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뮬라시옹

지은이 / 장 보드리야르 | 옮긴이 / 하태환

by Joong

시뮬라시옹
1판 1쇄 펴냄 2001년 1월 22일
1판 19쇄 펴냄 2009년 2월 27일
지은이 장 보드리야르
옮긴이 하태환
발행인 박근섭, 박상준
편집인 장은수
펴낸곳 (주)믿음사(서울 강남구 신사동 506 강남출판문화센터 5층 (135-887))


- 시뮬라크르란 결코 진실을 감추는 것이
아니다. 진실이야말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긴다.
시뮬라크르는 참된 것이다 : 전도서 [9p]


- 시뮬라시옹 [9p]


- 오늘날의 추상은 더 이상 지도나 복제, 거울 또는 개념으로서의 추상이 아니다. 시뮬라시옹은 더 이상 영토 그리고 이미지나 기호가 지시하는 대상 도는 어떤 실체의 시뮬라시옹이 아니다. 오늘날의 시뮬라시옹은 원본도 사실성도 없는 실재, 즉 파생실재를 모델들로 가지고 산출하는 작업이다. [12p]


- 무엇인가가 사라져버렸다 : 추상의 매력을 낳았던, 어떤 것에서 다른 것 사이에 개재 되었던 至高의<다름>이 사라져 버렸다. [13p]


- 이제 더 이상 모방이나 이중성, 심지어는 패러디마저도 문제의 대상이 아니다. 문제는 실재가 그의 기호를 다 제공하여 기호로가 아닌 실재로 우발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모두 차단해 버린다. 완벽하고 프로그램적이며 변화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안정된 신호 기계와 실재의 조작적인 분신에 의하여 모든 실제 과정을 저지하는 작업이 문제인 것이다. [18p]


- 감추기는 가졌으면서도 갖지 않은 체하는 것이다. 시뮬라크르하기는 갖지 않은 것을 가진 체하기이다. 전자는 있음에 속하고 후자는 없음에 관계된다. 그러나 시뮬라크르하기는 더 복잡하다. 왜냐하면 시뮬라크르하기는 사실은 체하기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병든 체하는 사람은 단순히 침대에 누워 타인들에게 자기가 병에 걸렸다고 믿도록 하면 된다. 그러나 병의 시뮬라크르를 만드는 사람은 정말로 어떤 병의 징후들을 만들어내야 한다>(Littré). 그러므로 체하거나 감추기는 실재의 원칙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여기서 다르다는 사실은 여전히 명백하지만 단지 가려져 있을 따름이다. 반면에 시뮬라시옹은<참>과<거짓>,<실재>와<상상세계>사이의 다름 자체를 위협한다. 시뮬라크르 제작자는<진짜>징후들을 생산한다. 그렇다면 그는 병자인가 아닌가? 객관적으로는 그를 병자로도 건강한 자로도 취급할 수가 없다. 심리학과 의학은 바로 여기서, 앞으로도 영원히 발견될 수 없는 이 병의 진실 앞에서 무력해지고 만다. 왜냐하면, 만약 어떠한 징후라도<만들어질>수 있고, 그리고 그것이 자연적인 사실로서 받아들여질 수 없다면 모든 병은 시뮬라크르될 수 있거나 시뮬라크르 된 것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의학은 모든 의미를 잃어버린다. 왜냐하면 의학은 객관적 원인에 의거해 자연적인<진짜>병만을 다룰 줄 알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심리적 원인을 다루는 병리학은 질병의 객관적 원리가 끝나는 곳에서부터 모호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19~20p]


- 만약 성화상이 신의 플라톤적인 이데아를 감추거나 숨길 뿐이라고 믿었다면 그것을 파괴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사람이란 왜곡된 진실 개념을 가지고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상 파괴주의자들의 형이상학적 절망은, 이미지가 아무것도 숨기고 있지 않으며, 이미지가 요컨대 이미지가 아니라는 것으로부터 온다. 즉 이미지가 원래의 모델에 따라 바뀌는 것이 아니라, 자기 고유의 미혹으로부터 영구히 빛을 발하는 완벽한 시뮬라크르였다는 사실로부터 온다. 따라서 그들은 어떻게든 신성한 지시물의 이러한 죽음을 피해야 했던 것이다.
이미지에서 신의 그림자만을 보았고 정교한 선으로 그려진 이미지로서의 신을 공경하는 것으로 만족하던 성상 숭배자들과는 반대로, 이미지를 경멸하고 부정한다고 비난받은 성상파괴주의자들은 이미지에다가 그 정확한 가치를 부여한 자들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성상 숭배자들이야말로 가장 근대적이고 가장 모험적인 정신의 소유자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신이 이미지의 거울 속에서 투명해진다는 생각의 배후에는, 이미 신 재현의 顯現 속에 내포되어 있는 신의 죽음과 사라짐이 도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그들은 아마 신의 재현이 더 이상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음을, 재현이란 순수한 도박임을,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커다란 도박임을 알고 있었다. 또한 이미지가 그 뒤에 아무것도 숨기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미지를 벗긴다는 것이 위험한 행위임을 알고 있었다).
예수회 교도들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행동하는데, 그들은 신의 사실상 사라짐이라는 생각과 인간의식을 세속적이고 연극적으로 좆가한다는 원칙 위에서 그들의 정치학을 세울 것이다 - 권력이라는 현현 속에서 신의 사라짐. 초월성이 종말을 고해서, 이제 그것은 지배력과 기호가 완전히 자유로이 전략을 세우도록 도와주기 위한 알리바이로서만 이용되게 된다. 이미지의 바로크적 자유로움 뒤편에는 정치라는 잿빛 실력자가 숨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비잔틴 시대의 성황상이 신의 동질성, 즉 신성을 살해할 수 있었듯이, 이미지에 걸린 문제는 항상 자기자신의 모델인 실재를 죽이는 이미지의 살상력일 것이다. 이러한 살상력에 맞서는 것이 이미지의 재현력인데, 이는 실재를 눈에 보기에 그리고 이해 가능하게 중재하여 주는 변증법적 힘을 말한다. 서구의 모든 신념과 믿음은 이 재현에 대한 자신감을 걸고 도박하였다 : 기호는 의미의 심층을 지시할 수 있고, 기호와 의미는 서로 교횐되어질 수 있으며, 이러한 교환에 무엇인가가 -물론 신이- 보증을 서준다. 그러나 만약에 신 자체가 시뮬라크르로 되어질 수 있다면, 즉 신 자신이 보증을 서주는 기호들의 하나로 축소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모든 체계는 무중력 상태로 들어가서, 신은 단지 하나의 거대한 시뮬라크르가 될 따름이다. 그렇다고 해서 비현실은 아니고 시뮬라크르이다. 즉 더 이상 실재와 교환되어지지 않으며, 어느 곳에 지시도 테두리도 없는 끝없는 순환 속에서 그 자체로 교횐되어지는 시뮬라크르이다. [24~25p]


