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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앙성 산문 11화

허물 (exuviae)

뱀의 허물 나의 허물

by 시준


마당이나 텃밭 고랑에서 처음 뱀과 마주치게 되면 두려움이 섞인 걱정이 앞서고 한동안 골치 아파하게 된다. 마주친 이가 뱀 잡는 땅꾼이 아니라면 누구나.

우선 내 땅에서 추방해야 할 으로 내 맘대로 정의한다. 나를 만나 똑같이 놀랐을 뱀은 나를 반드시 깨물어 내쫓아야 할 괴물로 여기지 않겠지만 뱀의 출현 자체를 험악한 선전포고로 간주하고 과잉 반응하는 것은 약해 빠진 인간의 피해망상 아니면 특권이라 믿는 오만함 일 것이다.


어쨌든 구불구불 민첩하게 쉬쉬쉭 잔디 마당을 가로질러 가는 뱀을 두 눈으로 봐 버렸다는 것이 중요하다.

구불구불한 몸매의 파동이 솔찬히 긴 놈이다. 소름이 살짝 끼치지만, 아내와 함께 전원생활을 원만하게 하려면 내가 본 뱀의 존재를 그대로 알려서는 안 된다. 시간이 지나면 내 눈에 띄었던 놈은 결국 아내 눈에도 띄게 되겠지만 내가 그대로 알려서 미리 공포를 조장할 필요는 없다. 다만 텃밭에 가실 때에도 꼭 장화 신고 다니실 것을 은근히 권하면서 장날에 나가 이쁜 꽃장화를 대령할 일이다.


소나기가 그치고 마당 가득히 햇살이 작열하던 어느 여름날, 잔디밭을 유유히 가로질러 구불구불 쑥부쟁이 덤불 속으로 사라지는 배암을 드디어 봐 버린 날, 놀란 아내는 탈 전원을 주장했다.

나는 속으로는 ‘결국 보시고야 말았구먼’ 했지만, 겉으로는 “그래? 뭐 뱀은 산골 어디에나 있으니까. 그래서 우리 집에 쥐가 없는 갑다.” 로 별일 아닌 듯 짐짓 태연하게 처신했다.


북극과 남극의 얼음 동토, 아이슬란드나 뉴질랜드 같은 섬을 제외하면 지구 표면 어디에나 있는 것이 뱀이라 하니 살기 좋은 나의 영지에 뱀이 없을 리가 없다. 내쫓아야 할 적에서 우호적 동거 생물로 신분 변경을 해주기로 맘먹었다. 그러려면 불법 체류 개체 딱지를 합법적 먹이 활동을 보장하는 체류 비자로 변경해 줘야겠다는 내심의 변화가 생긴다. 솔직히 뭐 추방할 현실적인 무력 수단이 없기도 하다.


이듬해 초봄. 마른 난초 잎 사이에 난초 잎과 함께 눌어붙은 폭이 3센티는 될 낡은 망사 호스 같은 뱀 허물을 발견했다.

그놈이 벌써 이렇게 커버렸나? 아니면 내가 미처 못 본 딴 놈이 또 있었나? 의심하며 이 뱀 허물을 아내가 보지 못하게 땅을 파고 일단 묻었다. 대담하게 영지의 심장부인 정원의 화초 속에서 허물을 벗다니. 정원의 주인이 누구인지 헷갈리게 했다.

나의 정원이 배암의 침실이 되었다면 지역 방어의 전투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벼라 별 방안이 다 있다.

뱀이 싫어하는 냄새를 풍기는 각종 약제, 뱀 잡는 온갖 도구… 그중에서 ‘고양이를 길러라’가 있다. 일단 현실적이다. 가끔씩 영지 순시를 하는 길고양이 두 마리에게 미소로 대하고 정기적으로 둘러보도록 나도 못 먹을 맛난 먹이를 마당과 텃밭 어귀에 놔 놓기로 했다.

이로써 영지에서 이뤄지는 파워 구조는 영주의 부인마님> 영주> 고양이> 뱀> 쥐와 두더지> 지렁이> 영주의 부인 마님 순으로 정착된 공포 순환 사슬로 완성되었다.

