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가 일요일이던 독일에서는 25일 (크리스마스 1,) 26일(크리스마스 2 )까지 공식 공휴일이라 삼 박사일 의 긴 명절 연휴를 보냈다.
상점들도 모두 문을 닫고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 조차 뜸 해진 조용하고 길고 긴 연휴 기간 동안
다른 독일 친구들처럼 할아버지 할머니 댁에 놀러 갈 수 없는 우리 아이들과 가족끼리 오붓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이런저런 프로그램으로 나름 유용하게 계획을 세웠으나 시간은 여유롭고 할 일은 많지 않았다.....
덕분에 평소에 시간이 없어 자주 보지 못하던 한국 드라마, 예능 등을 몰아서 보며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할 수 있는 호사를 누렸는데 그중에 흑기사라는 드라마가 유난히 나의 관심을 끌었다.
남자 주인공의 바람직한 비주얼과 근사한 목소리도 한몫했으나 드라마 제목과도 멋지게 어울리며 중세스럽고 환상적인 배경으로 판타지 드라마의 몰입도를 높여 주었던 아름다운 고성이 있는 나라 슬로베니아는 오래전 우리에게 잊을 수 없는 가족 여행의 추억을 안겨 주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살아가다 보면 계획에 없던 일들을 어느 날 우연히 또는 갑작스레 만나게 되는 일들이 종종 일어나고는 한다.
마치 흑기사의 주인공들의 우연으로 시작된 로맨틱한 슬로베니아의 여행이 그들을 필연적인 운명으로 이끈것처럼....
우리가 바이 어른 주의에얼랑겐 이라는 곳에 살던
그 당시에 슬로베니아는 전쟁이 끝난 지 오랜 세월이 지난 때가 아니어서 곳곳에 그 흔적들이 남아 있고 관광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황폐한 길들이 만나 지던 때였다.
아이들 의 부활절 방학이 시작되고 그즈음 유명한 관광지 중에 하나인 오스트리아 Kärnten 케른텐 주에 있는 Wörthersee 뵈어 더 호수 근처로 학회를 가게 된 남편이 그 김에 우리를 데리고 가서 자기가 학회에 참여하는 동안 우리는 놀러 다니고 학회가 끝나면, 그곳에서 멀지 않은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로 들렀 다가오자고 했다.
사실 크로아티아는 한번 가보고 싶던 나라였으나 슬로베니아는 그때 까지만 해도 내게 그리 익숙하지 않은 동네라 처음부터 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았지만,
크로아티아에서 가깝고 물가가 착하니 거기 머물며 크로아티아로 놀러 다니자 라는 남편의 달콤한 유혹에 홀라당 넘어가서 그러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떠나기 전 먼길을 가야 할 차도 미리 정비하고 나름 만반의 여행 준비를 해서 오스트리아로 향했다.
그렇게 도착한 오스트리아의 뵈어 더 호수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아름다웠으며,
아이들과 놀기에 시설도 잘 되어 있었다.
남편이 학회에 간 사이 우리는 4월 같지 않게 따뜻하던 날씨 덕분에 물놀이도
실컷 할 수 있었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드디어 오스트리아에서의 일정 마지막 날 저녁
내일 이면 이곳을 떠나,
슬로베니아라는, 우리 에게는 다소 생소하던 나라로 향해 일찍 떠나기로 하고,
짐을 챙겨 놓고 여유 있게 시내 구경을 나갔다.
그런데 중에 차 안에서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는 거다 처음에는 밖에서 나는 소린 줄 알았는데 우리가 차를 세우니 그 소리도 멈추는 것이다.
여행 오기 전 자동차 체크를 해 두었지만 아무래도 이 깡통 굴러 가는듯한 예사스럽지 않은
소리가 마음에 걸려서 급하게 자동차 정비소를 찾아 다음날 아침 슬로베니아로 출발하기 전 가 보기로 했다.
