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 W.J.T. 미첼 / 옮긴이 / 김전유경
그림은 무엇을 원하는가 : 이미지의 삶과 사랑
초판 1쇄 인쇄_2010년 10월 20일
초판 1쇄 발행_2010년 11월 1일
지은이 W.J.T. 미첼
옮긴이 김전유경
펴낸이 유재건
펴낸곳 (주)그린출판사(서울시 마포구 동교동 201-18 달리빙딩 2층)
1부 이미지
- 이미지라는 단어는 모호하기로 악명 높다. 이미지는 물질적 대상(회화나 조각)을 의미하기도 하면서, 정신적이고 상상적인 실체나 심리적 이마고imago, 꿈과 기억과 지각의 시각적 내용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미지는 시각예술과 언어예술 모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18p]
- 이미지에 대한 이중의식은 ‘재현’에 대한 인간 방응이 보여주는 뿌리 깊은 특징이다. 그것은 우리가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현대적이 되었다고 해서, 혹은 비판적 의식을 획득했다고 해서 ‘극복할’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나는 이미지에 대한 태도가 결코 바뀐 적이 없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혹은 문화들 사이에, 역사적 단계나 발달단계 사이에 아무런 유의미한 차이도 없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미지에 대한 역설적인 이중 의식은 놀랄 만큼 다양하고 특수하게 표현된다. 여기에는 예술에 대하여 대중적인 동시에 세련된 믿을 갖는 현상이 포함되며, 돈독한 신앙인이 종교적 도상에 보이는 반응과 동시에 신학자들이 종교적 도상에 대해 성찰하는 현상이 포함되고, 인형과 장난감에 대한 아이의 (동시에 부모의) 행동이 포함되며,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아이콘에 대해 국가과 대중이 갖는 감정이 포함되고, 매체와 재생산의 영역에서 기술적 진보에 대한 반응이 나오는 동시에 케케묵은 인종적 편견이 여전히 유포되는 현상도 포함된다. 여기에서 또한 자신의 작업을 잘못된 이미지를 탈신화화하고 교육적 측면에서 폭로하는 우상파괴적 실천으로 제시하려 하는 비평의 불가피한 성향도 포함된다. 내가 보기에, ‘우상파괴주의iconoclasm로서의 비평’은 이미지의 생명력을 보여 주는 징후인 만큼, 또한 예술작품의 내적 삶에 대한 소박한 믿음이라는 이면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여기에서 의도하는 것은, 비판적 혹은 철학적 언어의 ‘소리굽쇠’로 우상들을 ‘섬세하게 두드려 조사한다’는 니체의 전략이 제시하는 바와 같이 제3의 길을 탐구하는 것이다. 이는 이미지와 재현을 넘어서기를 꿈꾸지 않는 비평양식, 우리를 현혹하는 잘못된 이미지를 타파하기를 꿈꾸지 않는 비평양식, 심지어 올바른 이미지와 잘못된 이미지를 명확하게 분리하지 않는 비평양식이 될 것이다. [24~25p]
- 복제생물clone은 우리 시대에 새로운 이미지의 창조 가능성을 의미한다. ‘살아 있는 이미지’를 창조하려는 고대의 꿈을 실현시키는 새로운 이미지인 것이다. 이 ‘살아 있는 이미지’는 단순히 기계적인 복사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유기체의 생물학적으로 생존 가능하고 유기체적인 시뮬라크르simulacre인 복제물이다. 복제생물은 살아 있는 도상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뒤집음으로써, 살아 있는 이미지를 부인할 수 없게 만든다. 이제 우리는 이것이 단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몇몇 이미지의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어떤 형태로든 이미 이미지였음을 깨닫게 된다. [31~32p]
- 왜 한 마리 양이 복제와 생명공학의 아이콘이 되었는가? 돌리 이전에도 어느 정도 복제에 성공한 동물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이 특별한 피조물인 돌리만큼 전 세계의 주목을 받은 동물은 없었다. 이에 대한 대답은 부분적으로는 ‘양’에 대한 기존의 상징적 내포에 있을 것이다. 양은 목가적 보살핌, 순수함, 무해함, 희생, (불길한 측면에서는) 권위주의적 엘리트 집단이 이끄는 대중―“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얌전히”sheep to the slaughter라는 표현에서처럼―을 나타내는 현상이다. 복제된 양이 보여 주는 외관상 온화한 이미지는 테러리스트의 파괴라는 재앙 이미지에 못지않게 어떤 사람의 눈에는 공포감을 줄 것이다. 이미지의 창조는 그것의 파괴만큼이나 지독한 혐오감을 줄 수 있으며, 두 경우 모두 일종의 역설적인 ‘창조적 파귀’creative destruction가 작동하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 복제생물은 자연질서의 파괴를 의미하며, 인공적 생명을 창조하는 것을 근원적 금기에 대한 위반으로 취급하는 무수한 신화들을 상기시켜 준다. 골렘과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에서부터 최근 공상과학소설의 사이보그에 이르기까지, 인공적 생명형식은 자연법칙에 대한 끔찍한 위반으로 다루어져 왔다. [36p]
- 이미지는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이미지는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가? 이미지가 결여하고 있는 것, 그래서 우리에게 채워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욕망을 이미지에 투사하는가? 이미지가 다시 우리에게 되돌아 투사되면서 우리에게 요구를 하고 우리에게 특정한 방식으로 느끼고 행동하라고 유혹할 때, 그러한 욕망은 어떤 형태를 취하는가? [49p]
- 과학사가인 브뤼노 라투르는 『우리는 결코 현대인이었던 적이 없다』We Have Never Been Modern라는 뛰어난 저서를 통해 이러한 주장에 단호하게 반박한다. 그에 따르면 현대 기술은 우리 자신의 인공적 창조물들을 둘러싼 신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기는커녕, 새로운 ‘팩티쉬'factish의 세계질서를 생산했다. 즉, 한편으로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사실성factuaility의 질서와, 다른 한편으로 페티시즘과 토테미즘과 우상숭배의 질서를 새롭게 종합한, ’팩티쉬‘라는 새로운 세계질서를 생산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컴퓨터는 단지 계산을 수행하는 기계일 뿐이다. 그러나 (이와 똑같이 우리가 알고 있듯) 컴퓨터는 새롭고 신비로운 유기체이며, 기생충과 바이러스와 자신만의 사회적 네트워크를 모두 갖춘, 우리를 분통터지게 하는, 광포하고 복잡한 생명형식이다. 뉴미디어는 그 어느 때보다도 소통을 더욱 투명하고 즉각적이며 합리적인 것처럼 만들어 주었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를 새로운 이미지와 대상들, 종족의 정체성, 제의적 실천의 미로 속에 휘말리게 했다. 마셜 맥루한은 이러한 아이러니를 매우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기술들을 포용함으로써 자동제어장치로서의 기술들과 관계를 맺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대상들, 즉 우리 자신의 확장물들을 사용할 때 신이나 작은 종교인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인디언은 카누의, 카우보이는 말의, 중역은 시계의 서보 기구인 셈이다.” [50p]
- 즉 그림은 물질적이면서 동시에 가상적인 물체이며, 때로는 문자 그대로 때로는 비유적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고, “언어가 건널 수 없는 심연”을 넘어서 말없이 우리를 되돌아본다. 그림은 단지 표면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과 마주보고 있는 얼굴을 보여 준다. [55p]
- 아마도 가장 문제시되는 지점은, 이미지의 극악무도한 힘을 비판적으로 폭로하고 타파하는 것이 실상 몹시 손쉬운 일일 뿐만 아니라 별 효과도 없는 일이라는 점이다. 그림은 대중의 적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그림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것은 여전히 그대로 남는다. 시각 체제scopic regime는 시각문화나 정치문화에 어떤 가시적 영향을 남기지 않고서도 반복적으로 전복될 수 있다. [59~60p]
- 이미지는 분명히 무력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 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약할 수도 있다. 문제는 이미지의 힘과 이미지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우리의 평가를 더욱 가다듬고 복합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나는 ‘그림이 무엇을 하는가? 라는 질문에서 ’그림이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질문으로, 힘에서 욕망으로, 대립해야 할 지배 권력이라는 모델에서 질문을 받는 혹은 (더 좋게는) 말을 하도록 권유받는 하층민이라는 모델로 옮겨 가려는 것이다. 만일 이미지의 힘이 약자의 힘과 같다면, 이 때문에 이미지의 욕망은 그만큼 더 강력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는 자신의 실제 무력함을 보충하려는 욕망이다. 우리는 비평가로서 그림이 실제보다 더 강력하기를 원할 수도 있다. 그림에 반대하고, 그림을 폭로하거나 칭송하는 것을 통해 스스로에 일종의 권위의식을 부여하기 위해서 말이다. [60~61p]
- 인종차별주의의 시각적 폭력은 그 대상을 둘로 쪼개어, 지나치게 잘 보이는hypervisible 동시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찢어 놓는다. 파농의 표현에 따르면 ‘역겨움’의 대상인 동시에 ‘숭배’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역겨움과 숭배는 성경에서 우상숭배를 비난할 때 사용되는 용어들이다. 바로 우상이 숭배받기 때문에, 우상은 우상 공포증자에게 역겹게 느껴지는 것이다. 흑인과 마찬가지로 우상 또한 비실체이자 노예이기 때문에 경멸당하고 숭배받으며 매도당하며, 낯설고 초자연적 힘이기 때문에 공포의 대상이 된다. 만일 우상숭배가 시각문화에 알려진 이미지의 권력을 보여 주는 가장 극적인 형태라 한다면, 이러한 권력이란 실상 몹시도 양면적이고 모호한 종류의 힘이다. 시각성과 시각문화가 우상숭배와 인종차별주의의 사악한 눈과의 ‘연좌제’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 지식사학자인 마틴 제이가 ‘눈’자체를 서구 문화에서 반복적으로 ‘내리깔린’cast down(혹은 뽑혀 나간) 것으로 생각하고, 시각vision을 계속적으로 ‘훼손’denigration되어 온 것으로 설명하는 것도 놀랍지 않다. 그러므로 만일 그림이 사람이라면, 그는 유색인종이거나 유색인종의 표지가 있는 사람이다. 반면 완전히 희거나 완전히 검은 캔버스, 텅 비어 있고 아무런 표시도 없는 표면의 스캔들은 완전히 다른 얼굴을 보인다. [61~62p]
- 프로이트보다 훨씬 이전에 초서Geoffrey Chaucer는 「바스 부인의 이야기」에서 “여성이 가장 욕망하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둘러싼 서사를 보여 주었다. 이 물음은 귀족 부인을 강간한 죄가 있는 어느 기사에게 주어진 질문으로, 그는 사형 집행까지 1년의 유예기간 동안 올바른 대답을 찾으라는 명령을 받는다. 만일 틀린 대답을 가지고 돌아가면 즉각 사형에 처해질 것이다. 기사는 자신이 만난 여성들로부터 수많은 잘못된 대답을 듣는다. 여자는 돈을 원한다, 좋은 평판을 원한다, 사랑을 원한다, 아름다움을 원한다, 좋은 옷을 원한다, 잠자리의 쾌락을 원한다, 수많은 숭배자를 원한다 등의 대답들이 그것이다. 옳은 대답은 ‘지배력’maistrye으로 드러나는데, 이는 정당하게 혹은 합의하에 행사되는 ‘지배’mastery와, 우월한 힘이나 교활함으로 행사되는 권력power사이의 어디쯤을 의미하는 모호하고 복잡한 중세 영어단어다. 초서의 이야기가 전달하는 공식적 교훈은 교감에 근거하며 자유롭게 주어지는 지배력이 가장 좋다는 것이지만, 초서의 화자인 냉소적이고 세속적인 바스 부인은 여성이 권력을 원한다(즉, 결여하고 있다)는 것을, 따라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취하려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63p]
- 그림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 우리가 그림에 주지 못했던 것은, 그림의 존재론에 적합한 ‘시각성’visuality이라는 관념이다. 최근의 시각문화 담론들은 종종 쇄신과 현대화하는 수사로 인하여 산만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담론들은 텍스트에 기초한 학제와 영화 대중문화 연구 사이에서 마치 공 던지기 놀이를 하듯이 미술사를 쇄신하려 한다. 그들은 고급문화와 저급문화의 구분을 지우고자 하며, ‘미술사를 이미지의 역사로’바꾸려고 한다. 또한 그들은 미술사가 기대고 있다고 여겨지는 ‘유사성 혹은 미메시스’라는 소박한 개념들과 ‘결별’하고자 하며, 근절하기가 몹시 어려워 보이는 그림에 대한 미신적인 ‘자연스러운 태도’와도 결별하고자 한다. 그들은 이미지에 대한 ‘기호학’적 모델 혹은 ‘담론적’ 모델에 호소하면서, 이를 통해 이미지가 이데올로기와 지배 테크놀로지가 투사된 것이므로 눈 밝은 비평가의 저항에 직면할 것임을 밝힐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시각문화에 대한 이러한 생각이 틀렸다거나 쓸모가 없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러한 생각은 활기 없이 학제에 갇혀 있는 미술사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전부인가? 혹은(더 적절하게 말하자면) 그것이 그림이 원하는 전부인가? 시각문화의 적절한 개념에 대한 탐색은 시각적인 것의 사회적 장을, 그리고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는 일상적 과정을 강조하는 광범위한 변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복잡한 시각적 상호성의 장場은 사회적 현실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현실을 적극적으로 구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시각은 사회적 관계를 매개하는 데 있어서 언어만큼이나 중요하다. 또한 시각은 언어나 ‘기호’혹은 담론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림은 언어로 전환되지 않는, 언어와 동등한 권리를 갖기를 원한다. 그림은 ‘이미지의 역사’로 평준화되기를 원하지 않으며, ‘예술의 역사’로 격상되기도 원하지 않는다. 그림은 다수의 주젳위치와 정체성을 점유하고 있는 복잡한 개체로 간주되기를 원한다. [76~77p]
- 헬레나 커티스의 생물학 교과서에는 살아 있는 유기체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준들이 나온다. 살아 있는 것은 고도로 조직되어 있고, 항상성을 가지고 있으며(동일한 채로 있으며), 성장하고 발달하고, 환경에 순응하며, 환경으로부터 에너지를 얻고, 에너지를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바꾸며, 자극에 반응하고, 스스로를 재생산한다. 이 목록에서 첫 번째로 놀라운 것은 그것의 내적 모슨과 불분명함이다. 분명 ‘항상성’은 ‘성장과 발달’과는 양립할 수 없다. ‘고도로 조직된’은 유기체뿐만 아니라 자동차나 관료제의 특징이다. 환경으로부터 에너지를 얻어서 다른 형태로 바꾸는 것은 유기체뿐만 아니라 기계의 일반적 특징이기도 하다. ‘자극에 반응’하는 것은 너무 막연해서, 사진 감광제나 풍향계, 심지어 당구공에까지 적용될 수 있다. 그리고 엄밀하게 말해 유기체가 새끼를 낳는 것은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유기체는 통상 자신과 같은 종種의 새로운 개체를 생산한다. 스스로의 동일한 재생산에 가장 가까운 것은 복제생물뿐이다. 철학자 마이클 톰슨이 보여 주었듯이, ‘생명’에 대한 ‘진정한 정의’란 없으며, 살아 있는 물질과 살아 있지 않은 물질을 구별하게 해주는 확실한 경험적 기준이라는 것도 없다(DNA라는 것도 포함해서 말이다. 톰슨은 이것이 우리 시대의 페티시 개념임을 올바르게 보여 준다). 생명이란 오히려 헤겔이 불렀던 ‘논리 범주’라 할 수 있다. 즉 변증법적 추론과 이해 과정 전체를 확립하는 근본 개념 중 하나인 것이다. 실로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최고의 정의는 다음과 같이 솔직한 변증법적인 진술, 즉 ‘살아 있는 것은 죽을 수 있는 어떤 것’이라는 진술이다.
