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사(HISTORY OF ART ...

지은이 / 리오넬로 벤투리 | 옮긴이 / 김기주

by Joong

미술비평사(HISTORY OF ART CRITICISM)
지은이 - 리오넬로 벤투리(Lionello Venturi)
옮긴이 - 김기주
펴낸이 - 전병석
펴낸곳 - 문예출판사(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로 2가 184-4)
제1판 1쇄 펴낸날 / 1988년 9월 20일
제2판 1쇄 펴낸날 / 1989년 10월 30일
제2판 7쇄 펴낸날 / 2001년 4월 20일


서문
- 벤투리의 견해에 의하면, 예술 연구는 예술에 관한 사상사와 뒤죽박죽으로 뒤얽혀 있다. 생각하고 느끼고 응답하는 예술작품은 자발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커다란 사회환경의 일부인 개개인에 의해 산출되는 객체이다. 그러므로 예술 대상에 내재하는 의미의 원인은 전체적인 상황이다. 어떤 주어진 예술작품의 방법이나 양식, 형식은 그것이 제작된 시간과 공간에서 통용되는 제 사상(ideas)을 지시하고 있다. 따라서 그 작품의 원래 환경을 고려하지 않는 관찰자는 그 작품의 의미와 목적을 충분히 체험할 수 없고 그 작품에서 생각해야 할 논점을 전적으로 놓쳐 버리기 십상이다. [15p]


- 벤투리는 예술작품을 판정할 때 개인의 편견이 불가피함을 인정하고 있다. 개개 예술작품은 자신의 미학적 접근을 갖고 있거나 벤투리의 용어를 빌리면 취미를 갖고 있다. 예술가의 취미의 모든 측면을 똑같이 철저하게 연구하려면 현학적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나머지 측면보다 강조하기 위해서 어떤 측면을 선택한다는 것은 객관성을 잃는 것이다. 이러한 딜레마로부터 빠져나오는 유일한 방법은 벤투리가 했던 대로 하는 것이다. 즉 개인적인 것, 따라서 어느 정도 주관적인 자기 자신의 예술적 판단의 본성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다. 벤투리로 하여금 참신한 이해와 더불어 과거의 미술비평에 접근 가능하게 했던 것은 정확하게 말해서 판단의 개인적이면서 사회적인 본성의 진가를 인정한 점이었다. [18p]


제 1장
미술비평사 입문
- 예술사는 예술작품――일체의 예술품――을 판단을 동반하지 않은 채로, 다시 말하면 예술작품에 대한 논평을 달지 않고 가능한 한 가장 자세하게 그 사실을 고증해서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술비평은 비평가의 미적 감정에 따라 예술작품을 판단해야 한다. 미학은 예술의 정의를 보편적인 의미로 공식화해야만 한다. [32p]


- 그리하여 베네데토 크로체는 예술사와 예술비평이 가진 이중의 긴급 상황을 다음과 같은모범적인 태도로 분석하였다.
「예술비평은 칸트가 공식화한 바 있는 것들과 유사한 이율배반에 말려든 듯이 보인다. 한편의 테제는 다음과 같다. 예술작품은 그것이 생겨져서 나온 그 제 요소로 환원시키지 않고서는 이해될 수도 없고 판단될 수도 없다. 따라서 이 테제는, 만약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예술작품은 그것이 속한 역사적인 복합체로부터 유리된 어떤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아 그 진정한 의미를 잃게 될 것이라는 훌륭한 증명서가 첨부되게 되었다. 이 태제에 같은 힘을 갖고 있는 다음과 같은 안티테제가 대립하게 된다. 즉 예술작품은 그 자체에 의하지 않고서는 이해될 수도 없고 판단될 수도 없다. 그리고 이 경우에도, 만약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예술작품은 예술작품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분산되어 있는 예술작품의 제 요소는 예술가가 아닌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르지만 그때 새로운 예술작품의 전체 혼(魂)이 될 새로운 형태, 즉 새로운 내용을 발견하는 자는 예술가뿐이기 때문이다라는 증명서가 첨부된다.」
「상술한 이율배반의 해결책음 다음과 같다. 즉 예술작품은 확실히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 가치 자체는 단순한 것도 추상적인 것도 산술적인 단위도 아니며, 오히려 복합적이요 구체적이며 살아 있는 어떤 것, 하나의 유기체, 제 부분들로 구성된 하나의 전체이다. 예술작품을 이해한다는 것은 제 부분들로 된 전체를, 전체에 있어서의 제 부분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전체를 제 부분들을 거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고 한다면(여기에 제 1명제의 진리가 있다), 제 부분도 실제로 전체를 거치지 않고서는 알 수 없을 것이다(이것이 제 2명제의 진리이다). 그 이율배반은 칸트적 유형으로 되어있고, 해결은 헤겔적 유형으로 되어 있다.」 [33~34p]


- 그것은 논리로는 정당화되지 못하고 예술작품에서만 확실히 정당화되는 개인적인 기호(preference)이다. 예술에 있어서의 기호는 언제나 예술비평의 근본 방침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보편적인 이념이 없는 비평이요, 보편적인 주장이 없는 판단이며, 비평으로 향한 하나의 경향, 비평을 하려는 하나의 욕구, 제 감각의 하나의 판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아직은 예술이나 비평이 아니요, 하나의 과정이지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것이며, 개인들의 그룹에 속할 수는 있다. 그것은 비평이 아니라 취미(taste)이다. [37p]
- 그러나 문헌학적인 업적도, 미학적 이론도, 취미의 행위도, 미술비평을 완전하게 실현시키지는 못한다. 미술비평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미술비평이 필연적으로 판단에 집중되어야만 한다. 예를 들어 보들레르와 들라크로와에 관한 판단을 생각해 보자. 그곳에는 예술의 정신성이라는 원리가 있고, 낭만주의적 취미로서 신고전주의로부터 구별되고 있을 뿐 아니라 낭만주의적 취미내에서도 그것의 새로운 형태감각으로 한정된 들라크로와의 취미에 관한 역사적 판결이 있으며, 또 화가의 개성과 창조성에 관한 직관이 있다. 그리고 이들 모두가 판단 중에, 즉 들라크로와의 위대함의 평가 중에 나타나 있다. 보들레르의 활동의 중심은 정확하게 말해서 그곳, 즉 판단에 있다. 그리하여 그는 판단에 자신을 집중시켰기 때문에 완전한 의미에서의 비평가이다. [43~44p]


- 예술가나 예술작품에 관한 판단이 우리들 논문의 중심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판단의 주요한 요인들을 조사해 보면, 그것들은 다음과 같은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1) 판단이 주어지는 대상으로 삼고 있는 예술작품으로부터 주어지는 실제적 요인
2) 비평가의 미적 이념으로부터,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의 철학적 이념 및 도덕적 요구로부터, 요약해서 말하면 그가 밀착해서 형성에 조력하고 있는 문명으로부터 주어지는 관념론적인 요인
3) 비평가의 개성에 좌우되는 심리적인 요인 [44p]
- 개성이야말로 법칙 그 자체이다. 모든 사람이 이러한 원리를 제 2, 제 3으로 응용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예를 들어, 내가 들로크로와는 예술가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그의 그림의 장점과 단점을 찾을 필요가 없다. 들라크로와의 그림에는 어떠한 장점도 없고 단점도 없으며, 그곳에는 오직 들라크로와의 양식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보들레르는 「들라크로와의 소묘는 앵그르보다 못한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그린 것이다」고 말할 수 있었다. 들라크로와는 앵그르보다 소묘가 뒤떨어진다고 믿는 것은 바로 소묘를 소묘가 실현된 예술작품으로부터 추상하는 것이고, 따라서 일체의 예술적 가치가 없음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으로 앵그르가 그린 소묘의 추상적 완전성도 그의 초상화에서보다는 비유적인 인물화에서 더 명백히 나타난다고 하는 것이 지적되어 왔는데, 초상화에서는 앵그르조차도 그의 추상적으로 완전한 소묘를 변형시키도록 강요받고 있었으므로 그는 그 그림에서 그의 창조력이 가장 잘 나타나는 순간에 정확하게 말해서 예술적 충동에 의해 강요받았기 때문에 그러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들라크로와에게는 부족하고 앵그르에게서는 가장 최악의 순간에 발견되는 추상적 소묘란 무엇인가? 그것은 아카데믹한 소묘이다. 즉 앵그르가 교수법敎授法으로는 유익하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예술과는 여전히 관계가 없었던 하나의 도식이다. [47~48p]


- 그렇다면 이들 비례 중 한 개가 완전하다고 과연 누가 말할 수 있을까? 만약 예술이 예술가의 개성의 표현이라면, 비례는――어떠한 비례라도――예술가가 요구하는 한에서만 예술에 참여하게 된다. 만약 어떤 예술가가 「황금분할」이라 불리는 비례를 찬양한다면, 그 비례가 존재하는 예술작품을 매우 잘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작품에서 예술적이 될 것은 황금불할의 우상화인 그 욕구의 표현이지, 황금분할 그 자체는 아닐 것이다. [48p]


- 화가는 形과 色을 통해서 자신을 표현하지, 얼굴과 같이 모방된 자연의 단편을 통해서 자신을 표현하지는 않는다. [50p]


- 이상에서 예술적 판단은 절대적이면서 동시에 상대적이라는 성질을 가졌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 절대적인 양상은 예술의 불멸의 가치에 의존하고 있고, 그 상대적인 양상은 불멸의 가치가 오직 예술가의 단 하나의 개성 속에서만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에 의존하고 있다. 판단의 규준으로서의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은 결코 보편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 사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판단의 규준은 소묘도 아니고 색채도 아니며, 고전주의적인 것도 아니고 낭만주의적인 것도 아니며, 진실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며,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진정으로 예술적인 개성은 어느 것이나 그 자체 속에 일체의 도식을 이해하고 있으므로 틀림없이 그 개성을 구성하는 그러한 방식으로 그들 도식을 창조하고 있다. 그 개성이 진정으로 예술적인 개성인지 아닌지를 파악하는 것에는 오직 한 가지 길이 있을 뿐이다. 즉 예술에 관해서 직관을 갖는 것, 예술의 정신적 가치를 느끼고, 이성적이거나 종교적, 도덕적이거나 실리적인 여타의 인간 활동과는 다른 예술의 성격을 숙고해 보는 이 한 가지 방법뿐이다. [51~52p]


제 2장
그리스인과 로마인
- 그리스인들에게는 예술은 미메시스(mimesis), 즉 자연의 모방이나 재현이었고, 더욱이 그들에게는 미는 선善과 동일시되는 도덕적 성격을 지니고 있거나 기하학적 비례와 동일시되는 수학적 성격을 가졌다는 것이 사실이었다. 철학이 결정하지 못한 미와 예술, 이 두 문제간의 관계의 타협안이 제시되었다. 그들은 자연을 모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물질적이면서 정신적인 미(physical and moral beauty)의 개념에 따르는, 즉 수학적인 비례와 고귀한 감정(sentiment)에 따르는 자연의 이상화도 역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모든 것이 그다지 엄격하지는 못했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예술작품을 다른 관점에서 보게끔 하는 장점, 즉 기술적인 모방 능력을 지닌 예술작품, 추상적 형태를 지닌 예술작품, 정신적 내용을 지닌 예술작품이라는 다른 견지에서 보게끔 하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56p]


- 그러지만 예술을 정신성이라는 측면에서 판단하는 것은 예술이 표현된 주제가 아니라 예술적 창조 과정이라고 생각할 때는 옳다. 예를 들어 어떤 화가가 정물을 그릴 때 그는 자신의 정신의 섬세함을 드러낼 것이며, 다른 화가는 영웅을 그림으로써 그의 저급한 본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62p]


- 원주가 선택된 이유는 원주가 인체의 비례와 유사한 비례를 가졌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인체 비례가 건축의 모방적 성격을 정당화했으므로 건축을 예술작품으로 간주하도록 허용했다. 건축의 역사는 따라서 이들 세 가지 양식의 역사가 되엇고, 그러므로 그러한 역사가 하나의 순수한 전설이었다는 사실을 부언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69p]


