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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중희 Nov 25. 2020

병원일 하다 쌈닭이 되었다

직장 환경이 성격도 바꾼다.2


독일은 자타공인 서류의 나라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독일에서 서류 처리하다 보면 일 년이 후딱 간다는 말도 있다. 가정의 병원을 하다 보니 그 우스개 소리가 그냥 나온 말이 아니라는 것을 매일 확인 중에 있다. 환자 진료하기도 바쁜데... 으찌나 매일 서류 처리해야 할 일들이 끝도 없이 밀려들어오는지....


뻥좀 보탠 뼈 때리는 농담으로 우리 병원에서 처리되는 서류가 시골 주민센터 서류보다 많을 것이고 매일 들어오고 나가는 우편물들이 동네 작은 우체국보다 많을 것이다 라고 우리끼리는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우리 병원의 환자들 중에 누군가 지병으로 인해 조기 퇴직을 해야 할 경우 직장뿐만 아니라 의료보험 회사, 노동청, 연금공단 등 각각의 기관에 우리가 보내 줘야 할 서류가 종류별로 많다. 그동안의 환자 진료 기록부터 종합병원이나 각기 전문 병원 에서의 협진 기록 그리고 최근까지의 의사 소견서와 혈액 검사서 그리고 CT 나 MRI 검사서 등의 복사본을 다 따로 챙겨 보내 주어야 한다. 이건 한 가지 경우의 예 일 뿐이다. 환자별 케이스 바이 케이스 이기 때문에 더 서류가 종합세트로 필요한 다른 경우의 수도 샐 수 없이 많다.

매일 넘쳐 나는 병원 서류들 ㅠㅠ

게다가 요즘은 코로나로 병원에 오는 것이 꺼려져 처방전과 다른 전문의에게 갈 때 필요한 소견서마저도 우편으로 받기를 바라는 환자들이 많아졌다.

물론 기저질환이 있으신 고연령층의 환자들은 전문 간병인 들이나 가족들 이 대신 병원을 오가며 받아 가기도 하고 우편으로 보내 드리기도 하며 또 우리가 처방전을 바로 약국으로 팩스 하고 약국에서 환자의 집으로 약들을 배달 서비스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집 밖으로 다니기 어려운 고령의 기저질환자 들에 한해서다. 그런데 엊그제는 이런 일도 있었다.

우리 병원 환자 중에 중풍이 심하게 와서 누워 계시는 분이 계신다. 그래서 언제나 그분이 필요한 약 처방전 등을 약국에 팩스로 보내 드렸다. 이제 약국에서는 그 아저씨 성함이 들어간 처방전이 우리 병원 팩스로 들어가면 환자 댁으로 배달 부탁드려요 라는 메모가 따로 없어도 알아서 배달 서비스를 해 드리 고는 한다 그런데 엊그제 20대인 그 환자의 손녀가 병원에 찾아와서는 할아버지의 것이 아닌 본인의 약 처방전이 필요하니 처방전을 써서 약국에다가 팩스로 보내고 배달을 해 달라는 것이다. 자기가 지금 시간이 없다면서...

하아 이 새파란? 것이 지금 뭐래니? 싶어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동네 마다 있는 이렇게 생긴 우체통에 간단한 편지들은 우표 붙여 넣기도 합니다 그러나 서류들은 무게에 따라 요금이 달라져서 직접 우체국에 가야 합니다.

독일은  한국처럼 택배, 배달 서비스 들이 일사천리로 잘되어 있지 않다. 물론 사회적 시스템이 다르고 각각의 장단점이 있겠지만 급할 때 불편한 것을 감수하고 오래 살다 보니 이런 것 마저 이제는 더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예전에 한국에 다니러 갔다가 집 앞 슈퍼에서 장을 보는데 독일에서 하던 것처럼 매고 나간 가방에서 비닐 종이 꺼내 들고서 물건들을 양손 가득 잘 들고 갈 수 있도록 차곡차곡 담고 있었더니 슈퍼 쥔 아줌니가 눈이 커다래 지며 "아니 배달 안 시키세요?"라고 물으셨다.

이 일화가 우리 에게도 특별했던 것은 좋고 나쁘고를 떠나 너무 다른 것을 극명하게 보인 예여서 그럴 것이다. 물론 요즘은 독일도 이전에 비해 인터넷의 발달로 많은 것이 달라져서 여기도 인터넷으로 쇼핑한 물품들을 빠른 시간 내에 택배로 받아 보기도 하고 마트에서도 배달 엡을 통해 주문 배달하는 서비스가 생겨 나서 훨씬 편리해 지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도 막상 사용하려고 보니 바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며칠 걸려 받을 수 있는 것이어서 미리 주문을 해 두어야 한다거나 제품이 남아 있는 것 중에서 로 제한된다거나 해서 차라리 그냥 마트 가서 필요한 것을 필요한 때에 사 오는 쪽이 훨씬 빨랐다.