그러나 질문은 남는다. 그림은 어떻게 생명형식을 닮는가? 그림은 태어나는가? 죽을 수 있는가? 죽임을 당할 수 있는가? 커티스의 기준들 중 일부는 어떤 방식으로도 그림과 맞지 않으므로 수정이 필요하다. ‘성장과 발달’은 하나의 이미지가 구체적인 그림이나 예술작품으로 실현되는 과정을 특징짓는 말일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완성되면 작품은 보통 항상성을 가진다(작품이 노화되고 수용되는 역사가 생명형식의 발다로가 같은 일종의 ‘발달’을 구성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발터 벤야민은 예술자굼에 ‘아우라’―말 그래도 ‘숨결’―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역사와 전통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을 기억하자.) 환경으로부터 에너지를 얻는다는 점에 대해서도 유사하게 생각할 수 있다. 환경으로부터 나오고 수용의 행위 속에 변형되어 되돌아가는, 보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정신적 에너지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자극에 대한 반응은 특정한 ‘인터랙티드’ 예술작품에서 말 그대로 구현되고 있으며, 전통적 작품들에서는 비유적으로 구현되어 있다. ‘스스로를 재생산’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슬라보예 지젝의 『환상의 전염병』이라는 제목에서 암시되었듯이 이미지의 증식을 일종의 전염병이라는 생물학적 비유로 논의할 때 가장 잘 암시된다. 환상이 어떻게 해서 전염되는 질병, 통제할 수 없는 바이러스나 박테리아와 같은 것이 되는가? 이를 단지 ‘단순히 비유적인’ 생명형식이나 생기라고 치부하는 것은 지금 쟁점이 되고 있는 문제, 즉 이미지의 비유적 생명까지 명백하게 포함하는, 이미지와 그림과 비유의 생명이라는 문제를 회피하는 일이다. 살아 있는 이미지라는 구상의 통제 불가능성은 그 자체로 이 문제의 한 사례가 된다. 즉, 왜 이러한 은유는 자신만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인가? 이를 한때 살아 있었고 다시 살아 있을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죽은’ 은유라고 부르는 것이 왜 그토록 일상적인가?
그러나 그림을 살아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의 의미를 서술하기 위해 생물학 교과서를 참조하기보다는, 그림을 마치 살아 있는 것인 양 이야기하는 우리의 일상적 방식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살아 있는 듯한’ 이미지라는 찬사는 물론 이미지 만들기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며, 이때 이미지의 생기 있음은 재현으로서의 정확성과는 완전히 무관할 수 있다. 그림 속 얼굴의 ‘돌아보는’ 듯한 언캐니한 능력, 그리고 두 눈이 우리를 따라다니는 듯한 ‘편재하는 시선’omnivoyance의 기술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디지털 가상 이미지는 이제 관람자의 움직임을 따라 얼굴을 돌리거나 몸을 돌릴 수 있다. 실로 정지된 이미지와 움직이는 이미지 사이의 구분(혹은 이 문제에 관련된 것으로는, 무성 이미지와 유성 이미지 사이의 구분)은 일상적으로 생명의 문제로 구체화되어 왔다. 왜 움직이는 이미지는 항상 ‘애니메이션’이나 ‘생방송’live action과 같은 생기론적 은유로 특정지어지는가? 이미지가 움직이고 행동이 묘사된다고 말하는 것은 왜 불충분한가? 우리는 익숙함 때문에 이러한 비유들의 기이한 생명에 주목하지 못한다. 익숙함은 이러한 은유를 죽은 은유로 만드는 동시에 그 생명력을 단언한다. 이미지를 만든다는 것은 단 한 번의 몸짓으로 죽이는 동시에 부활시키는 것이다. [84~86p]
- ‘살아 있는’ 유기체는 두 개의 논리적 대립항을 가진다. 한때 살아 있었던 ‘죽은’ 사물(시체, 미라, 화석)과, 한 번도 살아 있던 적이 없는 생명 없는 대상(비활성의, 비유기적인 대상)을 말한다. 그렇다면 세 번째 대립항은 부정의 부정, 즉 생명 없는 물질에 생명이 귀환(혹은 출현)하거나, 생명이 이미지 속에서 괴사하는 것(예를 들어 살아 있는 사람이 회화나 조각의 생명 없는 형상을 흉내 내는 활인화活人畫에서처럼)이 된다. 이러한 ‘죽지 않은’ 형상은 일상적 언어나 대중적 서사(특히 죽어야 하거나 살아 있어서는 안 되는 무언가가 갑자기 살아 있는 것으로 느껴지는 공포소설)에서 이미지의 언캐니함이 활성화되는 명백한 장소다. [87~88p]
- 이미지 마법의 세계에서 이미지의 생명은 모델의 죽음에 기초한다. 모델의 이미지를 카메라나 초상화 속에 붙들어 버림으로써 ‘영혼을 훔친다’는 속설도 이와 관련된다. [103p]
- 이미지는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욕망을 ‘표현’하며, 무엇보다도 어떻게 욕망해야 할지를 가르쳐 준다. [104p]
- 그림이 원하는 것을 욕망이나 충동의 문제로 해석하는 것은 어떤 차이를 낳는가? 이 문제틀을 구성하는 한 가지 방법은, 정지된 이미지와 움직이는 이미지 사이의 차이, 하나의 이미지와 연속된 이미지 사이의 차이, 혹은 (앞으로 보겠지만) 그림(구체적으로 육화된embodied 대상 혹은 배치)과 이미지(하나의 그림에서 다른 그림으로, 그리고 매체를 가로질러 순환하고 있는 육체 없는disembodied 모테프 혹은 유령) 사이의 차이를 고려해 보는 것이다. 그림은 이미지를 느린 시간과 침묵 속에서 붙잡아 정지시켜 미라로 만들려 한다. 그러나 그림이 그 욕망을 일단 성취하면, 그것은 움직이고 말하고 해체하고 스스로를 반복하려 한다. 따라서 그림은 두 ‘결핍’want, 즉 충동(반복, 증식, 이미지의 ‘전염병’)과 욕망(생명형식의 고착화fixation, 사물화, 괴사mortification)의 교차로에 있다. 우리는 이를 코린트의 숙녀 장면에서 명백하게 볼 수 있다(그림 25). 윤곽 그리기, (이 그림을 물질화해서 삼차원에 고정시킬) 숙녀의 아버지인 도공, 청년 자신, 그리고 청년의 그림자가 이미지 탄생의 장면에 모두 공존하고 있다. 그림의 충동(스스로를 이미지로, 단순한 그림자나 흔적으로 복제하려는 충동)은 여기에서 하나의 정지된 이미지 속에 포착되어 있다. 이 장면은 그림이 원하는 것에 대한 메타그림이자, 어떻게 그림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도록 사람들이 도와주는지에 대한 메타그림이다. 아마도 이 장면은 (잠시 동안이라도) 원하는 것을 ‘소유하는 동시에 충족시키는’ 가능성을 보여 주는, 들뢰즈식의 배치일 것이다. 이 경우에 모델이 남성이고 화가는 여성이며 조각가는 그 여성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성찰은 다른 이의 몫으로 넘기려 한다. 욕망에서 회화가 탄생함을 보여 주는 이 장면은 남성 예술가와 여성화된 모델-이미지라는 진부한 장면과 분명 일치되지 않는다. [109~110p]
- 1. 욕망 대 충동. 그림이 원하는 것을 욕망이나 충동의 문제로 해석하는 것은 어떤 차이를 낳는가? 이 문제틀을 구성하는 한 가지 방법은, 정지된 이미지와 움직이는 이미지 사이의 차이, 하나의 이미지와 연속된 이미지 사이의 차이, 혹은 (앞으로 보겠지만) 그림(구체적으로 육화된embodied 대상 혹은 배치)과 이미지(하나의 그림에서 다른 그림으로, 그리고 매체를 가로질러 순환하고 있는 육체 없는disembodied 모티프 혹은 유령) 사이의 차이를 고려해 보는 것이다. 그림은 이미지를 느린 시간과 침묵 속에서 붙잡아 정지 시켜 미라로 만들려 한다. 그러나 그림이 그 욕망을 일단 성취하면, 그것은 움직이고 말하고 해체하고 스스로를 반복하려 한다. 따라서 그림은 두 ‘결핍’want, 즉 충동(반복, 증식, 이미지의 ‘전염병’)과 욕망(생명형식의 고착화fixation, 사물화, 괴사mortification)의 교차로에 있다. 우리는 이를 코린트의 숙녀 장면에서 명백하게 볼 수 있다(그림 25). 윤곽 그리기, (이 그림을 물질화해서 삼차원에 고정시킬) 숙녀의 아버지인 도공, 청년 자신, 그리고 청년의 그림자가 이미지 탄생의 장면에 모두 공존하고 있다. 그림의 충동(스스로를 이미지로, 단순한 그림자나 흔적으로 복제하려는 충동)은 여기에서 하나의 정지된 이미지 속에 포착되어 있다. 이 장면은 그림이 원하는 것에 대한 메타그림이자, 어떻게 그림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도록 사람들이 도와주는지에 대한 메타그림이다. 아마도 이 장면은 (잠시 동안이라도) 원하는 것을 ‘소유하는 동시에 충족시키는’ 가능성을 보여 주는, 들뢰즈식의 배치일 것이다. 이 경우에 모델이 남성이고 화가는 여성이며 조각가는 그 여성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성찰은 다른 이의 몫으로 넘기려 한다. 욕망에서 회화가 탄생함을 보여 주는 이 장면은 남성 예술가와 여성화된 모델- 이미지라는 진부한 장면과 분명 일치되지 않는다.
2. 시각적 충동scopic drive. 그림이 원하는 것에 대한 논의는 시각 장visual field에서의 욕망과 공격성이라는 문제, 그리고 실로 근본적인 사회적 실천으로서 시각적 인식cognition과 재인식recognition의 구조 자체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지 않고서는 진전될 수 없다. 따라서 시각적 충동과 관련하여 이미지의 역할이 충분히 탐구되어야 하는데, 이때 이미지는 단순한 충동의 징후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시각적 과정 자체의 모델이자 구성적 도식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그림이 우리에게 어떻게 욕망할지를 가르쳐 준다고 한다면, 그림은 또한 우리에게 어떻게 볼지를, 즉 무엇을 볼지, 본 것을 어떻게 배치하고 의미를 부여할지를 가르친다. 이것 외에도, 충동은 몽타주로만 재현될 수 있다는 라캉의 주장이 옳다면, 보는 것 자체는 오직 다양한 종류의 그림 속에서만 보여질 수 있고 만져질 수 있게 된다. 시각적인 것의 응축으로서의 그림이라는 문제는 또한, 그림을 순수하게 시각적인 것으로 보는 관념의 한계에 대해서, 그리고 시각매체 자체의 개념에 대해서 연구하는 데에 불가피한 부분이 된다.
3. 욕구/욕망/욕구. 그림은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need? 물질적 보조물과 물질적 매체(안료, 화소), 그리고 그림이 보여질 수 있는 장소를 필요로 한다. 그림은 무엇을 요구하는가demand? 그림은 보여질 것을, 찬사를 받을 것을, 사랑받을 것을, 전시될 것을 요구한다. 그림은 무엇을 욕망하는가desire? 욕망은 요구(보려는 소망 혹은 “봐서는 안 될지어다”라는 상징적 명령)와 욕구 사이의 간극에서 출현하므로, 그림은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림은 필요로 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있고, 자신의 요구도 모두 실현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림들 대부분은 무언가를 원한다. 누군가가 자신을 주의 깊게 보아 줄 것을 기다리며 수많은 다른 작품들과 함께 화랑에 전시되어 있는 어느 평범한 초상화에 대해 생각해 보라. 평범한 초상화(즉 잊혀진 화가가 그린, 잊혀진 인물에 대한 관습적이고 공식적인 이미지)는 재인식을 갈망하는 가장 버림받은 형상이다. 역사가나 전문가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나 캔버스에 포착된 것은 한때 살아 있었던 개인의 그림자와 같은 유사물이다. 이 개인은 아마도 스스로를 상당항 자긍심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화가에게 초상화를 주문할 수 있는 그의 능력으로 입증된다. 이 그림은 욕마으이 미로 속에 사로잡혀 있다. 주목받고 찬탄받고 (말장난을 좀 하자면) “액면 그대로/얼굴 그대로”face value 받아들여지고자 하는 그림의 ‘요구’는, 존재하고자 하는 단순한 ‘욕구’(이 또한 다소 불확실한데, 이 그림이 사라지더라도 아무도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친척들이 모두 죽고 아무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가족사진 또한 비슷한 운명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브라우닝Robert Brwoning의 「나의 전처 공작부인」My Last Dechess의 경우, 죽은 공작부인의 초상화는 욕망을 넘어서 있다. 즉,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결여되어 있지 않다. 그녀는 ‘시선’을 자유롭게 던지는 능력 때문에 그녀를 죽인 공작을 여전히 괴롭히면서, 공작이 초상화를 숨기기 위해 쳐 놓은 커튼 뒤에서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미소를 짓고 있다. 이와 더 반대되는 경우는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라 할 수 있다. 이 초상의 표면에는 도리언이 스스로 굴복했던 모든 억제할 수 없는 충동들의 훼손된 효과가 기입되어 있다.
4. 상징계/상상계/실재. 물론 그림에는 이 세가지가 수렴되어 있다. 언어 없는 그림은 없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재현할 실제 사물, 그림을 출현하게 하는 실제 대상이 없는 그림도 없다. 이는 확실히 단어/이미지 기표/기의의 엠블렘을 말했던 소쉬르적 기호의 교훈이다. 여기에서 단어와 이미지 기표와 기의 사이의 사선(/)은 실재, 지표, 존재기호existential sign의 침입을 나타낸다. 상징symbol, 도상icon, 지표index라는 퍼스Charles Peirce의 세 가지 기호라는 라캉의 세 가지 구분과 엄밀하게 맞아 떨어지며, 구조적인 기호 레지스터register 그 이상이다. 퍼스에게 ‘상짱은 '법칙기호'legisign, 즉 관습, 법칙, 입법legislation의 기호다. ‘지표’는 그것이 의미하는 것과 ‘실제적'real 혹은 존재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 즉 그것은 외상의 상흔 혹은 흔적이며, 지시대상에 연결되어 있고 지시대상과 함께 움직이는 ’연동소'shifter로서의 부분대상 혹은 그림자다. 마지막으로 ‘도상’은 현상학적 이해의 ‘처음됨’firstness이자, 현존과 부재, 실체와 그림자, (지각과 이미지 만들기를 가능하게 하는) 유사성과 차이의 근본적 유희다. 그림과 시각 이미지의 고유한 영역인 ‘상상계’는 전통적으로 프로이트의 이론에서는 고착fixation과 묶기binding에 관련되었다(따라서 ‘거울단계’는 육체를 안정되어 있고 통일되어 있는 ‘잘못된 이미지’로 제시한다). 그러나 상상계는 그 ‘고유한'proper 경계를 넘어서 상징계의 영역으로 (글쓰기의 문체 속에서, 그리고 언어적 이미지 혹은 은유, 구상 혹은 유비 속에서 비유적으로) 침투한다. 따라서 상상계는 양쪽, 즉 충동(반복, 재생산, 이동성mobility, 풀기unbinding)과 욕망(고착, 안정화, 묶기)의 교차로로서, 일차적 과정과 이차적 과정 모두에 결합되어 있다. 상상계의 변증법을 블레이크가 포착하는 방식을 상기해 보라. 그는 자신이 구리에 새긴 형상적graphic 선을 ’경계 짓는/경계를 튀어나가는 선‘bounding line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경계 안으로 결합한다는 의미와 경계를 뛰어넘는 모습을 의미하는 단어를 결합한 말장난이다. 상상계는 ’경계 짓는/경계를 튀어나가는 선‘에 의해 구체화되며, 이 선은 블레이크의 표현대로 (’종‘의 표지로서의 이미지와 같이) ’제한적이고 한정된 정체성‘을 만들어 내면서 하나의 사물을 다른 것과 구분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상상계는 또한 그 선을 뛰어넘게 하고 생명력으로 약동하게 하면서, 정지된 이미지에서조차도 포착되는 운동과 생기를 암시하고, 잠재적 이미지를 실제 그림(즉 배치)으로 바꾸는 물질적 과잉을 암시한다.