- 합리성과 비합리성, 미와 추醜, 완성과 미완성이라고 하는 이율배반은 形과 色의 이율배반이라고 하는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形과 色이 항상 필연적으로 이율배반을 구성해서 이미 상술한 다른 이율배반과 뗄 수 없다고 확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인이나 로마의 예술가들은 그러한 생각을 품고 있었지만, 중세의 예술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가 다시 근대 르네상스와 신고전주의 예술가들은 그러한 방식을 향하고 있었다. 역사는 사건의 원인을 고정시킬 수는 없지만 사건의 조건만은 고정시킬 수가 있다.
그런데 상술한 이율배반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미의 합리화는 형태의 수학적 비례에 근거하고 있다. 물론 색도 합리화할 수 있으므로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색채에 관한 논문을 썼던 것이다. 그 논문에서 그는 세 가지 요소 즉 1) 빛, 2) 빛이 통과한 물질, 3) 대상에서 빛을 반사한 부분의 색채 등을 구분했다. 이것들은 과학적인 관찰이기는 했지만 모든 형상이나 기둥(column)들의 형체에 인체의 비례가 부과되었듯이 모든 그림이나 건축잠품에 부과되어야 할 완전성의 기준으로 빛 하나 색채 하나를 가정한다는 것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말하자면, 인체 비례의 규범(cannon)은 창출되었지만 색채조화의 규범은 창출되지 못했던 것이다. 비례는 심지어 그것을 피하려고 하는 예술가들에게서조차도 법률처럼 준수되었다. 그러나 색채의 조화는 오직 예술가의 감수성에 맡겨진 채로였다. 미는 합리적인 것으로 생각되었으므로 합리화된 형체만이―감각적인 색채는 아니었다―미를 충분히 나타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플라톤과 그밖의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의하면 미의 대립 개념은 추이고, 색채는 그 자체가 선이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미는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합리적이고 절대적인 미인 형태의 미보다 하위에 위치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서 색채가 형태를 지배할 경우에 그 결과는 야만적인 취미이며 추이다. [74~75p]


제 3장
중 세
- 플로티노스로 하여금 모방 개념을 초월해서 발전 가능하게 한 원리는 동양에서 기원한 유출 개념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당신의 눈앞에 두 개의 대리석이 놓여 있다고 하자. 하나는 형상이 없고 손이 가해지지 않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에 반해 이미 조각된 상이다. 그것은 신의 상이라도 좋고 인간의 상이라도 좋다. 신의 상이라면 어느 정도 우아하거나 뮤즈의 상일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상이라면 어떤 특정 인물의 초상이 아니라 여러 모델로부터의 미를 모아서 만들어진 어떤 인물의 초상일 것이다. 그 다음에 기술에 의해 형상의 미를 떠맡은 대리석은 직접 아름다운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대리석이란 사실에 의해서가 아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다른 하나도 똑같이 아름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확하게 말해서 그것은 예술에 의해 제작된 형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대리석으로 옮겨지기 전에 예술가의 머리에 있었던 이 형상을 재료는 사실상 갖고 있지 않았었고, 이 형상은 예술가가 눈과 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예술을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장인의 머릿속에 존재했던 것이다. 사실 예술에는 이 상보다 훨씬 더 위대한 미가 존재하고 있었다.」왜냐하면 예술 자체로부터의 과정과 작가로부터 재료로 이행되는 과정엣 이미 미의 일부가 상실되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이 단지 그들이 본 것만을 모방한다고 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고 「그들은 자연이 그것을 가지고 성립하는 것과 자연이 그것과 함께 운행하는 것과 같은 조리에 의지하는 외에 자신의 상상력으로 많은 상들을 창조하면서 완전성이 결여된 여타의 것을 그 형상이 미를 맞이하도록정정한다.」[81~82p]


- 그러한 초월은 우의寓意의 개념에서 그 합리적인 형식을 발견했다. 이 우의란 것은 말로는 어떤 사물을 발음하면서 정신적으로는 다른 것을 지칭할 때 생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린 양과 그리스도가 그것이다. 이 경우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린 양의 예술적 특성이 그리스도와 관계가 있는지, 또는 표현 양식에 있는지에 관해서는 자문하지 않았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술작품의 판단에 관해서 언급할 때 현저하게 천재의 직관에 도달하고 있다. 직접적인 판단이라고 하는 것은 감각에 의한 판단이다. 그것 외에 신으로부터 생기는 미의 제 법칙(수, 관계, 균형, 통일성)에 따라 판단하는 것보다 고도의 판단인 이성에 의한 판단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는 이들 제 법칙이 조리를 갖고 있는지를 증명할 수 없었다. 여기에 증명 불가능성과 취미판단에 있어서의 보편성의 요구간의 이율배반의 윤곽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후에 칸트에 의해 정착될 수 있었다. [83~84p]


- 요약해서 말하면, 플로티노스로부터 성 토마스까지, 3세기로부터 13세기까지 신학적인 질서를 혐오함에도 불구하고 근대 미학의 선구적인 면에서 풍부하게 미학 사상의 계속적인 과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 과정은 바로 형체의 정신적인 가치, 미의 보편적이면서도 무한한 가치, 직관으로서의 예술과 황홀경으로서의 예술, 추의 상대성, 증명할 수 없으나 보편성을 요구할 수 있는 제 감관에 의한 판단, 조형예술들 중에서 건축을 크게 찬양하는 사상 등을 구성할 수 있는 과정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결국 예술적 감각을 이론적인 활동으로 평가하는 데에 도달함으로써 예술의 주관적인 성격을 인정하는 데에 도달하게 되었다. [85p]
- 바꾸어 말해서, 명료한 의식을 갖지 않은 무의식 상태에서 테오필루스는 정신적 역할을 형체의 표현에, 그리고 신비적 관조의 가치를 색과 빛에 할당하고 있다. 따라서 회화도 목적이 종교적 훈화가 아니거나 색과 빛의 미에 한정될 때는 재현이 아니고 관조의 대상이므로 건축과 같은 조건에 놓이게 된다.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사리 이 점이 중세 예술에 이어지는 비평적 발견이면서도 그러나 영원한 가치를 가지고 있어, 특히 근대 예술 의식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88p]


- 전통적인 도상학이 수정되는 것은 겨우 르네상스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이루어졌는데 예술에는 유리하고 교회에는 불리하게 수정을 당하게 되었다. 그 결과 (16세기의) 반종교개혁자는 그 구제책을 찾아 도상학적 교의를 재편성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아토스 산의 이 지침서에는 심지어 상(images)에 관하여 우화적 변명을 함으로써 우상파괴주의의 싸움을 암시하는 부분이 있다. 「그리스도라든가 성마라든가가 이 그림 저 그림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상에 대해 경의를 표할 때, 우리는 이 상이 우리에게 재현해 주고 있는 원형에게 이러한 경의를 보내는 것이다.」이런 종류의 언급을 테오필루스에게서 전혀 발견할 수 없는 것은 서구에서는 우상파괴주의와 거의 접촉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구에서도, 예를 들어,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경우에는 우상숭배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생기는 상(image)에 대한 어떤 망설임이 재현된 것으로부터 추상된 상을 명상하는 것에서 그 해결점을 찾아 냈다. 그러므로 그것이 바로 예술적 해결이 되었다. [89p]


- 그러나 중세는 자연 모방의 개념으로부터 해방되었던 때였으므로 인공이라는 개념에 빠져 버렸다.
성 토마스의 친구인 폴란드의 철학자 비텔로(Witelo)는 원근법론을 썼는데, 그 속에서 그는 고대의 과학이나 아라비아 과학의 덕을 입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원근법을 예술과의 관계 속에 놓는 것에 심취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예기치 목한 주장을 공포했다. 즉, 「인공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보다 훨씬 아름답다.」이 말은 인간의 창작물(human artfice)에 대해 확신을 가짐으로써 고대의 자연주의와 대립해서 새로운 시대가 탄생했음을 단숨에 드러내고 있다. 이 주장은 또 다른 말과도 관계가 있다. 즉 「편도형(almondshaped)의 눈이 동그란 눈부다 더 아름답다.」우리는 여기에서 동양을 애호하는 마음에서 생겨 났으며 고딕 예술로부터 이끌어 내었고 고딕 예술에 의해 눈의 성격이 부과된 취미의 관념에 놀라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예술이 자연을 창조한다고 하는 현상의 전형적인 예로 예술상의 정신주의의 클라이막스이다. [90p]


- 단테는 중세의 장식 과잉에 반기를 들었지만 정신적 요구에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예술적 요구에서였다. 「그런데 어떤 사물들이 외부는 장식이 없으나 내부가 참으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을 때야말로 뛰어난 수사법인 것이다.」이것이야말로 예술적 엄격성과 정신적 집중성을 요구하는 새 시대의 알림인 것이다. [92p]


- 지오토의 사후 거의 20년밖에 경과하지 않았는데도 보카치오는 지오토에게서 비롯된 예술상의 새로운 시대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의 이 판단은 비평적임과 동시에 역사적인 판단으로 10세기 동안이나 주어지지 않았던 판단이었다. 미학적 전통과 도상 목록 및 깁버처방전간의 분열은 중세를 폐쇄시키고 근대에로의 문을 연 이탈리아 문명에 의해 종말을 고했다. 단테는 지오토와 치마부에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그를 이어 페트랄카(Petrarca), 보카치오(Boccacio), 사케티, 필립포 빌라니(Filippo Villani)와 첸니니 등이 그 당시의 터스카니(Tuscany) 예술에 관해서 기술하고 있다. 그들은 터스카니 예술로부터 예술 판단의 척도를 형성하는 동기를 끌어내고 있다. 어떤 때는 그것을 받들어 모시고, 어떤 때는 그 운명을 염려하고, 어떤 때는 그것의 법칙들을 결정하려 하고, 어떤 때는 그들 도시의 영광인 예술가들의 이름을 후세 사람들에게 전하려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조형예술과 고전적이고 박학하며 비평적인 문학과의 사이에 다리가 놓여졌다. 고대의 저술가로부터 배운 제 원리가 매일매일의 예술 체험과 관계지어져, 이론적 원리가 예술의 생생한 현실에 적용됨으로써 판단으로 굳혀지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당시의 예술가들은 하나의 표준으로서 고대의 미술가와 대비된다. [93~94p]


- 예술은 자연을 사생하는 것도 아니요 스승의 작례作例를 모사하는 것도 아니다. 양식이 자연에 의해 교정되듯 자연은 양식에 의해 교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인들이 환상(fantasia)이라고 부르고 있고 그것에 의해 혼이 부재의 사물들의 이미지들을 눈앞에 현존하듯이 그려내는(represent) 시각적 환영(vision)에 관해서, 첸니니는 퀸틸리안의 문장을 이용해서 논리를 펴고 있다. 이 심리적 관찰을 회화에 적용함으로써 첸니니는 회화의 정의를 끌어내고 있다. 「손을 움직여서(자연의 그늘에 그 모습을 숨기고 있어) 눈에 보이지 않는 사물들을 찾아내어 손으로 그들을 고정시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듯이 나타내는 상상력을 가졌음에 틀림없는, 그러한 것이 우리가 회화라고 부르는 예술이다.」이 구절이 갖고 있는 중요성을 충분히 강조하기는 어렵다. 사실 최초로 자연 모방 개념이 자연으로부터 독립되어 자연과 평행하게 존재하는 산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즉 자연 중에 있지 않은 것이 마치 자연인 것처럼 재현된 재현으로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99p]


제 4장
르네상스
- 그래서 그는 지오토의 「발견」을 최대로 중요시하고, 「그는 거의 6백 년 동안이나 망각되어 왔던 그렇게 대단한 교리를 발견하여 예술을 가장 위대한 완전함으로 이끌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 기베르티의 생각이 예술의 시원始原, 진보, 완성, 쇠퇴를 말하는 갖가지 예술사에서 여전히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정당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만 한다. 예술은 창조적 개성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시원이 항상 완전하다는 역설은 사실이다. [104p]


- 만약 기베르티의 사상을 여전히 중세로부터 르네상스로 이행해가는 도중에 나타나는 사상으로 간주한다면,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1404~1472)의 사상은 르네상스 자체의 이념을 완전히 표현하고 있다. 중세의 종교에의 광신과 철학이 그에게는 죽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분명한 이상은 「기독교도의 지혜에서 나오는 명령을 이교도의 교리에서 나오는 명령과 일치시키는 것」이었다. 그 차이점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더 이상 종속적인 초점이 아니고, 우주 한가운데에 서 있는 새로운 인간에 대한 개념이다. 그리하여 그 인간은 더 큰 세계를 반영하고 있는 하나의 조그마한 세계같이 자신안에다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실재에 대한 인식을 얻기 위해 그의 활동 범위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다. 중세의 종교적 광신과 르네상스의 광신간에는 인간성(humanity)의 부정과 긍정간의 차이점과 같은 차이가 있다. 초월의 종교와 내재의 종교는 이들 두 가지 정신적 자세를 상징하는 두 가지 공식이고, 그것에 내재하는 자신의 팽창 능력에 의해 신비적인 초월성을 지닌 후광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이 추가되어야만 한다. 예술은 이 당시에 이르면 정신생활 방식에 충분히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단테 이후 전술한 작가 속에서 이미 이러한 움직임의 요인들을 밟아 볼 수 있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예술에 관한 저술가들 중에서 최초로 새로운 정신 상태가 충분히 나타난 알베르티에게서일 것이다. [107p]


