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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앙성 산문 25화

고양이

어느 날 무심히 손님으로 맞게 된

by 시준

나는 개나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애완동물도, 어떤 가축도 기르고 싶지 않다. 짐승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더 직설적이고 솔직한 표현이지만 그렇다고 싫어하느냐고 물으면 그것도 아니다. 동물을 학대하는 것에는 분노할 정도로 싫다. 그러니 동물에 대해서는 그냥 무심하다고 해두자.

어렸을 적 오랫동안 기르던 개도 있었고 집에 드나들던 고양이도 함께 했었다. 닭을 길러 계란을 얻고 칠면조도 사육했다. 그런데도 시골 넓은 영지에서 기르는 동물은 없다. 뒷산에 사는 고라니나 떠돌이 개나 고양이가 영지의 경계를 넘어오는 것을 방해할 수단도 없지만 환영하지도 않는다.


아이들이 아파트에서 강아지를 키우자고 조를 때마다 나는 한사코 거부했다.

아이들은 강아지의 귀여운 모습만 본다. 아직 한 생명체를 돌보는데 필요한 의무와 책임에 대해서는 생각할 나이가 아니었다. 아들 녀석이 강아지를 데려오겠다고 했을 때 ‘만약 강아지가 오면 나는 집을 나가겠다’고 할 정도로 강하게 반대했다. 대개의 가정에서 아빠들은 처음엔 그렇게 반대하다가도 막상 데려오면 제일 좋아하게 된다며 잊을만하면 한 번씩 머리가 굵어진 애들이 조르면서 놀렸지만 나는 그렇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길러봐서 안다’고 하면 글을 읽는 애견인중에는 불쾌해하실 분이 계실 것 같다. 그래도 어쩌랴, 길러봐서 기르고 싶지 않은 걸.


아파트에서 개를 기르는 것은 공동주택 관리 규칙 위반이고 사람과 개 모두에게 불편한 것이라고 설득했지만 마당 넓은 시골집에서의 반대 명분으로는 부족했다.

앙성 복상골로 거처를 옮기자 아내까지 합세해서 강아지 노래를 불렀다. 나는 먹이를 줘야 하는 애완동물을 기르는 것은 며칠씩 집을 비울 때가 많은 우리 생활에 제약이 될 것이고 함께 지내다 보면 결국 생명 있는 것에는 매이게 될 것이니 아예 생각을 말자며 말렸다.

나는 이제 아무것에도 매이고 싶지 않다. 그리고 강아지의 재롱도 귀찮아할 만큼 충분히 게으르다.


동네 집집마다 묶여서 심심해하는 개들을 본다. 고샅길에 인적도 드물지만 걸어 다니는 사람은 더 드물다. 종일 심심한 개들은 멀리서 사람 발자국 기척만 나도 무작정 짖기 시작한다. 이빨을 드러내고 컹컹 짖는 것이 반갑다는 것인지 묶여있는 제 몸을 제발 좀 풀어달라는 것인지 구분이 안된다. 내 집에 또 한 마리 심심해할 개를 묶어두고 싶지 않다는 것도 기르고 싶지 않은 마음 한구석을 차지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새끼 강아지에서 성견이 되기까지 생각보다 빨리 자라고 빨리 늙어 병들어가는 반려견을 다시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앞선다. 이것 역시 길러봐서 안 것이다.

아직 외롭지도, 우울하지도 않고 나름대로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지만 나도 늙어가는 중에 나를 추월해서 더 빨리 늙어가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개를 기르자는 가족 내부의 청원은 확고하게 방어와 기각을 해오는데, 시골 동네에는 어디에나 고양이가 많다. 거처를 옮기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기르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이 고양이 두 마리가 어슬렁거리다 우리 집에도 들렸다.

처음엔 웬 길고양이가 왔나 하는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쥐가 한 마리 현관 앞에 죽어 널브러져 있었다. 무언가에 물린 자국이 있었고 고양이가 근처에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새로 지은 집이니 없으리라 확신했던 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 자체로 쇼킹했다. 고양이는 자신의 유용한 가치를 말없이 시위하느라 잡은 들쥐를 현관 앞 지나칠 수 없는 길목에 물어다 놓은 것이다. 아내는 기겁했지만 고양이는 충분히 시위 효과를 달성했다. 집 주변 아니면 헛간에 쥐들이 살고 있다는 증명을 해 보인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고양이 두 마리가 마당까지 오고 가고 하는 것을 별생각 없이 보고만 있었다. 며칠씩 집을 비우고 돌아오면 안 보이다가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나타났다.