5. 사랑, 욕망, 우정, 주이상스. 리비도적 대상과 관계하는 이 네 가지 방식은 이미지 혹은 그림에 관련될 때 어떻게 되는가? 이 관계들과, 성화聖畵와 그에 관계된 실천들의 전형적 배열 사이에는 정확한 대응관계가 출현한다. 즉, 사랑은 우상에 속하고, 욕망은 페티시에, 우정은 토템에, 주이상스는 우상파괴주의, 즉 우상인 이미지를 파괴하거나 녹이는 것에 속한다. 그림이 사랑을 원할 때, 혹은 (더 오만하게도) 사랑을 요구할 때, 그러나 사랑을 필요로 하지도 않고 돌려 주지도 않지만 침묵 속에서 어렴풋이 드러낼 때, 그 그림은 우상이 된다. 그것은 자신을 섬세하게 두드려 조사해 주기를 원한다. 그림이 파괴되거나 손상되거나 해체되기를 요청할 때, 그것은 불쾌하고 폭력적이며 희생적인 이미지의 영역이자 우상파괴주의의 대상의 영역에 들어선다. 이는 죽음충동의 그림 대응물이며, 오르가즘을 연상시키는 자아의 황홀한 파괴다. 그림이 고착과 반복강박의 대상일 때, 그림이 발화된 요구demand와 있는 그대로의 욕구need 사이의 간극일 때, 그림이 결여와 충만의 포르트-다 게임으로 영원히 주체를 희롱할 때, 충동과 욕망을 횡단하여 주체를 희롱할 때, 그 그림은 페티시가 된다(코린트의 숙녀는 분명 미래의 페티시즘에 사로잡혀 있다. 즉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을 미리 두려워하면서 보상적 환상을 만들어 내는―떠나기도 전에 포르트-다 게임을 하는―형태의 불안인 것이다. 9·11에 대한 반응은 대부분, 깃발을 흔들고 인종적 프로파일링을 하고 희생자들을 끝없이 영웅시하는 고전적 페티시즘의 양식이었다. 이 모든 반응은 우상숭배에 가까운 호전적 독단주의의 지휘하에 나왔다. 마치 우리가 감히 국가적 페티시를 무시했다거나, 혹은(별 다를 바 없는 주장이지만) 그 페티시에 숭배하기를 강요받았다거나, 우리의 잘못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식이다.
마지막으로, 우정(나는 친족 관계도 여기에 포함된다고 생각한다)도 있다. 그리고 그에 적절한 이미지 유형은 토템이다. 토테미즘은 씨족, 부족, 가족을 의미하는 이미지의 실천이며, 토템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그 사람은 내 친척이다”라는 의미다. 토테미즘은 르네 지라르가 ‘모방적 욕망’이라고 불렀던 영역으로 향한다. ‘모방적 욕망’이란 어떤 것을 다른 사람들이 원하기 때문에 자신도 원하게 되는 경향을 가리킨다. 이는 또한 정신분석가 도널드 위니콧이 ‘과도기 대상’transitional object이라고 불렀던 것을 환기시킨다. 이는 대체로 장난감이나 학습기계로서, 사랑이자 학대의 대상, 애정이자 무시의 대상이다.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갈망의 대상인 페티시즘의 대상과는 반대로, 과도기 대상에 있어서는 (그 이름이 암시하듯) ‘놓아 버리기’letting go가 초점이 된다. 위니코싱 말하듯, 그 대상은 버려지다 해도 “잊히지도 않고 애도되지도 않는다.” 이 범주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많이 논의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도상학에서뿐만 아니라 정신분석학의 이론적 담론과 인류학에서도 이 개념은 부당하게 경시되어 왔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적절하게 다루기 위해서는 ‘이미지의 가캄라는 문제를 검토해야 한다. 이미지의 가치란 우리가 이미지를 평가하는 과정인 동시에, 이미지에 내재하는 가치이자 이미지가 세상에 들여오는 가치다. 이미지의 가치는 우리보다 앞서가면서 우리에게 어떻게 욕망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109~115p]
- 이미지는 카메라나 영화제작 같은 경우에서는 ‘전부’일지 모르지만, (이 광고가 암시하듯이) 환상이 유발하는 허위적 욕망이 아닌, 갈증과 같은 실제적이고 육체적인 욕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 광고는 문화산업에 의해 조장되는 ‘허위적 욕구’에 대한 마르쿠제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저작들을 읽었을지도 모르는 교양 있는 시청자들에게 말을 걸고 있다. 더 일반적이고 접근 가능한 관점에서 보자면, 이 광고에 시청자의 교양과 회의주의에 아첨하면서 스스로를 ‘광고에 반대하는 광고’ 자리매김하고 있다. 광고의 일반적 경향이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문화적 연상으로부터 (훈련 매뉴얼의 전문용어를 쓰자면) “가치 이전value transfer의 과정을 통해……상품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창출하는 것”이라면, 이 광고는 부정적 가치 이전이라는 반대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 이 광고는 이미지 제작자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창문을 제공하면서, 몹시 역겨운 상품으로 가치를 이전시키려는 그들의 냉소적인 노력을 조롱한다. 이러한 역겨움은 ‘제4의 벽’(영화관/텔레비전 스크린이자 회의실 창문)으로, 마치 시청자 얼굴에 대고 던지듯 달팽이를 던지는 행동에서 강하게 환기된다.
이 광고의 직설적 교훈에는 단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 혹은 문제점이 아니라 이 광고의 아이러니를 부각시키는 재치 있는 화룡점정일 수도 있다. 이것도 결국은 광고일 뿐이라는 것, 아이러니하고 부정적인 ‘가치 이전’ 전략을 사용하므로 광고의 세계 바깥에 있는 광고가 아니라는 뻔한 사실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또한 욕망의 진정한 대상, ‘진짜’, 페티시가 된 상품은 그 자체로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시청자의 얼굴에 던져진 달팽이의 “철퍽”하는 소리만큼 생생하게 표현된 이미지일 뿐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광고를 수업에서 보여 줄 때마다 지적된 사실에 대한 것이며, 의도적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에 대한 것, 즉 색깔의 사용에 대한 것이다. 달팽이의 끈적끈적한 초록색 점액은 마지막에 나오는 스프라이트의 초록색 병과 동일한 색깔임이 드러난다. 이것은 내부적인 농담일까? 광고 대행사가 영리하게도 제2의 아이러니를 끼워 넣은 것일까? 부정적인 역겨운 가치를 상품과 대조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품으로 이전시킴으로써 자신들에게 주어진 과제를 미묘하게 깎아내린 것일까? 아니면 이는 광고에 의해 활성화된, 이미지속의 일종의 잉여가치인가? 그 의미를 새로운 영역(욕망과 역겨움의 이미지사이, 궁극적 가치와 더러운 이득 사이를 횡당하면서 돈 자체가 남기는 초록색의 끈적끈적한 자취)으로 들여오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일까? [120~121p]
- 새로운 예술작품을 평가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평론가 레오 스타인버그 Leo Steinberg의 현명한 언급으로 나 자신을 달래려 한다.
새로운 예술의 도발에 대처하는 첫 번째 방식은 흔들리지 않는 자세로 확고한 기준을 지키는 것이다.……두번째 방식은 좀더 유연하다. 새로운 징후에 관심이 있는 비평가는 자신의 기준과 취향을 반대로 생각한다. 자신의 기준과 취향은 어제의 예술에 따라 형성되었으므로, 오늘의 예술을 평가하는 데 알맞지 않다고 전제한다.……그는 작품의 의도가 초점이 되고 자신의 반응이 말 그대로 작품에 공-감共-感할 때까지 판단을 유보한다. 굳이 그것에 찬성할 필요는 없으며, 그것이 마치 자신에게 둘도 없는 것인 양 그것과 함께 느낀다. [124p]
- 그렇다 해도 체계적 비평과 특히 도상학을 가치판단에 대한 엄격한 유보와 연결시킬 것을 고집하는 프라이의 주장은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미지 비판을 가치 평가의 대상이 아니라 가치의 원천으로 만드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 때문이라도 말이다. 프라이는 가치 평가적 비평을 이데올로기, 데코룸의 강요, 취향의 위계질서와 동일시하면서, 이를 “사회 의 계급구조에 의해 암시된”(p.22) 것이라고 보는 놀랄 만한 전환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진정한 비평인 프라이의 ‘도상학’은 “예술을 계급 없는 이상사회의 견지에서 보아야 한다”(p.22)라고 한다. 이는 모든 이미지가 동등하다거나 똑같이 가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비평의 주안점이 이미지에 서열을 매기거나 우상파괴적 실천에 몰두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서열과 위계질서(그리고 이미지를 파괴하는 것에 대한 일화들)는 예술의 영역들(모든 매체에서의 이미지, 텍스트, 재현)을 분화시킨 구조와 역사적 사건들 가운데 자리 잡아야 한다. [126p]
- 어떤 공룡 이미지는 깊은 인상을 주기 때문에 가치 있다. 다른 이미지는 깜찍하거나 무시무시하기 때문에 가치 있다. 또 다른 이미지는 정확하거나 우스꽝스럽기 때문에, 혹은 사고를 자극하기 때문에 가치 있다. 그토록 상이한 많은 장소들(텔레비전, 장난감 가게, 소설, 만화, 광고)에서 익숙하게 등장하는 이미지는 그만큼 어떤 내재적 가치를 소유하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그러한가?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은 그 이미지인가, 아니면 이미지가 등장하는 구체적 사물인가? 우리는 화랑에서 그림을 사지 그 안에 있는 이미지를 사지는 않는다. 우리는 작품의 이미지를 (복제를 통해) 빌리거나 차용하거나 도용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복제가 예술작품의 값을 떨어뜨리고 가치와 ‘아우라’를 서서히 없앤다는 발터 벤야민의 주장을 알고 있다. 이미지는 가치가 있지만, 그 가치는 특정 장소에서 그 이미지를 ‘육화한’그림이나 조각상이나 기념물의 가치보다 더 애매하다. 이미지는 파괴될 수 없다. 구약의 금송아지는 가루로 빻아질 수 있지만, 금송아지 이미지는 살아 있다. 예술작품에서, 텍스트에서, 서사와 기억 속에서 말이다. [127p]
- 이미지는 그림에서 떨어져 나와 다른 매체로 전이될 수 있고, 언어적 묘사의 대상으로 번역될 수 있으며, 저작권 법으로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이미지는 복사되었을 때 그림의 물질성을 빠져나가는 ‘지적 재산’이다. 그림은 이미지에 물질적 보조물을 더한 것이다. 즉 빗물질적 이미지가 물질적 매체에서 나타난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건축의 이미지, 조각의 이미지, 영화 이미지, 텍스트의 이미지, 심지어 정신적 이미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도, 그것들 속에 혹은 위에 있는 이미지가 전부가 아님을 알고 있는 것이다. [129p]
- 이미지와 그림에 대한 도상학자의 과제는 종과 표본에 대한 박물학자의 과제와 같다. (‘종’species이라는 단어 자체가 ‘거울’specular 이미지의 형상에서 나왔다는 것도 이러한 유비의 동기가 된다. 이는 이미지와 종 무도에서 유사성, 식별 가능성, 그리고 재생산 계통reproductive lineage의 기준을 세워야 한다는 반복되는 요구에서도 드러난다.) 우리는 아름답거나 흥미롭거나 새로운 표본을 식별할 수 있지만, 우리의 주된 과제는 가치판단에 착수하는 것이 아니라, 왜 사물들이 그 모습대로 존재하는 것인지, 왜 종들이 세상에 출현한 것인지, 종들은 무엇을 하고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떻게 시간에 따라 변해 왔는지를 설명하려 하는 것이다. 좋은 표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말이 되지만, 종에 대해 가치판단을 내린다는 것은 몹시 이상한 일이 될 것이다. 종이란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그것은 단지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가치의 문제는 개별적 표본이나 표본 집합을 다룰 때에만 제기될 뿐이다.
아니면 이 결론은 너무 성급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실제로 이미지를 평가하고 있으며, 아니면 최소한 가치 평가의 한 형태처럼 보이는 문화적 선별의 과정에 참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떤 생물학적 종은 살아남고 번성하여 그 수가 증식된다. 다른 종은 주변적이 되며 심지어 멸종하기도 한다. 이러한 유비의 일부를 이미지와 그림에 적용할 수 있을까? 이미지의 기원과 진화·변종·멸종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 새로운 이미지는 어떻게 세상에 처음 출현하는가? 이미지가 상징 형식들의 문화생태학 안에서 성공하거나 실패하게 되는 요인은 무엇인가? 이미지 혹은 종의 생명과정 배후에 있는 숨겨진 법칙이 무엇이든, 분명해 보이는 것은 어떤 것은(공룡이나 바퀴벌레처럼) 오랫동안 살아남는다는 것이며 다른 것은(돌연변이나 기형처럼) 개체 표본을 넘어서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는 (우리 자신이 속해 있는 종과 같은) 여전히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종들이 있다. [130~131p]
- 그렇다면, 이미지의 가치를 진화적인 혹은 최소한 공진화적인coevolutionary 실체로 이야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즉, 이미지를 숙주 유기체(우리 자신)에 의존하면서 인간의 참여 없이는 재생산할 수 없는(바이러스 같은) 준準생명형식이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틀은 우리가 특수한 표본, 즉 예술작품·기념물·건물 등에 부여하는 가치평가와 대비되는 것으로서 이미지에 부여하는 가치의 종류를 구별할 수 이게 해줄 것이다. 그 차이는 생존 가능성, 재생산 가능성, 진화적 번성 가능성에의 판단과, 하나의 개체를 ‘같은 종류의’견본으로 판단하는 것 사이에 있다. 그림이나 표본에 대해서 우리는 ‘이것은 X의 좋은 견본인가?라고 물을 수 있다. 이미지에 대해서는 ’X는 어디에나 가는가? X는 번성하고 스스로를 재생산하여 곳곳에 순환하는가?‘라고 묻는다. 광고주들은 단순한 질문 하나로 광고 이미지를 평가한다. 그것에 ’발이 달려 있는가?‘ 하고 묻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이미지로 보이는가, 혹은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듯이 예상하지 못한 연상으로 우리를 이끌면서 ’나아갈‘ 수 있는 것으로 보이는가 하는 질문이다. 유대인들이 자신을 ’앞장설‘ 신의 이미지를 요구했을 때, 그들은 이 이미지에 “발이 달려 있”어서 잃어버린 지도자인 인간 모세를 대체하여 자신들을 어디든지 이끌어 주기를 바랐다. [131~132p]
- 만일 이미지가 종과 같다거나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바이러스의 명령에 따르는 공진화적 생명형식과 같다고 한다면, 예술가나 이미지 제작자는 단순히 일군의 기생충을 달고 다니는 숙주에 불과하게 된다. 이 기생충들은 흥겹게 스스로를 재생산하며, 우리가 ‘예술작품’이라고 부르는 주목할 만한 표본들 속에서 가끔씩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135p]
- 그렇다면 이미지를 살아 있는 것으로 보는 나의 그림이 최소한 사고실험으로서 어느 저도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해 보자. 가치의 문제는 어떻게 되는가? 이에 대한 명백한 대답은 가치의 문제가 생명력의 문제로 바뀐다는 것이며, 생명력이라는 문제는 이미지/그림의 구분 양쪽에 대한 가치판단에 있어 하나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림에 관해서 보자면, 생명력의 문제는 대체로 생기 넘침 혹은 생생함 등의 말로 제기된다. 이는 어떤 그림이 그 모델을 ‘생생하게 포착한다’고 할 때나, 자신의 형식적 특징들 속에 활기 있고 살아 있으며 생생한 외관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의 의미다. 이미지에 관해 보자면, 생명력의 문제는 재생산 능력, 곧 다산성과 더 관계있다. 우리는 어떤 그림이 좋은 표본인지 나쁜 표본인지, 살아 있는 표본인지 죽은 표본인지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이미지에 관해 제기되는 질문은, 그 이미지가 개체수를 증식하거나 새롭고도 놀라운 형태로 진화하면서 계속 ‘나아갗 스스로를 재생산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지의 삶은 종종 재현적 실천의 부류 혹은 장르(초상화, 풍경화, 정물화, 종교화)와 연결되거나, 매체나 문화 형식과 같은 더 큰 부류와 연관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오늘 이후로 회화는 죽었다”와 같은 말을 하거나, 시나 소설의 죽음을 애도하거나, 영화나 텔레비전, 컴퓨터 같은 새로운 매체의 ‘탄생’을 축하하는 뿌리 깊은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 빠르게 늘어나는 부류의 매체는 아마도 ‘죽은 매체’(수동타자기, 폴라로이드 카메라, 등사기, 8트랙 테이프 플레이어)일 것이며, 이것은 지속적 혁신의 시대에 기하급수적으로 증식하고 있다.
