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의 역사

지은이 / A. 리샤르 | 옮긴이 / 백기수, 최민

by Joong

미술비평의 역사
A. 리샤르 / 백기수·최민
미술책방 초판 1쇄 2000년 5월 1일
초판 2쇄 2004년 4월 15일
발행인 이기웅
발행처 열화당(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문발리 520-10 파주출판도시)


- 예술 작품은 우리들 마음속에 어떤 감동적 인상(경탄, 반감, 만족)을 불러일으키는데, 그때 우리의 지성은 그 대상을 인심함과 동시에 그러한 감동도 인식한다. 예술에 대한 감수성의 연구와 예술 그 자체에 관한 성찰, 이 두 가지는 미학(美學)이란 학문의 내용을 이룬다. 다른 모든 학문이 그러하듯이 미학도 물리학의 법칙에 비길 수 있을 만한 어떤 보편적인 진리를 확립하려는 열망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연구하려는 대상은 그와 같이 보편적인 것에 관한 학문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앞에 있는 예술 작품에 대한 판단의 메커니즘이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미적(美的) 판단의 기초를 이루는 것으로서, 때로는 명확하게 그리고 흔히는 애매모호하게 정식화(定式化)되어 있는 판단 법칙(기준)에 관해서 연구하려는 것이다. 그러한 기준을 구체적으로 적용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곧 비평, ‘문학 작품이나 미술 작품 등을 판단하는 기술’인 것이다.
미적 판단의 정당성과 적합성에 관해서 사람들은 논쟁을 거듭해 왔는데, 이러한 미적 판단을 정당화하려는 데에서 예술 비평이란 표현이 나오게 된다. 몽테뉴 이래 인간의 세계가 무수한 관습으로 지배되어 있다는 사실의 발견에 자극받은 회의주의는, 다른 모든 사물에 대해서 그렇듯이 예술적 소산에 대해서도 적용되었다. 리들(Riedl)은 (1767년에) 인간의 취미가 시대와 국가와 개인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미학상의 모든 보편적인 기준을 부정했다. 그와 같은 기준의 다양성은 근자에 빅토르 바슈(Victor Basch)와 같은 비평가에게도 받아들여져서, 그는 리오넬로 벤투리(Lionello Venturi)가 극히 명쾌하게 내놓은 비평사의 이념에 대해 반대하고 있다.
지난 세기의 여러 이데올로기의 범람은 역사가의 눈을 철학적 체계로부터 외면하게 했고, 예술사가(藝術史家)들로 하여금 미학을 경시하게 하는 유감스런 결과를 초래했다. 작품 창작상에 미치는 여러 영향을 연구한다는 것은 흥미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예술가의 의도를 명확하게 하고, 작품의 의미를 도상학적(圖像學的) 연구에 의해서 밝힌다는 것은 지극히 타당한 일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양식이나 기법에 관한 연구는 위대한 예술가들의 독창성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어떤 설명이건 거기에는 일종의 선택이 포함되어 있으며, 예술에 관한 선택에는 가치 판단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한 가치 판단은 어떤 규범에 의거한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해서 각자 나름의 개인적 감정이 지배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면, 이는 그 주관성과 취약성을 시인하는 것이다. 상당히 박학한 고증학적(考證學的) 연구는 그런 의미에서 어쩔 수 없을 만큼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겠는데, 이는 선택의 자의성이라고 하는 것이 모든 다른 장점을 무의미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판단이라고 하는 것은 다소간에 의식적으로 어떤 비평의 법칙이나 교의(敎義)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고대 이래로 주요한 몇몇 관점들이 정식화(定式化)되고 그것이 다음 시대에 가서 차례로 논란되었다가는 다시 받아들여지고 해서 보완되었다. 이 책에서 우리는 바로 그러한 기본적 기준과 미술 비평의 몇 가지 주요한 방향을 살펴보려 한다. [7~8p]


- 그리스 예술이 이벽여 년 이상에 걸쳐(BC 6-5세기)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풍요함을 보여준 이후, 예술가들은 같은 주제의 반복이나 테크닉의 과시, 과장된 표현 중 어느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 무렵 학자들이나 때로는 예술가들 자신까지도 미술에 관해서 글을 썼는데, 이렇게 해서 미술 비평이 태어나게 되었으며, 그 첫 번째 기준은 유사성이었다. [13p]