그런데... 아침 일찍 찾은 오스트리아 자동차 정비소에서는 차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고 하니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 차를 열어 보고 다시 점검해 보아야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독일에서 이미 체크하고 왔지만 어쩌겠는가.. 무슨 일이든 미리 예약을 해야 가능하고 바로 당일로 처리되는 것은 어려운 독일 과는 다르게 당일 체크가 가능하다니 다행 일쎄.. 하며 우리는 차를 맡겨 두고 정비소 사무실 한 귀퉁이에 식구대로 쪼로미 앉아 기다렸다.
그러나 이미 점검하고 온 차이니 뭐라도 간단히 끝나지 않을까 기대하며... 심심해서 어쩔 줄을 몰라하는 아이들을 달래 가며 한참 기다린 후에 다시 만난 정비사 아저씨 께서는 바퀴 네 개 중에 두 개를 통째로 갈아야 한다는 거다,
당장 여행을 떠나야 하던 우리는 깜짝 놀라 , 우리 가 여행 오기 전에 미리 정비받고 왔노라 이야기
했더니 그 정비소에서 미처 확인하지 못한 부분이 있어 자동차 바퀴들을 교체하지 않고 떠난 다면
너무나 위험한 여행이 될 것이라는 거다. 특히나 슬로베니아로 간다면...
나는 정비사 아저씨의 슬로베니아 앞에 붙었던 그 특히나 라는 단어가 묘하게 신경 쓰였고.. 정비소 건너편 풀밭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던 얼룩무늬 소들의 힘찬 음메... 소리를 배경 음악 삼아 "덴쟝...이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야? 혹시 바가지 씌우려는 거 아니야?"를 속으로 외쳐대며 쓰린 속을 부여잡고 자동차 앞바퀴 두 개를 통째로 갈았다. 비싼 돈 들여....
그때부터 나는 슬슬 열이 받기 시작했다. 여행 비용을 아껴 보겠다고 남편의 학회 가는 길에 끼여 왔건만 엄한데 돈을 쏟아붓고 있지를 않나.... 게다가 여행의 다음 행선지는 리들이라는 동네 마트에서 파는 여행 상품권 중에 제일 저렴하고 해택이 많아서 선택된 곳으로 슬로베니아의 온천 마을이었다.
그것도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이 가신 다는 온천 마을.. 겨울 도 아닌 화창한 봄날에 밖에서도 수영이 가능하던 따뜻한 날씨에 말이다.
새신을 신듯 거금 들여 바꿔 달은 새 바퀴로 달려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은 지 한참인데... 길도 꼬불 꼬불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슬로베니아 좁은 도로를 우리는 끝없이 달리고 있었다.
드라마 흑기사에 나오던 로맨틱한 성을 만나기 전의 우리는 환장하게 좁고 구불 대는 길을 멀미 날 때까지 가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더 가야 온천 마을이 나오는가? 말이다. 아침부터 자동차 정비소에서 시간을 다 보내고 애들 점심도 제대로 먹이지 못한 체 출발했건만 분명 내비게이션에는 목적지에 세 시간 이면 도착한다고 되어 있었는데 네 시간 다섯 시간이 지나고 있는 데도 온천 마을은커녕 오가는 사람도 찾기 힘든 구부러지고 경사진 길에
지명이 쓰여 있는 표지판 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이건, 무언가 잘못되었나 보다 하던 우리는 달리던 차를 갓길로 세우고 몇 시간 만에 간신히 만나진 작업복 차림의 슬로베니아 아저씨에게 마트에서 받은 지도를 냅다 펼쳐 보여 주며 영어로 여기가 어디쯤 인지 우리가 가려는 곳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물었다.
우리의 버벅대던 영어 와는 다르게 자연스럽고 빠른 억양의 슬로베니아 어를 마구 쏟아내며 공사 중 이셨는지 손에 든 삽자루를 높이 쳐들며 아저씨가 우리에게 가리키던 곳은 산이였다.
