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은 서로 돕는다

지은이 / 표토르 A. 크로포트킨 | 옮긴이 / 김영범

by Joong

만물은 서로 돕는다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
지은이 / 표토르 A. 크로포트킨
옮긴이 / 김영범
펴낸이 / 최미화
펴낸곳 / 도서출판 르네상스(121-801 서울시 마포구 공덕1동 105-225)
초판 1쇄 인쇄 / 2005년 4월 20일
초판 1쇄 펴냄 / 2005년 4월 30일


- 진화를 주제로 유럽 대륙에서 최근에 발표된 중요 저작들은 대부분 생존경쟁에서 나타나는 두 가지 양상을 구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첫 번째는 외부적인 전쟁으로, 이는 혹독한 자연조건에 대한 투쟁 혹은 경쟁 관계에 있는 종에 맞서 벌이는 투쟁을 말한다. 두 번째는 내적인 전쟁으로, 이는 같은 종 내에서 생존 수단을 놓고 벌이는 투쟁을 가리킨다. 생물학자들은 또 진화에 있어서 내적인 전쟁이 벌어지는 범위나, 이것이 진화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이 모두 과장되었다고 지적했는데, 이는 다윈 자신도 상당히 뼈아프게 인정한 부분이기도 하다. 반면에 종의 번영을 성취하는 데 동물들의 사회성이나 사회적 본능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다윈도 이미 인정한 바가 있는데도, 오히려 그의 뜻과는 달리 과소평가되었다.
그러나 동물들 간의 상호부조와 지원의 중요성이 오늘날의 사상가들 사이에서 비로소 인정되기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내가 주장한 테제의 두 번째 부분, 즉 인간의 역사에서도 역시 상호부조와 지원이 사회 제도의 점진적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은 여전히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6~7p]


- 이 전쟁의 참화를 준비하고 야만적인 방법을 고안해낸 것은 유럽 국가의 대중이 아니라 그들의 통치자들이고, 정신적인 지도자들이었다. 인민대중들은 현재 자행되고 있는 살육행위의 준비과정이나 전쟁수단의 고안과정에서 발언권을 행사할 만한 어떠한 위치에도 있어본 적이 없다. 이런 살육행위와 전쟁 기술은 인류가 남긴 최고의 유산으로 자부해온 바를 전적으로 무시하는 짓들이다. [8p]


- 이러한 상황을 목격하면서 나는 다윈이 ‘과잉번식에 대한 자연의 통제’라고 설명한 것이 자연계에서 압도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찍이 깨닫게 되었다. 이에 비해 생존 수단을 놓고 동일한 종의 개체들 사이에 벌이는 투쟁은 제한된 범위 내에서 산발적으로 발생 할 수는 있어도 결코 이만큼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가 북아시아라고 일컫는 지역의 대부분에서 보이는 두드러진 특징은 개체 과잉이 아니라 개체 과소였다. [11p]


- 자연에는 상호투쟁의 법칙 이외에도 상호부조의 법칙이 존재하는데,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특히 종이 계속 진화하기 위해서는 상호부조의 법칙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 케슬러의 생각이었다. [13p]


- 하지만 동물의 사회성을 사랑이나 동정으로 환원시키면 그 일반성과 중요성은 축소되어버린다. 이는 마치 인간의 윤리를 사랑과 개인적 동정으로만 파악할 때 인간의 도덕적 감정을 총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협소한 시각을 불러오는 것과 마찬가지다. 때로는 전혀 알지도 못하는 이웃에 불이 났을 때 물 양동이를 들고 그 집으로 뛰어가는 이유는 이웃에 대한 사랑때문이 아니다. 그러한 행동은 다소 막연하긴 하지만 인간이 지니는 연대성과 사회성이라는 훨씬 더 폭넓은 감정과 본능에서 우러난 것이다. 동물들도 마찬가지다. 한 무리의 반추동물이나 말들이 늑대의 공격에 맞서 둥근 원을 형성하는 것은 사랑이나 동정심(사전적 의미로 이해된) 때문이 아니다. 늑대들이 무리 지어 사냥하는 것도 사랑 때문이 아니다. 새끼 고양이들이나 새끼 양들이 자기들끼리 어울려 놀고, 여러 종의 어린 새들이 모여서 가을날의 하루를 함께 보내게 만드는 것도 사랑의 힘이 아니다. 또한 프랑스 땅만큼 넓은 지역에 흩어져 있던 수천의 다마사슴들이 제각기 여러 무리로 뭉쳐서 저마다의 장소에 집결한 후 강을 건너는 행동도 사랑이나 개별적인 동점심 때문은 아니다. 이는 사랑이나 개별적인 동정심보다는 분명 한없이 더 넓은 감정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본능은 극히 장구한 진화 과정에서 동물이나 인간들 사이에 서서히 발달해오면서, 동물과 사람들에게 상호부조나 상호지원에서 얻어지는 힘을 가르쳐주었으며, 사회적 삶에서 찾을 수 있는 기쁨도 가르쳐주었다. [16~17p]


- 근대사회가 기반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각자는 자신을 위해, 국가는 모두를 위해”라는 원리는 아직 실제로 성공한 적도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19p]


- 그가 암시한 바로는 이러한 경우에 가장 적응을 잘한 종들은 육체적으로 가장 강하거나 제일 교활한 종들이 아니라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강하든 약하든 동등하게 서로 도움을 주며 합칠 줄 아는 종들이었다. 다윈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가장 협력을 잘하는 구성원들이 가장 많은 공동체가 가장 잘 번창하고 가장 많은 수의 자손을 부양한다”(제2판, p. 163). [27p]


- 그들은 동물의 세계를 반쯤 굶어 서로 피에 주린 개체들이 벌이는 끝없는 투쟁의 세계로 여기게 되었다. 그들의 영향을 맡은 근대의 저작물들은 정복당한 자의 비애라는 슬로건을 마치 근대 생물학의 결정판인 양 퍼뜨렸다. 이들은 개인의 이익을 위한 ‘무자비한’ 투쟁을 인간도 따를 수밖에 없는 생물학의 원리로까지 끌어올렸다. [29p]


- 사회성 역시 상호투쟁과 마찬가지로 자연법칙이다. 물론 이 두 가지 사실들이 갖는 상대적인 중요도를 대략으로나마 수치로 환산해서 평가하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간접적인 수단을 통해서 “끊임없이 서로 싸우는 종들과 아니면 서로 도움을 주는 종들 중에서 어느 쪽이 적자인가?”라는 질문을 자연에 던진다면, 의심할 여지도 없이 상호부조의 습성을 가지고 있는 동물들이 적자임을 바로 알게 된다. [31p]


- 모든 유기체들은 두 가지 욕구 즉 영양 섭취의 욕구와 종족 번식의 욕구를 지닌다. 영양 섭취의 욕구는 유기체로 하여금 서로 투쟁하고 말살하게 만들지만, 반면에 종족 유지의 욕구는 유기체로 하여금 서로 접근하고 지원하도록 한다. 나는 유기적 세계가 진화하는 데-즉 유기체의 점진적 변화에 있어서-개체들 사이에 상호지원이야말로 상호투쟁보다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고 싶다.(Memoirs(Trudy) of the St. Peterburg Society of Naturalists, 11권. 1880.)[34p]


- 어떤 종의 새매는 “약탈하기에 거의 이상적인 유기적 조직”을 가지고 있는데도 사라져가는 데 반해, 상호부조를 실천하는 종들은 번성하고 있다고 스예베르초프는 언급하였다. “다른 한편 사회성이 있는 새, 가령 오리를 예로 들어보자. 오리는 대체로 빈약한 유기조직을 가지고 있지만, 상호지원을 실천하고 있어서 종의 숫자를 셀 수도 없고 변종들도 무수히 많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지구의 거의 모든 곳에 퍼져 있다.” [34p]


- 물고기에 관한 정보는 믿을 만한 게 극히 드문데, 관찰하기 힘든 이유도 있겠지만 부분적으로는 이 주제에 대해 제대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45p]


- 비록 눈앞에는 충만한 삶이 넘쳐나지만 아무리 이상적으로 무장된 약탈자들도 그 삶의 이탈자를 잡는 데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61p]


- 자연은 가장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가장 고도화된 것에 이르기까지 가능한 모든 다양한 특성을 제공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은 어떤 포괄적인 단언으로 묘사될 수 없다. 또한 자연은 도덕론자의 관점으로 판단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도덕론자들의 견해는 그 자체가-대체로 무의식적으로-자연을 관찰해서 얻은 결과이기 때문이다. [63p]


- 군집과 상호부조는 포유류들에게는 철칙이다. [68p]


- 솔직히 과연 무엇이 동물들을 서로 모이게끔 만드는지 이야기하기란 극히 어렵다. 상호보호에 대한 필요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동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느낌이 주는 즐거움 때문인지. [74~75p]


- 엄청나게 많은 수의 버팔로들이 초원에서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이 목격되긴 하지만 이는 수없이 많은 작은 무리들로 이루어진 것이며, 이 작은 무리들은 절대 서로 섞이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필요가 발생하면 광대한 지역에 흩어져 있던 모든 무리들이 함께 모여 거대한 대열을 형성하는데, 그 수는 앞서 내가 언급한 대로 수십만에 이른다. [79p]


- 하지만 진화의 단계가 올라가면서 그에 비례하여 군집이 점점 더 의식적으로 성장하게 됨을 알게 된다. 군집은 순전히 자연적인 성격을 잃게 되어 더 이상 단순한 본능에 따르지 않고 이성에 의해 이루어진다. 더 고등한 척추동물들은 주기적으로 군집을 이루고, 군집에 의존해서 주어진 욕구, 즉 종의 번식, 이동, 사냥이나 상호 방어 등을 충족한다. 군집은 임시적으로도 이루어진다. 새들이 약탈자에 맞서 집단을 이룰 때나, 포유류들이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닥쳐 이동을 하기 위해 결합되는 경우처럼 이 마지막 사례에서 군집은 습관적인 생활 방식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이탈하는 경우이다. 이따금씩 결합 형태는 두 가지 혹은 그 이상으로 나타난다. 처음엔 가족, 그 다음엔 집단, 그리고 마지막으로 집단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군집. 우리가 들소나 기타 반추동물에게서 보았던 것처럼 생활 습관상 흩어져 있다가 필요한 경우에 결합하는 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군집 생활이 더 높은 형태로 발전하게 되면 집단생활의 이점을 잃지 않으면서도 개체의 독립성을 더욱 보장해준다. 대부분의 설치류들의 경우에 개체들은 각자의 거주 장소를 가지고 있어서 혼자 있고 싶을 때면 자기 집으로 물러갈 수 있다. [83p]


- 개미에서 시작해서 새들을 거쳐 가장 고등한 포유류에 이르기까지 모든 동물들은 서로의 관심을 끌거나 집적거리면서 놀고 뒹굴고 서로 쫓아다니기를 좋아한다고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이런 놀이는 새끼들에게 어른이 되어서 적절한 행동을 하도록 가르치는 학교 역할을 하지만 이러한 실용적인 목적 이외에도 춤이나 노래와 함께 넘치는 활력 즉 단순히 ‘삶의 즐거움’을 표출하는 수단이거나, 또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같은 종이나 다른 종의 개체들과 의사소통 하려는 욕망의 소산일 수도 있다. [84p]


- 그러므로 다윈이나 월리스가 언급했던 민첩성, 보호색, 영악함 그리고 배고픔이나 추위를 견디는 능력 등이 개체나 종들을 어떤 주어진 환경하에서 최적으로 만든다는 점을 전적으로 인정하더라도 사회성은 어떠한 환경하에서도 생존경쟁에 발휘되는 가장 강력한 이점이라고 주장하는 바이다 자진해서 혹은 마지못해 사회성을 포기한 종들은 결국 멸종하고 만다. [87p]


- 지능 발달에 필요한 여러 요소에는 언어, 모방 그리고 축적된 경험 등임 포함되는데, 사회성이 없는 동물들에게는 이러한 능력이 결핍되어 있다. [87~88p]


- 일정 지역의 물리적이고 생물학적인 조건들, 일정한 종들에 의해 점유도니 지역의 범위, 그리고 그 구성원들이 지니는 습성 등이 변화하지 않고 남아 있는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새로운 변종이 출현하게 되면 새로운 변종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충분하게 부여받지 못한 모든 개체들은 곧 굶어죽거나 멸종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조건들이 한꺼번에 중첩되어 작용하는 경우를 자연계에서는 실제로 찾아보기 어렵다. [95p]


- 조상종들이 예외적으로 대규모로 사망한 적도 없다. 중간 단계의 변종이나 종들에 속했던 개체들은 일상적으로 발생한 사건 속에서 사라져갔다. 때로는 먹이가 풍족한 와중에도 사라져갔고 그 흔적들이 세계 도처에 묻혀 있다. [98p]


