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성 산문
드르륵 드르륵 탁 탁
온실에 앉아 눈을 들면 바라보이는 은수원사시 나무 높은 곳에서 이제는 귀에 익숙해진 그 소리가 들려온다.
쭉 뻗어 올라간 나무 기둥 중간에 딱따구리 한 마리가 붙어있다.
작은 부리만으로 드르륵 기계음 같은 소리를 내며 열심히 구멍을 파내는 소리가 고요한 초가을 한낮의 정적을 허물고 있는지도 이미 한참이다.
아랫동네 이 의원께서 소싯적 산림녹화 사업에 동원될 때 심었다 하니 족히 오십여 년을 자라 아름드리로 늠름한 사시나무다. 영지의 경계 밖 비탈에 서서 대략 삼십 미터는 되게 높이 자라 달빛 어린 밤이면 은갈치가 솟구친 것처럼 은은하게 빛난다. 이 멋진 나무가 상할까 봐 며칠 전엔 다가가 돌멩이를 던져 쫓아도 보았지만 이내 다시 그 자리에 날아와 붙어 제 머리통이 아프지도 안은지 부리로 나무를 쪼는 것이다.
멍하게 듣다 보면 드르륵 탁 탁 소리가 리드미컬한 것이 마치 전동드릴과 목탁을 교대로 치는 소리처럼 울리는데, 조용한 산동네 골짜기의 정적과 공허감을 허물기도 하고 메워주기도 해서 이제 나의 귀에는 파란 하늘에 퍼지는 그저 하얀 소음이다.
드르륵 탁 탁 탁 쪼는 소리가 머릿속 어딘 가에 끼어 있던 잡념을 깨워 펼쳐 읽고 있는 글을 밀어내게 한다.
‘저 산에 딱따구리는 생나무에 구멍을 잘도 뚫는데,
우리 집 멍텅구리는 뚫린 구멍도 못 뚫는구나.’
들으면 미소 짓게 하는 것이, 정선아리랑과 함께 제법 알려진 만공 스님의 일화다.
스님께서 이 중의적 한탄을 게송(偈頌)으로 선언하시고, 만고불력지리 (萬古不易之理)의 핵심 법문이라 하셨다 한다.
머리에 떠 올리기만 해도 알만 하게 미소 짓게 만드는, 이 얼마나 자연의 원초적인 가르침을 담은 해학(諧謔)이자 절묘한 가르침인가!
푸르른 하늘을 만공이 날아와 ‘박 터지게 새로운 길을 뚫어 놓은 선각이 있는데 뚫린 길도 가지 못하는 멍텅구리는 누구냐’고 대놓고 꾸짖고 있다.
조용한 대낮에 딱따구리의 천공(穿孔) 수도를 한가한 멍텅구리가 넋 놓고 바라보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일지니, 누가 그대의 정진 행공(行功)을 방해하고 싶겠는가? 대신,
카메라를 들어 망원렌즈를 최대한 당겨 본다. 온실에 앉은 멍텅구리가 허공을 날아 수도 중인 딱따구리 만공 곁으로 다가간다. 빨간 머리 장식과 빨간꽁지덮깃으로 멋지게 치장한 오색딱따구리로 오셨다. 작년에 왔던 같은 분인지, 다른 만공인지 알 길이 없지만, 오불관언, 망원렌즈로 숨소리 들릴 만큼 가까이 다가가든 말든 이 가을의 딱따구리 만공은 나무줄기를 안정적인 행공 자세로 붙들고 득도에만 열중이다.
곁에서 숨죽이는 심약한 멍텅구리의 눈에는 머리통에 붙은 부리를 끊임없이 부딪히는 모습이 너무나 안쓰럽다. 꽁치 통조림 통 만한 직경으로 파 들어가는 저 정도의 구멍으로는 멋진 은빛 나무가 시들지는 않겠지 하며 이제 나무 걱정은 내려놓기로 한다. 대신 쉴 새 없이 나무를 쪼아 대는 저 만공의 머리통을 걱정하다 보니 렌즈를 통해 가까이 잡아당겨 바라보는 멍텅구리의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것이다.
사족: 드르륵 소리는 딱따구리가 나무속 벌레를 잡아먹기 위해 나무껍질에 구멍을 낼 때 초당 15~20회를 쪼며 내는 소리라고 한다. 딱따구리는 머리통이 특수하여 부리로 딱딱한 나무기둥을 쪼아대도 머리가 아프지 않을 거라는 인터넷 해설을 찾아보니 새삼 자연의 오묘한 지식 하나가 내 머리를 아프지 않게 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