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음식의 포근한 다독임
병원에서 온갖 진상을 떨던 환자 때문에 한바탕 난리가 났던 날 저녁 메뉴로 카레라이스를 선택했다
카레는 남편의 최애 음식 중에 하나 이기 때문이다.
무례한 사람과 마주 하면 환자니까.. 얼마나 아프면 저러나..로.. 이해하려 해도 의료인도 사람인지라 불쾌해진다
남편은 그러려니 하자고 괜찮다고 했지만 내가 괜찮지가 않았다.
괜스레 허공에 대고 니미럴년.. 지랄도 풍년이네.. 씨부럴..라고 남들은 모르는 우리만 알아듯는 한국말로 찰지게 욕설을 내뱉어도 영기분이 나아지지가 않았다.
꿀꿀할 때는 뭐니 뭐니 해도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며 기분 전환 하는 것이 최고다.
음식이 주는 조용한 위로는 때로 백 마디 말 보다 더 포근한 다독임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카레는 내 최애 음식은 아니지만 "음~카레네!" 하며 아이처럼 기뻐하는 남편을 보는 것 만으로 덩달아 기분 좋아질 것이다.
언젠가 아이들이 다 모였을 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큰아들이 재미난 질문을 가족에게 던졌다
"만약에 무인도에서 딱 한 가지 음식만 먹을 수 있다면?"
라는 우스개 질문에 각자 최애 음식을 이야기하는데 나는 떡볶이를 남편은 카레를 골랐다.
그만큼 남편은 카레를 좋아한다.
어릴 때 어머니가 바쁘셔서 카레를 자주 먹었다고 한다. 보통 그렇게 많이 먹은 음식은 질릴 법도 한데
남편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조상 중에 인도 분이 계셨던지 카레는 매일 먹어도 맛있단다.
남편에게 있어 음식이란 그저 맛난 것과 조금 덜 맛난 것 그리고 좋아하는 것과 덜 좋아하는 것이 있을 뿐이다
그는 늘 음식에 있어 투정 없이 무엇이든 감사하게 기꺼이 먹는다
한마디로 남편은 까탈을 떨지 않는 소탈한 식성을 가졌다
예전에 친정엄마는 같은 반찬이 아침저녁으로 올라오면 매우 못마땅 해 하시던 친정아버지에 까다로운 식성을 맞추느라 때아닌 시집살이를 사셔야 했다.
덕분에 자연스레 내 이상형에는 아무거나 더불더불 잘 먹는 남자 가 들어가 있었다.
물론 신이 구구절절 읊고 있던 내 이상형에 대해 딱 거기까지만 들으시고는 "옜다! 여깃 다!" 하실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저녁은 카레라이스다라고 선언하고 마트로 향했다.
생긴 것은 친할아버지를 성격은 아빠를 많이 닮은 우리 집 막내아들은 식성은 외할아버지를 닮았는지 까다롭다.
게다가 카레를 싫어한다 익힌 채소 특히나 익은 당근을 별로 안 좋아하는 막내에게 당근 조각이 크게 숭덩 들어가는 카레라이스는 별로인 음식이다.
그러나 오이무침을 해서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가 시원하게 곁들여 주면 오이 무침 먹는 맛으로 잘 먹어 준다
막내에게 오이무침도 해준다라고 덧붙여 말해 두었다.
카레라이스의 타협안 이라고나 할까?
카레라이스는 카레 가루에 신선한 감자, 당근, 양파, 고기만 있으면 누구나 만들 수 있는 간단하고 맛난 음식 중에 하나다.
조리법도 간단해서 실패하기 어려운 요리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무래도 재료가 좋으면 맛도 더 좋은 법..
마트에서 채소 칸부터 찬찬히 훑는다.
감자나 당근은 아무래도 낱개로 사는 것보다 1kg 또는 2kg 포장되어 있는 것들이 더 저렴 하지만 카레를 끓일 때는 기왕이면 햇감자와 햇당근이 더 맛나다. 해서 마트에 나와 있는 햇감자 튼실한 놈으로 다섯 알 담고 햇당근도 달달해 보이는 길쭉한 놈으로 두 개 담았다.