- 이곳의 주민들은 식량은 풍족했지만 위생 시설은 전혀 없었다. 지난 80년 동안의 출생률이 6%인점을 감안해도 현재의 인구는 80년 전과 같다. 따라서 거주민들 사이에 무서운 경쟁이 있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인구는 해마다 변동 없이 유지되었는데, 그 이유는 단지 새로 태어나는 아이의 3분의 1일 6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죽었고, 2분의 1이 4년 이내에 죽었으며, 100명이 태어나면 그중에서 17명 정도만 20살까지 살았기 때문이다. 새로 태어난 아이들은 경쟁상대로 성장하기도 전에 죽어버린다. 사람의 경우가 이렇다면 분명히 동물의 경우는 더 말할 여지도 없다. 새의 세계에서 알을 파괴하는 행위가 엄청나게 자행되는데 이 알들이 초여름에 여러 종들에게 주요한 먹이가 되기 때문이다. 폭풍은 물론이고 홍수로 인해 미국에서는 백만 개 정도의 둥지가 파괴되고, 급작스러운 기후의 변화는 어린 포유류들에게 치명적이다. 폭풍이나 홍수 때마다, 새둥지에 쥐가 나타날 때마다, 기온이 갑자기 변화할 때마다 이론상으로 무섭게 나타나는 경쟁자들은 사라진다. [98~99p]


- 아메리카에서 말이나 소가, 뉴질랜드에서는 돼지나 토끼가, 심지어는 유럽에서 건너온 야생 동물들이(이들의 숫자는 경쟁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람에 의해서 억제되었다) 매우 급격하게 증가했다는 사실들은 과잉-인구 이론에 오히려 반대되는 형국을 보인다. 아메리카에서 말이나 소가 그토록 급격하게 증가할 수 있었다면, 당시에 신대륙에 버펄로나 다른 여타 반추동물들이 아무리 많았어도 초식 동물의 개체수는 대초원이 감당할 수 있는 수에 훨씬 못미쳤다는 사실을 쉽게 증명해준다. 수백만의 침입자들이 이동해와서 충분한 먹이를 얻고도 이전부터 대초원에 살던 개체들이 굶어죽지 않았다면, 유럽인들은 아메리카에서 초식자들의 개체수가 과잉되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결핍된 상태를 목격했다는 결론을 내려야만 한다. [99p]


- 기근이나 콜레라, 천연두나 디프테리아 같은 극심한 전염병에서 살아남은 종들은 미개한 나라에서 보았듯이 가장 강한 것도, 가장 건강한 것도 가장 지능적인 것도 아니다. [104p]


- 참사가 벌어지는 동안에 자연선택의 역할은 모든 종류의 결핍을 최대한 인내하는 능력을 부여받은 개체들을 남겨두는 것이다. 시베리아의 말이나 소 떼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들은 그저 견뎌내고 있을 뿐이다. [104p]


- 매우 다행히도 경쟁은 동물에서도 인간에서도 철칙이 될 수 없다. 동물들 사이에서 경쟁은 예외적인 시기로 제한되고, 자연선택은 그 원리가 발현되기에 더 좋은 분야를 찾게 된다. 상호부조와 상호지지를 통해서 경쟁이 제거되면 더 좋은 조건들이 창출된다. 엄청난 생존경쟁 속에서-최소한의 에너지를 소비해서 가능한 최대한도로 생의 충만함과 강렬함을 추구하기 위해서-자연선택은 지속적으로 가능한 한 경쟁을 피하는 방법을 추구한다. 개미들은 보금자리와 종족 안에서 결합한다. 그들은 저장물들을 모아두고, 그들의 가축을 기른다. 개미는 이렇게 해서 경쟁을 피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선택을 통해서 개미의 종 중에서 어쩔 수 없이 유해한 결과를 야기하는 경쟁을 피하는 방법을 가장 잘 아는 종들이 선택된다. 새들은 대체로 겨울이 다가오면 서서히 남쪽으로 이동하거나 무수한 집단으로 모여서 긴 여행을 떠남으로써 경쟁을 피한다. 많은 설치류들은 경쟁이 시작되어야 하는 시기가 오면 아예 잠들어버린다. 한편 다른 설치류들은 겨울을 나기 위해 식량을 저장하고 일하면서 보호를 받기 위해 커다란 군집으로 모인다. 순록들은 대륙의 내지에 이끼가 말라버리면 바다로 이동한다. 버팔로들은 충분한 먹이를 구하려고 광대한 대륙을 건너간다. 비버들은 강에서 수가 불어나면 두 무리로 나뉘어 늙은것들은 강 아래로 가고 어린것들은 강 위로 올라감으로써 경쟁을 피한다. 잠도 자지 않고, 이동도 하지 않으며, 필요한 것들을 쌓아두지도 않고 개미처럼 스스로 먹이를 기르지도 못하는 동물의 경우에는 박새과의 새들이 하는 짓을 하는데, 윌리스는 이를 너무나도 매혹적으로 묘사(『다윈주의』5장)하였다. 즉 그들은 새로운 종류의 먹이에 의지한다. 이렇게 해서 역시 경쟁을 피하는 것이다
“ 경쟁하지 말라! 경쟁은 항상 그 종에 치명적이고 경쟁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매우 많다!” 이 말이야말로 항상 완전하게 실현되지는 않지만 자연에 항상 존재하는 경향이다. 이 말은 관목이나 숲, 강, 바다에서 우리에게 전해오는 슬로건이다. “그러므로 결합해서 상호부조를 실천하라! 이것이야말로 각자 그리고 모두가 최대한의 안전을 확보하고 육체적으로, 지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살아가고 진보하는 데 제일 든든하게 받쳐주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다.” 이것이 자연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이다. 그리고 저마다 각각의 부류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한 동물들은 모두 이런 식으로 실천하고 있다. 또한 인간-가장 미개한 인간도-이 그렇게 해왔고, 인간 사회에서의 상호부조를 다룬 다음 장에서 보게 되겠지만 인간이 현재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도달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105~106p]


- 가족은 원시적인 조직형태가 아니라 인간의 진화 과정에서 아주 최근에 나타난 산물이다. 선사인종학을 통해서 가능한 한 멀리 인류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인간은 가장 고등한 포유류의 군집과 유사한 종족형태로 군집을 이루며 살았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군집들이 부족이나 씨족 조직으로 이루어지는 데는 매우 느리고 긴 진화 과정이 필요했다. [111p]


- 이 문제를 가능한 한 간략하게 언급하면, 초기에 인류가 ‘군혼 혹은 집단혼’으로 볼 수 있는 단계를 거쳤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즉 혈연관계를 거의 고려하지 않고 종족 전체가 남편과 아내를 공유하였다. 하지만 아주 초기에도 이러한 자유로운 성 관계에 분명히 일정한 제한이 주어졌던 모양이다. 한 어머니의 아들들이 그녀의 자매들, 손녀, 이모나 고모와 결혼하는 것이 곧 금지되었다. 나중에 같은 어머니가 낳은 아들과 딸 사이의 결혼도 금지되었고 그 이상의 제한이 뒤따랐다. 한 혈족(또는 오히려 한 무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서 나왔다고 여겨지는 모든 후손들을 통합하는 씨족gens(혹은 clan)이라는 생각이 발전되면서 씨족 내의 결혼은 전적으로 금지되었다. 집단혼은 여전히 유지되었지만 부인이나 남편은 다른 씨족에서 데리고 왔다. 그리고 씨족의 숫자가 너무 많아지면 여러 개의 씨족으로 세분하였고, 그 각각은 계급(대개는 넷으로)으로 나뉘었고 결혼은 명확한 계급 사이에서만 허락되었다. [118p]


- 절제되지 않은 개인주의는 근대의 산물이지 원시인들의 특징은 아니다. [120p]


- 호텐토트인은 아무리 배고프더라도 혼자서 먹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을 불러 음식을 함께 나눈다. 이 때문에 콜벤Kolben이 놀라움을 표시하자 “그것이 우리 호텐토트인의 관습이다.”라는 대답을 들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호텐토트족만의 관습이 아니라 ‘야만인들’ 사이에 거의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습성이다. [123p]


- 미개한 인종들과 처음 대면했을 때 유럽인들은 대체로 그들의 삶을 서투르게 묘사한다. 그렇지만 문명인이 장기간 동안 그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면 대체로 그들을 지구상의 “가장 친절”하고 “가장 점잖은”인종이라고 묘사하게 된다. [124p]


- 불행히도 불화가 심심찮게 일어나지만, 그 이유가 ‘지역의 인구과잉’이나 ‘극심한 경쟁’과 같은 상업시대의 산물 때문이 아니라 주로 미신 때문이다. [128p]


- 나의 견해로 이러한 분배는 최초로 개인적인 부가 출현함과 동시에 나타난 매우 오래된 제도로 보인다. 이들 가운데 소수가 부를 독점하면서 혼란을 겪은 이후에 씨족 구성원들 사이에 평등을 재건하기 위한 수단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역사 시기에 상당히 많은 다른 인조들(셈족, 아리안족 등) 사이에서 주기적으로 땅을 재분배하고 빚을 모두 탕감해주었던 사례로 보아 오래된 관습이 잔존된 것이 틀림없다. 개인적으로 모든 소유물을 죽은 사람과 함께 묻거나 무덤 위에서 깨뜨리는 관습-모든 원시 인종들 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는 관습-도 확실히 같은 기원을 가지고 있다. 사실 죽은 사람이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물건들이 모두 무덤 위에서 태워지거나 깨뜨려지더라도 배나 공동으로 사용하는 낚시도구와 같이 부족과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던 물건은 전혀 파괴하지 않는다. 개인의 소유물만이 파괴된다. 후대에 이러한 습속은 종교적인 의식이 된다. 여론만으로는 이런 습속이 준수되기 어렵게 되자 신비적인 해석이 가해지고 종교의 힘을 빌려 강요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죽은 사람의 소유물 가운데 간단한 모형을 태우거나(중국에서처럼) 소유물을 무덤까지 가지고 갔다가 장례식이 끝나면 다시 그의 집으로 가져오는 형식-칼이나 십자가 그리고 공적인 영예를 드러내는 기타 징표들은 지금도 유럽인들 사이에 유행하는 관습이다-으로 대체되었다. [132~133p]


- 그래서 이처럼 사랑이 많은 그 부모들이 자행하는 유아살해를 볼 때 이러한 습속(이후에 어떻게 변할지라도)은 자라는 아이들을 키우기 위한 수단이자 부족에 대한 의무로서 순전히 강제로 이루어졌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어떤 영국인들이 언급했듯이 야만인들은 대체로 “무제한으로 늘어나지는” 않는다. 반대로 그들은 출생률을 줄이려고 온갖 방법을 강구한다. 분명히 유럽인들에게는 터무니없어 보이는 여러 가지 제한을 부과하여 효과를 본다. 야만인들은 이런 제한 사항에 엄격히 복종한다. 그렇게 해도 미개인들은 모든 아이들을 기를 수 없다. 하지만 일정한 생계 수단이 증가하게 되자마자 그들은 즉시 유아살해를 멈춘다. -중략- 선교사들은 설교를 통해서 야만인들을 교화하려 하지 말고 베니아미노프가 행한 사례를 따르는 편이 더 효과적이다. 베니아미노프는 노년에 이르기까지 매년 허름한 배로 오호츠크 해를 건너가거나 개썰매를 이용하여 추크치족들을 방문해서 빵과 낚시 도구를 제공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는 실제로 유아살해를 없앤 것이다. [136~137p]


- 이처럼 혹독한 시련기에는 유럽인들조차도 식인풍습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테고, 마찬가지로 야만인들은 이 풍습에 의존하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야만인들은 분명히 종종 죽은 시체를 먹고, 죽어 마땅한 자들의 시체도 먹었다. 노인들은 자신의 죽음이 부족에 대한 마지막 봉사임을 확신하면서 죽어갔다. 그래서 일부 야만인들 사이에서 식인풍습은 하늘의 전령사가 명령한 행위이므로 신성한 기원을 갖는다는 식으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식인풍습은 불가피한 상황에서 벌어졌던 원래의 특성은 사라지고 일종의 미신으로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때로는 용기를 계승하기 위해서 적들을 먹어야 했다. 그리고 훨씬 후대에는 같은 목적으로 적의 눈이나 심장을 먹었다. 한편 이미 많은 사제 계급과 발달된 신화를 가지고 있는 부족들 사이에서는 악한 신들, 인간의 피에 대한 갈망 등의 관념이 생겨났고, 사제들은 신을 달래기 위해서 인간의 희생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종교적인 국면에 접어들면서 식인풍습은 가장 혐오스러운 성격을 갖게 되었다. [141p]


- 하지만 보복은 종종 가해보다 더 심하게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다. 상처를 입히려다가 가해자를 죽일 수도 있고 또는 의도했던 것보다 더 많은 상처를 입힐 수도 있어서 이것이 새로운 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원시의 입법자들은 설사 보복이 가해지더라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피에는 피 이상으로 행해지지 않도록 제한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143p]


- 야만인들은 미덕의 전형도 아니지만 ‘포악함’의 전형도 아니다. 하지만 야만인들은 혹독한 생존경쟁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형성되고 유지되어온 한 가지 특성을 지닌다. 즉 그들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종족의 존재와 동일시한다. [146p]


- 대체로 무슨 일을 하든지 야만인들은 자신이 행한 행동이 초래할 직접적인 결과만을 본다. 그들은 간접적이거나 이후에 생길 수 있는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147p]


