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 E.H. 곰브리치 | 옮긴이 / 백승기, 이종숭
서양미술사(16차 개정증보판)
The Story of Art
지은이 E.H. 곰브리치
옮긴이 백승길, 이종숭
펴낸이 한병화
펴낸곳 도서출판 예경(서울 종로구 평창동 345-6)
초판발행 1997년 5월 1일
4쇄발행 2003년 7월 10일
- 미술(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아득한 옛날에는 색깔 있는 흙으로 동굴 벽에 들소의 형태를 그리는 그런 사람들이 미술가들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미술가들은 물감을 사서 게시판에 붙일 포스터를 그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옛날과 마찬가지로 그 밖에도 많은 일을 하고 있다. 우리들이 미술이라 부르는 말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으며 고유 명사의 미술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는 한 이러한 모든 행위를 미술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왜냐하면 미술은 도깨비나 영험이 있다고 숭배를 받는 그런 대상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15p]
- 다만 우리가 우려해야 할 점은 어떤 엉뚱한 기억이 우리들에게 편견을 갖게 할 때이다. 예를 들어 등산을 싫어하기 때문에 산 그림으로부터 본능적으로 등을 돌린다든지 할 때에는 그 그림을 즐기는 것을 방해한 혐오감의 원인을 우리들 마음 속에서 찾아야 한다. 미술 작품을 싫어하는 것은 여러 가지 그릇된 이유들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15p]
- 아름다운 것에 한 문제는 무엇이 아름다운 것이냐에 관한 취향과 기준이 그처럼 다르다는 데 있다. [20p]
- 사실 그림 속에 있는 인물의 표정이 우리로 하여금 그 작품을 좋아하게 만들거나 싫어하게 만들 때가 많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을 좋아하며 그 때문에 깊이 감동받기도 한다.[23p]
- 그들은 그들이 실제 생활에서 본 것들을 똑같이 그려내는 화가의 솜씨를 칭찬하고자 한다. 그들이 제일 좋아하는 그림은 ‘실물과 꼭 같이’ 닮아보이도록 그린 그림이다. 물론 이같이 실물처럼 표현해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가시적인 세계를 충실하게 표현하는 데 쏟아부운 그들의 끈기와 솜씨는 정말 찬양할 만하다. 과거의 위대한 미술가들은 세밀한 데까지 조심스럽게 기록된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뒤러의 산토끼를 그린 수채화 습작(도판 9)은 이처럼 가상스러운 끈기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그러나 램브란트(Rembrandt van Rjjn)가 그린 코끼리의 소묘(도판 10)를 세부 묘사가 덜 되었다고 해서 누가 감히 그의 작품을 좋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사실 램브란트는 목탄으로 그린 몇 개의 선만으로도 코끼리의 주름진 피부의 느낌을 우리들에게 확실하게 보여주는 그런 요술을 부리고 있다. [24~25p]
-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림의 정확성을 가지고 흠을 자으려면 반드시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자문해보아야 한다. 첫째는 미술가가 그가 본 사물의 외형을 변형시킨 이유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이 책을 통해 미술사를 더듬어가면서 우리는 그러한 여거 가지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둘째는 우리가 옳고 화가가 그르다는 확신이 서지 않는 한 작품이 부정확하게 그려졌다고 섣불리 그것을 비난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사물이 실제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판단을 성급하게 믿는 경향이 있다. 자연은 언제나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상한 습관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27~28p]
- 우리는 모두 인습적인 형태와 색깔만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어린이들은 때때로 별이 그들이 흔히 알고 있는 별표 모양으로 생겼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림에서 하늘은 푸르러야 하고 풀은 초록색이어야 한다고 우기는 사람들은 이러한 어린이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사람들은 그림에서 다른 색채를 보면 화를 낸다. 그러나 그들이 초록색 풀과 푸른 하늘에 관해서 지금까지 들어왔던 것을 다 잊어버리려고 노력한다면, 혹은 마치 우주 탐험 여행중에 다른 혹성에서 돌아와 지구를 처음 대하는 것처럼 본다면, 우리는 주위의 사물들이 엄청나게 놀라운 다른 색채들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28~29p]
- 위대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서 제일 큰 장애물은 개인적인 습관과 편견을 버리려고 하지 않는 태도이다. 친숙하게 알고 있는 주제를 뜨밖의 방법으로 표현한 그림을 대했을 때 그것이 정확하게 해석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매도하곤 한다. 우리는 작품에 표현된 이야기를 많이 알면 알수록 그 이야기는 언제나 그랬듯이 예전과 비슷하게 표현되어야 한다는 확신에 집착하게 된다. [29p]
- 이러한 ‘물의’를 빚은 전형적인 에로서 카라바조(Caravaggio)를 들 수 있는데 그는 1600년경 활동했던 대담하고 혁명적이었던 이탈리아 화가였다. 그는 당시 로마의 한 성당 제단을 장식할 성 마태오의 그림을 위탁받았다. 그 그림은 성 마태오가 복음서를 집필하고 있는 장면과 그 복음서가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그의 집필에 영감을 불어 넣어주는 한 천사를 그리도록 되어 있었다. 상상력이 대단히 풍부하고 타협을 모르는 젊은 화가인 카라바조는 늙고 가난한 노동자이며 단순한 세리(稅吏)였던 마태오가 갑자기 앉아서 책을 쓰게 되었을 때의 광경을 생각해내느라 고심했다. 그리하여 그는 대머리에 먼지 묻은 맨발로 커다란 책을 어색하게 거머쥐고, 익숙하지 않은 글을 쓴다는 긴장감 때문에 걱정스럽게 이마를 찌푸리고 있는<성 마태오>(도판 15)를 그렸다. 그의 옆에는 방금 천상에서 내려와 마치 선생님이 어린아이에게 하듯이 노동자의 손을 공손하게 잡아 이끌고 있는 젊고 아름다운 천사를 그렸다. 카라바조가 제단 위에 걸게 되어 있는 이 그림을 성당에 납품하자 사람들은 이 작품이 성인에 대한 존경심이 결여되어 있다고 분개했다. 그 그림이 수락되지 않아 카라바조는 그림을 다시 그려야만 했다. 이번에는 그도 모험을 하지 않았다. 그는 천사와 성인이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에 관한 인습적인 관념을 엄격하게 준수했다(도판 16). 그 결과로 나온 작품은 카라바조가 생생하고 흥미있게 보이도록 대단히 많은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지금도 아주 훌륭한 그림에 속하지만 우리에게는 이 그림이 첫 번째 그림보다는 덜 정직하고 보다 불성실해 보인다. [31p]
-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미술 작품’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어떤 신비스러운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위해서 만든 물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그림이 액자에 끼워져서 벽에 걸리면 우리들로부터 멀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박물관에서는 으레히 전시된 작품을 만지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원래 손으로 만지고 다듬어서 완성된 것이며, 거래의 대상이 되고 논쟁과 물의를 일으킨 대상이었다. 그리고 작품의 여러 가지 특징들 하나하나가 미술가의 결단에 의해서 생긴 결과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즉 화가는 그 특징들을 곰곰이 생각해보고 그것들을 여러번 고쳤을 것이며, 저 나무를 배경에 남겨둘지 아니면 다시 그릴지 여러 번 생각해 보았을지도 모르고, 우연히 그은 붓획이 햇빛을 받음 구름에 에기치 않은 생동감을 주는 것을 보고 흡족해 하였거나, 또는 고객의 성화에 못이겨 어떤 인물을 더 그려넣었을지도 모른다. 박물관과 미술관의 벽에 가지런히 걸려 있는 그림과 조각 작품들은 원래 미술품으로서 진열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미술가가 작품들을 시작했을 때에는 그 작품을 만드는 명확한 이유와 목적이 있었다. [32p]
- 사실 나는 제아무리 보잘것없는 방식으로라도 이러한 유형의 문제를 조금이라도 의식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믿는다. 한 다발의 꽃을 가지고 색깔을 뒤섞거나 이리저리 맞춰보며 꽃꽂이를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성취하려는 조화로움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어도 형태와 색채를 조화시켜서 생기는 이 이상한 감흥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여기에 한 웅큼의 붉은꽃을 더했을 때 다른 꽃들을 달리 보이게 만들기도 하며 푸른 빛깔의 꽃은그 자체로서는 좋을지 몰라도 다른 색깔과 ‘어울리지’ 않으며, 초록색 잎들이 달린 작은 가지 하나가 갑자기 모든 것을 다 ‘제대로’ 보이게 만들어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더이상 손대지 말자. 이제 완성되었다’라고 우리는 외친다. 모든 사람이 다 꽃의 배합에 대해서 그렇게 세심하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대로’ 되기를 바라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어떤 옷에 잘 어울리는 벨트를 발견하는 것일 수도 있고, 또는 접시 위에 놓인 푸딩과 크림의 적절한 비율이 어떻게 하면 보다 더 인상적으로 보일지 궁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그러한 경우 우리는 조그만 차이가 균형을 깨트리거나 또는 그 반대의 효과를 가져오기도 하므로 가장 어울리는 관계란 하나밖에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32~33p]
- 미술가가 올바른 균형을 이룩하기 위해서 이렇게 노력하는 것을 관찰하는 것은 대단히 흥미 있는 일이지만 만약에 우리가 그에게 왜 이러저러하게 바꾸었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그는 선뜻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어떤 고정된 규칙을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그가 가야 할 방향을 느낌으로 갈 뿐이다. 사실상 어떤 시기의 일부 미술가나 비평가들이 그들의 미술의 법칙을 공식화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지만 결과는 항상 같았다. 즉 신통치 않은 미술가들은 이러한 법칙을 적용하려고 노력했지만 아무것도 이루어내지 못한 반면에 위대한 대가들은 그러한 법칙을 깨트리면서도 이전에는 아무도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그런 새로운 형태의 조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영국의 위대한 화가였던 조슈아 레이놀즈(Joshua Reynolds)경이 왕립 아카데미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푸른색은 그림의 전경에 칠해서는 안되고 먼 거리의 배경이나 지평선 위의 희미한 언덕 등을 그리는 데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그의 경쟁자였던 게인즈버러(Thomas Gaunsborough)는 그러한 전통적인 규칙들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려고 유명한<푸른 소년>이라는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35p]
- 취향에 관한 문제는 논의의 여지가 없다는 속담이 맞는 말인지는 몰라도 그것이 취향을 개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은폐할 수는 없다. 이것은 또한 누구나가 아주 작은 분야에서 시험해볼 수 있는 공통적인 경험의 문제이다. 차를 마시는 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한 종류의 차가 다른 종류의 차와 맛이 다르다는 것을 못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에 그들이 차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맛을 음미할 여가와 의지와 기회가 있다면 그들은 선호하는 차의 유형과 혼합을 정확하게 가려낼 수 있는 감식가로 발전할 것이며 또 그들의 보다 큰 지식이 최상의 차를 즐길 수 있는 데 보탬이 되어줄 것이다.
미술에 대한 취향은 분명히 음시고가 술에 대한 것보다는 훨씬 더 복잡할 것이다. 그것은 여러 가지 미묘한 맛을 발견하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훨씬 진지하고 중요한 것이다. 결국 위대한 대가들은 미술 작품에 그들의 모든 것을 바치고 그 작품 때문에 고통을 받았고 작품에 심혈을 기울였으므로, 그들은 우리에게 최소한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미술 작품을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요구할 권리는 있는 것이다. [36p]
-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지식을 너무나 자만하기 때문에 아름답지도 정확하게 그려지지도 않은 그런 그림들만을 좋아하는 체하게 되어버린다. 그들은 너무도 분명히 즐거움과 감동을 선사해주는 듯한 그런 작품을 좋아한다고 고백할 경우 무식하다는 말을 들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진정으로 미술을 감상하는 방법을 잃어버리고 어쩐지 불쾌하다고 생각되는 작품을 ‘대단히 흥미 이는’ 직품이라고 부르는 속물이 되고 만다. 나는 그러한 오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지 않다. 또한 그렇게 무비판적인 방법으로 신뢰를 받기보다는 오히려 전혀 신뢰를 받지 못하는 쪽을 택하겠다. [37p]
- 미술가에 관해서 약간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때로는 이와 유사한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다. 그들은 하나의 미술 작품을 볼 때 그림 앞에 서서 그림을 감상하는 게 아니라 그것에 적합한 설명서에 관한 그들의 기억을 찾는 데 몰두한다. 그들은 렘브란트가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 명암법)로 유명하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으로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면서 유식한 척 고개를 끄덕이면서 “음, 훌륭한 키아로스쿠로로군”이라고 중얼거리며 다음 그림으로 옮겨간다. 나는 이러한 설익은 지식과 속물 근성의 위험성에 대해서 아주 솔직하게 말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그러한 유혹에 굴복하기 쉽고, 또 이와 같은 책이 그러한 속물들을 증가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이 눈을 뜨는 것을 돕는 것이지 입을 헤프게 놀리는 일을 돕자는 것은 아니다. 미술에 관해서 재치있게 말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비평가들이 사용하는 단어들은 이미 너무나 많은 상이한 문맥 속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 정확한 의미를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참신한 눈으로 그림을 보고 그 그림 속에서 새로운 발견의 항해를 감행한다는 것은 그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지만 더욱 값진 일이다. 우리가 그런 여행에서 무엇을 얻어가지고 돌아올지는 아무도 예견할 수 없다. [37p]
1 신비에 싸인 기원
선사 및 원시 부족들 : 고대 아메리카
- 이처럼 미술의 신비한 기원을 이해하려면 원시인들이 그림을 감상하기 위한 목적보다는 ‘실용적’ 위력이 있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게금 만든 체험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들 마음 속으로 들어가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러한 느낌을 다시 찾아낸다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솔직할 수 있는 의지와 우리들이 우리의 마음 속에 ‘원시적인’ 무엇인가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느냐의 여부이다. 빙하 시대로부터 시작할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들 자신으로부터 시작해보자. 좋아하는 운동 선수의 사진을 신문에서 오려냈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바늘로 그의 눈을 파내는 행위를 즐길 수 있을까? 신문지의 다른 곳에 구멍을 낸 것처럼 그런 행위를 무심하게 할 수가 있을까? 나는 그렇게 할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의 사진에 대해서 한 짓은 내 친구나 영웅에게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아무리 잘 알고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막연하게 그와 같은 행위를 하고 싶지 않다고 느낄 것이다. 그 사진에 저지른 일이 그 사진의 실제 인물에게 한 짓과 같다는 터무니 없는 생각이 어디엔가 남아 있다. [40P]
- 미술가들의 작품 대부분은 이러한 이상한 의례에서 일익을 담당하도록 만들어졌으며 그때에 문제가 되는 것은 조각이나 그림이 우리의 기준으로 보아 아름다우냐가 아니라 그 작품이 ‘효력을 방생’ 했느냐, 다시 말하자면 그 작품이 수행하게 되어 있는 주술을 제대로 해냈느냐 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미술들은 각각의 형태와 색깔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그들의 부족을 위해서 작품을 만들었다. 그들은 이러한 기존의 것들을 변화시킬 것으로는 전혀 생각되지 않았으며 의도했던 작품을 제작하는 데에만 그들의 기술과 지식을 적용하게 되어 있었다. [43p]
2 영원을 위한 미술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크레타
- 그러나 약 5천 년 전의 나일 강변의 미술을 가옥이나 포스터와 같은우리 시대의 미술과 연결시켜주는, 즉 거장으로부터 제자에게로, 그 제자로부터 추종자 또는 모방자에게로 전해내려오는 직접적인 전통은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리스의 거장들은 이집트 인들에게서 배웠고 우리는 모두 그리스 인의 제자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집트의 미술이 우리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55p]
- 이집트 미술은 미술가가 주어진 한 순간에 무엇을 볼 수 있었느냐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나 장면에 대해 그가 알고 있었던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원시 시대의 미술가가 그가 구사할 수 있는 형상들을 가지고 그 상을 만들었듯이 이집트의 미술가도 그가 배웠고 알았던 형태들을 가지고 그림을 그렸다. 이집트 미수락가 그의 그림 속에 구현한 것은 단지 형태나 모양에 대한 그의 지식뿐만 아니라 그 형태들의 중요성에 대한 그의 지식이기도 했다. [61~62p]
- 그런데 유일하게 이집트 양식의 철칙들을 뒤흔들어 놓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잊집트가 파국적인 침략을 받은 후에 건설된 ‘신왕국(新王國)’으로 알려진 제 18 왕조 시대의 왕이었다. 아멘호테프(Amenhotep) 4세로 불리어지는 이 왕은 이단자였다. 그는 오랜 전통에 의해서 숭상되어온 많은 관습들을 타파했다. -중략- 그 그림들에서는 초기 파라오들의 그림에서 발견되는 엄숙하고 딱딱한 위엄은 하나도 볼 수 없고 대신에 그가 태양의 신 아톤의 축복을 받으며 아내 네페르티티와 함께 그들의 자녀들을 사랑스럽게 껴안고 있는 모습(도판 40)으로 그려져 있다. 그의 초상들 중에는 그를 못생긴 사람으로(도판 39) 표현한 것도 있다. [67p]
- 제 18왕조 시대에 왕이 이러한 개혁을 쉽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 이집트 미술가들의 작품보다 훨씬 덜 엄격하고 굳어 있지 않은 외국의 작품들에 주의를 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외국의 섬나라인 크레타(Creta)에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곳의 미술가들은 빠른 운동감을 표현하는 데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68p]
3 위대한 각성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5세기까지 : 그리스
- 오리엔트 전제 군주들의 통치 지역에서 가장 초기의 미술 양식이 생겨난 곳은 태양이 무자비하게 작열하여 강에 연해 있는 땅에서만 식량이 생산되는 거대한 오아시스 땅이었다. 이러한 양식들은 수천 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고 존속되었다. 그러나 동방의 제국들과 인접하고 있는 동부 지중해의 크고 작은 많은 섬들과 그리스와 소아시아 반도들의 들쭉날쭉한 해안선을 끼고 있는 보다 온화한 기후를 가진 지역들의 경우는 사정이 매우 달랐다. 이 지역들은 한 사람의 통치를 받지 않았다. 이러한 지역들은 광활한 바다를 향해하면서 무역이나 선상 강도질을 해서 얻은 엄청난 재화를 성(城)이나 항구에 축적해놓고 있는 모험적인 뱃사람이나 해적왕들의 은신처가 되었다. 이들 지역의 중심지는 원래 크레타(Creta) 섬으로 크레타의 왕은 한때 이집트에 사신을 보낼 만큼 부유하고 강했으며 크레타의 미술은 그곳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76p]
- 도판 47의<두 형제상(像)>은 그리슴 l술가들이 신체의 각 부분과 근육을 구분하는 방법을 이집트 양식에서 배웠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그러나 이 입상(立像)들은 이것을 만든 조각가가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일정한 공식만 따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의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77p]
- 이집트 인들은 배워서 익힌 지식을 기초로 미술 작업을 했다. 그러나 그리스 인들은 그들의 눈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일단 이 혁명이 시작만 되면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 없었다. [78p]
- 그러나 이 그림과 그 앞의 그림을 보면 우리는 이집트 미술의 교훈들이 완전히 무시되고 버림받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스 미술가들은 여전히 인물의 윤곽을 가능한 한 명백하게 표현하려고 했으며 또 전체의 조화를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들이 인체에 관해서 알고 있는 지식을 되도록 많이 그려넣으려고 했다. 그들은 여전히 분명한 윤곽선과 균형 있는 구성을 선호했으며 얼핏 본 자연의 정경을 그들의 눈으로 본대로 모사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수백 년에 걸쳐 발달해온 인간 형태의 낡은 공식들이 그들의 출발점이었다. 다만 그들은 이제 더 이상 그러한 공식이 그 세부에 이르기까지 완전 무결하다고 신성시하지는 않았다. [81~82p]
- 사실 고대 세계의 거의 모든 유명한 조각 작품들이 없어진 직접적인 이유는 기독교가 승리한 뒤로 이교도의 신상은 어느 것이나 때려부수는 것이 신성한 의무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미술관에 소장된 대부분의 조각품들은 여행자나 기념품 수집가들을 위해서, 또는 정원이나 대중 목욕탕을 장식하기 위해서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복제품이다. 우리는 이 복제품들에 대해서 감사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것들로 인해서 우리들은 적어도 그리스의 유명한 걸작품들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상상력을 동원하지 않으면 이 보잘것없는 모조품들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리스 미술이 생기가 없고 차갑고 무미건조하며, 그리스의 조각상들은 진부한 미술 교육 시간을 생각나게 하는 창백한 얼굴과 무표정한 얼굴 표정을 하고 있다는 통념은 바로 이 로마 시대의 모조품들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예를 들면 페이디아스가 파르테논 신전에 모셔놓기 위해서 만든 거대한 우상인 아테나 파르테노스(Athena Parthenos) 상의 로마 시대 복제품(도판 51)은 대단히 인상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우리는 옛 문헌들을 찾아서 페이디아스가 만들었던 원래의 상이 어떠했을가를 상상해볼 필요가 있다. 금으로 만든 갑옷과 의상, 그리고 상아로 된 피부 등 온통 값비싼 재료로 뒤덮인 나무와 같이 약 11미터나 되는 거대한 목조상을 상상해보라. 방패와 갑옷은 강렬하고 번쩍이는 색으로 채색하고 눈도 잊지 않고 색깔이 있는 돌로 만들었다. -중략- 그러나 신이 이러한 조각상 속에 사는 무시무시한 귀신이라는 원시적인 관념은 이미 그 중요성을 상실했다. 페이디아스가 보고 만들어낸 아테나 파르테노스 상은 단순한 귀신의 우상 이상의 것이었다. 여러 가지 점으로 미루어 이 조각상은 그리스 인들에게 신의 성격과 의미에 관해서 전혀 다른 관념을 갖도록 하는 그런 품위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페이디아스가 만든 아테나 여신은 한 위대한 인간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신상의 힘은 어떤 마력에 있다기 보다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있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페이디아스의 미술이 그리스 사람들에게 신성(神性)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부여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85~87p]
- 그리스 인들의 운동 경기는 그들의 신앙과 의식에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잇었다. 이러한 운동 경기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아마추어나 직업 운동 선수가 아니라 그리스 명문가의 자제들로서 경기에 이긴 승자는 신들로부터 무적의 마술을 받은 것으로 간주되어 사람들이 두려움을 가지고 우러러보는 대상이 되었다. 원래 이러한 경기를 개최하게 된 것은 승리의 영광이 누구에게 돌아갔는지를 알아내기 위한 것이었으며 우승자들이 그들의 조각상을 당대의 제일 유명한 조각가에게 의뢰한 것은 이 같은 신의 은총의 징표를 기념하고 또 영원히 보존하기 위함이다. [89p]
4 아름다움의 세계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 : 그리스와 그리스의 세계
- 일반적이고 도식적인 형태를 가지고 대리석의 표면이 생명력을 갖고 숨을 쉬고 있느 srjt처럼 보일 때까지 더욱 더 철저하게 다듬어서 마치 살아 있느 srjt같이 보이는 아름다움을 창조해내는 이 방법에도 물론 한 가지 단점이 있다. 이러한 수단을 가지고 실감나는 인간의 형태를 창조해낼수는 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진실로 개성있는 인물 묘사를 가능하게 하는가?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의미에서의 초상(肖像)이라는 개념은 기원전 4세기 말까지는 그리스 인들의 작품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사실 그 이전의 시대에도 초상이 만들어지기는 했지만(pp. 89-90, 도판 54) 이러한 조각상들은 아마도 실물과 그다지 많이 닮지는 않았던 것 같다. -중략- 그리스의 미술가들이 얼굴에 특별한 표정을 주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종이 위에 단순한 얼굴 하나를 그리더라도(흔히는 우습게 보이지만) 어던 특정한 표정이 나타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점은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놀라운 일이다.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조각상이나 회화에 묘사된 두상(頭像)들은 둔감하고 공허해 보인다는 면에서 표정이 없는 것도 아니나 그들의 얼굴은 어떤 강함 감정의 표정을 내보이지 않는다. 소크라테스가 ‘영혼의 활동’이라고 불렀던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 당시의 그리스 거장들이 사용한 것은 육체와 그것의 움직임이었다(pp. 94-5, 도판 58). 왜냐하면 그들은 얼굴의 움직임은 두상(頭像)의 단순한 규칙성을 왜곡시키거나 파괴한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105~106p]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들은 우리가 얼핏 보고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덜 사실적이다. -중략- 미술가들은 먼 곳에 있는 물건은 작게 그리고 가까운 데 있거나 중요한 것은 크게 그려다. 그러나 사물이 멀어짐에 따라서 대상의 크기를 일정하게 줄여가는 방법이나 오늘날 우리가 하나의 조망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구도의 틀을 고전 시대 사람들은 채택하지 못했다. 사실 그것이 적용되기까지는 천여 년이라는 세월이 더 걸렸다. 이리하여 고대 미술 가운데 가장 최신의, 가장 자유로운, 그리고 가장 자신 있는 작품일지라도 우리가 이집트의 회화 기법을 다룰 때 논의했던 원칙의 잔재는 여전히 잔존하고 있었다. 여기에서도 개별적인 대상의 특징적인 윤곽에 대한 지식은 눈을 통해서 얻는 실제의 인상만큼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114~115p]
5 세계의 정복자들
기원후 1세기부터 4세기까지 : 로마, 불교, 유태교 및 기독교 미술
- 그리스도 탄생 이후 수백 년 동안 헬레니즘 미술과 로마의 미술은 오리엔트 미술을 그 본거지에서조차 완전히 밀어내고 대신 들어앉았다. 이집트인들은 그때까지도 그들의 시신을 미라로 매장했으나 이집트 식으로 그들의 형상을 거기에 덧붙이는 대신에 그들은 그리스 초상화(도판 79)의 온갖 기교를 알고 있는 미술가로 하여금 초상을 그리게 했다. [124p]
- 만약에 라오콘(p. 110,도판 69)을 제작한 거장이라면 이러한 주제를 어떻게 다루었을까를 생각해보면 미술이 그 이전과는 얼마나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를 쉽게 알 수 잇따. 지하 묘굴의 그림을 그렸던 화가는 극적인 장면 그 자체를 위해서 그것을 그리려 하지 않았다. 불굴의 신앙심과 신의 구원을 감동적이고 고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페르시아 옷을 입은 세 남자와 불길, 그리고 하느님의 구원을 상징하는 비둘기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만 그리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엄밀하게 관계가 없는 것은 모두 다 빼버리는 것이 좋았다. 다시 한번 명확성과 단순성의 개념이 충실한 모방이라는 개념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129p]
6 기로에 선 미술
5세기에서 13세기까지 : 로마와 비잔티움
- 그러나 일단 교회가 국가의 최대 세력이 되자 미술과의 모든 관계는 재검토되어져야만 했다. 예배 장소를 고대의 신전을 모델로 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기능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었다. 신전의 내부는 보통 신상을 모시는 작은 사당이 있을 뿐이었고 제사나 의식(儀式)은 건물 밖에서 행해졌다. 반면에 교회는 사제(司祭)가 높은 제단 위에서 미사를 올리거나 설교를 할 때 모여드는 모든 회중을 수용할 공간을 마련해야 했다. [133p]
- 그러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커다란 실물과 같은 조각상은 반대했지만 회화에 대해서는 생각을 달리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림이 그들이 받아들인 하느님의 가르침을 회중에게 상기시켜 주고 또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잇게 도와주기 때문에 필요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135p]
- 교회가 명확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모든 사물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명확성을 중요시했던 이집트의 관념이 되살아났다. 그러나 화가들이 이 새로운 시도에 사용한 형식들은 원시 미술의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그리스의 회화에서 한층 더 발전된 것이었다. 이리하여 중세의 기독교 미술은 원시적인 방법과 세련된 방법이 기묘하게 혼합된 것이었다. [136p]
- “하느님께서 그의 자비심으로 그리스도라는 인간의 형상으로 그 자신을 드러내 보이려고 결심했다면 어째서 그와 똑같이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상 속에 자신을 나타내 보이기를 꺼려하겠는가? 우리는 이교도들처럼 형상 그 자체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상을 통해서 하느님과 성인들을 숭배하는 것이다”[137p]
7 동방의 미술
2세기에서 13세기까지 : 이슬람과 중국
- 7세기와 8세기에 그 이전 시대의 모든 것을 다 휩쓸어버리고 페르시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북아프리카와 스페인을 정복한 중동의 종교인 이슬람 교는 이 문제에 있어서 기독교보다 훨씬 더 엄격했따. 우상을 만드는 것은 금기였다. 그러나 금기라고 해서 예술을 그렇게 쉽게 억압할 수는 없었다. 인간의 형상을 그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던 동양의 장인들은 그 대신 문양이나 형태 자체의 아름다움에 그들의 상상력을 발휘했다. 그들은 아라베스크(arabesque)라고 알려진 매우 정교한 레이스와 같은 장식을 창조해냈다. [143p]
- 15세기 페르시아의 연애 이야기에서 따온 달빛 아래 정원의 정경(도판 92)은 이 놀라운 솜씨의 완벽한 표본을 보여준다. 이것은 마치 동화의 세계에서 생명을 얻은 것처럼 느껴진다. 여기에는 비잔틴 미술에서처럼 사실적인 현실 공간의 묘사가 거의 없다. 어쩌면 더 없을지도 모른다. 여기에는 단축법도 없고, 명암이나 인체의 구조를 암시하려는 시도도 전혀 없다. 인물과 초목들은 마치 색종이에서 오려내 완전한 문양을 만들기 위해서 화면 전체에 고루 붙여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화가가 실제 광경을 실감나게 그리는 것보다 그 책에는 더 잘 어울린다. 우리는 마치 본문을 읽듯이 이런 그림을 읽을 수 있다. [143p]
- 중국 미술가들은 딱딱하고 모가 진 이집트 식 표현보다는 부드러운 곡선을 더 선호했다. 날뛰는 말[馬]을 묘사해야 할 때 중국 미술가는 그것을 여러 개의 둥근 형태에서 만들어내는 것같이 보인다. 중국 조각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점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뒤틀리고 구부러진 것같이 보이지만 결코 확고부동함과 견고함을 잃지 않는다(도판 94) [147p]
- 이 초기의 중국 그림에는 딱딱한 부분은 하나도 없는데 그것은 물결치는 듯한 선(線)이 화면 전체에 운동감을 불어넣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 [148p]
- 이러한 점에서 중국의 종교 미술은 중세의 기독교 미술이 그랬던 것처럼 부처의 전설이나 중국 사상가들의 특정한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명상의 실천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신앙심이 깊은 미술가들 어떤 특수한 교리를 가르치거나 단순한 장식으로서가 아니라 깊은 명상의 자료를 제공해주기 위해서 존경의 염(念)으로 산과 물을 그리기 시작했다. 비단 두루마리에 그린 이런 그림들은 아름다운 상자 속에 보관되었다가 조용한 시간에 꺼내어 마치 시집을 들고 아름다운 시를 음미하듯 펼쳐서 감상되거나 음미되곤 했다. 12세기와 13세기의 중국 산수화(山水畵)의 위대한 걸작들이 의도했던 바는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150p]
- 중국 미술가들은 소재를 직접 대하고 그리기 위해 밖으로 나가 사생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명상과 정신 집중이라는 색다른 방법을 통해서 그들의 예술을 익혔다. 그 과정에서 먼저 그들은 직접적으로 자연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유명한 대가들의 작품을 보고 탐구함으로써 ‘소나무’나 ‘바위’, ‘구름’ 등을 그리는 법을 터득했다. 그들은 이런 기법을 완전히 터득한 뒤에야 비로소 여행길에 올라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사색하고 그것을 깊이 마음에 새겨 집으로 돌아와서, 마치 시인이 산책을 하다가 머리에 떠오른 여러 가지 이미지들을 짜맞추어 시를 짓듯이, 소나무와 바위와 구름에 대한 그들의 이미지들을 한데 결합하여 그 분위기를 다시 화면에 재현하려고 했다. 그들의 영감이 아직 생생하게 살아 있을 때에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을 붓과 먹으로 단숨에 그려낼 수 있는 능란한 필치(筆致)를 얻는 것이 중국 대가들의 야심이었다. [150~153p]