- 미의 본질에 상반하는 장식 과잉은 피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자기의 원근법 원리에 따라 회화의 제 부분의 이미지를 구성한다. 첸니니가 지적한 소묘와 색채로는 이미 충분하지 않게 되었다. 어떤 지역들을 윤곽선으로 경계를 정하는 일, 윤곽선으로 경계가 정해진 구획의 면에 구성을 부여하는 일, 그 구확 중에 있는 색과 형에 명암을 분배하는 일들이 있어야만 한다. 여기에서야말로 그 속에 있는 각각의 구획이 그 자체 아름다우면서 다른 구획과는 원근법적 시각 속에서 동등하게 되고, 그 속에서 색채가 조소적 형체를 확실히 하기 위해 명암에 종속되고 있다고 하는 식의 15세기 피렌체 회화에 관한 서술이 발견되는 것이다.
조소적 형체로의 욕구는 다른 원리들을 야기시켰다. 즉 윤곽선은 플리니우스에 의해 이미 정의된 바 있는 파르라시오스의 윤곽처럼 지극히 섬세하지 않으면 안 되며, 「면의 가장자리」이어야 하고 갈라진 틈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누드 인물에 옷을 입히기 전에 누드 인물을 그리고, 살로 뼈와 근육을 덮기 전에 뼈와 근육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 완전한 조소적 형체라고 하는 것은 따라서 인간의 형체이고, 인간의 상이 그 속에 끼게 되는 원근법적 공간이라고 하는 것은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원근법적인 허공(void)이다. 그러나 재현의 적극적인 요소들은 인간의 요소들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그는 주름이 곱게 잡힌 옷의 움직임을 정당화하기 위해 화가로 하여금 바람도 제퓨로스의 무습으로 의인화하기를 바랬다. 그러한 방식으로 전 우주가 인간 속으로 흡수되는 이념이 실현되었다. [110~111p]


- 신에 대한 신뢰는 이미 죽었고, 과학적 인식은 보다 확실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과학의 한계를 깨닫기 시작했고, 그리하여 예술과 과학이 신에게 통한다고 하는 것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예술은 이미 더 이상 과학을 정복할 필요가 없고 이미 15세기에서와 같이 과학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도구로서 얻은 과학을 적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과학적이 아닌 어떤 것에서 예술의 본질을 인식할 필요가 생겼다. 따라서 예술과 과학간의 차이에 관한 인식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한 위기, 그러한 회의, 그러한 직관으로부터 17, 18세기 비평에서 본질적인 요소였고 심지어 오늘날에도 잊혀지지 않고 있는 예술, 예술가, 예술작품에 관한 일련의 관념이 태어났다. [112p]


- 레오나르도는 회화가 조각보다 훨씬 뛰어나며 원근법적 효과를 지니고 있는 청동 부조는 대리석 상보다도 더 높은 가치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미켈란젤로는 다음과 같이 반대하고 있다. 「나는 청동 부조가 회화와 아주 유사하기 때문에 대리석 조각을 진정한 조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조각과 회화, 이 두 가지가 하나같이 인간의 지성으로부터 나왔다고 하나 회화가 조각보다도 낫다고 기술한 사람은 하녀처럼 무지몽매한 사람이었다.」이 말은 암암리에 레오나르도를 직접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118p]


- 「만약 누군가가 이미지 속에 있는 미가 무엇인가를 알고 싶어 한다면, 아마도 누군가 사람들의 판단에 의해 증명된 것이라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그것에 동감하려 하지 않고, 그 판단이 무지한 사람들로부터 나온 판단이라면, 그것은 내 의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것을 잘 판단할 수 있는 자에게 틀림없이 존재하고 있을 인식을 결정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어느 누구도 이것 이상으로 완전한 것은 찾기 힘들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완전한 미는 찾아 내지 못할 것이다.
오직 신의 정신만이 절대적인 완전함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뒤러가 제기했던 과제는 우리의 정신을 연마시키는 것, 즉 미에 가까이 가기 위해 소묘 방식을 비례로 묘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다음은 각자가 스스로 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완전성에 도달할 수 없다면 과학(적 방법)으로 애쓴다는 것은 유용한 일이 못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뒤러는 최선에 도달할 수 없다 할지라도 차선을 탐구할 필요는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뒤러의 경우 절대미에 대한 회의주의는 흑인이나 농부의 모습을 그리기 좋아하는 그 자신의 예술가 의식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 회의주의를 기초로 그는 창조적 주제가 표현 대상으로부터 어떤 형태로 독립해야 함을 끌어내고 있다. 그 결과 표현 대상은 예술작품의 가치 척도가 못 된다. [120p]


- 베네치아의 인문주의는 피렌체와 비교해 볼 때 매우 꾸밈이 없고 원시적이다. 여러 해 동안 피렌체가 모든 곳에 신플라톤주의를 널리 보급시키고 있었을 때에도 파두어(Padua) 대학은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라비아인에 관한 철학을 계속 가르치고 있었다. 피렌체가 화가, 철학가, 조각가와 과학자를 배출했다고 한다면, 베네치아는 그와는 대조적으로 위대한 화가 외에 상인, 정치가, 음악가만을 배출했다. [122p]


- 피렌체의 비평에서는 결여되어 있던 채색 체험이 베네치아의 비평에서는 훨씬 세련되어 있었다. 채색을 명암으로 몰아 넣은 후부터(알베르티) 채색은 오직 음陰으로 한정되어 버렸다(레오나르도)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 돌체는 반대로 상이 떠오르게 보이는 릴리프(상像의 부상)는 채색의 문제라고 서술하고 있다. 결국 릴리프가 채색에 부수하는 것이지, 채색이 릴리프에 부수하는 것이 아니다. 베네치아의 시각 형식이 피렌체에 대립하는 가장 강력한 대립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124p]


- 그러나 모든 다른 저서들을 빛을 잃게 할 정도의 저서는 죠르죠 바사리(Giorgio Vasari, 1511~74)의 《화갇조각갇건축가의 생애(Vite dei Prittori, Scultori e architetti)》(1550년과 1568)이다. 바사리는 자신의 예술론을 그 책의 서문으로 썼는데, 그 책은 알베르티의 예술론보다도 훨씬 더 전문적이고, 또 예술가의 전기를 예술론과 관계지으려고 하는 욕망이 바사리에게서는 아주 다른 비율을 차지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이 《열전(Lives)》에서 사람들은 예술작품이 완전한가 불완전한가와 예술가의 작풍(manner)상의 차이를 배우게 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단언하고 있다. 그러나 심지어 고대를 포함해서 그 이전에는 어느 누구도 이룬 적이 없었던 일로서 그가 이룩했던 일은 예술가들의 생애에 관한 일화와 그들의 작품에 관한 기술을 막대하게 전개함으로써 새로운 역사적 관심의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비사리의 역사 또한 르네상스 역사들의 실용적인 유형과 관계되어 있다. 즉 개개인의 실제적인 자질을 그들의 이념과 관계지음 없이 임의적인 동인動因으로서 고찰하는 것이므로 그 해석은 단지 심리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바사리는 자신의 비평적 직관이 이론적 개념을 능가하는 몇몇 드문 경우에만 예술의 완전성과 한 개인의 완전성의 종합(synthesis)으로 예술적 개성을 이해하는 경우가 나타난다. 자연 모방 개념은 전통에 따라 바사리가 때로는 자연에 필적하는 작용으로 만들려는 개념이므로 모든 예술과 과학을 할 수 있는 고안(artifice) 개념을 동반하고 있다. 그것은 자유와 방종, 변덕을 갖게 허용되기도 하며, 예술적 격정의 권리를 갖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고안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다. 「예술의 위대성은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근면으로부터 태어나지만, 다른 사람의 경우에는 연구에 의해 태어난다. 전자의 경우에는 모방으로부터, 후자의 경우엔느 과학의 인식으로부터 태어난다.」너무나 많은 기원이 있음에도, 정확히 말해서 진정한 단 한 가지 기원인―창조적 상상력이 결여되어 있다. 바사리가 자연 모방을 넘어서 누구나 작풍(manner)의 모방에 의해서 예술에 도달할 수 있다고 허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이 점에서 레오나르도의 전술한 전통과 모순되고 있다. 예를 들어 레오나르도는 거장들의 모방을 제외시키고 자연의 모방만을 선善으로 허용했었다. 따라서 바사리 이론의 색다른 점이기도 한 이 사실은, 예술 세계에 있어서의 그의 위치에 의해 설명된다. [127~128p]


- 그렇다면 예술가로서의 바사리의 이념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 심지어 그의 이념과 다른 이념을 갖고 있는 화가들에게도 적용된 것이 분명하다. 그 결과 기베르티가 14세기의 몇몇 거장들의 절대적인 위대성에 관해 품고 있던 산벌적이기는 하나 적절했던 직관은 부정되었다. 예를 들어, 바사리는 지오토가 둥근 눈이 아니라 편도형의 눈을 그렸다고 비난했다. 이러한 비평은 자연주의적 선입관으로부터 온 것인 동시에 고전적 전통에 따라 구를 완전한 것으로 보는 미학적 선입관으로부터 온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해서 이들 선입관이 결합함으로써 비텔로의 경이로운 직관은 말살되어 버렸다. 결국 바사리는 르네상스 예술이 중세 예술에 대해 지고 있던 빚을 부시하고, 16세기에서만 예술은 완성에 도달했다고 하는 생각을 2세기 동안 믿게 하는 데 기여했던 것이다. [129~130p]


- 결국 形과 色이라는 추상적 요소는 더 이상 예술가의 제작에 필요한 기술적 도구가 아니라 비평가의 해석 도식이 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조형적 도식이 로마초의 예술적 관념에 일치하면서도 로마초에게 예술에 관한 도식의 한계를 전혀 인식시키지 못했다는 사실에 유의하면서 로마초가 근대 독일 예술학의 선구자라고 여겨진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16세기 이탈리아 매너리즘이 이룩해 놓은 최대의 성과였다. [137p]


제 5장
바로크 시대
- 도덕주의적 미학과 합리주의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예술은 정취(sentiment)의 문제라고 보는 확신이 널리 유포되었다. 따라서 미를 판단하는 능력으로서의 「취미」개념은 이성의 개념과 대립된 개념이었다. 여기에서 소위 예술의 법칙은 건축학이나 기하학의 원리가 아니라는 점을 인지하고, 따라서 소위 예술 법칙은 예외 조항과 결점을 관대하게 다루게 되었다. 재능(talent)은 과학적 지성과 대립되는 것이므로 다음 세기에서는 그것이 천재(genius), 즉 예술적 창조력으로 불려지게 될 것이다. 그 경우 「취미를 갖고 있지 않은 천재」를 가진 예술가와 「천재를 지니고 있지 않은」자들간에 차이가 나타난다. 이러한 사고방식들이 너무나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어서 원저자를 지적하기가 어렵겠지만, 그러나 그러한 사상들은 모두 도덕적이면서 지적인 규칙들로부터 나온 하나의 반동이었다. 그러한 것은 특히 듀보스(Jean Baptiste Dubos, L'abbe, 1670~1742)의<시와 회화에 관한 비평적 반성(Réflexions critiques sur la poésie et la peinture)>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회화의 첫 목적은 우리를 감동시키는(move)것이다. 우리를 크게 감동시키는 작품은 대체로 뛰어난 작품임에 틀림없다. 같은 이유로 우리를 전혀 감동시키지 못하는 작품은 우리의 마음을 뺏지 못하며 전혀 가치가 없다. 그러므로 만약 비평이 작품 속에서 제 규칙에 어긋난 과오에 대해 비난할 점을 아무것도 찾아 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제 규칙에 어긋난 과오들로 가득 찬 작품이 탁월한 작품이 될 수도 있듯이 어떤 작품은 오로지 제 규칙에 대해 과오를 갖지 않고도 나쁜 작품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그런데 정취라는 말은 비평가들이 쓴 모든 논문들보다 어떤 작품이 훨씬 더 감동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들 신사 비평가들이 융숭하게 대접하고 있는 논의 방법과 분석 방법은, 이것이 작품으로 하여금 쾌락을 주게 하거나 쾌락을 주지 못하게 하는 원인들을 찾아 내게 하는 데 있을 때, 그 진리에 대해서는 유익하지만 오직 정취만이 이 문제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142~143p]