- 이미지는 깊은 사실성의 반영이다.
이미지는 깊은 사실성을 감추고 변질시킨다.
이미지는 깊은 사실성의 부재를 감춘다.
이미지는 그것이 무엇이건간에 어떠한 사실성과도 무관하다 : 이미지는 자기자신의 순수한 시뮬라크르이다.
첫 번째 경우에 이미지는 선량한 외양이다. 여기서 재현은 신성의 계열이다. 두 번째 이미지는 나쁜 외양으로 저주의 계역이다. 세 번째 이미지는 외양임을 연출한다. 이것은 마법계열에 속한다. 네 번째 이미지는 전혀 외양이 아니라 시뮬라시옹의 계열이다.
무엇인가를 감추고 있는 기호로부터 아무것도 없음을 감추고 있는 기호로의 이전은 결정적인 전환점이다. 첫 번째 기호는 진실과 비밀의 신학으로 돌려진다(이데올로기는 여전히 여기에 속한다). 두 번째 기호는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의 시대를 여는데, 이겨서는 자신을 인지하기 위한 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참으로부터 거짓을, 실재의 인위적 부활로부터 진짜 실재를 분리학 위한 최후의 심판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이미 죽었고 또 미리 부활되었기 때문이다.
실재가 더 이상 과거의 실재가 아닐 때, 향수란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근원적 신화와 사실성을 나타내는 기호들의 가격이 오른다. 이차적인 진실과 객관성, 권위들의 가격이 더욱 오른다. 진실한 것과 경험된 것이 점점 높이 공격을 가하고, 대상과 실체가 사라져버린 그곳에, 그들에 대한 형상적인 부활이 행해진다. 물질적 생산의 광란과 평행한 상위 단계에서 실재와 지시물의 광적인 인위적 생산 : 이렇게 나타난 것이 우리가 해당되는 단계 속에서의 시뮬라시옹이다. 실재의, 네오 실재의, 파생실재의 전략, 이 전략은 어디서나 어떤 저지전략과 겹쳐지는 것이다. [27~28p]


- 과학적 대상의 유폐는 미친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의 유폐와 똑같다. 사회가 스스로 자신을 향해 내건 광기의 거울에 의해 사회 전체가 치료 불능으로 오염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과학은 자신의 거꾸로의 거울인 대상의 죽음에 의해 전염되어 죽지 않을 수 없다. 외면적으로는 과학이 그 대상을 지배하는 듯하지만, 내면적으로는, 무의식적인 책임 전가에 따라서, 과학에 의해 죽은 대상은 그에게 죽은 대답만을 하고 순환적으로 이 죽은 대답으로 구성되어 있는 과학을 죽이기 때문에 대상이 과학을 투여하고 있다. [34~35p]


- 람세스는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오직 미이라만이 비할 데 없는 가치를 가진다, 왜냐하면 미이라는, 축적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보장해 주는 것이디 때문이다. 선적이고 축적적인 우리의 문화 전체는 만약 우리가 과거를 백일하에 저장할 수 없다면 무너져내려 버린다. 그렇게 하려면 파라오들을 그들의 무덤으로부터, 미이라들을 그들의 침묵으로부터 끄집어내야 한다. 그러자면 그들을 발굴해야 하고, 그들에게 군대식 예식을 해주어야 한다. 그들은 동시에 과학과 벌레의 먹이가 된다. 오직 절대적인 비밀만이 이 수천 년의 힘을 보장해 주었다. 죽음과 함께 교환들의 사이클 전체가 지배한다는 것을 의미하던 부패의 지배 말이다. 우리는 과학을 미이라를 보수하는 데, 즉 눈에 보이는 질서만을 보수하는 데밖에는 사용할 줄 모른다. 그러나 미이라 방부는 숨겨진 어떤 차원을 영원 불명화하기 위한 신비적인 작업이었다. [36~37p]


- 우리는 르네상스 시대의 기독교인들이 아메리카 인디언들,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혀 모르던 이(인간) 존재들에 의해서 매혹되었듯이, 람세스에 의해서 매혹된다. 이처럼 식민화의 초기에는 복음의 보편적 법률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 앞에서 찬탄하고 마비되던 순간이 있었다. 이는 다음 둘 중 하나였는데, 혹은 이 법이 보편율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였거나, 혹은 증거를 없애기 위하여 인디언들을 말살하였다. 일반적으로는 그들을 개종시키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또는 단순히 그들을 발견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는데, 이것으로도 그들을 천천히 제거하기에는 충분하였다.
이렇듯이 박제화하여 제거하는 데는 람세스를 발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왜냐하면 미이라는 벌레에 의해서는 썩지 않는다. 부패와 죽음의 지배자인 상징의 느릿한 체계로부터, 더 이상 아무것도 지배하지 않고, 자신을 선행하였던 것을 부패와 죽음에다 바쳐버리며, 이어서 과학에 의해서 그것을 다시 부활하려고 애쓰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우리의 체계로, 역사와 과학과 박물관의 체계로 이동함으로써 미이라는 죽기 때문이다. 이는 곧 모든 비밀에 대한 치유할 수 없는 폭력, 비밀이 없는 문명의 폭력, 모든 문명 자신의 기초에 대한 증오이다.
마치 인종학이 자신의 순수 형태를 더 잘 확보하기 위하여 자기 대상을 포기하는 체하듯이, 비박제화는 인위성을 더욱 강화시킨 것일 따름이다. 그 증거는<그 원래 장소>에 다시 안치시키기 위하여 뉴욕의 클로이스터로부터 비싼 비용을 들여서 다시 본국으로 송환하려 하는 퀵싸의 셍-미셸이다. 모든 사람들은(샹-젤리제의<보도 블록을 옛날처럼 다시 깔기 위한 실험적 작업>에 대해서처럼 !) 이러한 회복에 대해 박수 갈채를 보낸다. 따라서, 옛날 이 기둥머리를 수출한 일이 자연스럽게 한 일이 아니고 인위적으로 멋대로 한 행위였고, 뉴욕의 클로이스터가 정말 모든 문명의 인위적 모자이크라도(가치의 자본주의적 집중화 논리에 따라) 원래 장소로 다시 수업하는 행위는 그보다도 더욱 인위적이다. 완벽한 회전에 의하여<사실성>에 다시 도달한 완전한 시뮬라크르이다. [37~38p]


- 디즈니랜드의 상상 세계는 참도 거짓도 아니고, 실재의 허구를 미리 역으로 재생하기 위하여 설치된 저지기계이다. 그로부터 이 상상 세계의 허약함과, 유치한 백치성이 나온다. 이 세계가 어린애 티를 내려 하는 이유는, 어른들이란 다른 곳, 즉<실제의>세상에 있다고 믿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진정한 유치함이 도처에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이며, 어른들의 유치성 그 자체가 그들의 실제 유치성을 환상으로 돌리기 위하여 여기서 어린애 흉내를 낸다. [41p]


- 모두가 자신의 추방된 형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자신의 반대 용어로 변신한다. 모든 권력과 제도들이 시뮬라크르된 죽음에 의해 그들의 실재적인 고통으로부터 빠져나가기 위하여 자신에 대해 부정으로 말한다. 권력은 존재와 정당성의 미광을 재발견하기 위하여 자기자신의 살해를 연출할 수 있다. [53p]


