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눈 오는 날 아침 풍경
며칠째 끊임없이 눈이 내린다.
마치 아이들이 미뤄 두었던 방학숙제를 한꺼번에 해 치우듯 새하얀 눈이 쉼 없이 내려 하얀 세상이 되었다.
비가 이렇게 오래 오면 장마라 부른다
그럼 눈은 뭐라 해야 하지? 장설?
새벽부터 드르륵드르륵 바닥을 긁어내고 소금을 뿌려 대는 제설차 소리에 잠이 깬다.
아침 일찍 집 앞 눈 쓸어 내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 지 벌써 며칠째인지 모르겠다.
크리스마스 때는 분위기도 살릴 겸 눈 좀 내리지 했는데..
그렇게 오라 해도 꿈쩍도 않더니..
그때 못 내린 것까지 몽땅 오는가 보다.
"아직도 그대로네!" 했던 예전 어느 비누 광고처럼..
하얀 눈이 영하의 날씨에 녹을 새 없이 소복소복 쌓여 눈 천지를 만든다.
방금 전 치워둔 길 위를 하얗게 덮고...
마치 화이트로 틀린 글씨를 지우듯 또박또박 찍힌 발자국을 없애며..
동네 주차장 앞에 세워진 색도 모양도 다른 각각의 자동차들은
흡사 단체 유님폼을 맞춰 입은 것 같다.
그 하얗고 두리뭉실 똑같은 모습이 웃겨서 픽 하고 웃음이 나온다
아름들이 나무들의 풍성했던 나뭇잎 들은 어느새 가을 지나 낙엽 되어 떨어지고
겨우내 다이어트한 것 같이 앙상하던 나뭇가지 위에도…
솜사탕 같은 눈송이들이 여지없이 한참이나 차곡차곡 쌓여 간다.
그러다 휭 하는 바람결에 스르륵 하고 마시멜로 녹아내리듯 땅으로 하얗게 흘러내린다
이리 보아도 저리 보아도 천지가 하얗다
온 세상이 마치 흑백 사진 가운데 들어오기라도 한 듯 온통 하얗게 덧칠되었지만
틈틈이 만나지는 소소한 장면들 덕에 지루할 틈이 없다.
길 위로 한가득 쌓인 눈 덕분에 아이들은 썰매를 타고 유치원을 가고 학교를 가는
이벤트를 누린다.
겨울, 독일에서 눈 오는 날이면 여기저기 하얗게 쌓여 작은 언덕이나 둔덕이 된 곳은
아이들의 눈썰매장이 되고는 한다.
동네에서 나무 또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썰매를 들고 엄마 아빠와 신나서 돌아다니는 아이들을 자주 만난다.
또 오늘처럼 눈이 녹을 틈을 주지 않고 내리고 또 내리는 날이면
한가득 쌓인 눈길을 썰매를 타고 오가는 아이들을 심심치 않게 만나지고는 한다.
신난 아이들의 데시벨 높은 환호성 소리와 대조 되게 썰매는 서행 운행 중이다
썰매 위에 알록달록한 모자와 스키복으로 완전무장한 아이를 태우고
헉헉 하얀 입김을 뿜어 내며 빨간 볼을 한 어른들의 발걸음은 그럼에도 분주하다.
덩달아 신이 난 이웃집 강아지가 부르르 털어 대며 눈 위를 깡충 거리는 소리가
맑게 찰랑대는 방울 소리 같다.
나뭇가지 꼭대기에 아직 채 떨어지지 않은 이름 모를 주홍빛 열매가 가지마다 가득 피어난 눈꽃 위로 빨갛게 나와 인사를 전한다.
눈 쌓인 길을 핑계 삼아 자동차는 두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한다
트램을 타러 길을 가로질러 정류장으로 향한다.
그 길 한가운데서 만난 누군가 정성스레 만든 눈사람은 저절로 웃음 짓게 한다.
눈사람 인가 아님 눈 토끼?
아래위로 둥글둥글 만든 얼굴과 몸통 그리고 나뭇가지를 꽂아 만든 가는
팔은 분명 눈 사람인데 귀가 쫑긋 하고 오렌지 빛의 둥근 코가 당근이다
눈 사람이던 눈 토끼이던..
아이들이 다 자라고 나서부터는 눈송이를 뭉치고 굴려 눈사람을 만들어 본 지도 눈송이를 꼭꼭 뭉쳐 던지는 눈싸움을 해 본 지도 오래되었다.
그게 언제였던지도 가물 가물 하다.
순간 장난기가 스멀스멀 발동이 된다.
차갑고 몽글몽글한 눈을 주먹만 하게 뭉쳐서 저만치 앞서 가는 남편의 뒤통수로 날린다.
에이 띠 아까비… 어깨 위로 살짝 빗나갔다.
마누라에게 커피 한잔 대령 하겠노라 빠르게 걷고 있던 남편은 갑작스레 뒤에서 날아온 허술한 눈뭉치가 어이가 없던지 돌아보며 썩소를 날린다.
자주 가는 빵가게에서 남편이 금방 들고 온 카푸치노의 향이 짙고 따뜻하다
커피 한잔 들고 도착한 트램 정류장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는 출근길 일 테고 또 누군 가는 학교를 가는 길 일 것이며
다른 누군 가는 시내에 볼일을 보러 가거나 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가는 길
일지도 모른다.
트램을 기다리는 각자의 이유도 상황도
연령 대와 모습만큼이나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추운 겨울 햇빛 한 움큼 없는 겨울
매서운 바람 한줄기 가릴 길 없는 야외에서의 기다림도 하얀 눈 덕분인지 한결 밝고 여유 있어 보이는 낯빛은 같다
우리가 타고 가야 할 트램 3번이 도착
하려면 아직 8분이 남았다
남편과 카푸치노 한잔 나눠 마시며 대수롭지 않은 수다를 떨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트램 정류장 건너편 대학 캠퍼스 안에
듬직하게 서 있는 오래된 느티나무 위로
바람결에 흩어지는 눈 꽃은 포근한 어느 봄날 하얗게 휘날 리던 벚꽃을 닮았다
기대하지 않은 선물을 받아 든 아이처럼
배시시 속없는 웃음이 배어 나온다.
눈 오는 날 자동차 세워 두고 트램 타고 출근하기로 한건 탁월한 선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