- 하지만 불합리하든 않든 간에 야만인들은 아무리 불편하더라도 불문율의 규정에 따른다. 그들은 문명인들이 성문법의 규정에 따르는 것 이상으로 훨씬 더 맹목적으로 불문율에 따른다. 불문율이란 그들에게는 종교이고 바로 생활습관이다. 항상 씨족에 대한 생각이 마음속에 남아 있고 씨족의 이익을 위해서 자기를 절제하고 희생하는 일이 일상적으로 벌어진다. [147p]


- 요컨대 독립된 가족이 부족의 통일성을 깨뜨리지 않는 한 부족 내에서 ‘개인은 만인을 위해’라는 규칙이 최고의 권위를 갖는다. 하지만 이러한 규칙이 상호 보호를 위해 연합될 때조차도 이웃하는 씨족이나 부족으로까지 확대되는 것은 아니다. 각각의 부족이나 씨족은 독립된 단위이다. 마치 포유류나 새들처럼 독립된 부족들마다 자기 영역이 대강 할당되어 있어서 전쟁할 때를 제외하고는 그 경계는 존중된다. [148p]


- 이웃의 영토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표시를 해야 한다. 누군가가 자신이 들어간다는 신호를 큰 소리로 알릴수록 더 큰 신뢰를 받게 된다. [148p]


- 그러므로 야만인들의 삶은 두 부류의 행동으로 나뉘며 두 가지 다른 윤리적인 양상으로 나타난다. 같은 부족 내의 관계 그리고 외부인과의 관계, 그리고 (우리들의 국제법이 그렇듯) ‘부족 사이에 지켜지는 법’은 관습법과는 상당히 다르다. 그러므로 전쟁을 할 때면 가장 끔찍한 잔인성을 보일수록 그런 특징은 그 부족을 찬양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러한 이중적인 도덕관은 인류의 전체 진화 과정을 거쳐서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유럽인들은 이중적인 윤리개념을 없애는데-엄청난 정도까지는 분명 아니지만-어느 정도 진전을 보아왔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연대의 사상이 국가의 경계를 넘어 부분적으로 여러 국가를 넘어서 확대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들 국가 내에서 그리고 우리 가정 내에서조차 연대의 결속력이 줄어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148~149p]


- 하지만 인간의 삶에서 어떤 시기에도 전쟁이 정상적인 상태인 적은 없었다. 무사들이 서로를 죽이고, 성직자들이 이러한 대학살을 찬양하는 동안에 대중들은 자신들의 일상을 살아가면서 노역을 수행해 나갔다. 이러한 대중들의 삶을 추적해보는 것은 흥미 있는 연구 주제가 된다. 즉 형평성, 상호부조, 상호지지 등의 개념은 대중들이 자신의 사회조직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작용해왔고, 이는 포악한 신정제神政制나 독재정치에 복종하고 있을 때조차 발휘된 것이다. [149~150p]


- 인간이라고 자연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152p]


- 맑고 빛나는 날들은 강풍과 폭풍에 가려진다. 심지어 우리 시대에도 언론사나 법정, 관공서 더 나아가 소설이나 시에서 미래의 역사가들을 위해 작성한 막대한 기록들에도 똑같은 편향성이 나타난다. 그들은 모든 전쟁이나 분쟁, 사소한 충돌, 모든 항쟁과 폭력행위, 모든 종류의 개인적인 고통 등을 매우 세밀하게 묘사해서 후손들에게 전해준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우리 모두가 아는 무수한 상호지지와 헌신 행위에 대해서는 자그마한 흔적도 좀처럼 전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 일상생활의 본질이 되어버린 것, 즉 우리들의 사회적인 본능과 예절에 대해서는 좀처럼 주목하지 않는다. [153p]


- 그들은 시련을 극복하면서 다음 15세기 또는 그 이상 동안 자신들을 결집시켜준 새로운 조직, 즉 촌락 공동체를 갖게 되었다. 이와 함께 공동의 노력을 통해 전유되고 보호되는 공동영토라는 개념이 생겨나서 사라져 가는 공동세습 개념을 대체하였다. 공동의 신들은 점차 조상으로서의 성격을 잃게 되었고 국부적이고 지역적인 성격이 부여되었다. 이 신들은 특정 지역의 신이나 성인이 되었고, ‘땅’은 거주민과 동일시되었다. 과거의 혈족 연합을 대신해서 영토에 기초한 연합이 발전하였다. [157p]


- 요컨대 어떤 인종이나 국가도 모두 촌락 공동체 시기를 반드시 거쳤다는 뜻이다.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유럽의 촌락 공동체는 농노제가 발전한 형태라는 이론은 폐기될 수 있다. 촌락 공동체를 깨뜨리기에는 역부족이다. 이 제도는 적어도 역사에서 일정한 역할을 해왔고 지금도 역할을 하고 있는 모든 종족들에게서 나타나는 진화의 보편적인 국면이었고 씨족 조직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159p]


- 하지만 공동경작이 반드시 공동소비를 뜻하지는 않는다. [165p]


- 미국을 식민지로 개척하기 시작할 때 영국인들조차도 과거의 제도로 돌아가서 촌락 공동체로 집단을 이루곤 했다. [167p]


- 미개인들의 법전-재판관들이 사용하기 위해 관습법의 규정들을 집대성해 놓은 것-에서는 복수 대신에 보상을 해주는 방안을 처음에는 용인하다가, 나중에는 장려했으며, 마침내 강제하였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보상이라는 제도를 상당히 오해해서 벌금이나 원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도록 부자들에게 주어진 일종의 백지 위임장으로 생각했다. 보상금은 벌금과는 전혀달라서, 관습적으로 모든 종류의 적극적인 위반 행위에 대해 매우 높게 부과되므로 그런 위법을 저지를 엄두도 내지 못하게 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살인을 저지른 경우에 일반적으로 보상금은 살인자가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을 상회했다. [171p]


- 사고 파는 행위는 공동체 내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러한 규칙은 상당히 엄격해서 부유한 가정에서 노동자를 구하려면 다른 씨족이나 러시아인들 가운데서 데리고 와야 한다. 분명히 이러한 습속은 부랴트족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습속은 당대의 미개인들, 아리안족이나 우랄알타이족들 사이에서 상당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서 우리 조상들에게서는 보편적인 현상이었음에 틀림없다. [178p]


- 카바일족은 이미 사적인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으므로 그들 사이에는 분명히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모두 존재했다. 하지만 가깝게 함께 살며 어떻게 빈곤이 시작되는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가난을 모든 사람에게 찾아올 수 있는 일종의 사고로 여긴다. [181p]


- 이제 카바일족의 삶에서 가장 흥미로운 두 가지 특징을 간략하게나마 언급하고자 한다. 즉 전쟁시에 우물이나 운하, 사원, 시장, 도로 등을 방어해주는 아나야anaya라는 이름의 제도에 대해서이다. 이와 함께 소프cof라는 것도 있다. 아나야는 전쟁의 재해를 줄이고 분쟁을 피하기 위한 제도이다. 시장터도 하나의 아나야가 되는데, 특히 국경 지방에서 카바일 사람들과 외부인들이 함께 모이게 되면 이 장터가 바로 아나야가 된다. 어느 누구도 감히 시장에서 소란을 피우지 못하며, 만일 소란이 발생하면 시장에 모인 외부인들이 이를 진압한다. 여인들이 마을에서 물가로 가는 길도 역시 전쟁시에는 아나야가 된다. 한편 소프로 널리 분포된 군집의 형태로 중세의 시민회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상호방어를 목적으로 하는 모임의 성격을 지니기도 하며, 마을이나 씨족, 동맹의 지역적인 조직으로는 충족될 수 없는 다양한 목적-지적, 정치적, 정서적 목적-을 위해 형성된 모임의 성격도 지닌다. 소프에는 지역적인 제한이 없다. 소프는 다양한 마을에서 심지어는 외부인들 사이에서도 구성원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면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사건으로부터 사람들을 지켜준다. 요컨대 소프란 국경을 초월해서 상호 친화력을 다양하게 표출함으로써 지역적인 모임을 넘어서고 보충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개인적인 취향이나 사상에 따라 자유롭게 국제적 연대를 추구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기원을 따져보면 고대 미개인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183~184p]


- 복수의 개념뿐이었던 과거의 정의관은 서서히 복수 대신에 잘못을 교정한다는 생각으로 철저하게 변형되었다. 인류의 3분의 2이상이 여전히 일상생활의 법칙으로 삼고 있는 관습법은 부의 사적인 축적이 쉬워지면서 권력을 얻게 된 소수가 다수를 압제하지 못하게 막는 관습 체계와 조직으로 만들어졌다. 이런 현상은 상호지지를 옹호하는 다수의 성향이 선택한 새로운 형태였다. 그리고 새롭게 나타난 대중적인 조직 형태하에서 인류는 경제적, 지적, 도덕적으로 매우 커다란 진보를 이루어냈다. 그 결과 이후에 국가가 나타나게 되었을 때는 이미 촌락 공동체에서 모두의 이익을 이해 실행되었던 모든 사법적, 경제적, 행정적 기능은 소수의 이익만을 위해 점유되었다. [190p]


- 같은 혈통의 유대가 대규모의 이동으로 인해 느슨하게 되고, 씨족자체 내에서 독립된 가족들이 형성되면서 과거에 유지되었던 씨족의 연대감이 파괴되자 인간은 사회적 특성을 발휘해서 원칙적으로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연합의 형태-촌락 공동체-를 만들어냈다. [192p]


- 게다가 6,7세기 당시의 생활상을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부와 군사력 이외에도 소수의 권위를 구축하는 데 필요했던 다른 여러 요소를 더 잘 알게 된다. 그 요인은 바로 법과 권리이다. 이는 평화를 유지하고 정의를 확립하려는 대중의 욕망이었다. 법과 권리를 통해서 저사집단의 수장들-왕, 공작, 대공 등-은 세력을 얻어 향후 2, 3백 년 동안 계속 확장해 나갔다. 정의란 잘못된 행위를 적절하게 복수하는 행위라는 생각은 부족 단계에서 발전되었다. 하지만 이후에 이어지는 제도의 역사를 실로 꿰듯 일관되게 통찰해보면 정의 관념은 왕과 봉건 영주들의 권위가 세월질 때 군사적, 경제적인 원인보다도 훨씬 더 강한 밑바탕이 되었다. [195~196p]


- 당시에 이들은 지금은 잊혀졌지만 보복은 정의로운 행동이 아니라는 기독교의 근본적인 원리를 고수하였다. 당시에 기독교 성직자는 피의 복수를 피해 도망쳐온 사람들을 위한 피난처로 교회를 열어 놓았고 생명에는 생명으로 상처에는 상처로 라는 과거 종족적인 원리에 늘 반대하면서 범죄 사건이 발생하면 기꺼이 중재자의 역할을 하였다. 요컨대 초기 제도사를 깊이 있게 연구해 볼수록 권위의 기원을 군사 이론에서 그 근거를 찾기가 더욱 힘들어진다. 오히려 나중에 억압의 근원이 되기도 하였던 그러한 권력조차도 그 기원은 대중들의 평화를 지향하는 경향에서 발견된 듯하다. [198p]


- 이처럼 엄청난 결과를 낳았던 힘에 눈을 돌려보면 우리는 그러한 결과들을 개별적인 영웅들의 천재성이나 거대한 국가의 강력한 조직 혹은 지배자들의 정치적인 역량에서가 아니라 상호부조와 지원이라는 한결 같은 흐름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상호부조와 지원은 촌락 공동체에서 힘을 발휘하였고, 중세에는 새로운 형태의 연합에 의해서 활력을 얻어 강화되었다. 새로운 형태의 연합은 이전과 같은 정신에 의해 고무되어 길드라고 하는 새로운 모델로 형성되었다. [203p]


- 중세 건축의 가장 세련된 기념물들은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브레멘의 놀라운 옛 교회는 9세기에 건설되었고,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사원은 1071년에 완공되었으며, 피사의 아름다운 돔은 1063년에 만들어졌다. 사실 12세기의 르네상스와 12세기 합리주의-종교개혁의 선구-로 설명되는 지적인 운동은 도시 대부분이 성벽으로 둘러싸여 작은 촌락 공동체 형태가 단순한 집단으로 여전히 남아 있던 시대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자유와 계몽사상이 성장하고 있던 이런 중심지에서 사상과 행동을 통일시키고 12, 13세기에 힘을 얻게 된 독창성을 발휘하게 하려면 촌락 공동체 원리말고도 또 다른 요소가 필요했다. 직업이나 수공업 그리고 예술이 다양하게 발달하면서 멀리 떨어진 나라들과 상업이 성행하자 새로운 형태의 연합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처럼 새롭게 필요한 요소를 충족시켜준 것이 길드였다. [208p]


- 사실 우리는 모든 직업마다 기드 조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농노의 길드, 자유민의 길드 그리고 농노와 자유민의 길드, 길드는 사냥이나 어로, 또는 교역 원정등의 특수한 목적을 위해 소집되었다가 그 목적이 달성되면 해산되었다. 특정한 기술이나 무역 분야에서는 길드가 몇 백 년씩 지속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길드의 목적이 엄청나게 다양해짐에 따라 길드의 형태도 그에 비례해서 다양해졌다. [213~214p]


- 이 모든 길드는 자치 사법권과 상호지원이라는 이중의 원리를 근간으로 조직되었다. [214p]