- 한마디로, 당신은 원치 않게 즉시 실재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실재의 기능들 중 하나는 틀림없이 모든 시뮬라크르적 시도를 삼켜서, 모든 것을 실재로 만드는 것이다. 제도와 사법적 정의가 작용하기 훨씬 전에, 기성 질서란 바로 이것이다. [55p]


- 패러디는 복종과 위반을 동등하게 만드는데 바로 그것이 가장 심각한 범죄이다. 왜냐하면 이 범죄는 법 설정 기반인 차이를 제거하기 때문이다. 기성 질서는 이 범죄에 대항하여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법이란 제2열에 속하는 시뮬라크르고, 시뮬라시옹은 참과 거짓을 넘어서서, 등가를 넘어서서, 모든 사회와 권력 작용의 기반인 합리적 구별을 넘어섯 제3열에 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질서를 겨냥하여야 할 곳은 바로 여기, 실재의 결핍에서이다. [55~56p]


- 죽음은 결코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의미심장하다 : 제임스 딘, 마를린 몬로, 케니디처럼(낭만주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희귀의 기본 원리와 교환이라는 기본 원리에 의하여) 죽음을 내포하고 있는 신비한 차원을 가졌었기 때문에 실제로 죽었던 사람들의 시대는 지나갔다. 차후는 시뮬라시옹에 의한 살해의 시대, 시뮬라시옹의 일반화한 미학읜 시대, 살해-알리바이의 시대이다. 이것은 죽음의 비유적인 부활로서, 이 비유적인 부활이 없으면 더 이상 실체도 자육적 사실성도 없는 권력의 제도를 인가하기 위하여만 거기 있다. [60~61p]


- 왕의 공식적이고 희생적인 죽음을 예건한 원시적 의식과는 거꾸로(왕이나 추장은 희생의 약속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현대의 정치적 상상은 점점 더 국가 수반의 죽음을 가느한 한 오래도록 감추거나 늦추는 방향으로 간다. 이러한 강박은 혁명과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시대 이래로 더욱 증가하였다. 이를테면 히틀러, 프랑코, 마오는<합법적인>후계자, 권력의 계승이 없어서 그 자신들보다도 무한히 오래도록 살아남도록 강요된다. 대중적 신화는 결코 그들이 죽었다고 믿기를 원치 않는다. 이미 파라오들이 그랬다. 연속적인 파라오들이 구현하는 것은 항상 유일한 똑같은 사람이었다.
모든 일은 마치 마오나 프랑코가 이미 여러 번 죽었고, 그들과 꼭 닮은 사람들에 의해 대체되었던 것처럼 일어난다.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국가 원수가 같은 사람이건 다른 사람이건 그들이 서로 닮기만 한다면, 엄밀히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 한 국가 수반이-그가 누구건간에-자기자신의 시뮬라크르일 뿐이고, 바로 이 점이 그에게 권력과 통치할 자격을 준 지는 아무튼 오래전부터다. 누구도 실재의 사람에게는 최소한의 동의, 경의를 부여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항상 이미 죽었기 때문에 충성은 그의 분신에게로 간다. 이러한 신화는 왕의 희생적 죽음 강요의 끈질김과 동시에 그에 대한 실망을 나타내는 것일 뿐이다. [62~63p]


- TV-진실. 그 의미의 모호성으로 하여 좋은 용어, 이 가정의 진실에 해당하는가, 아니면 TV의 진실에 해당되는가 ? 사실, 라우드가의 진실은 TV이다. 진실인 것은 TV이며, 진실을 만든 것은 TV이다. 더 이상 거울의 반사적인 진실도 그리고 전체 투시적 체계, 시선의, 원근법적인 진실도 아니라 조작적인 진실이다. 이 조작적 진실은 탐색하고 질문하는 테스트의 만져보고 자르는 레이저 광선의, 구멍난 당신의 삶의 시퀸스들을 간직하고 있는 모체들의, 당신의 결합들을 명령하는 발생론적 코드의, 당신의 감각 세계에 정보를 제공해 주는 세포들의 진실이다. 바로 이러한 진실에 라우드가가 TV라는 전달 매체에 의하여 바쳐졌다. 이러한 의미로 죽음에 놓여진 것이다(그러나 아직도 진실에 관한 문제입니까?). 전체투시적인 체계의 종말. TV의 눈은 더 이상 절대적 시선의 근원이 아니다. 그래서 통제의 이상은 더 이상 투명성의 이성이 아니다. 투명성의 이상은 여전히 객관적 공간(르네상스의 공간), 독재적 시선의 전지전능한 힘을 가정한다. 이는 여전히, 밀폐 시스템이 아니라면, 최소한 사각으로 틀지어진 시스템이다. 비록 전체 투시자의 초점이 맹목적이어 훨씬 교모하게 하더라도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의 대립 위에서 작용하는 한 한상 외향성이다. [68~70p]


- 따라서 오늘날 사회의 팽창을 지배하는 것은 극대의 프로그램적인 완전무결성과, 안전과, 저지와 동일한 모델이다. 여기에 진짜 핵의 부차적 영향이 있다. 기술의 세세한 작업은 사회적인 것의 세세한 작업에 모델로 사용된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더 이상 우연에 맡겨지지 않는다. 게다가 이게 바로 사회화이다. 사회화는 몇 세기 이래로 시작되어, 그후에 폭발적으라고 믿었던 한계(혁명)를 향하여 그의 가속화된 단계로 들어가게 되었으나 지금으로서는 되돌릴 수 없는 반대의 함열적인 진행으로 번역된다. 모든 우연과 모든 우발적 사건, 모든 비스듬함, 모든 목적성, 모든 모순 등의 저지이다. [83p]


- 학살의 망각도 학살의 일부이다. 왜냐하면 학살의 망각은 또한 기억의 학살이며, 역사의 학살이고, 사회적인 것 등의 학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망각은 또한 사건만큼이나 본질적인 것이다. 아무튼 이 망각은 우리에게는 그의 진실 속에서 찾아질 수 없고, 접근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 망각은 또한 너무 위험하여, 인위적 기억에 의하여 이 망각을 지워야 한다.[101~102p]


