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프 출신 가득한 문화센터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들 중에서도 경력이라면 뒤지지 않았고 한국요리는 내가 유일하니 비교될 것도 없었지만 그게 이유였다.
우리 문화센터에서 한국요리를 강습받는 독일 수강생 들은 나와함께 처음 한국요리를 만들어 맛보고 한국문화를 체험한다. 그들은그 즐거운경험을 통해 한국을 만난다.
인터넷을 통해 수많은 유익한 자료들과 정보를 쉽게 받을 수 있는 시대에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가서 야무지게 배워와 제대로 알려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그 멋진 경험을 통해 내가 얻은 것은 궁중요리뿐만 아니라 좋은 분들과의 값진 시간이었다.
그때 나와 함께 전수받던 분들 중에는 호주에서 셰프로 일하고 계신 분,한국의 어느 호텔 셰프,그리고대학의 조리학과에서 강의를 하고 계신 분도 있었고 문화센터에서 강사로 일하던 분도 한국의 어느 고등학교 영양사로 일하고 계신 분도 있었다.
나는 내가 요리 좀 한다고 생각하던 사람이었는데 그 막강한 분들과 같이 요리를 하고 보니 나는 내요리의 현주소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역시나 세상은 넓고 고수는 널렸던 것이었다.
나는 칼만 들면 그 현란함이 무림의 고수 같던 그분들에게 요리의 크고 작은 권법 들뿐만 아니라 내 인생에 아주 중요한 것을 전해 들었다.
궁중요리 지도자 단기 전수 과정에서 만든 오이선
그분들이 내게 핸디로 보여준 본인들이 만들어낸 세상 멋지구리한 요리들과 과정 사진들 그리고 레시피 가 빼곡히 적혀 있는 페이지 들은 마치 어디선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는 무림의 비서 같아 보였다.
그들은 그것을 블로그라 불렀다. 고백하자면 컴맹에 가깝던 나는 그때까지 블로그가 뭐 하는 건지 몰랐다.
그 신기방기한 것을 나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열망에 궁중요리 전수증을 들고 독일에 도착해서는 몇 날 며칠을 매달려 다음에 블로그 하나를 만들었다. 잘 아는 사람은 그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인가 할지 모르겠으나 아직도 핸디에서 글씨를 쓸 때면 손가락 하나로 일명 독수리 타법을 유지하고 있는 내게는 굉장한 일이었다. 그 당시 컴퓨터 켜고 끄고나 할 줄 알았던 내가 혼자 어찌어찌 블로그를 개설하고 글을 써서 포스팅을 한다는 것은 글 모르는 사람이 글을 깨우쳤을 때의 감동과 비슷하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한다. 눈 앞이 환해지고 모든 것이 새롭던 그때 나는 내가 무언가 대단한 것을 해 냈다는 뿌듯함을 안고 그렇게 김여사의 구텐 아페티트라는 블로그를 시작했다. 그때가 2014년 봄이었다.
궁중병과 과정에서 만든 색감도 곱던 절편
원래는 함께 요리하는 사람들과 요리에 대한 것을 공유하려고 시작한 블로그 여서 이름도 구텐 아페 티트 독일어로 맛있게 드세요 라는 뜻으로 지었다. 그런데 막상 요리를 올리려니 과정 사진도 많이 필요하고 겨우 겨우 포스팅을 할 수 있던 컴퓨터 수준이라 시간이 어마무시하게 들었다.
그때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가 하면 누군가 내 글에 댓글을 달아 주시면 답글을 달아야 하는데 그 당시에는 그 댓글 달아 주신 분의 아이디를 클릭하면 바로 그분에게 답글을 쓸 수 있다는 것도 모르고 그 댓글 써주신 분 바로 밑에 떡하니 답글을 달았다 내가 내 글에 댓글을 단 셈이다.
그리고 이런 일도 있었다 그 당시 다음 블로그 에는 지금의 하트 모양의 좋아요 처럼 누군가 눌러 주면 불이 들어오고 숫자가 생기는 손가락 모양의 다음 뷰라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각자 달아 놓는 것이었다.