- 도시의 권력이 상인이나 귀족과 같은 특권 계급의 손에 넘어간 경우에도 내적인 도시의 생활과 일상생활 속에서 민주주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들은 이른바 국가라고 하는 정치적인 형태에 크게 의존하지 않았다. [220p]


- 제 3자가 가격을 정하는 관행은 매우 오래된 관습이었다. 도시 내의 모든 교역에서 가격 결정을 판매자나 구매자가 아닌 제3자, 즉 ‘사려 깊은 사람’에게 맡기는 것은 분명히 널리 퍼진 관습이었다. 이러한 제도는 교역의 역사에서 훨씬 더 오래된 기원을 갖는다. 즉 주요 산물의 교역은 시 전체가 수행하고 상인들은 대리인이나 수탁인으로서 수출한 물건을 팔기만 했다. [225p]


- 요약하자면 중세 도시를 더욱 깊이 이해할수록 중세 도시가 정치적인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단순한 정치 조직만은 아니었음을 더 잘 알게 된다. 중세 도시란 촌락 공동체보다 훨씬 커다란 규모로 상호원조와 지원, 소비와 생산을 위한 연합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국가라는 속박을 부과하지 않으면서도 예술, 공예, 과학, 상업 그리고 정치 조직에서 각기 독립된 집단의 창조적이고 천재적인 개인들이 완전한 자유를 표출하면서 함께 사회생활을 하기 위한 밀접한 연합을 조직하려는 시도였다. [226p]


- 중세에도 시장은 일반적으로 똑같이 보호를 받았다. 사람들이 교역을 하러 온 장소나 그로부터 일정한 반경 내에서는 분쟁을 벌일 수 없었다. 그리고 만일 판매자나 구매자 등이 잡다하게 얽혀 있는 군중 사이에서 분쟁이 발생하면 시장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공동체의 법적이나 주교, 영주, 왕의 재판장 앞으로 가야 했다. 거래하기 위해 온 외부인은 방문객이 되는 셈이고 그에 걸맞게 행동했다. 대로에서 상인을 주저 없이 약탈하는 영주도 계표界標는 존중한다. 즉 시장에 서 있는 장대에는 그 시장을 보호해주는 주체가 왕인지 영주인지 아니면 지역 교회나 민회인지에 따라서 왕의 문장紋章이나 그 지역의 성인의 형상, 또는 단순한 십자가 등이 걸려 있었다. [232~233p]


- 수공업길드는 자체 생산품을 공동으로 판매하고 원재료를 공동으로 구매하였고, 그 구성원은 상인이면서 수공업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자유 도시의 초창기부터 과거의 수공업길드가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후에 도시에서도 수공업은 높은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사실상 중세 도시에서 수공업은 하위직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반대로 촌락 공동체 시대에 높은 존경을 받았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비전’의 수공업은 시민들에 대한 신성한 의무, 즉 다른 일만큼이나 명예로운 공직으로 여겨졌다. 지금으로선 너무 지나쳐 보이지만 공동체에서의 ‘정의’관념,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정당’하다는 관념은 생산과 교환 활동에 영향을 미쳤다. 피혁공, 통 제조자 또는 제화공의 작업은 반드시 ‘정당’하고 공정해야 한다고 당시의 사람들은 기록해 놓았다. 장인들이 사용하는 나무나 가죽 또는 실 따위는 ‘제대로 된’ 것이어야 하고 빵도 ‘적당하게’ 구워져야 한다. 이런 이야기들을 우리 시대에 맞게 옮겨보면 마치 꾸며낸 이야기처럼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당시에 이런 정황은 자연스럽고 꾸며내지도 않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중세의 장인들은 생면부지의 구매자를 대상으로 물건을 만들지 않았고 자신의 성품을 알지도 못하는 시장에 내놓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먼저 자신의 길드를 상대로 물건을 만들었고, 서로를 잘 알고 있고 그 직종의 기술을 알고 있는 조합 사람들을 위해서 제품을 만들었다. 각 생산품의 가격을 지정할 때는 제품의 제조 과정에 들어간 기술이나 작업에 투여된 노동을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었다. 개별적인 생산자가 아닌 길드에서는 공동체에 팔 목적으로 물건들을 내놓았고 그런 다음에 차례가 되면 결연을 맺은 공동체의 조합에 수출될 물건들을 내놓고 제품의 품질에 책임을 졌다. 이러한 조직에서 각 동업 조합들은 저급한 품질의 제품을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기술적인 결함이나 저질품을 내놓게 되면 조례에 “그러한 물품들은 공동체의 믿음을 깨뜨릴 수 있다.” 고 나와 있기 때문에 모든 공동체에서 우려하는 문제가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생산활동은 전체 관리들amitas의 통제를 받는 사회적인 의무였기 때문에 수공업은 자유 도시가 존속하는 한 지금처럼 나쁜조건으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장인과 도제 또는 장인과 직인의 차이는 중세 도시 초창기부터 있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부와 권력의 차이가 아니라 나이와 기술의 차이에 불과하였다. 7년 동안의 동제 생활을 마치거나 어떤 기능에서 지식과 능력이 증명된 후에는 도제도 장인이 되었다. 훨씬 뒤인 16세기쯤 왕권이 도시와 수공업 조직을 파괴한 후에는 단순히 세습과 재력만으로도 장인이 될 수 있었다. 또한 이 시기는 중세의 산업과 에술이 전반적으로 쇠락해가는 시대이기도 하였다. [235~236p]


- 사실 중세 도시를 더 많이 알게 될수록 도시의 삶이 절정기에 다다를 때처럼 노동이 그토록 번성하고 존경받은 때는 없었다는 점을 확신하게 된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우리 시대 급진주의자들의 열망은 이미 중세 때 실현되었다. 게다가 현재 유토피아적으로 그려지는 일들이 당시에는 현실적인 문제로 받아들여졌다. 노동은 즐거워야 한다고 말하면 우리는 그냥 웃어넘기지만 중세 구텐베르크 조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일을 하며 즐거워야 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때는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이 근면과 노동으로 이루어낸 것을 착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법이 근면과 노동을 지켜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창 하루 8시간 노동을 이야기할 때 페르디난드 1세 Ferdinand I (1503~1564. 신정 로마 제국의 황제-옮긴이)의 대영제국 탄광에 관련된 조례를 기억해 볼만한데,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토요일 오후의 노동은 금지되었다. 얀센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 이상 더 장시간 노동은 매우 드문 경우이고 일반적으로는 그보다 더 짧은 시간 동안 노동하였다. 15세기 영국에서는 로저스의 말에 따르면 “노동자들은 일주일에 48시간만 노동하였다.” 근대에 와서 쟁취한 것으로 알려졌던 토요일의 반나절 노동도 중세의 제도하에서 시행되고 있었다. 토요일 반나절 노동으로 남는 시간을 대부분의 공동체에서는 목욕 시간으로 활용하였고, 직인은 수요일 오후가 목욕 시간이었다. [237~238p]
- 중세 도시의 삶은 자유를 쟁취하고 지켜나가는 힘든 싸움의 연속이었다. 사실 시민들의 강하고 끈질긴 혈통은 이처럼 혹독한 경쟁 속에서 발전해왔고, 자기 도시에 대한 사랑과 숭배의 마음은 이러한 투쟁 속에서 자라났으며, 중세 코뮌에서 이루어냈던 굵직한 일들은 그러한 애정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공동체가 감수해야 했던 희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혹했고 그들의 내적 삶에서도 깊은 분열의 흔적을 깊이 남겨 놓았다. 유리한 상황이 동시에 발생했던 극소수의 도시는 단번에 자유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지만, 얼마 안 되는 그 도시들도 대부분 자유를 쉽게 잃었다. 한편 대부분의 도시들은 자유롭게 생활할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 50년이나 100년을 계속해서 싸워야 했고, 도시의 자유가 굳건해지는 데 또 10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12세기의 특허장은 자유를 위해 놓여진 단 하나의 주춧돌에 불과했다. 실제로 나라가 봉건적인 예속에 빠져든 와중에 중세 도시는 하나의 요새화된 오아시스가 되었고, 스스로 자체적인 무력으로 각각의 입지를 마련해야 했다. [242~243p]


- 인류는 중세 도시에서 새로운 운동을 이루어냈고 그 결과는 실로 엄청났다. 11세기 초에 유럽의 도시들에는 초라하고 작은 집들이 소규모로 집단을 이루었고 낮고 볼품 없는 교회만이 도시를 치장했다. 교회 건축가들은 아치를 어떻게 만드는지 몰랐고, 주로 조립하고 연마하는 정도의 기술은 아직 초보적인 단계에 있었다. 학문은 소수의 수도원에서만 가능했다. 바로 이랬던 유럽의 모습은 350년이 지나면서 변화되었다. 부유한 도시들이 온 나라에 산재했었고 그 하나하나하가 예술 작품인 탑과 성문들이 엄청나게 두꺼운 성벽을 둘러싸고 있었다. 장엄한 양식으로 기획되어 화려하게 장식된 성당들은 지금도 애써 도달하려고 하는 순수한 형식과 대담한 상상력을 과시하면서 성당의 종탑을 하늘 높이까지 끌어올렸다. 물건을 제작하는 속도보다 노동자들의 창의적인 솜씨와 빼어난 마무리를 더 높이 평가한다면 당시의 수공업과 예술은 여러 방면에서 지금도 쫓아갈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경지에 이르렀다. 자유도시의 상선들은 북, 남 지중해를 사방으로 헤치고 나아갔다. 좀더 힘을 썼으면 대양을 가로지를 기세였다. 광범위한 지역에서 괴로움은 행복으로 바뀌었고 학문도 발전하며 널리 퍼져 나갔다. 과학적 방법론이 고안되어 자연 철학의 기초가 놓여졌고, 우리 시대가 그토록 자랑하는 모든 기계적인 발명을 예비하는 길이 마련되었다. 400년도 안 돼서 이러한 마술 같은 변화가 유럽에서 이루어졌다. 자유도시를 잃게 됨으로써 유럽이 감당해야 할 손실은 17세기를 14세기나 13세기와 비교해 봐야만 이해할 수 있다. 이전에 스코틀랜드, 독일, 이탈리아의 평원으로 상징되었던 번영은 사라져 버렸다. 도로는 형편없는 상태가 되어버렸고, 도시의 인구는 감소되었으며, 노동은 노예 상태로 전락하였으며, 예술은 사라지고 상업 자체도 쇠락해가고 있었다. [252~253p]


- 모든 예술 가운데서도 무엇보다 사회성이 강한 예술인 건축이 최고도로 발달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건축이 그와 같은 모습을 지닐 수 있었다면 그 이유는 분명히 사회적인 삶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이리라. [254p]


- 중세 건축이 장엄한 이유는 바로 장엄한 사상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스 예술과 마찬가지로 중세건축은 도시가 키워낸 우애와 통합의 사상에서 나왔다. 중세 건축은 대담한 투쟁과 승리를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호방함을 가지고 있었고 도시의 모든 삶에 스며들어 있었던 활력이 표출된 것이었다. [254~255p]


- 바젤 성당도 마찬가지로 적은 자금으로 건축되었다. 하지만 각 조합들은 자신들의 공동 기념물을 위해서 각자의 역할에 따라 돌이나 노동 그리고 장식 기술 등을 기부하였다. [256p]


- 15세기 말에 이르러 과거 로마식으로 재건된 강력한 국가들이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서도 더 교활하고 더 많은 비축물을 가지고 있으며, 이웃들보다 비양심적인 봉건 영주들은 자기들만 사적인 소유지를 더 많이 전유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그들의 땅에는 더 많은 농부들이 있었고 그의 휘화에는 더 많은 기사들이 있었으며, 금고에는 더 많은 보물들이 있었다. 봉건 영주는 다행히도 아직 자치 도시의 생활에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 있는 도시들-파리, 마드리드 혹은 모스크바-에 자신의 영지를 확보하였다. 그리고 농노들의 노동력을 이용해서 그 지역을 왕실을 위한 요새 도시로 만들게 하였고, 전사들을 끌어들이려고 마음대로 촌락을 분배해주었고 상인들을 불러모아 상권을 보호해주었다. 점차 다른 유사한 중심지들을 흡수하기 시작하면서 미래 국가의 싹이 트게 되었다. 로마법 연구에 정통했던 법률가들도 이러한 중심지로 모여들었다. 시민들 가운데서 집요하고 야심 찬 부류의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영주들의 부도덕성도 소농민들의 무법성도 다같이 혐오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규범에 맞지 않는 촌락 공동체라는 형태와 연방주의 원리를 바로 ‘미개인’의 유산으로 간주해서 혐오감을 가졌다. 이들의 이상은 대중의 동의라는 허구와 무력의 힘으로 지지되는 독재 군주제였고, 이를 실현해 줄 듯한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한때 로마법에 대항했지만 이제는 동맹이 된 기독교 교회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신권주의적인 유럽 제국을 구축하려는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더욱 사리에 밝고 야심 있는 주교들은 이스라엘 왕 또는 콘스탄티노플 황제의 권위를 재건하려는 자들을 지지하게 되었다. 교회는 새롭게 등장하는 지배자들에게 교회의 신성함과 지상에서 신의 대리자라는 영예를 부여했으며, 성직자들의 학식과 정치적 수완, 교회의 축복과 저주, 교회의 재산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간직했던 동정심 등을 지배자들을 위해 사용하도록 하였다. 도시가 해방시키지 못했거나 해방을 거부하였던 농민들은 기사들 사이의 끝없는 전쟁-이런 전쟁은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을 종식시키는 데 시민들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의 희망을 왕이나 황제 혹은 대공에게 걸게 되었다. 그는 한편 농민들은 강력한 봉건 소유주들을 분쇄하도록 이들을 도우면서, 중앙집권화된 국가를 형성하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몽골과 터키의 침략, 스페인의 무어족들과 맞서 벌이는 성전, 그리고 주권이 발달한 중심지 사이에서 발발했던 끔찍한 전쟁-일드프랑스와 브로고뉴,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잉글랜드와 프랑스,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모스크바와 트베르 등-도 같은 결말을 맞았다. 강력한 국가가 건설되었다. 이제 도시들은 느슨해진 영주들의 연합뿐만 아니라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농노군을 가지고 있던 강력하게 조직된 중심지와도 대항해서 싸워야 했다. [260~261p]