- 이상에서 언급만 모든 선입견 중에서도 가장 나쁜 것이 「선택(Choice)」의 선입견인데, 그것은 고전 미학으로부터 도출되었기 때문에 언제나 집요하게 존재하며 영구적인 선입견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시대에까지도 집요하게 존재하고 있다. 반종교개혁에 의해 장려함과 종교 사이에서 혼란이 생긴 후, 美의 관념은 사회적 선호(Choice)에 따라 해석되었으므로 정신적인 미라고 해서 육체적인 완전성과 무관한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따라서 정신적인 미와 통속 형식을 동일시하는 현상은 렘브란트의 작품을 통해서 프로테스탄트의 나라에서만 가능하게 되었다. [148p]


- 한편으로 17세기에는 《열전》형식이 풍미하고 있었다. 회화상의 판단 범주에서의 이론적인 체계화가 추구되지 않고 개개 작품과 개개 예술가에 관해 판단을 하는 것이 선호되었다. -중략-
이러한 판단의 임의적인 편향성은 부조리로 떨어지기 마련이다. 사실 어떤 개성의 각각 다른 완전성을 정의하기 위해 안출된 추상이 그것을 파괴하는 데 똑같이 적용되어서는 안 될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라파엘은 딱딱하면서도 예리하고, 티치아노는 소묘력이 없으며, 코렛지오는 작법이 없고, 베로네제는 연약하면서도 너무나 放逸하며, 미켈란젤로는 고상하지 못하고, 카라치 일가는 제작상 소심하다는 등으로 유명한 예술가들의 결점을 목록화한 사람도 없지는 않았다. 그 속에서 여러분은 카라치 류 비평의 일종의 서투른 모방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149~150p]


- 이탈리아에서는 하나의 유파를 갖고 있던 모든 도시에서 그 지방 예술가에 관한 전기작가를 낳았다.[150p]


- 그러므로 피렌체에 렘브란트의 그림 한 점이 들어왔을 때 피렌체 예술가들이 어떠한 반응을 나타냈는가를 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다시 말해서, 물론 그들은 네덜란드에서 렘브란트가 획득하고 있던 명성을 자각하고는 있었으나 이해하지는 못했으므로 다음과 같이 보고 있었다. 「참으로 엉뚱하다. 내면적 외면적인 것을 불문하고 제 윤곽선을 안 쓰는 방식으로 모든 것이 대단히 강렬한 음영을 띠되 그렇다고 깊은 어두컴컴함을 만듦이 없이 분방하거나 거듭 반복되는 필촉으로 묘사되어 있다.」결국 그들은 렘브란트의 음영에는 광휘가 잇으면서도 카라밧지오 파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점을 이해하기는 했으나, 그들은 이탈리아의 彩光派(채광파)중에서 가장 대담한 화가들에게서보다도 한층 더 윤곽이 결여되어 있음을 알아 내었다. 그리하여 이 윤곽의 결여가 그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흥미있는 점은 피렌체에서는 렘브란트의 에칭에 의한 판화들이 유화 이상으로 평가받고 있었다는 점이다. 판화에서는 회화에서처럼 지방적 전통이 엄밀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전혀 회화적인 판화만이 그곳에서 보여졌기 때문이다. [151p]


- 회화·조각·건축을 포함하는 명칭조차 변화되고 있다. 바사리는 그것들의 일치점을 소묘(desing)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소묘예술(arts of design)이라고 불렀다. 또 그는 「가장 미적인 예술(the finest arts)」이라는 말을 쓴 적이 있었고 발디누치는 「소묘가 적용된 미적인 예술」, 스카모치는 「미적인 예술(fine arts)이라는 말을 쓴 적이 있었다. 그러나 「미적인 예술(美術)」이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된 것은 프랑스 아카데미라는 환경에서만이었으므로 그 용어는 그 당시 그대로 남아 있었다. 소묘라는 일치점이 미의 이상이라는 일치점으로 대치되었던 것이다. [154p]


- 보스키니는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을 알려면 어떻게 그리는지 알 필요가 있으므로 실제를 통해서 인식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훌륭한 천분」을 부여받은 사람은 실제의 경험 없이도 그곳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조차 부정하지는 않는다. 바꾸어 말해서 어떻게 해서 인식에 도달하는가가 아니라 오히려 인식의 의미가 무엇인가, 무엇을 인식하는 것이 좋은가를 결정하는 것이 문제였다. 보스키니에 의하면 이론적으로 볼 때 소묘는 회화의 기본이지만 실제로는 단지 안내자에 지나지 않는다. 즉 소묘에 생명을 부여하는 것은 채색이므로 채색 없는 소묘는 영혼이 없는 몸뚱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다. 「화가는 形 없이 형성하거나, 또는 오히려 形을 가지고 외견으로 나타난 참다운 형체성을 몰형체화함으로써 픽취레스크한 예술을 추구하고 있다.」이 말은 아마도 이제까지 부여된 적이 없는 회화적 형체에 관한 최상의 정의인 듯 하므로 잠깐 멈추어서 다른 말로 그것을 설명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는 회화적 형체란 조소적 형체가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형체를 발견하려고 하는 의도로 이루어진 하나의 변형이며, 그것이 유일한 사물의 외관이며, 그 속에서 비로소 회화예술은 성립한다. [159p]


- 예술적인 분방성은 외관상으로는 법칙에 대항하는 것이지만 사실은 때를 잘 맞추는 경우 새로운 법칙이 된다. 위대한 천재만이 법칙을 초월해 있다. 재기가 있는 인간은 예술의 원리로 교시를 받지 않더라도 한 폭의 그림을 판단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가 언제나 자신의 감정에 대해 어떤 이유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육체의 취미가 있듯이 정신의 취미도 있다. 그런데 그것은 천성적인 것이요 자연발생적인 것이다. 예술적인 교양에 의해 그것은 완전한 것으로 될 수 있지만 타락할 수도 있다. 판단을 반복함으로써 이 취미는 습관으로 되고, 그 습관은 관념으로, 비평에 있어서 원리로 변화될 수 있다. 비평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점은 선입관을 갖지 않는 것이다. -중략- 드 삘레는 예술비평의 데카르트가 되려는 뜻을 품고 있었던 듯하지만 그는 많은 입증할 수 없는 전통적 관념을 그대로 용인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재능은 그 정도까지 성공하지 못했다. [163~164p]


제 6장
계몽주의와 신고전주의
- 제 예술에 관련된 사상 운동은 18세기에 이르러 가속화되어 새로운 철학적 원리, 즉 미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기에 이르렀다. 전 세기에 이미 두 개의 예술 개념이 대치되어 있었음을 상기해 보라. 하나는 합리주의적인 것으로 데카르트에 연유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비적인 성격, 즉 플라톤주의적인 연원과 신플라톤주의적인 연원을 지닌 다른 것들이 데카르트 철학의 제 요소와 뒤섞여 있었다. 즉 몇몇 데카르트의 추종자들과 일치하고 있는데, 그들 가운데 최초의 인물이 말브랑쉬(Malebranche)이다. 그 당시는 예술의 진실이 이성의 진실과 동일시되었다. 그러나 그 이성은 신플라톤주의적 이데아에 따라 신에 의지하고 있었다. 벨로리와 푸생, 프랑스 아카데미의 고전주의는 이데아와 그 법칙이 시키는 대로 복종했다.
이데아의 이용과 남용에 대한 자발적인 반발로서 예술은 감정의 문제이며, 게다가 감정의 문제이므로 예술은 법칙이 아니라 감성과 취미가 예술의 심판관이 되어야 한다는 성명서로 나타났다. 이 사실에서 막연하면서도 때로는 임의적인 정신 상태가 취미의 상대성의 원리인 예술의 제 법칙의 대리 노릇을 하는 사태가 나타났다.
그러나 철학적으로 교육받은 정신의 소유자들은 감정 이론을 수동적이기 때문에 거부하고, 예술의 본질을 이성 밖에서 찾되 감정에서가 아니라 창조적인 정신의 활동에서 찾음으로써 합리적이지 못하고 상상적일 거라고 생각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러한 일은 18세기 중엽에 이루어졌다. [169~170p]


- 고대 그리스의 미와 동일시된 형식미가 비평의 유일한 관념으로 남아 있었다. 이것이 바로 신고전주의가 명백하게 지배하게 된 계기였다. 그러나 그 세기가 끝나지도 않아서, 프리미티브 아트라는 이름으로 비코, 바움가르텐과 끝으로 칸트에 이르는 미학자들의 관념에 의해 지지를 받으면서, 관념적 미학에 반대하는 반동이 폭발되었다. 이 반동은 너무나 강력했던 나머지 19세기 전체 위에 스스로를 각인시켜 놓았다. 이것이 낭만주의였다. [171p]


- 그러나 빈켈만이 특히 중요한 것은 그의 선배들에 비교될 정도로 그가 고대 예술품에 보다 더 생생한 관심, 보다 더 강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는 사실에 의거한 것이다. 고대 예술에 관한 박학한 저술이 이 점에 크게 기여했는데 그것은 18세기에는 막대하게 커졌다. 빈켈만의 미학적인 관념은 독창성이 없고, 그 당시 널리 퍼져 있던 신플라톤주의라는 전통적인 것이었다. -중략- 그런데 빈켈만은 그 체계를 뒤바꾸어 버렸다. 그리하여 그는 판단의 이유를 작품 속에서 찾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예술작품을 보고 있다. 아니 오히려 그는 자신의 판단을 「아름다운 양식」에 속하는 그리스 예술가들에게 특유한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과 동일시한다. 그가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조사한 예술작품들이 독자적 개성을 잃고 에술의 유형이 되어 버린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결과 빈켈만은 역사적 측면하에서도 미학적 측면하에서도 그 목표를 넘어서고 있다. 그렇지만 그 반면 그는 그 도정 중에서 어떤 것을 찾아 내었다. 그는 《예술가 열전》을 앞질러 《예술사》의 유형을 찾아 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 저서가 그렇게 명명되자, 1764년에 출간된 고대 예술에 관한 그의 저서도 그런 식으로 불리어졌다. [173~174p]


- 빈켈만은 분명히 스칼리게로(Julius Caesar Scaligero)가 시를 위해, 또 플로루스(Lucius Annaeus Florus)가 로마사를 위해 행했던 구분에 감화되어 자신의 그리스 미술사를 네 시기로 구분한 것이다. 그 각각의 시대는 다음과 같은 자신의 양식을 갖고 있다.
1. 古 양식―피디아스 이전.
2. 숭고 양식―피디아스와 그와 동시대 사람들의 양식.
3. 美 양식―프락시텔레스로부터 류시포스와 아펠레스까지.
4. 모방 양식―예술의 멸망까지.
그런데 여기에서는 제 1양식으로부터 제 3양식까지 진보한 다음에 쇠퇴한다고 하는 진보의 개념이 발견된다. 빈켈만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 예술의 발전과 근대 회화의 발전간에 상사점을 제기하고 있다. 즉,
1. 古 양식―라파엘 이전
2. 숭고 양식―라파엘과 미켈란젤로
3. 美 양식―코렛지오와 귀도 레니(Guido Reni)
4. 모방 양식―카라치 일가와 카를로 마라타(Carlo Maratta)
그런데 진보의 개념은 예술에서 중요하지 않고, 또 예술가의 개성이라고 하는 절대적인 가치를 가벼이 보는 것이므로 전부를 역사적 근거가 없는 설화로 보기 쉽다. 그러나 두 개의 예술가군의 취미에 대해서는 「미」와 「숭고」라는 두 개의 적극적인 정의가 역사 현실에서 여전히 어떤 의의를 갖고 있다. [189~190p]


- 그렇지만 렛싱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문제를 마음에 새겨 두면서 회화를 분명하게 시로부터 구분하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회화의 대상은 신체이고 신체는 동시에 공간속에서 나타나지만, 시의 대상은 행위이고 행위는 시간 속에서 繼起的(계기적)으로 나타난다. 그 구분은 회화의 관찰을 회화의 구체적인 현실로 돌려주면서도 관찰자의 상상력을 방힘하지 않는다는 장점을 갖고 이다. 렛싱은 그의 발견에 하나의 명칭을 각인했다. 렛싱 이전에는 단지 미술(fine arts이라고 불리고 있었던 회화, 조각, 건축이 그 이후로는 형상예술(die bildenden künste), 조형예술로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191~192p]