- 그러나 이런 회화에 대한 사고 방식에도 위험이 수반된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서 대나무를 그린다든가 또는 험준한 바위를 그리는 필치의 모든 유형이 공식으로 정해지고 전통에 의해서 고정되어 과거의 작품만을 지나치게 찬양한 나머지 미술가들은 점점 더 그들 자신의 영감에 의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155p]
8 혼돈기의 서양 미술
6세기부터 11세기까지 : 유럽
- 우리가 이 시기를 암흑 시대라고 부르는 이유는 민족의 대이동과 전쟁, 봉기로 점철된 이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암흑 상태에 빠져서 그들을 인도할만한 지혜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이고 또 한편으로는 고대 세계의 몰락 이후 유럽의 제국들이 대략 형태를 갖추고 생겨나기 이전의 혼란하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시대에 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바가 거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이 시기를 명확하게 한계지을 수는 없으나 논의상 대략 500년경부터 1000년경까지 계속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상 500년이라면 그 사이에 많은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오랜 기간이며 실제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가장 흥미로운 점은 이 시기에는 어떤 분명하고 통일적인 양식이 생겨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수많은 서로 다른 양식들이 갈등을 일으켜 혼돈된 상태이고 이 시기가 끝날 무렵에야 그러한 갈등이 겨우 마무리지어졌다는 사실이다. [157p]
- 이러한 미술가들이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필사본의 삽화에 그려놓은 인물상을 보면 더 더욱 놀랍다. 그것은 인간의 형상같이 보이지 않고 오히려 인간의 형상으로 만든 이상한 문양같이 보인다(도판 102). 우리는 이 미술가가 옛날 성경에서 찾아낸 어떤 표본을 사용해서 그것을 그의 취향에 맞게금 변형시켰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서로 엉킨 리본처럼 옷의 주름을 변경하고 심지어는 머리카락과 귀까지도 소용돌이 무늬로 변형시켜서 전체의 얼굴을 경직된 가면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필사본에 그려진 이러한 복음서 저자들과 성인들의 형상은 원시인들의 우상처럼 딱딱하고 괴상하게 보인다. -중략- 그러나 이 그림들을 단지 조잡하다고만 보는 것은 잘못이다. 이 미술가들은 그들의 전통으로부터 훈련받은 눈과 손으로 필사본 위에 아름다운 문양을 그릴 수 있었으며 이로써 서유럽 미술에 새로운 요소를 가미시킬 수 있었다. 이 영향이 없었다면 서유럽 미술은 비잔틴 미술과 같은 그런 방향으로 발전했을지도 모른다. 두 가지 전통, 즉 고전적인 전통과 토착 미술가들의 취향이 서로 충돌하는 바람에 무엇인가 전혀 새로운 미술이 서유럽에서 자라기 시작했다. [160~163p]
- 우리는 앞에서 미술가는 ‘독창적’이어야 한다는 근대적 관념을 과거 대부분의 민족들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아왔다. 이집트나 중국, 비잔틴의 미술가들에게 그런 요구를 한다면 그들은 크게 당황했을 것이다. 서유럽의 중세 미술가들은 교회를 짓고, 성찬배를 디자인하고, 성경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과거의 전례들로 훌륭하게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는데 왜 구태여 새로운 방식을 찾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163p]
- 아마도 음악에 대한 우리의 접근 방법을 생각한다면 이런 태도를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음악가에게 결혼식에서 연주를 해달라고 부탁할 경우 우리는 그가 그 결혼식을 위해서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작곡해 주리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중세의 미술 애호가가 예수의 탄생 그림을 부탁했을 때 무엇인가 새로운 창안을 기대하지 않는 것과 같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종류의 음악과 우리가 부담할 수 있을 정도의 오케스트라나 합창단의 규모를 지정해준다. 고대의 명곡을 훌륭하게 연주하느냐 아니면 엉망을 만드느냐는 음악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실력이 비슷한 두 사람의 음악가가 동일한 작품을 아주 다르게 해석하듯이 중세의 대가 두 사람도 동일한 주제와 동일한 고대의 모델을 가지고도 전혀 다른 예술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163p]
- 이집트 인들은 대체로 그들이 존재한다고 ‘알았던’ 것을 그렸고, 그리스 인들은 그들이 ‘본’ 것을 그린 반면에 중세의 미술가들은 그들이 ‘느낀’ 것을 그림 속에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던 것이다. [164p]
- 죄의 전기와 악의 근원이 너무나도 힘차고 명확하게 표현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인물들의 비례가 엄격하게 지켜지지 않았고 아담과 이브의 육체가 우리의 기준으로 보아서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는 것도 간과하게 된다. [167p]
- 우리는 중세 초기의 미술을 논의할 때 이러한 비종교적인 작품들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성은 파괴당할 때가 많았던 반면 교회는 보존되어 왔기 때문이다. 또한 종교적인 미술은 단순한 개인 저택의 장식물보다는 존중되었고 또 보다 주의깊게 보살펴졌다. 이런 성과 같은 개인 저택의 장식 미술은 유행에 뒤떨어지게 되면 요즈음의 유행이 그러하듯이 제거되거나 파괴되었다. [167~168p]
- 이 시기의 주엣 화가는 모사할 모델이 없었을 것이므로 마치 아이들처럼 그렸다. 그것을 보고 비웃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그러한 방법으로 그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이렇게 간결한 수단으로 그가 중요하다고 생각된 것만을 중점적으로 묘사함으로써 한편의 서사시(敍事詩)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그 결과는 아마도 오늘날의 뉴스나 텔레비전의 사실적인 보도보다 훨씬 더 기억에 남을 것이다. [169p]
9 전투적인 교회
12세기
- 교회가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무엇을 의미했는지 오늘날의 우리가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단지 우리는 시골의 몇몇 옛 마을에서 겨우 교회의 중요성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당시의 교회는 그 부근에서는 유일한 석조 건물이었으며 몇 마일에 걸쳐서 유일하게 볼만한 건물이었고 멀리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는 그 첨탑이 하나의 이정표였다. 일요일과 예배가 행해지는 기간에는 마을의 온 주민들이 거기에서 만났을 것이고, 이 높은 건물과 주민들이 살았던 원시적이고 초라한 집들과의 대조는 가히 압도적이었을 것이다. 마을 전체가 이 교회 건물에 관심을 가졌고 또 그 교회의 장식에 자부심을 가졌을 것이다. 경제적인 견지에서 보더라도 오랜 시간이 걸리는 교회 건물의 건축은 마을 전체를 변화시켰을 것이다. 돌을 채석(採石)해서 그것을 운반하는 일, 적당한 골조(骨組)를 세우는 일, 그리고 먼 고장의 소식을 전해주는 떠돌이 장인(匠人)들, 이 모든 것이 아득한 옛날에는 큰 사건이었다. [171p]
- 이런 교회들이 주는 내부와 외부의 전체적인 인상은 중후한 힘이다. 이런 교회 건물에는 장식도 거의 없고 창문도 몇 개밖에 없었으며 중세의 성채를 연상시키는 견고하고 잇달은 벽과 탑뿐이었다(도판 111). 이교도(異敎徒)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얼마 전에 개종한 농민과 전사(戰士)들의 땅에 세워진 이 강력하고 거의 도전적인 석조 건물들은 바로 ‘전투적인 교회’라는 관념, 즉 이 지상에서 최후의 심판날 승리의 여명이 밝을 때까지 암흑의 세력과 싸우는 것이 교회의 의무라는 관념을 표현하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도판 112). [173p]
- 그들은 지붕 전체를 그렇게 무겁게 만드는 것은 불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로지르는 몇 개의 단단한 아치를 세우고 그 사이사이를 가벼운 재료로 메우면 충분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기둥들 사이에 아치나 ‘늑재(肋材, rib)'를 서로 엇갈리게 걸쳐놓고 나서 이 늑재 사이의 삼각형 부분을 메우는 것이었다. 얼마 안가서 건축 방법에 일대 혁명을 가져온 이 발상은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노르만 양식의 더럼(Durham) 대성당(도판 114)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175p]
- 지상에서의 우리들의 삶의 최종적인 목표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이 이 교회의 현관에 새겨진 조각들 속에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런 종류의 조각은 설교자의 설교보다 더 강력하게 사람들의 마음 속에 살아 남았다.[177p]
- 우리는 12세기가 십자군의 세기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자연히 12세기는 그 이전보다 비잔틴 미술과의 접촉이 많아져서 그 시대의 많은 미술가들은 동방 교회의 장엄하고 성스러운 성상들(pp. 139-40, 도판 88, 89)을 모방하고 서로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180p]
- 이 시기의 회화는 사실 그림을 통해 글을 쓰는 형식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방법들이 없었더라면 교회의 가르침은 결코 가시적인 형상으로 번안될 수 없었을 것이다.
색채 또한 형태와 마찬가지 방향으로 나아갔다. 미술가들은 자연 속에 나타나는 음영의 농담을 연구하고 모방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림에 자기가 좋아하는 색채를 자유롭게 선택했다. -중략- 자연계를 모방할 필요에서 벗어남으로써 얻은 이 자유는 그들로 하여금 초자연적인 세계의 관념을 전달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183p]
10 교회의 승리
13세기
- 그러나 서유럽은 동유럽과 심각하게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동유럽에서는 미술 양식들이 수천 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또 그것들이 변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듯이 보였으니 서유럽은 이런 불변성을 전혀 몰랐다. 서유럽의 미술은 언제나 새로운 해결책과 새로운 이념을 찾아 한시도 쉬지 않았다. 로마네스크 양식은 12세기를 넘기지 못하였다. 미술가들이 교회에 궁륭 천장을 만들어 새롭고 장엄한 방식으로 그들의 조각상을 배치하는 데 성공하자마자 또 다른 참신한 이념이 노르만과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들을 볼품없는 구식으로 만들어버렸다. 그 새로운 이념은 프랑스 북부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바로 고딕(Gothic) 양식의 원리였다. [185p]
- 물론 ‘늑재’를 서로 교차해서 사용하는 원리만 가지고는 이 같은 혁명적인 양식의 고딕 건축을 세우기에는 불충분했다. 이러한 기적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다른 많은 기술적인 혁신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로마네스크 식의 둥근 아치들은 고딕 식 건축가들의 목적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렇다. 두 기둥 사이를 반원형 아치를 가지고 메울 경우, 그것을 해내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궁륭 천장은 항상 일정한 정점(頂點)을 갖고 있기 때문에 더 높지도 더 낮지도 않다. 만일 그 높이를 더 올리고 싶다면 아치의 경사를 더 가파르게 해야 한다. 이런 경우에 최선의 방법은 둥근 아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활 모양의 늑재를 접합시키는 것이었다. 첨형(尖形) 아치는 이런 발상에서 나왔다. 이 방법의 가장 큰 장점은 건축물의 요구에 따라서 평평하게 만들 수도 있고 또는 좀더 뾰족하게 만들어 높이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고려해야 할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궁륭을 만드는 무거운 돌들은 아래쪽으로만 압력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시위를 당긴 활처럼 양 옆으로도 압력을 주게 된다. 이 점에서도 첨형 아치가 둥근 아치의 개량형이긴 하지만 그래도 기둥만을 가지고 이 외부의 압력을 지탱하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건물 전체가 제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주 강한 버팀목이 필요했다. 궁륭 천장을 가진 측랑 부분에서는 어려운 문제가 없었다. 밖에 부벽(扶壁, buttress)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높은 신랑(身廊)에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 경우에는 측랑의 지붕을 가로질러 외부에서 지탱해주어야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건축가들은 고딕 궁륭의 뼈대를 완성시켜주는 ‘공중 부벽(空中扶壁, flying buttress)’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도판 122). 고딕 식 교회 건물은 마치 자전거 바퀴가 거미줄 같은 살에 의해서 그 형태를 유지하듯, 가냘픈 돌 구조 사이에 걸려서 그 하중을 지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전거 바퀴나 고딕 건물의 경우나 다같이 전체의 견고함을 유지하며 그 구조에 필요한 자재를 점점 줄일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바로 각 부분에 무게를 균등하게 배분시키는 것이다. [186p]
- 그러나 그는 도판 120에서 볼 수 있는 12세기의 거장처럼 철저한 좌우 대칭에 만족하지는 않았다. 그는 분명히 그의 조각 하나하나에 생명을 불어넣으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눈을 치켜뜨고 열심히 쳐다보는 사도들의 아름다운 표정을 읽을 수 있다. 사도들 중의 세 사람은 전통적인 애도의 표시로 손을 얼굴에까지 들어올리고 있다. 더욱 더 표정이 풍부한 것은 성모의 침상 곁에 쭈구리고 앉아 손을 맞잡고 있는 성 막달라 마리아의 얼굴과 몸짓인데 이 조각가는 그녀를 평화스럽고 조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성모 마리아와 놀랄 만큼 성공적으로 대비시키고 있다. 몸에 걸친 옷도 일찍이 초기 중세 작품에서 볼 수 있었던 텅 빈 껍데기가 아니며 순전한 장식적인 두루마리도 아니다. 고딕 양식의 미술가들은 그들에게까지 전수되어 내려온 옷을 입은 육체를 묘사하는 고대의 공식을 이해하고자 했다. 아마 그들은 프랑스에서 더러 찾아볼 수 있는 로마의 묘석이나 개선문 같은 이교도의 석조물에서 이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리하여 그들은 신체의 구조가 옷의 주름 아래로 보이게 만드는 잊혀졌던 고전 예술을 다시 찾았다. [192~193p]
- 그러나 그리스 미술과 고딕 미술, 즉 신전 미술과 성당 미술 사이에는 대단히 큰 차이가 있었다.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미술가들은 아름다운 육체의 이미지를 어떻게 형상화하느냐에 관심을 기울인 반면 고딕 미술가들에게는 이 모든 방법과 기교가 하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으며 그 목적인 성경의 이야기를 한층 더 감동적으로, 그리고 신빙성 있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작품을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서, 그리고 신자들이 그것으로부터 위안과 교화를 받게 하기 위해서 애를 썼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근육을 기술적으로 묘사하는 것보다 죽어가는 성모를 쳐다보는 그의 태도가 훨씬 더 중요했음에 틀림없다. [193p]
- 예술가들이 그들에게 흥미가 있는 그런 것을 그리기 위해서 표본이 되는 서적을 때때로 참조하지 않게 된 것은 13세기에 들어와서였다. 오늘날 우리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거의 상상하기 힘들다. 우리가 생각하는 미술가는 스케치북을 들고 앉아 기분이 날 때는 언제나 실물을 스케치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중세 미술가들의 훈련이나 양성 과정은 지금과는 대단히 달랐다. 중세의 미술가는 그 시대 대가의 견습생으로 시작해서 처음에는 스승의 지시를 따르고, 그림 속에서 비교적 덜 중요한 부분을 그려넣어서 그의 스승을 도왔다. 그는 점차 예수의 제자를 그리고 성모 마리아를 그리는 방법을 배웠을 것이다. 그는 옛 서적들에 실린 장면을 모사하거나 재배치해보고 그것들을 다른 구조 속에 맞게 만들어서 마침내는 그가 모르는 유형의 장면도 그려낼 수 있을 만한 충분한 능력을 습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스케치북을 들고 실물을 보고 그릴 필요성에 부딪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그는 왕이나 주교 같은 특정 인물을 그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에도 흔히 우리가 알 듯이 닮은 모습을 요구하는 초상화를 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중세에는 우리가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의 초상화는 없었다. 모든 미술가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인습적인 인물상을 하나 그리고 직함을 나타내는 표상, 즉 왕에게는 왕관과 홀(笏), 주교에게는 주교관(主敎冠)이나 홀장(笏杖) 등을 그려넣고 보는 사람이 잘못 알아보지 않도록 초상 아래쪽에 이름을 써넣었다. [196p]
- 그러나 사람이나 물건을 앞에 놓고 그린다는 생각 자체가 그들에게는 아주 다른 세계의 일같이 생각되었다. 실물을 그린다는 것은 13세기 미술가들에게는 아주 놀라운 일로 간주되곤 했다. 그러나 간혹 그들이 의존할 수 있는 전통적인 견본이 없을 때는 직접 실물을 보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196p]
- 이탈리아 화가들은 이탈리아 조각가들보다 더 늦게 고딕 예술의 대가들의 새로운 화풍에 호응을 보였다. 베네치아와 같은 이탈리아 도시들은 비잔틴 제국과 밀접한 접촉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또 이탈리아의 장인들도 파리보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영감과 지도를 받았다(p. 23, 도판 8). 13세기에도 이탈리아의 교회들은 여전히 ‘그리스 풍’의 장중한 모자이크로 단장되었다. [198p]
- 우리는 자연의 재현을 목적으로 하는 조각가의 작업이 그와 유사한 목적을 가진 화가들의 작업보다 훨씬 수월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조각가는 단축법이나 명암을 토해 입체감을 나타냄으로써 깊이의 환영을 만들어낼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조각상은 실제의 공간과 빛 속에 서 있다. 그래서 스트라스부르나 나움부르크의 조각가들은 13세기의 회화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실물과 거의 같은 단계에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8p]
- 궁극적으로 이탈리아 인들에게 조각과 회화를 분리시키는 장벽을 뛰어넘게 만든 것은 비잔틴 미술이었다. 왜냐하면 그 엄격성에도 불구하고 비잔틴 미술은 서유럽 암흑 시대의 필사본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고 더욱이 헬레니즘 화가들의 발견들을 더 많이 보존하고 있었다. 우리는 도판 88(p. 139)과 같은 비잔틴 회화의 냉엄한 엄숙성 밑에 얼마나 많은 업적들이 아직도 숨겨져 있는지를 기억한다. 얼굴에서 명암법을 어떻게 활용했으며 왕좌와 발 받침대는 단축법의 원칙을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이러한 방법론으로 무장을 하였기에 비잔틴 보수주의의 주문(呪文)을 깬 한 천재가 신세계로 감히 뛰어들 수 있었으며 고딕 조각의 실물과 같은 조각상들을 회화에 대입시킬 수가 있었다. 이처럼 천재적인 이탈리아 미술은 피렌체의 화가 조토 디 본도네(Giooto 야 Bondone:1267-1337)에서 확인되어진다. [198~201p]
- 조토로서는 이 발견이 단순히 자신의 기교를 과시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회화의 개념 전체를 변경하게 만들었다. 그는 그림으로 기록하는 수법을 쓰지 않고 그 대신에 성경의 이야기가 바로 우리의 눈 앞에서 전개되는 것과 같은 환영을 창조해낼 수 있었다. 이로써 동일한 장면에 관한 옛날 표현을 참고한다든지 또는 그처럼 유서깊은 수법들을 새로운 작품에 적용시키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오히려 그는 신자들에게 성경이나 성자들의 전설을 읽으면서 목수의 가족이 이집트로 도망가는 장면이나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힐 때의 정경을 마음속에 그려보라고 훈계하는 설교 수사들의 충고를 따랐다. 조토는 그것을 아주 새롭고 철저하게 생각해낼 때까지 쉬지 않았다. 그는 그런 사건에 참여한 사람이라면 어떤 자세로 서 있고,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움직일까에 대해 고심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몸짓이나 동작이 우리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 것인가 하는 것에도 골몰했다. [201p]
- 조토의 명성은 널리 세상에 퍼져서 피렌체 사람들은 그를 자랑으로 여겼다. 그들은 그의 생애에 흥미를 가졌으며 그의 기지와 재주에 관한 일화를 이야기했다. 이것 역시 상당히 새로운 형상이었다. 그 전에는 그러한 일이 일어난 적이 없었다. 물론 널리 존경을 받고 한 수도원에서 다른 수도원으로, 그리고 한 주교로부터 다른 주교에게 천거를 받는 거장들은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미술가들의 이름을 후세에까지 알려지도록 보존할 필요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당시의 사람들은 미술가들을 마치 우리가 훌륭한 가구를 만든 사람이나 재단사를 생각하듯이 생각했다. 미술가 자신들조차도 명성이나 평판을 얻는 일에 큰 관심이 없었다. 이들은 대부분 자기 작품에 서명조차도 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우리는 샤르트르 대성당이나 스트라스부르 대성당, 나움부르크 대성당의 조각 작품들을 만든 거장들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이들이 그 당대에 충분히 평가 받았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그러한 명예는 그들이 봉사했던 대성당으로 돌렸다. 이러한 점에서도 피렌체의 화가 조토는 미술의 역사상 완전히 새로운 장을 개척하고 있다. 그의 시대 이후로 처음에는 이탈리아에서, 그리고 뒤이어 다른 나라에서도 미술사(美術史)란 위대한 미술가들의 역사가 된 것이다. [202~205p]
11 귀족과 시민
14세기
- 13세기는 거대한 대성당들의 시대로 이 대성달에서는 거의 모든 분야의 미술이 각자 맡은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이러한 거대한 건축 사업은 14세기와 그 뒤로도 계속되었으나 더 이상 그것은 미술의 구심점이 되지는 못했다. 우리는 이 시기에 일어났던 커다란 변화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고딕 양식이 처음 발전했던 12세기 중반의 유럽은 아직 인구가 적은 농부들의 대륙이었고 권력과 학문의 중심지는 수도원과 귀족들의 성이었다. 그들 자신의 위세당당한 대성당을 갖고자 하는 대주교들의 야심은 도시의 시민적 자부심이 일깨워졌음을 알리는 최초의 징후였다. 그러나 약 150년 뒤 이 도시들은 상업의 번화한 중심지로 성장했고 시민들은 점차로 교회와 봉건 영주들의 권력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귀족들도 더 이상 요새와 같은 장원에서 음침하게 격리되어 살기보다는 안락과 유행하는 사치가 있는 도시로 이주해서 권력자의 궁전에서 그들의 부를 과시했다. 만약 기사와 시골 유지, 수도승과 장인들이 등장하는 초서(Chaucer)의 서사시를 되새겨본다면 14세기의 생활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이미 우리가 나움부르크 대성당의 설립자 군상(p. 194, 도판 130)을 볼 때 기억하게 되는 십자군이나 기사들의 무용담이 판을 치는 세계가 아니었다. 어떤 시대와 양식을 지나치게 일반화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한 일반화에 들어맞지 않는 예외적인 경우가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점을 유보한다면 우리는 14세기의 취향이 장대한 것보다는 세련된 것을 추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점은 이 시기의 건축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영구에서는 소위 ‘초기 영국 양식(Early English style)’ 이라고 알려진 초기 대성당들의 순수한 고딕 양식과 이런 형식들이 발전하여 그 후에 생긴 소위 ‘장식적 양식(Decorated style)'이라고 알려진 것으로 구분된다. 그 명칭 자체가 취향의 변화를 말해준다. [208p]
- 이러한 작품들은 미술관 같은 곳에서 그냥 지나치면서 보거나 한번 슬쩍 보는 것만으로는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 이런 작품들은 진정한 미술품 감식가들에 의해서만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졌고 헌신적으로 보호받아온 것들이다. [210p]
- 거기다가 더 놀라운 점은 위의 성경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또 하나의 장면이 아래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당시의 일상 생활에서 따온 소재로 매를 이용해서 오리를 잡는 장면이다. 매 한 마리가 오리 한 마리를 덮치고 있고 다른 다 무리는 날아서 도망치고 있다. 이를 보고 말을 타고 있는 남녀와 그 앞에 있는 소년이 기뻐하고 있다. 이 화가는 윗부분의 그림을 그릴 때는 열두 살 먹은 소년을 직접 보고 그리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아래 그림을 그릴 때는 매와 오리를 실제로 보고 관찰해서 그렸던 것 같다. 아마 그는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너무 경외한 나머지 그의 사실적인 관찰에 대한 것을 위의 그림에는 도입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이 두 가지 장면을 별도의 것으로 분리시키려 했다. 즉 위의 그림에서는 번잡한 세부 묘사를 없애고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제스처로 내용을 전달하는 분명한 상징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한편, 여백에서는 이것이 초서(Chaucer)가 살았던 시대라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실생활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 그림에서와 같이 우아한 설명과 충실한 관찰이라는 두 요소들이 점차 하나로 융합하기 시작한 것은 14세기에 들어와서였다. 아마도 이탈리아의 미술의 영향이 없었다면 이와 같은 풍조가 그렇게 빨리 이루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211p]
- 이탈리아, 특히 피렌체에서는 조토의 미술이 회화의 모든 개념에 변화를 일으켰다. 고대 비잔틴 양식이 갑자기 딱딱하고 구식으로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이탈리아 미술이 유럽의 나머지 지역과 갑자기 분리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와는 반대로 조토의 개념은 알프스 이북의 여러 나라에서 영향력을 넓혀갔으며 반면에 북쪽의 고딕 화가들은 남유럽의 거장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중략- 시에나의 화가들은 피렌체의 조토처럼 갑작스럽고 혁명적인 방법으로 초기 비잔틴 미술의 전통을 끊어버리지는 않았다. 조토와 같은 세대로 시에나의 거장인 두초(Duccio, 1255/60년경~1315/18년경)는 고대 비잔틴 형식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서 거기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으려고 노력한 결과 성공을 거두었다. [212p]
- 우리는 이 인물들을 패널의 복잡한 형태 속에 알맞게 배치한 방식에, 즉 천사의 날개가 왼쪽 아치에 들어맞게 그려졌다든가 뒤로 움츠린 마리아가 오른쪽 아치 속에 그려지고 이 두 인물 사이의 공간을 꽃병과 그 위의 비둘기로 채운 방법 등에 경탄을 금할 수가 없다. 이 두 화가들은 인물 모습을 패턴 속에 조화롭게 배치하는 기술을 중세의 전통에서 습득했다. 우리는 앞에서 중세 미술가들이 만족스러운 구도를 만들기 위해서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의 상징들을 배열한 방법을 보고 감탄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효과는 사물의 실제 형상과 비례를 무시하고 공간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상황에서 가능했다. 이 시에나 미술가들은 이제 더 이상 그러한 수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212p]
- 페트라르카와 마찬가지로 시모네 마르티니도 교황청에서 수년 간 생활했는데 당시 교황청은 로마가 아닌 남프랑스의 아비뇽에 있었다. 프랑스는 여전히 유럽의 중심이었고 프랑스적인 관념과 양식은 유럽 각지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214p]
- 언제나 성인 같은 생활만 할 수는 없는 거칠고 혼란한 생활 속에서 미술가의 기교를 빌어 만든 자신의 초상을 조용한 교회나 예배당에 걸어 성자나 천사들과 친숙하게 지내며 늘 기도드리고 있다고 생각하며 다소의 위안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215p]
- 그의 기법은 이전의 화가들이 보여준느 장면이 자연 그대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의 기법은 이전의 화가들이 사용했던 상징적인 방법을 통한 이야기 전달에서 멀리 벗어난 것처럼 보이므로 이 화가 조차도 인물들이 움직이는 공간을 표현할 수 없었고 주로 주의 깊은 세부 묘사를 통해서 현실감을 얻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그가 그린 나무도 자연에서 보고 그린 진짜 나무들이 아니라 나란히 서 있는 상직적인 나무일 뿐이다. 그리고 그가 그린 사람들의 얼굴도 하나의 매력적인 인물상의 공식에서 발전시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주변 생활의 화려함과 유쾌함에 대한 그의 관심은 회화의 목적에 대한 그의 견해가 중세 초기의 미술가들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한 관심은 가능한한 가장 명료하고도 인상적으로 성경 이야기를 전달하는 가장 좋은 방식이 무엇인가 하는 것으로부터 자연의 일면을 가장 충실하게 재현하는 방식에 대한 것으로 점차 변해왔다. 우리는 이 두 가지 방법이 반드시 상충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새롭게 얻은 자연에 관한 지식을 14세기의 거장들이 했던 것처럼, 그리고 그 후의 다른 대가들이 해왔던 것처럼 종교 미술에 적용시키는 것은 틀림없이 가능했다. 그러나 미술가들의 임무는 변했다. 전에는 성경에 나오는 주요 인물들을 묘사하는 고대의 공식을 배우고 이러한 지식을 새로운 방식으로 활용하는 것으로 훈련은 충분했다. 이제 미술가의 작업에는 다른 기술을 포함하게 되었다. 미술가는 자연으로부터 스케치를 할 수 있어야 했고, 또 이것을 그의 그림에 옮겨담을 수 있어야 했다. 그는 스케치북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희귀하고 아름다운 동식물들의 스케치를 비축해두어야 했다. [218p]
- 미술가들의 작품을 감상하는 일반 사람들도 자연을 묘사한 화가의 기교나 그의 그림 속에 얼마나 많은 양의 뛰어난 세부 묘사가 들어있는가에 따라 미술가를 평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술가들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기를 원했다. 그들은 자연의 관찰을 통한 꽃이나 동물의 세부 묘사에 숙달되는 새로운 기술에만 만족한 것이 아니라 시각의 법칙을 개척하고 그리스와 로마의 미술가들이 했듯이 미술가들의 관심이 이런 방향으로 변하자 중세미술은 사실상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일반적으로 르네상스라고 불리우는 시대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221p]
12 현실성의 정복
15세기 초
- 즉 당시의 사람들은 그의 미술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저술가들이 칭송했던 고대의 유명한 거장들의 걸작만큼 훌륭하다는 의미에서 이런 찬사를 보냈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이탈리아에서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탈리아 인들은 먼 옛날에는 로마를 수도로 한 자신들의 나라가 문명 세계의 중심이었는데, 고트 족과 반달 족 같은 게르만 종족이 침입해와서 로마 제국을 붕괴시킨 이래로 그 권세와 영광이 기울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인들의 마음 속에 품은 부흥이라는 관념은 ‘위대했던 로마’의 재생이라는 생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돌아다보는 고전 시대와 그들이 이제 희망하는 재생의 새로운 시대 사이에 놓인 기간은 단지 하나의 슬픈 막간, 즉 ‘중간 시대’에 불과했다. 이렇게해서 재생, 즉 르네상스라는 관념은 그 중간의 시대가 ‘중세’라는 관념을 낳게 했으며 지금도 우리는 그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고트 족 때문에 로마 제국이 몰락했다고 생각했으므로 마치 우리가 아름다운 물건들을 쓸데없이 파괴하는 짓을 가리킬 때 반달리즘(vandalism)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이 중간 시기의 미술을 고딕(Gothic) 미술이라고 부르고 ‘야만적’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게 되었다. [224p]
- 앞에서 우리는 고트 족의 로마 침입으로부터 우리가 지금 고딕 양식이라고 부르는 미술이 생기기까지는 대략 70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을 살펴보았다. 또한 우리는 미술의 부활이 암흑 시대의 충격과 혼돈 뒤에 서서히 진행되어 오다가 고딕 시대에야 급속도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탈리아 사람들이 북쪽에 사는 사람들보다 미술의 이러한 점진적인 성장과 개화를 인식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즉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중세의 이탈리아는 다른 지역보다 낙후되었기 때문에 조토의 새로운 업적들이 그들에게는 엄청난 혁신으로 보였고, 예술에 있어서 가장 고귀하고 위대한 모든 것의 부활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14세기의 이탈리아 사람들은 예술과 과학과 학문이 고전 시대에 번창했었으나, 이 모든 것들이 거의 다 북쪽의 야만인들에 의해서 파괴되었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가 이 영광스러운 과거를 다시 부흥시켜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이러한 자신감과 희망이 다른 도시보다 강하게 나타난 곳은 단테와 조토의 출생지이며 부유한 상업 도시인 피렌체였다. 바로 이곳에서 15세기 초에 일단의 미술가들이 계획적으로 새로운 미술을 창조하고 과거의 미술 개념에서 탈피하고자 시도했던 것이다. [223~224p]
- 사실 그의 명성은 궁륭형 천장을 만드는 고딕 식 방법을 알지 못했으면 불가능햇을 구성과 설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피렌체 사람들은 그들의 성당을 거대한 돔(dome)으로 덮기를 원했으나 브루넬레스키가 이런 돔(도판 146)을 완성시키는 방법을 고안해낼 때까지 이 돔을 받쳐주는 기둥들 사이의 거대한 공간을 덮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브루넬레스키는 새로운 교회나 다른 건물의 설계를 요청받았을 때 전통적인 양식들은 모두 다 버리고 로마의 영광이 부활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의 시안을 채택하기로 결심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그는 로마를 여행하며 신전과 궁전의 유적들을 측량하고 건물들의 형태와 장식들을 스케치했다고 한다. 이런 고대 건물들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 그의 의도는 아니었다. 이런 건물들은 15세기 피렌체의 요구에는 채택되기 힘들었다. 그고 목표했던 것은 새로운 건축 방법의 창조였으며 그러한 의도 내에서 고전 건축의 형식들을 새로운 조화와 미를 창조하는 데 자유로이 이용하는 것이었다.