- 공유제가 몰락하게 된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이 이유야말로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보다 더욱 중요하고 심각하다. 중세 도시의 역사는 인류의 운명에 미치는 사상과 원리의 힘 그리고 그러한 중심사상이 완전히 변형되면 정반대의 결과를 얻게 된다는 실례를 가장 두드러지게 보여 주었다. 11세기를 관통하는 중요한 사상이라고 하면, 독립과 연방주의, 각 집단의 주권 그리고 단순한 단계에서 복잡한 단계에 이르는 정치 조직의 구성 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이 시기가 지나면서 이러한 개념들은 완전히 바뀌었다. 이노센트 3세(1160~1216, 로마 교황-옮긴이) 시대 이래로 로마법 연구자와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이 밀접하게 공모하여 도시의 근간을 이루었던 이 사상-고대 그리스 사상-을 쓸모 없게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2, 3백년 동안 이들은 교단이나 대학 강단, 그리고 판사석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가르쳤다. 구원이란 반半 신성의 권위를 지닌 강력하게 중앙집권화된 국가를 통해서 얻어야 하며, 한 사람이 사회의 구세주가 될 수도 있고 또 되어야 하며, 대중을 구원한다는 명목만 있으면 어떠한 폭력도 행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남자와 여자를 화형에 처하거나 형언할 수 없는 고문으로 죽게 하거나 지역 전체를 가장 참담한 상태로 몰아넣을 수도 있다. 로마법 학자들과 고위 성직자들은 왕의 칼과 교회의 화형이, 또는 이 두 가지가 동시에 닿을 수 있었던 곳이면 어디든지 엄청난 규모로 들어본적도 없이 잔인하게 이러한 효과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이런 교육과 본보기가 끊임없이 대중들의 관심 속에 반복적으로 각인되면서 시민들의 정신 자체에 새로운 틀이 형성되었다. 일단 ‘공공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권력이 아무리 확장되어도, 살인이 아무리 잔인하게 자행되어도 그에 대한 정당한 이유를 묻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정신이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고 한 사람의 권력에 대한 새로운 믿음이 생겨나면서 과거의 연합주의적인 원리는 사라져갔고, 대중들이 가지고 있던 창조적인 정신은 차차 소멸되었다. 로마의 사상은 목표를 달성하였고 이런 상황 속에서 중앙집권화된 국가는 도시안에 간편한 먹잇감을 갖게 되었다. [263~265p]


- 상호부조는 주로 평화와 번영기에 발전했다. 하지만 인간에게 최악의 재난이 닥쳤을 때도-온 나라들이 전쟁으로 황폐해지거나, 전체 인구가 빈곤으로 인해 격감하거나, 압제자의 속박에 신음할 때조차-상호부조의 경향은 마을마다 도시의 극빈층 사이에서도 명맥을 유지하면서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었고, 마침내 이러한 경향을 감상적인 허튼소리라고 여겼던 소수의 지배자, 전사, 파괴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268p]


- 다음 3세기 동안 대륙이나 영국 등지의 국가들은 이전에 상호부조의 경향이 표출되었던 제도들을 전부 체계적으로 제거하였다. 촌락 공동체는 자신들의 민회나 법정 그리고 독립적인 경영권을 빼앗겼고 토지는 몰수되었다. 길드는 자신들의 소유물과 자유를 강탈당했으며, 변덕스럽고 탐욕스러운 국가 관리들에게 희생되었다. 도시들은 주권을 빼앗겼고, 도시 내부의 삶의 원천-민회, 선출된 판사와 관리, 독립적인 교구와 길드-은 제거되었다. 이전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던 모든 고리들은 국가의 공권력이 장악하게 되었다. 국가가 만들어낸 치명적인 정책과 전쟁 탓으로 과거에는 인구도 많고 풍요롭던 지역들이 하나같이 헐벗게 되었다. [270~271p]


- 요컨대 경제적인 법칙에 의해 촌락 공동체가 자연스럽게 소멸되었다고 말한다면 전쟁터에서 학살당한 병사들이 자연사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불쾌하기 짝이 없는 농담이다. 사실은 이렇다. 촌락 공동체는 천 년 이상 지속되어왔다. 언제 어디서고 농민들은 전쟁이나 강제 징수 때문에 멸망하지는 않았고 꾸준하게 자신들의 경작법을 개량해왔다. 하지만 산업의 발달로 땅의 가치가 증가하면서 귀족들은 봉건 제도를 통해서는 가져본 적이 없던 권력을 국가 조직을 통해 획득하게 되자, 공유지 가운데 가장 좋은 부분을 차지했고, 공유 제도를 파괴하려고 전력을 다했다. [280p]


- 하지만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공동 소유라는 제도가 지닌 경제적인 가치보다 윤리적인 중요성이 훨씬 더 크다. [287p]


- “St. G에서는 화재 보엄에 드는 농민이 거의 없다. 큰 화재가 발생하면-최근에 그랬는데-모든 사람들이 화재를 당한 가정에 뭔가를 가져다준다. 석탄, 침대보, 의자 등등. 그렇게 해서 아쉬운대로 살림살이가 다시 갖추어진다. 모든 이웃들은 불 탄 집을 짓는데 도와주고, 그동안에 이 가족은 이웃집에 공짜로 묵는다.”[289~290p]


- 공유제에 찬성하는 이러한 운동은 현재의 경제이론과는 상당히 배치된다. 경제 이론에 따르면 집약 경작은 촌락 공동체에는 맞지 않는다. 하지만 백보를 양보해서 말하더라도 경제 이론은 실험을 통해 검증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그저 정치적인 탁상공론에 가깝다. 반대로 우리가 얻은 사실들은 이렇다. 즉 유리한 상황이 동시에 발생해서 평균적인 사람들보다는 덜 비참한 상태에 있는 러시아 농민들의 촌락 공동체는, 어디서든지 그리고 그들이 이웃에서 지식과 독창성을 가진 사람들을 알게 되면 언제든지 농업과 마을 생활 모두에서 다양한 발전을 이룰 수 있는 수단이 된다. [299~300p]


- 건조한 기후와 맞서 싸우는데 고립된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남부 러시아에서 마모트가 창궐하여 피해를 입었을 때 부자와 가난한 자, 공유자나 개인주의자 할 것 없이 그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그 재난을 조절하기 위해 직접 나서야만 할 때 개별적으로 흩어진 노력을 통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었겠는가? 경찰을 불러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었을 테고 유일한 해결책이란 연합하는 것이었다. [303p]


- 사실상 노예 사냥꾼이나 상아 도둑, 포악한 왕, 마타벨레나 마다가스카르의 ‘영웅들’은 피와 불로 자신들의 흔적을 남기고 사라졌지만, 종족과 촌락 공동체에서 발전한 상호부조의 핵심은 제도, 습속, 관습 속에 남아 있다. [304~305p]


- 기타 유럽 국가들의 경우에 아주 최근까지도 모든 형태의 노동조합들은 음모단체의 일종으로 기소되었다. 가끔은 비밀 결사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노동조합은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었다. 미국이나 벨기에에서 노동 조직, 특히 노동 기사단의 규모와 그 세력은 90년대의 파업에서 충분하게 입증되었다. 하지만 법적으로 기소당하는 일 이외에도 단지 노동조합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금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그리고 무급노동을 통해 상당한 희생을 치러야 했으며, 노동조합원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일자리를 잃을 위험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었다. 게다가 노동조합원은 끊임없이 파업에 직면해야 했고 빵 가게나 전당포에서 일하는 노동자 가족의 얼마 안 되는 잔고는 곧 바닥이 났다. 이것이 파업이 초래하는 냉혹한 혁실이다. 파업 수당은 식비에도 못 미쳐서 곧 아이들의 얼굴에는 굶주린 기색이 나타난다. 노동자들과 가까이 사는 사람들에게 장기간의 파업이야말로 가장 비통한 광경으로 비춰졌다. 한편 40년 전의 영국에서 그리고 지금까지도 유럽 대륙의 가장 부유한 지역을 제외하고 파업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는 쉽게 상상해 볼 수 있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파업은 완전히 진압되거나 전체 노동자들이 강제로 이주당하면서 끝이 나고 파업 노동자가 사소하게 도발하거나 심지어는 아무런 도발을 하지 않아도 총을 발사하는 일이 유럽에서는 상당히 일상적으로 되어 버렸다.[313~314p]


- 인간 심리에는 동기가 있다.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미치지만 않았다면 그들은 도움을 청하는 호소를 듣고 이에 응답하지 않고 “견딜 수 없다.” 영웅들은 행동한다. 모든 사람들은 영웅들이 할 일은 자신들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머릿속의 궤변으로 상호부조라는 감정을 거스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감정은 수천 년 동안의 인간의 사회생활 속에서 그리고 인류가 나타나기 전 수십만년 동안의 군거 생활 속에서 길러졌기 때문이다.
-중략- 인간은 물려받은 본능과 받은 교육의 산물이다. 광부나 어부들 사이에서 이들은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서로 간의 일상적인 접촉을 통해 연대감이 생겨났다. 이들을 둘러싼 위험한 환경도 용기와 담력을 유지하게 해준다. 반대로 도시에서는 공통되는 관심사가 없기 때문에 무관심하게 되고 용기나 담력도 발휘해볼 기회가 거의 없으므로 사라져 버리거나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더욱이 광산이나 바다에서는 영웅들의 전통이 광부나 어부들의 마을에 시적인 후광으로 장식되어 살아 있다. 그러나 혼잡한 런던의 군중들에게는 어떤 전통이 있는가? 그들의 공통으로 가질 수 있는 전통이라면 문학으로 창조되어야만 하는 것뿐이고 농촌의 서사시에 필적할 만한 문학은 좀처럼 존재하지 않는다. 성직자들은 인간의 본성에서 나온 것은 모두 죄이며, 인간의 선은 모두가 초자연적인 기원을 갖는다는 것을 무리해서 입증하려고 한 나머지 저 높은 곳에서 유래하는 고귀한 영감이나 은총의 예로서 제시될 수 없는 사실들을 대부분 무시하려 한다. 일반 작가들의 경우에 이들의 관심은 주로 일종의 영웅주의, 국가라는 관념을 조장하는 영웅주의로 향해있다. 그러므로 이들은 로마의 영웅이나 전쟁터의 군인들을 찬미하지만 어부들의 영웅적인 행동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지나쳐버린다. 시인이나 화가들도 물론 인간의 마음 그 자체의 아름다움에 심취될 수는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뻔한 상황에서 로마의 영우이나 군사적인 영웅들을 노래하거나 그리기는 하지만 이들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평범한 환경 속에서 행동하는 영웅을 인상적으로 노래하거나 그리지는 않는다. 이들이 용기를 내어 그렇게 하더라도 단편적인 수사학에 불과하다. [323~324p]


- 비록 이 협회의 회원들은 사이클을 좋아한다는 점 이외에는 아무런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사이클 애후가가 별로 없는 외딴 곳에서는 유별나게 서로 도와주려는 우애적인 감정이 진작에 나타난다. 이들은 어떤 마을에 있는 ‘사이클 애호가 연합 클럽’을 마치 집처럼 간주한다. 그리고 매년 사이클 애호가 캠프에서는 지속적인 유대관계가 돈독해진다. [325p]


- 이런 모든 협회나 단체, 조합, 동맹, 학회 등은 유럽에만 만개 이상을 헤아릴 정도이고, 이 각각의 단체들은 자벌적이고 사심도 없이 무보수나 박봉을 받으면서 많은 일을 해왔다. [328p]


- 그리고 모든 야만인들이 자신의 동족에 대한 의무라고 생각했던 상호부조 대신에 교회는 자비를 설교하였다. 자비란 하늘로부터 감화를 받는다는 성격을 지니고 그에 따라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우월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한계와 더불어 단지 인간적인 행동을 하면서 자신들을 선택받은 단체라고 간주하는 사람들을 비난할 의도는 없지만, 우리는 확실히 상당수의 종교적인 자선 단체를 상호부조와 똑같은 경향의 산물로 간주할 수 있다. [329p]