- 한 폭의 그림은 선택된 몇 가지 요소로 구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적으로 아름답게 꾸민다고 해도 실제 모습과 닮지 않았을 경우에는 용서받지 못했다. 미(美)는 형태의 진실을 배척하지 않았다.
진실을 위해서 미가 희생이 되는 일도 흔히 있었다. 왜냐하면, 아카데미의 이상주의는 복고적이며 귀족주의적인 조류로서 권력층의 애호는 받았지만, 프랑스의 경우 근대적 취미의 주된 경향을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근대적 경향이란 다름아닌 레알리즘인데, 이는 퐁텐블로나 베르사유 궁전을 벗어나 그 밖의 세계를 자세히 살펴볼 때 분명하게 나타난다. 북구의 모든 유파는 본능적으로 이 레알리슴을 실행했다. 희고 차가운 빛 가운데 충실히 모사된 존재나 사물에 대한 그와 같은 심각하고도 종교적인 탐구는 곧 조물주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는 한 방법이었다. 15세기말에는 유머러스한 요소가 연극과 대중판화(大衆版畵)라는 우회로(迂廻路)를 거쳐 플랑드르 회화에 들어와서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의 공포와 기묘하게 결합되었다. 얼마 후, 익살꾸러기 브뤼겔(Brueghel)에게는 아주 주유 스럽고 의도적인 것으로 된다. [22p]


- 유사성의 기준은 미술 비평을 문학적 전위(轉位), 즉 시각적인 작품을 글로써 설명, 기술하는 작업으로 이끌어간다. 이 분야는 미술 비평 그 자체와 거의 같을 만큼 오래되었으며, 도판(圖版)에 의한 복제가 없었거나 있다 해도 희소했던 지난 세기말까지 타당성을 지니고 있었다. 루키아노스(Loucianos)로부터 테오필 고티에(Théophile Gautier)까지 미술 작품을 글로 기술하는 작업은 모든 비평적인 글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했다. [28p]


- 들라크르와(Delacroix)는 ‘착한 테오(Bon Théo)’의 문학적 환상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어느 하나의 그림을 들어 자기식대로 기술하고, 자기자신이 하나의 매력적인 그림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는 진정한 비평가의 과업을 해내지 못했다. 때로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는 기쁨으로써, 그가 찾아내는 그 뒤범벅인 표현들로 아롱거리게 할 수 있으면, 그리고 스페인이나 터키나 알함브라나 콘스탄티노플의 아트메이단(Atmeïdan)을 인용할 수 있으면 그는 만족하고 호기심 많은 작가로서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그는 그 이상의 것은 보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그와 같은 비평에는 교훈도 철학도 없을 것이다.”[32p]


- 사진술이 발달되고, 게다가 역사적 풍속적 주제가 사라지자 미술 비평의 한 형태로서의 문학적인 전위는 완전히 몰락하게 되었다. 『옛날의 대가(Maîtres d'autrefois』(1876)에서 프로망탱(Fromentin)은 아직도 부득이 글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실성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고, 문학적 유희 때문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테크닉에 주목하는 데 기쁨을 느낀다.
추상미술의 발전이 비평가들로 하여금 이에 상응하는 비평을 부활시키게끔 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새로운 시각 세계를 특징짓기 위해서는 비교되는 것을 발견하고 영역(이는 기법과 혼동되고 있다)을 한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32~33p]


- 리얼리즘은 과학을 발전시킨 사람들의 특유한 하나의 시각 방식이다. 서구에서는 이것이 몇 세기에 걸친 오랜 습관이 되어 있으나, 전세계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그것은 하나의 놀라운 예외이다. [37p]


- 바로 19세기말에 이르러 리얼리즘의 미학은 무너지고, 비평가는 유사성의 기준을 포기하게 된다. 이 혁명이 현대 예술의 기원을 이룬다. (13세기부터의) 리얼리즘의 추구 이래로 서구 미술사에 있어서 이보다 더 중요한 혁명은 없었다. 가장 결정적인 사실은 칠백여 년에 걸친 사실적 창작 후에 예술이 그 자율성을 되찾고, 예술가가 완전한 표현의 자유를 회복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유럽 미술은 세계의 미술과 다시 만나게 된다.
이 혁명의 기원으로서 사진술의 출현을 들 수 있는데, 사진은 부인할 수 없는 객관적 증거물로서 1850년부터 1880년에 걸친 ‘과학주의적’ 세대를 충분히 만족시켜 주는 것이었다. 화가들은 이와 경쟁해 보려고 했다. 메소니에(Meissonier)의 확대경으로 비춰본 것과 같은 회화, 그리고 보나(Bonnat), 다냥 부브레(Dagnan-Bouveret), 카롤뤼스 뒤랑(Carolus Duran)등의 우중충한 음영과 같은 것이라든가, 카이유보트(Caillebotte)와 드가(Degas)의 예사롭지 않은 원근법에 의한 단축법이나 구도법은 바로 여기에서 생겨났다. [39p]


- 자기가 바라지 않았으면서 혁명가가 되었던 사람들에 뒤이어, 의식적인 혁명가가 나타난다. “나는 위대한 예술가이며, 이를 나는 알고 있다”고 고갱은 쓰고 있다. 그리고 세잔느는 “살아 있는 화가는 한 사람밖에 없다. 그건 나다. …나와 같은 화가는 이백 년에 하나 있다”고 말한다.[40p]