고양이 한 마리가 배가 불러 있었다. 새끼를 배고 힘들어하는 고양이를 지나치지 못했다. 아들이 운동한다고 잔뜩 사다 놓고 먹다 남긴 닭가슴살 통조림을 아내가 서빙하기 시작했다. 아들 것이라 나도 못 먹던 것을 고양이에게 선뜻 내주었다.

헛간에 몸 무거운 고양이가 터를 잡았다. 겨울이면 작약을 덮어주던 두꺼운 부직포를 개어 쌓아 놓은 선반을 아지트 삼은 것이다.


화창하던 어느 날 어미를 따라 나온 주먹만 한 새끼 고양이 네 마리가 햇살 환한 잔디밭에서 놀고 있는 모습을 아내가 보고 환호했다. 잔디밭에서 상견례를 한 셈이었는데, 무심한 내 눈에도 갓 태어난 고양이 새끼들이 깡충거리며 노는 모습이 귀엽기 짝이 없었다. 두 마리는 몸전체 털이 어미를 닮고 두 마리는 가슴에 하얀 털을 둘렀다.

장 보러 가면 마님은 카트에 고양이 사료를 챙기기 시작했다. 가격도 안 보는 것 같다. 날마다 다정하게 고양이를 부르며 먹이를 주는 것을 보고 나는 소심하게 두 가지 태클을 걸었다.

1. ‘고양이가 야성을 잃지 않게 조금씩만 줘요. 쥐 잡고 뱀도 잡아먹게 해야지.’

2. ‘집안으로는 들이지 맙시다.’


고양이 새끼들은 겁도 많지만 장난기도 많고 잠시도 가만있지 않는다. 앞마당 잔디 위에서 서로 뒹굴고 있나 싶은데 어느새 집뒤꼍 벚나무 가지에 높이 올라가 있다.

새끼들이 부쩍부쩍 큰다. 집을 비우고 며칠 만에 돌아오면 고양이들도 집을 비우고 없다. 밥 챙겨주는 마님이 없으니 당연하다 싶은데 어떻게 우리가 왔는지 알고 금방 나타난다.

아마 승용차가 대문 안에 서 있으면 우리가 온 줄 아는 것 같다. 마을 분들이 차를 보고 우리들이 집에 있는지 없는지 아는 것처럼. 그런데 어느 날부터 어미를 따라다니는 새끼가 두 마리로 줄었다. 사고를 당했을까 아니면 독립을 했나 궁금해했지만 이내 잊었다. 몇 달 안 되어 새끼도 거의 어미만 하게 자랐다.


‘새끼가 새끼를 뱄나 봐’

‘설마? 벌써?’


새끼가 어미가 되어 또 새끼를 데리고 다닌다. 비슷비슷해서 나는 이제 누가 어미였고 새끼였고 손자뻘인지 구분할 수 없다. 고양이는 보통 생후 5~9개월 정도가 되면 첫 발정을 겪으며 임신이 가능해지고 두 달 정도 지나면 새끼를 낳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고양이에게 너무 편한 환경이 되면 영지 전체가 고양이판이 될 것 같아 걱정스러웠다.

6개월마다 새끼를 4마리씩 낳고 그중 반이 암컷이라면, 대략 계산을 해봐도 암컷 한 마리로 시작해서 2년이면 거의 30마리로 불어나고 그 이후로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게 되니 온 동네가 고양이 세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일하느라 한 동안 머물렀던 리비아, 모로코에서 도시 골목, 모스크나 시장에 고양이가 떼로 몰려다니는 것을 보고 운전해 주는 현지 직원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도시에 웬 고양이가 이렇게 많은가? 시에서 개체 수를 관리해야 하지 않나?’했더니 눈을 크게 뜨고 내게 부디 말 조심하시라고 했다. 이슬람국가에서 고양이를 해치거나 학대하는 행위는 크게 비난받을 짓인데, 제거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개체 숫자 관리를 말하면 맞을 짓이라는 것이다.

먼저 꺼내는 얘기가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위대한 무함마드는 고양이를 매우 아꼈다’고 한다. 무함마드께서 기도를 드리려다 자신의 옷자락 위에서 자고 있는 고양이를 깨우지 않으려고 옷 일부를 잘라냈다는 일화가 전해지니 무슬림이면 누군들 고양이를 존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반문했다.

고양이가 스스로를 깨끗하게 유지하는 습관이 있고 좁은 골목길이 많은 이슬람 도시에서 고양이가 쥐를 잡아주고 위생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고양이를 존중하는 문화가 생겼다는 것이다. 따라서 거리의 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주거나 보호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고 했다.

이런 문화적, 종교적 배경 때문에 이슬람 국가에서는 유독 길고양이가 많고, 사람들도 너그러운 태도를 보인다.