- 동일한 모델이 모든 비율을 유지하며 이 연구소에서도 제공된다. 문화 핵분열, 정치적 저지 등이 그렇다.
그런데 유동체들의 순환이 종류에 따라 불규칙하다. 환기장치, 냉방 시설, 전기망들 등의<전통적인>유체들은 거기서 아주 잘 순환한다. 벌써 인간 물결의 순환은덜 잘 보장된다(플라스틱 통 속에서 구르는 계단으로 된 해묵은 해결책, 그런데 내가 안다면, 인간들도 바람 같으로 확 빨려지고 뒤에서는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바로 이 정도의 유동성이, 이 뼈대물에 독특한, 유체들의 기이하고 율동적인 바로크 무대 같은 극장 이미지에 어울릴 것이다). 작품들, 물건들, 책들과 같은 것들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리고 이른바<복수가치적인>내부공간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건 전혀 순환하지 않는다. 안으로 박히면 박힐수록, 덜 순환한다. 이것은 루와씨 Roissy에 있는 샤를르 드 골 공항과는 반대이다. 비행기 탑승점인<위성들>을 향하여 방사선적으로 퍼져 있는<우주공간적>미래주의 디자인으로 된 중앙으로부터 밖으로 나갈수록 결국에는 아주 평범하게 전통적인 비행기에 이른다. 그러나 겉과 속의 불일치는 마찬가지이다(다른 유동체인 돈은 어떠한가? 그의 순환양식, 표면과 심층부의 이질양식, 보부르에서처럼 움직임의 급격한 감소양식은 어떠한가?).
사적인 노동공간이 없이<복수가치적인>공간에 배치된 직원의 행동에서까지도 똑같은 모순이 있다. 서서 돌아다닐 때 사람들은<현대적>공간의<구조>에 적응하여 서늘한, 더 부드러운, 아주 현대적 기능에 맞는 미적인 행위를 연출한다. 그 구석이 꼭 하나만은 아니지만, 자기들 구석에 앉아서는, 그들은 어떤 인위적인 고독 같은 것을 분비하며 자신들의 개인적<밀폐공간>을 다시 만드는 데 진력한다. 여기서도 역시 저지의 훌륭한 전략이 있다. 사람들은 그들이 모든 에너지를 이러한 개인적인 방어에 소비한다고 비난한다. 희한하게도 이런 동일한 모순을 보부르의 사물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유동적이고 불안하게 변하며 차갑고 현대적인 외부와 낡은 가치들 위에서 수축경련하는 내부가 그렇다.
속까지 투명한, 복수가치적이고, 상호합의적인, 서로 이웃하는 이데올로기와 연접되나, 안전에 대한 협박에 의해 제재된 이러한 저지의 공간은 오늘날 잠정적으로 모든 사회관계의 공간이다. 모든 사회적 담론이 거기 있다. 그리고 문화취급면에서와 마찬가지로 사회관계의 면에서도 보부르는 밖으로 내건 목표물들과는 완전히 모순이기 때문이기 때문에 우리 현대성의 천재적인 기념물이다. 이 모순적 생각이 혁명적 정신의 소유자에게서 오지 않고, 기성질서의 논리학자들에게서 이 생각이 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다행이다. 이 논리학자들은 비평적 정신도 없고 그 때문에 진실과 훨씬 가까운 사람이다. [117~118p]


- 다행히도, 문화적인 가치들의 이 모든 시뮬라크르는 외적인 건축에 의하여 미리 제거된다. 왜냐하면, 그물망 같은 관들을 가지고, 국제전시회나 박람회건물 같은 모습을 한, 전통적인 모든 정신상태나 기념물의 성격을 저지하는 (계산된?) 연약성을 가진 이 외관은, 우리시대가 더 이상 지속의 시대가 아님을, 우리의 유일한 시간성은 가속된 순환과 재순환의 시간성임을, 유동체회로와 그 통과의 시간성임을 터놓고 선언한다. 근본적으로 우리의 유일한 문화는, 탄화수소와 석유 정제와 석유분해 증류의 그것으로서, 문화분자들을 잘게 부숴 그들을 종합적 산물로 재결합한다. 이것을 보부르-박물관은 감추려 하나, 보부르-뼈대물은 선언한다. 이것이 바로 이 뼈대물의 심층적인 미를 이루는 것이고 내부공간들이 실패하도록 하는 것이다. [122~123p]


- 그러나 박물관은 여전히 하나의 기억이다. 결코 여기서철머 문화가 저장과 기능적 재분배를 위하여 그의 기억을 상실해 버리지는 않는다. 그러면 이것은 더 일반적인 하나의 사실을 번역해 준다. 즉<문명화된>사회 어디서고 대상들의 저장은 인간들의 저장이라는 부차적인 과정을 유발한다는 사실. 줄서기, 기다리기, 막히기, 집중, 캠프, 이게 바로<대중덩어리 생산>이다, 대량생산이나 대량의 사용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대중덩어리를 생산한다는 의미에서이다. 모든 사회성의 최종 생산물로서, 그리고는 단숨에 이 사회성이라는 것에 종말을 가해 버리는 대중덩어리, 사람들이 우리에게 그것이 바로 사회적인 것이라고 믿게 하려고 하는 이 대중덩어리는 반대로 사회적인 것이 함열하는 장소이다. 그래서 끊기지 않는 시뮬라시옹의 과정 속에서 그곳으로 삼켜져 버리는 더욱더 촘촘한 영역이다.
그로부터 이러한 오목거울이 나온다. 즉 대중을 대중 안에서 보아야 대중들은 와 몰리고자 유혹되리라는 것이다. 이는 마케팅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투명성에 대한 모든 이데올로기는 여기서 그 의미를 갖는다. 또는, 축소된 이상인 어떤 모델을 무대에 올려야 가속된 인력 같은 것을, 대중들의 자동적인 밀집과 같은 문화의 자동적인 달라붙기를 기대할 수 있다. 이와 똑같은 과정이 역쇄적인 핵반응 작용, 혹은 요술거울 같은 반사작용이다. [128~129p]


- 거대시장과 파생상품 [137p]


- 깊이 파고 들어가면,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일종의 종류가 다른 직업으로서, 문명화시키고, 비교하며, 시험하는 작업, 코드의 작업 그리고 사회적 판결작업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제기할 수 있는 모든 문제들에 대한 대상-대답을 거기서 발견하고 선택하기 위하여 온다. 혹은 차라리 그들을 대상들이 구성한 기능적이고 방향지어진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온다. 대상들은 더 이상 상품들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들은 더 이상 사람들이 해독하고 그 의미와 메시지를 익힐 기호조차도 아니다. 그들은 테스트이고, 우리에게 질문하는 것은 그들이며, 우리는 그들에게 대답하도록 소환되며, 대답은 질문 속에 포함되어 있다. 대중매체들의 모든 메시지도 이와 비슷하게 작용한다. 정보도 의사소통도 아니고, 국민투표, 영구적으로 고정된 테스트, 순환적인 대답, 코드의 확인이다.
울퉁불퉁함도 근원적인 시야도 시선이 멀리 사라질 위험이 있는 소실선도 없이, 광고판과 끝없이 진열된 생산품들 만이 등가적이면서 연속적인 기호들로써 작용하는 통째로의 화면일 따름이다. 소비자들이 빼내갈 때 생길 수 있는 구멍을 메우기 위하여, 무대의 전면과 표면의 진열을 다시 하는 일에만 전념하는 고용자들이 있을 따름이다. 셀프-서비스는 이러한 깊이의 부재를 더욱 부채질한다. 동질적인, 중개자가 없는, 똑같은 하나의 공간이 인간들을 사물들과 묶는다. 직접적인 조작의 공간이다. [138~139p]