- 말로(Malraux)는 이 혁명의 본질적 특성을 아주 탁월히 설명하고 있다.
첫째, 만드는 것(다시 말해서 물질로서의 회화)이 묘사하는 것, 다시 말해서 일루저니즘(Ilusionisme)을 대신한다. 화가들은 ‘회화가 재현하는 내용보다도 회화의 재료 그 자체를 애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둘째, 테마란 화가에게 있어서 작품에 독특한 양식을 부여하는 개성적인 작의(作意)에 사물을 종송시키는 기회에 불과하다. “고갱은 (테마를)프레스코(fresco)를 통해, 세잔느는 양괴(量塊)를 통해, 그리고 반 고흐는 단련된 철(鐵)을 통해 보았던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소재에 그들 각자의 개성적 필법을 불어넣었다.
셋째, 모델로부터, 입체감과 깊이의 묘사로부터, 그리고 모델과 유사하냐 아니냐 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된 색채는 색채 그 자체로서 취급된다. 반 고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눈앞에 있는 것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대신 나 자신을 강력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내멋대로 색채를 사용한다.”
“나는 마치 실물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방식으로는 될 수 있는 대로 그리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우리의 앞에 나타나는 모든 것을 잊고’ 회화적 이미지를 창조하는 세잔느는 “색채가 풍부하게 될 때 형태도 완전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형태의 정확성이, 채색된 반점의 표현적인 확대를 위해 희생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실에 비추어 보는 것은 더 이상 적용될 수 없게 된다. 이 유사성의 기준 대신에 어떤 기준들이 나타나게 되는가는 앞으로 살펴보게 될 것이다. [40~42p]


- 이러한 종류의 비평은 용이한 것이다. 주제가 특히 문학적이므로 화가는 교화적인 소재로 그림을 구성하고, 표현적인 자태나 감격적인 눈길이나 상징적인 소도구들을 모아서 그린다. 이에 비평가는 화가의 작업을 재해석하는 것이다. 즉 주제에 의해 해석한다. 용이하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한 그러한 일은 많은 이야기를 가능케 하는 이점이 있다. [53p]


- 예술은 정치 선전에 봉사해야만 했다. 전통적인 교육이 부활하고, 1932년에는 미술 아카데미가 재건되어 아카메디즘에서 살아남은 브로드스키(Brodsky)가 원장으로 앉게 되었다. 예술가들은 예술 위원이 관리하고 지도하는 협회로 조직되었다. (지도자의) 초상화, (들이나 공장에서 노동하는) 풍속화, 역사화가 다시 제작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가 하도 보잘것없었기에 스탈린이 죽기 이전에 벌써 정부는 예술의 정치화를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57p]


- 프루동(Proudhon)은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힘차고 다면적이며 때로는 모순을 드러내기도 하는 그의 사상은 예술에 관한 문제에도 적용되어 있는데, 그는 『예술의 원리와 그 사회적 사명에 관하여(Du principe de l'art et de sa destination sociale)』(1865)라는 진귀한 저작을 남겼다. 프루동은 자의적(恣意的)인 형식이나 예쁘장한 그림에 대해서 냉혹하다. 그는 ‘18세기와 19세기 예술의 불합리성’을 비난한다. 예술은 허망한 기분풀이가 아니다. 예술은 우리에게 빈곤이나 위선이나 여러 형태의 부도덕이라는 사회적 상처를 보여줌으로써 사회의 개선에 봉사하는 것이어야 한다. [60p]


- 헤겔은 사유와 예술과의 사이에 존재하는 기존의 관계를 전도시켰다. 예술 작품 속에서 변증법적 사유(종교적 또는 철학적인)의 반영을 찾아보는 대신 예술의 근원적이고 자율적인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예술은 결국 이차적 활동이 아니라 본질적인 창조의 현상이요, 사유의 제 일차적인 상태인 것이다.
걸작이라는 것은 반영이나 유희가 아니라 심오한 감정의 표현, 즉 오늘날 우리가 메시지(message)라고 부르는 것이다. 작품은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이 새롭고 독창적인 제작일수록 그만큼 더욱 많은 것을 표현한다. [72~73p]