골목마다 도도한 폼으로 어슬렁거리거나 길을 막고 있는 고양이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런 문화적 환경에서 무수한 고양이를 보며 지냈지만 나는 도통 친근해질 마음이 없었다. 오히려 떼로 몰려있는 고양이 사이를 지날 때면 긴장되었다.


나의 영지가 고양이로 가득 차면 어찌해야 하나?

그런데 기우였다. 몇 년 동안 무수한 고양이들이 나고 자라고 거쳐갔지만 새끼들이 좀 크면 어디론가 사라지고 우리 집에 와서 밥을 내놓으라고 마님을 보채는 고양이는 항상 세 마리 정도다. 고양이들은 나를 본체만체해 줘서 나는 외려 고마울 지경이다. 우리의 경제적 능력을 고려해서 지들끼리 식객 수를 조정할 리는 없지만 뭔가 개체수를 조절하는 알고리즘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슬람국가와 달리 우리나라에서 길고양이의 운명은 편하지는 않을 것이고 산과 닿아 있는 산골 마을에선 인간이 생각하지 못하는 생존 위험 요소가 많을 것이라 짐작만 한다.


뚝딱 만든 나무 벤치에 노란색을 칠해 온실 앞에 놓아두었다. 하루일을 마치면 벤치에 앉아 마주 보이는 산봉우리들과 등성이의 골프장을 바라보며 멍 때리기도 하고 작업하던 도구를 놓아두기도 하는 용도인데, 어미 고양이가 새끼들을 선보인 날부터 그 벤치를 뺏겼다. 고양이 새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스스로 양도했다는 것이 맞겠다. 마님의 눈에도 노란 벤치 위에 챠콜색 고양이들이 줄줄이 앉아있는 것이 자세 구부정한 사내가 앉아있는 것보다는 보기가 좋았을 것이다.

그 벤치 아래에 공깃밥용 사기그릇 3개가 나란히 놓여있는데, 마님은 매번 고양이는 참 신기한 녀석들이라고 감탄한다. 밥그릇 3개에 고양이 사료를 반쯤 담아 뚜껑을 덮고 그 위에 갈색으로 변색된 모과를 하나씩 얹어 놓으면 먼저 온 놈부터 뚜껑 위의 모과를 치우고 뚜껑을 열어 한 그릇씩만 먹고 사라진다. 옆그릇은 건드리지 않고 딱 제 몫만 먹고 간다. 그걸 보면 나름의 규칙 지키기와 자제력이 사람보다 낫다며 흥미로운 게임을 하듯 날마다 반복한다.


마당에 항상 고양이들이 있게 되니 지들끼리 놀다가도 가끔씩 흩어져서 일도 좀 해주기를 은근히 기대하게 된다. 쥐도 잡고 뱀도 잡고 두더지도 잡아주는 고양이다운 일을 해주면 든든할 것 같다.

쥐들은 고양이 떼의 등쌀에 몽땅 도망갔는지 보이지 않는데, 뱀은 가끔 보인다. 그런데 뱀을 잡아놓은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밭고랑에서 두더지가 한 마리 상처도 없이 죽어 있는 것을 보기는 했는데 고양이가 잡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두더지는 고양이가 먹기엔 지방이 많고 맛이 없어, 잡아도 그냥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 죽은 두더지는 고양이에게 잡혀서 밤새 장난감이 되어 지쳐 죽었나? 궁금하긴 하다. 마님이 장 보며 나의 간식거리는 무시하면서도

대용량 고양이 사료를 카트에 싣는 것을 도와주지만 나는 올해도 고양이들이 일을 하는지 지켜볼 것이다.

3월 초는 아직 춥다. 우리 집은 양철 지붕이다. 고양이들이 햇살아래 적당히 뜨뜻해진 지붕에서 놀기 좋은 때다. 며칠 나갔다 돌아오면 지붕 위에 모여 있다가 우당탕 도망간다. 얼굴 익힌 세월이 쌓여도 아직 반기며 다가오는 녀석은 없다. 내가 데면데면 대하기도 하지만 사람이 나타나면 일단 도망가고 본다.

문학 작품 속의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는 보통 ‘어려운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포기하지 않고 버티는 것’을 의미하는데, 겨울날 ‘따스한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는 ‘마음 따뜻한 상황을 방해 없이 즐기는 것’으로 내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행복의 다른 표현인데 그렇다면 행복한 고양이들의 시간이 나의 출현으로 번번이 종료되는 셈이지만 나는 결코 고양이들 더러 지붕에서 냉큼 내려오라는 어떤 위협 행동도 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나를 보고도 뜨뜻한 양철지붕 위에서 지들끼리 놀고 있을 날이 올 것 같다.


반려동물인양 길고양이인양 손님인양 대강 이런 상태로 우리들의 관계가 무심히 이어지기를 소망한다. 나는 개도 고양이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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