브루넬레스키의 업적 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그의 계획을 실현하는 데 실제로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그 뒤로 거의 500년 가까이 유럽과 미국의 건축가들은 그의 발자취를 따랐다. 오늘날 우리는 어느 도시나 마을에 가든 열주(列柱)나 박공(牔拱, pediment)과 같은 고전적인 형식을 이용한 건물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몇몇 건축가들이 브루넬레스키의 방침에 의문을 갖기 시작하고 브루넬레스키가 고딕 전통에 반기를 든 것처럼 르네상스 식 전통에 반기를 들기 시작한 것은 금세기에 들어와서의 일이었다. 그러나 현재 건축되고 있는 대부분의 주택들, 심지어 원주나 그와 비슷한 장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건물에까지도 아직 문에나 창틀의 쇠시리 장식(moulding)에서, 또는 건물의 치수와 비례 등에서 고전적 형식의 잔재를 찾아볼 수 있다. 브루넬레스키각 새로운 시대의 건축을 창조하고자 한 것이라면 그는 분명히 성공한 셈이다. [224p]
- 밝고 균형이 잘 잡힌 실내에서는 고딕 건축가들이 그처럼 높이 평가했던 특징들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높은 창문도 없으며 가느다란 기둥도 없다. 그 대신 건물의 구조상 실질적인 기능을 하지 않지만 고전기의 ‘기둥 양식’을 본뜬 회색 벽기둥들이 아무 장식도 없는 흰 벽을 구획하고 있다. 브루넬레스키는 다만 내부의 형태와 비례를 강조하기 위해서 벽기둥들을 거기에 설치했던 것이다. [226p]
- 브루네렐스키는 르네상스 건축의 창시자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미술의 영역에 있어서 또 하나의 획기적인 발견으로 그 뒤 수백 년 간 미술을 지배했던 원근법(遠近法,perspective)의 발견은 그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단축법(短縮法, foreshortening)을 이해했던 그리스 미술가들이나 공간의 깊이를 능숙하게 표현했던 헬레니즘 미술가들(p. 114, 도판 72)조차도 물체가 뒤로 물러갈수록 수학적인 법칙에 따라 그 크기가 작아진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고전기의 미술가들 중에 가로수가 늘어서 있는 길이 지평선 상의 한 점으로 사라지게 그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미술가들에게 이 문제를 수학적으로 해결하는 수단을 제공해준 사람이 바로 브루넬레스키였다. 이것이 그가 화가 친구들에게 불러일으킨 흥분은 엄청났을 것이다. [229p]
- 비록 원근법이 새롭게 등장했던 당시에는 그것 자체가 대단히 놀라운 것이었을 테지만 이 혁명은 기법적인 수단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중략- 만약에 피렌체 사람들이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당시 피렌체에서도 유행했던 국제 양식 같은 것을 기대했다면 틀림없이 실망했을 것이다. 그들이 본 것은 섬세한 우아함이 아니라 큼직하고 육중한 인물들이었으며, 유려한 곡선이 아니라 건장하고 모가 진 형상이었고, 꽃이나 보석같은 고상한 세부 묘사 대신에 유해를 안치하는 황량한 지하 납골소였다. 그러나 마차초의 작품이 그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는 그림들보다 시각적인 즐거움을 덜 주었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훨씬 더 진지하고 감동적인 것이 있었다. 우리는 마사초가 조토를 모방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극적인 장엄함을 찬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략- 마사초가 인물들을 원근법적인 틀 아래 배치함으로써 강조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바로 이런 효과였다. 우리는 손으로 그들을 만져볼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된다. 바로 그 느낌이 이 인물들과 그들의 의미를 우리에게 보다 가까이 접할 수 있도록 해준다. 르네상스시대의 거장들에게는 미술에 관한 새로운 방법과 발견이 언제나 그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 그들은 언제나 그런 방법과 발견을 매개로 하여 그 주제가 갖는 의미를 보는 사람이 보다 친근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229p]
- 우리는 도나텔로의 이러한 상상력뿐만 아니라 이 무사다운 성인을 이처럼 신선하고 신빙성 있게 시각화한 그의 탁월한 재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조각 예술에 대한 그의 전체적인 접근 방법도 완전히 새로운 착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 조상은 그것이 풍겨주는 생명감과 운동감에도 불구하고 그 윤곽이 분명하고 바위와 같이 단단하다. 마사초의 그림과 마찬가지로 도나텔로는 그의 선배들의 우아한 세련미를 새롭고 힘찬 자연의 관찰로 대치하기를 원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성인의 두 손이나 눈썹 같은 세부 묘사는 전통적인 모델에 전혀 의존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며 인체의 실제 모습을 참신하고 확고하게 연구하였음을 입증하고 있다. 15세기 초 피렌체의 거장들은 중세의 미술가들로부터 물려받은 낡은 공식을 반복하는 것으로 더 이상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이 찬미했던 그리스와 로마의 미술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작업실이나 공방에서 모델이나 동료 미술가드에게 자기들이 원하는 자세로 포즈를 취해줄 것을 요구함으로써 인체에 관한 탐구를 시작했다. 도나텔로의 작품을 그처럼 뚜렷하게 사실적으로 보이게 만들어준 것도 바로 이러한 새로운 방법과 새로운 관심이었다. [230p]
- 도나텔로의 이 작품에서 어떤 양상이 새로운 것인지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모든 면이 다 새롭기 때문이다. 고딕 미술의 명확하고 우아한 이야기 방식에 익숙한 사람들은 도나텔로의 이야기 방식을 보고 틀림없이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이 그림에는 정돈되고 유쾌한 문양을 형성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으며 오히려 갑작스러운 혼돈의 효과를 만들어내려 하였다. 마사초의 인물들처럼 도나텔로의 인물들도 그 움직임에는 거칠고 모가 진 데가 있다. 그들의 몸짓은 격렬하며 이 이야기의 끔찍스러움을 완화시켜려는 시도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이 장면이 거의 기분 나쁠 정도로 생생하게 보였을 것이 틀림없다.
원근법의 새로운 기술은 현실의 환상을 더욱 가중시켰다. 도나텔로는 다음과 같이 자문하는 것으로 시작했을 것이다. ‘성인의 머리를 방 안으로 가져왔을 때의 정경은 어떠했을까?’ [233p]
- 그러나 북유럽에서 사실성의 정복을 최종적으로 완수한 사람은 조각가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완전히 새로운 것을 표현한다고 느껴지는 혁명적인 창의성을 보인 사람은 화가 dis 반 에이크(Jan van Eyck : 1390?-1441)였다. 슬뤼테르와 마찬가지로 그는 부르고뉴 공국의 궁전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 현재의 벨기에로 옛날에는 네덜란드에 속해 있던 지방에서 일을 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헨트 시에 있는 여러 장면이 그려진 거대한 제단화(도판 155-6)이다. 이 작품은 얀보다는 덜 알려진 그의 형 휘버트(Hubert)가 시작해서 1432년에 얀이 완성했다고 한다. 1432년이라면 이미 앞에서 언급했던 마사초와 도나텔로의 걸작들이 완성된 그 무렵이다. [235p]
- 성경에는 선악과를 따먹은 뒤에야 그들은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았다’고 적혀 있다. 그들은 손에 든 무화과 잎사귀에도 불구하고 정말 완전히 벌거벗은 모습이다. 이 점에서 반 에이크는 그리스와 로마의 미술 전통을 결코 완전히 버리지 않았던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 대가들과 진정으로 대치된다. 고대 미술가들은 밀로의 비너스나 아폴론 벨베데레(pp. 104-5, 도판 64,65)에서 볼 수 있듯이 인물의 형상을 ‘이상화’했다. 반 에이크는 이런 것을 전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는 벌거벗은 모델들을 그의 앞에 세우고는 후세들이 그의 지독한 정직성으로 인해 다소 충격을 받게 될 정도로 그들을 충실하게 그렸을 것이다. 그가 심미안을 지니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도 분명히 이전 세대에<월튼 두폭화>(pp. 216-7, 도판 143)를 그린 대가가 그랬듯이, 하늘의 영광을 불러 일으키기를 즐겼다. 그러나 그가 음악을 들려주는 천사들이 입은 진귀한 비단옷의 광택과 그림의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보석의 광채를 연구하며 그릴 때의 끈기와 숙달된 솜씨에서 다시 한 번 그차이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면에서 반 에이크 형제는 마사초만큼 급진적으로 국제 양식의 미술 전통과 결별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랭부르 형제 같은 미술가들의 방법을 추구해서 그것을 완벽한 경지로 이끌었기 때문에 중세 미술의 개념에서 한 걸음 앞으로 전진하게 되었다. 그 시대의 다른 고딕 미술가들과 마찬가지로 랭부르 형제도 실물의 관찰에서 얻은 매력적이고 섬세한 세부 묘사를 화면 속에 가득 채우기를 좋아했다. 그들은 꽃이나 동물, 건물, 화려한 의상과 보석 따위를 그리는 솜씨를 과시했으며, 또 눈앞에 유쾌한 시각적 향연을 선사하는 데 자부심을 느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들은 인물이나 풍경의 실제 모습에 그렇게 많은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소묘와 원근법이 그렇게 실감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반 에이크 형제의 그림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자연에 대한 그의 관찰은 랭부르 형제보다 더 인내심이 있었고 세부 묘사에 관한 그의 지식도 훨씬 정확했다. 그림의 배경에 있는 건물과 나무들이 이 차이점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랭부르 형제의 나무는 상당히 도식화되어 있고 인습적이다(p. 219, 도판 144). 그들의 풍경은 실제의 광경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배경이나 태피스트리처럼 보인다. 이 모든 것이 반 에이크의 그림에서는 완전히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도판 157에서 진짜 나물르 보고, 도시로 이어지는 실제 풍경과 지평선 위에 있는 성을 본다. 바위 위의 풍이나 가파른 돌산에 자라는 꽃들을 그리는 데 들인 무한한 인내는 랭부르 형제가 그린 세밀화의 장식적인 덤불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인물에 대해서도 풍경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반 에이크는 그의 그림이 모든 세세한 부분까지도 정확하게 재현하는 데 골몰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말의 갈기에 있는 털이나 말탄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의 모피 장식의 터럭 수효까지도 다 셀 수 있을 것 같다. [236~239p]
- 그와 같은 세대의 남유럽의 미술가들, 예컨대 피렌체의 브루넬레스키 주변의 거장들은 자연을 그림 속에 거의 과학적인 정확성을 가지고 묘사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그들은 원근법적인 선으로 틀을 짜는 것으로 시작해서 해부학과 단축법의 법칙에 관한 지식을 통해 인체를 구축해갔다. 반면 반 에이크는 정반대의 방법을 사용했다. 그는 그림 전체가 가시적인 세계의 거울처럼 될 때까지 끈기를 가지고 미세한 세부까지 묘사하면서 자연의 환영을 만들어냈다. 물건이나 꽃, 보석 또는 천의 아름다운 표면을 묘사하는 데 뛰어난 작품들은 대개 북유럽 화가, 특히 네덜란드의 화가가 그린 것이고, 반면에 대담한 윤곽선과 원근법이 명확하며 인체의 아름다움을 확실하게 파악한 그림은 이탈리아 화가의 작품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239p]
- 이렇게 반죽을 만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으나 중세까지는 이 용매의 주된 성분은 달걀이었다. 달걀은 너무 빨리 마르는 점을 제외하면 아주 적합한 것이었다. 이러한 식으로 안료를 준비해서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템페라(tempera)라고 불렀다. 반 에이크는 이런 방식에는 만족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것은 색깔들이 서로 섞여들어가는 부드러운 변화를 나타내기에는 부적합했기 때문이다. 그는 달걀 대신 기름을 사용함으로써 보다 여유있게, 그리고 보다 더 정확하게 그림을 제작할 수 있었다. 그는 투명한 층, 또는 겉칠(glaze)에 이용할 수 있는 광택 있는 색채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고, 뾰족한 붓으로 반짝이는 하이라이트를 찍어넣을 수 있게 되었으며 경이로운 정확한 묘사를 성취하여 그의 동시대 사람들을 놀라게 함과 동시에 유화를 가장 적합한 매체로 받아들여 널리 쓰이게 만들었다. [240p]
- 이 거장이 그림에서 눈에 잘 띄는 곳에 라틴어로 ‘Johannes de eyck fuit hic(얀 반 에이크가 입회했노라)’라고 그의 이름을 써넣은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우리는 뒤의 벽에 걸려 있는 거울에서 그 장면이 모두 반영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또 화가이자 증인인 반 에이크 자신의 모습도 볼 수 있다(도판 159). 이것은 마치 목격자가 확실하다고 인정하는 사진을 법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비교할 수 있는데, 그림을 이런 새로운 방법으로 이용하는 것을 생각해낸 사람이 이탈리아의 상인인 아르놀피니인지 아니면 북유럽의 미술가 반 에이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을 창안해낸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그는 분명히 반 에이크의 새로운 회화 방식이 지닌 엄청난 가능성들에 재빨리 이해했음에 틀림없다. 역사상 처음으로 미술가가 진정한 의미에서 완전한 증인이 되었던 것이다. [243p]
- 그러나 비츠는 제네바의 시민들에게 예술가 물가에 섰을 때 진짜로 어떤 모습이었을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호수가 아니라 시민들이 다 알고 있는 호수, 즉 높이 솟은 웅장한 살레브 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제네바 호수를 그렸다. 이것은 누구나 다 볼 수 있었고, 오늘날에도 존재하며 아직도 그 그림 속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게 보이는 실제의 풍경이다. 그것은 아마도 실제 풍경을 최초로 정확하게 묘사하려고 시도한 작품일 것이다. 이 현실의 호수 위에 비츠는 현실의 어부들을 그려넣었다. 옛날 그림에 나오는 위풍당당한 사도들이 아니라 고기잡이 도구를 부지런히 다루면서 배가 기울지 않게 하기 위해서 어색하게 애를 쓰고 있는 평범하고 투박한 사람들을 그렸다. [244p]
13 전통과 혁신 Ⅰ
15세기 후반 : 이탈리아
- 이러한 단절의 한 영향으로서 우리가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대략 1400년까지는 유럽 각지의 미술이 비슷한 수준으로 발전해갔다.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과 부르고뉴 등지의 지도적인 거장들의 목적이 모두 다 비슷했기 때문에 이 시기의 고딕 화가들과 조각가들의 양식을 국제 양식(p. 215)이라고 한다는 것은 우리가 익히 기억하고 있는 바이다. [247p]
- 이 시대의 귀족들은 그들 사이에 기사도의 이상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왕이나 봉건 영주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거기에는 그들 자신이 어떤 특정한 민족이나 국가의 옹호자라는 생각은 들어 있지 않았다. 중세 말기에 이르러, 시민과 상인들로 구성된 도시가 점차 봉건 영주의 성보다 중요한 것으로 발전하게 되자 이러한 모든 점들도 점차 변해갔다. 상인들은 모두 그들이 태어난 고향의 말을 했고 타국의 경쟁자나 침입자들에게는 단결해서 대항했다. 각 도시는 교역과 산업에 있어서 그들 자신의 지위와 특권에 자부심을 갖고 그것을 잃지 않으려고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중세에는 훌륭한 거장이라면 이 건축 현장에서 다른 현장으로 옮겨다니며 작업할 수 있었고, 한 수도원에서 추천받아 다른 수도원으로 갈 수도 있었으며, 그의 국적이 어디인지 물어보려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도시들이 큰 세력을 얻게 되자 미술가들은 다른 직공이나 장인들처럼 길드(guild)를 조직했다. 이 길드는 여러 가지 점에서 오늘날의 노동 조합과 유사하다. 길드의 임무는 조합원의 권리와 특권을 보호하고 그들의 제작품을 판매하기 위한 안전한 시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 길드에 가입하기 위해 미술가들은 일정한 수준에 도달해야 했는데, 다시 말하자면 그가 하나의 기술면에서는 완전하게 익히고 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런 다음에 그는 자기의 공방을 열 자격이 있었고, 견습공들을 고용해서 제단화, 초상화, 채색된 가구, 깃발과 문장(紋章)등의 주문을 받을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
길드와 시 의회는 보통 시의 행정에 대해서 발언권을 가지고 있는 가장 부유한 집단으로, 그들의 도시를 번창하게 만드는 데 일조할 뿐만 아니라 도시를 미화하는 데도 최선을 다했다. 피렌체와 다른 도시의 길드들, 예를 들어 금세공사, 모직물업자, 무기 제조자 등의 길드들은 그들 기금의 일부를 교회 설립이나 조합의 건물을 짓는 데, 그리고 제단과 예배당을 세우는 헌금으로 바쳤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예술을 위해서 많은 일을 했다. 반면에 그들은 회원들의 권익을 열심히 보호했으며 따라서 다른 지방의 미술가가 일자리를 얻거나 그들 사이에 정착하지 못하게 했다. 단지 가장 유명한 미술가들만이 때때로 이 저항을 물리치고 대성당들이 건축될 시절에나 가능했던 것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일하는 것이 가능했다. [247~248p]
- 이러한 여러 가지 사정이 미술사에 그 영향을 미쳤다. 도시의 성장으로 말미암아 고딕 국제 양식은, 적어도 20세기가 되기 전까지는 아마도 유럽이 가지고 있던 최후의 국제적 양식이었을 것이다. 15세기에는 미술이 각기 다른 여러 ‘유파(流波,school)'들로 분열되어 이탈리아, 플랑드르, 독일 등지의 모든 도시나 마을에는 그 나름의 ’회화 유파‘가 생겨났다. [248p]
- 알베르티가 어디에서 이러한 원리를 배웠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각 층마다 상이한 그리스의 기둥 양식을 사용했던 로마의 콜로세움(p. 118, 도판 73)을 기억한다. 콜로세움과 마찬가지로 이 건물에서도 제일 아래층에서는 도리아 식 기둥 양식을 채택하고 있으며 또한 벽기둥 사이에는 아치를 배치하고 있다. 그러나 로마의 형식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옛 도시의 대저택에 현대적인 모습을 부여했다고 해서 알베르티가 고딕 전통과 완전히 결별한 것은 아니었다. 이 대저택의 창문들과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의 정면에 있는 창문들(p. 189, 도판 125)을 비교해보기만 해도 예기치 않은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알베르티는 소위 ‘야만적인’ 첨형 아치를 부드럽게 만들고 또 고전적인 기둥 양식의 요소들을 재래의 인습적인 형식 안에 채택함으로써 단지 고딕 식 설계 방식을 고전적 형식으로 ‘번안했을’뿐이었다.
알베르티의 이런 업적은 전형적인 것이다. 15세기 피렌체의 화가나 조각가들은 새로운 고안을 오래된 전통에 맞도록 조화시켜야만 하는 그런 처지에 놓일 때가 많았다. 새로운 것과 낡은 것, 고딕 전통과 근대적인 양식 사이의 절충은 15세기 중엽의 많은 거장들의 특징이었다. [250p]
- 프라 안젤리코의 그림에는 거의 운동감이 없으며 실재의 단단한 인체를 암시해주는 요소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 그림이 지닌 겸손한 분위기 때문에 보다 감동적으로 느껴진다고 생각한다. 이 위대한 미술가의 겸손함이야말로 브루넬레스키와 마사초가 미술에 도입했던 문제를 깊이 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근대적인 새로운 표현법을 과시하지 않았던 이유인 것이다. [252p]
- 북유럽의 반 에이크는 관찰을 통해 얻은 세부들을 점차 더해가고, 또한 가장 사소한 음영에 이르기까지 사물의 세세한 면을 그대로 모사함으로써 국제 양식의 형식들을 변화시켰다. 반면 우첼로는 이와 정반대의 접근 방법을 택했다. 그는 그가 사랑하는 원근법에 의해서 그림 속의 인물들이 입체감 있고 사실적으로 보이게 하는 실감나는 무대를 구축하려고 노력했다. [255p]
- 프라 안젤리코와 같은 화가들이 전(煎) 시대의 정신을 변화시키지 않고도 새로운 방법을 이용할 수 있었고 우첼로는 그 나름대로 새로운 방법에 완전히 사로잡혔던 반면에, 그들보다 덜 헌신적이고 덜 야심적인 미술가들은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않은 채 새로운 기법을 화려하게 응용했다. 대중들은 아마도 신구(新舊) 두가지 세계의 장점을 동시에 보여주는 후자의 경우를 더 좋아했을 것이다. [255p]
- 조토나 도나텔로와 마찬가지로 만테냐도 그런 정경이 현실적으로 어떻게 보였을지 분명히 상상해보려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현실성이라고 부른 기준은 조토의 시대보다 훨씬 더 정확한 것이 되어 있었다. 조토의 경우 중요했던 것은 이야기의 내면적인 의미, 즉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남자와 여자는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행동을 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반면 만테냐는 외부적인 형태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는 성 야고보가 로마 시대에 산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러한 광경이 실제로 벌어졌을 장면을 그대로 재구성하려고 부심했다. 그는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고대의 기념물들도 특별히 연구했다. -중략- 이 그림이 우리들에게 고대의 조각을 연상케 하는 것은 단지 이러한 의상과 장신구의 세부 처리뿐만이 아니다. 이 장면 전체에서 엄격한 단순성과 장대함을 가진 로마 미술의 정신이 넘쳐흐르고 있다. [256p]
- 반면에 만테냐는 마사초가 하다가 중단한 것을 계속 밀고나갔다. 그의 인물들은 마사초의 인물처럼 조각적이고 인상적이다. 마사초처럼 그는 원근법이라는 새로운 기법을 열심히 이용했다. 그러나 우첼로처럼 이 마술을 수단으로 해서 얻어지는 새로운 효과를 과시하기 위해 원근법을 이용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만테냐는 그의 인물상이 단단하고 형체가 있는 존재들처럼 서 있고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무대를 창출하기 위해 원근법을 사용하고 있다. [259p]
- 만테냐의 작품에서처럼 이 작품도 어딘가 연극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것 같다. 여기에는 아주 명확하게 표시된 무대가 있고 우리의 주의를 본질적인 동작으로부터 다른 데로 돌리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259p]
- 그러나 그는 무대의 공감을 암시하는 이런 기하학적인 방법 이외에도 그와 동일하게 중요한 새로운 방법, 즉 빛의 처리를 더해주고 있다. 중세 미술가들은 거의 빛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들이 그린 평면적인 인물상에는 그림자가 없었다. 마사초도 이런 점에서는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그림에 나오는 둥글고 입체적인 인물상들은 명암으로 힘있게 형상화되어 있다.(p. 228, 도판 149). 그러나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만큼 분명하게 이 새로운 수단이 갖는 엄청난 가능성을 이해한 사람은 없었다. 이 그림에서 빛은 인물들의 형상을 이루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깊이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원근법과 대등한 중요성을 지닌다. 앞에 서 잇는 군인은 밝게 비추어진 천막 입구를 배경으로 어두운 실루엣으로 처리되었다. 그래서 보는 사람은 이 군인들과 천사로부터 발산되는 빛을 받고 앉아 있는 호위병과의 거리를 짐작할 수 있다. 천막의 둥근 형태와 그 내부의 텅빈 공간은 단축법과 원근법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빛을 수단으로 해서 느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259~260p]
- 처음에는 의기양양한 승리감에 도취되어 원근법의 발견과 자연의 탐구가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술이란 과학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미술가의 수단이나 그의 기술적인 방법은 발전할 수 있으나 미술 그 자체는 과학이 발전하는 그러한 방식으로 발전한다고 말할 수 없다. 어떤 한 방향으로의 새로운 발견은 다른 방향에서의 새로운 어려움을 낳는다. 중세의 화가들은 정확한 소묘의 규칙은 알지 못했으나 바로 이러한 결함이 그들로 하여금 완벽한 구성을 창출하기 위해서 그들이 좋아하는 방식대로 화면 전체에 인물을 배치할 수 있도록 허용했던 것이다. -중략- 현실 세계를 거울과 같이 반영하는 그림을 그리는 새로운 관념이 채택되자마자 인물들을 어덯게 배치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그 이전처럼 용이하지 않았다. 실제로 인물들은 그 자신들이 그림을 위해 조화롭게 모이거나 하지는 않으며, 또 단조로운 색조의 배경에서는 뚜렷하게 부각되지도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미술가들의 이 새로운 능력은 전체를 보기 좋고 만족스러운 장면으로 그려낸다는 미술가가 지닌 가장 귀중한 천부의 재능을 망칠 수도 있었다. [260p]
- 이들에게 존경하는 그리스와 로마 인들의 신화는 유쾌하고 아름다운 동화 이상의 것이었다. 그들은 고대 사람들의 탁월한 지혜에 대해 대단한 확신을 가졌으므로 이 고전기의 전설들이 어떤 심오하고 신비스러운 진리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263p]
- 폴라이우올로가 실패한 바로 그것을 보티첼리는 성공적으로 해냈다. 그의 그림은 사실상 완벽하게 조화된 화면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을 보고 폴라이우올로는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즉 보티첼리는 그가 보존하려고 그렇게 노력했던 성과의 일부를 포기함으로써 그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고. 사실 보티첼리의 인물들은 보다 덜 단단해보인다. 그의 인물들은 폴라이우올로나 마사초의 인물들처럼 정확하게 그려지지 않았다.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우아한 운동감이나 선율적인 선들은 기베르티나 프라 안젤리코의 고딕 전통, 또는 앞에서 우리가 부드러운 육체의 곡선과 섬세한 옷주름의 흐름을 언급한 바 있는 시모네 마르티니의<수태 고지>(p. 213, 도판 141)나 프랑스 금세공사의 작품(p. 210, 도판 139)과 같은 14세기의 미술을 상기시켜준다. 보티첼리의 비너스는 너무나 아름답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의 목이 부자연스럽게 길다거나 어깨가 가파르게 처져 있다거나 또는 왼쪽 팔이 다소 어색하게 몸에 붙어 있다든가 하는 점은 그다지 주목하지 않게 된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즉 우아한 윤곽선을 만들어내기 위해 자연에 구애받지 않은 보티첼리의 이러한 자유로운 표현은 하늘로부터 내려진 선물로서 우리 해변에 떠밀려온 무한히 부드럽고 섬세한 존재에 대한 인상을 한층 드높여주고 있기 때문에, 화면의 아름다움과 조화에 보탬이 되고 있다고. [264p]
- 삶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보다 풍부하게 해주는 미술의 이와 같은 기능이 전적으로 잊혀졌던 시대는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탈리아 르네상스라고 부르는 시대가 도래하면 그 기능은 점점 더 전면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 [264~267p]
14 전통과 혁신 Ⅱ
15세기 : 북유럽
- 도판 174의 루앙의 법원 건축물은 ‘플랑부아양(Flamboyant ; 타오르는 불꽃 모양)양식’ 이라고도 불리워지는 프랑스 고딕 양식의 최후의 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설계자가 장식이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지는 고려하지 않은 채 변화무쌍한 장식물로 건물 전체를 뒤덮어놓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런 건물들은 무한히 풍요롭고 새로운 창안으로 가득 찬 동화의 세계와 같은 요소가 넘쳐 흐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건축물들에서 설계자들이 고딕 건축의 마지막 가능성까지 다 소진해버렸으므로 그 반작용이 조만간 뒤이어 일어날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이탈리아의 직접적인 영향이 없었어도 북유럽의 건축가들이 보다 더 큰 단순미를 갖는 새로운 양식을 발전시켰으리라는 징후가 보이기도 한다.
