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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앙성 산문 02화

고기를 먹는 철학

앙성 산문

by 시준

대문 펜스 옆 논과 붙은 사잇길을 덮고 어느덧 허리 높이로 자란 무성한 잡초 무더기를 상대로 한참 낫질하며 씨름하는 중에 휴대폰 진동음이 들린다. 김이장이 마을회관으로 지금 빨리 오라고 한다. 뭔 일이냐고 물어볼 새도 없이 ‘존 일 잉게 빨리 오라’고 성화다.


낫을 잡초 더미에 찔러놓고 부랴부랴 회관에 가보니 고라니 고기 샤부샤부로 점심 함께 먹자는 초대였다.

고라니 고기? 평소에 뒷산 중턱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만 들어도 미워하는 마음이 앞서는 고라니였다.

고라니는 재수 없어 사냥꾼도 외면한다는데… 내키지는 않지만 호기심이 동하였다.

가축 외에 멧돼지, 사슴고기, 타조고기를 먹어봤고,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우연히 타조, 낙타고기, 도마뱀 고기도 먹어 봤지만, 고라니는 태어나고 처음이었다.

넓은 대청에 육칠십 대 마을 형님들 여럿이 모여 앉아 가스레인지 위에 커다란 냄비를 올려놓고 육수를 끓이는 중이었다.


“웬 고라니 고기 다요?”

“흐흐 노인회장께서 오늘 아침에 때려 잡았대여”

“크기는 엄청 큰 놈이 션찮게 팔십 노인한테 잽혀부렀구만~. 고기만 거의 스무 근이 나왔어”

누군가 웃으며 알려준다.


나는 감탄했다. 팔십이 된 노인이 어떻게 커다란 개보다 덩치가 크고 날쌘 고라니를 때려잡았는지 궁금했다.


회장님의 무용담이 신이 났다.

“아 이놈이 우리 밭을 다 망쳐 놨어~ 어떤 놈이 올무를 시원찮게 놔 가지고 고라니 뒷다리가 올무에 물린 채로 길길이 이 밭 저 밭 휘젓고 댕기니 올무 철사에 밭이 엉망진창으로 다 망쳤지. 그걸 보니 화가 나서 몽둥이 들고 뛰어가서 냅다 한방에 후두러 팼다니까”


때려잡아 뻗은 놈을 젊은 노인들 몇이 들고 와서 이놈을 어찌할까 의논한바, 기왕에 중복날도 다가오니 여름 보신 잔치나 하자고 만장일치 결론을 봐서 내친김에 당장 오늘 점심으로 절반은 두루치기, 절반은 샤부샤부로 일사천리 메뉴 결정까지 했다고 한다.

마을 회관 부엌에선 노인들의 주인마님이자 자의 반 타의 반 호출된 부녀 회원 몇 분이서 두루치기 양념을 준비하고, 크게 썰은 고기를 맞춤하게 작고 얇게 써느라 북적였다. 회관의 넓은 메인 홀인 대청 한가운데에 펴 놓은 앉은뱅이 테이블엔 한여름의 청량한 잔치 분위기가 물씬했다.


싱싱하게 윤기 흐르는 검붉은 색 날고기가 접시에 수북이 담겨 놓였다. 온갖 야채가 냄비 속에서 끓고 있고, 얇게 저민 고기들이 끓는 물속에서 데쳐지며 익는다. 모두들 젓가락을 들어 한 점씩 특별제조한 쌈장에 찍어 맛보는데 나는 좀 주저주저했다.


“어허 류전무는 고라니 고기는 안드시는겨?“

오늘 고기의 주인인 노인회장님의 구수하고 찰 진 음성이 재촉한다.

참고로, 우리 마을에서는 노인회장님 직권으로 바깥에서 이사 온 분들께 마을 전입을 축하하는 의미로 사회에서의 신분 호칭에 더해 일계급씩 특별히 진급시켜 주시는데 회장의 축하로 호칭은 당장 통일된다. 가령 예비역 중령 전입자는 대령, 대령은 장군이 되는 거다. 본인의 사양과 겸양의 교양은 통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불리워지게 되는데, 일이 년 계속 듣다 보면 스스로도 진급이 된다. (이 얼마나 시골생활 격려하는, 돈 들일 일 없는 참신한 축하법이냐! 도시에서 낯선 이를 부르는 ‘사장님’으로의 고속 특진 인플레 호칭보다는 참신하다.)


“아이구 회장님, 처음 먹어보는 거라 천천히 먹을랍니다.”

“에이~ 배운 사람이 솔선수범하셔야지~ 아무래도 박애정신(博愛精神)이 부족한 것 같혀~”

“아이고~ 고라니 고기 먹는데 웬 박애 정신입니까?”

“허허~ 뭘 모르시는구만. 소, 돼지, 맴생이는 안 먹어줘도 괜찮아~ 근디 야생에서 놀던 짐승은 인간이 먹어줘야 혀” 듣던 중 희한한 논리였다.


“왜 그런 답니까?”

“고놈들은 산속에 숨어서 내내 산 아래 인간들을 부러워하거든. 죽어서라도 사람의 일부가 되면 고놈들한텐 위로가 되는 거여. 곡식이든 짐승이든 사람 똥이 돼서 땅으로 돌아가는 것들은 영광일 것이여”


노인회장님의 능글맞고 유머 넘치는 철학이 심오하고 정겹다.

모두가 나의 박애주의 역량을 감시하는 분위기에서 펄펄 끓는 냄비에서 한점 집어 입에 넣었다. 육수에 익혀진 얇은 고라니 고기가 생각보다 질기지만 부추, 쌈장과 함께 한점 더하니 제법 먹을 만하다. 제육볶음이나 소고기 스테이크를 씹는 맛 만은 못하지만 여름날 우연한 보신요리라 생각하니 특식이다. 고기를 고추장에 버무려 커다란 프라이팬에 볶은 두루치기가 곁들여졌다.


주거니 받거니 소주잔 가득 고라니를 위한 제주가 돌고 도는 흥겨운 여름 한낮이었다. 얼큰 해진 노인 회장님이 한잔을 권하며 축원하신다.

“이놈은 특별히 영광인 줄 알아야 혀~ 고라니 지가 언제 전무되고 박사 되고 회장 돼 보겠어? 하하하”


참 니코스*도 감탄할 신박한 인간중심 생명 철학의 정수(精髓)를 이 여름날 복상골에서 접하게 될 줄이야. 그런데 아직 박애주의 역량이 한참 모자라는 나는 왠지 내 몸의 일부가 고라니가 되는 기분으로 온몸이 근질근질했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조르바를 읽는 기분? 먹은 고기가 영혼이 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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