- 그(텐느)는 예술 작품을 ‘그것이 의존하고 그것을 설명하는’ 하나의 전체 속에 두려고 한다. 즉 동일한 예술가의 다른 작품들, 그가 속해 있는 예술가 집단, 그리고 그것들을 낳은 사회, ‘그 주위에서 제창하는 민중의 무수하고 다양한 위대한 소리’ 가운데에 두려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법칙이 나오게 된다. “한 예술 작품, 한 예술가, 한 예술가의 집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속해 있는 시대의 정신과 풍속의 일반적인 상태를 정확하게 그려 보아야 한다. 거기에서 최종적인 설명을 찾아볼 수가 있다. 그 이 외의 다른 것을 결정하는 원초적인 원인이 거기에 있다.” 식물대(植物帶)라는 것이 있는 것과 같이 예술대(藝術帶)가 있다. 양자 모두가 특정한 풍토를 필요로 한다. “예술은 그것과 결부된 정신과 풍속의 특정한 상태와 함께 생겨났다가 동시에 소멸된다.”
그리스의 비극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독립과 함께 나타나고, 그것들과 함께 소멸되었다. 고딕미술은 봉건제도의 결정적인 확립과 함께 생겼다가 근대적 왕정의 등장과 함께 사라졌다.
네덜란드 회화는 네덜란드가 유럽에서 가장 번영했던 때에 활짝 피어났다가, 18세기에 영국이 유럽의 패권을 차지하게 되자 쇠퇴했다. 프랑스의 비극은 예술을 존중하는 군주정치 사회를 위해서 만드어졌다가, 혁명 때에 소멸한다. “내가 따르려는 근대적인 방법, 정신 과학에서 도입하기 시작한 방법은 인간이 만들어낸 작품, 특히 예술 작품을 사실로서, 또한 생산물로서 간주하고, 그 특성을 구명하며, 그 원인을 탐구하려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 환경의 연구는 어디에서 머무르는가. “예술 작품은 그것을 둘러싼 정신과 풍속의 일반적 상태인 하나의 전체에 의해서 결정된다.” 한 사회의 물질적 상태가 ‘주된 감정(sentiment majeur)’을 결정하며, 예술작품은 바로 그 감정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항상 외부의 위협을 받았던 그리스 도시국가는 건장한 전사(戰士)를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이것이 그리스 조각의 주요한 테마가 되었으며, 신의 형상을 나타내는 경우에도 그러했다. 중세의 공포감은 신비스러운 연애를 높이 추켜세웠으며, 이는 마치 군중의 기도와도 같이 하늘로 치솟는 교회당에 표현된다. 프랑스의 고전 비극은 그리스의 비극보다 루이 14세 궁전의 영향을 더욱 많이 받고 있다. 라신느(Racine)의 아킬레스는 “적의 살을 생으로 먹으려 한다”는 호메로스의 영웅보다도 오히려 콩데(Condé) 왕자와 더욱 닮았다. 끝으로, 18세기에 있어서의 도덕, 종교, 정치상의 혁명 후에 야심가, 욕심쟁이, 감상적인 사람, 회의(懷疑)하는 사람, 그리고 ‘세기병(世紀病)’ 환자 등등의 근대적 유형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주어진 사회의 연구는 그 사회의 정신 푸옽, 그 주된 감정을 명확히 규정짓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
작품의 관심이 사회를 올바르게 표현하는 데 있다고 한다면, 과학은 “모든 에술 형태에, 모든 유파에, 그리고 심지어 서로 정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예술 형태나 유파에도 공감을 가지며, 그것들을 모두 인간 정신의 발현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식물이 아니라 인간의 작품에 적용되는 일종의 식물학‘이다. [74~76p]
- 마르크스주의 비평은 흔히 매우 단순한 방식으로 소개되는데, 마르크스주의자 자신에 의한 경우에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즉 예술은 혁명적 입장, 말하자면 프롤레타리아의 이해관계에 봉사해야만 하며, 예술가는 ‘인민의 정치적 결속과 도덕을 강화하는’ 사명을 지닌다는 것이 그 요점이다. 레닌은 이와 같은 판단에서 인민의 당에 봉사하는 도구로서 예술을 이용했다. 그러나 권력의 명령에 예술을 예속시킨다는 것은 칼 마르크스에 가깝다기보다는 루이 14세에 더 가까운 처사다. 마르크스주의는 결코 정치, 사회적 순응주의(順應主義)는 아니다. [81p]