나도 남들처럼 그 손가락을 블로그 글에 달아 놓고 추천도 말하자면 좋아요도 받고 싶은데 당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알 수가 없는 거다. 블로그라는 것을 만들었다고 방방 떠다니던 마누라가 그놈의 손가락 때문에 의기소침해지자 남편은 인터넷을 다 뒤져 그 추천 손가락을 찾아냈다 그리고 복사해다 예쁘게 붙여 주었다.
그 문제의 손꾸락 ㅠㅠ
그런데 문제는 남편이 만들어준 손가락은 아무리 눌러도 불이 들어오거나 숫자가 생기지 않았다.
그렇다 그것은 사용 가능한 진짜 다음뷰 손가락이 아니라 그저 그림이었던 게다.
나란히 앉아 망연자실하던 우린 인터넷 시대에 덤 앤 더머 부부였던 것이었다.
블로그에 내 생애 처음 포스팅한 글
그러나 더 기막힌 건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독일에서는 학교 선생님들도 여자 선생님은 프라우 남자 선생님은 헤어를 성에 붙여서 부른다. 이렇게..(우리처럼 김 선생님, 이선생님이 아니라 )프라우 포겔, 헤어 뮬러... 그래서강습할 때 나를 사람들은 프라우 김이라고 부른다.
그 프라우 김을 한국말로 어떻게 번역하면 좋을까? 하다 가장 비슷한 느낌의 김여사를 붙였다.
그렇게 나는 독일에서 블로그 하는김여사 가 되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한국에서 여사는 선생님 또는 연장자 에게도 사용하지만 김여사는 똘끼 충만하고 진상 짓을 일삼는 사람을 빗대어 그리 부르고 있었다.
얼떨결에 독일 김여사가 된 나는 정든 아이디를 버릴 수도 없고 가지고 있자니 김여사로 불릴때마나 거시기 하기 짝이 없었다. 내 비록 똘끼 충만은 하다만 진상까지는 아닌데... 하면서..
그런데 나의 절친이던 블로그 친구님 들이 정든 이름 김여사로 그냥 있으라고 응원을 많이들 해 주셔서 지금 까지 김여사의 구텐 아페티트 다.
물론 브런치를 만나고부터는 그곳에 거의 글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나의 예전 글들이 모여 있는 나만의 서재 같은 공간이다. 그런데 아직도 매일 김여사의 구텐 아페티트를 찾아 주시는 분들이 있고 그곳을 통해 나의 브런치까지 와주시는 분들이 있다.
이 자리를 빌려 미쳐 전하지 못한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만약,내가 그때 남편의 도움으로 (*아이 셋을 모두 맡기고 갔었으니 지대한 이루 말할 수 없는 도움이었다 할 수 있겠다, 남편 지금 옆에서 글쓰는거 보고 있음)
궁중요리를 배우러 한국으로 갈 수 없었다면,그리고 나의 멋진 지인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도 김여사의구텐 아페티트라는 블로그는 생겨 나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없었을 것이다. 나의 글쓰기의 시작은 거기서부터 였으니 말이다.
사실은 아직 작가라는 이름이 어색하고 마치 내 이야기 같지 않다. 컴퓨터 수준도 처음 글을 쓰던 그때보다 조금 나아졌을 뿐 큰 차이가 없다. 아마 내 글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속도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너무나 글 잘 쓰는 작가님들이 해변의 모래알만큼 많은 브런치에서 글을 쓴다는 자체가 미안하고 작가라는 이름이 한없이 버겁지만 애정 하는 독자님 들이 찾아와 주시고 별 볼 일 없는 내 글을 읽어 주시고 나를 그리 불러주고 응원해 주고 계시니 나는 여전히 독일의 김여사이고 브런치의 김중희 작가다.
브런치에 올려진 글들을 읽어 주시는 모든 독자님 들과 이 시간에도 찰진 글을 쏟아 내고 계실 멋진 브런치 작가님들그리고 브런치라는 포근한 공간을 만들어 주신 관리자 분들에게 진심을 담아 독일에서 감사를 담아 사랑의 인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