- 정보는 더욱 많고 의미는 더욱 적은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다.
세 개의 가정 : ―정보는 의미(한 신호에 대해 느끼는 불확실도의 부정)를 생산한다. 그러나 모든 영여겡서 의미작용의 거친 흐름을 보충하지는 못한다. 매체를 통해서 아무리 메시지와 내용물을 재주입하여도 소용없다. 의미의 흐름과 함입은 그 재주입보다도 빨리 간다. 이러한 경우에는, 기력이 빠진 매체를 이어 가기 위하여, 근본으로부터의 생산성에 호소하여야 한다. 이것이 자유언론의 이데올로기,<반-매체>(라디오-해적 등)에까지 이르는 수많은 개인적 발신세포로 감속된 매체 이데올로기이다.
―혹은 정보는 의미작용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이것은 다른 것이며, 의미와 고유한 의미에서 의미의 순환 밖에 있는 다른 질서에 속한 작동적인 모델이다. 이것은 샤논의 가정이다 : 순수하게 도구적인 정보영역에 대한 가정으로, 정보란 어떠한 의미적 목적성도 내포하지 않은 기술적인 중개자이다. 따라서 정보자체도 가치판단에 연루되어서는 안 된다. 정보란 발생론적인 코드와 마찬가지로 코드적인 것이다 : 이 코드는 그것이 그것인 바이고, 그런 그대로 작용하는 것이며, 의미란 다른 것이고, 『우연과 필연』에서 모노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어떤 점에서는 나중에 온다. 이러한 경우에는 정보의 인플레이션과 의미의 디플레이션 사이에는 간단히 말해 의미작용 관계가 없을 것이다.
―혹은 반대로 이 둘사이에는 정보가 의미와 의미작용의 직접적인 파괴자 혹은 중화자인 정도에 따라 엄격하고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 의미의 흐름은 정보, 매체, 대중매체의 용해적이고 지지적인 행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세 번째 가정이 가장 재미있는 것이지만, 이 가정은 아래의 모든 일반적인 관념과 정면으로 대치된다. 우리의 일반적인 관념에서는 어디에서든 사회화는 매체의 메시지에 노출됨으로써 측정된다. 매체들에게 불충분하게 노출된 것은 비사회적 혹은 반사회적인 것이다. 어디서든 정보는 의미의 가속된 순환, 자본의 가속된 회전으로부터 오는 경제적인 부가가치와 동질적인 의미의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정보란 의사소통의 창조자로서 주어지고, 비록 그 낭비가 막대하다 하여도, 전체적으로는 의미의 잉여분이 있어서, 이 잉여분을 사회적인 것의 모든 미세 조직에까지 재분배하기를 일반적인 동의는 바란다―물질적 산물에 따르는 역기능과 비합리성에도 불구하고, 물질적 산물이 더 많은 부와 사회적 목적성으로 이르기를, 일반적인 동의가 바라는 것과 똑같다. 우리 모두는 이 신화의 공범자들이다. 이것은 우리 현대성의 기본원리이고, 이것이 없으면 우리 사회조직에 대한 맹신이 무너져내릴 것이다. 그런데, 이 맹신이 바로 이 이유에 의해 무너졌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정보가 의미를 생산한다고 생각한 그곳에서 반대의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정보는 자신의 고유한 내용물을 삼켜버린다. 정보는 의사소통과 사회적인 것을 삼켜버린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1 의사소통을 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정보는 의사소통을 연출만 하면서 소진되는 것이다. 의미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는 의미를 연출만 하면서 소진되어 버린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거대한 시뮬라시옹의 과정이다. 꾸밈없는 인터뷰, 자연스러운 말, 청취자 전화, 모든 방향의 참여, 자연스러운 말을 하라는 협박 :<당신이 관여되고 있다, 당신 자신이 바로 사건이다, 등.>정보는 더욱더 이러한 종류의 유령 같은 내용물, 실제가 아닌 어떤 유사한 것을 대체하여 접목하기, 의사소통의 몽유병에 의하여 침범된다. 관객 욕구를 연출하는 순환적 배열에 따라 의사소통의 가장된 연극을 반대한다는 반-연극도 결국은 관객을 배우로 만드는 연극이기에, 이 순환 배열은, 아시다시피, 전통적 제도를 부정으로 다시 개조하는 것이고, 부정적인 것을 통합한 회로이다. 전력을 다해 이 시뮬라크르를 지탱하려면, 우리를 의미상실이라는 명백한 현실과 맞부딪뜨리게 할지도 모를 거친 반 시뮬라시옹을 피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엄청난 에너지의 전개가 필요하다.
이러한 시뮬라크르 속에서 이러한 가격상승을 유발한 것이 의사소통의 상실인지, 혹은 시뮬라크르가 머저 저지적 목적으로 의사소통의 모든 가능성을 미리 잘라버리기 위하여(실재에 종말을 고한 모델의 자전) 거기 있었는지 자문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어느 것이 처음이었는지 자문하는 것은 무익하다. 이는 처음이 없고 순환적인 과정, 즉 시뮬라시옹과 파생실재의 과정이다. 의사소통과 의미의 파생실재성,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것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실재를 폐기한다. - 중략 -
2 의사 소통을 한다는 이러한 극도로 자극된 연출을 하면서 계속 공격을 하는 대중매체와 정보는 사회적인 것의 저항할 수 없는 탈구조화를 초래하며 뒤쫓는다.
이와 같이 전혀 혁신의 증가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전적인 불확실도를 겨냥하는 일종의 성운 속에서 의미를 분해하고 사회적인 것을 분해한다.
매체들은 사회화의 수행자들이 아니라, 정반대로 대중들 속에서 사회적인 것을 함열시키는 자이다. 이것은 의미의 함열을 기호의 현미경적인 차원으로 거대하게 팽창하는 것일 따름이다. 의미 함열의 거대한 팽창은 아직 그 결과를 완전히 소진하기에는 먼, 맥루한의<매체는 메시지이다>라는 공식으로부터 출발하여 분석하여야 한다. [143~147p]


- 현대성의 특징인 매체들 자신에 이르기까지 그<전통적>위상이 문제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맥루한의<매체는 메시지이다>라는 공식은, 시뮬라시옹 시대의 핵심적 공신인데(매체는 메시지이다―발신자는 수신자이다―모든 대립극들의 순환―범시적이고 원근화법적인 공간의 종말―이러한 것이 우리 현대성의 기초적인 공식이다), 이러한 공식마저도 극단에 이르러 재고되어야 한다. 이 극단에 이르면, 모든 내용물과 메시지가 매체 속에서 기화되어 버린 후에, 그러한 자체로서의 매체 자신이 기화한다. 근본을 보면, 메체에게 의사소통의 중개자로서의 구별되고 명확히 한정된 위상을 주는 것은 여전히 메시지이다. 메시지 없이는 매체 자신도, 우리의 판단과 가치의 모든 위대한 체계에 대한 특이한 비정의 속으로 떨어져 버린다. 그 효용이 즉각적인 유일한 하나의 모델만이, 동시에 메시지와 매체 그리고<실재>를 생산한다. [148p]