이미지의 생명력과 그림의 가치는 독립적 변수로 보이기도 한다. 수 세기 동안 수백만의 모사물 속에 살아남은 이미지(예를 들어 금송아지)는 완전히 활기 없고 가치도 없는 그림, 즉 실패작에서도 등장할 수 있다. 죽거나 빈약한 이미지(기형, 돌연변이, 혹은 괴물)는 잠시 사라질 수는 있겠지만 늘 부활할 가능성이 있다. 특정 부류의 그림(그 중에서도 특히 ‘죽은 자연’nature mort이라 불렸던 정물화)는 죽은 동물, 시든 꽃, 썩어 가는 과일과 야채를 생생하게 재현하는 과제에 전념한다. 죽은 그림은 다락방이나 박물관 창고에 처박히거나 쓰레기더미에 버려져서 영원히 사라진다. 반면 화석은 죽거나 멸종한 표본의 (도상적이면서도 지표적인) 자연 이미지로, 물질적 분해를 기적적으로 견뎌 내어 그 흔적을 남김으로써 인간의 상상력 속에서, 즉 그림이나 모델, 언어적 묘사, 애니메이션 영화에서 다시 되살아날 수 있다. [135~136p]
- 그렇다면 이미지를 생명형식으로 보는 메타그림은 그 자체로, 당혹스러울 정도로 무수한 이차적 이미지들을 증식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는 생명과학의 제1의 자연만큼이나 복잡한 제2의 자연이다. 이미지는 창조되거나 파괴될 수 있는가? ‘원본 이미지’original image라는 개념은 창조신화의 문화적 판본이거나, 공통 가계common ancestry라는 생물학 원칙의 문화적 판본인가? 모든 생명형식이 그러하듯이 모든 이미지에도 공통의 조상이 있는가? 이미지는 멸종할 수 있는가? 이미지는 어떻게 진화하는가? 이미지가 출현하게 되는 장르나 형식, 매체는 표본들이 번식하고 재생산되는 서식지나 자연환경, 생태계로 이해될 수 있을까/ 마치 인간 육체가 수백만 미생물의 숙주가 되는 동시에 그 자체도 더 큰 사회적이고 자연적인 환경 속에 거주하는 것처럼, 어떤 자연환경이나 생태계 자체도 이미지가 되거나 도상이 되어, 이미지는 동심원 구조로 서로 포개져 있고, 하나의 종이 다른 종을 위한 서식지를 형성하는 일이 가능한가? 예를 들어, 풍경화라는 이름으로 통하는 실체들의 위계질서를 생각해 보자. 첫째, 표본이 있다(말하자면,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의 구체적 작품 한 점). 둘째, 장르가 있다(서구 회화와 비서구 회화에서 그것의 역사를 포함한, 풍경화라고 불리는 부류 전체). 셋째, 매체로 간주된 풍경이 있다. 이는 컨스터블이 그림을 그리며 살았던 스투어 계곡Stour Valley 같은 구체적이고 특정한 장소를 포함하여,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 혹은 현실의 시골을 말한다. 종과 표본, 고정관념과 개인, 계층과 구성원, 이미지와 그림의 변증법은 이 모든 관심 층위들을 가로지른다. 이 때문에 풍경화 자체도 회화에서 재현된 모티프, 회화작품 자체, 그 작품이 속한 장르를 동시에 지칭하는 몹시 모호한 단어인 것이다. [137~138p]
- 그러나 이미지를 살아 있는 것으로 간주할 때 도출되는 가장 흥미로운 결과는, (생명력으로 이해되는) 이미지의 가치라는 문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사회적 맥락 속에서 진행된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이미지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숙고해야 한다. 오히려 이미지가 새로운 가치 형식을 세상에 들여와서 우리의 기준과 경쟁하며 우리의 생각을 바꿀 것을 강요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미지가 탄생 혹은 재탄생하는 이러한 순간을 ‘상의 번쩍 떠오름’dawning of an aspect, 즉 이것을 저것으로 보는 새로운 방식이라고 묘사한다. 우리의 장腸에 살고 있는 미생물이 그러하듯 이미지는 인간 숙주와 공존하는 수동적인 실체가 아니다. 이미지는 우리가 생각하고 보고 꿈꾸는 방식을 변화시킨다. 이미지는 우리의 기억과 상상력을 재기능하게 하면서 새로운 기준과 새로운 욕망을 세상에 들여온다. 신이 아담을 최초의 ‘살아 있는 이미지’로 창조했을 때, 그는 자신이 새로운 이미지를 더 만들어 낼 수 있는 피조물을 창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상 이 때문에 이미지가 살아 있다는 관념이 그토록 불온하고 위험해 보이는 것이며, 이 때문에 신은 아담을 자신의 이미지에 따라 창조한 뒤 인간의 손으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을 금지하는 금지법을 발포한 것이다. 이미지의 가치가 그 생명력이라면, 이는 살아 있는 이미지가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위협하는 사악하고 부패시키는 병리적 생명형식으로 보일 수 있다.. 이미지의 삶에 대한 가장 의미심장한 증언은 오히려 이미지의 삶을 두려워하고 증오하는 사람들로부터 나온다. 이들은 이미지의 삶이 사람들을 도덕적 타락, 도착, (원시적 미신이나 유아주의나 정신병이나 잔인한 형태의 행동으로의) 퇴행으로 유인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미지의 삶을 인정하면 우상숭배와 페티시즘을 건드리게 된다. 즉 우상숭배와 페티시즘은 우리로 하여금 사물이나 (더 나쁘게는) 타자에게 냉소적이고도 비뚤어진 방식으로 투사하는 환영에 속아 넘어가도록 하며, 우리를 바보나 악당으로 만든다. 우리가 우리를 ‘앞장설’ 이미지를 창조한다면, 그 이미지는 우리를 파멸로 향하는 환락의 길로 데려갈 것이다. [139~140p]
- 이미지의 삶은 사적인 것 혹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인 삶이다. 이미지는 계보학적인 혹은 유전적인 계열 속에서 살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스스로를 재생산하고 문화들 사이를 옮겨 다닌다. 이미지는 또한 다소 분명하게 구분되는 세대나 시대 속에서 집단적으로 동시 현존하면서, 우리가 ‘세계상’world picture이라고 부르는 몹시 거대한 이미지 형성물의 지배를 받는다. 이 때문에 이미지의 가치는 역사적으로 변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며, 이 때문에 시대적 양식은 늘 새로운 일련의 평가기준에 호소하면서 어떤 이미지는 강등시키고 다른 이미지는 장려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지가 인간 숙주에 기생하는 유사-생명형식이라고 할 때, 우리는 단지 이미지를 인간 개인에 기생하는 기생충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이미지는 인간 숙주의 사회적 삶과 그것이 재현하는 사물들의 세계와 나란히 공종하는 사회적 집단을 형성한다. 이 때문에 이미지는 ‘제2의 자연’을 구성하는 것이다. 철학자 넬슨 굿맨의 표현에 따르자면, 이미지는 세상에 대한 새로운 배치와 지각을 만들어 내는 “세상을 만드는 방식”이다. [140~141p]
- 고대의 이미지는 이미지가 열망하는 최고의 가치 평가를 소유하고 있다. 그 이미지는 말 그대로 신 자체인 것이다. 즉 그것은 다른 곳에 있는 신을 닮았다거나 재현한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신이다. 유대인들은 아론에게 신의 상징이나 신의 유사물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한 것이 아니라, 신(엘로힘) 자체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 [153p]
-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이미지와 가치의 문제가 일련의 가치들을 확보함으로써 이미지를 가치 평가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미지는 가치를 세우고 변화시키는 게임에서 능동적인 참가자다. 이미지는 새로운 가치를 세상에 들여올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과거의 가치를 위협할 수 있다. 여하튼 인간은 이미지로 이루어진 제2의 자연을 자신의 주위에 창조함으로써, 자신의 집단적이고 역사적인 정체성을 수립한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그것들을 만든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의도했던 가치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보는 사람들의 집단적이고 정치적인 무의식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형태의 가치를 발산한다. 잉여가치의 대상이자 과대평가와 과소평가의 대상인 이 이미지들은 가장 근본적인 사회적 갈등의 접점에 있다. 이들은 환상적이고 비물질적인 실체이며, 세상 속에 육화되었을 때는 행위자와 아우라, ‘자신만의 정신’을 소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157~158p]
2부 대상
- 이미지는 한 가지 이상의 의미에서 중요하다. 즉, 이미지는 차이를 만들고 무언가를 요구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러나 이미지는 그 자체로도 중요하다. 돌이든 금속이든 캔버스든 영화필름이든, 이미지는 늘 물질적 대상, 즉 사물 안에서 육화된다. 혹은 살아 있는 육체와 그 기억, 환상, 그리고 경험이라는 미로 속에서 육화된다. 2부에서 우리는 이미지의 환상적이고 빗물질적인 영역으로부터 떠나서 ‘대상’이라는 영역으로 향할 것이다. 물론 대상이란 많은 것들이다. 대상은 ‘객관적’objective 묘사와 재현의 목표이며, 객관성objectivity 담론의 산물이다. 그것은 ‘주체’, 즉 인간, 개인, 의식적 존재에 맞서 설정된 세계의 구성요소들이다. 대상은 또한 (정신분석학의 언어로 말하자면) 주체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는 특히 대상관계 이론에서 그러한데, 여기에서 ‘대상 선택’은 주체의 성적 취향을 결정하며, ‘좋은 대상’과 ‘나쁜 대상’은 주체에게 영양을 공급하거나 주체를 박해하는 관계 속에서, 혹은(‘분열된 대상’Split Object의 경우에서처럼) 둘 다를 동시에 행하는 관계 속에서 “주체에 작용할” 수 있다.