특히 영국에서 소위 ‘수직 양식(Perpendicular style)'으로 알려진 고딕 양식의 마지막 단계에서 이런 경향들이 생겨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수직 양식이란 명칭은 장식에 있어서 그 이전 시대의 장식적인 트레이서리의 곡선과 아치보다 직선을더 빈번하게 사용한 14세기 말과 15세기 초 영국 건축의 특징을 나타내기 위해서 만들어진 말이다. [269p]
- 러스킨(Ruskin)과 같은 19세기 낭만주의 비평가들과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의 상상력을 맨 처음 사로잡았던 그림들은 로흐너와 프라 안젤리코의 작품과 비슷한 그림들이었다. 그들은 이런 그림에서 순박한 신앙심과 어린이와 같은 꾸밈없는 마음씨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어떤 점에서 그들이 옳았다. 이 작품들은 아마도 아주 매혹적으로 보여질텐데, 그림에 있어서 현실적인 공간과 정확한 소묘에 다소 익숙해져 있는 우리로서는 그 작품들이 중세의 정신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전의 중세 거장들의 작품보다 이해하기가 쉽기 때문일 것이다. [273p]
- 그러나 이 두 ‘유파’ 즉 이탈리아 미술과 북유럽 미술이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발전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당시에 프랑스의 선진적인 화가의 한 사람인 장 푸케(Jean Fouquet : 1420?-80?)가 젊은 시절에 이탈리아를 방문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1447년에 로마에 가서 교황을 그리기도 했다. 도판 178은 그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지 몇 년 뒤에 그린 것으로 생각되는 기증자의 초상이다.<윌튼 두폭화>(pp. 216-7, 도판 143)에서와 같이 성인은 무릎을 꿇고 앉아서 기도를 올리는 기증자를 보호하고 있다. -중략-<윌튼 두폭화>의 성인들과 기증자는 마치 종이에서 오려내어 그림에 붙인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장 푸케의 그림에 나오는 인물들은 마치 조각처럼 다듬어진 것같이 보인다.<윌튼 두폭화>에서는 명암을 찾아볼 수 없었다. 푸케는 거의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했던 것처럼(p. 261, 도판 170) 빛을 사용하고 있다. 이 조용하고 조각과 같은 인물들이 현실적인 공간에 서 있는 방식은 푸케가 이탈리아의 작품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도 그의 그림 방식은 이탈리아 화가들의 방식과는 다르다. 모피, 돌, 옷감, 대리석 등 사물의 질감과 표면에 그가 갖는 관심을 보면 그의 미술이 dis 반 에이크의 북유럽 전통의 영향 아래 있었음을 보여준다. [274p]
- 이전의 미술가들에게 있어 명확한 구도 속에 인물들을 배치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이었던가! 그들은 반 데르 후스에게 기대되는 단축법과 3차원적 공간 표현의 문제들과 씨름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반 데르 후스의 그림에서는 화가가 우리의 눈 앞에 현실의 장면을 떠올려 주기 위해, 그러면서도 화면의 어떤 부분도 텅비거나 무의미하게 내버려두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하였는지 느낄 수 있다. [279p]
- 그림을 인쇄하는이 간단한 기술을 목판화술(木版畵, woodcut)이라고 한다. 그것은 대단히 값싼 방법이었으므로 곧 널리 퍼지게 되었다. 목판화를 여러 장 함께 사용하여 일련의 그림들을 인쇄하여 책으로 묶기도 하였는데 이렇게 전부 목판화로 찍어낸 책을 목판인쇄본(block-books)이라고 불렀다. 목판화와 목판 인쇄본들이 곧 일반 시장에서 판매되었다. 트럼프와 같은 놀이 카드도 이같이 제작되었고 신앙 수련을 위해서 유머러스한 그림과 판화들도 만들어지게 되었다. [282p]
- 15세기의 가장 위대하고 유명한 동판화가는 오늘날 알사스 지방인 라인 강 상류의 콜마르(Colmar)에 살았던 마르틴 숀가우어(Martin Schonguer : 1453?-91)였다. 도판 185는 숀가우어의 동판화<거룩한 밤>이다. 이 장면은 네덜란드 대가들의 기품을 대변해주고 있다. 네덜란드 대가들과 마찬가지로 숀가우어는 그 장면에 있는 모든 작은 일상적 세부를 표현하고자 하였으며 그가 표현하는 사물의 재질과 표면을 우리들에게 느끼게 해주려고 노력하였다. 붓이나 물감의 도움 없이, 그리고 유화라는 매체를 사용하지 않고 그렇게 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은 기적에 가깝다. 확대경을 통해서 그의 동판화를 보고 연구하면 깨진 돌과 벽돌들, 돌 틈바구니에 핀 꽃, 아치를 타고 기어 올라가는 담쟁이 넝쿨, 동물들의 털과 목동들의 머리카락과 덥수룩한 수염 등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감탄해야 할 것은 그의 끈기와 솜씨만이 아니다. 우리는 뷰린을 가지고 하는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는 채로 이 크리스마스의 이야기를 즐길 수 있다. -중략- 이 주제들은 모두 기독교 예술의 전통에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으나 이들을 그림 위에 결합하고 배치하는 방식은 숀가우어 자신의 것이다. 판화와 제단화의 구성의 문제는 어떤 점에서 서로 대단히 유사하다. 두 경우 모두 공간의 암시와 현실의 충실한 모방이 구성의 균형을 깨트리게 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이 문제를 염두에 둔다면 숀가우어의 업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84p]
- 이탈리아에는 만테냐와 보티첼리 풍의 동판화가 제작되었고 네덜란드와 프랑스에는 다른 유파와 동판화들이 제작되었다. 판화는 유럽의 예술가들에게 서로 다른 유파들의 미술 개념을 배울 수 있게 해준 또 하나의 새로운 수단이 되었다. 그 당시에는 다른 미술가로부터 아이디어와 구성을 베껴오는 것을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많은 군소 대가들은 동판화를 그들의 아이디어와 구성을 빌려오는 견본책으로 이용했다. 마치 인쇄술의 발명이 사상의 교환을 재촉하여 종교 개혁이 일어났듯이 그림의 인쇄는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승리를 보장해주었다. 그것은 북유럽의 중세 미술에 종지부를 찍게 만든 여러 가지 원동력 중의 하나였으며 오직 위대한 거장들만이 극복할 수 있을 미술의 위기를 이들 나라에 초래하게 만든 요인 중의 하나였다. [285p]
15 조화의 달성
16세기 초 : 토스카나와 로마
- 건물을 아름답게 만들고 영원히 남을 훌륭한 작품을 창조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미술가를 확보하고자 경쟁을 벌였던 이들 도시가 가졌던 자부심은 거장들로 하여금 서로 남보다 뛰어나고자 노력하게금 자극을 주었다. .이탈리아에 비해 도시들이 누렸던 자유도 제한되었고 지역적 자부심도 강하지 못했던 북유럽의 봉건 영주의 나라에서는 이런 자극이 이탈리아만큼은 없었다. 그리하여 이탈리아에는 미술가들이 원근법의 법칙을 연구하기 위해 수학으로 관심을 돌리고 인체 구조를 탐구하기 위해 해부학에 관심을 갖는 위대한 발견의 시대가 도래했다. 이러한 발견들을 통해서 미술가들의 시야는 넓어졌다. 더 이상 그들은 신발이나 찬장이나 그림 등을 가리지 않고 주문만 받으면 즉각 수행할 차비를 갖추고 있는 그런 장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연의 신비를 탐색하지 않고서는, 또 우주에 감추어진 법칙을 밝히지 않고서는 명성과 영광을 얻을 수 없는 독립적인 거장들이었다. 이러한 야심을 가지고 있는 앞서가는 예술가들이 그들의 사회적 지위에 불만을 느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의 사회적인 지위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수준이었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속물들인 귀족들은 머리를 가지고 일하는 시인은 우대하면서도 손으로 일하는 미술가는 결코 대접하지 않았다. 이것은 또한 미술가들을 분발시킨 또 하나의 도전이자 자극이었다. 그들은 번창하는 공방의 존경하는 우두머리로서만이 아니라 독특하고 귀중한 재능을 가진 인간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위대한 업적을 성취하는 방향으로 그들 자신을 독려했다. 그것은 당장 성공할 수 없는 어려운 싸움이었다. 사회에 만연된 속물 근성과 편견은 깨트리기 힘든 단단한 벽이었다. 라틴 어를 말하는 학자나 경우에 따라 능숙한 화술을 구사할 줄 아는 학자는 기꺼이 그들의 식탁에 초청하면서도 화가나 조각가에게 이와 같은 특전을 베푸는데는 주저하였다. 그러나 미술가들이 이러한 편견을 타파할 수 있게 도와준 것은 특권을 얻고자 안달이 난 군소의 궁정(宮廷)들이 많이 있었다. 훌륭한 건물을 짓는다거나 화려한 무덤을 조성하도록 주문한다거나, 대규모 프레스코의 제작을 의뢰하거나 유명한 교회의 높은 제단에 그림을 봉헌하는 일 등은 그 사람의 이름을 영원히 남게 하고 이승에서의 그의 지위에 어울리는 기념물을 확보하는 확실한 방법으로 간주되었다. 가장 유명한 거장들을 유치하기 위해서 많은 도시들이 경쟁했으므로 거장들은 그들 나름대로 조건을 제시할 수 잇었다. 이전에는 미술가들에게 호의를 베풀던 사람은 군주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시대가 거의 지나가고 그 역할이 거꾸로 바뀌게 되었다. 미술가가 주문을 수락함으로써 부유한 왕자나 군주에게 호의를 베풀게 되었던 것이다. 미술가들은 마음대로 주문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또한 그들의 작품을 고용주의 변덕과 기분에 맞추어 만들 필요가 없게 되었다. 장기적으로 볼 때 이 새로운 힘이 미술을 위해서 순수한 축복이 될 것인지 아닌지는 지금 결정내리기 어렵다. 그러나 여하간에 처음에는 이것이 엄청난 양의 억눌려 있던 에너지를 방출하는 해방의 효과가 되었다. 마침내 미술가는자유인이 된 것이다. [287~288p]
- 건축 분야만큼 후원자의 요구와 미술가의 이상이 극명하게 갈등을 일으킨 분야도 없었다. 이 학식 높은 거장들이 진정으로 하고 싶어한 일은 신전과 개선문을 짓는 것이었지만 후원자들은 그들에게 도시의 궁궐과 교회의 건축을 요구했던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알베르티와 같은 미술가들이 이 본질적인 갈등 속에서 어떠한 절충안을 내놓았는지(p. 250, 도판 163) 살펴보았다. 알베르티는 고대의 ‘기둥 양식’을 근대 도시의 궁전에 결합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이 당시 르네상스 건축가가 진정으로 열망했던 것은 건물의 쓰임새와 상관 없이 비례의 아름다움과 내부의 공간성 및 그 조화 자체가 만들어내는 장대함만을 위해 건물을 설계하는 것이었다. [288p]
- 브라만테의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 계획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대담하고 진취적인 기상은 그토록 많은 위대한 거장들을 배출한 1500년경을 전후로 하는 르네상스 전성기의 특징이다. 이들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없었으므로 분명히 불가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해낼 때가 있었다. [291p]
- 앞으로 우리는 위대한 미술가들이 거의 모두 이처럼 단단하게 확립된 전통 속에서 성장했음을 알게 될텐데 이러한 거장들 뒤에는 그 기술의 대부분을 습득할 수 있게 해준 군소 대가들의 공방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291p]
-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단순히 재주가 있는 소년이 아니었다. 그의 강력한 정신력은 범인들에게 항상 경의와 감탄의 대상이 되고도 남을 천재였다. 우리는 그의 제자들과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보존해둔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그의 스케치북과 노트북을 보면서 그의 정신의 활동 범위와 그 엄청난 생산성에 놀라게 된다. 그 속에는 그가 쓴 글과 소묘, 그가 읽은 책에서 발췌한 글들, 쓰려고 했던 초고들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어떻게 한 인간이 각기 다른 연구 분야에서 이토록 탁월할 수가 있으며 또 거의 대부분의 분야에서 중요한 공헌을 할 수 있었는지 점점 더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아마도 그 이유의 하나는 레오나르도가 교육받은 학자가 아니라 피렌체의 한 미술가였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는 그의 선배들이 했던 것처럼 미술가의 임무는 더 철저하게, 그리고 더 열정적으로 더 정확하게 눈에 보이는 세계를 탐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학자들의 책에서 얻은 지식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셰익스피어와 마찬가지로 ‘라틴어는 거의 모르고 그리스 어는 전혀 몰랐다.’ 대학의 학자들이 존경받는 고대 저술가들의 권위에 의지하고 있을 때에 화가인 레오나르도는 자기가 읽은 것을 자기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문제에 부딪치게 되면 권위자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언제나 그것을 실험으로 해결하였다. 그는 자연에 대해 깊은 호기심을 느꼈고 창의적 정신으로 이 모든 것에 도전했다. 30구 이상의 시체를 해부해서 인체의 비밀을 탐구하기도 했으며(도판 190) 자궁 속에서 태아가 성장하는 신비를 조사한 최초의 사람이기도 했다. 또한 파도와 조류의 법칙을 연구했으며, 곤충들과 새들이 나는 것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데 수년을 보내고 언젠가는 현실화되리라고 확신한 비행 기구를 고안하기도 했다. 바위와 구름의 형태, 멀리 있는 물체의 색채에 미치는 대기의 영향, 초목이 성장하는 것을 지배하는 법칙들, 음(音)의 조화 등이 그의 끊임없는 연구의 대상이었고 이것이 그의 예술의 기초가 되었다. [293~294p]
- 이 그림을 처음 본 사람들이 이 모든 극적인 움직임을 지배하고 잇는 완벽한 에술을 이해하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렸을까?[297~298p]
- 우리는 이 장면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알지 못해도 여전히 이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화면 구성을 즐길 수 있다. [298p]
- 레오나르도는 받침대 위에 올라가 그가 그려놓은 것을 유심히 바라보며 붓 한번 대지 않고 팔짱을 끼고 하루 종일 서 있곤 했었다고 한다. 작품이 이렇게 파손된 상태 속에서도 그가 우리들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색의 결과이다. [298p]
- 레오나르도의<모나 리자>와 같이 지나치게 유명한 명성은 그 예술 작품을 위해서 반드시 좋다고만 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그림 엽서나 심지어 광고에서조차도 모나 리자를 보아왔으므로 그것을 실제 화가가 살과 피를 가진 실존 인물을 그린 그림으로 참신한 눈을 가지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이 그림에 관해서 아는 것이나 안다고 믿었던 것을 다 잊어버리고 이 그림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새롭게 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닫도 우리를 먼저 감탄하게 하는 것은 리자라는 인물이 놀라울 정도로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녀가 실제로 우리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그녀의 마음 속에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같이 보이기도 한다.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우리의 눈 앞에서 변하여 볼 때마다 달라 보이는 것 같다. 이 그림은 도판으로도 그 이상한 효과를 경험할 수 있지만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원화 앞에 서서 보면 거의 불가사의하다. 우리를 조롱하는 것같이 보이는가 하면 그녀의 미소 속에 어떤 슬픔이 깃들어 있는 것같이 보이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상당히 신비스럽게 들리겠지만 위대한 예술 작품 중에는 그런 효과를 내는 것들이 종종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오나르도는 어떻게, 그리고 어떤 수단으로 이런 효과를 낼 수 있는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자연의 위대한 관찰자인 레오나르도는 그 이전의 어느 누구보다도 사람들의 눈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연을 자연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미술가들에게 또 하나의 새로운 문제, 즉 정확한 소묘를 조화로운 구성에 결합하는 것만큼이나 미묘한 문제를 남겨 놓았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사초의 뒤를 밟아간 이탈리아의 ‘콰트로첸토(1400년대)’ 거장들의 예술 작품에는 하나같이 인물들이 어딘가 딱닥하고 거칠어서 나무로 만든 것같이 보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것이 비단 화가의 인내심이 부족하다거나 지식이 모자라서 생겨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자연을 모방하는 데 있어서 반 에이크(p. 241, 도판 158)보다 더 참을성이 많은 사람도 없으리라. 또한 만테냐(p. 258, 도판 169)보다 정확한 소묘법과 원근법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는 사람도 없으리라. 그러나 그들이 재현한 자연은 장대하고 인상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인물은 살아 있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조각상들같이 보인다. 아마도 그 이유는 한 인물은 선은 선대로, 세부는 세부대로 더욱 의도적으로 잘 모사하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더 그 인물은 지금까지 실제로 움직이고 숨쉬었다는 것을 생생하게 그려낼 수 없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마치 화가가 갑자기 마법을 걸어서 그들을<잠자는 숲속의 미녀>라는 동화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영원히 돌로 굳어 버리게 만든 것과 같다. 미술가들은 이런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해 보았다. 예를 들면, 보티첼리(p. 265, 도판 172)와 같은 경우 인물들의 윤곽이 덜 딱딱하게 부이기 위해 물결치는 머리카락과 펄럭이는 의상을 강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을 발견한 사람은 레오나르도뿐이었다. 화가는 보는 사람에게 무엇인가 상상할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 가령 윤곽을 그처럼 확실하게 그리지 않고 형태를 마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것같이 약간 희미하게 남겨두면 이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인상을 피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레오나르도의 창안으로, 이탈리아 어로 ‘스푸마토(sfumato)'라고 한다. 이것은 하나의 형태가 다른 형태 속으로 뒤섞여 들어가게 만들어 무엇인가 상상할 여지를 남겨놓는 희미한 윤곽선과 부드러운 색채를 가리킨다. [300p]
- 얼굴을 그리거나 낙서를 해본 사람이라면 우리가 표정이라고 부르는 것이 주로 두 가지 요소, 즉 입 가장자리와 눈 가장자리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300~302p]
-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보다 스물세 살 아래였지만 그가 죽은 뒤로 45년을 더 살았다. 그의 긴 생애 동안에 그는 미술가의 지위가 완전히 바뀌는 것을 목격했다. [303p]
- 그러나 인간을 자연에 존재하는 수많은 매혹적인 수수께끼 중의 하나로 본 레오나르도와는 달리 미켈란젤로는 이 하나의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겠다는 일념으로 분투노력하였다. 그의 집중력과 기억력은 대단히 탁월했으므로 얼마 안가서 그리기 어렵다고 생각되는 자세나 동작은 하나도 없게 되었다. 사실상 어려움은 단지 그의 관심을 자극할 뿐이었다.[304p]
- 공포와 분노로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은 그는 로마를 떠나 피렌체로 가서 교황에게 만약 교황이 자신을 원한다면 몸소 찾아오라는 무례한 편지를 보냈다.
이 사건에서 주목할 점은 교황이 화를 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피렌체의 시장을 통해서 이 젊은 조각가가 로마로 돌아오도록 설득하는 정식 협상을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 사건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은 이 젊은 미술가의 거취나 계획이 국가의 미묘한 문제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사실에 의견의 일치를 본 것 같다. 피렌체 시민들은 심지어 미켈란젤로에게 계속해서 은신처를 제공해준 이유로 교황의 노여움을 사게 될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피렌체 시장은 미켈란젤로에게 율리우스 2세에게 돌아가 봉사하라고 설득하며 그에게 추천서까지 한 통 써주었다. 그 추천서에는 그의 예술이 이탈리아 전체, 아니 전 세계에서 비교될만한 것이 없으며 만약 그를 친절하게 대해주기만 한다면 ‘그는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 만한 작품을 창조할 것이다’라는 말이 들어 있었다. [305p]
- 1980년대에 거기에 쌓은 그을음과 먼지의 두터운 층을 제거한 이래로 그 강렬하고 밝은 색채가 드러났는데, 그토록 좁고도 적은 수의 창문을 지닌 이러한 예배당에서 그 천장화가 보일 수 있게 하려면 당연히 밝게 채색해야 했을 것이다.[308p]
- 율리우스 2세가 죽자 다른 교황이 그 당시의 가장 유명한 미술가인 그의 봉사를 요구해왔고 또 그 뒤를 이은 역대 교황들도 이전의 교황보다 더 열렬히 자신의 이름을 미켈란젤로의 이름과 연결시키고자 열망하였다. 그러나 군주들과 교황들이 이 늙어가는 거장의 봉사를 얻기 위해서 경쟁을 하고 있는 동안 그는 점점 더 깊숙이 내면 속으로 들어갔으며 보다 더 철저하고 엄격한 기준으로 자신을 채찍질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그가 쓴 시들은 자신의 예술이 죄스러운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그의 편지들을 보면 그가 세상으로부터 존경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점점 더 무정하고 까다로운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존경을 받기도 하였지만 그의 성질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두려움을 사기도 했다. 그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가차없이 대했다. 그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퍽 의식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미술가의 지위는 그가 젊은 시절에 기억하고 있던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312~313p]
- 우리는 그의 작품을 너무 많이 보게 되면 그의 창안에 식상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그림들은 미술관에 나란히 진열하기 위해 그려진 것은 아니었다. 작품 하나만을 따로 떼어 놓고 보면 그의 작품들 중 뛰어난 몇몇 그림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이 세계보다 더 평화롭고 조화로운 다른 세계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315p]
- 다른 젊은 미술가라면 이 거장들의 명성에 압도되어 기가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라파엘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배우기로 결심을 했다. 그는 자신이 어떤 점에서는 불리한 입장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엇다. 그는 레오나르도와 같은 광범위한 지식을 갖지 못했고 또 미켈란젤로와 같은 정력도 없었다. 그러나 이 두 천재들이 보통 사람들과는 어울리기가 어려웠고, 그들에게 또한 예측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존재였지만 라파엘로는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영향력 있는 후원자들의 마음에 들 수 있었다. 더욱이 그는 이 선배 거장들을 따라잡을 때까지 쉬지 않고 작업할 수 있었다. [315p]
- 라파엘로의 그림에는 당대의 사람들과 후대의 사람들이 경탄해 마지 않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그가 그린 인물들의 완전한 아름다움이다. 그가<요정 갈라테아>를 완성했을 때 어떤 귀족이 라파엘로에게 도대체 그렇게 아름다운 모델을 어디서 찾아냈느냐고 물었다. 이 질문에 그는 어떤 특정한 모델을 모사한 것이 아니라 그가 그의 마음 속에 가지고 있던 ‘어떤 생각’을 따랐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라파엘로는 그의 스승 페루지노와 마찬가지로 콰트로첸토의 그처럼 많은 미술가들의 야망이었던 자연의 충실한 묘사를 어느 정도 포기했던 것이다. 그는 나름대로 상상한 조화로운 아름다움의 전형을 의도적으로 사용했다. 프락시텔레스(p. 102, 도판 62)의 시대를 돌이켜보면 우리가 ‘이상적인’ 아름다움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떻게 도식화된 형태에서 천천히 자연과 비슷하게 되어가면서 생겨나게 되었는지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 과정이 반전되었다. 미술가들은 고전 시대의 조각 작품들을 보고 자신의 머리 속에서 형성된 아름다움의 이념에 따라 자연을 수정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모델을 ‘이상화(理想化)’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그 자체로 위험을 안고 있었다. 만일 미술가들이 의도적으로 자연을 ‘개량’하려고 한다면 그의 작품은 틀에 박히거나 맥빠진 것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한번 라파엘로의 그림을 살펴보면 그가 어쨌든 생명력과 성실성을 잃지 않고도 이상화시킬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갈라테아의 사랑스러움에는 도식적이거나 계산된 곳은 하나도 없다. [319~320p]
16 빛과 색체
16세기 초 : 베네치아와 북부 이탈리아
- 피렌체의 위대한 개혁자들은 색채보다 소묘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그림이 색채면에서 아름답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러나 한 그림 속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과 형태들을 하나의 통일된 구성으로 결합시키는 데 색채를 주된 수단의 하나로 생각하고 있었던 화가는 매우 드물었다. 그들은 채색하기 전에 원근법이나 구도로써 그러한 통일된 구성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베네치아 화가들은 색채를 그림 위에 덧붙이는 부가적인 장식으로 여기지는 않았던 것 같다. 베네치아에 있는 산 차카리아의 작은 교회에 가서 위대한 베네치아 화가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 1431?-1516)가 그의 말년기인 1505년에 제단에 그린 그림(도판 208) 앞에 서보면 색채에 대한 그의 접근방법이 매우 달랐다는 것을 당장 알아볼 수 있다. 그 그림이 특별히 밝거나 화려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림이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도 전에 부드럽고 다채로운 색채들이 우리에게 강렬한 인상을 준다. [326p]
- 그러나 이 그림이 미술사상 가장 훌륭한 작품의 하나로 손꼽히는 것은 그 내용 때문이 아니다. 이것은 이 작은 도판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이것으로도 어렴풋이 그의 혁명적 업적의 편린을 짐작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인물들이 특별히 세심하게 그려진 것도 아니고 구도에서도 별다른 기교가 엿보이진 않지만 이 그림은 분명히 화면 전체에 스며있는 빛과 공기에 의해서 하나의 전체로 융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뇌우의 섬뜩한 빛이 그림 전체를 지배한다. 또한 이 그림이 그 시초일 듯 싶은데, 그림에 등장하는 배우들이 움직이고 있는 무대가 되는 풍경이 이제는 단순한 배경으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풍경은 그 나름대로 그림의 진정한 주제가 되고 있다. 우리는 인물들로부터 이 작은 패널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는 풍경을 번갈아 살펴보며 조르조네가 그의 선배나 동시대 화가들과는 달리 사물과 인물을 나중에 공간 속에 배치한 것이 아니라 땅, 나무, 빛, 공기, 구름 등의 자연과 인간을 그들의 도시나 다리들과 더불어 모두 하나로 생각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거의 원근법의 창안과 맞먹는 새로운 영역을 향한 하나의 발돋움이었다. 이제부터 회화는 소묘에 채색을 더한 것 이상의 의미가 되었다. 회화는 그 자체의 비밀스런 법칙과 방안을 갖는 하나의 예술이 되었다. [329~331p]
- 그들은 처음에는 그러한 그림이 한쪽으로 치우쳐 균형을 잃게 됳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였다. 이 예기치 않은 구도는 전체적인 조화를 깨트림 없이 오히려 그림을 생기있고 활기차게 만들어주었다. 그것은 티치아노가 빛과 공기와 색채로써 이 장면을 통일시켰기에 가능하였다. [332p]
- 권력자들이 이 거장에게 초상화를 그려받는 영광을 얻기 위해 서로 경쟁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티치아노가 실물보다 특별히 더 좋게 그리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예술을 통해서 영원히 살 수 있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334p]
- 첫눈에는 이와 같은 배치가 기교가 없으며 우연한 것같이 보일 것이다. 왼쪽의 복잡한 장면에 대응하는 군상(群像)들이 오른쪽에는 없으므로 균형이 잡혀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성모와 아기 예수에게 빛을 던져 강조함으로써 전체 그림은 균형을 이루게 된다. 코레조는 색과 빛을 사용하여 형태에 균형을 주고, 보는 사람의 시선을 일정한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발견을 티치아노보다 더욱 잘 활용하였다. 아기 예수가 탄생한 장면으로 목동과 함께 달려가 요한 복음서가 전하는 어둠속을 비추는 ‘빛’의 기적을 보게 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인 것이다. [337p]
17 새로운 지식의 확산
16세기 초 : 독일과 네덜란드
- 뒤러는 그 당시의 가장 유명한 동판화가인 마르틴 숀가우어(Martin Schongauer, pp. 283-4)의 공방을 방문하는 것이 그의 오랜 생각이었으나 그가 콜마르에 도착했을 때는 그 거장이 사망한 지 수개월이 지난 후였다. 그래도 그는 그 공방의 운영을 맡은 숀가우어의 형제들과 상당한 기간을 함께 지낸 뒤 당시 학문과 서적 교역의 중심지였던 스위스 바젤로 갔다. 거기에서 그는 목판화 삽화를 그리다가 다시 여행을 계속하여 이번에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북부 이탈리아로 갔다. 여행중에 그는 사물을 주의 깊게 관찰하였고 알프스 계곡의 아름다운 풍경을 수채화로 옮기기도 하고 만테냐(pp. 256-9)의 그림을 연구하기도 했다. 결혼을 하고 공방을 열기 위해서 다시 뉘른베르크로 돌아왔을 때 그는 북유럽의 미술가가 남유럽에서 배울 수 있는 모든 기법적인 성과들은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하고 있었다. 얼마 안가서 그는 미술가라는 어려운 직업에 요구되는 단순한 기술적인 지식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으며 또 위대한 미술가가 될 수 있는 강렬한 감정과 상상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여 주었다. 그의 초기 걸작 가운데 하나는 성 요한의 계시록을 묘사한 이련의 대형 목판화였다. 그것은 즉각 성공을 거두었다. 최후 심판날의 공포와 그에 앞선 여러 가지 징후와 불길한 조짐들의 무시무시한 광경이 이처럼 힘있고 강력하게 시각화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뒤러의 상상력과 대중들의 관심은 중세 말엽 독일에서 무르익어 결국 루터의 종교 개혁으로 폭발한, 교회 제도에 대한 일반적인 불신과 불만을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뒤러와 그의 작품을 보는 당시의 대중들에게는 이 요한 계시록의 무시무시한 환영들이 대단한 화젯거리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예언들이 그들의 생전에 현실로 이루어질 것으로 믿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343~345p]