- 현재의 사회 체제하에서 같은 동네가 이웃에 거주하는 사람들 사이의 온갖 유대 관계는 무력해지고 있다. 대도시의 부유한 지역에서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면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밀집되어 있는 골목길에서는 서로 잘 알고 지속적으로 접촉하면서 살아간다. 물론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이런 골목길에서도 사소한 싸움은 벌어진다. 그러나 개인적인 친밀도에 따라 집단이 형성되어 자신들의 영여 내에서는 부자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상호부조를 실천한다. 길거리나 교회마당 또는 잔디밭에서 놀고 있는 가난한 이웃의 아이들을 예로 들어보면 일시적으로 싸우기도 하지만 친밀하게 유대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러한 유대관계를 통해 모든 불행에서 스스로 보호한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한 아이가 호기심 때문에 하수구 입구에 몸을 구부리자마자 한 꼬마가 “거기에 서 있지 마라! 구멍 속은 뜨겁다!”라고 소리친다. “그 벽 위로 올라가지 마라. 떨어지면 기차에 치여 죽는다! 도랑 근처에 가지마라! 그 열매는 먹지 마라! 독이 있어 죽는다!” 밖에서 친구들과 놀면서 이 개구쟁이들에게 처음으로 주어지는 교훈들은 이런 것들이다. 이런 식으로 서로 도움을 주고받지 않는다면 놀이터라야 ‘노동자 시범 주거단지’ 주변의 포장도로나 운하의 방파제나 다리뿐인 아이들은 얼마나 많이 차에 치어 죽거나 더러운 물에 빠져 죽었겠는가! [330~331p]


- 부유한 계층의 여인이 길에서 떨고 있는 굶주린 아이를 못 본체 지나치는 이유는 내심 체면을 차리려 하기 때문이다. 그런 체면치레가 좋은지 나쁜지는 그들이 스스로 결정한 일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가난한 계층의 어머니들은 그런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들은 배고픈 아이들을 보면 견딜 수가 없다. [332p]


- 풀림솔의 지적대로 이러한 정신적 지도자들한테서 부유한 계급을 바라보는 감정이 뭉뚱그려 나타나지 않고 ‘계층화’되어 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좀처럼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잘 사는 사람들은 생활 방식이 달라서 가난한 사람들과 구분되었고, 매일 최상의 상태에서 살고 있어서 가난한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서도 부를 축적하고자 하는 열정의 결과들과 그리고 부 자체를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강요되는 무익한 지출을 받아들이면서 가족과 친지들 사이에서 부자들도 가난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상호부조와 상호지원을 똑같이 실천한다. 친지들끼리 대출 형식으로 오고가는 돈을 모두 통계로 잡아 기록할 수 있다면 세계 무역 거래량과 맞먹을 만큼 그 총액이 엄청나다고 밝힌 예링 박사와 L. 다군 박사의 말은 전적으로 옳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접대나 사소한 상호 봉사, 다른 사람의 일을 관리해주거나 증여나 자선 사업 등에 지출되는 액수를 추가하면, 이런 대체 행위가 국가 경제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최근에 통용되는 “우리는 저 회사로부터 가혹한 대접을 받았다.”라는 식으로 상업적인 이기주의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도 가혹한 처리 방식, 즉 법률적인 처리 방식과 반대되는 우호적인 처리 방식도 있다. 한편으로 해마다 얼마나 많은 회사들이 다른 회사로부터 받는 우호적인 지원을 통해서 파산을 면하고 있는지 모든 상인들은 알고 있다. [337~338p]


- 모든 인간의 연대감이란 앞서 진화과정 속에서 자라난 것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단계부터 진화를 거듭하며 얻어진 연대감이 마찬가지로 진화 과저에서 나타난 여러 가지 양상 가운데 단 한 가지 요인 때문에 극복될 수는 없다. 최근에 작게는 가족이나 빈민가에 사는 이웃들 그리고 촌락이나 노동자 비밀 결사 형태로 숨어들었던 상호지지와 지원에 대한 욕구는 근대 사회에서도 다시금 거듭 주장되었고, 늘 그래왔던 것처럼 미래의 진보에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면서 그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338~339p]


- 동물계에서 대다수의 종들이 군집을 이루어 살며 연합을 이루어야 생존경쟁에서 가장 좋은 무기를 얻게 된다는 사실도 알게되었다. 당연히 여기서 생존경쟁이란 다윈의 주장대로 넓은 의미에서 단순히 생존 수단을 얻기 위한 토쟁이 아니라 이 종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모든 자연 조건에 맞선 투쟁을 말한다. 개별적인 투쟁을 최소화하면서 상호부조를 최고조로 발전시킨 동물 종들이야말로 늘 수적으로 가장 우세하며 가장 번성하고 앞으로도 더욱 발전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런 식으로 확보된 상호방어, 오래 생존해서 경험을 축적하게 되는 가능성, 더 높은 수준으로 발달하는 지능, 더욱 발전해가는 사회적인 습속 등을 통해서 종족이 유지, 확장되고 더 높은 수준으로 점진적으로 진화하게 된다. 반대로 사회성이 없는 종들은 멸망할 운명에 처한다. [342p]


- 그리고 마지막으로 앞의 두 장에서 로마 제국을 본떠서 국가가 성장하면서 상호지원을 표방하는 중세의 제도들을 모두 폭력적으로 종식시켰지만, 이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 문명도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개인들 사이의 헐거운 결합에 기초하면서 유일한 연합의 결속을 보증했던 국가도 소기의 목적에 부합하지 못했다. 마침내 상호부조를 통해서 강철 같던 국가의 통치가 분쇄되었고 인간들이 서로 단결할 때마다 그러한 경향이 다시 나타나 제 목소리를 내게 되었다. 상호부조의 경향은 인간의 삶에 속속들이 베어들게 되었고 이를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지친 삶을 복돋아주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마련하게 되었다. [343p]


- 우리 시대에 접어들어 갑작스럽게 산업이 발전했다. 그 이유를 대체로 개인주의와 경쟁 원리가 승리한 탓으로 돌리지만 그보다는 훨씬 더 깊은 연원을 가지고 있다. 일단 15세기에는 위대한 발견들이 이루어졌다. 특히 자연 과학이 발전을 거듭하면서 대기압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중세 도시 조직에서도 발견들이 이루어졌다. 일단 이러한 발견들이 이루어지자 증기기관이 발명되었고 새로운 동력을 정복하게 했던 모든 혁명들이 필연적으로 뒤를 이었다. 만일 중세 도시가 이러한 발견들이 이루어질 때까지 존속했다면 증기가 촉발시킨 혁명은 윤리적으로 다른 결과를 초래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자유도시의 몰락에 잇따른, 특히 18세기 초반에 산업이 전반적으로 눈에 띄게 붕괴하면서 이후에 계속된 기술 혁명은 물론이거니와 증기기관의 출현을 상당히 지체시키지 않았는가라는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다. 직물업, 금속공업, 건축 그리고 항해술 등의 분야에서 12세기에서 15세기에 이르는 놀라운 산업 발전의 속도를 고려해보고 이러한 산업 발전이 15세기말에 초래한 과학적인 발견을 숙고해보면 우리는 유럽에서 중세문명이 몰락한 이후에 예술과 산업이 전반적으로 침체되었을 때 이러한 성과들을 충분하게 활용하기를 미루었던 것은 아닌지 자문해보아야 한다. 확실히 예술가나 장인이 사라지고 대도시가 몰락하면서 이들 사이의 거래도 끊어지는 사태 등등은 산업혁명에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았다. 실제로 제임스 와트가 자신의 발명품을 실용화 하는 데 20년 이상의 시간이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지난 세기에 중세의 피렌체나 브뤼헤에서라면 쉽게 구할 수 있었던 환경들, 즉 자신의 발명품을 금속으로 만들고 증기기관에 요구되는 정교한 마무리와 정밀 작업을 할 수 있는 장인들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346~347p]


- 사회에서 가장 지위가 낮고 학대받는 계층에 속한 비천한 사람들이 맨 먼저 신흥 종교를 지지한다. 그러한 사회 계층에서는 상호부조의 원리야말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근간이 된다. 초기 불교와 기독교 공동체 그리고 모라비아 교도들은 새로운 연대의 형태를 채택했는데, 그 특징을 들자면 상호부조가 가장 바람직한 양상으로 나타났던 초기 종족 생활의 정신으로 돌아간다는 점이다. [347~348p]


- 인간에게 포획당할 가능성이 적었을 때는 동물의 사교성이 더 강했다는 사실은, 인간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는 고립해 사는 동물들이 인간이 없는 지역에서는 계속 무리를 지어 살고 있다는 많은 예들로 확인할 수 있다. [354p]


- 허드슨은 『라플라타 강의 박물학자』(3장)에서 어떤 종의 쥐가 급격하게 증가하는 모습과 이러한 급작스런 ‘삶의 파동’이 초래하는 결과를 매우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1872과 73년 여름은 햇볕이 충분하고 소나기가 잦아서, 더운 여름 동안에도 여느 해처럼 야생의 꽃들이 드물지가 않았다.” 이러한 계절은 쥐들에게 안성맞춤이었고, 곧 “이 다산성의 작은 생물들은 순식간에 불어나서 개와 고양이들은 거의 이 쥐들만 먹고 살았다. 여우와 족제비, 주머니쥐들도 호화로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심지어 벌레를 먹는 아르마딜로까지 쥐 사냥에 나섰다.” 새들도 육식성이 되었다. “노란배딱새Pitangus와 구이라 뻐꾸기들까지도 쥐만 먹고 살았다.” 가을이 되자 무수한 황새와 귀짧은올빼미들이 나타나 이 잔치에 한몫 끼었다. 그리고 겨울이 되어도 계속 가물었다. 마른 풀들은 다 뜯어 먹히거나 바스러져 없어졌다. 숨을 곳과 먹을 것을 빼앗긴 쥐들은 죽어가기 시작했다. 고양이들은 도로 집안으로 숨어들었다. 방랑성인 귀짧은올빼미들은 떠나 버렸다. 작은 가시올빼미들은 거의 날지도 못할 정도로 약해져서 “흩어져 있는 먹이 부스러기를 찾아 종일 민가 주위를 헤맸다.” 가뭄에 뒤이은 추위 때문에 믿을 수 없이 많은 수의 양 떼와 소 떼가 그 겨울 동안에 죽어나갔다. 허드슨이 쓴 바로는 쥐들은 “이 엄청난 반응을 이겨내고 간신히 살아남은 소수가 종을 이어갔다.”
이 예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제시하고 있어서 더욱 흥미롭다. 즉 평야나 고원에서 어떤 종이 급격히 증가하게 되면 평야의 다른 쪽으로부터 그 천적을 끌어들이게 된다는 점과, 사회조지그로 보호받지 못하는 종은 불가피하게 그 천적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같은 저자가 이 점에 대한 또 하나의 훌륭한 예를 아르헨티나에서 전하고 있다. 물쥐Myiopotamus coypu'는 아르헨티나에 매우 흔한 설치류로 모양은 쥐와 비슷하지만 크기는 수달만 하다. 습성은 수서동물이고 매우 사교적이다. 허드슨은 이렇게 쓰고 있다. “저녁이 되면 물쥐들은 모두 나와서 물 속에서 헤엄을 치고 논다. 이상한 음조로 말을 주고받는데, 마치 상처 입고 고통 받는 사람의 탄식과 비명처럼 들린다. 물쥐는 길고 거친 턱 밑에 훌륭한 모피를 갖고 있어서 대부분 유럽으로 수출된다. 그러나 육십여 년 전에 독재자 로사르가 이 동물의 사냥을 금지하는 법령을 공표했다. 그 결과 이 동물들은 엄청나게 증식하여, 그 수서 습성을 버리고 이동성 육상 동물이 되어 여기저기 무리를 지어 먹이를 찾아다녔다. 갑자기 이상한 병이 급습하여 물쥐들은 빠르게 자취를 감추고 거의 멸종 상태가 되었다”(p. 12).
한편으로는 인간에 의한 박멸, 또 한편으로는 질병, 이것이 종의 번식을 막는 주된 원인이다. 생존 수단을 위한 투쟁은, 만약 존재한다하더라도, 번식을 막는 원인이 되지는 않는다. [355~357p]


- 분명 마ma와 파pa가 아기들이 발음하기에 가장 쉬운 음절인 것은 분명하지만, 문제는 왜 이 유아어의 일부를 성인들도 사용하며 그것이 왜 특정한 엄격하게 정의된 인간의 범주에만 적용되느냐 하는 것이다. 왜 어머니와 그 자매들을 마ma라고 부르는 많은 부족들이 아버지는 티아티아tiatia(디아디아diadia, 아저씨와 유사), 대드dad, 다da 또는 파pa라고 지칭하는가? 왜 어머니 쪽 아주머니들에게 주어졌던 어머니라는 명칭이 그 이후에는 다른 명칭으로 대체되는가? 이런 등등의 문제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많은 야만인들 사이에서 어머니의 자매는 아이를 양육하는 데 있어서 어머니 자신과 똑같은 책임을 지고, 만약 사랑하는 아이가 죽었을 때에는 이 다른 ‘어머니’(어머니의 자매)가 자신을 희생하여 저승길로 가는 아이의 여행에 동반한다는 점을 알게 되면, 이러한 명칭 속에는 단순한 말씨, 즉 존경을 표시하는 방식 이상으로 심오한 무언가가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363~364p]