- 마르크스주의는 일종의 사회 철학으로서, 각 시대의 사회를 정태적(情態的)으로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변화를 설명하려고 한다. 그런 점에 있어서 마르크스주의는 헤겔의 생성의 철학에 연결되어 있다. 근본적인 명제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첫째, 한 사회는 생산 수단에 의해 조건지어진다. 이것이 소위 사적유몰론(私的唯物論)이라는 것이다. 생산 수단은 인간과 자연과의 어떤 관계를 해명해 준다. 이러한 관계에서부터 특정한 사회적, 정치적 구조가 생겨난다. 따라서 손으로 움직이는 방앗간은 주인(또는 상전)과 노예(또는 농노)로 이루어진 사회를 생겨나게 했고, 대자본을 요구하는 기계는 자본가와 노동자로 되어 있는 현대 사회를 생겨나게 했다. 이렇게 생산 수단은 사회의 근본 구조를 결정한다.
둘째, 계급투쟁은 역사의 원동력이다. 생산력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따라서 사회도 영원한 변화 과정 속에 놓여 있다. 어떤 계급들은 보다 큰 혜택을 누리며, 따라서 그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한다. 다른 계급은 그들로부터 그러한 혜택을 빼앗으려고 한다. 이러한 힘의 관계가 변화하면 새로운 유형의 사회가 낡은 사회 대신 들어서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봉건주의는 부르주아지에 의해 정복되었으며, 또 부르주아지는 프롤레타리아의 조직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
셋째, 이상의 두 가지 점보다 덜 엄격하게 결정된 것이지만 이데올로기 현상은 일종의 상부구조를 형성한다. 이것은 정치적, 도덕적, 종교적, 심미적인 학설이나 주의, 주장의 경우에 해당한다. 그것들은 의당 그것들을 만들어낸 작가가 속해 있는 계급의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현실이란 매우 복잡한 것이며, 이 복잡한 현실에 마르크스주의는 정확하게 부합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한 계급에서 다른 계급으로의 이데올로기적인 전이(轉移, 또는 자기소외) 현상을 고려에 넣어야만 한다. 즉 경제적, 사회적인 조건만이 작가나 예술가에게 직접적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플레하노프(Plekhanov)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궁정(宮庭)의 사치로, 셰익스피어를 16세기 영국 상업의 융성으로, 볼테르와 디드로를 18세기 산업혁명으로 완전히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에 대해 비웃었다. 이는 증기 기관차에 의해 인상주의를, 비행기에 의해 입체주의의 타당성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플레하노프는 경제적 현실과 예술 사이에는 최소한 네 가지의 매개적인 요소가 있다고 지적했다. 즉 다른 여러 생산력 간의 관계, 거기서 비롯된 사회·정치 체제, 그 다음으로 그러한 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 인간의 심리, 마지막으로 그의 심리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이데올로기 등이다. 그리하여 사회 심리학은 아주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게 되며, 사회가 진보함에 따라 그 비중도 더욱 커지게 된다.
사정이 이렇게 복잡다단하다고 해서 사상과 예술에 이르기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배계급의 권력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엥겔스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힘있게 강조했다. “지배계급의 사상은 또한 그 시대의 지배적인 사상이다. 달리 말하자면 한 사회의 물질적 권력을 쥐고 있는 계급은 정신적인 지배력도 아울러 지니고 있다. 물질적 권력을 쥐고 있는 계급은 동시에 지적(知的)생산 방법도 좌우한다.” 또한 인간은 결코 한 사회 속에 그가 처해 있는 상황이 제시해 주는 관념 전부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흔히 단순함으로 말미암아, 전염에 의해, 또는 허영심 때문에 그들 자신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게다가 모순되기까지 하는 이데올로기들을 받아들인다. [81~83p]


- 예술의 역할 예술은 다만 개인적인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자유로운 유희로 간주될 수도 있고, 일종의 사회적인 기능을 간주될 수도 있다.
첫째, 예술을 위한 예술 이론은 최근에 생겨난 것이다. 이 이론은 낭만주의자에 뒤이어 1832년 테오필 고티에, 파르나시앙(Parnassiens)과 함께 나타나서 사회적 불행이나 고통을 고발하는 데 예술을 이용한다고 주장하는 자연주의와 대립하게 되었다. 르콩트 드 릴르(Leconte de Lisle)는 흰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이상적인 그리스에 그 당시의 저속성(低俗性)을 대비시켰다. 1830년과 1848년의 두 차례의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문학가와 예술가들 중 어떤 이들은 불행을 고발하는 투쟁을 계속하고, 어떤 이들은 돈과 총검의 지배에 체념하여 ‘상아탑’ 속으로 도피했다. 플레하노프는 예술을 위한 예술은 지도적인 계급과 예술가와의 불화에서 비롯한 결과라고 보고 있다. 이들은 예술은 그 자체에 목적을 지니고 있으며,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 그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이 순수한 테크닉의 미학을 형식주의(形式主義)라 부를 수 있다. 주제를 멸시함으로써, 예술가만이 아니라 예술 그 자체도 세계로부터 은퇴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추상예술에 대해 ‘메마른 추상’(앙리 르베브르)이라고 비난한다. 더욱이 만약 형식만이 문제가 된다면 예술의 내용이 점차 제멋대로, 부도덕하거나 비인간적인 데로 빠져들어 가지 않을 하등의 이유도 없다. 인간적 유대는 파괴되고, 르페브르의 말대로 “고립된 개인은 그들의 부정적인 측면(즉 소외감, 불안, 잔인성, 멸시, 새디즘 등등)으로밖에 서로 소통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것이 예술의 역할이며, 그런 예술 제작은 다만 정신병학의 대상에 속하는 변태적인 징후로 간주되어야만 하는가.
둘째, 예술의 역할은 사회적이다. 예술은 일종의 사회적 기능이다. 그것은 사회 속에서 역할을 지닌다. 자유를 그처럼 중요시하는 현대의 예술가는 이 자유가 불안정한 것이며, 시대적 요청에 의해서 인정된 것임을 망각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그들은 이 자유가 민주주의의 진보에 의해 최근에야 쟁취된 것이며, 예술가는 그 자유의 대가로서 이르 쟁취한 계급에 대한 의무가 들에게 주어져 있음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83~84p]