마트 서비스들도 이러한데... 아무리 의료도 서비스 라지만...

환자가 한두 명도 아니고 하루에도 몇 번씩 응급 상황이 터져 대고 있는 가정의 병원에서 누구나 그런 서비스를 기대한다면 진료를 어떻게 하겠는가? 더구나 그 처자의 할아버지처럼 한번 처방전 나갈 때 동화책 두께 분량을 매번 약국으로 의료용품 회사로 팩스 하고 그 팩스 가 잘 도착했는지 확인하고 약 들이 환자 댁으로 배달이 된 후에 오리지널 처방전을 다시 약국이나 의료용품 회사로 보내는 일들은 어디까지나 움직이지 못하시는 환자와 환자 가족들에 대한 병원의 배려 다.

독일에서 보통 현지는 80센트 서류는 1유로 55센트 무게에 따라 추가요금을 냅니다.워낙 보낼 우편물이 많아 100개 짜리 사도 금방이에요.

그런데... 지금 아픈 것도 아니고 멀쩡히 잘 싸돌아 다니는 20대의 젊은 처자가 병원에서 처방전 기다리는 것과 약국 들르는 고것이 귀찮아 약을 집에 앉아서 받으시겠다고 처방전을 팩스로 보내고 배달까지 해달라니 기가 찼다.


어쩌면 예전의 나였다면 머뭇머뭇하다 그렇게 해 주겠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병원일을 하다 보면 환자들 중에 이런저런 터무니없는 요구 들을 해 오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그렇다 보니 만일 내가 이런 일을 깔끔하게 처리 해 주지 않는다면 안 그래도 코로나 하나로도 충분히 지치고 힘든 우리 직원들이 스트레스받고 맘고생할 일들이 더늘게 된다는 것을 알기에 단칼에 잘랐다.  


나는, 당연히 되죠? 하는 눈빛으로 "그렇게 해주실 수 있죠?" 라며 나를 빤히 보는 철없는 처자에게 정색하고 이야기해 주었다."그 서비스는 움직이지 못하시는 환자를 위한 것이지 일가족 전체에 해당되는 패밀리 세트 가 아니에요. 지금 여기서 잠깐 기다렸다가 처방전 바로 받아 가던지 시간 없으면 이따 오후에 처방전 받으러 다시 오세요"라고 했다.

당당히 말 꺼냈다가 본전도 못 건진 처자는 찍소리 못하고 병원 문 앞에서 기다렸다 처방전을 받아 갔다. 5분 만에...

그럼에도 내가 병원일 하면서 이런 저런 자질구레한 일들로 이래저래 치이며 어쩐지 점점 쌈닭이 되어 가고 있는 것 만 같아 만감이 교차했다.

그런데 정작 나의 쌈닭스러움의 진가를 볼 수 있던 일은 오후에 터졌다.


독일의 작은 동네 우체국은 요렇게 생겼어요 요즘 코로나 때문에 안으로 한명 또는 맥시멈 세명 까지 들어갈 수 있어요.그래서 늘 줄이 길어요.ㅠㅠ

그날 오후도 왕진 스케줄이 시간별로 잡혀 있었다. 우리는 왕진 가기 전에 우체국에 들러 병원 우편물부터 보내고 출발하기로 했다.

그렇게 차를 동네 우체국 주차장에 주차하고 남편이 왕진 가방을 체크하고 왕진 나갈 환자의 집주소를 차례로 네비에 입력하는 동안 나는 양팔 가득 누런 서류 봉투 들을 안고 우체국 앞에 줄을 섰다.

코로나 시대인 요즘은 늘 그러하듯 마스크 쓰고 한 줄로 띄엄띄엄 길게 늘어선 줄에 말이다.


그런데 매캐한 담배 냄새를 풍기며 내 옆쪽으로 다가온 아저씨가 내게 " 뒤로 가서 서죠!"라고 했다.

나는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아저씨가 이 시국에 다가오는 것도 거시긴 한데 줄 잘 서고 있는 내게 와서는 뜬금없이 뒤로 가라니 이게 무슨 소리 인가 싶어 "네?" 하고 되물었다.

그랬더니 그 아저씨가 이제는 건들 거리는 목소리로  "아니, 나도 시간 없어요 빨리 뒤로 가죠!" 라며 그 아저씨 뒤쪽으로 서 있던 다른 아저씨 쪽을 턱으로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그 예의를 밥 말아먹은 듯한 말투와 제스쳐에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한 나는 제법 앙칼진 목소리로 "내가 왜요? 여기 줄 서고 있는데요!"