(물질적 보조물 혹은 지시적 목표로서) 대상 없는 이미지는 없다고 한다면, 이미지 없는 대상도 없다는 점도 분명해져야 한다. 멜라니 클라인은 대상과 나쁜 대상이란 실제로 ‘이마고’이며, 이는 “그것이 기초로 하고 있는 실제 대상에 대한 환상적으로 왜곡된 그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 덧붙여 ‘실제 대상’ 또한, 널리 공유되고 현실적으로 유용하며 대중적으로 입증 가능한 이미지의 산물이라고 말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관시을 갖는 대상은 이러한 경계를 넘나드는 종류의 것이다. 즉, 나는 개인심리학이나 신경증적이고 도착적인 행위의 대상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역할을 하는 대상에, 그 지위(좋은/나쁜, 정상적인/도착적인, 이성적인/비이성적인, 객관적인/주관적인)가 바로 논쟁이 되는 대상에 관심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대상을 불쾌한objectionable대상들, 실물 교육object lesson, 혹은 경멸당하고 버림받은 혐오스러운 대상들로 생각할 수 있다. [160~161p]
- 모두가 알고 있듯, 발견된 대상에는 두 기준만이 있다. ①발견된 대상은 일상적이고 중요하지 않으며 소홀히 취급되고 (발견될 때까지) 무시되어 온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그것은 명백히 아름답거나 숭고하거나 경이롭거나 놀랍거나 특출한 것이 될 수 없다. 그랬더라면 벌써 눈에 띄었을 것이고, ‘발견’에 적합한 후보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② 그것의 발견은 의도적이거나 계획된 것이 아니라 우연적이어야 한다. 피카소의 유명한 언급처럼, 우리는 ‘발견된 대상’을 추구할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을 발견한다. 혹은 더 좋게 표현하자면, 라캉의 정어리 통조림이나 마르셀 브로타르스Marcel Broodthaers의<눈>[目]항아리처럼, 그것이 당신을 발견하고 되돌아본다. 따라서 발견된 대상의 비밀은 아주 어려운 종류의 비밀이다. 즉 에드거 앨런 포의 도둑맞은 편지처럼, 일상적 시선에는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초현실주의의 실천에서와 같이, 한 번 발견되면 ‘토대가 되는 것’이 된다. 그것은 신격화되고, 흔해 빠진 것에서부터 변신하며, 예술에 의해 구원받는다. 레디메이드에서는 새로운 이름을 얻을 수도 있다. 변기가 ‘샘’이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 잘 먹혀들었을 때, 우리는 그 변신이 속임수가 아닌지,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가 조종한 희극적 책략이 아닌지 하는 의심을 품게 된다. 소박학 친숙한 이름을 가진 평범하고 낡은 사물은 여전히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미학적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얼굴을 붉히고 웃거나, 아니면 우리를 아예 무시하면서 말이다. 신형 광택기기를 유리진열장에 진열해 놓은 제프 쿤스의 재구성에서 핵심적인 특징은 그 대상에 다른 이름을 붙이는 것을 그가 대놓고 거부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원래의 고유명사(‘신형 후버 디럭스 샴푸 광택기기, 3단 장착된 신형 10갤런 셸튼 웨트/드라이’)를 현학적으로 고집한다는 점이다. 진정한 ‘발견된 대상’은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결코 잊지 않으며, 자신이 스펙터클과 전시로 격상되었다는 것을 완전히 믿지 않는다. 그것은 마지막까지 소박하게 있으며, 욕망의 요구의 밀고 당김에 갇힌 ‘불상한 것’poor thing 으로 남아 있다. [166~167p]
- 따라서 발견된 대상의 시간성이 중요하다. 그 대상이 일종의 ‘출세한’ 일대기를 가지게 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소박한 출신성분origin이 그것의 수명에 핵심적인 부분이 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169p]
- 새로운 생각이란 없고, 단지 사물들로부터 솟아나는 것들만 있다면, 즉 단지 불상한 것들과, 이들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한 불쌍하고 나약한 이론들로부터 솟아나는 것들만 있을 뿐이라면, 아마도 낡고 화석화되었으며 구식이 된 우리 시대의 대상들은 우리가 이제는 사유할 수 없는 것들, 즉 우리 자신들이자, 진공청소기에서 컴퓨터까지 우리의 최신 가전제품과 기계장치들이다. 나는 이를 ‘포스트휴먼’ 시대라고 지금 알려지고 있는 시대의 진자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즉, 발견된 대상의 새로운 형식은 갈수록 가속화되는 상품의 유용성 주기에 내몰린 최근 인류의 유물 속에서, 심지어 (무엇보다도) 현대 휴머니즘의 유물 속에서 발견 될 수 있다는 메시지인 것이다. 발견된 대상의 최근 판본이 고대의 유물이나 화석이 아니라 (예를 들어 제프 쿤스의 진공청소기와 농구공처럼) 완전히 최신 유행의 사물인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원시적인 것과 구식이 된 것을 페티시로 만들었던 초현실주의와는 반대로, ‘포스트모더니즘’(더 좋은 단어가 없으므로)은 새로운 것과 혁신적인 것을 토템으로 만든다. 만일 이러한 대상들이 어떤 의미에서든 ‘화석’이라고 한다면, 이 대상들은 현재의 고생물학paleontology이라는 틀 속에, 즉 ‘시원적 시간’deep time의 관점과 인간이라는 종 자체의 (가능한) 구식화라는 관점에서 동시대성contemporaneity을 바라보는 재현의 구조라는 틀 속에 자리 잡고 있다. [180p]
- 대상들(특히 불쾌한 대상들과 신성한 대상들)은 결코 단순한 물질적 대상이 아니다. 주목할 만한 특정 형식의 재현이자 제시 없이도 ‘그 자체만으로’ 불쾌하게 보이는 어떤 대상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배설물·쓰레기·생식기·시체·괴물 같은 것들은 종종 그 자체만으로 역겹고 불쾌하다고 간주된다. 그러나 내가 여기에서 관심을 가지는 것(또한 우리 대부분이 관심을 가진다고 생각되는 것)은 그러한 대상들이 특정 방식으로 재현되거나 매개되어 언어적으로나 시각적으로 교묘하게 우리 앞에 배치되는 순간이다. 이는 불쾌하거나 불쾌하지 않은 대상들이 묘사와 복제, 각인에 의해 격상되고 상연되고 전시됨으로써 변신하게되는 순간이다. 따라서 대상에 대한 질문은 늘 이미지의 문제로 되돌아가며, 우리는 이미지의 그 무엇이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는 놀라운 힘을 부여하는지에 대해 여전히 질문을 던져야 한다. [181~182p]
- 사람들이 이미지를 해칠 때에는 두 가지 믿음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이미지가 그것이 재현하는 것에 투명하고도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이다. 이미지에 행해지는 것은 어느 정도 그것이 의미하는 것에 대해 행해지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이미지가 일종의 살아 있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자신에게 가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미지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투명한 매체일 뿐만 아니라, 감정과 의도와 욕망과 행위성을 가지고 있는 살아 있는 대상과 같은 무엇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미지는 때로 인간과 유사한 것으로 다루어진다. 즉, 이미지는 고통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감각을 가진 생물일 뿐만 아니라, 반응을 할 수 있고 책임을 질 수 있는 사회적 존재로 다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이미지들은 우리를 돌아보면서 우리에게 말을 걸며, 심지어 자신에게 폭력이 가해졌을 때 피해를 입을 수 있고, 신비하게도 도리어 피해를 가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183p]
- 1. 불쾌하게 하는 이미지는 근본적으로 불안정한 실체이고, 그것이 피해를 입히는 능력은 복잡한 사회적 맥락에 달려 있다. 또한 이러한 사회적 맥락은 때로 하나의 이미지를 두럴싼 대중적 논쟁의 결과로 변할 수 있다. 처음의 충격이 사그라지면서 오히려 익숙하고 사랑스러운 것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이미지의 불쾌한 특성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사물과 공동체 사이의 사회적 상호작용으로부터 유발된다. 이 공동체 자체도 그 대상에 대해 다양하고 분열된 반응을 보일 수 있다.
2. 불쾌하게 하는 이미지는 똑같은 방식으로 불쾌하게 하지는 않는다. 어떤 것은 보는 사람을 불쾌하게 하며, 어떤 것은 재현된 대상을 불쾌하게 한다. 어떤 것은 가치 있는 것을 모욕하거나 신성한 것을 모독하기 때문에 불쾌하게 하고, 또 어떤 것은 증오스럽고 경멸스러운 것을 찬미하기 때문에 불쾌하게 한다. 어떤 것은 도덕적 금기와 예의범절의 기준을 위반하기 때문에, 또 어떤 것은 국가적 영예를 모욕하거나 치욕스러운 과거를 상기시키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불쾌하게 한다. 어떤 것은 재현의 방식 때문에 불쾌하게 한다. 따라서 희화화나 고정관념은 그것이 재현하는 사람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재현하는 방식 때문에 불쾌감을 준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미지도 나쁜 사람들이나 가치, 재료를 ‘연상시키는 죄가 lT다’guilty by association고 느껴질 수 있다.
3. 만일 어떤 이미지가 수많은 사람들을 불쾌하게 한다면, 곧 누군가는 법에 호소하려 할 것이고, 이에 덧붙여 판사, 입법자, 정책입안자, 경찰에 호소하려 할 것이다. 불쾌한 이미지를 규제하는 “법안이 제정되어야 한다”는 외침이 더욱 높아질 것이며, 정책의 지침을 정식화하기 위해 토론회가 개최될 것이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미지도 심지어 법적 절차에 참여하는 증인이나 피고인과 같은 ‘법적 주체’가 될 수 있다. 이는 ‘미국 대 사진 37장’ 소송사건United States vs. Thirty-Seven Photographs이나 ‘미국 대 슈퍼 8mm 영화의 12,200피트 릴’United States vs. 12 200-Ft. Reels of Super 8MM Film et al.소송사건 등에서 그러했다.
4. 마지막으로, 이미지는 똑같은 방식으로 훼손되지 않는다. 때로는 (금송아지를 녹이는 것처럼) 이미지 자체를 완전히 없애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기도 한다. 때로 우상파괴적 행위는 단지 부분적으로만 파괴하려 한다. 즉 훼손, 손상, 절단, 참수 등의 행위는 이미지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방식으로 이미지를 모욕하고 ‘상처 입힌다’. 이러한 전략이 노리는 효과는 완전한 파괴와 사뭇 다르다. 그 목표는 이미지를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게 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등장하게 하는 것, 즉 이미지와 그것이 재현하는 것에 모욕을 주는 방식으로 출현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희화화는 훼손과 우상파괴주의의 한 형태다. 이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기이한 것은, 이미지를 훼손하거나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사라지게’하고, 은폐하고, 숨기고, 묻고, 시야에서 사라지게 하는 전략이다. 이러한 전략은 이미지를 ‘해치는’ 방식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앞으로 보겠지만 이는 신성모독에 맞서 이미지를 공손하게 옹호하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요약하자면, 우상파괴주의에는 세 가지 전략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완전한 파괴, 훼손, 그리고 은폐가 그것이다. [189~191p]
- 작품에 의해 훼손당한 것은 오히려 (성모마리아의) 이미지 자체라는 것이다. 경건한 가톨릭신자들은 오필리의 성모마리아 이미지에 불쾌했던 것이 아니라, 성모마리아의 이미지가 제시되는 방식과 그것이 표현되는 재료에 분개했다. 이는 이미지 즉 ‘모티프’(루벤스, 라파엘로, 다빈치 등의 수많은 다른 성모마리아 그림들과 연결되는 이 작품의 특징)와 특정 그림의 구체적 물질성을 구별하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지를 보여 준다. 불쾌하게 하는 것은 ‘종’種(모든 성모마리아 그림들을 포함하는 분류)이 아니라 이 종을 기괴하고 역겹게 ‘육화’한 특정 표본이다. 관람객의 불쾌감도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대리적이다. 그 논리는 이러하다. “성모마리아의 이미지가 배설물로 된 재료로 표현됨으로써 훼손당했다. 성모마리아의 이미지가 훼손되었다면, 성모마리아 자체도 공격당한 것이다. 성모마리아가 공격당했다면 성모마리아와 그 이미지를 숭배하는 사람들도 공격당한 것이다. 내가 존경하거나 사랑하는 것이 모욕당했다면, 곧 내가 모욕당한 것이다.” [196p]
- 예술작품의 90퍼센트는 금방 잊힌다. 이는 스캔들이 될 만한 발견이 아니라 단지 상식일 뿐이다. 논리적으로 볼 때 제작된 작품의 최소한 절반은 ‘평균 이하’임에 분명하다. 개리슨 케일러Garrison Keillor의 워비곤 호수에서나 아이들이 모두 평균 이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이 사실에 대해서 개탄하거나 놀랄 것은 없다. 폭로될 스캔들이라고는 없는 것이다. 수많은 이류 예술작품들은 진정으로 뛰어난 작품이 드물게 꽃피기 위한 일종의 비료로서 제작되어야 한다. 이쯤 되면, 미술계의 닳고 닳은 세련된 무리들이 이를 일종의 자연적 법칙이라고 받아들이고, 젊고 신선한 예술가들의 그룹전이 열릴 때마다 순수한 척 두 손을 부들부들 떠는 몸짓을 취하는 것은 그만둘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센세이션 전시는 이와 유사한 대부분의 전시가 그러하듯, 소수의 장래성 있는 뛰어난 작품들과 다수의 유능하나 별 기억할 가치는 없는 작품들이 뒤섞인 전시였다. 센세이션 전시에 대한 나의 감상은, 기법이나 재치, 표현의 전문성과 같은 문제에서 어느 정도 평균 이상이었다는 것이다. [199~200p]
- 그러나 이미지는 언어가 아니다. 이미지가 실제로 어떤 것을 ‘말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미지는 무엇인가를 보여 줄 수 있지만, 그것에 부과되는 언어적 메시지나 발화행위는 관람자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다. 관람자는 이미지에 목소리를 투사하고, 그 속에서 이야기를 읽어 내거나 언어적 메시지를 해독해 낸다. 이미지는 비담론적이고 비언어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밀도 있고 도상적이며 (대부분은) 시각적인 상징이다. 이러한 비담론적이고 비언어적인 정보는 ‘진술’statement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몹시 모호하기 일수다. 때로 파이프나 담배를 그린 그림은 단지 “이것은 파이프다”와 같이 순수하고 직설적인 무언가를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시각 이미지는 늘 언어적 메시지가 포착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선 무언가를, 심지어 그것이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정반대의 무언가(예를 들면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말하고(혹은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은 시각 이미지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부분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하나의 그림은 천 개의 단어만큼 가치 있다고들 하는 것이다. 이미지를 해독하거나 요약할 수 있는 정확한 단어들이란 몹시 확정하기 어려우며 모호하기 때문이다. [202p]
- 불쾌감이라는 감각을 자극함으로써 그 그림이 경멸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음에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한 것은 단지 언어즉 층위, 즉 똥이라는 이름이다. 안드레 세라노Andre Serrano의<오줌 예수>Piss Christ처럼, 불쾌하게 한 것은 그림의 실제 외양이 아니라 재료의 이름과 그 이름이 함축하는 의미다. 즉 실제 지각된 시각 이미지가 아니라, 언어가 불러일으킨 상상적이고 공상적인 이미지인 것이다. 세라노의 오줌은 십자가의 매달린 예수 주위에 황금빛을 발하고 있어서, 신성한 이미지에 연상되곤 하는 황금빛 후광을 떠올리게 한다. 만일 세라노가 자신의 이미지를<황금빛에 둘러싸인 예수>라고 불렀다면, 어느 약삭빠른 비평가가 ‘황금빛 줄기’와 변태적 행위의 연관성을 폭로할 때까지는 안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204p]
- 육체가 없고 비물질적인 가상성과 사이버스페이스가 우리에게 밀어닥쳤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적 대상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제국주의의 종말과 대상의 탈물질화는 우연히 동시 발생한 유사한 사건들이 아니라,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는 사건들이다. 두 다른 각도에서 보았을 때 심지어 같은 사건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들어서 알고 있듯이, 우리 시대에 제국주의는 ‘세계화’globalization로 대체되었다. 그것은 중심이 없고 명확한 위치나 유일한 대표자가 없는 정보의 흐름과 순환의 매트릭스다. (하지만 나는 오늘날 지구상에서 실제 상품유통의 속도가 1900년의 속도와 거의 똑같다는 앨런세큘라의 조심스러운 통찰을 사람들에게 상기시키기를 좋아한다.) 세계화에는 황제도 없고, 제국의 수도도 없으며, 기업 합병과 정부 관료와 급증하는 비정부 조직의 끝없는 미로 외에는 그 어떤 다른 구조도 없다. 그것은 네트워크와 웹과 ‘미디어스케이프’mediascape의 리좀이다. 이 풍경에는 책임질 사람이 아무도 없고, 전화선 연결망은 멈추지 않고 증식해 가며, 아무도 무언가를 떠맡으려고 하지 않는다. 미소를 짓는 가식적 얼굴이 전 세계 곳곳의 권력이 있는 사무실을 점령하고 있다. 그 얼굴은 무기, 생체권력, 에너지와 같은 기업의 이해와 맞물려 있는 온화한 표정의 아바타이자, ‘민주주의’와 ‘자유’를 점점 더 규제 불가능한 자본주의와 미군 모험주의의 알리바이로 써먹고 있는 (‘온정적 보수주의’라고 알려진)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아바타이다. 이 ‘새로운 세계질서’에서 자유란 국경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유통되는(인간 육체가 아닌) 상품의 자유를 의미하며, 민주주의란 정치적 선택의 범위는 점점 더 협소해져 가는 반면 소비자의 선택은 무한히 확장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제국주의의 종말을 성급하게 축하하기에 앞서, 그것을 대체한 제국의 형태들에 대해 성찰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월드와이드웹의 육체 없는 유토피아 속으로 항해하기에 앞서, 어떤 것들을 뒤에 남겨 놓게 될 것인지, 남아 있는 실제 육체와 물질적 대상에는 어던 결과가 있을 것인지를 자문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232~233p]
- 사물/그것은 지각될 수 없고 재현될 수 없는 실재의 이름 없는 형상으로 나타난다. 그것이 단일하고 인식 가능한 얼굴과 안정된 이미지를 가지게 되면 대상이 된다. 반면, 그것이 불안정하게 하거나 다중심적multistable 이미지의 변증법 속에서 명멸한다면, 하나 이상의 이름과 하나 이상의 정체성을 필요로 하는 (오리-토끼 같은) 혼종적인 것이 된다. [242p]
- 그렇다면 나쁜 대상은 단순히 노골적인 도덕적 의미에서 나쁜 것이 아니다. 나쁜 대상은 매혹과 동시에 혐오를 쉽게 연상시키는, 양가감정과 불안의 대상이다.