- 회화에 있어서의 醜(추)에 관한 렛싱의 말을 검토해 보면, 누구나 이상에서 기술한 것의 상대가 되는 증거를 얻게 된다. 이 문제에 관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심지어 추한 모습일지라도 회화로 재현되면 우리를 즐겁게 할 것이라고 하는 천재적인 말을 한 바 있다. 렛싱은 이 말에 반대하여 모방 능력으로서의 회화는 추한 것을 표현할 수 있지만, 아름다운 예술로서의 회화는 그것을 표현하려 하지 않는다고 구별하려 한다. 이것은 일종의 동어반복인 셈이다. 그러나 예술로서의 회화가 추함을 표현할 수 있는가 없는가? 렛싱은 우리들은 표현된 대상의 추함을 제거하고 화가의 기술만을 향수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용인한다. 「그러나 이 향수도 기술의 악용에 생각이 미치면 어느 순간이라도 차단되므로 이러한 반성이 예술가에 대한 경멸을 불러일으키기 않는 경우는 드물다.」 요컨대 렛싱은 정확히 말해서 추한 형상에 존재할 수도 있는 미술의 정신적인 가치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를 들어 렘브란트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정신적인 미에 대한 눈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한 점의 그리스 조각이 갖고 있는 미를 하나의 형이하적인 방법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헤어날 수 없는 모순에 빠져 버렸던 것이다. [193p]


제 7장
낭만주의와 중세
- 그러나 미술비평은 심지어는 오늘날에도 프리미티브 미술 체험이나 낭만주의자들의 프리미티브주의적인 비평을 피할 수 없는 형편이다. 빈켈만의 저술들을 읽으면 예술가의 종교적 도덕적 감수성이 고려되지 않았음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기껏 표현된 정경情景의 도덕적 종교적 가치가 고려된 경우라도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은 고려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조상彫像의 창조적 가치보다도 비례의 계산을 평가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리스 걸작들의 차갑고 기계적인 복사가 미의 모델로 숭앙되게 되었던 것이다. 신고전주의자들은 전적으로 작품의 객관성에 관한 고찰에 동조함으로써 창조적 주관의 가치를 이해하는 것을 포기해버렸다. 다른 한편으로 낭만주의자들은 방종과 배타주의를 통해 비평을 객관으로부터 주관으로 이행시키고, 조각이나 회화를 통해서 창조적 예술가의 개성을 예술가 자신의 감수성, 이념, 고뇌 등으로 재추적한다는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다. 정신의 전全생명이 비평에 투입되었던 것이다. 이성으로는 충분하지 않게 되었다. 자신들의 비평을 종교적 도덕적 감수성으로 특징지은 것은 낭만주의자들의 불멸의 공적이었다. [200~201p]
- 예술의 재판관들에게 「관용과 박애」가 결여 되어 있는 데 비해, 예술은 「인간의 감수성의 꽃」이다. 조물주에게는 「그리스의 사원과 마찬가지로 고딕 사원도 똑같이 마음에 드는 것이다. 왜 여러분은 인도어를 말하고 다른 언어는 말하지 않는 인도인을 비난하지 않으면서 중세 사원이 그리스 사원을 닮지 않았다고 중세를 비난하려 하는가?」「미란 참으로 불가사의하게 경이로운 말이구나! 일체의 개개 예술에 대하여 하나씩 새로운 낱말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들 개개 낱말 속에 또 하나의 다른 색채가 나타나고 있으므로, 개개의 낱말에 대해 인간의 심리 과정 속에 다른 신경들이 창조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이 낱말로부터 이성의 조작으로 엄격한 체계를 끌어낼 것이고, 그 결과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의 지각 표상과 당신의 규칙에 따라 느끼도록 제한하면서도 당신 자신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모든 시대, 모든 국민을 조용하게 주목함으로써, 우리는 일체의 감정과 일체의 그 감정이 담긴 작품 속에서 인간적인 것을 언제나 느끼도록 노력하고 있다.」(바켄로더) [211p]


- 예술의 본질을 이렇게 해명한 러스킨은 예술가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예술가의 전적인 기능이란 보고 느끼는 생물이란 점이다. 즉 어떠한 음영, 어떠한 빛깔, 어떤 선, 그의 주위에서 보이는 사물들의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리는 표정, 그리고 그에게 부여되어 있는 정신에게 이들 사물들이 전달할 수 있는 감동 중 어떠한 것도 기록에 실려 있지 않은 상태로 남겨 두거나 기록서에서 희미하게 사라지게 하지 않는 그렇게 유연하고 민감한 도구라는 것이다……예술가는 옆길로 생각하기도 하고, 때때로 그가 전혀 접촉이 없는 경우레는 추론하며 그가 자신을 낮추지 않고 모을 수 있거나 고통없이 도달할 수 있는 그러한 지식의 편린을 알고는 있으나, 이들 중 어느 것도 그의 관심이 되지는 못한다. 그의 일생 동안의 작업은 오직 두 가지 일, 즉 보는 것과 느끼는 것뿐이다(《베네치아의 석조 Stones of Venice》, Ⅲ, Ⅱ, 10). [220~221p]


- 러스킨은 도덕적 이유 때문에 항상 자연으로부터 선택한다고 하는 유명한 그리스적 원리에 반대하고 있다. 사실 그렇게 해서 된 어떤 선택은 러스킨에게는 오만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는 자연을, 모든 자연을 사랑하면서 찬미하고 있다. 선택한다고 하는 것은 자연의 어떤 요소를 거부하고 무시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결국은 신성모독적인 것이다. 그러나 가령 모든 자연이 표현가치가 있다 해도 단 한 사람의 단 한 점의 그림만으로 모든 것이 다 표현될 리는 없다. 따라서 예술가는 자연사물들 가운데에서 선택하지 말고 자기 예술의 제 요소들 가운데에서 선택해야 한다. 다시 마랳서 그는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자연의 단편을 임의적으로 선택하지 말고 자연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표현하기 위하여 색보다는 선을, 형보다는 음영을, 혹은 그 역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선택 기준이 이리하여 예술가의 견해쪽으로 옮겨졌고, 객체로부터 객체와 주체간의 관계로, 자연으로부터 에술로 옮겨졌으니, 이것 역시 천재의 섬광 같은 것이라 하겠다. [223~224p]


- 시각의 추상적 요소들을 개개의 역사적 조건들에 적용한다고 하는 것은 추상 중에서 자연과 관계가 있는 어떤 측면만을 지지하고, 그 조건들을 한 시기의 취미에 상응되게 구체화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러스킨은 조형적 제 요소로부터 구체적으로 인간적인 성격을 제외시키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는 1) 선, 2) 면, 3) 깊이가 있는 괴塊나 공간이라는 세 가지 단계의 계기로 취미가 발전한다고 보고, 인간이 그러한 발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어떻게 행동을 취하였는가도, 즉 명암과 색이라고 하는 두 개의 수단을 통해 관찰하고 있다. 그 다음에 그는 명암이라는 수단을 현실의 추상적 이해라는 과학적 경향과 동일시하고, 색채라는 수단을 예술적 상상력의 자발적이고 자유스럽고 정명하고 건전한 성향과 동일시하고 있다(《예술에 관한 제 강의》, 147). 이것은 취미의 진정한 역사를 구성하는 것을 말한다. 정확하게 말해서 예술가의 취미를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조형적 도식과 동일시하는 이 능력 덕분에, 러스킨은 형을 색에 우선시키는 고전주의적 선입견으로부터 해방되는 데 성공하였고, 보틸첼리에게서는 선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였으며, 성 마르코 성당의 아름다움이 색채의 아름다움임을 이해하였고, 기타 많은 다른 비평적 제 발견을 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224~225p]


제 8장
예술사와 관념철학
- 신고전주의 취미는 극단적인 엄격성으로 이행되었고 고대 예술을 숭배한다는 결론이었는데, 그것은 르네상스 이후 거의 저지당하지 않았고 또 계몽주의자의 관념들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런데 중세 예술에 대한 취미는 신고전주의적 관념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났고, 그 당시 생활과 낭만주의 문학의 충동하에서 탄생되었다. 이들 두 운동의 기원은 18세기 후반에 몇 년의 간격으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18세기가 채 끝나지도 않아서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취미의 종합을 추구하는 경향이 벌써 나타났던 것이다. 즉 나는 관념론을 말하고 있는 것인데, 그 관념론의 야망이란 예술을 낭만주의적 내용에다 고전주의적 형식을 취한 것으로 정의내리는 것이었다. 관념론적 비평의 최대 성과는 1820년대 예술이 신고전주의에 의해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지배되는 순간에 나타났다. 그러나 관념론적 비평은 19세기 중반경 낭만주의 예술의 발달을 동반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19세기 후반에 관념론적 비평과 낭만주의 예술은 둘 다 그들의 직접적인 기능으로부터 퇴보하였다. 정확하게 말해서 낭만주의 예술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게된 반면, 관념론적 비평은 20세기초에 다시 나타나서 발전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227~228p]


- 계몽주의 시대와 관념론 시대 사이의 과도기에 칸트가 있다. 그는 취미 판단을 체계적으로 정당화했다. 어떤 작품이 아름다운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것인 취미는 그 판단의 정당성을 합리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 판단이 보편적임을 주장한다. 이 이유 때문에 누구도 취미의 여하한 객관적인 법칙도 부여할 수 없다. 이러한 근원(취미)에서 도출된 판단이란 것은 모두 미적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의 결정 요인은 주관의 감정이고 객관적인 개념은 아니기 때문이다. 확정적인 개념에 의해 미의 보편적인 기준인 취미의 원리를 탐구한다는 것은 헛된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을 탐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고 그 자체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미의 학이 아니라 미의 비판만이 있고, 또 미적인 학이 아니라 미적 기술만이 있을 뿐이다. 한 점의 아름다운 미술작품을 앞에 두고 그것이 예술이고 자연이 아니란 점을 의식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형체의 궁극점은 마치 그것이 단순히 자연의 산물이고 자연발생적인 산물이며 의도적이지 않은 산물이듯이, 일체의 의도적인 제 규칙의 구속에서 해방되어 있는 듯이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 뛰어난 에술은 천재의 예술이다. 천재는 독창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임의적임을 피하기 위해서 하나의 범형(pattern)을 그 작업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모르는 채 생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칸트는 예술에서의 그리고 예술적 판단에서의 주관성과 임의성에 차이점을 세웠고, 예술의 모든 제 규칙을 거부하였으며 미의 개념과 예술의 개념을 융합하였고 예술과 학문, 예술과 자연, 감각과 상상력을 구별하였으며, 자발적이고 독창적인 천재의 산물이라는 예술의 성격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들 제 원리는 일반적인 전통이 됐을 정도로 타당한 것이었다. 한편 칸트는 예술도 계승할 필요는 있지만 모방할 필요는 없는 전통에 속하고 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전통으로부터 단절된다는 것은 조잡한 자연적 능력에 의지하는 것임을 의미할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모방한다고 하는 것은 천재의 독창성을 거부하는 것임을 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칸트 시대에 특유한 예술 문명의 전통을 이해하며 고대의 모방을 거부하기 위한 한 방법이었다. [231~232p]


- 무엇보다 많이 주목할 가치가 있는 것은 바로 예술의 창조성에 관한 훔볼트의 설명이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그것에 의해 예술 외적인 제 요소의 구성이 그 예술가의 작품에 전혀 새로운 어떤 형태로 귀착하고 있다. 또 그는 대상의 제 가치에서, 즉 창조 이외의 요소에서 美를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있으므로 결국 여러 장르 별 위계들을 허용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술의 본질적인 요소는 형식이므로 역사 화가는 꽃을 그리는 화가보다 인간으로서는 훨씬 위대할 수 있지만, 그러나 화가로서는 후자가 전자보다 못하지 않다. [235p]