- 마르크스주의 비평 방법은 한편으로는 움직이고 있는 환경 즉 변화하고 있는 살아 있는 사회 속에 작품을 위치시키는 분석의 방법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작품이 지니는 영향력을 고려하여 작품의 힘을 평가하는 방법이다. 그리하여 작품들은 역사 속에서, 즉 그 작품들이 불식(拂拭)시킨 과거에만 관련시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미래와의 관련하에서도 고찰된다.
기본적 입장 작품 속에서 볼 수 있는 몇몇 주요한 테마들은 기본적 입장으로 환원된다.
첫째, 현재 상태를 정당화하거나 찬양하는 입장이다. 지배계급은 예술의 역할을 바로 이렇게 생각한다. 이런 입장에서부터 어용(御用) 예술, 즉 우의화나 대규모의 역사화, 초상화 등이 생겨난다. 다비드의<대관식>(도판 43)은 갑자기 출세한 자들이 촌스러움을 감추려는 목적에서 장엄하게 보이고자 하는 욕망에 답하는 작품이다. 앵그르의<베르탱(Bertin)>(도판 44)은 1832년의 부르주아지가 지녔던 위엄과 간소함이라는 이상을 표현하고 있다.
둘째, 현실을 포기하고 제멋대로의 환상에 빠지는 입장이다. 이는 몰락하는 계급의 도피처이다. 고대적인 주제에 대한 낡은 취미와 중세 남프랑스의 음유시인풍의 양식은 일종의 알리바이로서, 마치 온순하고 낙오한 ‘젊은 프랑스(Jeune-France) 파’가 격렬하고 강한 색채의 중세를 동경했던 것과 같다.
셋째, 새로이 상승하는 계급의 젊음과 열광을 표현하는 활력과 희망이다. 여기에 빈번히, 몰락하는 계급에 대한 아주 신랄한 비판이 병행해서 따른다.
예술가의 출신 성분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가 개인적으로 차지한 사회적 지위나 그가 어떤 것을 사랑하고 어떤 것을 증오하는가 하는 점이 더 중요하다. 평민 출신의 많은 화가들이 왕정에 봉사했다. 이와는 반대로 대지주의 아들인 쿠르베는 의식적으로 혁명가로서의 자기를 내세우려 했다.<바리케이드>에서 인민의 에너지를 고양시킨 들라크르와는 루이 필립의 전권 대사이자 그의 총애를 받던 자의 아들이었다. [87~88p]


- 독창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작업과 작품이 필요하다. 또 이 독창성은 아카데미가 정해 놓은 제 장르의 위계질서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즉 ‘훌륭한 장르란 다름아닌 완벽함에 도달한 장르이다.’ 작업은 개인적인 노력이지 학교 공부는 아니다. [100p]


- 당시 위세가 당당했던 귀스타브 플랑슈(Gustave Planche)는 과도하게 평가되었었다. 그러나 그는 누구도 발견해내지 못했고 누구에게도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보다는 타고난 비평가이자 공화주의자인 테오필 토레가 보다 흥미있다. 1849년에 외국으로 망명해 1860년 사면받을 때까지 그는 프랑스에 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프랑스에 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1832-48년 살롱평」과「1861-68년 살롱평」을 저술했다. 망명 중 그는 뷔르거(Bürger, 한 시민)라는 이름으로 박물관과 미술품 컬렉션 연구 및 모노그래프를 출간했다. 1857년, 베르메르 반 델프트(Vermeer van Delft)를 발견, 세상에 널리 알린 사람은 바로 그였다. 그는 더 이상 현대에 맞지 않는, ‘시대에 뒤떨어진 신화취미(神話趣味)’, 다만 ‘추(醜)의 자연주의’에 지나지 않는 하잘것없는 모방, 신앙심이 결여된 종교 회화 등을 배격했다. 그는 그 시대의 인간을 표현하고, 그 이전에는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계급의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성실한 예술이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기원했다. [118p]


- 이러한 모더니즘의 미학에 호응해서 충격의 비평이 생겨난다. 즉 비평가란 설명하기 위해 통송화하는 사람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작품이 주는 놀라움의 효과를 감소시키게 되고 말 것이다. 오히려 비평가는 감상자의 관심을 자극하고 분노하게 하며 그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작품을 직접 체험하도록 이끌어 가야만 한다. 아폴리네르 자신은 부분적으로는 지적인 예술 옹호자라 할지라도, 감상자가 작품에 의해 정복당하고, 이해하기 이전에 작품에 매혹될 것을 바랐다. 아폴리네르는 큐비슴을 설명하지 않았다고 흔히 비난받는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폴리네르의 의도와는 상관 없는 일이다. 또 비평과 선전(宣傳)을 혼동했다고 비난받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상 그 두 가지는 항상 결합되어 왔던 것이 아닌다. [125p]