우선 첫째로, 나쁜 대상은 식민주의 원정을 유혹하는 상품들(향료, 금, 설탕, 담배)이 아니며, 부유하고 고상하다는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해 황제들 사이에 교환된 상징적 선물도 아니다. 대신 나쁜 대상은 제국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대체로 가치가 없거나 혐오스러운 것으로 보이는 것이지미나, 식민지 타자에게는 중대하면서 의심할 바 없이 과도한 가치를 가지는 거승로 이해되는 대상이다. 이 대상은 보통 일종의 종교적이거나 마법적인 아우라를 가지고 있으며, 살아 있고 생명을 부여받았다는 특징을 가진다. 이는 객관적인 제국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순전히 주관적이고 미신적인 믿음의 산물로 간주되는 것이다. 이러한 대상이 식민화된 사람들의 언어에서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나는 유럽 제국주의 역사에서 놀라울 정도로 항구적인 생명력을 가지고 있으며 제국주의가 자신의 ‘본래적’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그림(특히 예술작품)에서 한층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세 가지 범주의 대상들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그 이름은 페티시, 우상, 토템이다. [244~245p]
- 조슈아 레이놀즈가 옳다면, 예술은 단지 차례로 이어지는 제국을 뒤따르면서, 황제의 새 궁전을 찬미하는 역할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만일 블레이크가 옳다면, 예술과 과학은 훨씬 더 복잡한 위치에 있다. 한편으로 예술과 과학은 새로운 형태의 제국이 의존하는 모든 지배와 착취 기술을 가능하게 하며, 이 과정을 자연스럽고도 불가피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제공한다. 다른 한편, 예술과 과학은 우리가 도달하게 될 곳이 어디인지를 보게 해주는 예언적 통찰력을 제공한다. 과거의 우상들이 그러했듯, 예술과 과학이 “우리를 앞장서”, 있을 법한 가능한 미래로 데려간다. 이러한 목표들을 어떻게 풀어내고, 우리의 목적과 우리 자신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 하는 문제가 우리 시대에 예술(그리고 제국)이 직면한 거대한 임무다. [258p]
- 토테미즘과 페티시즘, 우상숭배는 오히려 사물들 사이의 세 가지 상이한 관계에 대한 이름이자, 세 가지 형태의 ‘대상관계’를 칭하는 이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단어와 개념들을 포함한) 무수히 다양한 구체적 실체들을 이러한 관계로 구성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동일한 대상(예를 들면 송아지)이 그것을 둘러싼 사회적 실천과 서사에 따라 토템의 기능을 할 수도 있고, 페티시나 우상의 기능을 할 수도 있다. 송아지가 기적을 행하는 신의 이미지로 보인다면 그것은 우상이 된다. 송아지가 부족이나 민족(뒤르켐의 용어로 하자면 ‘사회’)이 자기의식적으로 생산한 이미지로 보인다면 그것은 토템이다. 송아지의 물질성이 강조되면서 유대인들이 이집트에서 가지고 나온 귀걸이와 황금 보석과 같은 사적인 ‘부분대상’이 녹아 만들어진 금덩어리를 보인다면 그것은 집단적 페티시가 된다. 성경에서 금송아지를 ‘주조된 송아지’라고 칭하는 것은, 그것이 유동적이고 다중심적인 이미지이며 팽팽한 긴장감이 도는 토끼-오리라는 의미를 반영한 것이다. 그렇다면 송아지 이미지가 들어서게 되는 대상관계는 비트겐슈타인의 ‘~로 보기’seeing-as 혹은 ‘상을 보기’aspect seeing와 같다. 즉, 송아지는 주체의 지각 도식에 따라 변화하는, 모양이 변하는 키메라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의 다중심적 이미지와는 달리, 금송아지 이미지에서 변하는 것은 그 이미지의 인식적이거나 지각적인 특징이 아니라(금송아지가 낙타로 보인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것의 가치와 위상, 힘, 생명력이다. 그러므로 토템-페티시-우상의 구분은 반드시 눈에 보이는 차이일 필요는 없다. 그 구분은 이미지를 섬세하게 두드려 조사하는 것, 즉 이미지가 무엇을 말하고 행하는지, 이미지를 둘러싸고 어떤 제의와 신화가 순환하고 있는지에 대한 탐구를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286~287p]
- 이 세 용어들을 삼원하는 것의 의의는 절대적 위상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관계에 대한 감각을, 말하자면 객관적인objective 대상관계를 제공한다는 점에 있다. 이는 셔츠 사이즈를 ‘스몰, 미디엄, 라지’로 대략 삼분화하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291p]
3부 매체
- 이미지가 생명형식이라면, 그리고 대상이 이미지에 생명을 불어넣는 육체라면, 매체는 그림이 살아 움직이게 되는 서식지 혹은 생태계다.
지금까지 논의해 온 모든 이미지와 대상이 이런저런 매체 안에 존재한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미지와 대상의 접속, 가상적 외양이나 환상과 물질적 보조물의 결합은, 실상 매체가 무엇인지를 명시하는 일반적 방식이기도 하다. 원스턴 처칠의 이미지는 어딘가에서, 즉 무엇(동전, 대리석 흉상, 사진, 회화)안에 혹은 위에 등장한다. 그러나 매체를 이미지가 등장하게 되는 대상 혹은 물질적 사물이라고 말하고 싶은 유혹에 저항하게 하는 많은 이유들이 존재한다. 매체는 단순히 물질적 재료가 아니라, (레이먼드 윌리엄스가 말한 바 있듯이) 기술technology, 기량skill, 전통, 습관을 수반하는 물질적 실천이다. 매체는 물질적인 것 이상이며, (맥루한에게는 실례지만) 메시지 이상이고, 단순히 이미지에 보조물이 더해진 것―‘보조물’을 ‘보조하는 체계’로 이해하지 않는다면―이상이며, 이미지가 세계에서 그림으로―다시 말해, 단순히 캔버스에 안료를 더한 것뿐만 아니라, 캔버스 틀과 작업실, 화랑, 미술관, 수집가, 판매상-비평가 체계로―구현될 수 있게 하는 실천의 범위 전체다. 이 책의 서문을 인용하자면, “‘매체’media라는 용어는 이미지와 대상을 결합하여 그림을 산출하는 일군의 물질적 실천 전체를 의미한다”.[300p]
- 매체에 대한 유용한 메타그림은 다多중심적인 고전적 이미지인 꽃병/얼굴 도형이다(그림 41). 만일 우리가 꽃병부터 바라본다면, 우리는 ‘표시된’ 체계(꽃병)와, ‘표시되지 않은’환경(꽃병을 둘러싼 빈 공간) 사이의 루만의 구분에 대한 유용한 실례를 보게 된다. 또한 이 메타그림은 형식(꽃병임을 식별하게 하는 윤곽선)과 매체(꽃병이 그려진 백지) 사이의 구분도 예증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을 다시 보면 이러한 읽기가 정확하게 뒤집어짐을 알 수 있다. 꽃병은 하나의 체계에서 하나의 환경으로, 즉 두체계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 환경으로 바뀐다. 그리고 꽃병을 둘러싼 빈 공간 혹은 환경은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 두 체계로 바뀐다. 그러나 이 이미지에서 가장 놀라운 역전은 꽃병의 장식 띠가 두 얼굴의 눈과 입을 오가는 소통 회로로 바뀐다는 점이다.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말하는, 보이지 않는 소통은 여기에서 상호 주체성intersubjectivity의 통로로, ‘매체에 말 걸기’라는 과정자체에 대한 일종의 엠블렘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 두 얼굴은 자크 라캉이 ‘시각적’scopic이고 ‘음성적’vocative인 레지스터라고 불렸던 것 속에서 서로에게 말을 걸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체 이미지 자체가 이미지를 바라보고있는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으며, 우리가 말을 거는 것인 동시에 우리가 바라보는 것이자 우리를 바라보는 것으로서 ‘그림’과 우리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 이미지를 ‘마주함’face으로써 우리는 대면face-to-face 소통 속에서 바라보는/말하는 주체로서 우리 자신이 중간에 삽입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이 그림은 우리에게 말을 걸고자 하고, 우리가 말을 걸어 주기를 바라며, 말을 거는 감각 양식들을 구별하고자 한다. 입이라는 매체를 잇는 표시 없는 장식 띠는, 동그라미가 찍혀 있고 부분들로 나뉘어 있는 시각적 매체의 통로와 대조된다. 이는 아마도 시각적인 것과 음성적인 것 사이의 질적인 구분을 제시하기 위해서일 것이며, 말하는 것의 유동성과 대조되는 시각적 과정의 파동과 불안한 시선을 드러내기 위해서일 것이다. [314~315p]
- 1. 매체는 처음부터 우리 주변에 있어 왔던 현대이 발명품이다.
2. 새로운 매체가 주는 충격은 실상 매우 오래된 것이다.
3. 매체는 체계이자 환경이다.
4. 매체 바깥에는 항상 무엇인가가 있다.
5. 모든 매체는 혼합매체다.
6. 정신은 매체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7. 이미지는 매체의 주요 화폐다.
8. 유기체가 서식지에 거주하듯이, 이미지는 매체에 거주한다.
9. 매체는 주소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매체에 말을 걸 수도 없다.
10. 우리는 매체의 이미지에게, 매체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말을 건다.
1. 매체는 처음부터 우리 주변에 있어 왔던 현대의 발명품이다. 매체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는 ‘대중’매체나 기술 매체, 기계 매체, 전자 매체 등 현대의 영역에만 국한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들 위주로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현대적 매체와 전통적 매체, 그리고 소위 원시적인 매체가 변증법적이고 역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간주하는 것을 선호한다. 회화·조각·건축과 같이 오래된 매체는 텔레비전·영화·인터넷을 이해하기 위한 틀을 제공하며, 이와 동시에 이러한 초창기 매체에 대한 우리의 시각(심지어 그것들을 ‘매체’락 보는 우리의 현대적 이해방식)은 새로운 의사소통 수단과 시뮬레이션 수단, 재현 수단의 발명에 의존하고 있다. 보디 페인팅·긁어서 상처 내기scarification·몸짓언어와 같은 오래된 실천들과 토테미즘·페티시즘·우상숭배와 같은 고대의 문화 형성물들은 (새로운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최근 매체에서도 살아 남았으며, 전통적 매체를 둘러싼 무수한 불안들은 ‘새겨진 이미지’graven images의 급증에서부터 글쓰기의 발명에까지 이르는 기술적 혁신이라는 문제와 관계되어 있다.
2. 새로운 매체가 주는 충격은 실상 매우 오래된 것이다. 매체의 역사가 존재하는 한, 매체는 현대적 형태와 전통적 형태로 편리하게 양분되지 않는다. 매체에 대한 변증법적 설명은 불균등 발전에의 인식, 현대 세계에서 전통적 매체의 존속에 대한 인식, 오래된 실천에서 새로운 매체에 대한 예견을 포함한다. 예를 들어, 발터 벤야민이 주목했던 바와 같이, ‘최초의’ 매체인 건축은 정신분산의 상태에서 소비되었다는 의미에서 늘 대중매체였다고 할 수 있다. 야외 조각은 태곳적부터 대중 집단에 말을 걸어 왔다. 텔레비전은 대중매체일 수 있지만, 그것이 말을 거는 곳은 대체로 대중집회가 아닌 가정이라는 사적인 공간이다. 그리고 과학기술은 예술작품의 생산에서, 그리고 불의 발명에서부터 북소리, 도구들과 야금술, 인쇄기에 이르는 원거리 메시지 전달에서 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그러므로 매체는 늘 새로운 것이었으며 기술혁신과 기술공포증의 장소였다는 인식을 통해, ‘새로운 매체’라는 관념(인터넷, 컴퓨터, 비디오, 가상현실)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 플라톤은 문자가 인간의 기억을 파괴하고 얼굴을 마주한 대화의 변증술적 원천을 파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한 혁신이라고 생각했다. 보들레르는 사진의 발명이 회화를 파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쇄기는 혁명에 책임이 있다고 비난받아 왔으며, 비디오게임에서부터 만화책과 텔레비전에 이르는 모든 것이 청소년 범죄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되어 왔다. 그러므로 매체에 관한 한, ‘새로움의 충격’은 몹시 오래된 것이므로 전체적 시야를 가지고 고찰할 필요가 있다. 매체에 대해서는 늘 새로움의 충격이 있어 왔다. 즉 매체는 늘 신적인 발명품, 신으로부터 내려온 양면성을 가진 선물, 전설적 창조자와 전령들(문자를 발명한 이집트의 토트 신, 시나이 산에서 음성문자를 가져온 모세, 축음기를 발명한 에디슨, 불을 가져온 프로메테우스, 그와 같은 자격을 가진 매체연구의 프로메테우스적 발명자 맥루한)과 관련되어 생각되었다. 이는 이러한 혁신들이 실제로 새롭지 않다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매체 사이의 차이라는 문제를, 매체에 ‘새롭다’라는 딱지를 붙이고 과거의 모든 매체들을 ‘낡았다’고 간주하는 것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의미다.
3. 매체는 체계이자 환경이다. 매체 개념은 더 포괄적인 ‘매개'mediation 개념에서 파생된 것으로, ’매개‘ 개념은 예술과 대중매체의 재료와 기술을 넘어서 정치적 중재(입법부와 주권자와 같은 대의제도), 논리의 매개항(삼단논법의 중간항), 경제적 매개물(돈, 상품), 생물학적 ’매체‘(생물의 ’문화‘ 혹은 서식지), 영적 매개(강신술 회합에서의 영매나, 보이지 않는 신의 상징인 우상)와 같은 영역들을 포함한다. 간단히 말해, 매체는 단순히 일련의 재료들이나 하나의 장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며, 또는 개인들 사이를 ’매개하는‘ 코드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매체는 그 안에 개인들을 포함하는 복잡한 사회제도이며, 실천·의식·습관·기량·기법들의 역사에 의해, 그리고 일련의 물질적 대상들과 공간들(무대, 작업실, 이젤, 텔레비전 수사익, 휴대형 컴퓨터)에 의해서 구성된다. 매체는 의사전달을 위한 물질적 수단인 만큼이나, 조합·직업·동업조합·복합기업·법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명제는 매체에 대한 무수한 개념을 세상으로 풀어 놓으려 위협하는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사회적 실천‘ 개념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로 우리를 다시 데리고 간다. 그러므로 이 경우 우리는 이 개념을 또 다른 금언으로 보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알렉스 그레고리가 그린 시사만화에서 잘 드러나 있다(그림42).
4. 매체 바깥에는 항상 무엇인가가 있다. 모든 매체는 그에 상응하는 직접성의 지대를, 즉 무매개성과 투명성의 지대를 구성한다. 이 지대는 매체 자체와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창문도 물론 그 자체로 하나의 매체며, 유리를 고르게 하는 적절한 기술의 출현에 의존한다. 아마도 창문은 건축의 내부와 외부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열어 주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인간 육체를 내부 공간과 외부 공간이라는 유추를 따라 재배치하게 했다는 점에서, 그래서 눈은 영혼의 창문이 되고 귀는 현관이 되며 입은 진주로 장식된 문이 되었다는 점에서 시각문화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발명품 중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슬람교의 격자구조 장식에서부터 중세 유럽의 스테인드글라스, 쇼핑객과 산보객을 위한 현대의 쇼윈도와 아케이드, 마이크로 소프트사의 사용자 인터페이스인 윈도즈에 이르기까지, 창문은 겨코 투명하고 자명하며 무매개적인 실체가 아니다. 그러나 그레고리의 시사만화는 또한, 창문이라는 새로운 매체가 역설적이게도 종종 직접성과 무매개성과 연관되었으며, 따라서 고해상도의 초고속 컴퓨터가 더 오래된 매체인 창문을 완벽하게 흉내 낼 수 있음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새로운 매체는 우리의 감각을 재배치한다기보다는, 이미 자연과 습관과 이전 매체에 의해 구성되어 있는 그대로 감각의 작동을 분석하며, 그럼으로써 이전 매체와 꼭 닮은 것처럼 보이게 하려 한다.