-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광고양식 속으로 잠재적인 모든 표현양식들이 흡수되는 시대이다. 모든 독창적인 문화형태들, 모든 한정적인 언어들은 광고양식이 깊이가 없고 즉각적이며 즉시 잊어버리기 때문에 광고양식 속으로 흡수 된다. 표면적인 형태의 승리, 모든 의미화들의 최소공약수, 의미의 0도, 가능한 모든 수사적 비유에 대한 불확실도의 승리, 이는 기호 에너지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이다. 이러한 분절되지 않고, 순간적이며, 과거가 없고, 미래도 없고, 가능한 변형도 없는 형태는 이것이 최종적인 것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 우세하다. 현재 실행되는 모든 형태들은 광고로 향하고 대부분 거기서 소진된다. 반드시 명명된 광고 즉 광고로써 생산된 광고만 일컫는 것이 아니라, 광고형태 즉 단순화되고 두루 유혹적이며 두루 동감하는 작동양식의 형태(모든 양태들이 완화되고 말초적인 양식으로 그 속에서 혼동된다)까지 포함한다.<무거운>언술들과 의미의(혹은 문체의) 분절된 형태들의 고유성은 어떤 게임의 규칙들과 마찬가지로 하나가 다른 것으로 상호 번역될 수 없는 반면에, 일반적으로 광고형태 속에서는 모든 독특한 내용물들이 서로서로 번역될 수 있는 순간에 취소되어 버린다. [154~155p]


- 정치적인 것의 언어 이후에 이번에는 사회적인 것의 언어가 말초적인 언어의 미혹적인 선동과 혼합되려 할 때, 사회적인 것이 광고로 되려 할 때, 그의 상표 이미지를 강요하려고 시도함으로써 다수의 동의에 의해 결정되고자 할 때 후속 단계가 통과된다. 예전에는 역사적 운명이었던 사회적인 것 자체가 모든 방향으로 자신의 광고를 확보하며 일종의<집단적인 기획>의 서열로 떨어진다. 각각의 광고가 어떤 잉여가치를 생산하려 하는지를 보라 : 븜 븜 하는 여자 아나운서의 따뜻하고 핏기없는 목소리 속에서 소리 띠의 묵직하면서도 날카로운 소리 속에서, 우리 눈 아래 어디서나 뛰어다니느 이미지-띠의 다양한 색조들 속에서, 벽들의 어디나 있는 사회적인 것의 선동, 어디나 있는 사회성, 절대적 광고 속에서 마침내 실현된 절대적인 사회성 역시 완전히 용해되어 환각에 홀린 사회성의 잔해가 모든 벽들 위에, 광고의 메아리에 의해 즉각적으로 만족되어진 사회적인 것의 요구라는 단순화된 형태로 있다. 사회적인 것은 시나리오와 같고 우리는 이 시나리오에 미쳐 날뛰는 관중이다. [156~157p]


- 지하철 속에서의 민속춤, 안전에 관한 수많은 캠페인, 전에는 여가에 전속한 미소를 동반한<내일 나는 일한다>라는 슬로건, 노사분쟁 조정위원 선출에 관한 일련의 광고 :<나는 아무에게도 나를 위해 선택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아주 공연적 거짓처럼 들리는 기괴한 슬로건, 그 부정 속에서조차 사회적인 것의 행위를 하는 조롱적인 자유의 슬로건,<나는 구입한다, 소비한다, 즐긴다>라고 근본적으로 끊임없이 말하고 반복하면서 오랫동안 경제적 유형의 암시적인 최후통첩을 운반한 이후에 오늘날은 광고가 그 모든 형태로<나는 투표한다, 참여한다, 현장에 있다, 관계되어 있다>를 반복하는 것은 우연만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역설적인 조롱을 나타내는 거울, 모든 공공의 의미에 대한 무관심을 나타내는 거울인 것이다. [159~160p]


- 이것이 가능한 까닭은 미혹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광고의 도시인 라스베가스를 보기만 하면 된다(50년대의 도시, 광고로 미친 해들의 도시, 도시들을 전혀 다르게 만들어버린 프로그램적인 논리에 의해 광고가 비밀스럽게 단죄되어 버렸기에 어떤 점에서 오늘에 와서는 복고적인 광고의 매력을 간직하고 있는 도시). 해가 떨어지자마자 광고의 휘황찬란한 빛으로 사막으로부터 통째로 라스베가스가 솟아오르고, 날이 밝자마자 다시 사막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볼 때 사람들은 광고가 벽들을 즐겁게 하거나 장식하는 것이 아니라, 광고란 벽들을, 길을, 건물의 정면들을, 모든 건축을, 모든 물적 실체와 깊숙함을 지우는 것임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제거, 표면 속으로 모든 것의 흡수가(그 표면에서 순환하는 기호들이 무엇이건 중요치 않다) 바로 우리를 눈이 휘둥그렇게 하고, 파생실재적인 이러한 함열 속으로 빠지게 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 함열을 우리는 이제 다른 어떤 것의 함열과는 바꾸지 않을 것이며, 이것은 또 매혹의 되돌이킬 수 없는 빈 형태이다. [161p]


- 광고는 따라서, 정보와 마찬가지로 가치나 의미 집중성의 파괴자, 무감각의 가속자이다. 의사소통 언어의 모든 장치들과 모든 절차들이, 예를 들어 (접촉 기능 : 내 말 들려요? 날 보고 있습니까? 곧 말할 것이다! ―참조 기능, 시적 기능, 암시, 역설, 말장난, 무의식) 광고 속에서 의미를 나타내는 것들과 비-의미적인 모든 인위적인 것들이 무감각하게 반복된다. 어떻게 이 모든 것들이 정확히 포르노에서 섹스처럼, 즉 그걸 믿지 않으면서, 지쳐빠진 동일한 외설성을 가지고서, 연출되는가를 보라. 그 때문에 차후로는 광고를 언어로서 분석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거기서 일어나는 것은 다른 것, 즉 언어의(이미지도 역시) 겹뜨기이기에 거기에는 언어학도 기호학도 대답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언어학이나 기호학은 의미의 진짜 작동 위에서 작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어의 모든 기능들이 이렇게 회화적으로 과도히 틀을 벗어나는 것을 예감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호들이 이렇게 그 광대한 조롱의 영역으로 열려서, 그들의 조롱 속에서, 어떤 내기도 없는 그들 게임의 집단적 광경과 조롱 때문에, 흔히 이르듯<소비될 줄을>결코 예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략-
이제 더 이상 상품의 연출 장면은 없다. 단지 상품의 외설적이고 공허한 형태만 있다. 그래서 광고는 이러한 포화되고 공허한 형태의 삽화이다. [162~163p]


- 전통적인 관점에서는(정보통신학적인 관점에서조차도), 기술은 신체의 연장이다. 기술은 인체기관의 기능적 첨단화로서, 이 기관이 자연과 동등하고 자연을 압도적으로 개발하도록 허용해 준다. 이는 마르크스로부터 맥루한에 이르기까지, 기계와 언어에 대한 동일한 도구적인 관점이다. 여기서 기계와 언어는 이상적으로 인간의 유기체적 신체가 되도록 운명지어진 자연의 계속, 연장, 매체이다. 이러한<합리적>관점에서는 신체 자체도 매체일 따름이다. [185p]


- 생산의 질서에서 노동력으로서 신체 모으기에, 이처럼 절단의 질서에서는 아나그람으로서 신체의 흩어짐이 대조된다. [186~187p]