그때, 아저씨가 무슨 말을 친절히 해 주셨는지 알 길이 없었으나 우리의 목적지 온천마을의 지명을 이야기하며 산을 가리켰으니 저 앞에 보이는 산 지나 어디쯤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아 이제 다와 가나 보다... 한결 마음이 편안해진 우리는 내비게이션이 가리키고 아저씨가 삽을 들어 알려 주던 그 길을 향해 힘차게 속도를 냈다.
그런데.. 이상 하게도 "이게 정말 자동차가 다니는 길이 맞나?"싶게 더 좁아지던 길은 급기야 비탈진 산으로 올라가고 있었고 그 길 중간에도 역시나 아무런 표지판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좁고 경사진 길 끝에서 우리는 어느새 차로 산 중턱을 넘어 꼭대기로 향해 가고 있었음을 체감하게 되었다.
영어도 독일어도 통하지 않은 낯선 땅, 산비탈 길에서 우리는 더 이상 올라갈 수도 내려갈 수도 없는 대략 난감 한 상황에 봉착하고 만 것이다.
그때까지도 산 꼭대기 만을 향해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내비게이션과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의 산속 비탈길에서 겁을 먹은 나는 그냥 다시 내려가는 것이 더 났지 않겠냐 며 호들갑을 떨고 있었고 아래쪽으로 다시 내려가는 길이 더 가파르게 보인 다는 남편의 설득에 결국엔 내비게이션이 인도하는 대로 그냥 끝까지 따라 올라 가 보기로 했다.
점점 해가 기울고 주변이 어둑어둑해지고 있는 저녁에 우리는 슬로베니아의 산꼭대기에 올라가 있었다. 자동차를 타고...
멀리 불게 물드는 석양을 배경 삼아 차 창문으로 내려다 보이는 야경이 죽여주고 멋들어진 중세의 성이 내려다 보이는 겁나 로맨틱한 지점이 아니라 시커멓게 어둠이 깔리며 가파른 산 낭떠러지 아래로 몇 개 안 되는 인가의 지붕이 보이고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굴뚝의 연기로 누군가 살고 있음을 인증하고 있었으며
조용하다 못해 적막하기 그지없는 산속에서 울려 퍼지는 가끔 푸드덕 거리며 날갯짓을 하며 꼬꼬댁 거리는 닭들의 소리는 괴기스럽기까지 했다.
배는 고프고 가야 할 온천마을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고 호텔은커녕 민박도 보이지 않는 산 꼭대기 위 차 안에서
내려갈 길이 막막해 곧 어둡게 내려앉을 밤을 걱정하며 온 가족이 떨고 있었다.
이러다 오도 가도 못하면 영화에서처럼 나무 가져다 불이 라도 피워야 하는 거 아니야? 하며 말이다.
우리는 위험 하지만 어떻게든 산길을 내려가 보기로 했다.
더 늦어져 칡흑 같은 어둠이 덮쳐 오고 숲 속 어딘가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어우" 하며 나타날지도 모를 늑대와 12살, 9살, 2살짜리 아이들 셋을 데리고 산속에서 밤을 지새워야 할지도 모르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셈이다.
한참을 올라왔던 산길이니 아찔 하게 내려가는 길도 만만치 않을 터 소심하고 겁이 많아 아이들이 좋아라 하는 놀이동산 놀이 기구도 못 타고 수영장 미끄럼틀도 못 타는 내게는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이었다.
어슴프레 어둠이 깔리고 있는 저녁 무성한 나무 들로 뒤덮여 잘 보이지도 않는 산 비탈길을 자동차를 타고 내려가야만 하다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도저히 맨 정신에 눈 뜨고는 그 길을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아 나는 두 눈을 꼭 감은체
두 손을 땀나게 그러 모아 잡자, 평소 자주 하지 않던 기도가 기다렸다는 듯이 자동으로 흘러나왔다.