- 뒤러는 자연을 모사하는 완전한 기술을 얻으려고 노력한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 보다는 유화와 동판화와 목판화로 삽화를 그려야 했던 성경의 이야기를 보다 더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스케치를 그리게 했던 그러한 인내력은 그를 타고난 동판화가로 만들어주었다. 그는 동판화 속에 하나의 진정한 소우주를 만들어내기 위해 세부에 세부를 더해나가는 치밀한 작업에 한번도 진력을 내는 일이 없었다. [346p]
- 라파엘로는 이러한 문제에 당면했을 때 마음 속에서 떠오르는 아름다움의 ‘어떤 이념’에 비추어 답을 구했는데(p. 320), 그 이념은 그가 고전적인 조각과 아름다운 모델들로 수년 간 연구하는 동안에 익힌 것들이었다. 뒤러에게는 이것이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공부할 기회가 많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그를 지도해줄 확고한 전통이나 확실한 직관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무엇이 인체의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인가를 가르쳐줄 수 있는 확실한 법칙을 찾아나서게 되었다. 그는 인체의 비율에 관한 고전 시대의 저술을 통해 그러한 법칙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대인들의 표현과 비례 측정은 다소 모호했으나 뒤러는 그러한 난제 때문에 단념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말한 것처럼 그는 선배들(미술의 규칙에 관한 분명한 지식 없이도 활력이 넘치는 작품들을 만들어냈던 선배들)의 모호한 관행에 가르칠 수 있는 적절한 근거를 부여하려고 의도했다. 여러 가지 비례의 법칙에 대한 뒤러의 실험을 살펴보면 매우 재미있다. 그는 인체의 올바른 균형과 조화를 찾기 위해서 인체를 과도하게 길게, 또는 넓게 그림으로써 인간의 체격을 일부러 왜곡시켰다. 평생 동안 몰두했던 이러한 연구의 첫 번째 결과 가운데 아담과 이브를 그린 동판화가 있다. [347~349p]
- 뒤러는 그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내게는 이탈리아 사람들 중에 많은 친구들이 있는데 그들은 나에게 이탈리아 화가들과는 함께 먹거나 마시지 말라는 충고를 한다네. 대부분의 이탈리아 화가들은 나의 적이라 할 수 있지. 그들은 교회건 어디건 내 작품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그것들을 모사하고는 내 작품이 고전적인 양식으로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좋지 않다고 비난을 한다네. 그러나 조반니 벨리니는 많은 귀족들 앞에서 나를 높이 평가해주었네. 그는 내가 그린 작품을 가지고 싶다고 직접 나를 찾아와서 무엇인가 하나 그려달라고 부탁했네. 그것도 보수를 두둑히 준다면서.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말하기를 그는 대단히 신심이 깊은 사람이라고 하네.그것이 나로 하여금 그 사람을 좋아하게 만들었다네. 그는 대단히 나이가 많은 분이지만 그림에 있어서는 아직 최고일세. [349~350p]
- 그러나 뒤러의 그 후의 생애는 그렇지만도 않았다. 사실 그도 다른 장인들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뉘른베르크와 프랑크푸르트의 부유한 시민들과 흥정도 하고 시비도 해야 했다. 그는 그들에게 최고 품질의 물감을 상요할 것과 또 그것을 여러 겹으로 칠할 것을 약속해야 했다. 그러나 그의 명성은 점점 퍼져나가게 되었으며 자신을 영광되게 하는 수단으로서 미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던 막시밀리엥 황제는 여러 야심적인 계획에 뒤러를 고용했다. 그의 나이 50에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때 그는 실로 제왕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그 자신도 대단히 감동되어 안트웨르펜의 화가들이 그들의 조합 회관에서 큰 잔치를 베풀어 그를 어떠헥 대접하였는지를 묘사하면서 ‘내가 식탁으로 안내되었을 때 사람들은 마치 위대한 군주를 맞이하듯이 양 옆으로 모두 일어섰는데 그들 중에는 지체가 높은 사람들도 있었으나 모두들 가장 겸손한 태도로 머리를 숙였다’라고 쓰고 있다. 북유럽의 나라들에서도 위대한 미술가들은 마침내 손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멸시하던 속물 근성을 타파하게 된 것이다. [350p]
- 왜냐하면 마티스라는 거장에 관해서도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뒤러는 그의 습관, 신념, 취향과 표현의 매너리즘까지도 우리에게 친숙하게 알려진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인 양 우리들 앞에 서 있지만 그뤼네발트는 우리에게 셰익스피어만큼 신비스러운 존재이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우리가 뒤러를 그처럼 잘 알고 있는 이유는 바로 그가 자신을 자기 나라의 미술을 개혁하고 쇄신한 사람으로 자처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가 무엇을 하고 있으며 왜 그것을 했는지를 깊이 생각했으며, 여행과 연구에 관한 기록을 남겼고 그의 세대를 가르치기 위해서 책을 저술했다. 반면에, ‘그뤼네발트’의 작품이라고 알려진 걸작품들을 그린 화가는 그 자신을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보았다는 것을 시사해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350~351p]
- 그뤼네발트의 작품은 이렇게 하여 우리들에게 다시 한번 예술가는 ‘진보적’이 아니더라도 위대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진정 예술의 위대성은 새로운 발견에 있지 않다. 그뤼네발트는 자기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될 때에는 언제나 d이 새로운 발견들을 채용해서 그가 이 새로운 기법들을 충분히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예수의 고통받고 죽어가는 신체를 묘사하는 데 사용했던 붓을 이번에는 다른 그림에서 예수가 부활하여 하늘의 빛을 가진 초자연적인 형상으로 변용하는 것을 전달하기 위해서 사용했다(도판 255). 이 그림은 너무나 많은 것이 색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353~354p]
- 레겐스부르크의 화가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Albrecht Altdorfer : 1480?-1538)는 숲과 산 속을 누비고 다니며 풍우에 시달린 나무와 바위의 형태를 연구했다. 그가 남긴 많은 수채화와 동판화, 그리고 유화 몇 점(도판 227)에는 아무런 이야기도 담겨 있지 않으며 인물이 하나도 없다. 이것은 대단히 중대한 변화이다. 자연을 그렇게 사랑했던 그리스 인들조차도 목가적인 장면을 위한 배경으로서만 풍경화를 그렸다(p. 114, 도판 72). 중세에는 종교적인 테마이든 세속적인 테마이든 분명한 이야기 거리를 다루지 않는 그림은 거의 상상할 수가 없었다. 화가의 묘사력만으로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화가는 아름다운 풍경을 즐겁게 묘사한다는 것 이외의 다른 목적이 없는 그림을 팔 수가 있었다. [356p]
- 중세 사람들이 마음을 사로잡고 괴롭히던 공포심을 구체적이고 실감나는 형상으로 표현하는 데 성공한 미술가는 역사상 보스 한 사람뿐일 것이다. 이러한 업적은 아마도 새로운 시대 정신이 미술가들에게 그들이 본 것을 재현하는 방법을 마련해주었고 반면에 구시대의 이념이 의연히 살아남아 있었던 바로 그 순간에서만 가능할 수 있었을 것이다. 히에로니무스 보스도 그가 그린 지옥도의 한 부분에 얀 반 에이크가 아르놀피니의 평화로운 약혼식 장면에 써넣었던 것과 같은 말을 써넣을 수 있었을 것이다. 즉 ‘내가 거기 있었노라.’[359p]
18 미술의 위기
16세기 후반 : 유럽
- 그는 당대의 위대한 거장들의 경의적인 작품들에 제아무리 감탄했다 할지라도 미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이미 다 이룩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 사실인지에 대해 당연히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어떤 미술 지망생들은 이러한 생각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미켈란젤로가 연구했던 것을 열심히 배우고 최선을 다해서 그의 수법을 모방하려고 했던 것 같다. 미켈란젤로는 복잡하고 까다로운 자세의 나체상을 즐겨 그렸다. 그들은 미켈란젤로의 나체상들을 그대로 베껴서 그것이 그들의 그림에 어울리든 안 어울리든 상관없이 그림 속에 집어넣었다. 그러한 결과는 참으로 우스꽝스러울 때가 많았다. 예를 들면 성경 이야기를 그린 장면에 젊은 운동선수들같은 우람한 체격의 나체 인물들이 가득 등장했다. 그 당시의 젊은 미술가들이 미켈란젤로의 작품의 유행에 휩싸여 단순히 그의 수법(manner)만을 모방했기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보는 후대의 비평가들은 이 시기를 가리켜 매너리즘(Mannerism) 시대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 당시의 젊은 미술가들 모두가 어려운 포즈를 취한 나체들만 모아놓으면 그림이 된다고 믿을 정도로 어리석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 많은 미술가들은 미술이 마침내 정지해버린 것인지, 또는 그 이전 시대의 거장들을 능가하는 것이 정말로 불가능한 것인지, 인체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는 그들을 능가할 수 없다 하더라도 다른 방면에서도 과연 그러할 것인지 등에 대해 의심해보았다. 터무니없이 기발한 착상으로 그들을 이겨보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실 그러한 지식이란 굉장한 학식을 지닌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알수가 없는 것들이었다. 그들의 작품은 이집트의 상형 문자나 지금은 반쯤 잊혀진 고대 저술들의 의미를 아는 사람 정도나 해독할 수 있는 애매모호한 그림 수수께끼 같은 것이었다. 또 다른 미술가들은 이전 세대의 위대한 거장들의 작품보다 자연스럽지 못하고 애매하고 덜 단순한거나 조화롭지 못하게 작품을 제작함으로써 사람들의 주의를 끌려고 했다. 그들은 아마도 이렇게 주장했던 것 같다. 즉 거장들의 작품은 완벽하다. 그러나 완벽한 것이 영원히 흥미있는 것은 아니다. 일단 거기에 익숙해지면 그러한 작품은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인가 놀랍고 기발하고, 전에는 들어보지도 못한 그런 것을 추구하려 한다. -중략- 사실 위대한 ‘고전적인’ 거장들 자신도 어느 정도는 이 새롭고 생소한 실험을 시작했고 또 고무되기도 했다. 바로 그들의 명성과 그들이 만년에 누린 명예가 그들로 하여금 구도나 채색에 있어서 새롭고 비정통적인 효과를 시험해봄으로써 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게 만들었다. 특히 미켈란젤로는 모든 관례를 대담하게 무시할 때가 많았다. 다른 분야에서보다도 특히 건축에 있어서 그는 고전적인 전통의 신성 불가침한 규칙들을 버리고 그 자신의 기분과 변덕을 따를 때가 많았다. 대중으로 하여금 한 예술가의 ‘기발한 착상’과 ‘창안’을 찬양하는 데 익숙하게 만든 것도 미켈란젤로였으며 자신의 초기 걸작의 비할 데 없는 완벽성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쉬지 않고 표현의 새로운 수법과 양상을 탐구하는 천재의 본보기를 보여준 것도 바로 미켈란젤로였다.
이러한 대선배가 있었기 때문에 젊은 미술가들이 그들의 ‘독창적인’ 창안을 가지고 대중을 놀라게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361~362p]
- 그는 완벽한 조화에 관한 고전적인 해결 방식만이 우리가 생각할 수 잇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했다. 자연스러운 단순함은 아름다움을 이룩하는 한 가지 방법이지만 안목 높은 미술 애호가들의 흥미를 끄는 데는 여러 가지 간접적인 방법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택한 방법을 수긍하든 안 하든 간에 그의 자세가 시종일관하다는 점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선배 거장들이 이룩해놓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무엇인가 새롭고 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것을 창조하고자 모색했던 파르미자니노를 비롯한 그 당시의 모든 미술가들은 아마도 최초의 ‘현대적인’ 미술가들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살펴보게 되겠지만 소위 ‘현대’ 미술이라고 하는 오늘날의 미술도 이들처럼 분명한 것을 피하고 인습적인 자연스러운 아름다움과는 다른 어떤 효과를 이룩하고자 하는 욕망에 그 근본을 두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367p]
- 그들은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빛과 어둠, 원경(遠景)과 근경(近景) 및 조화가 결여된 몸짓과 동작을 보고 상당히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틴토레토가 보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우리들 앞에 전개되고 있는 이 엄청난 기적의 인상을 창조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곧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틴토레토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조르조네와 티치아노 같은 베네치아 화가들의 가장 자랑스러운 업적이었던 원숙한 색채의 아름다움까지 희생해야만 했다. [371p]
- 또 “그의 스케치는 아주 거칠어서 그의 연필 획선은 정확한 묘사보다는 힘을 보여주며 또 우연하게 그려진 것같이 보인다”라고 했다. 그러한 비난은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새로운 시대의 미술가들을 공격하기 위해 흔히 사용되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것은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예술의 위대한 혁신자들은 본질적인 것에만 집중을 하고 통상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기법적인 완성도에 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틴토레토와 같은 시대에는 기법적인 탁월함이 아주 높은 수준에 도달했기 때문에 약간의 기계적인 소질만 있으면 누구나 그 기법상의 트릭에 숙달될 수 있었다. 틴토레토와 같은 사람은 사물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고자 했으며 또 과거의 전설과 신화를 표현하는 새로운 방법을 탐구하고자 했다. 그는 그의 그림이 전설적인 장면에 대해서 그가 상상한 바를 전달하기만 하면 그 그림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했다. 매끈하고 세심한 마무리 손질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목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러한 것들은 보는 사람들의 주의를 그림의 극적인 사건으로부터 다른 데로 돌려버릴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마무리 손질을 하지 않은 채 내버려두었고 그럼으로써 사람들에게 상상할 여지를 남겨놓았던 것이다. [371p]
- 그의 작업실은 항상 분주했다. 그는 그가 받은 주문을 감당하기 위해서 많은 조수들을 고용했던 것 같다. 그가 서명한 작품들 전부가 모두 고르게 훌륭하지 않은 것은 이것으로 설명이 될 것이다. 한 세대가 지난 후 사람들은 그의 자연스럽지 않은 형태와 색채를 비판하고 그의 그림을 기분 나쁜 농담 같은 것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엘 그레코의 미술이 재발견되고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현대 미술가들이 모든 미술 작품에 ‘정확성’ 이라는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지 말라고 가르쳐준 제 1차 세계 대전 이후에야 비로소 가능했다. [374p]
- 홀바인의 이런 초상화들에는 드라마틱한 것은 하나도 없고 사람의 눈을 끌만한 것도 없으나 이 그림들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모델의 마음과 인품이 드러나보이는 것 같다. 홀바인이 그 인물에 대한 어떤 두려움이나 호의 없이 본대로 충실하게 그린 것이라는 점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홀바인이 인물을 이 그림에 배치한 방법을 보면 우리는 거장의 빈틈없는 솜씨를 발견할 수 있다.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전체 구성이 아주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는 아주 ‘알기 쉽게’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홀바인이 의도한 것이었다. 그는 그의 초기의 초상화에서는 인물의 배경, 즉 평소에 그 인물이 가까이 했던 것들을 통해서 주인공의 특성을 표현하려고 하였으며 세부를 묘사하는 그의 탁월한 솜씨를 여전히 과시하려고 했다(도판 243). 그러나 점차 나이가 들고 기법이 완숙해감에 따라서 그러한 트릭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게 되었던 모양이다. 그는 자신을 내세우려 하지도 않았으며 또 초상 인물로부터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게 의도하지도 않았다. 우리가 그의 그림을 높이 사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거장다운 절제 때문이다.[376p]
- 유럽의 신교 국가 중 종교 개혁이 불러일으킨 위기를 무사하게 넘긴 유일한 나라는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회화가 번창했으며 미술가들은 그들이 처해 있는 공경에 빠져나갈 길을 발견했다. 그들은 초상화에만 매달리지 않고 신교 교회들이 반대하지 않을 주제를 찾아 그러한 모든 유형을 전문화하였다. 일찍이 반 에이크의 시대로부터 네덜란드의 미술가들은 자연을 모방하는 데 완벽한 대가들로 정평이 나 있었다. 이탈리아 화가들은 움직이는 아름다운 인체의 표현에 있어서는 그들에게 필적할만한 사람이 없다고 자랑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꽃, 나무, 마굿간, 양떼 같은 것을 그릴 때 필요한 절대적인 인내력과 정확성에 있어서는 ‘플랑드르(Flanders)' 화가들이 쉽게 그들을 앞지를 수 있다는 것을 순순히 인정했다. 따라서 더 이상 제단화나 기타 다른 종교적인 그림을 그릴 필요가 없어진 북유럽의 미술가들은 그들의 공인된 전문적 특기를 사줄 수 있는 시장(市場)을 발견하려고 애썼고, 또 사물의 외관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엄청난 솜씨를 과시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그런 그림을 그리려고 노력했다. 전문화는 사실 이 나라의 미술가들에게는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히에로니무스 보스(p. 358, 도판 229-30)가 예술의 위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지옥과 악마의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렸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회화의 영역이 보다 제한된 이상, 이제 화가들은 이 전문화의 길을 더욱 따라나서게 되었다. 그들은 중세 필사본(p. 211, 도활의 장면들(p. 274, 도판 177)로 거슬러 올라가는 북유럽 미술의 전통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 북유럽 화가들이 주제를 어떤 종목 또는 부분으로 한정해서 의도적으로 개발한 그림, 특히 일상 생활의 장면들을 묘사한 그림들을 뒤에 가서 소위 ’풍속화(genre painting)‘라고 부르게 되었다(장르 페인트의 장르(genre)는 프랑스 어로 종류 또는 분야를 의미한다). [380~381p]
- 브뢰헬이 주로 그렸던 그림의 ‘종류’는 농민들의 생활 장면이었다. 그는 농부들이 떠들썩하게 술잔치나 축제를 벌이고 일하는 모습을 즐겨 그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플랑드르의 농부 출신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술가들에 대해서 범하기 쉬운 공통적인 실수의 하나다. 우리는 흔히 작품과 작가를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중략- 소박한 시골 생활은 힐리어드가 그린 신사들의 생활과 예의범절보다 덜 위장되어 있고 인간 본성의 자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며 인위적이고 인습적인 허식에 가려지지 않는다. 그래서 극작가나 화가들이 인간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보이려고 할 때는 하층민의 생활에서 그들의 주제를 구했던 것이다. [381~382p]
- 대부분의 그림과 마찬가지로 이 그림도 도판으로는 그 진가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즉 모든 세부가 더 더욱 작게 축소되기 때문에 이중으로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382p]
19 발전하는 시각 세계
17세기 전반기 : 가톨릭 교회권의 유럽
- 르네상스를 뒤이은 양식을 보통 바로크(Baroque)라고 부른다. 그 이전의 양식들은 각각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식별하기가 용이하였으나 바로크의 경우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그 이유는 르네상스 이후로 거의 오늘날까지도 건축가들은 원주, 벽기둥, 코니스, 엔타블레이처, 쇠시리 장식 등과 같은 동일한 기본 형태들을 사용해왔는데, 이것들은 모두 본래 고전 시대의 유적에서 빌러온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르네상스의 건축 양식이 브루넬레스키의 시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 왔다고 말할 수도 있으며 건축에 관한 많은 책들은 이 기간 전체를 르네상스라는 이름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387p]
- 심지어 산소비노의<산 마르코 교회 도서관>(p. 326, 도판 207)과 같은 화려하고 복잡한 건물도 이것과 비교해보면 단순하게 보이는데 그 까닭은 거기에는 동일한 기본 형태가 변화없이 반복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건물의 일부만 본다 하더라도 전체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델라 포르타가 설계한 최초의 예수회 교회당의 정면에는 모든 부분이 전체적인 효과를 이루기 위해 존재한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의 커다랗고 복잡한 형태 속에 융합되어 있다. [389p]
- 우리는 틴토레토와 엘 그레코의 위대한 작품들 속에서 17세기 회화에서 점점 더 많은 중요성을 띠게 되는 새로운 이념들이 성장하고 있음을 보았다. 이를테면 빛과 색의 강조라든가 단순한 균형을 무시하고 보다 복잡한 구도를 선호한다든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세기의 회화는 매너리즘 화가들의 양식을 단순하게 지속시킨 것만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 당시의 사람들은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느끼지 않았다. 그들은 미술이 매우 위험한 상투적인 방식에 빠졌으며 거기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미술에 관해서 이야기하기를 즐겨했다. 특히 로마에는 그 당시의 미술가들 사이의 다양한 동향(動向)이나 ‘운동’에 관해 토론하고, 그들을 그 이전 시대의 거장들과 비교하며 미술가들 사이의 다툼이나 음모에 가담하여 어느 한쪽을 편들기를 즐기는 교양있는 신사들이 많았다. 그러한 논쟁 자체는 미술의 세계에서 처음 있는 현상이었다. 16세기에는 회화가 조각보다 나은 예술이냐, 또는 구도가 색채보다 더 중요하냐 아니면 그 반대인가 하는 식의 문제로 논쟁을 벌였다(예컨대 피렌체 사람들은 구도를 중시했고 베네치아 사람들은 색채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주된 쟁점은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390p]
- 카라바조에게는 추한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경멸한 만한 약점으로 보였다. 그가 원하는 것은 진실, 즉 그가 본 그대로의 진실이었다. 그는 고전적인 규범을 좋아하지 않았고 또 ‘이상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신통치 않게 생각했다. 그는 인습을 타파하고 미술에 대해 아주 새롭게 생각하고 싶어했다(pp. 30-1, 도판 15,16). 어떤 사람들은 그를 주로 관중들에게 충격을 주고자 하는 화가이며 아름다움과 전통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는 이와 같이 쏟아지는 비난을 받은 최초의 화가들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또한 그의 예술관이 비평가들에 의해 하나의 문구로 집약되었던 첫 번째 화가이기도 했다. 그들은 그를 ‘자연주의자(naturalist)'라고 비난했다. 사실상 카라바조는 너무나 진지하고 위대한 예술가였으므로 떠들썩한 화젯거리나 불러일으키기 위해 시간을 낭비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비평가들이 이러쿵저러쿵 하고 지껄여대는 동안 그는 분주하게 작업을 했다. [392p]
- 안니발레 카라치와 카라바조는 19세기의 유행에서 배제되었으나 20세기에 들어 다시금 그들의 진가를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당시의 회화에 불어 넣어준 가극과 영향은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두 사람 다 로마에서 작업했으며 로마는 그 당시의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였다. 유럽 전역의 미술가들이 로마로 모여들어 회화에 대한 논쟁에 참가해서 유파 간의 싸움에 편을 들었고, 과거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최신의 미술 ‘운동’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곤 했다. 당시의 로마는 마치 오늘날의 미술가들에게 있어서의 파리와 흡사했다. 미술가들은 민족적 전통과 기질에 따라서 서로 경쟁하는 로마의 여러 유파 가운데 무언가 하나를 선택해서 거기에 가담하려 했다. 그래서 그들 중 뛰어난 사람들은 이러한 이국의 미술 운동에서 배운 바를 바탕을 하여 자기의 독자적인 표현법을 개발했다. [393p]
- 사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미술은 이제 미술가들 앞에 놓은 여러 방법들 중에서 어떤 것을 의식적으로 선택해야만 될 정도로 발전한 것이다. 일단 이러한 점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레니가 그의 마음 속에 가지고 있던 아름다움을 실현하기 위해서 취한 방법, 즉 비속하고 추하며 그의 고상한 이상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은 무엇이든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현실보다 더 완벽하고 이상적인 형태를 추구하는 그의 노력이 얼마나 훌륭하게 이룩되었는지 자유로이 찬미할 수 있다. 고전 시대의 조각상들에 의해 설정된 기준에 따라서 자연을 이상화하고 ‘미화하는’ 방침을 공식화한 사람들은 카라치와 레니, 그리고 그 레니의 추종자들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정해진 방법 같은 것에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는 고전 미술과 분명하게 구별하는 의미에서 신고전주의적(neo-classical), 또는 ‘아카데믹(academic)' 방침이라 부른다. [394~395p]
- 자연의 숭고한 아름다움에 처음으로 사람들의 눈을 뜨게 만든 화가는 바로 클로드 로랭이었고, 또 그가 죽은 뒤 거의 백 년쯤 되었을 때 여행객들은 그의 기준에 따라서 실제의 풍경을 평가하곤 했다. 만약 어떤 풍경이 클로드가 그려보여준 시각 세계를 그들에게 연상케 하면 그들은 그것을 아름답다고 찬미하고 거기에 앉아서 야유회를 즐기곤 했다. 부유한 영국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름다움에 대한 클로드의 꿈을 모델로 해서 그들의 소유지 내의 정원에 자기들만의 소자연(小自然)을 꾸며놓으려고까지 하였다. 이탈리아에 정착하여 카라치의 방침을 그대로 실천한 이 프랑스화가의 영향은 이런 식으로 영국의 아름다운 전원 풍경들 속에 나타나게 되었고 거기에는 이 화가의 사인이 들어갈 만하였다. [397p]
- 네덜란드 출신의 이들 화가들은 항상 다채로운 사물의 표면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옷감과 살아 있는 신체의 감촉을 표현하기 위해서, 다시 말하자면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능한 한 최고로 충실하게 그리기 위해서 그들이 알고 있는 모든 기법과 수단을 이용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이탈리아 화가들이 그렇게 신성시했던 아름다움의 기준에 대해서는 별로 개의치 않았으며, 또 품위 있는 주제에 대해서도 별로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397p]
- 루벤스는 대단히 큰 조직력을 가진 사람이었고 또 개인적으로도 매력이 넘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플랑드르이 많은 재능 있는 화가들이 그의 밑에서 일을 하여 그에게서 배우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했다. 교회나 유럽의 여러 나라 왕이나 군주로부터 새로운 주문을 받으면 그는 채색을 한 작은 스케치만을 그릴 때가 많았다(도판 256은 대작을 위한 그런 채색 스케치 중의 하나이다.) 그러한 스케치에 담긴 구상을 큰 화폭에 옮기는 일은 그의 제자들이나 조수들이 할 일이었고, 그들이 스승의 구상대로 밑그림을 그리고 채색을 마치면 그제서야 루벤스가 붓을 들고 얼굴이나 비단 옷에 손질을 하거나 거칠게 대조가 되는 부분들을 부드럽게 완화시키곤 했다. 그는 자신의 손길이 닿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당장 생기를 띠게 된다고 확신했는데 사실상 그의 생각은 옳았다. -중략- 그 이전의 티치아노보다도 루벤스는 한층 더 붓질을 그의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그의 그림들은 이제 더 이상 세심하게 입체감을 표현한 채색 소묘는 아니다. 그것은 소묘적인 수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회화적인’ 수단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며 그 점이 생명감과 활력의 느낌을 더욱 강조해주는 것이다. [400~401p]
- 루벤스를 사랑하고 이해할 수 있으려면 먼저 그의 작품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이유는 아마도 이러한 성질 때문일 것이다. 고전적인 아름다움의 ‘이상화’된 형태가 그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런 형태들은 그와는 거리가 멀고 추상적인 것이었다. 그가 그린 남자와 여자들은 그가 실제로 보고 좋아했던 살아 있는 사람들이었다. [403p]
- 벨라스케스는 그때까지 이탈리아에 가본 적은 없었지만 모방자들의 작품을 통해서 알게 된 카라바조의 발견들과 그의 수법에 커다란 감명을 받고 있었다. 그는 ‘자연주의’의 방침을 흡수하여 전통에 구애받지 않고 자연을 냉정하게 관찰하는 데 그의 예술을 바쳤다. [406p]
- 이 그림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을 알 수는 없으나 나느 카메라가 발명되기 이미 오래 전에 벨라스케스는 현실의 한순간을 화면에 담았다고 상상하고 싶다. [410p]
- 반 에이크는 작은 개의 곱슬곱슬한 털 하나하나를 모사하는 데 온 정성을 쏟고 있는 반면에, 그로부터 이백 년 뒤의 벨라스케스는 개의 특징적인 인상만을 포착하려고 노력했다. 레오나르도처럼,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한층 꼭 필요한 것만을 묘사하고 보는 사람에게 상상할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 비록 그는 털을 하나도 그리지 않았지만 그의 작은 개는 사실상 반 에이크의 개보다 훨씬 더 털이 북실북실하고 자연스럽게 보인다. 19세기의 파리에서 인상주의의 창시자들이 과거의 어느 다른 화가들보다도 벨라스케스를 존경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효과 때문이었다. [411p]
20 자연의 거울
17세기 : 네덜란드
- 네덜란드의 이들 신교 상인들의 취향은 국경 너머 가톨릭을 믿는 나라들과 아주 달랐다. 이들의 태도는 영국의 청교도들과 흡사했다. 즉 경건하고 근면 절약하며 대부분 남쪽 지역의 호사스러운 허식을 싫어하는 사람들이었다. [414p]
- 앞에서 우리는 신교의 승리가 미친 영향이 건축보다는 회화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음을 살펴보았다(p. 374). 중세 유럽의 다른 지역 못지 않게 미술이 번창했던 영국과 독일에서도 이 미술의 위기 상황은 매우 심각하여 화가나 조각가라는 직업이 그 나라의 재능있는 젊은이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게 되었다. 우리는 장인적인 솜씨의 전통이 그렇게 강했던 네덜란드에서조차 화가들은 종교적 견지에서 아무런 이의(異議)가 없었던 회화의 특정 영역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잘 기억하고 있다.
