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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곶 Apr 27. 2020

우리는 서로의 방지턱이 돼 주어야 한다

오늘날 연대가 필요한 이유


어릴 적 난 엄마와 자주 입씨름을 벌였다. 다툼의 원인은 엄마의 오지랖이었다. 특히 엄마는 요즘 세상에서 보기드문 동네 반장님처럼 행동했다. 동네 입구에 집에서 잘 쓰던 벤치를 가져다 두거나 아파트 한편에 방치된 쓰레기를 손수 치우는 식이었다. 하지만 나는 엄마와 달랐다. 우리 아파트에 사는 100여 가구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를 정도로 무심했다. 그리고 나는 서로에게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그런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매번 궂은 일을 나서서 하는 엄마에게 난 ‘누가 알아주겠냐’며 볼멘소리를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엄마는 “다 너와 나를 위한 거야"라고 말할 뿐이었다. 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너와 나를 위한 거야


어느 날 내가 집 앞에서 차에 치일 뻔한 적이 있었다. 엄연히 주거지역이었지만, 도로와 맞닿아 있는 갈림길 앞에서 차들은 속도를 멈추지 않았다. 나는 앞으로 조심하면 된다고 말했지만, 엄마는 크게 놀란 눈치였다. 다음날 엄마는 아파트 앞 도로에 과속방지턱을 만들어달라고 구청에 민원을 넣었다. 하지만 구청 공무원들의 행정 처리는 생각처럼 쉽게 이뤄지는 법이 없었다. 엄마는 수차례 구청 게시판과 이메일, 전화 등 갖가지 방식으로 민원을 넣었지만 방지턱은 감감무소식이었다. 결국 엄마가 직접 담당 공무원과 대면한 후에야 이듬해 방지턱이 설치됐다.

그런데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것 같았던 엄마의 행동들은 아파트를 조금씩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질주하는 차들이 눈에 띄게 줄어든 아파트 입구에서 위층 집 여자아이는 줄넘기와 공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아파트에서 볼 수 없었던 낯선 풍경이었다. 엄마가 가져다 둔 벤치에는 처음 보는 주민들이 차츰 나타났다. 누군가 가져다 뒀는지 벤치 개수도 하나둘 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은 쉼터에는 처음 보는 주민들이 모여 일상을 나눴다. 언제부턴가 엄마가 아닌 또 다른 누군가의 손길이 닿은 흔적들이 눈에 띄기도 했다. 엘리베이터엔  '필요한 분 쓰세요'라는 쪽지와 함께 손 소독제가 비치돼 있었고, 떨어진 벽돌과 쓰러진 화단은 순식간에 말끔히 정리돼 있었다.

그렇게 어느새 우리 아파트는 비교적 따뜻하고 안전한 공간이 돼 있었다. 우리는 모두 늘 깨끗한 복도를 거닐 수 있었다. 오며 가며 얼굴을 익힌 주민들은 엘리베이터에서 가벼운 미소를 지었고, 아래층 할아버지를 비롯한 다른 노인들은 매일같이 작은 쉼터에 앉아 서로의 안부를 확인했다. 서로가 서로의 얼굴도 알지 못하던 시절엔 느낄 수 없었던 든든함이었다. 그제야 난 엄마가 왜 그토록 방지턱을 위해 애를 썼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모두를 위한 공간을 가꾸는 것이 곧 나와 엄마를 지키는 방법이었다. 각각의 주민들이 모여 든든한 울타리를 이루고, 애정이라는 양분을 주고 받으며 우리 아파트에 건강한 피를 돌게 한 것이다.



방지턱과 쉼터가 있었더라면



달리는 차에 치여 어린아이가 죽고, 가족도 친구도 없는 노인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는 수많은 사건 사고들은 결코 나와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날 그곳에 누군가 애써서 만들어 놓은 방지턱과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쉼터가 있었다면, 그런 가슴 아픈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결국 나와 공동체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세포들이 살아 숨쉴 때, 우리 사회는 조금씩 더 안전하고 평화로워지는 게 아닐까. 그렇게 누군가가 아프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방지턱들은 결국 내 자신을 지켜주는 울타리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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