蟲(충) Bug
분명 아름다운 우리말인데 들으면 싫은 어감이 있는 단어 중 하나가 ‘벌레’가 아닐까 싶다. 발음하기 부드럽고 다정한 음색으로 들리는 이 ‘벌레’라는 단어가 새삼스러워 각종의 사전을 찾아보니 실로 다양하게 정의되고 있다. 인터넷 시대의 대표적인 사전을 찾아보면,
먼저 나무 위키의 벌레 : [충/bug – 작은 무척추동물을 일컫는 말. ‘버러지’라고도 한다.]
다음으로 네이버 국어사전의 벌레: [1. 곤충을 비롯하여 기생충과 같은 하등 동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 2. ‘어떤 일에 열중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오픈사전의 ‘벌레’는 좀 의외다: 뭔가 못마땅한 사회적 관계 관점에서 ‘비굴하게 남들에게 굴종하는 자’로 정의해 버렸다. 이것은 네이버 사전의 벌레 2. 의 긍정적인 뜻과 150도 정도는 다른 의미가 된다.
생물학적 정의와는 영 거리가 멀지만, 사회적인 정의로서의 ‘벌레’는 긍정적 의미로도 부정적 의미로도 두루 쓰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의 명사가 이렇게 극과 극의 칭찬과 격려로 혹은 경멸과 욕설로 전혀 다른 사회적 의미를 갖게 된 중의적 단어가 있을까 싶다.
수석 애호가가 멋진 돌을 찾는 것처럼 세상의 아름답고 미묘한 ‘낱말 수집’이 일상의 취미라 서설이 길어졌다. 이제 생물학적 蟲(충)인 벌레를 떠올리자.
부부 모두가 원해서 일 저지르듯 귀촌하여 전원생활을 하면 일상의 즐거움도 함께 나누고 햇살아래 고생도 함께 할 만하여 적응도 순조롭다. 실제로 부부가 합심해서 탈도시를 이룬 분들은 전원에서 살다가 이런저런 사유로 다시 떠나더라도 사는 동안 불화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사정이 생기면 합심해서 떠나면 된다. 전원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반면에 도시에서 전원생활을 꿈꾸지만 망설이는 분들 중엔 부부가 의기투합하여 일을 저지르는 경우는 의외로 드물다. 이보다는 남편은 원하는데 아내가 반대한다든지, 아내는 원하는데 어려서 시골에서 농사에 치여본 어려웠을 때의 기억이 잊힐 리 없는 남편은 한사코 반대한다든지 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런데 전원생활을 좋아하든 원하지 않든 싫어하는 키워드는 단연 ‘벌레’인 것 같다.
도시의 아파트에도 바퀴벌레가 있건만 왜 그렇게 모두가 싫어하냐고? 바퀴벌레부터 싫으니 온갖 벌레가 다 싫은데 시골엔 그 징그러운 벌레가 너무나 많지 않냐고 한다.
맞다. 많다. 많아도 엄청 많다. 농사를 지으면 벌레와의 알력은 피할 수 없다. 전쟁이라고까지 표현하고 싶지는 않지만 꼭 영화 속 지구를 침범한 적대적 외계 생물 대하듯 적개심을 갖는다.
농사를 짓지 않더라도 흙이 있으면 수풀이 있고 반드시 벌레를 만난다. 육해공군에 땅굴 속 게릴라까지 다 있는 셈이다. 농사에 이로운 놈, 해로운 놈 할 것 없이 봄부터 가을까지는 어찌할 수 없는 벌레들의 세상이다. 땅강아지부터 달팽이 노린재 진딧물 여치 사마귀 온갖 나방들까지 다 셀 수가 없다. 집 밖에도 집안에도 이놈들은 스스럼이 없다.
개미도 많다. 큰 놈 작은놈, 깨알처럼 자잘한 놈까지 실로 다양한 개미떼가 영지 여기저기 그들만의 지하도시를 이루고 산다.
작물을 재배하지 않는 길가 잡초에 어쩌다 제초제는 뿌려도 텃밭에는 농약도, 토양 살충제도 사용하지 않다 보니 해가 지날수록 각종의 벌레가 더 기승을 부린다. 땅속에 지렁이도 많지만 여기저기 큰 개미, 작은 개미 할 것 없이 군집이 보인다. 땅 속에, 땅 위에 발 많이 달리고 민첩한 징그러운 놈들이 떼로 출몰하여 주인 노릇 한다. 유튜브에서 봉사하는 농사 전문가들의 조언대로 막걸리 트랩을 만들어 밭고랑 여기저기 놓았다. 유인 등 전기망 불빛으로 달려드는 날벌레를 태워 죽이고 벌레가 앉으면 떨어지지 않게 붙드는 접착시트를 설치했다. 초보답게 주워들은 대로 이것저것 다 실험 삼아해 본 것이다. 이렇게 오기를 섞어 애를 쓴 만큼은 잡히긴 하지만 잡힌 개체수는 영지 내의 벌레 군단의 세력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초보의 욕심에 군침을 잔뜩 묻혀 영지 내 이곳저곳에 자두, 살구, 애기사과에 체리까지 몇 그루씩 심었다. 꽃이 피고 풋 열매가 맺히는 설레는 풍경을 몇 년 동안 보았지만 열매를 입에 넣고 맛보는 기대는 결국 포기했다. 풋열매 상태에서 이미 벌레 차지가 되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열매는 못 먹어도 이웃 농원에 피해가 갈까 봐 날아다니는 해충 방제는 때 맞춰서 해야 한다.
미국선녀나방, 갈색매미충 같은 날개 달린 것들을 방제하는 약은 비싸기도 하다. 효과적인 방제를 하려면 벌레가 날개를 달기 전에 애벌레 상태에서 없애야 하는데 워낙 넓은 영지라 매번 몰살의 기회를 놓친다. 이월이면 기계유제와 유황 합제를 섞어서 나목에, 그리고 오월이면 20 리터 분무기통을 매고 두릅, 자두, 살구, 사과, 벚나무, 이팝, 산수유나무에 붙은 나방 애벌레를 무차별로 죽여보지만 집과 밭이 산과 연결되어 있고 과수원 옆이라 해충을 퇴치하기 더욱 어렵다. 일단 날개를 달면 약 뿌릴 때 민첩하게 산으로 도망갔다 이내 돌아온다.
나무 과일은 포기했지만 매일 먹어야 하는 채소와 화초 과일을 지키는데 전투력을 집중한다. 채소에 농약은 생각하지 않으니 주로 일전을 벌이는 진드기. 노린재. 28점 무당벌레. 하늘소, 달팽이는 눈에 띄는 대로 손으로 잡아낸다.
진딧물 정도는 목초액을 희석하여 뿌리고, 뚱딴지, 자리공 줄기를 베어다 삶은 물을 분무해서 나름 친 환경적으로 열심히 대처했다. 물론 이런 순한 처방으로는 턱도 없는 벌레들이 훨씬 더 많다. 벌레를 잡고 죽이면서 갖게 되는 생명 살생에 대한 일말의 망설임은 현인의 가르침으로 극복한 지 오래 건 만 벌레와의 투쟁은 끝없는 일상의 수고를 반복하게 한다.
그러다가 지쳐 농협 경제사업장의 농약 담당 직원과 진지하게 의논을 나눈다. 그래도 별 뾰족한 수 없는 초보 농부는 다시 온갖 벌레와 나눠먹으며 사는 것이 일상이라며 체념한 듯 빈손으로 돌아온다. 벌레는 여전히 숙제이고 생활 속의 화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