신교 사회에서 계속될 수 있었던 이런 회화의 영역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것은, 홀바인의 경우가 잘 증명해주듯이 바로 초상화 그리기였다. [414p]
- 이러한 고객들의 취향에 맞도록 그림을 그리느 화가는 비교적 안정된 수입을 기대할 수 있었지만 일단 그의 양식이 유행에 뒤지게 되면 몰락하기 마련이었다. [414p]
- 신교를 믿는 네덜란드의 화가들 중 초상화를 그리는 소질이나 재능이 없는 사람들은 주로 주문을 받아 그림을 제작하겠다는 생각을 포기해야 했다. 중세나 르네상스의 대가들과 달리 그들은 먼저 그려놓고 나서 구매자를 찾아나서야 했다. 오늘날은 대부분의 화가들이 이런 식이고 또 우리들 자신도 여기에 익숙해져 있어서 화가가 그의화실 안에서 그림을 그린 다음 그것을 포장하여 팔려고 내놓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사정이 초래한 변화를 거의 상상할 수가 없다. 어떤 면에서는 예술가들이 그들의 작업에 간섭을 하고 때로는 그들은 못살게 굴었던 후원자들을 제거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는 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어진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제 미술가는 한 사람의 후원자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횡포한 주인, 즉 작품을 구매하는 대중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시장이나 장날을 찾아가서 거기서 거의 작품을 팔거나 그렇지 않으면 화가의 그러한 수고를 덜어주는 대신 이익을 남기고 팔기 위해 될 수 있는 한 싸게 사들이려는 중간 상인, 즉 화상(畵商)에게 의뢰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가 화가들 사이의 경쟁도 치열했다. 네덜란드의 각 도시에는 점포에 그림을 진열해놓고 파는 화가들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별로 이름이 나지 않은 군소 화가가 명성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회화의 특수한 분야, 즉 특수한 장르의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리는 것이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그 당시에도 대중들은 어느 분야의 그림에서 누가 유명한 작가인지를 알고자 했다. 어떤 화가가 일단 전쟁화를 잘 그려 명성을 얻으면 대개 그는 전쟁화만을 손쉽게 팔 수 있었다. 만약 그가 달빛 아래의 풍경화로 성공을 거두었다면 그것만을 전문적으로 더 계속해서 그리는 것이 안전했다. 16세기에 북유럽의 나라들에서 시작된 전문화의 경향(p. 381)이 17세기에 와서는 더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417~418p]
- 그러나 반 호이엔은 이처럼 평범한 풍경을 평온한 아름다움이 배어 있는 정경으로 변화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우리들의 눈에 익은 모티프들을 변화시켜서 우리들의 시선을 아들히 먼 곳으로 인도하며 마치 우리들이 제일 좋은 위치에 서서 저녁 햇살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우리는 앞에서 클로드의 작품에 매료되어 그를 숭배하게 된 영국인들이 자기 나라의 실제 풍경을 변경시켜서 그 화가의 그림에 나오는 정경과 흡사하게 만들려고 애썼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당시 영국인들은 클로드의 작품 세계를 연상하게 해주는 풍경이나 정원을 한 폭의 그림 같다는 뜻으로 ‘픽처레스크(picturesque)'라고 불렀다. 그 이후 우리는 이 단어를 허물어진 성이나 석양뿐만 아니라 또한 돛단배나 풍차와 같은 소박한 사물에도 적용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그런 단순한 사물에 ’픽처레스크‘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그것이 클로드의 그림을 연상시켜서가 아니라 데 블리헤르나 반 호이엔과 같은 거장들의 그림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로 하여금 소박한 풍경 속에서 ’한 폭의 그림‘ 같은 것을 볼 수 있도록 가르쳐준 사람은 바로 이 네덜란드 화가들이었다. [419p]
- 도판 273은 만년의 렘브란트의 모습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분명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그의 추한 모습을 결코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아주 성실하게 관찰했다. 우리가 이 작품의 아름다움이나 용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잊어버리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성실성 때문이다. 이것은 살아 있는 인간의 실제 얼굴이다. 여기에는 포즈를 취한 흔적도 없고 허영의 그림자도 없으며 다만 자신의 생김새를 샅샅이 훑어보고, 끊임없이 인간의 표정에 내포되어 있는 비밀에 대해 보다 많은 것을 탐구하려는 화가의 꿰뚫어보는 응시가 있을 뿐이다. [420p]
- 전에 뒤러가 그랬던 것처럼 렘브란트도 화가로서 뿐만 아니라 판화가로서도 역시 위대한 거장이었다. 그가 사용한 기술은 이제 목판화나 뷔랭으로 직접 긁어서 파는 동판화(pp. 282-3)가 아니라 그것보다 훨씬 더 주유롭고 신속하게 작업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이 기법을 에칭(etching, 부식 동판화)이라고 부르는데 그 원리는 대단히 간단하다. 동판의 표면을 힘들여서 긁는 대신에 그 표면을 밀랍(wax)으로 덮고 그 위에 바늘로 그림을 그리면 된다. 바늘로 긁은 자리는 밀랍이 제거되어 동판의 표면이 드러나게 된다. 그 다음에 동판을 산성 용액 속에 집어넣으면 밀랍이 벗겨진 부분은 산에 부식되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온전하게 남는다. 그런 다음에 안그레이빙과 동일한 방법으로 인쇄 잉크를 칠한 다음 찍어내면 된다. 에칭을 안그레이빙과 구별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선의 성격에 의해서 판단하는 것이다. 뷔랭에 의한 힘들고 느린 작업으로 생겨나는 선과 바늘에 의해 자유롭고 용이하게 그려진 에칭의 선은 눈으로 식별할 수 있을 만큼 서로 다르다. [424p]
- 이 거장을 당시의 유럽에서 인정받지 못한 외로운 반역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과 아주 다르다. 물론 그의 예술이 한층 심오하고 타협을 모르는 경지로 들어감에 따라 초상화가로서의 인기가 떨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개인적인 비극과 파산의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미술가로서의 그의 명성은 대단히 높았다. 예나 지금이나 진짜 비극은 명성만으로는 먹고 살 수 없다는 데 있다. [427p]
- 전문 분야를 파고들어가는 이러한 화가들은 스스로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그림의 주제란 과거에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여주기 시작했다. 사소한 말 몇 마디가 아름다운 노래의 가사가 되듯이 사소한 사물들로도 완벽한 그림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430p]
- 그러나 가사가 없이도 위대한 음악이 될 수 있듯이, 중요한 주제가 없는 위대한 그림도 있을 수 있다. 17세기 화가들이 가시적인 세계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발견했을 때 모색했던 것은 중요한 주제가 없이도 그림이 될 수 있다는 이 새로운 발견이었다(p. 19, 도판 4). 그래서 동일현 종류의 주제만을 평생 동안 그린 네덜란드의 전문 화가들은 결국 주제라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 될 수도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430p]
21 권력과 영광의 예술Ⅰ
17세기 후반과 18세기 : 이탈리아
- 다양하고 인상적인 효과가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면 그 이후의 미술가들은 계속해서 인상적인 효과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더 복잡한 장식과 더욱 놀라운 아이디어를 고안해내야만 했다. [435p]
- 미술은 글을 못 읽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너무 많이 읽은 사람들까지도 설득해서 개종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많은 건축가, 화가, 조각가들이 교회를 변형시켜 그 찬란함과 아름다움이 보는 이를 거의 압도해 버리는 거대한 장식물로 만들기 위해서 소집되었다. 교회당 내부에서 중시되는 것은 세부가 아니라 교회 전체가 주는 전반적인 효과이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의 내부를 로마 교회의 장려한 의식의 틀로 보지 않는다면, 또한 제단 위에 촛불이 켜져 있고 분향의 향기가 교회 내부에 감도는 가운데 오르간과 성가대의 선율이 우리를 별세계로 인도하는 장엄한 미사에 참석하여 보지 않는다면 이같이 호화찬란한 교회의 의미를 이해하거나 올바르게 판단하기는 힘들 것이다. [437p]
- 베르니니의<성 테레사>와 같은 조각 작품은 그것이 놓여진 장소까지 포함해서 고려해야만 올바로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크 교회의 회화장식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440~443p]
- 이와 같은 그림은 이것이 놓여 있는 장소를 벗어나면 그 의미를 상실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효과를 달성하는 데 모든 예술가들이 협력했던 바로크 양식이 완벽하게 발전된 뒤에는 이탈리아와 유럽의 가톨릭 세계에서 회화와 조각이 각각 독립적인 예술로서 발전하지 못하고 쇠퇴하게 된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닌 것 같다. [443p]
- 과거 이탈리아의 위대한 영광을 감탄하기 위해서 유럽 전역에서 모여든 여행객들은 흔히 돌아갈 때 갖고 갈 기념품을 원했다. 특히 그 경치가 화가를 매혹시킨 베네치아에서는 이러한 수요를 만족시켜주는 한 유파가 생겨났다. 도판 290은 이들 중 한 화가인 프란체스코 구아르디(Francesco Guardi : 1712-93)가 그린 베네치아의 한 풍경이다. [445p]
22 권력과 영광의 예술 Ⅱ
17세기 말과 18세기 초 :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우리는 이 실내가 실제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눈 앞에 그려보지 않고는 그것을 정당하게 평가할 수 없다. 향연이나 연회가 베풀어질 때 등불들이 켜지고 그 당시의 화려하고 품위 있는 유행하는 옷차림을 한 남녀들이 도착해서 이 계단을 오르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그러한 순간 당시의 어둡고 불빛 하나 없으며 불결하고 악취가 진동하는 거리와 귀족들의 휘황찬란한 거처(居處)간의 대조는 어마어마한 것으로 생각될 것이다. [451p]
- 이러한 교회의 건물 안에서는 ‘자연스럽’거나 ‘정상적인’ 것이 하나도 없으며 또 그런 것을 의도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보는 사람들에게 천국의 영광을 미리 맛보게 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아마 그것이 천당에 관한 모든 사람들의 생각은 아니겠지만 우리가 그 가운데 서 있으면 모든 것이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의 모든 의심을 정지시켜 버린다. 우리는 우리 나름의 규칙과 기준이 전혀 통하지 않는 그런 세계에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452p]
- 로코코는 바로크 시대의 호방한 취향을 이어받아 들뜬 경박함 속에 표현되는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장식의 유행을 말한다. 그러나 바토는 단순히 당대의 유행의 대변자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위대한 예술가였다. 오히려 그의 꿈과 이상이 우리가 로코코라고 부르는 유행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를 한 것이었다. [454~455p]
- 이러한 아름다움의 환상 속에는 어딘지 슬픈 분위기가 감돌고 있는데 그것을 말로 설명하거나 규정할 수 없지만 그것이 바토의 예술을 단순한 기교와 예쁘장한 아름다움의 영역을 초월하게 만든다. [455p]
23 이성의 시대
18세기 : 영국과 프랑스
- 17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유럽의 가톨릭 국가에서는 바로크 운동이 절정에 달해있었다. 신교 국가들은 한껏 위세를 떨치던 이 바로크 유행에 무관심할 수는 없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실제로 채용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영국의 스튜어트 왕조가 프랑스 쪽으로 기울어 청교도적인 취향과 세계관을 싫어했던 왕정 복고 시기에도 그랬다. [457p]
- 이와 같은 교회는 주로 신자들이 예배를 위해서 만나는 공간으로 설계되었다. 그 목적은 이 세상이 아닌 천국의 환상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신도들의 생각들을 집중시키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설계한 많은 교회에서 렌은 엄숙하고 동시에 간소한 느낌을 주는 이러한 공간의 테마에 언제나 새로운 변화를 주고자 노력했다.
교회들이 그랬듯이 성(城)들도 동일한 경향을 따랐다. 영국의 어떠한 오아도 베르사유와 같은 궁전을 짓는 데 필요한 엄청난 자금을 모을 수가 없었고 영국의 귀족들 또한 사치와 방종의 면에서 독일의 제후들과 경쟁하려 하지 않았다. [457~459p]
- 그러나 이런 것은 예외적인 경우였으며 18세기 영국의 이상(理想)은 성이 아니라 교외의 저택이었다.
교외의 저택들을 설계한 건축가들은 보통 바로크 양식의 지나친 호사스러움을 배격했다. 그들의 야심은 그들이 ‘고상한 취향’이라고 생각한 규칙을 하나도 위반하지 않고 고전 건축의 실제적인 또는 그렇다고 주장하는 법칙을 가능한 한 충실하게 따르려는 것이었다. 고전 시대 건축들의 유적을 과학적인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측량했던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건축가들은 건축가들과 장인들에게 표본을 제공해주기 위해서 그들의 연구 조사 결과를 교과서로 출판했다. 이 교과서들 중에서 제일 유명한 것은 안드레아 팔라디오(Andrea Palladio)가 저술한 것인데(p. 362) 이 책은 18세기 영국에서 건축에 관한 모든 취향을 규정하는 최고의 권위서로 간주되었다. 자기의 별장을 ‘팔라디오 식’으로 짓는 것이 유행의 첨단으로 여겨졌다. [459p]
- 그 이유는 벌링턴 경과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 : 1688-1744 ; 18세기 초 영문학의 대표적인 고전주의 경향의 시인·비평가-역주) 시대의 영국에서는 취향의 척도가 또한 이성의 척도였기 때문이다. 영국의 전반적인 기질은 바로크 식 장식에 나타난 공상의 비약에 반대했고 또 감정을 압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그런 예술에도 반대했다. 베르사유 궁의 정원 양식같이 끝없이 이어지는 잘 다듬어진 생울타리와 작은 길까지 건축가의 설계에 포함되어 실제 건물 이외의 주변 지역까지 확장된 형식적인 느낌을 주는 정원은 불합리하고 인공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영국인들이 생각하는 정원이나 공원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반영해야 하며 화가의 눈을 매혹시키는 그런 아름다운 풍경을 모아 놓아야 하는 것이었다. 켄트 같은 사람은 팔라디오 식 별장의 이상적인 주변 경관으로서 영국의 ‘풍경 정원(landscape garden)'을 고안해냈다. 그들은 건축에 있어서의 이성과 취향의 척도를 한 이탈리아 건축가의 권위에서 찾았듯이 경치에 있어서의 아름다움의 기준에 대해서도 남유럽의 한 화가에 의존했다. 자연이 어떤 모습으로 보여야 하는지에 관한 그들의 생각은 대체로 클로드 로랭이 그림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460~461p]
- 회화에서 유일하게 수요가 여전한 영역은 초상화 부분이었는데, 이러한 기능마저도 주로 홀바인(p. 374)이나 반 다이크(p. 403) 같은 외국 화가들이 충족시켰다. 이들은 외국에서 명성을 얻은 뒤에 영국으로 초청된 화가들이었다.
벌링턴 시대의 상류 사회 신사들은 청교도적인 이유를 내세워 그림이나 조각을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그들은 외부의 세계에서 아직 명성을 얻지 못한 본국의 미술가들에게 작품을 외뢰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저택에 걸 그림을 원할 경우 그들은 차라리 유명한 이탈리아 화가의 이름이 들어 있는 그런 그림을 사려했던 것이다. 그들은 당대의 화가들을 외면한 채, 스스로를 미술품 감식가로 자처했으며 또 그들 중 일부는 옛 거장들의 훌륭한 걸작품들을 수집하기도 하였다. [461~462p]
- 그는 사람들이 ‘그림의 효용이 무엇인가’라고 묻고 싶어한다는 것을 깨닫고 청교도적인 전통에서 성장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예술이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그는 사람들에게 착한 일의 보상과 악한 일의 대가를 가르칠 많은 교훈적인 내용을 그릴 것을 계획했다. -중략- 사실상 그의 그림은 일종의 무언극(無言劇)처럼 모든 등장 인물들은 각각 주어진 임무에 맞는 제스처나 무대의 소도구로 사용해서 그들의 의미를 분명하게 전달한다. 호가스 자신도 이 새로운 유형의 그림을 극작가나 연출가의 수법에 비교했다. 그는 각 인물의 ‘성격’을 얼굴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옷차림이나 행동을 통해서도 표현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의 연속 그림들은 하나의 이야기나 아니면 오히려 하나의 설교처럼 읽혀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런 유형의 미술은 호가스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든 중세 미술이 교훈을 가르치기 위해서 형상을 사용했으며 또 그림을 통해 설교를 하는 이러한 전통은 호가스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미 대중 미술 속에 존재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술주정뱅이의 운명과 도박의 위험을 보여주는 조잡한 판화들이 시장에서 팔렸으며 또 엉터리 시인들도 그 비슷한 이야기들을 담은 소책자를 팔기도 했다. 그러나 호가스는 이런 점에서 볼 때 대중 미술가는 아니었다. 그는 과거의 대가들과 그들이 회화적인 효과를 내는 데 사용한 방법을 세심하게 연구했다. 그는 일상 생활에서 일어나는 익살스런 에피소드로 그림을 채우고 또 인간의 유형을 개성적으로 표현하는 데 탁월했던 얀 스텐(p. 428, 도판 278)과 같은 네덜란드의 대가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또 당시의 이탈리아 화가들과 구아르디(p. 444, 도판 290)풍의 베네치아 화가들의 수법도 알고 있었다. 구아르디로부터 그는 붓을 두세 번 힘차게 휘두름으로써 한 인물의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하는 기법을 배울 수 있었다. [462p]
- 그의 일련의 연속 그림들이 그에게 명성과 상당한 돈을 안겨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원화보다는 열성 있는 일반 대중들에게 보급된 판화로 만든 복제품 때문이었다. 당시의 감식가들은 화가로서의 그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평생을 통해서 유행적인 취향에 반대하는 끈질긴 운동을 전개했다. [464p]
- 레이놀즈와 게인즈버러 모두 쇄도하는 초상화의 주문으로 인해 그들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는 것은 불행한 노릇이었다. 그러나 레이놀즈가 고대사에 나오는 야심적인 신화의 장면이나 일화들을 그릴 시간과 여유를 갈망한 반면에 게인즈버러는 그의 경쟁사가 경멸했던 바로 그런 주제, 즉 풍경화를 그리고 싶어했다. 왜냐하면 그는 도시인인 레이놀즈와는 달리 조용한 시골을 좋아했고 그가 진실로 즐긴 여흥은 실내악을 듣는 일이었다. 불행하게도 게인즈버러는 그의 풍경화를 사고자 원하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풍경화는 그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그린 습장(도판 307)으로 남아 있다. 이 그림들에서 그는 영국 시골의 나무들과 언덕들을 아름다운 풍경이 되도록 짜맞추어서 그 당시가 풍경 정원이 유행하던 시대였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왜냐하면 게인즈버러의 습작들은 자연을 직접 묘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그림들은 어떤 기분을 불러일으키고 반영시키기 위한 풍경 ‘구성 작품’들이었다. [469~470p]
24 전통의 단절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 영국, 미국 및 프랑스
- 역사책에서 근대는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미술에 있어서의 이 시기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 이 시기는 화가나 조각가가 된다는 것이 보통의 직업과는 다른 일종의 천직(天職)으로서 별도로 취급되던 르네상스시대였다. 또한 이 시기는 종교 개혁으로 교회 성상에 대한 반대 운동이 일어나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그토록 자주 쓰이던 그림과 조각들이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고 이에 따라 미술가들은 새로운 시장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사건들이 중요하기는 했지만 갑자스런 변화를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대다수의 미술가들은 여전히 길드와 협회를 조직하였고, 도제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성과 시골의 별장을 장식하거나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진열실에 자신의 초상화를 걸기 위해 미술가들을 필요로 하였던 돈많은 귀족들의 주문에 의존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1492년 이후에도 미술은 유한 계급의 생활 속에서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일반적으로 볼 때 반드시 있어야 하는 어떤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비록 유행이 바뀌고 미술가들이 다른 문제들에 부딪치게 되어, 어떤 사람은 인물의 조화로운 배치에 관심을 가지고, 또 어떤 사람들은 색채의 조화나 극적인 표현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으나, 대체로 회화와 조각의 목적은 전과 똑같았으며 누구도 이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미술의 목적이란 원하고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것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들 간에도 여러 유파가 존재하여 ‘미’란 무엇인가, 카라바조와 네덜란드 화가들과 게인즈버러 등이 명성을 얻었던 것처럼 자연을 능숙하게 모방하는 것인가, 혹은 라파엘로나 카라치, 레니, 레이놀즈와 같이 자연을 ‘이상화’ 할 수 있는 미술가들의 능력이 진정한 미를 좌지우지하는가 하는 여러 문제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논쟁들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었으며 또 그들이 선호했던 미술가들 간에도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심지어 ‘이상주의자’들도 미술가란 자연을 연구해야 하고 나체화로부터 그림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했으며 ‘자연주의자’라고 할지라도 고대의 고전적인 작품들이 결코 능가할 수 없는 최고의 미를 지니고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18세기 말에 이르러 공통된 기반은 점점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였다.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이 수천 년은 아니라 하더라도 수백 년 간 당연하게 여겨지던 수많은 가설들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밝아오는 근대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프랑스 혁명은 이성의 시대(Age of Reason)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며 미술에 대한 관념이 변화한 것도 이 시기부터였다. [475~476p]
- 전에는 한 시대의 양식이란 그저 어떤 일이 행해지는 방식이었고 사람들은 그것이 어떤 바람직한 효과를 얻는 데 가장 올바르고 훌륭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채택할 뿐이었다. 이성의 시대가 되자 사람들은 양식에 대해 의식하기 시작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아직도 많은 건축가들은 팔라디오의 책 속에 나오는 규칙들이 훌륭한 건물을 위한 ‘올바른’ 양식을 보장해준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에 관해 다른 문헌에 관심을 가진다면 ‘왜 꼭 팔라디오 양식이어야만 하는가’라고 말할 사람들은 반드시 나타나기 마련이다. [476p]
- 전통의 사슬이 단절되었다는 사실이 그림과 조각에서는 건축처럼 즉각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훨씬 더 커다란 의의를 지닌 것이었다. 여기서도 문제의 근원은 멀 18세기 중엽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우리는 호가스가 미술의 전통에 대해 얼마나 불만을 품었으며(p. 462), 의도적으로 새로운 대중을 위한 새로운 그림을 창조하기 위해 나섰던 사실을 이미 살펴보았다. 한편 우리는 레이놀즈가 전통이 위험에 처해 있기라도 하듯이 그 보존에 얼마나 급급해 했던가 하는 것도 기억하고 있다. 위험은 앞서 말한 사실, 즉 이제는 그림 그리는 일이 장인으로부터 도제로 그 지식이 전승되는 보통의 직업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었다. 그 대신 그림이란 아카데미에서 가르쳐야 하는 철학과 같은 하나의 과목이 되어버렸다. ‘아카데미(academy)'라는 말 자체가 이러한 새로운 접근 방식 자체를 암시하고 있다. 이 말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그의 제자를 가르쳤던 올리브 숲 이름에서 나온 말로서, 나중에는 지혜를 추구하는 학자들의 모임을 가리키게 되었다. 16세기 이탈리아의 미술가들은 자기들이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학자들과 맞먹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들이 모이는 장소를 처음으로 아카데미라 불렀다. 이러한 아카데미가 점차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기능을 맡게 된 것은 18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따라서 과거의 위대한 화가들이 안료를 갈고 윗사람드을 도와주면서 직업적인 기술을 전수받았던 구식의 방법들은 쇠퇴하고 말았다. 레이놀즈 같은 아카데미의 교사들이 젊은 학생들에게 과거의 걸작들을 부지런히 연구하여 그들의 기교를 익히라고 재촉해야 했던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18세기의 아카데미는 왕실의 후원을 받았다. 이것은 왕 스스로가 왕국 내의 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술이 번창하기 위해서는 왕립 기관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것보다 그 시대 미술가들의 그림과 조각을 기꺼이 사려고 하는 구매자들이 많아야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여기에서 어려운 문제가 생겨났다. 아카데미에서는 옛 거장들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데 역점을 두었는데 바로 이 사실이 후원자들로 하여금 당시 생존해 있는 화가들에게 그림을 의뢰하기보다 거장의 작품을 사게금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아카데미는 파리에서 처음으로, 그 후 런던에서도 회원들의 작품을 매년 전시하기로 계획하였다. 오늘날 화가와 조각가들이 비평가들의 관심을 끌고 구매자를 찾기 위해 전시회를 열고 또한 그것을 위해 작품을 주로 제작한다는 관념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는 우리로서는 이것이 얼마나 획기적인 변화였는지 깨닫기 힘들 것이다. 이러한 연례 전시회들은 상류 사교계에 화젯거리를 제공해주는 사회적 행사였으며, 미술가들에게 명성을 가져다주기도 했고 빼앗아가기도 했다. 요구하는 것이 무언지 분명한 개인 후원자들이나 취향을 짐작할 수 있는 일반 대중을 위해 작품을 만드는 대신 미술가들은 이제 전시회에서 성공하기 위한 작품을 만들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한 전시회에는 화려하고 가식적인 것이 단순하고 진지한 것을 압도해버릴 위험이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화가들에게 있어,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그림의 주제를 멜로드라마적인 것으로 선택하고 작품의 규모를 크게하거나 요란한 색채에 의지하게 되는 것은 정말 큰 유혹이었다. 따라서 몇몇 미술가들이 아카데미의 ‘관한적’인 미술을 경멸했으며, 대중의 취향에 호소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사람들과 소외 당한 사람들 사이의 의견 충돌이 그동안 미술이 발전해온 공통의 기반을 파괴해버릴 위험을 몰고 왔다는 사실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심각한 위기가 즉각 불러일으킨 뚜렷한 영향은 미술가들이 도처에서 새로운 종류의 주제를 찾아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그림의 주제가 아주 당연히 정해져 있는 것이라고 여겨졌었다. 미술관과 박물관을 돌아보면 우리는 똑같은 주제를 취급하고 있는 그림들이 얼마나 많은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물론 과거의 그림들 중 대다수는 성경에서 따온 종교적 주제들이나 성자의 전설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속적인 성격의 그림들까지도 대개는 신들의 사랑과 다툼에 고나한 이야기들이 있는 고대 그리스 신화라든가 용맹과 자기 희생이 있는 로마의 영웅 설화, 또는 의인화를 통해 일반적인 진리를 보여주는 우의적 주제 등 몇 가지 선택된 주제에 국한되어 있었다. 18세기 중반 이전의 미술가들은 주제에 있어서 이러한 좁은 한계를 벗어난 적이 거의 없었다.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사랑 이야기 따위의 한 장면이나 중세나 당대의 역사적 일화를 그리는 일이 그토록 드물었던 것은 신기할 뿐이다. 이런 모든 것들은 프랑스 대혁명 시대에 매우 급속히 변해버렸다. 갑자기 미술가들은 셰익스피어 작품의 한 장면에서부터 시사적 사건에 이르기까지 상상력에 호소하고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을 그들의 주제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당시의 성공적인 화가나 외로운 반역자들은 다 같이 전통적인 주제를 무시한다는 점에서 유일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481~482p]
- 그가 마술을 부리듯 비단과 황금의 반짝임을 만들어내는 기술은 티치아노나 벨라스케스를 연상시키지만 사실 고야는 그들과는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옛 거장들은 권력에 아첨했지만 고야는 그것을 버리는 것을 전혀 아끼워 하지 않은 듯 보인다. 그는 그들의 초상화에서 허영과 추악함, 탐욕과 공허함을 낱낱이 드러냈다(도판 319). 자기 후원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던 궁정화가는 전무후무할 것이다. [485p]
- 렘브란트처럼 그도 수많은 에칭을 제작했는데, 그 중 대부분이 부식된 선뿐만 아니라 그늘진 부분들까지도 나타낼 수 있는 애쿼틴트(acuatint)라는 기법으로 제작된 것이었다. [485p]
- 고야는 전쟁과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고통받고 있는 자기 나라의 운명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저 시(詩)와 같은 하나의 환상을 만들어 냈던 것일까?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전통의 단절이 가져온 가장 뚜렷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이제 미술가들은 지금까지 오직 시인들만이 누렸던 개인적 환상의 세계를 종이 위에 펼쳐놓는 자유를 얻게 된 것이었다. [488p]
- 블레이크는 환상에 너무 깊이 빠진 나머지 현실 세계를 그리길 거부하고 오로지 자기 내면의 눈에만 의존했다. 그의 소묘상의 오류를 지적하기는 쉽지만 그렇게 한다면 그의 예술의 진가를 놓치게 될 것이다. 중세의 미술가들처럼 그는 정확한 묘사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꿈 속의 형상 하나하나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단순한 정확성의 문제는 그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같이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그는 르네상스 이래로 공인된 전통의 규범을 의식적으로 포기한 최초의 화가였다. [490p]
- 주제를 마음대로 선택하는 새로운 자유를 얻게 된 화가들이 가장 많은 혜택을 입었던 분야는 풍경화였다. [490p]
- 컨스터블의 생각은 터너와는 매우 달랐다. 터너가 경쟁하고 능가하기를 원했던 전통이라는 것이 그에게는 단지 장애물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은 과거의 위대한 거장들을 존경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클로드 로랭의 눈이 아니라 그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그리려고 했다. 그는 게인즈버러가 그만둔 곳에서 다시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p. 470, 도판 307). 그러나 게인즈버러조차도 여전히 전통적인 기준에서 보아 ‘한 폭의 그림 같다(picturesque)'고 생각될 만한 소재들을 선택했으며 여전히 자연을 목가적인 장면들을 위한 아늑한 무대로 보았다. 컨스터블에게는 이러한 모든 생각들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진실만을 원했을 뿐이다. [495~496p]
- 전통과의 단절은 화가들에게 터너나 컨스터블의 작품에서 구체화된 두 가지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들은 붓과 물감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 되어 감동적이고 극적인 효과를 추구할 수 있었다. 또 자기 앞에 놓여진 소재들을 성실하게 묘사하며 끈질기고 정직하게 그것을 탐구하려는 결심을 할 수 있었다. [497p]
25 끝없는 변혁
19세기
- 아카데미와 전시회, 비평가들과 감식가들은 ‘예술(Art)'과 단순한 ’기술‘(화가의 기술이든 건축가의 기술이든)간의 차이를 명확히 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동원했다. 이제 미술이 존재 근거로 삼아왔던 바탕들은 또 다른 측면에서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다. 산업 혁명은 장인 기술의 전통을 무너트려 기계 생산이 수공업을 대신하게 되었으며, 소규모 작업장은 대공장으로 바뀌어갔다.