양파는 지난번에 사다 두었고 그다음은 오이 무침을 할 오이를 고를 차례다.
이 동네 오이는 우리네 오이에 비해 겉면은 부드럽고 짙은 초록색에 일단 크기가 크다
사람만 큰 게 아니라 채소 도 큰 게 많은데 그중 오이도 그렇다.
두꺼운 놈은 뻥좀 보태서 아이들 팔뚝만 하다. 그리고 씨가 많고 물이 많아 그냥 먹거나
샐러드에 넣어 먹기에 안성맞춤이다.
그런데 물이 많다 보니 잘 물러진다 간단한 무침 정도는 괜찮지만 우리처럼 며칠 두고 먹을 오이소박이나 오이장아찌를 담기에는 맞지 않는다
그런데..
오이 중에도 수분이 적고 아삭한 오이가 있다. 미니오이 또는 스낵오이라고 부른다.
요 오이 들은 무침을 해도 맛나고 소박이를 담아도 좋고 장아찌도 가능하다.
단지 제철이 아닌 때는 비쌀 수가 있어서 잘 골라 보아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말이다.
손가락 긴 편인 어른 손가락 만한 미니 오이 한 개에 69센트 한다. 한화로 약 9백 원 가까이다.
네 쪽 내면 끝날 텐데 크기가 두 배는 넘게 클 보통 오이가 49센트 하는데 가격대비 너무 비싸다.
어떻게 할까? 요리조리 둘러보다 빙고~!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들 도시락 통에 넣어 주기 딱 좋게 생긴 스낵 오이 발견!
손가락 짧고 통통한 사람 검지 손가락 만한 스낵오이가 한통에 8개 들어 있고 1유로 26센트 한다.
가격 대비 괜찮다 세 통 사다 얇은 파 넣고 무치면 이삼일은 먹겠다.
예쁘게 생긴 놈들로 골라 얼른 담고 고깃간으로 이동
독일 동네 마트 중에 작은 곳은 정육점이 없고 포장육들이 들어 있는 냉장고만 있다.
조금 큰 마트는 치즈, 생선 그리고 고기 칸이 나란히 들어간 정육 코너가 따로 있다.
여기서는 고기를 미리 포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골라서 잘라 달라고 하거나
담아 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한국의 정육점처럼 다양한 부위를 요리에 맞게 담아 주지는 않지만 가끔 운 좋게도
세일을 만나기도 한다
그날은 신선한 돼지목살이 세일 품목이었다
카레에 넣을 고기를 두껍게 세 조각을 썰어 달래서 담고 보니 430g 3유로 40센트 한화로 약
4천8백 원어치 나왔다.
가격대비 괜찮다.
이 정도 고기 양이면 뚜벅뚜벅 썰어 넣어도 카레 냄비에 부족하지 않다.
장을 다 보고 계산대에서 계산을 하려다 나를 위해 노란색 그리고 주홍색 튤립도 담았다.
뒤끝이 만리장성인 사람이라 마트에서 장 보며 일부 화남을 날려 보냈지만
나머지는 식탁 위에 꽃 보며 좋아질 예정이다.
원래는 금방 시들고 먹지도 못하는 꽃 돈 주고 사는 거 아까워서 생화는 잘 안 사는 편인데 가끔 기분전환이 필요할 때는 거금 들여 산다.
장바구니는 필요한 것만 들어 있어 가볍고 얼른 가서 남편이 감탄사를 내뿜을 카레와 아들이 물개 박수를 칠 오이무침을 만들기 위해 날듯이 집으로 향했다.
저녁메뉴 카레라이스와 오이무침 그리고 꽃을 위해 13유로 50센트 한화로 약 2만 원 들었다.
그야말로 2만 원의 소소한 행복이고 슬기로운 장 보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