그러나, 눈을 감은 와중에도 촉각이 곤두선 몸으로 느낌이 라이브로 전달되었다. 차가 쓱 , 휘청휘청
덜커덩 마구 쭉쭉 내려가는 흡사 어린 시절 눈 오는 겨울 동네 뒷동산에서 비닐 쌀 푸데? 같은 것 위에 앉아 썰매를 타듯 마구 떠내려? 가던 그 얄딱구리하며 울렁거리는 느낌 말이다.
이렇게 내려가다 혹시 차가 굴러 뒤집어 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옆길로 빠져 계곡 같은 곳에 박힌 기라도 하면 어쩌나? 온갖 걱정 두려움으로 범벅되어 ,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맞잡은 두 손이 흥건히 젖어 갈 때쯤 우리를 싣고 고꾸라 질듯 위태로이 비틀 거리며 내달리던 자동차는 산 아래에 도착했다.
이제 드디어 안전하게 산 아래로 내려왔노라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가 무섭게 우리 앞에 펼쳐지던 그 장면을 나는 아직 까지 생생히 기억한다.
귓가를 스치는 스산한 바람은 휭휭 하는 마치 라디오 방송 음향 에서나 들어 봄직한 소리를 내며,
작은 종이 부스러기 같은 것들을 동반 한 체 불어 대고 있었고
황량한 회색의 밴치 위에 앉아 뒷모습만 보이던 하얀 머리의 두 노인은
슬로 모션으로 천천히 스르륵 고개만 돌려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하며 그것은 마치 숨 가쁘게 뛰고 달리는 액션 영화를 보다 버거워 채널을 돌리니 머리 푼 귀신이 나오는 전설의 고향이 방영되고 있었을 때의 느낌이랄까?
그때까지 우리가 가야 하는 온천 마을이 이곳이 맞는지 조차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텅 빈 밴치에 앉아 말없이 천천히 고개만 돌리던 두 노인의 모습은 우리를 섬뜩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다행히 그렇게 극적으로 산속을 탈출? 해 호로 틱 하게 도착한 곳은 우리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슬로베니아의 온천 마을이었다.
우리는 드라마 흑기사에 나오는 중세의 고성 같은 호텔에서 드라마 남자 주인공 이 정해진 우연처럼 다시 만난 여자 주인공을 애틋하게 떠올리며 분위기 있고 아련한 밤을 맞이 한 것이 아니라 긴장이 풀리고 주린 배가 채워지며 떡실신해서 밤을 맞았다.
다음날, 아침 자세히 근처를 돌아다녀 보니
관광버스들 까지 들어오는 번듯하고 큰길은 호텔 앞쪽에 따로 나 있었다.
우리는 멀쩡한 길 놔두고 굳이 산을 타고 도착한 것이다.
아마도 중간에 차를 세우고 길을 물었던 슬로베니아 아저씨가 들고 있던 삽을 높이 든 체 산을 가리키며 큰소리로 슬로베니아 어로 이야기했던 것은 "저 쪽 산은 가덜 말아요 올라 가면 개고생하니께"가 아녔을까?
어쨌거나 드라마 흑기사를 보다 소환된 슬로베니아 에서의 우리 가족여행의 추억은 로맨틱하고 아름다운 것과는 거리가 있지만 새록새록 떠오르는 산 좋고 물 좋고 인심 좋던 그곳 에서의 추억 들은 우리 가족에게 푸근하고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물론 그날 지름길로 지정되어 있던 내비게이션 덕에 계획에 없던 산 까지 타게 된 우리는
그 이후로 내비게이션을 절대 지름길로 지정 하지 않으며 모르는 길을 가다가 왠지 이상한 길로 접어 든다 싶으면 내비게이션 설정 상태를 바로 확인하고는 한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힘들고 당황스러웠던 예상 치 못한 일들도 시간이 지나 떠올리면 여행의 소중한 추억 한 자락 으로 남기에 우리는 오늘도 못내 설레이며 또, 다른 낯선 곳으로의 여행을 꿈꾸게 되는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