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중희 Sep 30. 2016

독일에서 출산, 닭 튀기다 애 낳은 여자  


누군가 내게 해외 생활 중에

제일 힘들었던 순간을 꼽으라 한다면  

아마도

 임신과 출산일 것이다.


내 경우 세 번의 출산이

결코 평범?

 할 수 없었는데,

그중에서도 제일

드라마 틱 했던 것이

딸내미를 낳았을 때였던 것 같다.


아줌마 들끼리 모여 이야기하다 보면

누구나

자신의 임신 기간과 출산 이야기로

미니시리즈 14 부작 은 너끈이 꾸릴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인생에 있어
특별한 순간인 엄마 되기가

 해외에서 일 경우

가족들이 곁에 없다는 것이

제일 어려운 점 중에 하나일 것이다.


우리 딸내미를 가졌을 때

체중이 20kg 이 넘게 불었고,

이웃 사람들이  병원에서

검사 잘못한 거 아니냐

쌍둥인데 제대로 못 본거 아니냐고 이야기

할 정도로 배가 많이 불렀었다.

게다가

아기가 뱃속에서 거꾸로

있어서 제왕절개를 해야 하나,

고민해야 했었고,

태반이 조기에 떨어질 증상이

있다고 병원에 입원도 했었다.

그렇게

언제 낳을지 모른 다고

출산 예정일

한 달 전부터는 가방 싸 놓고

항상 대기 상태였다.


그 상황에 한국에서는 아무도 우리에게

와 줄 수가 없었다.

친정아버지가 지병 중이셔서,

친정 엄마는 오실 수가 없었고,

당뇨병으로 고생하시던

 시어머니도 건강상의 문제로 오실

형편이 못 되어

어른 들은 그저 안타까워하시며

출산을

기다리실  수밖에 없었다.


독일 의 산모 수첩 (구글 에서 가져 왔어요)

물론
주변에 좋은 친구 들도 많이

있었고, 기꺼이 도와줄 이웃 들도

곁에 있었지만,

어떻게 가족과 같을 수가 있겠는가  


그때 큰아들이 3살이었다.

유치원 다니는  어린아이가 있으니,

갑자기 새벽에 진통이 오면 어쩌나,

자던 아이를 남에 집에 맡기고 병원을

가야 할 텐데 어린것이 놀라지 않을까?

아이가 유치원 가 있을 때 낳아야 할 텐데

별 별 걱정이 다 들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 도

다른 날처럼 반찬을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출산 예정일 한 달 전부터는

언제 낳을지 모르니

혼자 어디 가면 안 된 다고 해서

돌아다니는 것도 자제하고

집에서 주로 반찬을 만들어

냉동을 했었다.


그래야 아들과 아빠가

내가 병원에 있을 때랑

퇴원해서도 한동안 먹고살지 않겠는가?


그날은 짜장을 해서 냉동고에 이름표 붙여서

딱 넣어 놓고,

닭을 양념반 후라이드 반으로

튀기고 있는데

배가 사르르 아픈 것이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조만간 병원으로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아까운

닭을 튀기다 놓고 가면

누가 튀기겠나 싶어

속도를 내서 다 튀겨 놓고,


미역국을 끓이며 남편에게

집으로 오라고 전화를 했다.

헐레벌떡 뛰어온 남편에게

지금 병원 가면 언제 낳을지 모르니

 빨리

식사를 하라고 해 놓고

튀긴 닭들을 챙겼다.


이웃집 아줌마에게 아이들 간식으로

주시라고 닭 접시를 드리면서

우리 아이도 같이

유치원에서 찾아서 좀 데리고 있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 아줌마가 두고두고,

애 낳으러 가는 사람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닭 접시 가져다주고

옆에

있던 아저씨가 얼굴이 허옇게 돼서

쓰러지기 직전으로 보였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러나 실상은 그 아주머니

말처럼 내가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다.

간혹 뉴스에서 택시 안에서

애를 낳았다 거나 ,

하는 소리를 들은 적은 있었지만,

내가 그러게 생길 줄은 몰랐다.

정말 이지 차 안에서 낳게 생긴 거다,


독일 산파 (헤바메 Hebamme) 와  우리집 딸내미

간신히 병원에 도착했는데,

분만실이 만원이란다,

호텔도 아닌데 꽉 찼단다.

그날

나까지 아이를 낳은 산모가 여덟 명이었다.

하는 수 없이 분만실이 아닌

입원실처럼 생긴 응급실에서

병원에 도착한 지 30분 만에

울 딸내미를 낳았다.


위에 사진이 아이를 받아준 산파다,


독일에서는 주로 Hebamme 헤바메 라고 부르는

산파가 모든 출산을 주도한다.

당연히 의사도 상주하고

응급 상황이나, 마무리 등은 의사가

한다.

그러나 출산의 전반적인

일들을 산파가 한다.

그 산파가 자기가 30년 넘게

산파로 일하면서

이렇게 쉽게, 빨리 아기를

받아 보기는 처음이라 했다.


내가  차 안에서 고군분투했던 것과

집에서 진통과 함께 닭을 양념반, 후라이드 반으로 튀겼다는

사실은 알 수가 없을 테니 그리 이야기할 수도 있다.


아기를 품에 안고 입원실에 올라오니,

옆 침대의 독일 아줌마가

슬며시 조심스럽게 내게 물어왔다.


"혹시 , 네가 병원에 오자 마자 애 낳았다는  엄마 야?"

어느새 작은 병원에 소문이 파다 해 진 거다.


헐, 잘못하면, 우리 딸내미 이름이

"병원에 오자마자" 가 될 뻔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