- 게오르그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은 그의 선배들, 특히 쉘링이 공식화했던 美의 정의를 받아들이고 있다. 즉 진리는 이념 그 자체이고, 미는 이념이 감각적으로 나타난 것, 즉 이념의 외적 존재에 관한 직접적인 인식이었다. 따라서 예술의 목적은 「감각적인 표현 형태하에서 진리를 겉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헤겔은 이들 원리로부터 쉘링의 그것보다 한층 철저한 결론을 끌어내고 있다. 그는 자연 모방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없어도 좋은 행위로 간주하고 있다. 「객관적인 자연다움은 규칙이 아니며, 외적 현상의 단순한 모방은 예술의 목적이 되지도 못한다.」예술가의 유일한 역할이란 이상의 표현이다. 그런데 과학이나 철학에 관해서는, 과학의 목적이 예술의 목적과 같다는 의견을 고수하면서도, 진리를 인식하는 사유 쪽이 예술의 외적 표면성과 비교해 볼 때 더 심원한 가치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예술은 철학적 오류 내지는 착각적인 철학이 되고, 다음과 같은 결과가 생긴다. 즉 진정한 철학이 이념의 질서에서뿐 아니라 시간적인 역사의 현실 중에서 탄생할 때 예술은 사멸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것은 예술의 목적을 과학의 목적과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생긴, 또는 예술의 완전성은 인간의 영원한 창조성보다는 몇 점의 고대 걸작 중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고 하는 예술비평상의 통념으로부터 생긴 논리적 결과이기는 하지만, 불합리만 소리임이 확실하다. [243p]


- 졸거(Solger, 1770~1819)는 추의 개념 속에는 무언가 적극적인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을, 즉 추로 하여금 미에 대치시키려고 노력하는 한에서 추는 미의 단순한 대립 개념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직관해내었다. 그러나 절대적인 추가 예술의 한계로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했고, 오직 숭고로부터 활계滑稽로 통과할 때 미는 추의 가장 가까이가지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만을 용인했다. [250p]


- 예술사가 그것이 쓰여진 원자료를 검증하기 위해 문헌학적인 방법을 따랐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플리니우스가 직접 또는 다른 방법으로 인용했던 그 원자료를 확인하려고 하기 전에 고대의 화가와 조각가에 관하여 하나하나 열거했던 것이 이따금 주석을 덧붙여 재간행되었다. 1850년에 얀(Jahn)에 의해 시작되어, 브룬(Brunn), 푸르트벵글러(Furtwängler), 2人의 울리히(Ulrich), 셀라즈 스트롱(E. Sellers Strong)여사에 의해 계속되었고, 1898년에는 칼크만(Kalkmann)에 의해, 그 문제는 전부라고는 말할 수 없어도 원문 대조와 훌륭한 직관련으로 대부분은 해결되었다. 그 결과 크세노크라테스의 비평과 일반적으로 3세기의 그리스의 비평을 동일한 것으로 확인할 수 있었고, 또 그것을 공화정 말기와 제정초의 로마 비평으로부터 구별할 수 있었다. -중략- 구비口碑 문헌의 원자료가 이렇게 검증되고 가끔은 가치를 잃어 추방되는 한편 맨 처음의 문헌 자료, 즉 기록보관소에 있는 고문서와 비명碑銘들의 조사와 간행이 강화되었다. 특히 고문서는 르네상스와 근대에 관한 정보를 비상하게 증가시켜 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예술가의 생애와 업적, 예술작품들의 작자, 그 작품의 연대, 그것이 제작된 원인, 예술작품 상호간의 그리고 종교적 사회적 문학적 생활과의 외면적인 관계 등을 확신을 가지고 정의하게 해 주었다. 예를 들어 바사리의 것과 같은 몇몇 경우에 문헌상의 전설은 완전히 분쇄되었고, 예술가의 생애와 작품들에 관한 정보는 모두 기록보관소의 고문서에 의해 기초지어졌다. 이들 고문서에 관한 간행과 주석은 19세기 예술사가들의 활동 중 상당한 부분을 점유하고 있었다. [258~259p]


- 문헌학자들 중에는 종종 예술에 대해 진지한 열정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때로는 심지어 소묘나 회화에서, 또는 서정적인 서술에서 예술 능력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에게 결여되어 있는 점은 거의 언제나 예술에 관한 사상이었다. 이 태도에는 어떤 유행적인 동기, 즉 지난 세기 후반의 실증주의 시대에 강조되었던 철학에 대한 반감이 있었고, 그리하여 그것은 철학적 질서든 역사적 질서든 일체의 권위있는 사상을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곳에는 동시에 극히 타당한 요청이 있었으니 그것은 사실들을 놓치지 않는 것, 그리고 그것을 판단하기 전에 그 정확성과 한계를 검토하는 것이었다. 하나의 예술작품이 무엇을 표상하려 하는가, 그 속에 어떠한 기법이 쓰여지고 있는가, 그 작품의 양식적 제 요소와 동일한 예술가의 다른 예술작품들이나 또는 시대와 장소를 같이하고 있는 다른 예술가들의 다른 예술작품들의 양식적 요소들간에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이러한 것 모두가 문헌학자들에 의해 이전과는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방법으로 결정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사실의 진술로부터 예술의 역사적 재건이나 예술의 비평적 판단을 도출하려고 생각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것에 이의를 제기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260~261p]


- 그러나 예술에 관한 문헌학적 업적은, 취급된 사실의 단순한 정확성 외에, 비평적 판단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중요한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이 두 개의 공헌 중 하나는 소극적인 것이다. 관념론이란 것은, 특히 쉘링 유형의 관념론은 예술을 인식 방식으로 높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지적 인식을 예술에 의탁해 버렸던 것이다. 천재를 합리적으로 설명함으로써 천재를 합리화해 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문헌학적 예술사가는 천재를 젖혀둔 채, 그 대신 예술작품의 제 요소를 설명했다. 아니 오히려 때로는 천재를 인정하면서도 천재로부터 도망치기를 좋아함으로써 천재를 무시했다. 그런데 그것은 천재의 합리화를 피하는 하나의 방법―합리성으로 환원시킬 수 없는 것도 사상은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납득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사실 유일한 방법―합리성으로 환원시킬 수 없는 것도 사상은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납득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사실 유일한 방법―이다. 사실들에 묶여 있기 때문에 문헌학적 비평은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었다. 적어도 이 말은 제일 현명한 대표자들에게는 사실이었다. 그 경우 문헌학적 비평의 역할은 헤겔의 예술 정의처럼 예술의 비논리적 성격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예술의 정의에 관해서 의문 설정을 하는 것이니, 그것에 뒤따라 궁극적이고도 훨씬 포괄적인 예술 개념에 대하여 부정적인 조건을 설정하는 불가지론이 생겼다.
또 하나의 기여는 적극적인 것이었다. 빈켈만은 사실 그가 거의 로마 시대의 모사품만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리스와 이집트 예술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믿고 있었다. 진정한 그리스 예술의 발견은 엘긴 경(Lord Elgin)이 조각품들을 런던으로 운반하기 위하여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의 건축물들을 약탈하기 시작했던, 정확히 말해서 1800년에 시작되었다. 만약 오늘날 어떤 사람이 최근의 그리스 미술사를 빈켈만의 미술사와 비교하여 본다면, 관념은 거의 변하지 않았으나 논의된 작품은 거의 전부가 새로운 것임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미케네가 크레타 미술의 시대처럼 全 시대가 행운의 발굴에 따라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집트 미술에 관한 아주 새로운 지식의 축적은 훨씬 더 인상적이었다. 중세 미술에 찬성하는 낭만주의 운동은 문헌학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안목을 가지고 비잔틴, 로마네스크, 고딕 등의 유물들을 발견하게 하였고, 그리고 기독교도의 지하분묘(catacombs)를 발굴하게 했다. 아시아 예술에 관한 지식은 특히 20세기에 1백 배로 증가되었다. 오늘날 우리들은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중아 아시아, 인도, 인도차이나, 중공, 일본 및 스키타이 족, 아프리카인들, 마야 족, (멕시코 원주민인) 아즈텍 족, 잉카 족과 같은 소위 미개인이라고 불리는 많은 민족들의 작품들을 매우 잘 구별하고 있다. 결국 르네상스와 근대와 같이 전통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예술적인 시대에 관해서조차도 무수하게 잃어버렸던 작품들이 재발견되고 재분류되고 있어, 그 결과 망각 속으로 빠져 버렸던 예술가들이 역사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되찾고 있다. 예를 들어 그뤼네 발ㅌ(Grünewald), 엘 그레코, 베르메르 반 델프트(Vermeer van Delft) 같은 사람이 전형적인 예이다. 문헌학자들을 괴롭히는 간격(gaps)이 무한하게 존재하고 , 아마도 언제까지라도 무한대로 남아 잇을 것이다. 그러나 지식의 증대는 아무리 예술적 감수성이 결핍되어 있다 할지라도 문헌학적 방식이 나타나기 이전에 저질러졌던 것과 같은 오류를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한다. [261~263p]


- 심지어 20세기에도 번역되고 재판된 가장 인기있는 개론서는 1855년에 발행된 슈프링거(Springer)의 개론서였다. 실증주의에로의 접근은 이 책에서는 일층 현저하다. 즉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고 따라서 예술은 독자적인 활동으로서가 아니라 민족의 풍습에 따라 변화하는 관례로서 이해되고 있다. 미술사의 방법은 역사 일반의 방법이어야만 되고, 그 내용이 예술이라고 하는 사실에 의해서 변형되지는 않는다. 슈프링거는 예술가의 개성의 발전을 추적하는 것이 예술사의 주요 임무라는 것을 이해하고는 있으나, 그 개성을 실제적 활동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것은 사실 그의 폭넓은 학설에 설명을 불어넣기에는 부적합한 그의 예술적 감수성의 특별한 한계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265~266p]


- 텐느가 「환경」이야말로 회화의 因子인자라고 믿었을 때 오류는 시작되었다. 그것은 이중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즉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은 개인의 창조의 자유를 고려하지 않았고, 다음에는 환경을 형이하적인 사실로서 물질화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믿고 있었듯이 그는 관념론의 선입견으로부터 해방되어 있지 못했다. 그는 자신은 일체의 유파와 일체의 취미를, 심지어는 가장 대립적인 것까지도 모두 용납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 따르면 이탈리아의 회화는 1475년과 1530년 사이에 완성의 경지에 도달했으므로, 그 이전은 불완전했고 그 이후는 쇠퇴의 길에 있었다. 즉 그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회화 부분에서는 빈켈만과 부분적으로는 헤겔이 저지른 것과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일체의 취미를 용인하는 경우가 아니라 모든 취미 속에서 창조적 개성의 존재를 발견해 내는 경우이다. [271p]


- 어떤 것으로 했던지간에 그 본질적인 목적인 한 예술가의 작품 총목록이었다.
이러한 목적에 따라 발단한 것이 감식가 유형인데, 이것이 19세기말 이후에는 모든 다른 유형의 예술사가들을 압도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감식가의 능력 속에서 예술사가는 다른 문헌학자나 史家와는 다른 이유를, 자신의 방법의 특징을 발견했던 것이다. 예술사가의 교양이 문학이나 문화 일반의 역사학자들의 교양보다 떨어지고, 사상의 능력은 미학자의 그것보다 뒤떨어진다고 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나, 교양이나 사상이 감식가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대중의 생각에서 볼 때 미술사가란 조각이나 회화 앞에 세워졌을 때 문헌에 의거하지 않고 작품에 내재해 있는 조형적 요소들을 보는 것만으로 그 작품을 분류해 낼 수 있는 사람이다. 이제 어느 누구도 모든 시대와 장소의 예술감식가일 수는 없다고 하는 사실이 분명해졌지만 특정 시대에서조차도 실수를 거의 저지르지 않는 참다운 감식가는 매우 드물다. 감식가의 기량은 어떤 시대의 예술작품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보는 습관에서 생기는 기량이다. 직관에 의해 이들 예술작품은 개개 그룹에 속하는 것으로 구분되고, 개개 그룹은 선후 관계로 놓여지고, 개개 그룹 내에서는 한 작품으로부터 다른 작품으로의 양식의 발전을 찾아 내며, 일군의 작품들의 성질로부터 분류되어야 할 어떤 작품이 그 일군 속에 넣을 만한가 제외되어야만 하는가 및 그 작품이 원작인가, 그렇다면 보존 상태는 어떠한가, 또 복사품이라면 어느 시대의 복사품인가, 아니면 끝으로 위작僞作은 아닌가 등등을 추론해 낸다. 문헌 자료를 갖고 있는 문헌학적 비평이 감식가의 판단보다 선행해야 한다. 즉 문헌에 의해 그의 작품으로 확실히 확인된 대가의 작품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경우, 그 대가의 인식의 기초는 당연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대가의 확인된 작품이 하나라도 있고 원래의 부분이 복구된 부분과 구별될 때, 그 원래의 부분이 그 대가의 양식을 드러내 주어 그 기법적, 조형적, 도상학적 제 요소가 예술가의 개별화를 가능하게 한다. 이렇게 되면 경험적 개성이 이 이름에 부합하는지 또는 저 이름에 부합하는지 하는 경우가 아니라 그의 예술 속에서 개성을 인식해야 하는 경우이며, 그 인식 다음에야 비로소 감식가의 이해가 참으로 예술비평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사실 감식가의 판단을 예술비평가에 일치하게 하려면, 그 판단을 보편적인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인식과 역사적인 교양에 근거하게 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아마 충분하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현재까지 감식가와 예술비평가가 일치했다는 것을 보기가 드물었다면, 그 이유는 첫째 정신 경향이 진정한 예술비평보다는 문헌학적 비평을 향해 있는 경우가 더 많은 데 있고, 둘째 감식가의 임무는 그 자체에 몰두하고 있어서 필요한 사상과 문화의 종합에 충분한 에네르기가 남아 있는 경우가 드물다고 하는 사실에 있다. [275~277p]