- 말로는 대중의 착각, 즉 예술을 정서로 본다든가 자연의 모방으로 본다든가 어떤 양식의 모방으로 본다든가 하는 것을 철저히 고발한다. 발레리는 “흥분이란 작가의 정신 상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말로는 이에 다음과 같이 맞장구치고 있다. “세계를 가장 민감하게 느끼는 사람이 반드시 예술가는 아니다.” 만약 예술이 감동적 순간들을 포착하여 정착시키는 것이라면, 그것은 재현이지 창조가 아니다. 그런 것이라면 감상적 주제만 선택하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다.(예컨대 ‘아이들의 놀이’ 또는 ‘바구니 속의 고양이’ 등등)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들도 현실을 벗어나 그 나름의 매력적인 상상적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의 데생은 더 이상 발전하지 않는다. 유아기가 지나고 현실에 대한 의식이 생기자마자 그것은 사라지고 만다.
예술은 자연의 모방도 아니다. 만약 자연의 모방이라면 밀랍인형(蜜蠟人形) 박물관이야말로 예술의 신전이 될 것이다. 예술은 개성적인 것이다. “회화는 중립적인 형식을 모른다. 회화에는 한 예술가가 발견했거나 그 이전에 다른 예술가들이 발견했던 형식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사실주의’ 운동 때문에 우리가 착각을 가지게 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운동들은 지나친 이상주의에 대한 반동으로서 그 ‘수정(修正)’으로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쿠르베의<화재(火災)>는 실제의 화재보다도 오히려 렘브란트의 작품에 훨씬 더 가깝다. [126~127p]


- 그렇다면 예술적 창조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그것은 우선 예술가의 기질에 맞는 주제를 선택하는 것이다. 일실(逸失)되어 지금은 없지만 바토의 작품 중에<십자가의 예수>와 같은 작품이 있었다고 어떻게 상상할 수가 있겠는가. 한 시대를 특징짓는 새로운 것이 반드시 주제가 되지는 않는다. 코로는 한번도 공장 같은 것은 그리지 않았다. 예술가는 모티프 속에서 그의 마음을 끄는 어떤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변용시킴으로써 자기 솜씨를 증명해 보일 수 있는 일종의 수단을 찾는다. 세잔느는 그릇 나부랭이를 훌륭하다고 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것으로써 자기밖에는 아무도 창조해낼 수 없는 어떤 그림을 만들어냈다. [128p]


- 오늘날의 미술 그러나 서구 회화는 계속 찬란하게 진보, 발전해 왔다. 모험의 미술, ‘위대한 항해자의 미술’이 지저인 미술의 뒤를 이어 나타났다. 그 대신 사진술과 영화가 허구의 일뤼지오니슴을 물려받았다. 미술관, 흑백 및 색채 복제 기술, 용이해진 여행의 덕분으로 사람들은 각자 나름으로 보다 폭넓은 선택을 할 수 있음으로써 전 세계의 상상의 미술관을 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몇몇의 시도들은 그러한 상상의 미술관에 포함될 수 없다. 예컨대 대중 미술이 그렇다. 대중 미술은 옛날에는 뒷전에 밀려나 두드러진 특색을 지니지 않았는데, 오늘날에 와서는 무미건조한 가공적(架空的)인 성격과 폭력 및 성(性)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그리고 또 실제로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는 소박한 미술, 고뇌는 나타나지만 전혀 예술적인 솜씨가 결여되어 있고, 제멋대로 현실 세계와 단절되어 있는 광인(狂人)들의 제작품들도 이 상상의 미술관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악령(惡靈)들이 들끓는 칼데아인(人)의 미술, 강렬한 흑인 미술, 비현실적인 현란한 색채의 대양주(大洋州)의 미술은 여기에 포함된다. 이는 바로 현대인의 염세주의적 사상 때문이다. 우리 현대인들은 폭력과 기이(奇異)함을 추구했다. 왜냐하면 인류 문화사상 최초로 불가지론적(不可知論的)인 문명이라고 할 수 있는 현대 문명은 그 기술적인 면에 있어서는 가장 큰 힘을 지니고 있지만, 도덕적으로는 가장 불안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데서 오늘날의 예술의 주요한 특징이 생겨난다. 그것은 끊임없는 의문과 폭력이라는 특징이다. 우리들의 문명은 어떠한 긍정적 신념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의문을 갖는다. “우리의 모든 예술은… 점차 그 자신의 것이라고 할 수 없는 한 세계에 대해 의문을 표시한다.” 현대 예술은 일종의 탐구의 예술, 모험의 예술, 문화를 지니지 않은 예술이다. 왜냐하면 “단지 의문만으로 이루어지는 문화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테크니그이 면에서 보자면 현대 예술은 폭력의 예술이다. 이제 묘사가 아니라 행동이 중요시된다. 화가들은 마치 “묘사되는 대상보다 재료 자체를 더 사랑하는 것 같다. -중략- 회화는 화포(畵布)와 직사각형의 틀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다. 회화는 새로운 비약을 하기 위해 새로운 재료를 탐구한다. 그래서 나무나 유리등의 물건에 직접 채색하는 실험이 등장한다.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미술은 타블로, 즉 네모난 화폭이나 조상(彫像)에 귀착하는 것이 아니라 오브제(object), 즉 미술 그 자체에 귀착한다.“ [136~140p]