5. 모든 매체는 혼합매체다. ‘순수’ 매체(예를 들어 ‘순수’ 회화, 조각, 건축, 시, 텔레비전)란 없다.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가 모더니즘 아방가르드의 과제라고 보았던 ‘매체의 본질에 대한 추구’가 매체의 예술적 전개와 분리될 수 없는 유토피아적 몸짓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매체의 순수성이라는 문제는 매체가 자기 지시적이 되면서 의사전달이나 재현수단으로서의 기능을 거부할 때 제기되곤 한다. 그 지점에서 매체의 특정한 표본적 이미지가 매체 자체의 내적 본질을 구현하고 있는 것으로 정전正典회된다(추상회화, 순수음악).
6. 정신은 매체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정신적 삶(기억, 상상력, 환상, 꿈구기, 지각, 인지cognition)은 매개되어 있으며, 물질적 매체의 전 범위 안에 육화되어 있다. 사유는 머릿속에 있는 (비트겐슈타인의 표현을 따르자면) 어떤 ‘기이한 매체’queer medium에 거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자판 앞에서 도구와 이미지와 소리를 가지고 소리 내어 생각한다. 이 과정은 전적으로 상호적이다. 화가 사울 스타인버그Saul Steinberg는 그리기drawing를 “종이 위에서 생각하기”라고 불렀다. 그러나 사유도 또한 일종의 그리기, 즉 정신적으로 스케치하기, 모사하기, 윤곽선 그리기, 그리고(내 경우에는)목적 없이 낙서하기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매체에 대해서 생각할뿐만 아니라, 매체 속에서 생각한다. 이 때문에 매체는 생각이 반복될 때 두통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기호학, 언어학, 혹은 담론 분석에서 매체의 특권화된 메타언어란 없다. 매체와 우리의 관계는 상호구성의 관계다. 즉 우리는 매체를 만들고, 매체는 우리를 만든다. 수많은 창조신화에서 신을 다양한 매체로 작업하면서 전체 창조물들(우주의 건축, 동물과 인간의 조각된 형태들)을 만드는 제작자로 묘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7. 이미지는 매체의 주요 화폐다. 만일 ‘매체에 말 걸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언어가 아닌 ‘이미지’가 매체의 주요 화폐임을 인식해야 한다. 물론 말하기와 글쓰기는 매체가 전달하는 메시지를 구체화하고 해독하는 데에 있어 중요하다. 그러나 매체 자체는 메시지가 아니라 육화된 전달자embodied messenger다. 매체는 메시지가 아니라 ‘마사지’라고 한 맥루한의 말은 절반은 진실이라 하겠다. 게다가 말하기와 글쓰기는 그 자체로 단지 매체의 두 가지 종류일 뿐이다. 즉 말하기는 청각 이미지로 구현되는 매체고, 글쓰기는 도식적 이미지graphic image로 구현되는 매체다.
8. 유기체가 서식지에 거주하듯이, 이미지는 매체에 거주한다. 유기체가 그러하듯이 이미지는 하나의 매체 환경에서 다른 매체 환경으로 이동할 수 있다. 따라서 언어 이미지는 회화나 사진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고, 조각된 이미지는 영화나 가상현실에서 표현될 수 있다. 하나의 매체가 다른 매체 속에 ‘둥지를 틀’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하나의 매체가 정전이라 할 수 있는 범례 속에서 가시화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렘브란트가 유화를 대표하거나, 유화가 회화를 대표하거나, 회화가 미술을 대표할 때처럼 말이다. 또한 ‘이미지의 삶’이라는 관념이 불가피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미지는 살 수 있는 장소를 필요로 하며, 매체는 바로 그러한 장소를 제공한다. “하나의 매체의 내용은 늘 다른 매체다”라는 맥루한의 주장은 유명하다. 그러나 그는 ‘다른’ 매체는 그 이전의 매체여야 한다고 잘못 전제했다(소설과 희곡은 영화의 내용이고, 영화는 비디오의 내용이라는 식이다). 그러나 실상 더 새로운 매체, 심지어 존재하지 않는 매체도 그 이전의 매체 안에 ‘둥지를 틀’ 수 있다. 특히 이미지와 의사전달, 가상현실 환경, 공간이동, 아직 발명되지 못한 뇌 이식등에서의 기술혁인을 예언하고 있는 공상과학영화에서 그러하다. 새로운 매체의 발명은 불가피하게 유토피아이자 디스토피아인 일련의 가설적 미래를 만들어 낸다. 문자가 인간의 기억을 파괴할 것이라 예언할 때 플라톤이 생각했던 것처럼 말이다.
9. 매체는 주소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매체에 말을 걸 수도 없다. (모든 매체들을 포함한 일반 분야로서 매체를 칭하는) ‘매체에 말 걸기’라는 관념은 전적으로 신비적이며 역설적인 개념이다. 매체는 주소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매체에 말을 걸 수도 없다. 일신교의 신이나 현대 공상과학영화의 ‘매트릭스’처럼, 매체는 모든 곳에 있으나 아무 곳에도 없고, 단수인 동시에 복수다. 매체는 “우리가 살고 있고 움직이고 있으며 우리의 존재를 담보하고 있는”장소다. 매체는 특정한 장소나 사물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메시지와 재현이 무성하게 성장하고 순환하는 공간이다. 매체의 주소를 묻는다는 것은 우편체계의 주소를 묻는 거소가 같다. 특정 우체국은 있을 수 있지만, 우편업무라고 알려져 있는 매체는 주소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자기 안에 모든 주소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주소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10. 우리는 매체의 이미지에게, 매체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말을 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체에 말 걸기’를 할 수 없으며, 매체 자체가 우리에게 말을 걸 수 없다. 우리는 매체의 이미지들, 즉 틍정 미디어스케이프에 있는 고정 관념들이나 인간화된 형상들(매체의 스타, 거물, 스승, 대변인)에 말을 걸고, 그 이미지들이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매체가 우리를 ‘환호’하거나 ‘호명’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매체에 인격을 투사하고 있는 것이며, 우리가 그 수신인이 되는 화자인 매체에 말을 걸고 있는 것이다. ‘매체의 주소’는 두 가지 상이한 형태를 띤다. 하나는 형상적이며, 다른 하나는 공간적이다.①말하는 주체가 수신인에게 하는 것과 같은 ‘말 걸기’. 이 경우 매체는 아바타로 재현된 얼굴과 육체를 가지고 있다(매트릭스가 ‘요원’을 통해 말하고 해커가 그에 응답하는 것처럼, 혹은 마치 매체 전문가가 그 자체로 ‘매체’인 양, 맥루한이나 보드리야르가 매체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매체를 ‘위해서’ 금언들을 말할 때처럼). 혹은, ②위치, 장소, 공간, 발화지점으로서의 ‘주소’. 이 경우 중요한 것은 그 주소가 어디에서 ‘오는갗 하는 문제다.
매체가 공간이자 육체, 풍경이나 형상의 이미지로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매체는 이미지와 관련시켜 생각되는 모든 양가성을 우리 안에서 만들어 낸다. 매체는 보이지 않는 매트릭스거나 과잉되어 보이는hypervisibel 스펙터클이며, 숨은 신이거나 그의 육화된 살아 있는 말씀이다. 매체는 우리 의지의 단순한 도구이거나, 갈수록 완벽해지는 의사전달 행위의 수단이거나, 혹은 우리를 노예 신세와 멸종으로 이끄는 통제 불가능한 기계다. 따라서 ‘매체에 말 걸기’를 시작할 수 있는 적절한 지점은, 매체가 생명을 부여해 주고 역으로 매체를 밝혀 주는 형식들인 ‘매체 이미지’라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316~324p]
- 감정이입은 보는 사람과 대상 사이의 미메시스적인 관계이자 동시에 보상적인 관계다. 미메시스적 관계인 이유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표현을 빌리자면) 보는 사람이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되”고 자신의 언어(이 경우에는 의미 없고 끝없이 반복되는 ‘수다 떨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림이 그리는 것과 관계되듯이, 추상적이고 비非지시적이며 자기형상적인autofigurative 말은 언어와 관계되는 것과 같다. 보상적인 관계인 이유는, 이미지가 결여하고 있는 것, 그것이 필요로 하거나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 그것의 시각적 순수성에 적절한 ‘목소리’를 보는 자가 보증해 줌으로써 이미지의 침묵을 보상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341~342p]
- 다시 말해, 내가 직접적이고 비매개적인 친민설에 너무 서투르기 때문에, 사회적 관계를 정립할 수 있는 대상이나 이미지, 장난감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내가 다른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있는 부족한 점일 것이며, 어째 됐든 이론이란 늘 특정 종류의 결여나 결핍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사유에서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이론화하며, 설명이나 서사가 없으므로 사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다에 가설적 그물을 던져 무엇이 걸려드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352p]
- 연극이 시작되면 세 명의 오랜 친구들인 세르주, 마크, 이반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 세르주가 온통 하연색뿐인 어떤 그림을 20만 프랑을 주고 산것을 축하하기 위해서이다. 세르주는 완벽한 심미주의자로, 최근 유행하는 작가가 그린 것처럼 보이는 이 작품의 가치를 확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작품을 미술이론, 심지어 해체이론과 관련하여 토론할 준비가 되어 있다. 마크는 세르주의 (예전) 조언자이자 아버지 같은 인물로, 처음에는 이 그림이 ‘쓰레기’라면서 열띤 논쟁을 촉발한다. 반면 이반은 이 삼각관계에서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중간자다. 그는 처음에는 이 그림의 가치를 조심스럽게 인정하지만, 세르주가 그토록 많은 돈을 썼다는 사실에 대해 자기 회의적인 시끄러운 웃음을 터뜨리자 대화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들 각자는 또한 집에 그림을 소장하고 있기도 하다. 마크는 고전적인 풍경화 한점을 아파트에 소장하고 있으며, 이반은 아기 아버지가 그런 키치스러운 정물화인 ‘모텔 그림’을 소유하고 있다. 따라서 이 세 명은 더 상세히 말하면 모더니스트 대對 고전주의자 대 감상적 기념품 수집가로 설명될 수 있다. 이들은 다양하게 짝을 이루면서 그림에 대해 논쟁한다. 그리고 논쟁이 격론으로 치달으면서 셋의 우정은 위기에 처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세르주는 그림보다 친구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보여 주기 위해 마크에게 작품을 파란 매직펜으로 훼손해도 된다고 허락한다. 마크는 그림의 한쪽 구석에서 다른 쪽으로 사선 하나를 그리고는 언덕을 활강하는 스키어의 형상을 그린다(이 고의적 작품 훼손 행위를 보면서 청중들은 전율의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친구들은 식사를 하기 위해 다시 그림 앞에 모이고, (다행히 물에 지워지는) 매직펜을 지운다. 그들은 캔버스를 다시 벽에 달고, 연극은 마크의 독백으로 끝난다. 마크는 그림을 사라진 스키어가 횡당했던 풍경화로 시적으로 묘사한다.
『예술』은 예술작품을 사회적이고 대화적인 대상으로 보는 관념을 훌륭하게 다룬 작품이다. 이 작품은 내가 서술한 바 있는, 과도하게 가치 부여된 대상들의 세 가지 형태들을 거쳐 간다. 즉 페티시 대상(특히 과장된 교환 가치를 가진 상품 페티시)에서 시작하여, 역으로 경멸을 받는 역겨운 대상이자 추악한 쓰레기(‘쓰레기’라는 마크의 평가)로 옮겨 간다. 그러고 나서 우상으로 발전하며(마크는 그 그림이 세르주의 아버지격인 자신을 대체했다고 불평하면서 실제로 우상이라고 부른다), 마지막으로 토템이 된다(훼손된 뒤 공동체 향연의 중심으로 다시 정화된 희생제의의 대상). 그 그림은 또한 극에 부재하는 여성의 대역이기도 하다. 여성이 그러하듯이, 이 그림은 ‘남성들 사이에서’ 침묵하는 중재자 역할을 한다. 관계의 위기를 촉발하고 마지막에 그 위기를 해결하는 교환의 매체인 것이다. 백색의 빈 서판tabula rasa으로서 이 그림은 비어 있는 기표이자 자기 지시적인 ‘사물’, 그리고 ‘텅 빈’ 도상의 역할을 하며, 서사와 담론에 의해 채워지고 설명과 묘사에 의해 활성화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353~354p]
- 즉, 원주민 회화가 관광업을 넘어서 국제적으로 유통되고 상품화되어 미술계로 들어선 것은 대부분 원주민 회화와 추상화의 시각적 유사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원주민 회화는 기하학적이고 회화적인 추상에 단련된 서구인들의 시선에 호소력을 발휘한다. 유럽인들이 (당혹감에서) ‘원시주의’라고 불렀던 다양한 형식들은 말할 것도 없다. 원주민 회화는 일정한 순수한 시각적 쾌락(복잡한 패턴, 생생한 색채, 탁월한 화법)과 함께, ‘독창적’original일 뿐만 아니라 ‘원주민다운’aboriginal 신비감, 진정성, 아우라라는 부가가치들을 제공한다. 원주민 회화를 구매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 그림에만 고유한 특정 이야기에 처음 입회하는 사람이 된다. 그것이 비록 현장에서 날조된 이야기일지라도 말이다. [355~356p]
- 곰리의 조각상을 마주하는 경험에는 체계적 이중성이 수반되며, ‘깜짝 놀라 다시 보는 반응’double-take이 존재한다. 곰리의 조각상들은 발터 벤야민이 ‘변증법적 이미지’라 불렀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정반대되는 정동affect과 해석이 융합된 몹시 모호한 형상들이며, 가장 명백하고 자명한 것에 대해 ‘거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위험을 감수한 작품들이다.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작가의 의도가 작품의 의미를 완전히 결정하는 것은 아니며, 비판적 해석 또한 그러하기 때문이다. 만일 작가의 의도가 작품의 의미를 결정한다면, 우리는 작품 없이 그저 작가가 하는 말을 듣기만 하면 된다. 조각의 자리에 인터뷰가 들어서는 것이다. [378p]
- 월러스 스티븐스는 하나의 인공물이 어떤 장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감각을 제공해 주었다. 외로운 형상, 특히 목격자나 감시자로 서 있는 형상은 그 장소의 느낌 전체를 바꾼다. 하이데거가 암시했듯이, 조각된 대상은 그 장소를 하나의 단순한 장소보다는 인간적인 장소로, 모임의 장소로 ‘세운다’. 게다가 그 형상이 가진 힘과 웅변은 그것의 몸짓이나 극적인 주장에 반비례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그 형상이 수동적이고 특징이 없으며 자기 생각에 골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수록, 자신을 둘러싼 공간에 더 많은 ‘지배력’을 행사하게 된다. [381~382p]
- 곰리는 최근 거대 공공작품인<북쪽의 천사>Angel of the North(그림 68)와<양자구름>Quantum Cloud(그림 69)에서 주조된 육체와 미술전시의 관습적 공간의 경계를 넘어서 (미국인들의 표현에 따르면) 바깥으로 ‘뻗어나가는’ 과정을 계속하고 있다.<북쪽의 천사>는 팔을 벌려 환영하는 전통적 몸짓을 하면서 날개를 활짝 펴고 있다. 이는 곰리의 작품이 보여 주는 익숙한 양극성들을 결합하고 있다. 천사는 날기 위해서 날개를 활짝 펴지만, 또한 시속 160킬로미터에 이르는 바람에 저항하기 위해 확고하게 뿌리박은 채 서 있기도 하다. -중략- 이제 중요한 질문은,<북쪽의 천사>가 무엇을 의미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그 장소의 토템이 되었는가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미국 원주민 토템 기둥에서 종종 발견되는, 날개를 활짝 편 천동새 형상을 상기시는 것을 넘어, 버려진 탈공업화된 황무지를 연상하게 하며, 그럼으로써 그곳을 하나의 장소로 세우고 부활시키는 데 일조한다. [391~393p]