- 자신의 기억력과 자신이 본 회화의 드로잉에 의해 카발카셀레가 성취한 것은 그 이후에는 회화와 조각의 사진을 활용하는 것으로 성취되고 있다. 사진이란 주지된 대로 예술작품의 일면만을 재생산하기는 하지만 원작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진을 봄으로써 기억 속에 그것을 쉽사리 재구성할 수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원작과 친숙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사진들을 비교해 봄으로써 양식적인 친근성이라든가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280p]


제 10장
19세기의 당시 미술에 대한 비평
- 크세노크라테스가 붓을 든 B.C. 3세기 이래 오직 빈켈만을 제외하고 그 이전까지 미술사와 비평은 동시대의 미술 평가에서 그 존재이유를 발견했었다. 심지어 과거 미술을 연구 대상으로 했던 경우에도 그것은 항상 현재 예술과의 관계 속에서 판단되었다. 바사리는 미켈란젤로를 표준으로 해서 지오토를 상찬했고, 벨로리는 카라치 일가와 푸생을 표준으로 해서 고대인과 라파엘을 상찬했는가 하면, 멩스는 자기 자신의 표준에 따라 라파엘과 코렛지오, 티치아노를 상찬했다. 그러나 빈켈만은 그 위치를 뒤집어서 고대 그리스인을 표준으로 해서 근대 미술을 판단했다. 예술의 완전성이 현재에서 과거로 거꾸로 놓여지게 되었다. 낭만주의자들은 완전성을 그리스 예술에서보다는 중세의 예술에서 찾고 있었지만, 요컨대 그들도 역시 과거 예술에서 완전성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관념론자들은 이러한 전제로부터 논리적인 결론을, 즉 근대에서는 예술이 철학 속에서 해체되어 버렸기 때문에 예술은 죽었다는 결론을 도출해 내었다. 관념론에서 나온 문헌학자 및 고고학자, 감식가들은 계속 과거의 예술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근대 예술을 잊어버렸지만, 이것은 그들이 근대 예술을 가치없는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들의 문헌학적이고 분석적인 능력이 과거의 예술에서만 해결할 문제들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근대 예술로 눈을 돌린 경우가 있었다면, 휘귀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과거 예술의 사상이나 제 원리를 보다 더 잘 모방할 수 있는 자, 즉 예술가로서는 한 단계 덜 독창적이고 동시대의 미술가로서는 대표자가 못 되는 자들을 동 시대인들 중에서 평가하기 위해서만이었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여러 가지 상황이 근대 미술비평의 이례적인 발전에 유리하게 되어 나갔다. 19세기에 프랑스는 다른 나라의 화가들보다 뛰어나고 이론으로 잘 무장된 일련의 위대한 화가들을 갖게 되었으니, 들라크로와, 앵그르, 쿠르베, 마네, 세잔느, 고갱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들은 말이나 저술뿐 아니라 자신들의 그림을 가지고 비평 논쟁이 참여했다. -중략- 그 외에 추가할 수 있는 사실은 전시회가 빠리라고 하는 집중적인 수도에서 정규적으로―2년마다 혹은 매년―개최되었다는 사실과 장르에 관해서 볼 때 전시회 보고라고 하는 장르가 18세기에 이미 발달해 있었으므로, 디드로에 의해 칭호가 부여되었다는 사실이다. 2년마다 또는 매년 많은 일류 저술가들이 출품작들에 자신의 판단을 부여하고, 현대 미술의 제 사정이나 비평 방법에 관하여 일반화시키려고 노력했고, 심지어는 그것으로부터 취미의 경향에 관한 예측을 인출해내려고 했다. 이러한 모든 저서들은 종종 즉석에서 한다는 저널리스틱한 결점을 갖고 있어 종종 충분한 역사적 미학적 정보가 결여되어 있기는 했지만, 그러나 (전시중의) 있는 대로의 미술에 붙어다닌다고 하는 비유할 바 없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283~285p]


- 비평이 예술의 보편적인 이념에 관해서 인상주의를 정당화하지 못함으로써 비평은 심지어 19세기말에 일어난 미술상의 새로운 미술의 제 경향들조차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쇠라의 신인상주의나 분할주의는 시냑에 의해 예술적 양상으로가 아니라 과학적 주장으로 해석되었다. [317p]


제 11장
예술비평과 순수가시성
- 이들 상징들의 먼 기원을 잘 이해하려면 제 2장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루키아노스가 말한 구별을 상기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제욱시스의 켄타우로스의 그림에 관하여 루키아노스는 켄타우로스의 무섭고도 야성적인 외모와 여자 켄타우로스의 관능적인 외모에 관해서만 언급하고 싶고, 데상과 채색의 정확함이라든가 입체적인 표현(modelling)과 음영의 효과 등을 말하는 임무는 다른 사람들, 즉 예술가와 감식가들에게 맡긴다고 말했다. 즉 루키아노스는 두 가지 유형의 현상을 보았던 것이다. 하나는 심리적인 표출에 관련된 현상이요, 다른 하나는 예술가의 시각에 관련된 현상이다. 비평의 임무는 심리적인 표출이 어떻게 회화로 변화되는가 및 예술가의 시각이 어떻게 그가 느낀 것을 표출하는가를 이해함으로써 이원성을 극복하는 것이다. [319~320p]


- 예술은 진보하지 않고 비약하는 것이다. 예술의 제 규칙의 가치는 그 규칙을 만들어 낸 사람의 예술적인 창조(production)에 있지, 그 법칙을 전해 받은 사람들이 그 법칙에 복종한다고 하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기법이 학습되어지는 어떤 것으로 취급된다면, 양식이 예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라파엘, 미켈란젤로, 코렛지오, 레오나르도, 티치아노는 비록 누가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말하기는 불가능하지만 각각 자신의 독특한 방법으로 자기 자신의 예술적 세계를 창조했던 사람들이다. 반대로 카노바(Canova)와 다비드(David), 카르스텐스(Carstens), 코르넬리우스(Cornelius)는 그들의 시대가 반예술적인 시대였기 때문에 그러한 예술적 진실을 표출하지 못했다. [330p]


- 따라서 순수가시성 이론이 예술판단에서 그 가능성들을 충분히 성취하려면, 판단 기준을 세우기를 포기하고 그것의 역사에로의 적용이 상대적이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334p]


- 리글이 자신의 역사적 관심과 자신의 미적 판단 모두를 정당화하고 있는 원리는 「예술 의욕」이다. 그는 그것을 이론적으로 정의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단지 자연을 재산출하는(모방하는) 기술적 능력에 지나지 않는 제 예술 양상의 안티테제로 적용했다. 형식이 시대드를 지나면서 변화하는 것을 확인한 그는 그것을 변화시킨 힘이 무엇일까하고 자문했다. 젬퍼와 그의 제자들은 목적, 소재 및 기술에 의해 양식을 한정하고, 창조적 정신은 고려하지 않았었다. 리글은 이러한 해결 방식을 비난하고 그 대신 관념론적 긍정으로서 예술 의욕을 제안했다. 예술작품은 그것이 정신적인 창조 과정으로부터 유리되어 있을 경우 죽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예술작품의 창조의 근원으로까지 소급해 올라갈 필요가 있다. [335p]


- 그러므로 이미지가 이미지에, 형체가 형체에 미치는 지속적인 영향이라는 내적 요인이 없이는 발전은 여전히 설명 불가능하다. 여기에서 벨프린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일체의 예술작품의 본원은 생명에 있는 것이지, 전시대의 예술작품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고려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예를 인용하면서 계속 다음과 같이 말했기 때문이다. 「프란츠 할스(Franz Hals)나 벨라스케즈(Velázquez)가 초상화에서 홀바인의 딱딱한 디자인을 떠는 듯한 필촉으로 대체했을 때, 누구나 그것이 이미 정지 상태가 아니라 움직임중에서 그 본질을 탐색하려고 하는 인간의 새로운 시각상의 성과라고 믿을 것이다. 실제 움직임을 말할 수 없는 경우인 정말화에서도 같은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그러나 정물 역시 확신하건대 대상 자체에서가 아니라 17세기의 화가들에게 정물이라는 구실로 쓰여졌었던 光과 陰의 작용에서의 움직임이라고 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것과 유사하게 뷀프린은 그의 상징들의 역사적인 발전, 즉 폐쇄된 형식으로부터 반드시 개방된 형식으로 계속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확신적이지 못했다. 사실 역사는 취미의 변화들이 논리에 의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증명해 주고 있으며 더구나 개방된 형식이 폐쇄된 형식으로 종종 변형되었음을 우리들에게 증명해 주고 있다. [344p]


제 12장
현대 미술
- 르네상스 이래 예술가들은 과학에 대해서 두 가지 입장 중 하나를 취해 왔다. 즉 예술에 합리적인 근거를 부여하기 위해 과학을 이용하든가, 상상력의 제 권리라는 명목으로 과학에 반발하든가였다. 야수파는 이 두 번째 입장을 취하였다. 반대로 입체파는 예술을 과학으로 바꾸어 놓든가 또는 적어도 하나의 자신들의 과학을 창조하도록 요구했다. 이러한 목표는 이론을 필요로 했다. 세잔느, 쇠라, 고갱, 반 고호도 이론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야수파는 그러한 선입견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으므로 그들의 미학은 막연하고 애매한 것이었다. 입체파가 야수파보다 훨씬 더 영향을 미친 것은 그들이 이론적으로 무장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야수파와 입체파가 정반대로 대립되지는 않았으므로, 1919년 아폴리네르는 1906년에서 1908년에 걸친 야수파의 작품이 입체파의 서언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사실 야수파도 입체파도 자신들은 인상파의 감각주의를 밀어내려고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더 진실되고 더 심원하게 리얼리티와 접촉하려 한다는 그들의 뜻을 선언하면서 자연의 외관으로부터 생긴 감정에 의지하기를 거부했다. 이러한 입장에서 생겨난 것이 전통적인 문명의 거부요―이것은 인습의 장치를 통해서 그들의 그러한 접촉을 방해했다―역사상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깊은 불신이다. 사실 그들은, 고갱의 타이티 체류와 랭보(Rimbaud)의 아프리카 탐험으로 예증되었듯이 비역사적인 문명으로 회귀함으로써 역사를 회피하려고 시도했다. 그 결과 시각적인 표현 면에서는 야수파도 입체파도 전통적인 투시법과 조소적 형체를 거부하고 그 대신 색의 면으로 이루어진 회화로, 즉 색채가 갖고 있는 절대적인 가치와 표현적인 직접성으로 눈을 돌렸다. [348p]


- 20세기초까지 건축에서의 취미는 회화와 족가의 급속한 변화와 보조를 맞추지 못하고, 르네상스와 바로크 형식들을 더욱더 기계적으로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단 전통에 대한 모반이 생기자, 그 모반은 다른 제 예술 분야에서보다 건축 분야에서 훨씬 더 맹렬했다. 파괴과 철저해지면 철저해질수록, 재건은 더 느리고 더 주지되었던 것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그 결과 생긴 예술작품은 비록 건축 개념의 개혁이 보다 큰 사회적 중요성을 갖고 있어 그것에 도달하기가 훨씬 어려웠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아주 희귀했다. 이 새로운 취미의 원리는 (구축) 형체와 (실제 생활 중에서의) 기능간의 일치와 그 형체간의 유기적인 상호 관계에 근거하고 있다. [350p]