- 베르니니(Bernini)가 파리에 체재하고 있을 때(1655) ‘젊은이들의 교육에 있어서, 그들에게 우선 미에 대한 관념을 형성해 주기 위해’ 학교에 아름다운 고대의 작품들을 비치해 둘 것을 충고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 형성된 이 미의 관념은 그들 일생을 통해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자연에 대면시켜 데생을 시키는 것은 그들을 해치게 할 것이다. 자연은 언제나 약하고 보잘것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반면에 고대의 작품을 올바른 비례 관계를 제시해 준다. [151~152p]


- 진실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지 않으면 안 된다. 합리적인 예술은 동시에 즐거운 예술어이야만 한다. [152p]


- 사람들은 미(美)의 규칙을 발견하고 정식화라려는 야심을 지녔었다. 그러나 사실상 사람들은 어떤 특정한 양식, 즉 한 세대의 취미에 맞는 양식을 규정했던 것이다. 고전주의의 본질적 모순(모델의 모방과 이상적인 도식을 조화시키려 한 점)은 진실하기도 하며 동시에 아름다운 고대의 작품들을 제작상의 모범으로 삼음으로써 일단 해결되었던 것처럼 보였다.
그 후, 사람들은 취미의 다양성, 즉 취미의 상대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이어서 미를 보편적 규칙 속에 한정시키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게 되었다. 그 다음 고대 예술 역시 다양한 것이며 점차 진화해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156p]


- 판단력 비판 1790년 칸트는 아카데믹한 미학과 규범적인 비평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놓았다. 우리에게 유일하게 문제되는 부분인 『판단력 비판』중 제 1부에서 그는 미적 판단을 검토하고 있다. 칸트가 말한 미를 정의하는 네 개의 명제를 다시 한번 상기해 보자.
첫째, “취미란 어떤 대상 또는 표상(表象)의 형식을 완전히 무관심적인 방식으로 만족감에 따라서나 불쾌감에 따라서 판단하는 능력이다. 이때 만족의 대상을 사람들은 미라고 명명한다.” 미란 모든 이해(利害)나 실제적 관심으로부터 벗어나 순수한 만족감을 주는 대상이다. 쾌적한 것은 오직 감각만을 기쁘게 한다. 그때 대상의 존재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만족감이란 개인적일 수밖에 없다. 카나리아 제도의 술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이와 반대로 미란 관조의 대상이다. 이때 그 대상을 자기의 것으로 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둘째,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고 보편적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것은 아름답다.” 미는 개념 없이, 말하자면 추론의 도움이 없이 기쁨을 준다. 미는 그것을 증명할 필요가 없이 기쁨을 준다.(미를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와는 달리 선(善)은 증명되고 설명된다. 선행은 어떤 도덕적인 교설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는 증명되지 않고 준거해야 할 기준도 지니지 않는다. 그것은 모방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비평도 한 폭의 그림의 아름다움을 설명할 수 없다. 작품 그 자체를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셋째, “미란 목적의 표상이 없이도 지각되는 것으로서의 어떤 대상의 목적성(目的性)의 형식이다.” 즉 미란 목적의 표상을 지니지 않은 목적성의 대상이다. 유용한 것은 어떤 목적을, 어떤 효용을 시사한다. 사람들은 한 대상이 어디에 쓸모가 있는가 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반며넹 아름다운 것은 그 존재 이유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은 작품의 조직 속에 내재하는 어떤 조화를 암시한다. 그리고 또한 동시에 작품과 우리의 본성 사이의 조화를 암시한다. 그것은 우리들의 이성과 상상력을 화해시킨다.
넷째, “개념이 없이도 필연적으로 만족감을 주는 대상이라고 인식되는 것은 아름답다.” 아름다운 것이란 보편적으로 필연적인 만족감을 주는 대상이다. 이성의 판단은 신중하고 잠정적이지만 아름다운 것은 절대적 판단의 대상이다. 이 판단의 확신을 가지고 만인에게 있어서 타당한 것으로 규정된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가정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점에서 예술이 지닌 종교적 특징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명제들은 미적 현상을 처음으로 올바르게 정의한 것들이다. 그것들은 규범적인 비평이 쓸모없음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 칸트 이후 예술 양식에 대한 모든 독단론, 미의 규칙 또는 미의 처방을 정식화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 몇몇의 미적 도그마에 준거한 모든 연역적 비평은 결정적으로 부정되었다. [158~159p]


- 모든 시대에 있어서 각종의 모든 예술과 모든 장르가 다 고르게 발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서구 회화의 고전주의적 시대는 16세기초이지만, 조각에 있어서 고전주의적 시대는 포시용의 과감한 주장에 따르면 13세기이다. 한편 사회적 환경에 따라 그 발전은 촉진되기도 하고 지체되거나 마비되기도 한다. 로마네스크 양식은 고졸기에서부터 고전주의적 단계를 거치지 않고 초기 바로크적인 단계로 직접 변화해 갔다.
이러한 주기를 초원할면 예술은 비시간적인 것이 된다. 즉 모든 형식이 동시에 오랜 기간 사용될 수 있다. 고대 이집트의 긴 역사와 현대의 혼란기가 이 점을 증명해 준다. [17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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