이러한 변화의 가장 직접적인 결과는 건축에서 가장 잘 드러났다. 즉 견실한 장인 기술의 결여는 ‘양식’과 ‘미’에 대한 이상한 집착과 함께 이 시기의 건축을 거의 말살시켰다. 물론 수적인 면에서 보면 19세기에 지어진 건축물이 이전 시기에 지어진 건물 수보다도 훨씬 많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는 영국과 미국 전역의 도시들이 급속도로 팽창하여 모두 ‘건물로 둘러싸인 지역’으로 변화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나는 건물들은 그 나름의 자연스러운 양식을 지니고 있지 못하였다. 이는 조지 시대까지 유용하게 사용되었던 경험적인 방식이나 견본책들이 이 시기에 와서는 너무 단순하며 ‘비예술적’이라는 이유로 외면당한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업가나 시의원들은 새 공장이나 기차역, 학교나 박물관을 세우는 데 있어 자기 자신의 취향을 고집했다. 예를 들어 일단 기타 세부 사항이 합의된 후에는 건축가에게 문은 고딕 양식으로, 건물은 노르만 성이나 르네상스의 궁전 혹은 오리엔트 회교 사원 양식으로 해달라는 요구를 했다. 물론 전통적인 건축 방법이 어느 정도 수용되긴 했지만 사태 개선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성당은 대개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이는 고딕 양식이 소위 ‘신앙의 시대’에 지배적인 양식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극장이나 오페라 하우스에는 과장된 바로크 양식이 선호되었으며 성이나 관공서에는 위엄 있어 보이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이 적용되었다. [499p]
- 한편 회화나 조각의 경우는 건축에서와 같은 ‘전통적인 양식’이라는 것 자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전통의 단절’이 미친 영향이 건축에 비해 미약하리라 생각되기 쉽지만 실은 그렇지도 않았다. 흔히 화가의 생애는 괴로움과 불안의 연속이라고 한다. 그러나 화가들에게도 소위 ‘좋은 시절’이 있었다. 그때에는 화가 스스로가 내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필요도 없었고 그의 일은 다른 직업들처럼 안정되어 있어 늘 그려야 할 제단화나 초상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거실 장식을 위한 그림과 별장을 꾸미기 위한 벽화를 필요로 했고 이러한 작업은 어느 정도 예정된 일정에 따라 이루어졌다. 화가는 후원자들이 요구하는 그림을 그렸고 그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껏 능력을 발휘하여 불후의 명작을 낳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실생활에 있어서의 그의 지위는 안정되어 있었다. 바로 이러한 안정감이 19세기에 이르러 무너지게 되었다. 먼저 ‘전통의 단절’은 화가들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주었다. 이제 소재가 풍경화인지 과거의 극적인 장면인지, 주제의 경우도 밀턴의 작품인지 아니면 고전 문학인지, 또 방식에 있어서도 다비드 식의 고전주의인지 환상적인 낭만주의인지하는 모든 결정이 화가의 손에 맡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듯 화가의 선택권이 확대되면 확대될수록 화가 자신의 취향과 대중 최향 간의 간극은 점차 벌어져갔다. 보통 그림을 사려는 사람은 어떤 것을 살지 미리 염두에 두고 다른 데서 이미 보았던 것과 비슷한 것을 사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과거에는 이러한 요구가 쉽게 충족되었다. 왜냐하면 화가에 따라 그림의 수준이 천차만별이긴 했지만 동시대의 그림은 여러 가지 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한 단일한 전통이 사라졌기 때문에 미술가와 후원자 간에 종종 마찰이 빚어졌다. 후원자의 취향은 한쪽으로 고정되어 있는 반면 미술가는 거기에 만족하지 못했다. 따라서 생활에 쪼들려 어쩔 수 없이 후원자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경우 그들은 ‘양보’하고 있다고 느끼면서 자존심에 손상을 입었고 위신도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내부의 목소리만을 따라 자신의 예술관에 어긋나는 제안을 일체 거부한다면 굶어죽을 처지에 빠지게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19세기 미술가들은 관례를 따르고 대중의 요구에 부합하는 부류와 스스로 선택한 고립을 자랑스러워하는 부류로 크게 나뉘어 이 둘 사이의 골은 점점 깊어져갔다. 게다가 이러한 상황은 산업 혁명과 장인 기술의 쇠퇴, 전통성이 결여된 새로운 중산 계급의 등장, ‘예술’을 빙자한 값싸고 조잡한 상품 생산으로 인해 더욱 악화되어 일반 대중의 취향 수준을 하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500~501p]
- 사실 두 번째 혁명은 주로 주제에 관한 인습과 관련된 것이었다. 당시 아카데미는 고상한 그림은 반드시 고상한 인물을 그려야 하며 노동자나 농민은 네덜란드의 전통적인 풍속화(p. 382, 도판 246)에나 적합한 주제라고 믿고 있었다. 1848년 2월 혁명 시기에 일군의 화가들이 프랑스의 바르비종(Barbizon)이라는 마을에 모여 컨스터블의 지도 아래 새로운 시각으로 자연을 관찰했다. 이들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장 프랑수아 밀레(Jean-Fancois Millet : 1814-75)이다. 그는 풍경화에서의 이러한 관점을 인물화로까지 확장하여 농부들의 진솔한 생활모습과 그들이 들에서 일하고 있는 장면을 그리고자 했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혁명’이라고까지 말하는 것이 좀 이상할지도 모르지만 그 이전까지 농부들은 브뢰헬의 그림에서 보듯(p. 382, 도판 246)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묘사되곤 했다. 도판 331은 밀레의 유명한 작품<이삭 줍는 사람들>이다. 여기에는 어떤 극적인 사건도 없으며 줄거리도 없다. 다만 세 명의 농부들이 추수가 한창인 넓은 들판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아름답지도 우아하지도 않다. 그렇다고 목가적인 분위기가 흐르는 것도 아니다. -중략- 이렇게 해서 이 세명의 농촌 아낙들은 아카데미 파의 그림에 등장하는 영웅보다 오히려 더 그럴듯한 자연스러운 품위를 지니게 되었다. 언뜻 보기에 허술한 듯한 구성은 고요한 균형감을 지탱해주고 있다. 인물들의 움직임과 배치는 계산된 리듬에 따른 것이며 이것이 전체 구성에 안정감을 주어 우리로 하여금 화가가 이 장면 얼마나 엄숙한 것으로 보았는지 느끼게 해준다.
이러한 운동에 명칭을 부여한 화가는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 1819-77)였다. 그는 1855년 파리의 한 낡은 건물에서 개인전을 열고 이것을 ‘사실주의(Le Realisme), G. 쿠르베 전’이라 불렀다. 그의 ‘사실주의’는 미술에 있어서의 혁명을 뜻하는 것이었다. 쿠르베는 오직 자연의 제자이기를 원했다. 어떤 면에서 그는 개성과 방식은 카라바조(p. 392, 도판 252)와 유사했다. 즉 그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진실을 원했다. [507~508p]
- 진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자연을 ‘이상화’하고(p. 320)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 찬사를 보낸 것은 라파엘로와 그의 추종자들이었다. 따라서 미술이 개혁되기 위해서는 라파엘로 훨씬 이전의 시대-미술가들은 ‘하느님께 정직했던’ 장인들이었으며 땅의 영광이 아니라 하늘의 영광을 염두에 두고 최선을 다해 자연을 모사했던 시대-로 되돌아가야 했다. 그들은 라파엘로에 이르러 미술이 불순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앙의 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고 믿고 스스로를 ‘라파엘 전파(前派, Pre-Raphaelite Brotherhood)'라 불렀다. [511p]
- 프랑스 미술의 세 번째 혁명의 물결(들라크루아에 의한 첫 번째 혁명의 물결과 쿠르베에 의한 두 번째 파동을 거쳐)은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 1832-83)와 그의 친구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들은 쿠르베의 주장을 신중하게 검토하여 진부하고 무의미해진 회화의 인습을 찾아내려 하였다. 그들은 자연을 묘사하는 방법을 발견했다는 전통 미술의 모든 주장이 그릇된 생각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즉 전통 미술에서 사용하는 표현 방법은 기껏해야 인공적인 조건하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511~512p]
- 오히려 르네상스 시기에는 세계가 어떻게 보여져야 하는지에 대한 이론적 지식의 중요성이 과학적인 원급법의 발견과 해부학의 강조를 통해 감소되기는커녕 더욱 득세하였다(pp.229-30). 다음 시기의 위대한 미술가들은 시각 세계의 실감나는 모습을 그릴 수 있게 해준 연이은 발견들을 하엿지만 그들 중 누구도 각각의 대상이 그림 속에서 반드시 쉽게 인지되는 일정한 형태와 색깔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에 감히 도전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마네와 그의 추종자들이 일으킨 채색에 있어서의 혁명은 그리스 인들이 했던 형태 표현에서의 혁명에 비견할만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발견했던 것은 우리가 옥외에서 자연을 볼 때 각 대상들이 그들 고유한 색깔을 가진 개별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눈에서(실제로는 우리 마음 속에서) 뒤섞여 훨씬 더 밝은 색조의 혼합물로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512~513p]
- 이 새로운 이론들은 외광(外光, plein air), 즉 옥외의 자연 광선에서의 색의 취급뿐 아니라 움직이고 있는 형태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였다. 도판 355는 마네의 석판화(lithographs;돌 위에 직접 드로잉해서 찍어내는 방법으로 19세기 초반에 발명되었다)가운데 하나이다. 얼핏 보면 혼란스러운 낙서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경마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마네는 우리로 하여금 그가 제시한 혼란 속에서 드러나는 알아보기 힘든 형태들을 어렴풋이 암시만 해줌으로써 빛과 속도와 운동감의 인상들을 포착하길 원했다. 말들은 빠른 속도로 우리를 향해 질주하고 스탠드에는 흥분한 관중들이 자리를 꽉 메우고 있다. 이 일례는 마네가 형태를 재현함에 있어 얼마나 그의 지식에 영향 받기를 거부했는가 하는 사실을 훨씬 더 명확히 알려준다. 그가 그린 말들 중 어느 것도 네 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실제로 우리가 그런 장면을 순간적으로 힐끗 볼 때 네 개의 다리가 다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514~517p]
-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회화는 반드시 ‘바로 그 현장’에서 마무리되어야 한다는 모네의 생각은 오래된 습관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일 뿐 아니라 안이한 제작 방법을 거부한 것이기에 필연적으로 기법상 새로운 방법들을 발전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자연’ 혹은 ‘모티프’는 구름이 해를 가리며 지나가거나 바람이 수면에 파장을 일으킬 때 시시각각 변화한다. 대상의 순간적인 양상을 놓치지 않으려는 화가는 예전의 대가들처럼 갈색조 바탕 위에 겹겹이 덧칠하는 것은 물론, 색채들을 혼합하고 어울리게 배치할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화면 전체의 효과를 위해 세부 묘사에 신경을 덜 쓰면서 빠른 붓질로 캔버스에 물감을 칠해나가야만 했다. [517p]
- 인상주의자들은 레오나르도가 입체감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어두운 그늘이 옥외의 밝은 광선 아래에서는 발생할 수 없음을 발견하고 이러한 전통적인 방식을 탈피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종전의 어떤 시대의 화가들보다도 더욱 더 의도적으로 윤곽선을 흐릿하게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들은 인간의 눈이 놀라운 도구임을 알고 있었다. 눈에 적절한 암시를 주기만 하면 눈은 우리가 거기 있을 거라고 알고 있는 전체 형태들을 짜맞추어 보여준다. 그러나 그런 회화들은 올바른 방법으로 보아야 한다. 인상주의 전시회를 처음 방문한 사람들은 작품에 코를 박고서 아무렇게나 그어진 듯한 뒤범벅된 붓놀림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인상주의 화가들을 미쳤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521~522p]
- 이 미술가들이 새롭게 가지게 된 자유와 능력에 대한 감회는 실로 가슴 벅찬 것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직면해야 했던 수많은 조소와 적의를 보상해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갑자기 세계 전체가 회화를 위한 적절한 주제들을 제공하였다. 색조의 아름다운 조합, 색채와 형태들의 흥미로운 구성, 태양과 그늘진 응달의 즐거운 조화 등을 발견하게 되는 그 어떤 장소에서라도 미술가는 이젤을 세워놓고 그가 받은 인상을 캔버스 위에 옮겨놓을 수 있었다. ‘품위 있는 주제’니 ‘균형 잡힌 구도’니 ‘정확한 소묘’니 하는 과거의 낡아빠진 허깨비들은 이제 모두 사라져버렸다. 이제 미술가들은 그가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그리는가에 있어 오직 자기 자신의 감각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었다. 이러한 인상주의자들의 힘겨운 투쟁을 돌이켜볼 때 이 젊은 화가들의 관점이 저항에 부딪쳤다는 사실보다는 그러한 관점들이 너무 금방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사실이 더욱 놀랍다. 비록 그러한 투쟁이 치열해서 관련된 미술가들은 너무 힘겨웠겠지만, 인상주의자들의 승리는 완벽한 것이었다. 최소한 이러한 젊은 반항아들 중 몇몇, 특히 모네나 르누아르와 같은 화가들은 운좋게도 승리의 결실을 즐기며 전 유럽에서 유명세를 타고 존경을 받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오래 살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작품이 공공(公共)컬렉션에 포함되고 부자들이 탐내는 소유물이 되가는 것을 목격했다. 게다가 이러한 변화는 미술가들과 비평가들에게 똑같이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그들을 비웃었던 비평가들은 결과적으로 큰 오류를 범했음이 증명되었다. 비평가들이 인상주의자들의 작품을 비웃지만 말고 그것을 사놓았더라면 그들은 큰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비평은 다시는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위신을 잃게 되었다. 인상주의자들의 투쟁은 이제 새로운 미술 운동을 일으키려는 모든 혁신자들의 소중한 전설이 되어 필요할 때는 언제나 일반 대중이 새로운 방법을 인식하지 못했던 하나의 일례로 지적되었다. 어느 면에서 이러한 악명 높은 실패는 미술사에서 인상주의 이념의 궁극적인 승리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522~524p]
- 19세기 사람들이 세계를 좀더 다른 시각으로 보도록 도와준 두 조력자가 없어더라면 아마도 인상주의자들의 승리가 그처럼 빠르고 철저하게 이루어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조력자 중 하나는 사진술이었다. 이 발명이 이루어진 초기에는 사진이 주로 초상용으로 쓰여졌다. 장시간의 노출이 필요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진을 찍기 위해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고 서 있을 수 있도록 뒤에서 받쳐주어야 했다. 휴대용 카메라와 스냅 사진의 발전은 인상주의자들의 회화가 등장하던 시기와 때를 같이 했다. 카메라는 우연한 광경과 예기치 않은 각도가 가지는 매력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게다가 사진술의 발달은 미술가들로 하여금 더 심도 있는 일을 굳이 그림으로 그릴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과거의 회화가 수많은 유용한 목적을 위해 쓰여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회화는 저명 인사의 초상이나 시골 저택의 기록으로 사용되었고 화가란 사물의 순간적인 성질을 극복하고 어떤 대상의 외관을 영구히 보존할 수 있게 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17세기의 한 네덜란드 화가가 멸종 직전의 도도새를 그리지 않았더라면 도도새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19세기의 사진술은 회화가 지닌 바로 이러한 기능을 떠맡게 되었다. 이것은 신교도들의 성상 폐기(p. 374) 만큼이나 미술가들의 지위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이러한 새로운 기술이 고안되기 이전에는 자기 자신에 대해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거의 대부분 생전에 적어도 한번은 자신의 초상화를 남기기 위해 화가 앞에 마주 앉았었다. 이제 사람들은 화가인 친구를 도와주려는 의도가 아닌 이상 이러한 수고를 하려고 하질 않았다. 그래서 미술가들은 점차적으로 사진술이 미치지 못하는 새로운 영역을 탐색하도록 내몰리게 되었다. 사실상 근대 미술은 이런 발명의 충격 없이는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두 번째로 인상주의자들이 새로운 소재와 참신한 색채 구성을 야심적으로 찾아나가도록 협력해준 조력자는 일본의 채색 목판화였다. 일본의 미술은 중국 미술의 영향을 받아 발전하면서(p. 155) 약 1000년 동안 지속해왔다. 그러나 아마도 유럽 판화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여겨지는 18세기의 일본 미술가들은 동양 미술의 전통적인 소재들을 포기하고 채색 목판화를 위한 주제로서 하층민의 생활 장면들을 선택했다. 이런 채색 목판화는 최고의 장인이 지닌 기교의 완벽성과 매우 대담한 의도가 결합된 것이었다. 일본인 감식가들은 이런 값싼 작품들을 별로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그들은 근엄한 전통적 방법을 더 선호했다. 19세기 중반 일본이 유럽과 미국으로부터 교역 관계를 강요받았을 시기에 이러한 판화들은 물건을 싸는 포장지나 빈 곳을 메우는 종이로 자주 사용되었고, 차(茶)상점에서 싼 값에 구할 수 있었다. 마네 주변의 화가들은 그 판화들의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그것들을 열심히 수집한 최초의 부류였다. 이 판화들 속에서 그들은 프랑스 화가들이 제거하려고 노력하였던 아카데믹한 규칙가 상투적 수법에 의해 훼손상하지 않은 전통을 찾아내었다. 일본 판화는 프랑스 화가들로 하여금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유럽적 인습이 아직도 그들에게 남아 있었는지 깨닫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일본인들은 사물의 우연적이고도 파격적인 면을 즐겼다. -중략- 이처럼 유럽 회화의 기본적인 규칙을 과감하게 무시한 점이 인상주의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들은 이러한 규칙에서 시각에 대한 고대의 지배적인 지식이 잔존해 있음을 발견해냈다. 그림이 항상 어느 장면의 모든, 또는 관련되는 부분들을 다 보여주어야만 하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
이러한 가능성에 깊은 감명을 받은 화가는 다름 아닌 에드가 드가(Edgar Degas : 1834-1917)였다. [524~527p]
- 그들처럼 로댕도, 자신의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상상할 여지를 남겨놓기를 좋아했다. 심지어 그는 때때로 형상이 막 나타나 모양이 갖추어지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 거친 돌의 일부를 그대로 놔두기까지 했다.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그의 이러한 행위는 순전히 게으름의 소산이 아니면 비정상적인 기벽으로 보였을 것이다. -중략- 그 누구도 그의 작품 제작 절차가 무지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그의 영향력은 인상주의를 얼마 안되는 프랑스의 찬미자들 무리 밖에서도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을 터주는 데 크게 기여했다. [530p]
26 새로운 규범을 찾아서
19세기 후반
- 표면적으로 볼 때 19세기 말은 대번영의 시기였으며 이러한 번영에 스스로 만족한 시기였다. 그러나 스스로를 아웃사이더라고 느낀 미술가와 작가들은 대중의 마음에 드는 예술의 목적과 방법에 대해 점차 불만을 갖게 되었다. 건축은 그들에게 가장 손쉬운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건축은 공허한 틀에 박힌 형태로 발전되어왔다. 엄청나게 팽창하는 도시의 구획구획을 꽉 채운 아파트, 공장 그리고 공공 건물들이 그 건물의 목적과는 전혀 관계없는 잡다한 양식으로 세워졌다. 그것은 기술자들이 먼저 짓고자 하는 건물에 적절한 뼈대를 세운 다음, ‘역사상의 양식들’을 모아놓은 양식집 중에서 하나를 골라 건물 정면을 장식하여 약간의 ‘예술성’을 가미시킨 것처럼 보였다. 대다수의 건축가들이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이 같은 과정에 만족하고 있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대중은 이러한 원주, 벽기둥, 처마 장식띠, 쇠시리 장식 등을 원했고 건축가들은 이러한 요구에 부응했던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이르러 점차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방식의 불합리성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영국의 비평가와 미술가들은 산업 혁명으로 인한 수공예(手工藝) 기술의 전반적인 쇠퇴에 불만을 느꼈고, 한때는 그 자체로 의미와 기품을 지녔던 장식물이 기계에 의해 값싸고 천박한 싸구려 복제품으로 변하는 광경을 목격하고 반감을 갖게 되었다. 존 러스킨(John Ruskin)이나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같은 사람들은 미술과 수공예의 철저한 개혁과, 싸구려 대량 생산물 대신 양심적이고 가치 있는 수공예품이 자리를 되찾길 꿈꾸었다. 비록 그들이 옹호했던 변변찮은 수공예품이 현대에 와서는 엄청난 사치품이 되어버렸지만, 그들의 비평은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그들의 선전 계몽 활동이 기계적 대량 생산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그것이 야기한 문제들에 대중의 눈을 뜨게 했고 순수하고 단순한 ‘손으로 만든 소박한’것에 대한 기호를 확산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536p]
- 이러한 의문들이 당시에 선풍적인 인기를 끈 벨기에 건축가 빅토르 오르타(Victor Horta : 1861-1947)의 설계 밑바탕에 깔린 논리였을 것이다. 오르타는 일본의 건축 양식에서, 좌우대칭의 원칙을 버리고 우리가 이 책의 동양 미술편(p. 148)에서 살표보았던 굽이치는 곡선의 효과를 활용하는 것을 배웠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모방자는 아니었다. 그는 이 곡선들을 현대의 요구에 잘 맞는 철제 구조물에 옮겨놓았다(도판 349). 브루넬레스키(Brunelleschi)이래 처음으로 유럽의 건축가들은 완전히 새로운 양식을 보게 된 것이다. 이 새로운 창안은 매우 자연스럽게 아르 누보와 동일시되었고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왜냐하면 ‘양식’에 대한 이러한 자각과 일본 미술이 유럽 미술을 곤경으로부터 구해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건축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세기 미술의 업적, 즉 19세기 말까지도 젊은 미술가들을 사로잡고 있었던 그 업적에 대한 우려와 불만의 느낌이 생겨나게 된 것을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감저에서 요즘 흔히 ‘현대 미술’이라고 부르는 여러 가지 미술 운동이 성장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 근원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인상파 화가들이 당시의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는 회화의 규칙들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현대 미술의 시조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상파 화가들의 목적도 르네상스 시대에 이루어진 자연의 발견 이래로 계속 발전해온 미술의 전통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들 역시 자연을 보이는 대로 그리기를 원했다. 그들이 벌인 보수적인 대가들과의 논쟁은 그 목적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대한 것이었다. [536p]
- 세잔은 이와 같이 웅대하면서도 평온한 분위기를 지닌 미술을 자신의 예술적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푸생의 방법으로는 그것을 더 이상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과거의 대가들은 적절한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비로소 균형과 견고함을 이룰 수 있었다. 그들은 자연을 눈으로 본 그대로 그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그림은 고전 시대 작품의 연구를 통해서 얻어지는 형태의 배열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공간이나 견고함에 대한 인상조차도 각각의 대상을 새롭게 관찰하기보다는 확고한 전통적인 규범을 적용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세잔은 이러한 아카데믹한 수법이 자연과 대립된다고 생각하는 인상주의 동료들과 견해를 같이 했다. 그는 색채와 입체감의 묘사에 있어서 새로운 발견들을 높이 샀다. 그는 또한 이때까지 그가 알고 있었고 배워왔던 것에서 벗어나, 자신의 인상에 따라 자기가 본 그대로 형태와 색채를 그리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 회화가 택한 방향에 대해 불안함을 느꼈다. 인상파 화가들은 ‘자연’을 그리는 데 있어 진정한 대가들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까? 과거의 위대한 그림들이 보여주었던 조화로운 구성, 견고한 단순성과 완전한 균형을 이루려는 노력은 어디에 있는가? [538p]
- 세잔은 어수선한 것을 싫어했다. 그러나 그는 조화로운 화면 구성을 살리기 위해 ‘구도된(composed)' 풍경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견고한 느낌을 살리기 위해 아카데믹한 소묘 방법과 명암법의 전통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색채의 올바른 사용에서 그는 더욱 절박한 문제와 마주쳤다. 세잔은 명료함뿐만 아니라 강렬하고 순도 높은 색채를 열망했다. -중략- 세잔은 온갖 모순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자연을 대했을 때의 감각적인 인상에 절대적으로 충실하고자 하는 그의 바램은, 그의 말대로 ’인상주의를 미술관에 있는 미술품과 같이 더욱 견고하고 지속적인 어떤 것‘으로 만들려는 그의 의도와 상충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종종 절망에 가까운 고심을 했으며 화폭에 정신없이 매달려 결코 실험을 중단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라울 것이 없다. 진정으로 놀라운 것은 그가 성공했다는 것, 즉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것을 작품 속에서 이루어냈다는 사실이다. 만약 미술이 계산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이러한 결과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미술은 계산이 아니다. 미술가들이 그토록 신경을 쓰는 균형과 조화는 기계의 균형과는 다르다. 그것은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것이며, 아무도 어떻게 또는 왜 일어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세잔 미술의 비밀에 관해서는 많은 글들이 쓰여졌다. 그가 무엇을 원했으며 무엇을 이루었나에 대해 갖가지 종류의 설명들이 제시되었지만, 그 설명들은 충분한 것이 못되며 때로는 자가 당착으로 들린다. 비평가들의 이러한 이야기는 우리를 짜증나게 할지라도 작품 자체는 항상 우리를 납득시켜주기 마련이다. 그래서 언제나 최선의 방법은 ’원화를 직접 가서 보는 것‘일 수밖에 없다. [539p]
- 이처럼 눈에 띄게 서툰 솜씨가 생겨난 이유는 쉽게 추리해볼 수 있다. 세잔은 회화의 전통적 수법 중 어느 하나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이전에 어떠한 그림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긁기에서부터 출발하려고 결심하였다. 네덜란드 화가는 자신의 놀라운 기교를 과시하기 위해 정물을 그렸다. 하지만 세잔은 자신이 해결하고자 했던 몇몇 특정한 문제들을 연구하고자 정물을 소재로 택했던 것이다. 알다시피 그는 입체감과 색채의 관계에 몰두해 있었다. 사과처럼 밝은 색채의 견고하고 둥근 물체가 이러한 문제를 탐구하는 데 있어서 이상적인 소재였다. 또한 그는 균형잡힌 화면 구성에도 관심이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과일 그릇의 한쪽을 잡아늘여 왼쪽의 빈 공간을 메꾸려했던 것이다. 그는 탁자 위에 있는 모든 형태들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고자 했기 때문에 그 관계가 잘 드러나보이도록 탁자를 앞으로 기울게 묘사했다. 아마도 이러한 작품들이 세잔에게 ‘현대 미술’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밝은 색채를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깊이감을 살리고, 깊이감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질서 있는 화면 배칠르 이루려고 한 그의 피나는 노력, 그 모색과 고투 속에서 필요하다면 기꺼이 희생시키고자 했던 단 하나는 바로 윤곽선의 고루한 ‘정확성’이었다. 그가 굳이 자연의 형태를 왜곡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바라는 효과를 얻는 데 도움이 된다면 사소한 세부의 왜곡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541~543p]
- 세잔이 인상파의 방법과 질서의 필요성을 어떻게 결합시킬까 고민하고 있는 동안, 한편에서는 그보다 한참 나이 어린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 :1859-91)rk 이 문제를 마치 수학 방정식을 풀 듯이 해결하려 하였다. 그는 인상주의 회화의 기법을 출발점으로 하여 색채가 시각에 미치는 작용에 대한 과학적인 이론을 탐구하였고, 순수 원색을 분할하여 규칙적인 점으로 찍어서 마치 모자이크처럼 화면을 구축하려고 하였다. 이렇게 하면 색채의 순도와 명도를 잃지 않고서도 눈에는(또는 마음 속에서라도) 혼합된 색처럼 보일 것이라고 그는 기대했다. 그러나 점묘법(pointillism)이라는 극단적인 기법은 자연히 모든 윤곽선을 무너트리고 모든 형태를 다양한 색깔의 점으로 분할하였으며, 그 결과 그의 그림은 알아보기 힘들게 되어버릴 위험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쇠라는 세잔이 이때까지 시도했던 것보다 더 극단적으로 형태를 단순화시켜 그의 복잡한 회화 기법을 보완하였다(도판 354). [544p]
- 이전의 어떤 화가도 고흐만큼 시종 일관 효과적으로 이러한 기법을 구하하지는 못했다. 알다시피 그 이전의 그림들, 이를테면 틴토레토의 작품(p. 370, 도판 237)이나 할스(p. 417, 도판 270), 마네의 작품(p. 518, 도판 337)에서도 대담하고 자유로운 붓놀림을 볼 수 있으나, 그러한 붓놀림은 오히려 화가의 탁월한 기량과 재빠른 감각, 그리고 어떤 장면을 상상할 수 있게 해주는 마술적인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흐의 붓자국들은 그의 격앙된 심리 상태를 전달하기 위한 것들이다. 고흐는 이러한 새로운 수법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대상과 장면, 즉 붓으로 색칠함과 동시에 소묘할 수 있고, 마치 글 쓰는 사람이 단어에 밑줄을 긋듯이 두텁게 물감을 바를 수 있는 소재를 즐겨 그렸다. 고흐가 그루터기와 관목들, 곡물밭, 울퉁불퉁한 올리브 나뭇가지, 불꽃처럼 생긴 짙은 색의 사이프러스 나무(도판 355)의 아름다움에 처음으로 눈뜬 화가가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547~548p]
- 이 두 화가는 다 같이 ‘자연의 모방’이라는 그림의 목적을 의도적으로 버리으로써 미술사에 있어서 중요한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물론 이유는 각각 달랐다. 세잔은 정물을 그릴 때 형태와 색채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고자 했고 자신의 특수한 실험에 필요한 때에만 이른바 ‘정확한 원근법’을 포기했다. 반면에 고흐는 그림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려 했고 이러한 목적을 이루는 데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형태를 왜곡시켰다. 두 사람은 모두 예부터 내려오는 미술의 규범을 타파하려고 하지 않았으면서도 이러한 지점에 도달했다. 그들은 ‘혁명가’인 체하지도 않았고 자기만족에 빠진 비평가에게 충격을 주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사실상 이 두사람은 자신들의 작품에 누군가가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다만 그렇게 해야 했기 때문에 그러한 방식으로 작업했을 뿐이다. [548~550p]
- 그러나 고갱이 아주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다. 낯설고 이국적인 것은 단지 작품의 주제만이 아니다. 그는 원주민의 정신 속으로 들어가 그들이 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물을 보려고 노력했다. 그는 토착민 장인들의 수법을 연구하고 때로는 자신의 작품 속에 그들의 것을 묘사하기도 했다. 그는 자기가 그린 원주민의 초상을 그러한 ‘원시’ 미술과 조화시키려 애썼다. 그래서 그는 형태의 윤곽을 단순화하고 넓은 색면에 강렬한 색채를 거침없이 구사했다. 세잔과는 달리 그는 이 단순화된 형태와 색채의 구성으로 인해 혹시 그의 작품이 평면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하는 점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551p]
- 유럽 미술이 일본 미술로부터 습득한 수법은 특히 광고 미술에 적합하다는 것이 곧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20세기가 되기 이전에 드가(p. 526)의 재능 있는 추종자였던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 : 1864-1901)은 이처럼 절제된 회화 수단을 포스터라는 새로운 미술(도판 361)에 활용했다.