- 페퍼가 도달한 절충적인 결론은 다음과 같다. 「미의 경험은 질이란 면에서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이고, 고도로 조직화되어 있으며, 정상적인 정신의 소유자에게는 직접적인 쾌감의 원천이 된다. 즉 객관적인 미란 고도로 유쾌한 제 감정의 전형적인 인식의 통합이므로 질적인 면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게 된다.」
이렇게 정의된 예술은 현재와 똑같이 과거의 모든 제 예술을 포섭할 수가 있다. 그러나 페퍼는 현대 예술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므로 피카소와 같은 예술가들과 많은 관계가 있다. 페퍼의 절충주의와 큐비즘 회화의 고전성, 객관성, 총괄적 구성의 주장간에 일종의 유사성을 찾아 낼 수 있을 것이다. [372p]


- 르 꼬르뷔지에는 여전히 「이상 도시(la ville radieuse)」란 이름하에 도시 계획을 생각했고, 그로피우스는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문제로 생각했는 데 반해서 라이트는 도시 계획을 자연과의 직접적인 관계속에서 인간의 개성과 활동의 문제로 파악하거나 연속적이고 유기적인 창조성으로서의 개인 자유의 실현 문제로 파악하였다. [379p]


제 13장
미술비평사
- 소위 미는 오직 예술이 완전한 경우인데 그것도 미가 감관의 대상이 아닐 때에 한해서이다. 아름다움의 범주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예술의 제 법칙 및 장르, 유형 등에 관한 일체의 다른 제 범주는 실패로 끝날 것이다. 따라서 예술의 유일한 리얼리티는 비록 그것이 예술가의 예술작품 속에 드러나 있다고는 해도 예술가의 개성 속에 있는 것이다. 그 곳에 예술가의 개성이 존재하고 예술의 보편적인 이념이 존재하는 것이다. 즉 개성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 사이에는 어떠한 중간 진리로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실제적인 도식들만이 존재하는데 그 도식들이 보편적으로 예술의 이념에 도달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될 수도 있고, 개성으로 예술의 판단에 도달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될 수도 있다. 그리하여 대우주는 소우주 속에 모두 있기 때문에 이념과 판단은 동일시되어야만 한다. 바꾸어 말해서 개개 예술가는 보편적인 예술의 한 측면, 즉 하나의 계기에 불과하다. [383p]


- 그런데 만약 예술이 절대적이고 영원하다면 취미는 상관적이라는 사실을 정의할 필요가 있다. 모든 취미는 예술에 관해서 똑같은 가치를 갖고 있다. 그러한 방식으로 임의적인 기호와 그것을 가지고 판단을 내릴 모범형들의 설립, 진보와 퇴보의 개념들―요컨대 예술가의 개성에 관한 모든 오해를 피할 수 있는 것이다. 현대의 취미에 관한 필요조건이 비평가에게 다른 취미를 인식하지 못하게 방해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비평가가 현대의 취미를 알고 있으면 있을수록 그는 그 취미의 한계를 더욱더 자각하게 되고, 그 결과 무엇이 그들 한계 밖에 있는 것인가를 더욱더 인지하게 될 것이다. 비평가가 예술이 어찌하여 현대의 취미에서 생기는가를 익숙하게 인지한다면, 예술이 고대 취미 속에서 살고 있는 경우도 쉽사리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예술의 영원성과 취미의 상대성의 대립은 예술 비평사를 성취할 때까지 미학과 역사적 판단의 동일시를 필요로 하고 있다. [399p]


- 그런데 취미의 인식은 어떻게 획득되는가를 지적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예술작품에서의 예술의 직관과 그 구성 요소의 분석은 응당 최초의 조건이요 본질적인 조건이다. 그러나 개개인의 직관과 개개인의 분석을 조정하고, 그리하여 그 결과 그들의 객관성을 보장한다는 것은 오직 비평의 역사로써만 획득되는 것이다. 모든 취미는 예술가 자신의 이상에 근거를 둔 예술가의 말(words)로, 예술가 자신의 기법으로, 동시대인의 판단으로, 후시대인의 해석으로 자신의 본성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제 요소를 정의하고, 그리하여 비평의 발달을 위한 한 단계를 성립시킨다. 그러므로 취미에는 예술가가 자신의 창조의 계기에 갖고 있었고 그것에다 그가 형체를 부여했던 모든 과학적, 종교적, 도덕적, 공리적 모티브들이 내포된다. 문화사의 요구는 이렇게 자신을 정당화하면서 변형된다. 즉 문화사는 예술의 취미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미 더 이상 예술작품으로부터 유리되지 못하고 예술사와 하나로 되는 것이다. 문화사는 정신의 전영역을 꿰뚫는 어떤 여정에 의한 예술작품의 직관으로부터 출발했고, 그 다음에 예술작품의 직관, 예술가의 개성의 직관으로 되돌아와 완전한 인간성으로 보강되었다. [399~400p]


- 이 시점에서 시의 역사에서는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와 비교하는 것이 시선(時宣)에 맞을 것이다. 우리는 시의 역사와 문학의 역사가 운문이고 산문이라고 하는 외부적인 성격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시는 보편적이면서 영원한 가치를 가진 반면에 문학은 시간과 공간, 즉 그것이 속하고 있는 문명에 관계되는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의 내재적인 가치에 의해 구별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시는 개별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의 종합(synthesis)이지만, 문학은 개별적이고 유한적일 뿐이다. 상관적이요 개별적이면서 유한적이기 때문에 문학은 천재에게 보이는 특유한 시적 자유와 비교해 볼 때 어떤 확립된 제도와 관례로서의 자신의 기능을 갖고 있다. 소위 시와 문학의 역사는 대단히 희귀한 몇몇 순간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문학의 역사이다.
제외된 순간이란 시와 문학의 역사가 진정한 시와 접촉한 때로서, 그것은 그 시가 황홀경을 산출시키면서 모든 것을 잊게 하고 우리를 매혹된 성채로 데려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매력이 끝났을 때 우리는 시의 그 순간이야말로 매일매일의 노동 중에서 하나의 행복한 막간극 같은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누구나 꿈을 꾼 후에 삶으로 되돌아가듯이 우리도 문학의 역사로 되돌아가게 된다. 문학은 그러므로 감동적(sentimental), 도덕적, 지적 제 경향을 표현하고 있는데, 그 제 경향들은 그 자신의 완벽한 시의 형식을 아직 찾아 내지 못했고 아마도 미래에도 결코 찾아 내지 못할 것이다. 그리하여 문학은 시의 분석적 계기가 자신의 역사라는 질료임을 드러내고 있다.
시와 문학간의 차이와 같은 경향의 차이가 조형예술의 역사에는 지금까지도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도 감히 역사의 주제를 형성하고 있는 일체의 회화, 조각, 건축이 완전하면서도 절대적인 예술 즉 시라고 주장하지는 못한다. 사실 조형예술에서도 문학과 음악에서처럼 완전하면서도 절대적인 예술은 휘귀한 예외에 속한다. 그러면 그 나머지는 무엇인가? 예술의 부정인 추(醜)가 있다고 대부분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매우 많은 회화와 조각, 건축작품은 비록 그들이 완전하면서도 절대적인 예술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렇다고 모든 가치가 완전히 박탈된 순수한 의미에서의 부정적인 작품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말하고 있듯이 「흥미있는」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절대 예술의 기준으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이 기준에 의해 측정되면 그들은 전멸될 것이다―어떤 다른 기준으로 측정되고 있다. 그들은 감동의, 의욕의, 개개 제 문명의 이념들의 역사적 기록들이므로 소위 「도해적인(illustrative)」제 가치를 드러내고 있거나, 아니면 대작의 탄생 즉 「선구자」들의 작품에 실용적인 제 조건을 예비하고 있는 작품이거나, 혹은 위대한 대가 중 한 사람의 양식을 계속하면서 그것을 해석해서 대중이 접근할 수 있도록 친숙할 수 있게 만드는 작품들인 것이다. 즉 「제자」및「추종자」의 작품들인 것이다. 물론 도해자나 선구자, 추종자의 작품 중에서도 때로는 완벽한 예술을 찾아 낼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개 그들의 성과는 예술적이라기보다는 실용적이므로, 정확하게 말해서 그것은 도해나 예비 도는 해석의 성과인 것이다. 그들은 영웅의 순간을 기대하면서 일상생활의 회화, 조각, 건축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비록 방심 않고 있다가 「대작」을 알아보는 일이 있다고 해도 그 경우 예술사는 그 일상생활에 종사하고 있다. [401~402p]


- 사실 미학자와 예술사가들은 전혀, 아니 거의 전혀 예술을 생성 과정으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당시 예술보다는 과거의 작품과 훨씬 친숙하다. 그들은 너무나 자주 그들 주위의 활동을 단지 예술의 타락이라든가 부정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그리하여 이 생각이 그들로 하여금 영원한 인류의 창조성을 이해하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다. 과거 문화에 대한 공감이 합리적일 수는 있으나 그것이 예술에 대한 정열과 일체가 될 리는 없다. 더구나 이 공감은 종종 비평가들로 하여금 과거의 척도로 자기 시대의 예술을 판단하게 하고, 따라서 당시의 작품에서 독자적이고 진정한 점을 이해하지 못하게 하거나 한층 더 나쁘게는 전통적인 도식의 모방을 창조와 혼동하게 하는, 즉 자주성이 없는 능력(모방 능력)을 예술의 자유와 혼동하게 유도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자세는 과거의 예술을 영원하게 만드는 어떤 직접성을 과거의 예술에 부여하는 창조성으로 과거의 예술을 보지 않고, 예술에 속하지 않고 취미에 속하기 때문에 이미 어떠한 지속적인 가치도 없는 조건부적이고 일시적인 양상을 만들어 내는 문화적 도식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406p]


- 비평가가 선택하고 거부하는 것에서 한쪽으로 기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점에서 모든 생존 비평가의 열렬한(혹은 보들레르가 말했듯이 정치적인) 성격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는 추상적인 제 원리에 따라 판단하고 창조적 행위를 자발적으로 애호하는 것에서 나오지 않는 정열만은 피해야 한다. 자연과학자에게는 당연한 양자간의 분리가 예술비평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비평가는 인간의 정열과 환상이라는 인간 세계내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평가의 편파성이 그로 하여금 많은 측면에서 어떤 것을 관찰하지 못하게 막지는 않으며,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모든 면으로부터 관찰하지 못하게 하지도 않는다. 그가 편파적이라는 것은 매일매일 매순간 예술작품과 함게 소생하는 영원한 창조성에서 볼 때 편파적이라는 의미이다. 만약 그가 어떤 작품을 예술로 만드는 힘을 획득했다면, 그 힘을 달성케 한 취미에 상관없이 어떤 작품에서도 그 힘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보들레르는 들라크로와와 도미에의 창조성을 이해했지만, 앵그르와 같이 다른 예술가들 속에서도 예술의 계기를 인식할 수 있었다. [407~408p]


- 예술을 판단하기 위한 기준이 되는 유일한 조화는 형과 색의 창조성이다. 그러나 창조성은 삶으로부터 고립되어 잇지도 않고 고립될 수도 없다. 회화는 하나의 직업이다. 그러나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심지어 회화조차도 직업의 한계를 초월해서 예술가의 존재 전체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예술작품의 도덕적 종교적인 제 요구는 그것이 예술이 도덕성과 종교를 가르치라는 구실이 되는 것이 아니라(어느 경우에서든 그것은 수사학적이 되고 예술이 되지 못한다)자기 자신의 창조성을 향해 있는 예술가의 자세가 도덕적인 성실성에 의해, 그리고 무한과 보편을 향한 갈망에 의해 깊이 침투되어 있으라는 요구에 있는 것이다. 러스킨은 이 점을 가르쳤고, 현대 비평은 그의 가르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술작품은 그 시대를 초월한다고 말하는 경우, 예술작품의 창조성이 모든 인류에게 즉 시간이나 공간에 관계없이 느끼고 상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속해 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상력이란 창조성으로 다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시대의 삶에 집착하거나 반항함으로써 자신의 시대의 삶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이 역사를 초월하지만, 반면에 또 역사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에술가의 역사적 환경을 완전히 인식하지 않고 그의 창조성을 비판적으로 간파해 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헤겔에 의해 고용된 인간의 이상을 공식화하는 방법과 불크하르트와 드보르작에 의해 공식화된 문화사의 유형이란 두 가지 요인이 이러한 인식에 공헌하고 있다. [408~40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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