- 리첼은 중세 도시에 대한 자신의 저작(『시장과 도시의 법률관계Markt und Stadt in ihrem rechtlichen Verhaltnis』, Leipzig, 1896)에서 독일 중세 코뮌의 기원을 시장에서 찾아야 한다는 사상을 전개했다. 주교나 수도원, 왕자의 보호 하에 놓인 지방 시장에는 상인과 장인 인구가 모여들었으나 농업인구는 없었다. 보통 도시가 분학된 구역이 시장에서 방사상으로 뻗어나갔고 각 구역에는 특정 직업의 장인들이 모여 살았다는 것이 한 가지 증거이다. 이러한 구역은 보통 구도시가 되었고, 반면 신도시는 왕자나 왕에 속해 있는 농촌이었다. 구도시와 신도시는 별개의 법령으로 다스려졌다. [370~371p]


인간사회에서의 생존경쟁

토마스 H. 헉슬리
- 만약 우리가 기술이라 칭하는 인간의 작업 중 대다수를 야수의 먹이가 되는 것을 피하려는 사슴의 생체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면, 사슴을 쫓아가서 조만간 사슴을 잡아먹으려 하는 늑대의 생체역학에서도 비슷한 기술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냉정하게 과학적 측면으로만 보자면, 사슴과 늑대는 똑같이 경탄할 만한 존재이다. 그리고 이 둘 모두가 지각이 없는 자동인형과 같은 존재라면, 이 둘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한 우리의 놀라움에 차등을 둘 이유는 전혀 없다. 그러나 사슴은 고통을 겪는 반면 늑대는 그 고통을 준다는 사실은 인간의 도덕적 공감을 자극한다. 사슴과 같은 사람은 순진하고 착한 사람, 늑대와 같은 사람은 악하고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며, 사슴을 보호하고 늑대로부터 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은 저열하고 잔인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을 인간의 세상을 넘어선 자연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기에, 분명 인간은 사심 없는 판정을 해야만 한다. 그럴 경우 사슴을 돕는 선의의 오른손과 늑대를 부추기는 악의의 왼손은 서로를 중화시킬 것이며, 자연의 이치란 도덕적이지도 비도덕적이지도 않은, 도덕과는 관계없는 것으로 보이게 된다.
모든 지각 있는 자연에서 유추된 사실로 이러한 결론이 내려지기는 하지만, 이 결론은 널리 퍼져 있는 편견과 상충될 뿐 아니라 고통스러운 것에 대한 자연스러운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그간 많은 이들이 이 결론을 피하기 위하여 정교하고 독창적인 이론들을 만들어냈었다.
신학적 입장에서는 이러한 상태를 시련이라 하고, 자연이 겉보기에 정의롭지 못하고 비도덕적인 듯해도 시간이 지나면 이는 모두 보상되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지각 있는 사물의 경우 대부분은 이러한 보상이 어떻게 실현될지 확실치 않다. 인류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수백만 년 동안 이 지구상에 살아오면서 계속 육식동물에게 시달리고 잡아 먹혀온 수세대에 걸친 무수한 초식동물의 영혼이 다년생 식물인 토끼풀의 존재로 보상을 받는다거나, 그 반면 육식동물의 영혼은 물 한 그릇도, 고기 한 조각 안붙은 뼈다귀도 없는 우리에 처넣어진다고 하는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도덕성의 관점에서 보자면 일이 되어가는 마지막 단계는 첫 단계보다 악화되기 마련이다. 세상에 이치라는 것이 있더라도, 육식동물이 야만스럽고 잔인하다 해도 그것들은 분명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기에 다른 동물을 잡아먹을 뿐이다. 더 나아가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은 똑같이 노령, 질병, 과잉 번식에 수반되는 모든 비참한 상황을 겪게 마련이고, 이 점에서는 둘 다 보상을 주장할 권리를 가질 수도 있다.
한편 진화론적 측면에서는 생존을 위한 처절한 경쟁에는 결국 최종적인 이익이 따를 가능성이 높고 또 조상의 고난을 통하여 자손이 갈수록 완벽해진다는 논리로서 인간에게 위안을 주려 한다. 현 세대가 조상에게 빚을 갚을 수 있다는 중국식 논리가 통한다면 이 주장이 맞을 수도 있겠으나, 그렇지 않을 경우 에오히푸스(말과 히라코테리움속Hyracotherium에 속하는 말의 조상. 신생대 제3기 에오세에 번성하였던 화석동물-옮긴이)가 수백만 년 후에 그 자손 중 하나가 더비 경마(영국 서리 주 엡섬에서 매년 6월에 거행-옮긴이)에서 우승한다는 사실로서 자기의 고통에 대해 무슨 보상을 받을 수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리고 또 한 마디 하자면, 진화를 통하여 항상 더 완벽해진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오류이다. 물론 진화란 유기체가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여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어가는 과정이지만, 그 변이의 방향이 좋을지 나쁠지는 그 상황의 성격에 따라 달라진다. 퇴보 역시 진보적 변형만큼 실용적일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자연 철학자들이 말하는 대로 지구가 용융 상태에 있으며 언젠가 태양처럼 서서히 식어간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진화란 전 세계저인 겨울에 적응한다는 뜻이 되고 북극과 남극에 서식하는 규조식물이나 북극의 녹조류 같은 단순한 구조의 하등 유기체를 제외하고는 모든 생명체가 멸종될 때가 오고야 말 것이다. 지구가 하등 생물밖에 살 수 없는 너무 뜨거운 상태로부터 하등 생물 외에 다른 존재가 있을 수 없는 너무 차가운 상태로 변해가는 것이라면, 지구 표면에 존재하는 생명체가 살아가는 과정이란 발사기로 발포한 포탄과 같은 궤도를 그릴 수밖에 없으며 그 떨어져가는 절반의 과정은 솟아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진화의 일반적 진행선상의 일부라 할 것이다. [375~376p]


- '자연‘이라는 단어의 뜻을 엄밀히 따지자면 그것은 현상 세계의 과거, 현재, 미래의 총합을 의미하며, 그렇기 때문에 사회 역시 예술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일부이다. 그러나 편의상 인간이 즉각적인 원인의 일부로 작용하는 자연의 일부분을 따로 떼어 생각한다면, 예술이 그러하듯이 사회도 자연과는 구별하여 생각하는 것이 좋다. 이러한 구분은 더욱 바람직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필요한데, 사회는 구체적인 도덕적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자연과는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윤리적 인간-사회 구성원 또는 시민-이 만들어 가는 길은 비윤리적 인간-보통 택하는 길과는 필연적으로 대립하게 마련이다. 후자는 다른 모든 동물처럼 생존을 위해 싸워도 종국에는 비참한 최후를 맞지만, 전자는 생존경쟁에 한계를 두어야겠다는 목표에 자신의 모든 정력을 쏟아부으며 헌신한다.
인간의 삶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의 주기로 보자면, 늑대와 사슴의 삶에서 나타나는 것과 그다지 크게 다른 도덕적 목표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비록 원시인의 삶의 자취가 잘 남아 있는 유적이 드물기는 하지만, 거기서 확실하게 얻을 수 있는 결론은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문명들의 기원 이전부터 인류는 매우 하등한 형태의 원시적 야만 상태로 수십만 년 간 존재해왔다는 것일 듯하다. 원시 시대의 야만인은 자신들의 적이나 경쟁자들과 겨루면서 자신보다 약하거나 교활하지 못한 생물을 잡아먹고, 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삶을 보냈을 메머드, 쥬어러스(Urus, Aurochs라고도 함. 들소의 일종-옮긴이), 사자나 하이에나들과 더불어 수천 세대에 걸쳐 아무 제약 없이 태어나고 번식하다 죽어갔을 것이다. 그러니 도덕적 근거로 보더라도 직립하지 못하고 체모가 좀 더 많은 동물들보다 더 낫다거나 더 못하다고 판단할 여지는 없다.
동물 세계에서처럼 원시적 인간 사이에서도 가장 약하고 가장 바보스러운 사람들은 궁지에 몰리는 반면 환경에 대처하는 능력이 뛰어나지만, 다른 면에서는 결코 최고라고 볼 수 없는 가장 거칠고 가장 약삭빠른 자들은 살아남았다. 삶은 자유 경쟁의 연속이고, 한정적이고 일시적인 가족 관계를 넘어서면 만인에 대한 개개인의 경쟁이라는 홉스의 이론에 따른 투쟁이 존재의 일상적인 상태였다. 인간이라는 종은 다른 모든 생물처럼 어디에서 생겨나서 어디로 가는지 생각도 못하면서 그저 최대한 머리만 물 밖으로 내밀고 진화의 일반적인 흐름 속에서 철벅대고 허우적 거리며 살았다.
반면 문명의 역사-즉 사회의 역사-는 이러한 위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인류가 시도해온 일들의 기록이다. 맨 처음 어떤 동기에서든 상호 전쟁의 상태를 상호 평화의 상태로 바꾼 사람들이 사회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평화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생존경쟁에 뚜렷이 선을 그었다. 어쨌든 그 사회의 성원들 사이에서는 생존경쟁이 극단적으로 추구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사회가 취해온 모든 연속적인 형태 가운데 가장 완성도가 높은 것은 개인 대 개인의 경쟁이 아주 엄격하게 제한된 사회이다. 이스타의 가르침을 받은 원시적 야만인은 하려고만 든다면 마음에 드는 것은 무엇이든 취하고 자기에게 반기를 드는 자는 누구든 죽일 수도 있다. 반면 윤리적 인간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행동반경 내로 자신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고 자신의 복지 만큼이나 공공복리를 추구하는데, 사실 이것은 그 자신의 번영에 필수적인 부분이다. 윤리적 인간에게 평화란 곧 목적이자 수단이고, 윤리적 인간의 삶은 다소간 완벽한 자제를 말하며 이는 곧 무제한의 생존경쟁을 부정하는 것이다. 윤리적 인간은 도덕과는 상관없이 자유롭게 전개된 진화의 원리 위에 세워진 동물의 왕국에서 차지하는 자리를 벗어나 도덕적 진화의 원리로 움직이는 인간의 왕국을 건설하려 애썼다. 왜냐하면 사회는 도덕적 목표를 가짐은 물론 그 완성 단계에서의 사회적 삶이란 결국 도덕성의 구현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덕적 목표를 추구하는 윤리적 인간의 노력은 도덕과는 상관없는 길을 따라가서 자연 상태의 인간에게 깊이 자리잡은 유기체적 충동을 결코 꺾지 못하였으며, 아마도 이를 수정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생존을 위한 노력의 주된 원인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그 가장 필연적인 조건 중 하나는 인간이 다른 모든 생물과 공유하는 무제한으로 번식하려는 경향이다. “자손을 늘리고 번성하라”라는 계율이 십계명보다 훨씬 앞선 전통을 지녔다는 사실과, 이 계율은 아마도 인간 종족의 엄청난 대다수가 본능적으로 또한 영혼에서 우러나와 따르는 유일한 계명이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문명화된 사회에서 이 계율을 따른다면 그 필연적인 결과는 극단적인 생존을 위한 투쟁-만인에 대한 개개인의 전쟁-을 초래하며, 결국은 사회 조직의 주된 목표를 약화시키거나 완전히 페기시키게 된다. [378~381p]


-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러한 상태는 인구 변화가 일정할 때에만 영구적으로 존속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입이 열 개 늘어난다고 치자. 그러면 앞서의 가정으로 볼 때 이전에는 식량의 양이 정확히 딱 맞았었기 때문에 누군가는 제한된 양식으로 살아가야만 하게 된다. 아틀란티스 사회는 지상낙원이고 온 나라가 참회할 필요조차 없는 정의로운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을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굶어야 한다. 무자비한 이스타, 도덕과 관계없는 대자연은 윤리의 틀을 깨뜨려 버렸을 것이다. [381p]


- 인간의 본성이 어떠한 상황에서든 이러한 이상적인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지, 아니면 최소한 이 상태에 상당히 가까워질 수 있을지는 논의할 필요가 없다. 인류는 상당 기간 동안 이러한 상태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 나의 관심사는 현재이다. 내가 지적하려는 바는 자연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제한 없이 증가하고 번식하는 한 평화와 산업이 발전한다 하더라도 전쟁 체제와 다름없이 치열한 생존경쟁이 따르는 것은 물론이고 결국 이러한 생존경쟁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이스타는 인간을 다스리는 한편 인간의 희생 또한 요구할 것이다. [383p]