- 실제로 상상은 어떤 거리에서만 존재한다. 이 거리가, 실재와 상상 사이의 거리도 포함하여, 오직 모델만을 위하여 사라지고 흡수되려 하면 무엇이 되겠는가? 따라서, 하나의 시뮬라크르들의 질서에서 다른 시뮬라크르들의 질서로의 이전 경향은 이 거리, 이상적 혹은 비평적인 투영 여지를 주는 이 떨어짐의 흡수 경향이다.
유토피아에서는 이 거리가 극대이다. 여기서는 초월적인 세계,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가 그려진다(낭만적인 꿈은 여전히 이 세계의 개인화된 형태이다. 여기서는 초월성이 무의식적인 구조들 속에서까지도 깊숙함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아무튼 실제 세계와의 유리는 극대이며, 이는 실제 대륙과 대비되는 유토피아의 섬이다).
거리는 공상과학에서 뚜렷이 줄어든다. 공상과학은 아주 흔히 생산의 실제 세계를 과도하게, 그러나 결코 질적으로 다르게가 아니게, 투영한 것일 따름이다. 기술적인 혹은 에너지적인 연장들, 속도들과 힘들은 n의 힘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도식들과 각본들은 기술, 야금학 등의 그것들과 같다. 로봇의 투영적인 대체(전기-산업사회의 제한된 세계에, 유토피아는 이상적인 대체 세계를 대비시켰다. 잠정적으로 무핞나 생산의 세계에, 공상-과학은 그에 고유한 가능성들의 확대를 더한다).
거리는 모델들의 함열적인 시대에는 완전히 흡수된다. 모델들은 더 이상 초월성이나 투영을 구성하지 않으며, 더 이상 실재에 대한 상상을 구성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자신들이 실재의 예견이며, 따라서 허구적인 어떠한 종류의 예견 여지도 남겨 놓지 않는다. 이 열려진 영역은 정보통신학적 의미로 시뮬라시옹의 영역, 즉 이러한 모델들의(각본들, 가장된 상황들을 올리기 등) 모든 방향으로의 조작의 영역이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이러한 조작을 실제 자체의 관리 및 조작과 구별하지 않는다. 더 이상 허구는 없다.
과거에는 실재가 허구를 추월할 수 있었다. 실재는 상상이 한술 더 뜨게 하는 가장 확실한 기호였다. 그러나 이제 실재는 모델을 추월할 줄 모른다. 실재는 모델의 부재를 말해 주는 알리바이일 따름이다. [199~200p]


- 지금까지 우리는 항상 상상의 여지를 가지고 있었다. 현실성 계수는 그에게 특수한 무게를 주는 상상의 여지에 비례한다. 이것은 지리학적인 그리고 우주적인 탐험에서도 역시 사실이다. 처녀지, 그러니까 상상이 관여할 수 있는 영역이 더 이상 없을 때, 지도가 모든 영토를 덮을 때, 현실성의 원칙과 같은 그 무엇이 사라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주공간의 정복은 지구상의 참조물의 상실을 향한 돌이킬 수 없는 문턱이다. 제한된 세계의 한계가 무한으로 물러나면, 이 세계의 내적 일관성으로서의 현실성이 출혈을 한다. 지구상의 정복 이후에 온 우주공간의 정복은 인간의 공간을 비현실화하거나, 시뮬라시옹의 파생실재 속으로 다시 확장된다. 최근의 달 착륙선과 함께, 궤도 위로, 말하자면 우주의 힘에로 올려진 이 두칸 방/부엌/샤워장이 증거이다. 우주적인 가치의 서열로 올려진, 우주공간 속에서 대체된 지구 거주지의 일상성 자체, 우주공간의 초월성 속으로 실재의 위성화, 이것은 형이상학의 종말이고 환상의 종말이며, 공상과학의 종말이고 파생실재성 시기의 시작이다. [201~202p]


- 사육하는 동물들에게서 먹을 것에 접근하는 서열, 쪼는 순서가 있다. 그들의 과밀 조건에서는 순서에서 맨 마지막인 것들은 전혀 먹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쪼는 순서를 깨뜨려서, 다른 분배 시스템에 의하여 먹이에의 접근을 민주화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상징적인 질서의 파괴는 동물들에게서 완전한 혼란, 그래서 만성적인 불안정을 야기한다. 이처럼 무모한 부조리성에 대한 좋은 예를 사람들은 알고 있다. 부족사회에서 민주적인 선한 의지가 하였던 유사한 폐해가 그것이다. [209~201p]


- 산업화한 죽음의 구성에 대항하여 동물들은 자살 외에는 다른 수단이, 다른 도전이 없다. 앞에서의 모든 비정상들은 필사적인 것들이다. 이러한 저항들은 산업적 이성의 실패이다(소득이 감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히 사람들은 이러한 저항들이 논리적 이성 속에 있는 전문가들을 거역하고 있음을 느낀다. 반사적 행위와 기계-동물의 논리 속에서는, 합리적 논리 속에서는 이러한 비정상들은 규정될 수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동물들에게 심리현상을 부여할 것이다. 비합리적이고 고장난 심리현상, 죽음이라는 최종 목적은 결코 변하지 않고, 자유의적이고 인간주의적인 치료법에 바쳐진 심리 현상이다.
동물이 그에게 준비된 죽음에 잘 적응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이처럼 재주있게 새롭고 지금까지 개척되지 않은 과학의 영역으로 동물의 심리현상을 발견한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죄수들을 순수 간단하게 가둘 수 없을 때, 죄수들의 심리학, 사회학, 성을 다시 발견한다. 산업적인 동물들이 정상적으로 죽기 위하여는 어떤<생활의 질>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죄수도 감옥을 견디기 위해서는 자유, 성,<정상성>을 필요로 함을 발견한다. 그리고 여기서는 아무것도 모순적이지 않다. 노동자 자신도 생산의 강제명령에 더 잘 응하기 위하여는 책임과 자율관리를 필요로 한다. 적응하기 위하여 모든 인간은 심리현상이 필요하다. [210~211p]


- 자기 정글에서 빼내져 음악-강당의 주연배우가 된 킹콩의 괴물성이 그것이다. 단숨에 문화적인 각본이 거꾸로 되었다. 옛날에는 영웅이 짐승, 용, 괴물을 죽였다. 그러면 그 흘러 퍼진 피로부터 식물들이, 인간들이, 문명이 탄생하였다. 오늘날은 짐승인 킹콩이 산업적인 대도시들을 박살내러 오고, 실제적인 모든 괴물성이 축출되어 버리고 괴물성과의 계약을 파기하였기에(이 계약이 이 영화에서는 여자의 원시적인 증여로 표현되었다) 죽어버린 우리의 문명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기 위하여 온다. [216p]


- 가치는, 만약 교환의 원 속에서 흡수되지 않고 기화되지 않으면, 폐기물과 같은 것이다.(가치가 쓰레기이기에 교환에 의해 재생된다 : 역자.) [230p]


- 아무것도 자기가 있을 자리에 없는 곳, 이것은 무질서
아무것도 자기가 원하는 자리에 없는 그곳, 이것은 질서 : 브레히트 [241p]


- 가치와 노력에 종말이 있기 때문에, 가치와 노력의 시뮬라크르에 종말이 없다. [244p]


