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 어느 주말이었다. 지금은 베를린에서 바쁘게 생활하고 있는 딸내미가 다니러 왔을 때의 일이다. 집에 있을 때는 늘 편하고 보드라운 곰돌이 잠옷 바지 차림으로 뭉개는 딸내미가 청바지에 티셔츠 꺼내 입고 카디건 차림으로 내려왔다. 어디를 가는 게지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시내를 간다고 했다.
그동안 엄마 아빠의 운전기사 해 주느라 친구들 만날 새도 별로 없었는데 시내에서 동네 친구들을 만나나 싶어 물었다."라우라? 토니? 아님 마리나?
그랬더니 딸내미는 웃으며 "아니 혼자 잠깐 뭐 찾을 게 있어서"라고 했다.
딸내미 혼자 시내에 간다는 말에 나는 마시던 커피잔을 얼른 내려놓고 "엄마도 갈까?" 했다.
딸내미가 운전해서 시내로 가는 동안 나는 간간이 운전하는 딸아이의 옆얼굴을 멍하니 보았다.
어느 초겨울 그 당시 한국에서 대박이 났던 가을동화라는 드라마를 기숙사에서 인터넷으로 다시 보기하고 있던 때였다. 드라마 한 편 보는데 끊겼다 다시 이어졌다 버퍼링만 수백 번 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게라도 한국 드라마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차고 넘치게 감사한 일이었다.
인터넷 상태가 그지 겨 이였음에도 몰입해서 보았던 드라마의 마지막이 너무 슬퍼서 코가 빨개지도록 울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우리에게는 송혜교 저리 가짜로 예쁜 딸내미가 태어났다.(저 혼자 알고 있는 혜교씨 쏘리요!)
딸내미는 아들들에 비해 유난히 동그랗고 작게 태어났다. 그 작고 작았던 아이가 이제는 엄마보다 키도 훨씬 크고 자동차 운전을 하고 있다니 참 세월은 이다지도 빠르게 흐르는구나 싶다.
내가 옛날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어느새 차는 시내에 도착했다. 주말 아침이라 다니는 차도 많지 않고 신호 대기도 몇 번 없어서 금세였다.
딸내미가 차를 세운 곳은 내가 아주 익숙한 골목이었다.
이 골목에서 한 블록 뒤로 가면 내가 한국요리 강습을 해 왔던 문화센터가 나온다.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모든 요리강습이 올스톱되어 있지만 언젠가 다시 강습을 할 수 있는 날이 오면 기쁜 마음으로 달려갈 곳이다.
옛날옛적에 재래시장입구
2차 대전후 새로 지은 지금의 재래시장 입구로 가는길
주차 요금 표를 차에 가져다 두고 우리가 간 곳은 작은 사진관이었다.
오며 가며 보기는 했지만 들어가 보기는 처음이다. 딸내미는 이곳에 필름을 맡겨 두었다고 했다.
아 기억난다 필름 카메라. 작년에 울 딸내미가 만으로 스무 살이 되었다.
스무 살은 독일에서도 스페셜 한 나이 다.
큰아들이 그런 스무 살을 맞이한 동생을 위해 "너의 스무 살을 특별하게 담아봐" 라며 필름 카메라를 선물했다.
짜아식이 여자 친구가 생기고 나서는 어찌나 날리는 멘트들 마다 로맨틱 하신지....
딸내미는 오빠에게 선물로 받은 필름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스무 살 내내 특별한 순간들을 담았다 그리고 그 필름이 현상이 되어 나오는 날이다.
딸아이가 현상된 사진 봉투를 받아 들자 나는 선물 포장 뜯기 전에 두근 거리는 마음이 되어 이 사진들을 그냥 길에서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딘가 카페에 라도 가서 아껴둔 초콜릿을 까먹듯 그렇게 함께 한 장 한 장 사진을 보고 싶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주말 그렇다면 요 근처 마크트 할레가 문을 여는 날이다.
마크트 할레는 농가 소상인들이 자체적으로 상가를 이루는 독일의 재래시장이다. 안에는 이탈리아 카페가 있고 지금이라면 노천카페도 문을 열었을 것이다.
그렇게 따끈한 사진을 들고 우리는 독일의 재래시장 마크트 할레로 갔다.
우리는 카푸치노와 카카오 한잔을 들고 건너편 시내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노천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필름으로 현상된 사진은 정말 오랜만이다. 예전에 아이들 어렸을 적에는 모든 사진을 저런 필름 뭉치를 카메라에 걸어 놓고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을 현상하려면 며칠이 걸렸지만 그 기다리던 순간마저 즐거웠다.
어떻게 사진들이 나오려나 궁금하기도 하고 설레 기도 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으로 그 자리에서 찍어 사진 보정까지 마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요즘
이렇게 아날로그 시대의 기다림의 미학을 만나 보기란 쉽지 않다.
사진 안에는 어느 가을날 가족들의 산책 모습도 담겨 있고 친구들과의 시간들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 장 한 장 사진을 들여다보면 아, 이때다! 그때 이런 표정이었네, 그날이었구나 하며 그 순간 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
중간중간 이가 빠진 듯 사진으로 현상이 되어 나오지 못한 필름의 빈자리들이 하얗게 남기기도 한다.
그럴 땐 갈색의 필름을 들어 햇빛에 비추어 보면 사진으로 나오지는 못했지만
어떤 장면 들이었는지 찍혀 있는 것을 들여다볼 수가 있다.
마치 다락방에 잊고 두었던 아이의 보물 상자를 엿보듯 설레며...
우리는 현미밥을 꼭꼭 씹어 먹듯 한 장 한 장의 사진들을 보고 또 보았다.