참고로 일본의 어느 심심한 연구자가 집중해서 연구한 결과로 길고양이의 하루 행동반경은 무려 4km나 된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다. 무려 12평방 km2의 영역을 활보하고 다닌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고양이들이 나의 코딱지 만한 0.002 km2의 변방 영지에 날마다 들러 주는 것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행차이니 잘 대접하지 않을 수 없다. 출처는 어느 날 우연히 조우한 인터넷 콘텐츠이다.

약삭빠른 물고기 미끼만 축내듯, 고양이가 뱀을 잡은 흔적은 마당 정원 어디를 봐도 아직 없다. 그래도 아내의 급식 호의가 의무가 되어 커플이 대가족이 되었으니 묘(猫) 판이된 마당에 뱀들이 지나다니기엔 꽤 불편하긴 할 것이다.


여름의 절정에서 벚나무 가지에 붙은 무수한 매미 허물을 발견한다. 매미의 측은한 일생에 대해서는 워낙 잘 알려져 있어 숫 매미의 처절하고 그악한 구애의 아우성이 한낮 영지의 허공을 채울 때면 제발 암컷들이 즉각적으로 호의를 베풀어 자동으로 욕구에 호응해서 수컷들이 아우성치는 기간을 단축해 줄 것을 기대했다.

낮 매미의 간절한 구애, 밤 개구리의 연애 합창에 영지의 여름은 무르익는다. 영지의 온갖 나무 열매들은 개구리와 매미가 힘들게 아우성쳐서 익어가는 것이다.


매미의 허물을 처음 봤을 때 불가사의 했다. 나무껍질에 붙은 매미 허물 앞에 바짝 눈을 대고 한참을 관찰하며 탄복했다. 어떻게 그렇게 가늘디 가는 매미 다리까지 갈색 허물의 엷은 껍데기를 부수지 않고 고스란히 빠져나올 수 있단 말인가? 마술적인 탈피 예술의 결과를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곤충들의 변태와 허물을 보면 땅 위에서 그들의 짧은 생이 참으로 드라마틱하다는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비슷한 듯하면서도 아주 다른 뜻을 갖는 우리말을 접하면 좀 묘 해지면서 지적 자극이 된다. 그중에 하나가 ‘허물’이다.

허물 1: 남에게 비웃음을 살 만한 거리

허물 2: 파충류, 곤충류 따위가 자라면서 벗는 껍질


살아보니 깨닫게 된다. 인간에겐 허물 1과 함께 뱀처럼 제때에 맞춰 벗어야 하는 성장의 허물 2도 있다는 것을.

사람 또한 무수한 허물 2를 때가 되면 벗는다. 이것은 바람직한 성장의 허물이다. 때가 되었을 때 허물을 벗지 못하면 성장하지 못한다. 고등학교, 대학교 등의 교육의 허물, 남자라면 병역의 허물, 직장에서의 계급과 이후의 사회적 위상의 허물. 에워싼 여러 겹의 허물을 벗으면서 모두들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되고 아버지가 되고 엄마가 되고 장인도 되었다가 시어머니가 된다. 그리고 결국은 예외 없이 자연의 이치로 사그라진다.


허물 2를 벗지 않고 성장한 것 같은 인간도 있기는 하다. 대체로 드라마틱하지 않다.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을 생에 ‘드라마틱’이 어울리기나 한 수식어일까?

가끔은 남에게 돋보이고 싶어 기괴하게 변태를 하는 인간도 있기는 하다. 제때 벗어야 할 허물 2 대신 무수한 허물 1만 여기저기 어디다 벗어놓은지 자신만 모르고 쉬쉬식 꿈틀거리며 세상을 휘젓기도 한다.


나의 허물 1과 2 그리고 투명하고 적나라한 배암의 허물 2. 내가 살아오면서 남에게 비웃음을 살 만한 허물1 거리를 이곳저곳에 얼마나 남겼는지는 나만 모르고 있을 것이다.

뱀이 커가면서 허물을 벗듯 나도 나의 성장의 허물 2를 해마다 남몰래 벗어 놓을 수 있었다면 좀 더 풍요로운 경험 속에 멋지게 늙어가는 내가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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