- 더 이상 무대가, 사건들이 사실성의 힘을 취하도록 해주는 극소의 환상조차도 없다. 정신적 혹은 정치적인 연대감의 무대가 없다 : 칠레가, 비아프라가, 보트 피플이, 볼론뉴 혹은 폴란드가 우리에게 뭐가 중요한가? 이 모든 것은 텔레비전 화면 위에서 제거되기 위하여 온다. 우리는 결과 없는 사건들의 시대에 있다(그리고 결과 없는 이론들의 시대에).
의미에게 더 이상 희망이 없다. 그리고 이것은 다음을 말한다 : 의미는 죽음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위에서 의미가 자신의 일시적인 지배를 강요했던 것, 의미가 빛들의 지배를 강요하기 위하여 제거한다고 생각했던 것, 즉 외양들은 죽지 않는 것들이며, 의미 혹은 비-의미의 허무주의에 다치지 않는 것들이다.
바로 여기서 유혹이 시작된다. [252p]


옮긴이 해제
- 모더니즘의 기원은 데카르트의 합리주의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정치적으로는 자유경제의 원리가 되었다. 그러나 이 모더니즘의 근저는 기독교주의가 지탱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모더니즘의 절대적 이데올로기는 바로 진보에 대한 믿음이다. 그러면 무엇을 향한 진보인가? 기독교주의와 헬레니즘의 인간주의 기반 위에서 이상적 절대를 향한 끝없는 앞으로의 나아감, 이것이 바로 모더니즘의 실체이다. 바로 이 절대의 세계, 이것을 형이상학적 고찰은 나타내보여주려 하는 것이다. 휴머니즘과 진보, 그에 따라 인간의 행복을 짓밟은 모든 사회적, 제도적, 물리적 질곡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기, 이것이 바로 간단히 말하여 모더니즘의 지주이다. 모더니즘은 진보를 향한 앞으로의 나아감, 움직임, 변화를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으며, 모든 독창적인 것, 새로운 것을 높이 사게 되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모더니즘의 기본적인 논리적 모순이 도사리고 있다. 바로 이 모순의 드러남을 우리는 후기 모더니즘 현상이라고 부른다. [253~254p]


- 마치 전통의 이념이 전달한다는 그것이 그 전달내용을 흡수하여 더욱 우위를 차지해 버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텔레비전 혹은 다른 대중 전달매체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인 메시지를 극히 일회적으로 만들어버리고 의미 없는 것으로 사라지게 해버림과 같은 현상이다. 마찬가지로 문학에서도 이야기와 그 이야기의 전달행위인 이야기하기가 독자적으로 더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형식주의 비평에서 명확히 드러나는 것이다. 의미가 빈 형식 그 자체가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전달의 내용물인 지식은 전달조작의 대상물이 되었다. 따라서 현대는 조작적인 사회로 전환된다. 지식의 양은 무한히 어디에고 있다. 그러나 그를 어떻게 조작해야 하는가. 그 조작의 방법과 속도에 의해서 각 현상은 모습을 달리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254~255p]


- 이러한 모더니즘의 시간개념, 그와 함께 역사도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무자비하게 무너진다. 오직 현재, 쉬운 말로 하자면, 지금 여기만이 남는다. 즉각적인 시대라는 것이다. 절대적인 의미의 지표, 이상이 없으니, 전통이 있을 수 없으며, 미래를 향한 이상이 없다. 오늘의 시대는 원초적으로 희망이 사라진 시대이다. 신이 죽어버림으로 하여 인간은 희망마저도 함께 잃어버렸다. [255~256p]


- 기호는 우선 기호가 지시하는 대상과는 이원적인 관계에 있다. 기호와 지시물의 관계는 실체와 그 그림자와의 관계, 절대와 그 재현의 관계를 반복한다. 지시물과 기호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최소한의 거리가 있으며, 바로 이 거리는 의미의 거리가 되고, 깊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를 한걸음만 더 깊이 들어가보자. 기호는 언제나 지금 그 기호의 자리에 없는 그 지시물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기호 속에는 언제나 대상의 소멸, 결핍이라는 이상한 모순이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기호가 정작 지시하고 있는 것은 지시물이 아니라 그 지시물의 부재, 사라짐, 죽음을 지시하고 있다는 말이다. 기호에 깃든 이 모순, 존재의 지시와 동시에 존재의 부재라는 모순을 포스트모던은 지적한다. 그리하여 기호의 지시적인 대체적인 재현적인 기능을 말하기 전에 바로 이러한 기능에 내재하고 있는, 지시물의 권한의 갈취, 완전하게 대체하여, 스스로가 그 지시물적인 위치에 오름을 주목한다. 즉 지시물이 없는 그 자리에 오직 기호만이 남아서 그 지시물의 죽음에 뒤이어 되돌아 오는 회귀적인 권리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기호가 기호 그 자신의 존재만을 지적하게 되면 즉시 사라지는 것은 기호와 그 지시 대상과의 거리이며, 그와 아울러 기호의 의미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기호는 깊이 없는 피상적인 존재, 의미 없는 기호로서 독립적이 된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의 실체가 없는 기호와 같은 것이라고 서슴지 않고 주장하기에 이르른다. [260p]


- 속도 역시 모더니즘이 고양하던 가치 즉 움직임의 하나이었다. 그러나 극도의 속도는 0의 속도에 이르게 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자동차의 발달은 더욱더 인간을 움직이지 않도록 하고 있으며,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거리는 더욱더 좁혀 들어가서 움직일 거리가 없어진다. 움직임이 없는 사회, 거리가 없는 사회는 지극히 표면적인 사회가 된다. 그리고 전체는 더욱더 동시적으로 변하게 되어 시간적 차이가 없어지므로 시간의 연속성보다는 항상 시간은 표피적인 현재적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표피적이고 일회적 현재적으로 변한다는 것은 추상적 의미보다는 지극히 말초적이고 감각적으로 변하도록 한다. 감각 중에서도 촉각적인 것이 된다. 시선이 통과할 거리가 있는 곳은 시각적인 공간이다. 르네상스에서 만들어진 원근법적인 공간은 시각적인 공간이다. 이러한 공간은 깊이가 있으며 전후좌우 그리고 논리적으로 배열되는 공간이다. 이 공간은 시선이 주팔할 시간이 소요되고 전체를 하나에 감싸는 전체적인, 피라미드식인 공간이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변한 공간에서는 시선은 항상 튕겨지거나 너무나 투명해져서 시선은 의미 생산의 지주에 부딪힘이 없이 그냥 되돌아오거나 통과되어 버린다. 사실 모더니즘의 공간은 의미의 투명성, 명확성을 추구하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극도의 의미의 명확성은 오히려 의미 제거의 의미의 투명함을 가져온다. [264~265p]


- 덩어리에게 있어서 기능의 분화란 있을 수 없기에 그 옛날 각각 독립적인 기능을 담당하였던 유기적 기관들은 하나의 덩어리 속에서 다기능적으로 변하거나 본래의 기능이 상실되었다. 오늘의 모든 제도적 기관들도 기관의 독립성은 서서히 상실되고 다기능 혹은 무기능적으로 변해 가고 있음도 이러한 연유일 것이다. [26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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