- 미국 아버지라면 모두 잘 안다. 그들은 자연스러운 가족사진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형식적으로 찍은 가족사진에만 등장한다는 것을 말이다. [417p]
-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미지는 생명력 혹은 생기의 비유적 의미와 글자 그대로의 의미 사이를 진동하는 두 가지 기본 형태들 안에서 활기를 띠게 된다. 즉, 이미지는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그것이 실제 살아 있다고 믿기 때문에 살아 있게 된다. 인간 제물이나 도덕적 회심을 요구하는, 눈물 흘리는 성모상과 말 없는 우상의 경우가 그러하다. 혹은, 영리한 예술가/기술자가 이미지를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살아 있게 된다. 인형조종자/복화술사가 동작과 목소리를 통해 인형을 움직이게 하는 경우, 혹은 거장 화가가 화룡점정으로 모델의 생생함을 포착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따라서 이미지를 생명형식으로 보는 관념은 늘 믿음과 지식, 환상과 과학기술, 골렘과 복제생물에 대한 질문을 모호하게 품고 있다. 프로이트가 ‘언캐니한 것’the Uncanny이라고 불렀던 이 중간지대는 아마도 매체로서의 이미지의 위치를 지칭하는 가장 좋은 이름일 것이다. [427p]
- 고정관념은 특히 살아 있는 이미지의 중요한 사례다. 고정관념은 바로 환상과 기술적 현실 사이에 있는 중간지대이자 더 복잡하고 친밀한 영역을 점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고정관념의 이미지는 살아 있는 존재의 몸 위에 직접 그려지거나 얇게 덧씌워져서, 보는 사람의 지각장치에 각인된다. 그리고 가면을, 혹은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는 (두 보이스의 표현에 따르면) ‘베일’을 형성한다.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이미지의 ‘독립된’ 형태들(인형극, 말하는 그림, 악령이 깃든 인형, 소리 나는 우상)과는 달라, 고정관념은 특수하거나 예외적인 형상이 아니라 보이지 않거나 혹은 반만 보이는 일상적인 형상이다. 그리고 일상생활에 교모하게 스며들어 다른 사람들과이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스크린이 된다. 아니, 현실적인 의미에서는 그 만남을 불가능하게 하는 스크린이 된다. 고정관념은 볼 수 있는 것에서부터 들을 수 있는 것까지 감각적 레지스터를 가로지르면서 순환한다. 그리고 으레 투명하고 읽기 쉬우며 들리지 않고 보이지도 않는 무의식적이며 부인된 채 남아 있을 때 가장 효과적이며, 새로운 인식으로 확증되기를 기다리면서 잠복해 있는 [타인에 대한] 의혹일 때 가장 효과적이다. 따라서 고정관념은 통상, “나는……를 반대하지는 않지만……”이나 “나는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지만……”과 같은 부정하는 표현을 수반하면서 고정된다. [427~428p]
-<뱀부즐리드>는 그림에 대한 그림인 메타그림, 다시 말해 이미지의 삶, 특히 인종차별적 이미지의 삶과 그 이미지가 매체와 일상생활에서 순환하는 방식에 대한 자의식적 탐구를 수행하는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스파이크 리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나는 사람들이 이미지의 힘에 대해 생각해 보기를 원했다. 단순히 인종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어떻게 사용되고 어떤 종류의 사회적 영향력을 갖는지, 우리는 어떻게 이야기하고 생각하고 바라보는지에 대해 생각하기를 원했다. 특히 영화와 텔레비전이 어떻게 출발부터 왜곡된 이미지를 역사적으로 양산하고 영속화해 왔는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다. 영화와 텔레비전은 그런 방식으로 시작되었으며, 지금 우리가 서 있는 21세기 초에도 그러한 광기의 많은 부분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있다. [435~436p]
-<뱀부즐리드>가 말하려 하는 것은 결코 명확하지 않으며, 이것이 인종을 그리는 과정 자체에 대한 영화로서 이 영화가 지닌 최고의 미덕이다. [446p]
- 내가 이 개념에 내재된 근본적인 변증법적 긴장을 전면화하기 위해, 더 간결한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라는 단어를 두고 혀가 꼬이는 바이오사이버네틱스biocybernetics라는 다음절 단어를 쓰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이버네틱스라는 단어는 배의 조타수를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왔으며, 따라서 통제와 지배의 분야임을 암시한다. 이 개념을 고안한 노버트 위너Nobert Wiener는 사이버네틱스를 “기계와 동물을 포함한, 의사소통과 통제에 대한 이론의 전 영역”을 뜻한다고 말했다.(『옥스포드 영영사전』,1948년판). 반면, 비오스bios는 통제에 종속될 수는 있으나 ‘자신만의 삶’을 고집하면서 어떤 방식으로든 그러한 통제에 저항할 수도 있는 살아 있는 유기체의 영역을 일컫는다. 따라서 바이오사이버네틱스는 의사소통과 통제의 영역뿐만 아니라, 통제를 피하고 의사소통을 거부하는 영역 또한 지칭한다. 다시 말해, 나는 우리 시대를 정보 시대, 디지털 시대, 혹은 컴퓨터 시대라고 기술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는 관념에 문제를 제기하고자 하며, 이러한 계산과 통제의 모든 모델이 (컴퓨터 바이러스에서 테러리즘까지) 새로운 형태의 게산 불가능성과 통제 불가능성과의 투쟁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보는, 더 복잡하고 상충되는 모델을 제시하고자 한다. ‘정보시대’는 ‘잘못된 정보 시대 혹은 탈정보 시대’라고 불리는 것이 더 적절하다. [452p]
- 나는 바이오사이버네틱 복제가 우리 시대의 근본적인 기술결정 인자로서 발터 벤야민이 말했던 ‘기계복제’mechanical reproduction를 대체했다는 대담한 주장을 제시할 것이다. 기계적 복제 가능성(사진, 영화, 그리고 조립라인과 같은 산업 과정)이 모더니즘의 시대를 지배했다면, 바이오사이버네틱 복제(초고속 컴퓨터, 비디오, 디지털 이미지, 가상현실, 인터넷, 유전공학의 산업화)는 우리가 포스트모던이라고 부르는 시대를 지배하고 있다. [458p]
- 하지만 새로운 이름표를 붙인다는 것은 탐구를 종결하는 것이 아니라 시작하는 일일 뿐이다.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의 정신을 따른다면, 모든 용어는 재검토될 필요가 있다. 벤야민이 일찍이 통찰했듯이, ‘예술’art/kunst은 단지 회화, 조각, 건축과 같은 전통 예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시대에 출현하고 있었던 새로운 기술 매체의 전체 영역(사진, 영화, 라디오, 텔레비전)을 가리킨다. ‘작품’work또한 예술의 대상(‘예술품’kunstwerk)이냐, 예술의 매체냐, 혹은 예술에 바쳐지는 노고 자체(‘예술작업’kunstarbeit)냐를 결정할 수 없는 매우 모호한 용어다. 기술의 중심 문제가 상품의 ‘대량생산’이나 동일한 이미지의 ‘대량복제’가 아니라, 생명과학의 복제 과정과 무한히 변화 가능하고 디지털로 살아 움직이는 이미지의 생산이라는 점에서, 복제reproduction와 복제 가능성reproducibility 또한 이제 완전히 다른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조립라인 위의 대표적 대상이 더 이상 기계가 아니라 가공된 유기체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그림84)? 또한, 이 유기체가 자라게 되는 매체가 디지털 코드와 아날로그 코드의 혼합일 때, 이 유기체의 삶/생명은 어떻게 변하는가? 즉, 매체이론가 프리드리히 키틀러가 말했듯이, 겉보기에는 감각적인 출력으로 보이지만 그 아래에는 문자와 숫자를 조합한 암호의 흐름이 있는 ‘눈속임’일 때, 이 유기체는 어떻게 되는가? [459~460p]
- 이제 우리는 복제본은 원본보다 훨씬 더 아우라를 가지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유일무이한 원본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제 단순히 명목적이거나 법적인 허구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복제본은 원본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향상시킨 것 혹은 강화시킨 것이 될 충분한 기회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소리와 시각 이미지의 디지털 복제는 생생함이나 진짜 같음을 훼손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그것이 나은 원본을 실제로 더 낫게 만들 수 있다. 예술작품을 찍은 사진은 예술작품의 미세한 흠이나 먼지를 ‘문질러 닦아’ 제거할 수 있다. 원칙적으로, 유화가 낡아서 생긴 흔적도 디지털로 제거될 수 있으며, 작품은 복제 과정에서 그 순수한 원래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는 여전히 벤야민이 대상을 둘러싼 역사와 전통의 축적과 연관시켰던 ‘아우라’의 상실을 수반할 것이다. 그러나 아우라가 원본의 생명력을, 즉 원본의 ‘숨결’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디지털 복제본은 원본 자체보다도 더 원본처럼 보이고 들릴 수 있다. 어도비 포토샵Adobe Photoshop의 기적적인 프로그램 구성으로 인해 심지어 원본과 복제본 사이의 변형의 ‘역사’ 또한 보존됨으로써 그 어떤 변형도 취소될 수 있게 되었다.[461p]
- 바이오사이버네틱스가 가져온 두 번째 결과는 새로운 도구와 장치의 도입으로 인해 예술가와 작품, 작품과 모델의 관계가 바귀었다는 것이다. 이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게, 벤야민은 수동복제와 기계복제의 시대를 마술사와 외과의사, 화가와 카메라맨에 비유한다. 그는 말하낟. ‘외과의사는 마술사의 정반대 위치를 표상한다. 마술사는 자신의 손을 얹음으로써 병든 사람을 치유한다. 반면 외과의사는 환자의 몸을 절개한다.……마술사와 외과의사의 관계는 화가와 카메라맨의 관계와 같다. 화가는 작품 속에서 현실과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는 반면, 카메라맨은 현실의 그물망 속으로 깊숙이 침투한다. [462~463p]
-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극적이고 가장 결정적인 역사적 사건인 전쟁조차도 우리 시대에는 철저하게 불확정적이고 불명료한 형태를 띠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미국은 전시체제다. 그러나 이 전쟁은 선전포고도 되지 않은 모호하고 새로운 종류의 전쟁으로, 적은 아무데도 없는 동시에 모든 곳에 있고, 그 명확한 영토나 정체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적은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같은 먼 곳에서 살고 있지만, 동시에 플로리다에 있는 우리들 사이에서 살고 있다. [465p]
- 그렇다면, 이러한 기업을 생명형식이자 예술품으로 부르지 않고, 다국적 자본주의를 그 서식지라고 부르지 ddksg은 채 이러한 생산양식을 비판하는 것은 이 주제의 외부틀outer frame을 놓치는 일이다. 자본주의는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게임이자, 손톱과 발톱을 피투성이로 물들어야 하는 제1의 자연의 비인간적인 다원주의적 논리를 정당화하는 것에 의해 작동하고 그것에 호소하는 제2이 자연이다. 단지 생명공학 기업들이 새롭게 가공된 식물, 동물, 식료품의 유전자 코드에 대한 저작권을 재빠르게 전유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혹은 이 기업들이 곧 인간 유전자에도 저작권을 걸고 인간의 태아를 사육하게 될 것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 기업들 자체도 살아남기 위해서 경쟁기업을 파괴하거나 잡아먹어야 하는 바이오사이버네틱한 ‘생명형식’이자 집단적 유기체라는 더 심층적인 사실 때문에 그러하다. [469p]
- 1. 민주주의 혹은 ‘평준화’라는 오류에 대하여, 순수예술과 대중문화사이의 구분은 우리 시대에 사라졌다고, 혹은 매체들 사이의 구분이나 언어 이미지와 시각 이미지 사이의 구분은 없어졌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정말 사실인가 하는 것이다. 초대형 전시회는 미술관이 이제 스포츠 이벤트나 서커스와 구별할 수 없는 대중매체가 되었음을 의미하는가? 사태가 그렇게도 단순한 것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몇몇 학자들이 예술적 이미지와 비예술적 이미지를 동시에 고려하기 위해 ‘이미지의 영역’을 열어젖히기를 원한다고 해서 이러한 영역 사이의 차이가 자동적으로 폐기되는 것은 아니다. [498p]
- 지금까지 내가 보았던 가장 재미있고도 기묘한 ‘보여 주고 말하기’ 퍼포먼스는 자신의 9개월 된 아기를 ‘소도구’로 가지고 나왔던 어느 여학생의 발표였다. 그녀는 아기를 시각문화의 대상으로 보여 주면서, 아기의 특수한 시각적 특성들(작은 몸, 큰 머리, 통통한 얼굴, 반작이는 눈)이 합쳐져서 우리가 ‘귀엽다’라고 부르는 이상한 시각적 효과를 발생시킨다는 점을 이야기 했다. 그녀는 이 귀여움을 설명할 수 없다고 고백하면서, 그러나 그것은 시각문화의 중요한 한 측면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아기에게서 나오는 모든 다른 감각적 신호들(특히 냄새와 소리)은 ‘귀엽다’라는 상쇄효과가 없었다면 그 신호들을 낳는 대상을 경멸하고 심지어 없애고 싶을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발표에서 정말로 놀라웠던 것은 그아기의 행동이었다. 엄마가 진지하게 발표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아기는 엄마의 품속에서 몸부림치고 청중을 향해 얼굴을 찡그리고 청중의 웃음에 반응을 했다. 그리고 처음에는 겁을 먹었다가 차차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즐겁고도 적극적으로 청중을 끄는 행동을 했다. 아기는 엄마가 유아의 시각적 특성에 대해 ‘말하기’를 (중간에 자주 중단되었지만) 계속하는 동안 스스로를 ‘과시’하기 시작했다. 그러써 대위법적인 혼합매체 퍼포먼스라는 총체적 효과가 발생했는데, 이는 시각과 목소리, 보여 주기와 말하기가 완전히 봉합될 수 없음을 강조하고, 반면 ‘보여 주고 말하기’라는 것 자체의 성격이 몹시 복잡하다는 것을 예증했다. [508~509p]
- 『아이코놀로지』에서 이미지의 이론화를 위한 기틀을 놓은 미첼은『그림이론』Picture Theory(1994)을 통해 ‘이미지가 등장하게 되는 구체적이고 재현적인 대상’인 ‘그림’에 대한 분석을 전개한다. 이렇게 ‘이미지’에서 ‘그림’으로 옮겨 간 것은 당시 대중문화와 비판이론에서 종종 회자되던 ‘그림으로의 전환’pictorial turn이라는 관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기 위해서였다. ‘그림으로의 전환’이란 이제 지배적인 표현양식이 언어에서 시각이미지로 대체되고 있다는 다소 근심 어린 통념이었다. 미첼은 ‘그림’을 시각성, 장치apparatus, 제도, 담론, 육체, 형상성figurality의 복합적 유희로 읽으며, 따라서 언어와 떼려야 뗄 수 없을 만큼 긴밀하게 얽혀 있는 것으로 사고한다. 이에따라 미첼은 ‘순수하게’ 시각적이거나 언어적인 예술은 없으며 모든 예술은 (텍스트와 이미지가 결합된) ‘복합 예술’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모든 매체는 상이한 코드와 담론적 관습, 감각적이고 인지적인 양식들이 결합된 ‘혼합매체’다. 긜고 그림과 텍스트 사이의 상호작용은 재현 자체를 구성한다. 이에 따라 미첼은 그림과 언어의 관계를 역동적이고 변증법적인 관계로 볼 것을 제안하며, 상이한 역사적 문맥에서 그림과 언어가 어떻게 공존하는지, 서로를 어떻게 무시하거나 배제하는지, 어떻게 서로를 억압하려 하면서도 서로에게 생명력을 주는지를 탐구한다. [51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