요거이 말랑한 단맛이 제대로인 미라벨른 이에요
아날로그 감성 물씬 품은 사진 감상을 끝낸 우리는 마크트 할레 안으로 들어갔다.
이 재래시장은 문화센터와 가까워서 한국요리 강습이 있는 날이면 신선한 식재료를 구입하기 위해 자주 오던 곳이다.
이 건물은 원래 2차 대전 때 폭격을 맞아 다 부숴진 것을 다시 예전과 비슷하게 재 건축한 것인데 옛날 옛적 그림을 보면 정말 비슷하다.
독일은 뭐든 새롭게 고치는 것보다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시키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때때로 독일의 느리고 답답한 여러 가지가 어려운 점을 야기하기도 하지만 나는 이런 변함없는 모습의 독일을 좋아한다.
재래시장 2층에는 각자의 농장에서 키운 채소와 과일을 가지고 나온 가게, 그리고 그 과일들을 갈아서 과일주스를 파는 곳, 그 과일들로 직접 담은 식초, 꿀을 파는 가게, 꿀 와인가게, 유기농 빵가게, 직접 만든 유기농 초와 나무로 깎은 아로마 세러피 용품들을 파는 가게, 비건 쿠키 가게, 그리고 이탈리아 레스토랑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은 농가를 직접 운영하고 있는 가게들이 많다.
안네 아주머니 네 채소가게에서 달콤한 미라벨른을 넉넉히 담았다.
인심 좋은 아주머니는 오랜만에 왔다고 우리네처럼 덤도 얹어 주신다.
꼭 대추만 해서는 말랑하고 달콤한 미라 벼른 은 딱 요맘때만 잠깐 장에 나오므로 이때가 아니면 못 먹는다.
저녁엔 포근하게 삶아 껍질 솔솔 까서는 프라이팬에 버터 조금 넣고 소금 살짝 뿌려 구워낼 감자도 한 푸대 들었다.
독일은 감자도 종류가 무지 많은데 안네 아주머니에서 재배한 에나벨레 라는 품종의 감자는 강원도 휴게소 감자 비슷한 맛을 낼 수 있어 그 맛이 아주 일품이다.
풍성해진 장바구니에 미소가 저절로 지어진다.
체리 등의 과일로 만든 과일 식초,향초,아로마 세라피용 나무그릇
코코넛 등을 사용한 비건 쿠키와 유당 불내성 글루텐 알러지 있는 분들도 드실수 있는 우유성분과 글루텐을 뺀 빵과 쿠키
신선한 허브 들과 과일들을 파는 과일가게,유기농 곡식을 사용한 곡식빵이 많은 유기농 빵가게
1층으로 내려가면 정육점들이 줄지어 있다.
사람들은 각기 자기들이 좋아하는 정육점들이 달리 있다.
나는 쿠어트 아저씨네서 도톰한 살이 붙어 있는 갈빗대를 담고 닭 농장을 하는 자매들이 함께 나와 일 하고 있어 은방울 자매네 라 부르는 곳에서 닭 강정용 닭봉을 담는다.
그리고 이 동네의 자랑거리 알레뷔어스트를 동그란 모양으로 산다.
알레뷔어스트는 돼지고기에 소금,후추 등 여러가지 자연향신료를 넣고 종류에 따라 1-2개월 또는 3개월,6개월을 훈재 하거나 널어 말린 육포다.
긴것,짧은것,얇은것,두꺼운것,둥근것 모양도 가지가지 집집마다 맛과 식감도 다양하다.
이곳은 서로 흰머리만 조금씩 더 늘었을 뿐 사람도 건물도 언제나 변함없는 모습 그대로 다.
코로나 전에 찍은 사진을 보아도 요새 찍은 사진을 보아도 달라진 것이라고는 손님 들의 숫자가 조금 더 적어졌고 마스크를 써야 하고 사람들끼리 부대낄 것을 염려해서 복도에 세워 두웠던 것을 치웠다는 것뿐이다.
변화가 많지 않으니 그 장소에 가면 느껴지는 느낌은 늘 그대로여서 좋다.
서로 흰머리만 조금씩 더 늘었을 뿐 이곳은 사람도 건물도 변함없는 모습 그대로 다.
딸내미와 함께해 장 바구니도 마음도 더 풍요로워진 주말이였다.
며칠 전 어느 독자님이 달아 주셨던 댓글 속에서 독자님은 오랜만에 만난 가족과 원두커피를 내려 두고 고구마, 감을 곁들여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었다고 했다.
원래 아는맛과 느낌은 긴말이 필요 없다.
그 댓글을 읽으며 바로 어린 시절 온 가족이 따끈한 방바닥에 빨간 담요를 덮고 둘러 앉아 입가에 까만 자욱 내가며 군고구마를 먹고 얇은 껍질을 까면 새콤 달콤한 맛이 감돌던 귤을 윙크를 해가며 까먹던 그때 그시절이 떠올랐다.
내게 그런 푸근함을 안겨 주는 곳 중에 한 곳이 독일의 재래시장이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독자님들도 아날로그 갬성 담은 푸근한 주말을 보내시기를...
2층에서 내려다 본 요즘의 재래시장 1층 전경
2015년 4월 코로나가 없던 시절의 재래시장 1층 모습
우리동네 향토식품 육포 알레뷔어스트 파는곳,벽에 걸려 있는 긴것,짧은 것,둥근것 등등...
종류별 덩어리 치즈 파는곳
독일내에서 생산된 차잎 들과 세계 각국에서 모인 다양한 차잎들을 그람 g별로 담아 올수 있는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