라도 말했다.

그러자 아저씨는 "내가 먼저 왔는데 그쪽이 앞에 서면 어떻게요?"라는 거다.


그러니까 그 아저씨의 말인즉슨 내가 저를 가로막고 새치기를 했다는 거다.

이게 무슨 자다 봉창 두드리는 소리란 말인가? 분명 나는 우체국 앞에 한 줄로 되어 있는 줄에 서 있었고 그 아저씨가 나타나 내게 말을 건네기 바로 전에 내 앞에 서 있던 아주머니가 우체국 안으로 들어갔다. 만약 그 아저씨 말대로 내가 그를 새치기한 거라면 지금 우체국 안으로 들어간 사람이 서 있었을 때부터 그 아저씨가 이 줄 앞쪽 어딘가에 서 있어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그 아저씨가 우체국 앞에 서 있던 것을 본 적이 없다. 우체국 앞이 공원처럼 넓디넓은 것도 아니요 아저씨가 다람쥐처럼 작은 것도 아니며 시간이 지나 깜빡할 만한 어제 그제 일도 아닌 불과 십 여분 전에 말이다. 결론 적으로 그 아저씨가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이 진짜 맞다면 내가 보지 못했을 리가 없다는 이야기다.




아 놔 이 아저씨 보소!. 독일 사람들 중에서도 가끔 시치미 뚝 떼고 은근슬쩍 끼여 들어와 모르는 척 새치기를 하는 양심 불량들이 있다. 그런데 이 아저씨처럼 얼굴에 철판을 깔고 앞으로 새치기를 하려는 상대 에게 구라를 치시는 경우는 신종 수법?이다.

폼이 딱 봐도 마이 해본 솜씨다. 키 작은 동양 아줌마에게 어깃장을 놓으면 호락호락할 것 같았던지 아니면 내가 들고 있던 서류가 수북해 겁나 오래 걸릴까 봐 두려웠던지 내 알바 아니나 아자씨 오늘 사람 잘못 골랐어하며 나는 전투력 피어오르는 얼굴로 아저씨에게 따져 물었다.


"내가 왜 아저씨 뒤에 서야 하죠? 난 아저씨를 내 앞에서 본 적이 없는데요"

그랬더니 이 아저씨가 "하아 완젼 웃기시네.. 뒤에 가서 서기나 하죠!"라는 거다.


그 순간 나는 내 안에서 우리 집 가스보일러에 불 붙일 때 나는 소리와 비슷한 피융 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

나는 나도 모르게 우리가 줄을 서고 있는 우체국 앞 땅을 가리키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렇게

"이것 보세요 난 댁을 여기서 이 줄 에서 본 적이 없다고요! 내 뒤로 가세요!"

내 소리에 나도 놀랄 만큼 쩌렁쩌렁했다. 내가 이렇게 발성이 잘 되는지 나도 미처 몰랐다.

그러자 그 소리에 흠칫하던 아저씨는 그대로 주춤주춤 내 뒤로 섰다.


나는 여전히 무례하게 매캐한 담배 냄새를 풍기며 내 뒤쪽 가까이에 서 있던 아저씨를 고개를 휙 하고돌려 째려보고는 우체국 앞에 커다랗게 붙어 있는 코로나 19 방역 수칙 포스터를 가리켰다.

"좀 더 뒤로 가세요 저 표스터 안 보여요?줄은 한 줄로, 서로 간에 1.5미터 거리 두기!"

내 험악한 기세에 눌린 아저씨는 고개는 사선으로 땅바닥을 향한 체 뒷걸음질 쳐서 슬금슬금 뒤로 물러 났다. 마이클 잭슨인 줄!


그렇게 유유히 우편물을 무사히? 보내고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던 차로 돌아온 나는 엄마에게 미주알고주알 오빠의 비리?를 일러바치던 딸내미처럼 남편에게 흥분된 목소리로 자초지종을 쏟아 놓았다.


그러자,남편은 주차장이 떠나가라 자동차 핸들을 쳐가며 웃어젖혔다.    

나는 이제는 하도 웃다가 눈물도 찔끔거리게 생긴 남편을 새초롬한 눈으로 보며 말했다

"내가 요즘 다니는 직장의 업무 환경이 오죽해야 말이지 내가 이렇게 쌈닭이 될지 누가 알았대.."!

그랬더니 남편이 그 예의 재밌다는 표정으로 내게 어퍼컷을 날렸다.

"내가 그랬잖아 너 학교 다닐 때 껌 좀 씹었다고.. 내 말이 맞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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