- 잘 알려진 분명한 조건은 우리의 생산물이 다른 이들의 생산물보다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상품이 경쟁자들의 상품보다 잘 팔릴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 우리 고객들이 보기에 같은 값이라면 우리 상품이 더 좋기 때문이다. 이것은 상품 생산시 생산비는 증가시키지 않으면서 더 많은 지식, 기술, 근면성을 쏟아 부어야 한다는 뜻이고, 노동 비용이 생산비의 큰 요소이이만큼 임금 수준을 일정 한도로 제한해야 한다는 뜻이다. 값싼 생산과 값싼 노동비용이 결코 동일하지 않다는 것은 100% 사실이지만, 임금이 어느 수준이상 증가하면 가격 경쟁력이 사라진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따라서 가격 경쟁력과 가격 경쟁력의 한 부분이자 요소인 적절한 노동 비용은 세계 시장 속에서 한 경쟁 국가가 성공하는 데 필수다.
두 번째 조건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 본다면 첫 번째 조건과 마찬가지로 정말 분명히 필요 불가결하다. 바로 사회 안정성이다. 사회 구성원의 욕구가 삶 그 자체에서 충분히 만족감을 얻고, 상식과 경험이 사리에 맞게 나타난다고 예측될 수 있다면, 그 사회는 안정적이다. 대체로 인류는 정부의 형태나 어떤 이상적인 의견에도 그다지 신경을 쓰는 법이 없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온 상황이 계속됨으로써 이 세상에는 비참하게 살다가 다음 세상에서는 저주를 받는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이 두 가지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확신을 갖지 않는 한 사람들은 관습을 깨뜨리거나 반란이라는 명백한 위험을 초래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중이 앞서 말한 것과 같은 확신을 갖게만 되면, 사회는 다이너마이트 뭉치처럼 불안정해지고, 아주 사소한 문제 때문에 폭발을 일으켜 사회전체가 야만 상태의 혼란에 빠질 수 있다.[385~386p]


- 지성, 지식, 기술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성공의 조건이다. 하지만 이것들이 정직, 열정, 선의 그리고 사람답게 사는 데 필요한 모든 신체적, 도덕적 능력과 결합되지 않는다면, 또 사람들이 정당하게 구할 수 있는 마땅한 보상에 대한 희망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면 지성, 지식과 기술이 무슨 소용이 되겠는가? 더구나 몸과 마음 모두가 찌들고, 사시가 꺽이고 꿈도 없이 빈곤의 수렁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이러한 자질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이 말이나 되겠는가?[388p]


- 한 가지 경우, 충분한 보수를 받는 노동 인구는 육체적, 도덕적으로 건강하고 사회도 안정이 되겠지만, 생산물 가격이 비싸기 때문에 산업 경쟁에서 뒤쳐질 수 있다. 다른 경우, 불충분한 보상을 받는 노동 인구는 육체적, 도덕적으로 건강하지 못하고 사회도 불안정할 수밖에 없으며, 값싼 생산물로 일시적으로 산업 경쟁에서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끔찍한 고통과 타락 속에서 완전히 파멸하게 된다.
이 둘만이 가능한 대안의 전부라면, 우리 자신과 후손들을 위해 첫 번째 대안을 선택하고, 필요하다면 남자답게 굶주림을 견디자. 그러나 나는 건강하고, 기운차고, 교육받은 데다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안정적인 사회에 파멸의 운명이 심각한 위협으로 닥치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389p]


- 영속적인 산업 발전에 없어서는 안 될 조건인 육체적, 도덕적 복지와 사회 구조의 안정이 보장된다고 가정하고 나면 지식과 기술을 얻을 수단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하는데, 지식과 기술이 없다면 경쟁을 성공적으로 치러낼 수 없다. 우리의 입지를 생각해보자. 현재까지 방대한 체계의 초등교육이 16년 동안 실시되어 왔으나, 이는 아주 소수의 인구에게밖에는 혜택을 미치지 못했다. 물론 대체로 초등 교육에 잘 되어 왔으며 그 직·간접적인 혜택이 엄청났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예상된 결과일 수도 있지만 초등 교육도 우리의 모든 교육 제도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 우리사회가 이전에 필요로 했던 것들에 맞추어 설계되었다는 문제점을 보여준다. 널리 퍼져 있고 내 생각에는 상당히 근거 있는 불마능로, 초등 교육이 책만을 중요시하고 현실의 사물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는다는 면이 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어릴 때 받는 교육의 폭을 좁히고 초등학교를 공방의 부속 건물쯤으로 만들라는 것이 나의 뜻은 아니다. 우리 초등 교육이 책만을 중시하고 지나치게 이론적이라는 흔한 비평을 내가 다시 거론하는 까닭은, 산업 이익의 측면보다는 문화의 다양성을 논하고 싶어서이다.
산업상의 목표 같은 것이 아예 없다 하더라도, 관찰력을 전혀 개발하지 않고 손도 눈도 전혀 훈련하지 않아서 아주 흔한 자연의 섭리에도 완전히 무지하게 만드는 교육 체계는 마땅히 그 자체가 이상스럽고 불완전하다고 생각될 것이다. 그리고 그 부족한 교육과 훈련이 바로 인구의 절대 다수에게 극히 중요한 것일 때는, 그러한 문제점은 거의 범죄에 가까울뿐더러 이러한 결점을 해결하는 데 실질적인 어려움이 없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림을 보편적으로 가르치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으며, 그림은 눈과 손 모두에 아주 좋은 훈련이 된다. 예술가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지만, 누구든 정면도, 평면도, 단면도 그리는 법은 배울 수 있고, 이런 목적이라면 냄비나 프라이팬도 좋은 모델이고 사실 이것들이<벨베데르의 아폴로>(BC 320년에 그리스 아티카 출신의 한 작가가 만든 청동상을 대리석으로 모방한 작품으로 태양의 신 아폴로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으며 고전 양식의 걸작으로 꼽힌다-옮긴이)를 그리는 것보다 더 낫다. 식물은 비싸지 않으면서 위에 말한 그림의 훌륭한 점들을 갖추고 있는데, 식물 그림은 아이들이 배우는 산수처럼 쉽고 엄격하게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그림은 바르거나 틀리거나 딱 두 가지이고, 만약 틀렸다면 학생도 어디가 틀렸는지 배울 수 있다. 산업적 관점에서도 그림에는 더 큰 장점이 있는데, 매일 그리고 매시간 그림이 갖는 힘을 활용하지 않는 업무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능력 있는 교사가 없어서가 아니라면 기초 과학 교육이 일반 교육과정에 포함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 경우에도 역시 값비싸거나 정교한 교구는 전혀 필요치않다. 가장 흔한 물건들-양초, 사내아이들의물총, 분필 조각-이 훌륭한 교사의 손을 통해서 아이들이 자신들의 능력이 허락하는 대로 관찰력을 키우고 추론 능력을 발휘하여 과학의 세계로 다다르도록 해주는 출발점이 되기도 하다. 실물 교육이 종종 명백한 실패로 끝나기도 하지만 이것은 실물 교육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아주 작은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도 많은 것을 완전히 알아야 한다는 것을 몰랐던 교사의 문제이고, 그 교사가 그 사실을 몰랐던 것도 교사 자신의 문제이기보다는 교사들을 그렇게밖에 못 가르친 이 형편없는 교육 제도의 문제이다. [389~391p]


- 기술 교육은 엄밀하게 말하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필요해졌다. 한편으로는 산업 사회의 바뀐 생활 양상 때문에, 또 한편으로는 공업이 더 이상 장인이 그 도제들에게 대대로 전해져온 비밀을 전수하는 ‘수공예’가 아니기에, 전통적인 도제 제도가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발명이 끊임없이 산업의 양상을 변화시키기 때문에, ‘관습’, ‘경험’ 등은 점점 중요성을 잃어가는 반면 원리를 알면 그것 하나만으로 변한 상황에 성공적으로 대처할 수 있으므로 원리에 대한 지식은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사회적으로는, 네 다섯 명의 도제를 거느린 ‘장인’은 40명, 400명의 ‘노동자’를 고용한 ‘고용주’에 밀려 사라지고 있으며, 이전에 공방에서 얻어졌던 기술에 관한 이런저런 지식은 공장에서는 얻어지지도, 얻을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기술학교에서 가르치는 체계적 교육은 이전에 장인에게 배울 수 있었던 것 이상의 몫을 해야 한다. [392p]


- 그러나 어떻게 기술 교육을 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바람직한 최상의 방법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차이가 있었다. 두 가지 방식이 실현 가능하고 실용적이라고 보인다. 한 가지는 학생들은 공부만 하면서 장기간 체계적인 수업을 듣는 전문 기술학교를 설립하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이미 공업이나 상업 분야에 취직한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어떤 특정한 주제에 대해 짤막한 연속 강의로 구성된 야간 수업으로 주로 이루어지는 기술 수업을 계획하는 것이다.
첫 번째 방식으로 계획된 기술학교는 당연히 굉장히 비용이 많이들 것이다. 그리고 장인들이 가르치는 문제를 고려해보면, 학생들은 일도 안하고 프로 의식이 없어서 실제 현장에서는 도움보다는 방해가 될 것이라는 것도 흔하게 나오는 반대 의견이다. 똑똑한 일꾼을 훈련시켜 쓰려는 고용주의 지시로 이런 기술학교가 공장에 부설될 경우에는 당연히 이런 반대 의견은 통하지 않는다. 또한 이러한 학교가 미래의 고용주를 훈련시키고 고용인들의 질을 향상시킨다는 측면에서 얻어지는 유용성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들 학교는 하루 빨리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절대 다수가 다니기에는 분명 거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야간 수업을 장인이 기술 교육을 하는 훌륭한 수단으로 개발해야만 한다. 이런 수업의 유용성은 이제 자명하다. 다만 남은 문제는 이러한 수업을 육성할 방법과 수단을 찾는 일이다.[393p]


- 법은 다수의 의견을 표현한 것이고, 그 다수가 법을 집행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기 때문에 그것은 단순한 의견이 아닌 법이다. [394p]


- 나는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모든 개개인이 모든 면에서 행동의 자유를 보장받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논리를 가장 강경한 개인주의자만큼이나 강력하게 신봉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위대한 정치학의 전제를 흔히 이로부터 유도하는 실질적인 추론과 연결 지을수는 없었는데, 국가-즉 집합적 능력을 지닌 국민-는 다른 일에는 일절 간섭하지 말고 단지 정의와 국방을 위한 행정만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 그 추론의 내용이다. 나에게는 이 추론이, 통합된 사회가 구성원 전체에게 부여하는 자유의 정도가 ‘천부인권’이라고 불리는 허구로부터 추론되어 선험적으로 결정되어 고정된 크기(양)를 갖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결정되고 또 변하기도 한다는 것으로 들린다. 사회단체의 조직이 고등하고 복자할수록 각 구성원의 삶이 사회 전체와 더 긴밀하게 얽히고, 단순히 자신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자유를 다소간 심각하게 침해하는 행동의 범주가 점점 확대된다는 사실을 통해 나의 말을 입증할 수 있다고 본다. [394p]


- 국가의 조치는 늘 다소간 잘못이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주장은 내가 알기로는 완벽한 진실이다. 그러나 집학적 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행위가 개인들의 행동보다 더 잘못되기 마련이라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현명하고 냉정한 사람이라도, 한 분야에서 다른 분야로 한 걸음만 떼어놓으면 그렇게 똑바로 걷지 못한다. 그는 언제나 길을 약간은 벗어나고 그런 다음에야 제 방향을 잡는다. 어떤 개인주의자가 자신의 전체적인 삶의 과정은 남들보다 굴곡이 적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그저 그를 축하할 따름이다. 국가 조치의 방향이 상대적 정당성만을 지닌다는 이유로 국가 조치를 폐지한다는 것은, 내 보기에는 배가 약간 흔들렸다고해서 항해사를 해고하는 일과 다름이 없다. -중략-
나 스스로 잘 알아서 하는 이야기는 아지만, 분명히 나는 결코 부유하지도 안혹, 사실상 추상적이든 구체적이든 어떤 언급할 만한 ‘권리’나 재산도 없는 천둥벌거숭이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 만약 내가 발 한쪽이 없이 태어났다면 엄청난 골칫거리가 되었을 테고, 그러한 불운을 피하게 한 것은 나로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주변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애정이나 아니면 내가 태어나기 전 오랜 시간에 걸쳐 내가 불쑥 들어온 이 사회에 고통스럽게 정립되어 온 법률에 대한 두려움, 이 둘 중 하나였다. 나를 먹이고, 보살피고, 가르치고, 또한 부랑자가 되어 방랑하는 운명으로부터 구해준 노력의 대가로 나 스스로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내가 지금 뭔가를 소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비록 내가 일해서 받은 돈으로 정당하게 얻었으니 마땅히 내 재산이라고 말할 수 있어도,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살아가기 이전의 수세대에 걸친 긴 수고나 희생으로 태어난 사회 기구가 아니라면, 내 것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단지 돌도끼와 변변치 않은 오두막뿐이었을 테고 그마저도 더 힘센 야만인이 침입하지 않는 한에서만 나의 소유일 수 있었다는 생각이 문뜩 든다.
그러니 거의 무보수로 이 모든 것을 내게 해준 사회가 그 대가로 사회의 보존을 위한 어떤 행동을 요청한다면-만약 그것이 다른 사람자식의 교육에 얼마간을 기부하는 일이라 해도- 개인주의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못하겠다고 말한다는 것이 나로서는 정말로 부끄럽다. 그리고 설령 부끄럽지 않다 해도, 사회가 도덕적 의무를 법적 의무로 전환했다고 해서 나에 대해 부당한 행동이라고 할 수는 없다. 부담을 지겠다는 이들에게만 모든 짐을 떠넘긴다는 것이야말로 명백한 불공정해위이다. [396p]


- 훌륭한 교사를 육성하는 일도 필요하지만 그렇게 육성된 교사들이 교단에 남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 [39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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