삽화 미술 분야도 역시 그와 같은 영향이 확산되면서 똑같이 도움을 받았다. 이전 시대가 책의 출판에 쏟은 애정과 정성을 상기하면서 윌리엄 모리스(p. 535)와 같은 이들은 삽화가 인쇄된 페이지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지 않고 단지 이야기만을 전달하도록 조악하게 출판된 책이나 삽화를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젊은 천재인 오브리 비어즐리(Aubrey Beardsley :1872-1898)는 휘슬러와 일본 판화에서 영향을 받은 세련된 흑백 삽화(도판 362)로 유럽 전역에서 순식간에 명성을 얻었다.[553~554p]
- 아르 누보 양식이 유행하던 이 시기에 많이 사용된 찬사의 말은 ‘장식적’이라는 것이었다. 회화와 판화는 그것이 무엇을 묘사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기 전에 먼저 시각적인 즐거운 화면 구성을 보여주어야 했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이같이 장식적인 것을 추구하는 유행이 미술의 새로운 모색을 위한 길을 열어주었다. 회화나 판화 작품이 시각적인 즐거움을 줄 수 만 있다면 소재나 감동적인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 따위는 이제 더 이상 문제시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일부 미술가들은 점차 이러한 모든 추구 가운데서 무언가 중요한 것이 미술에서 사라졌다고 느꼈고, 그것을 되찾으로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앞서 보았듯이 세잔이 사라졌다고 느낀 것은 균형과 질서의 감각이었다. 인상주의자들은 순간순간의 감각에만 너무 사로잡힌 나머지 자연의 굳건하고 지속적인 형태는 소홀히 했다고 느꼈던 것이다. 반 고흐는 인상주의 시각적 인상에만 집착하여 빛과 색의 광학적 성질만을 탐구한 나머지 미술이 강렬한 정열을 상실하게 될 위험에 처했다고 느꼈다. 즉 강렬한 정열을 통해서만 예술가는 자신의 감정을 다른 사람이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고갱은 그가 본 인생과 예술 전부에 대해 철저하게 불만을 느꼈다. 그는 보다 단순하고 보다 솔직한 어떤 것을 열망했고 그것을 원시인들 속에서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오늘날 우리가 현대 미술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불만의 감정에서 자라난 것이다. 이 세사람의 화가가 모색했던 제각각의 해답은 세 가지 현대 미술 운동의 이념적 바탕이 되었다. 세잔의 해결 방법은 결국 프랑스에 기원을 둔 입체주의(Cubism)를 일으켰고, 반 고흐의 방법은 독일 중심의 표현주의(Expressionism)를 일으켰다. 고갱의 해결 방법은 다양한 형태의 ‘프리미티비즘(primitivism)'을 이끌어냈다. 처음에는 이 세 가지 운동이 ’미친‘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오늘날에는 자신들이 처해 있던 막다른 상태에서 탈출하기 위한 미술가들의 끊임없는 시도로서 어렵지 않게 설명될 수 있다. [554~555p]
27 실험적 미술
20세기 전반기
- 주지하다시피 미술가들이 양식을 자각하고 실험하기 시작하며, 일종의 표어로서 새로운 ‘주의’를 내세우면서 참신한 미술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던 시기가 바로 그 무렵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새롭고 지속적인 현대식 양식을 창출하는 데 성공한 미술 분야는 다양한 표현 양식의 혼란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어왔던 건축 분야였다. 현대 건축은 서서히 이루어졌으나 그 원칙은 확고하여 이제는 어느 누구도 여기에 감히 도전하지 못한다. -중략- 이 젊은 건축가들은 건축이 ‘예술(fine art)'에 속한다는 관념에 집착하지 않고 장식을 거부하였으며 건축을 그 목적에 비추어서 새롭게 보자고 제안하였다. [557p]
- 그 중 가장 성공적이었던 사람은 미국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 : 1869-1959)였다. 그는 주택에서 중요한 것은 방이지 건물 정면의 외관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부가 살기 편하게 설계되어 있고 거주자의 요구에 잘 들어맞는다면 건물 외관도 그럴듯하게 보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중략- 그는 이른바 ‘유기적 건축(Organic Architecture)'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이 말은 건축물이 거주하는 사람의 요구와 지방의 특색에 따라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발생하고 성장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557~558p]
- 이를테면 기계로 만든 것이 사람의 손으로 만드는 것보다 못하다는 모리스의 주장이 옳았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해결 방안은 기계가 해낼 수 있는 것을 발견해내고 거기에 맞추어서 디자인을 조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558p]
- 그러나 몇 년 지나지 않아 그러한 건축물의 외관에 익숙해졌고 현대 기술이 탄생시킨 양식이 지닌 명확한 윤곽, 단순한 형태를 즐기게 되었다(도판 364). 이러한 취향의 혁신은 최초로 현대적 건축 재료를 대담하게 사용하는 실험을 하고 그로 인해 때때로 조소와 적의를 받았던 몇몇 선구자들의 공로로 이루어진 것이다. 도판 365는 현대 건축에 대한 찬반 논쟁의 중심이 되어왔던 실험적 건축물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은 독일 사람인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 1883-1969)가 데사우(Dessau)에 설립한 바우하우스(Bauhaus)인데 후에 나치의 탄압으로 폐쇄된 건축 학교이다. 이 학교는 미술과 기계 기술이 19세기처럼 분리될 필요가 없고 오히려 상호 간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세워졌다. 바우하우스의 학생들은 건축물과 가구의 설계를 실습했다. 이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상상력을 활용하고 대담하게 실험하되 그 설계의 목적을 잊지 않도록 가르쳤다. 철제 파이프 의자나 이와 비슷한 일상용 가구가 처음 고안된 곳도 바로 이 학교에서였다. 바우하우스의 기본 이념은 ‘기능주의(functionalism)'라는 용어로 요약된다. 이는 목적에 맞게 설계되어야만 그에 따라서 형태도 아름답게 보인다는 신념이다. 이러한 신녀은 확실히 상당 부분 진실에 가깝다. 어쨌든 기능주의는 19세기 미술 관념이 우리들의 도시와 방을 어질러놓는 데 사용했던 불필요하고 몰취미한 잡동사니를 제거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다른 표어들처럼 이 ’기능주의‘라는 것도 지나친 단순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기능적으로는 완벽하면서도 추하다거나 적어도 빈약한 것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이러한 양식으로 지어진 최고의 걸작은 그것이 기능에 맞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기능이라는 목적을 충족시키면서도 그것을 ’보기 좋게‘ 만들 수 있는 기술과 취향을 지닌 사람들에 의해 설계되었기 때문에 아름답다. 기능과 미(美) 사이에 숨겨진 조화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시행 착오를 거쳐야만 한다. 건축가는 반드시 다양한 비례와 재료를 자유롭게 사용하여 실험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실험 가운데 어떤 것은 건축가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을지도 모르나, 그렇다 하더라도 이 경험은 결코 헛된 것으로만 끝나지는 않았다. 어떤 예술가도 항상 ’안전하게‘ 행동할 수만은 없다. [559~561p]
- 소위 ‘초현대적’인 것을 싫어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벌써 자신들의 생활 속에 깊이 파고들어 왔으며 자신들의 취향과 기호를 형성하는 데 학몫을 했다는 것을 알면 아마 깜짝 놀랄 것이다. 초현대 회화를 그리는 반항아들이 발달시킨 형태와 색채 구성은 이제 상업 미술에서 상투적으로 써먹는 것이 되었다. 포스터나 잡지 표지, 옷감에서 그러한 것이 보일 때 우리는 그것을 평범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현대 미술은 형태와 무늬를 결합하는 새로운 디자인 방법을 실험하기 위한 장(場)으로서의 역할을 발견하게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561p]
- 그렇다고 해서 인상주의 이념이 단지 진실의 절반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인상주의 이래로 우리는 지식으로 아는 것과 보는 것을 서로 확실하게 분리시킬 수 없다는 것을 더욱더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도 나중에 시력을 회복하게 되면 보는 것을 배워야 한다. 약간의 자기 훈련과 자기 관찰을 통해 보면 소위 본다는 것이 대상에 대한 우리의 지식(또는 믿음)에 의해 형상이 잡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사물과 그것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이 상반될 때 분명히 드러난다. 때때로 잘못 보는 경우도 있다. -중략- 여기에서 우리는 감각적 인상에 따라 수동적으로 그린다는 생각이 매우 터무니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창문을 열고 밖을 볼 때 수천 가지 다른 방식으로 경치를 바라볼 수 있다. 그것들 가운데 과연 어떤 것이 진정한 감각적 인상이란 말인가? 우리는 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어느 하나부터 그리기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길 건너의 집과 집 앞의 나무가 있는 그림을 만들어야 한다. 무엇을 하든지 우리는 항상 ‘인습적’인 선이나 형태를 사용해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우리 내부에 있는 ‘이집트 인’은 억눌려 있을지는 모르나 결코 완전히 패배한 것은 아니다. [561~562p]
- 싫든 좋든 20세기의 미술가들은 창안자가 되어야 했다. 그들은 주목을 받기 위해 과거 대가들의 감탄적인 솜씨보다는 독창성을 추구해야 했다. 전통과 단절함으로써 비평가들의 주의를 끌고 추종자들을 매료시킨 것은 무엇이든 새로운 ‘주의’가 되어 미래의 미술을 주도하곤 했다. 그 미래는 언제나 오래 지속되지 못했는데, 20세기 미술의 역사는 이처럼 끊임없는 실험으로 기록되어야 한다. 그 시대의 수많은 재능 있는 미술가들이 이러한 노력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563p]
- 그가 택한 수법이 만화가의 수법과 비교될 수 있다고 한 반 고흐의 말은 사실이었다. 만화(caricature)는 항상 ‘표현주의적’이다. 만화가는 그가 조롱하려는 인물을 닮게 그리고 나서 그 인물에 대해 느낀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그것을 왜곡한다.k 자연에 대한 이러한 왜곡이 유머의 기치 아래 이루어지는 한 아무도 이를 이해하기 어렵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만화를 볼 때는 미술(Art)을 대할때처럼 편견을 가지고 대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지한 만화, 즉 상대방에 대한 우월감이 아니라 사랑, 존경, 두려움 따위를 표현하기 위해 사물의 외관을 의도적으로 변형시키는 미술은 반 고흐가 예언했던 것처럼, 실제로 사람들의 이해를 가로막는 장애물임이 판명되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모순되는 점은 없다. 사물에 대한 우리들의 감정은 그것을 보는 방식은 물론 더 나아가 기억하는 형태를 변화시킨다. 같은 장소라도 기쁠 때와 슬플 때에 따라 아주 다르게 보인다는 것은 누구나 경험하는 바이다. [563~564p]
- 표현주의 미술에 대해서 사람들이 당황하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자연의 형태가 왜곡되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결과가 아름다움과는 멀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만화가라면 사람의 추(醜)함을 보여주는 것도 당연시될 것이다. 그것이 그의 직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지한 미술가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사물의 외관을 변형시킬 때 그것을 추하게 만들기보다는 이상화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잊는다면 혹독한 반발을 살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뭉크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을 것이다. 고뇌의 외침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며 인생의 즐거운 면만을 보려는 것은 불성실한 태도라고. 표현주의자들은 인간의 고통, 가난, 폭력, 격정에 대해 아주 예민하게 느꼈기에 미술에서 조화나 아름다움만을 고집하는 것은 정직하기를 거부하는 태도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하는 측면이 강했다. [564p]
- 표현주의 운동은 독일에서 가장 풍요롭게 전개되었다. 독일에서 표현주의는 사실상 ‘보잘 것 없는 인간’의 분노와 복수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하였다. 나치가 1933녀에 권력을 잡게 되자 현대 미술은 일체 금지되고 이러한 미술 운동의 위대한 지도자들은 추방되거나 제작을 금지당했다. [567p]
- 만약 미술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자연에 대한 모방이 아니라 색채와 선을 선택해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표현주의의 이론이 옳다면 당연히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될 것이다. 주제를 모두 없애고 색조와 형태의 효과에만 의존하면 미술이 더욱 순수해지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그것이다. 언어의 도움이 없이도 완벽한 것이 될 수 있는 음악과 같은 예는 미술가와 비평가들에게 순수하게 시각적인 음악에 대한 꿈을 제시해주었다. 휘슬러가 자신의 그림에 음악적인 제목을 붙임으로써 어느 정도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갔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p. 532, 도판 348). 그러나 말로만 그러한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과 알아볼 수 있는 대상이 전혀 그려져 있지 않은 그림을 전시회에 출품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이것을 처음 시도한 사람은 당시 뮌헨에 살았던 러시아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였다. 칸딘스키는 다른 많은 독일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진보와 과학의 가치를 싫어하고 순수한 ‘정신성’을 지닌 참신한 미술을 통해 세계를 새롭게 재건하기를 바랬던 신비주의자였다. 그가 지은 다소 혼란스럽지만 열정적인 저서 《미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관하여》(1912)라는 책에서 순수색의 심리학적 효과, 이를테면 밝은 빨강색이 트럼펫 소리와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방법으로 정신과 정신을 결합시키는 것이 가능하며 또 그것이 필요하다는 신념으로, 그는 색채로 표현된 음악을 최초로 시도하여 전시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도판 372). 이로써 ‘추상 미술(abstract art)'이라고 불리는 것이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568~569p]
- 그러나 입체주의는 대상을 재현하는 것을 완전히 그만두지 않았으며 단지 대상을 다른 형태로 바꾸려고 했다. [570p]
- 대상의 형상을 구축하는 이러한 방법에는 한 가지 결점이 있다. 입체주의 창시자들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이러한 방법은 어느 정도 익숙한 형태에 한해서만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림에 나타난 다양한 조각들을 서로 연관시킬 수 있으려면 바이올린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 입체파 화가들이 기타, 병, 과일 그릇, 때로는 인물같이 우리에게 익숙한 소재를 다루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익숙한 소재가 등장해야만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각 부분 사이의 연관을 이해하고 그림 전체를 쉽게 해독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런 게임을 즐기는 것은 아니고 또 꼭 그래야만 한다는 이유도 없다. 그러나 그런 게임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화가의 진정한 목적을 오해하면 안된다. 어떤 이는 입체파 화가들이 바이올린은 ‘그렇게 생겼다’고 믿어주기를 기대하는 것이 그들의 지성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에 모욕하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다. 오히려 감상자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바이올린이 어떻게 생겼는지 감상자들도 이미 알고 있고 그들이 그러한 초보적인 지식을 얻으려고 그의 그림을 보러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캔버스 위에 그려진 평면적인 단편들로부터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입체적인 사물을 머리 속에 떠올리는 이 복잡한 게임을 자기와 함께 하자고 감상자들을 초청한 것이다. [574p]
- 분명히 피카소는 얼굴의 형상과는 전혀 닮지 않은 재료와 형태를 가지고 어느 정도까지얼굴 형상을 구성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했던 것이다. [575p]
- 피카소 자신은 그가 실험을 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했다. 그는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의 예술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비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사람들은 예술을 이해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왜 새의 노래는 이해하려 들지 않는가?” [576p]
- 입체파 화가들은 세잔이 손을 놓은 곳에서부터 계속해나갔다. 그 이후로 점점 더 많은 미술가들이 미술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소위 ‘형태’에 대한 문제를 새롭게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찾는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미술가들에게는 항상 ‘형태’가 먼저이고 ‘주제’는 그 다음의 문제였다. [577p]
- 물론 우리는 과거의 미술가들 역시 때때로 우연한 영감과 우연한 요행을 믿었으리라고 호가신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기분좋은 우연을 환영하기는 했으나 항상 자제하려고 하였다. 클레처럼 창조적인 자연에 대한 믿음을 지닌 많은 현대 미술가들은 그렇게 의도적으로 자제하려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작품이 그 나름대로의 법칙에 따라 ‘성장’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믿었다. [578p]
- 우리가 기억하고 있다시피 미켈란젤로의 조각 개념은 대리석 속에 잠들어 있는 듯한 형태를 끄집어 내어(p.313) 원석의 단순한 윤곽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그의 형상에 생명과 활기를 불어넣는 것이었다. 브랑쿠시는 정반대쪽에서부터 이 문제에 접근해 들어가기로 결심했었음에 틀림없다. 그는 조각가가 돌덩이를 변형시켜 인물상을 암시하게 만들면서도 원석의 본래 모습을 얼마만큼이나 보존할 수 있는지를 밝혀내고자 했다. [580p]
- 입체주의가 불러일으킨 화면 구성에 대한 관심은 파리, 러시아, 얼마 안 있어 네덜란드의 화가들 사이에 회화가 건축물과 같은 일종의 구조물로 될 수는 없을까 하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네덜란드 화가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 : 1872-1944)은 가장 단순한 요소인 직선과 원색으로 그림을 만들어내고자 하였다(도판 381). 그는 우주의 객관적인 법칙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명료하고 절도 있는 회화를 열망하였다. 몬드리안도 칸딘스키나 클레와 마찬가지로 어딘지 모르게 신비스런 경향을 지니고 있었고, 주관적인 눈에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으로 보이는 형태들 속에 감추어진 불변의 실재(實在)를 그의 예술이 밝혀낼 수 있기를 바랬다. [581p]
- 이와 같은 철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건 미술화가가 몇 개 되지 않는 색채를 결합시켜서 그것들이 제대로 어울려 보일 때까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연결시켜보는 신비스런 작업(pp. 32-3)에 완전히 몰두하게 되었던 마음의 상태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사각형 두 개만으로 이루어진 그림을 만드는 제작자가 성모를 그렸던 과거의 화가보다 더 큰 고민을 했다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성모상을 그리는 화가는 자신이 무엇을 그리려고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에게는 과거의 전통이 길잡이가 되어주고 있고 맞닥트린 문제에 대해 그 자신이 내려야 하는 결정의 수도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두 개의 사각형으로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야 하는 현대의 추상화가는 보다 바람직하지 못한 위치에 있다. 그는 사각형을 캔버스 여기저기에 놓아보면서 무한한 가능성을 검토해볼 거싱다. 언제 어디에서 멈추어야 할지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582p]
- 즉 현대 미술가들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것을 창조했다고 느끼고자 한다. 제아무리 솜씨 있게 만들어졌다 해도, 혹은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단지 현실에 존재하는 사물의 모사품이나 단순한 장식품에 그치는 것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그럴 듯하고 영속적인 어떤 것, 이 무미건조한 세상에 존재하는 볼품없는 물건보다 더 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어떤 것을 창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자세를 이해하려면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어린 시절에는 벽돌이나 모래로 무엇이든지 만들 수 있다고 느끼며, 빗자루가 마술 지팡이가 되고 돌멩이 몇 개로 마법에 걸린 성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렇게 스스로 만들어낸 물건들은 때때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584p]
- 단순하고 어린아이 같은 것에 대해 현대 미술가들이 이렇게 열광하는 것을 비웃기는 쉽다. 그러나 그것을 너무 어렵게 이해해서도 안된다. 현대 미술가들은 이러한 솔직함과 단순함은 결코 배워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 밖의 다른 기교는 얼마든지 배워서 습득할 수 잇다. 어떠한 효과이든지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된 후에는 쉽게 모방할 수도 있다. 미술관과 전시회장은 뛰어난 솜씨와 기교로 제작된 작품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이런 방향으로 나가보았자 아무것도 얻을 게 없다고 느끼는 미술가들이 많다. 또한 그들은 그들 자신이 어린아이가 되지 않는 한 자신의 영혼을 상실한 재 그림이나 조각을 찍어내는 안이한 기술자로 전락할 위험에 처해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585~586p]
- 루소와 ‘일요 화가(Sunday Painter)'들이 독학으로 터득한 소박한 방식에 감탄한 화가들은 표현주의나 입체주의의 복잡한 이론을 불필요한 짐으로 생각하고 팽개쳐버렸다. 그들은 전문가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이상에 맞추어서 나뭇잎이나 발고랑 하나하나까지 다 셀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하고 솔직한 그림을 그리고자 하였다. ’현실적‘이고도 ’진솔해져서‘ 평범한 사람도 좋아하고 이해할 수 있는 주제를 그리는 것이 그들의 자랑이었다. [586p]
- 초현실주의라는 명칭은 1924년에 앞서 언급했듯이, 현실 그 자체보다 더 현실적인 어떤 것을 창조하려는 젊은 미술가들의 열망을 표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다. [590p]
- 대부분의 초현실주의자들은 깨어 있는 사고가 마비되면 우리들 내부에 숨어 있는 유아성과 야만성이 우리를 지배하게 된다는 사실을 밝힌 지크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저작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 예술은 완전히 깨어 있는 이성에 의해서는 결코 생산될 수 없다고 하는 초현실주의자들의 주장은 바로 이러한 프로이트의 학설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성이 과학을 가능케 했다는 것은 인정하나 비(非)이성만이 우리들에게 예술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중략- 그들은 다음과 같은 클레의 말, 즉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을 계획할 수 없지만 그 작품이 자유롭게 자라날 수 있게는 해야 한다”는 말에 공감했다. [591~592p]
- 이런 종류의 그림들은 왜 20세기 화가들이 단순히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재현하는 데 만족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절실히 느끼게 해준다. 그들은 이러한 요구 속에 숨어 있는 많은 문제들을 너무나 잘 의식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현실의(또는 상사의) 사물을 그대로 ‘재현’하고자 하는 화가는 눈을 뜨고 자신의 주위를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색채와 형태를 취해서 원하는 형상을 짜맞추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간단한 사실을 우리가 흔히 잊게 되는 이유는 과거의 대부부느이 그림에 있어서 한 가지 형태나 한 가지 색채는 자연 속에 존재하는 한 가지 사물만을 제각기 의미했기 때문이다. 즉 잘색의 붓자국은 나무 줄기를 나타내고 푸른색 점은 나뭇잎을 나타낸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형태로 동시에 여러 가지 사물을 나타내도록 한 달리의 방식은 각각의 색채나 형태가 지닐 수 있는 다양한 의미에 관심을 기울이게 한다. 이것은 시에서 음율이 비슷한 단어를 나란히 사용함으로써 단어의 역할과 그 의미를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하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594p]
- 그다지 추구할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없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아주 놀라운 재주와 상상력을 동원했으므로 비록 그의 동기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 없어도 그의 솜씨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미술가들이 그림이나 조각을 예술로 발전시키는 방식에 주의를 쏟은 나머지 그들에게 보다 뚜렷한 임무를 맡기는 것을 잊어버리게 된 시기는 미술의 역사에 있어서 운명적인 순간이었다. 이러한 방향으로 첫걸음을 내디딘 것은 헬레니즘 시대(pp. 108-11)였고 그 다음이 르네상스 시대(pp. 287-8)였다. 비록 이 이야기가 놀랍게 들릴지는 모르나, 이러한 발걸음은 화가나 조각가들로부터 그들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유일한 원동력인 핵심적인 임무를 빼앗아가지는 않았다. 뚜렷한 일거리가 점차 드물어 갈때에도 미술가들에게는 수많은 문젯거리가 남아 있었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탁월한 솜씨를 발휘할 기회가 있었다. 이런 문제를 사회가 제시하지 않는 경우에는 미술의 전통이 문제를 제시해 주었다. 미술가의 임무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핵을 전한 것도 형상 제작의 전통을 통해서였다. 미술이 자연을 재현해야 한다는 것은 미술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필요에서 나온 문제가 아니라 전통이 제기한 문제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조토(p. 201)에서 인상파 화가(p. 519)들에 이르기까지, 미술사에 있어서 이와 같은 요구가 중요성을 지니는 것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현실 세계를 모방하는 것이 미술의 ‘진수’요 ‘의무’이기 때문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가 미술과 전적으로 무관한 것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러한 요구는 미술가의 창의성에 도전하여 그로 하여금 불가능한 것을 해내도록 요구하는 해결 불가능한 문제들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러한 문제들이 하나하나 해결되자마자 숨 돌릴 틈도 없이 새로운 문제를 제시해서 그 다음 세대 미술가들이 색채와 형태를 이용해서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는 사실을 여러 번 보아왔다. 심지어 전통에 반기를 든 미술가들도 자기가 노력해 나아갈 방향을 잡는 데 도움이 되는 자극을 얻기 위해서는 전통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미술의 역사를 끊임없이 새로 짜여지고 변화하는 전통의 역사로서 설명하려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그 전통 속에서 각 작품들은 과거를 참고하고 미래를 지향한다. 살아 있는 전통의 사슬이 오늘날의 미술과 태고의 피라밋 시대의 미술을 연결시켜주고 있다는 사실만큼 놀라운 것도 없다. 아크나톤의 이단(異端, p. 67), 암흑 시대의 혼란(p. 157), 종교 개혁 당시의 미술의 위기(p. 374), 프랑스 혁명 무렵의 전통의 단절(p. 476)등은 이러한 연속성을 위협한 사건들이다. 때때로 그 위협은 매우 현실적인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어떤 나라나 문명에서도 전통의 마지막 고리가 끊어지고 나면 미술은 결국 사멸하고 마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미술의 전통은 이 마지막 파멸을 모면해왔다. 낡은 임무가 사라지면 새로운 임무가 생겨나서 미술가들에게 방향감과 목적 의식을 부여해 주었다. 그러한 방향감과 목적 의식이 없다면 위대한 작품은 결코 창조되지 않았을 것이다. 건축에 있어서는 이러한 기적이 한번 더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19세기의 방황과 모색 끝에 현대 건축가들은 자기들이 나아갈 방향을 발견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고 일반 대중들은 그들의 작품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회화와 조각의 경우 이러한 위기가 위험선을 넘어섰다고는 아직 말할 수 없다. 일상 생활 속에서 볼 수 있는 이른바 ‘응용 미술’ 또는 ‘성업 미술’과 전시회장과 화랑의 이해하기 어려운 ‘순수 미술’ 사이에는 유망한 일부 실험들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불행한 틈이 존재하고 있다.
현대 미술을 무조건 ‘지지’하는 것이나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모두 다 생각없는 짓이다. 현대 미술이 발생하게 된 상황은 미술가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탓이기도 하다. 현존하는 화가와 조각가 가운데는 분명히 우리 시대의 명예가 되는 작가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어떤 특별한 것을 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은 이상 그들의 작품이 아리송하고 목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들을 비난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겠는가?
일반 대중은 흔히 제화공이 구두를 만들어내듯이 미술(Art)을 만들어내는 사람을 미술가라고 여기고 이러한 생각에 만족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에 의하면 이전에 미술(Art)이라고 이름 붙은 회화나 조각 같은 종류의 것을 미술가가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막연한 요구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요구야말로 미술가가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전에 만들어진 것은 더 이상 아무런 문제도 제시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미술가를 분발시킬만한 과업이 없다. 일반 대중이 아닌 비평가나 ‘고상한 교양인’들도 때때로 이와 비슷한 오류를 범한다. 그들 역시 미술가에게 미술(Art)을 창조해내라고 말하며 미래의 미술관에 전시될 표본으로 회화와 조각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이 미술가에게 요구하는 유일한 과업은 ‘새로운 것’의 창조다. 만약 그들이 뜻대로 된다면 작품 하나하나가 모두 새로운 양식, 새로운 ‘주의’를 나타내게 될 것이다. 최고의 재능을 지닌 현대 미술가들조차 구체적인 임무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때때로 위와 같은 요구에 굴복하고 만다. 어떻게 하면 독창적일까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그들의 방안은 간혹 무시하지 못할 기지와 명석함을 지닌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그것들은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일은 아니다. 현대 미술가들이 미술의 본질을 다룬, 즉 새롭거나 낡은 다양한 이론에 관심을 돌리는 궁극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미술은 표현이다’라든가 ‘미술은 구성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미술은 자연의 모방이다’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진실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이론이라도 그것이 극단적으로 애매모호하다 하더라도 그 안에는 진실의 핵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마치 진주 안에 핵이 있듯이.
결국 우리는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왔다. 미술(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형태와 색채가 ‘제대로’ 될 때까지 그것을 조화시키는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드물기는 하지만 어중간한 해결방식에 머물지 않고 모든 안이한 효과와 피상적인 성공을 뛰어넘어 진정한 작품을 제작하는 데 따르는 노고와 고뇌를 기꺼이 감내하는 뛰어난 남녀들이다. 미술가는 계속해서 태어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미술이 존재할 것인지 아닌지는 적지 않게 우리들 자신, 즉 일반 대중의 태도에 달려 있다. 우리가 관심을 갖느냐 아니냐에 따라, 편견을 갖느냐 이해심을 갖느냐에 따라 미술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는 것이다. 전통의 흐름이 끊이지 않게 하고 미술가가 과거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이 미술이라는 보물에 귀중한 것을 하나 더 보탤 수 있게 하는 것도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595~597p]
28 끝이 없는 이야기
모더니즘의 승리
- 결국 미술 작품이 우아하고 세련된 당대의 유행을 수없이 반영해온 것을 상기하려면 이 책의 페이지를 앞으로 넘겨보기만 해도 될 것이다. 가령, 5월의 도래를 찬양하는 랭부르 기도서에 나오는 우아한 숙녀들(p. 219, 도판 144)이나 앙투안 바토의 ‘로코코’ 풍 꿈의 세계(p. 454, 도판 289)가 그렇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그러한 작품들이 여전히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거기에 반영되어 있는 유행은 얼마나 빨리 지나가 버렸는지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중략-
소위 ‘유행의 변천’이라고 불리는 것은 기벽으로 사회에 충격을 주려는 돈 많고 한가한 사람들이 있는 한 정말 계속 변화를 유지해 나갈 듯 싶고 이것이야말로 진정 ‘끝이 없는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류를 타는 사람들에게 오늘날 유행하는 옷을 알려주는 패션 잡지들은 신문과 마찬가지로 뉴스의 조달자인 셈이다. 나날의 사건들은 후세의 발전에 무슨 영향(얼마라도 있다면)을 끼쳤는지 알기 위해 충분한 거리를 두었을 때야만이 비로소 ‘이야기’로 엮어지게 된다. [599p]
- 이 다-다라는 유치한 음절은 그러한 장난감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어린아이가 되고자 하는 것과 예술(Art)의 진지하고 과장된 태도를 경멸하려는 것은 틀림없이 이러한 미술가들의 바램이었다. 이러한 생각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조롱하고 폐기하고자 했던 과장된 태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바로 그 진지한 태도로 ‘반예술(anti art)'의 행위를 기록하며 분석하고 가르치는 것은 언제나 나에게 다소 걸맞지 않는 일인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러한 운동을 고무시킨 생각을 저버리거나 무시한 것에 대해 나 자신을 탓할 수는 없다. 나는 아이들의 세계에서 일상의 사물들이 생동감 넘치는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마음 상태를 설명하려했다(p. 584). 사실 나는 이처럼 어린아이이 마음 상태로 돌아가려는 것이 미술 작품과 다른 인공품 사이의 차이를 얼마만큼이나 모호하게 만들게 되었는지 미처 예견하지 못했었다. 프랑스 출신의 미술가 마르셀 뒤샹(Marcel Ducahmp : 1887-1968)은 그 자신이 ’레디메이드(ready-made)'라고 부른 그와 같은 일상 사물을 취해서 거기에 자신의 서명을 하여 명성과 악명을 동시에 얻었고 그보다 훨씬 나이 어린 독일 출신의 미술가 요제프 보이스(Joseph Beuys : 1921-86)는 자신이 ‘미술’의 개념을 확장시켰다고 주장하며 뒤샹의 뒤를 따랐다. [600p]
- 나는 진심으로 내가 이 책의 첫머리에 ‘미술(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p. 15)라고 했을 때 이러한 유행-실제로 그러한 경향은 유행이 되었기 때문에-에 기여하지 않았기를 바란다. 거기서 내가 의미했던 바는 물론 ‘미술’이라는 말이 시대에 따라 각기 다른 뜻을 지닌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극동에서는 서예가 여러 ‘예술들’ 중에서도 가장 높이 인정받는 분야이다. 그러나 나는 또한 미술가가 작품을 너무 훌륭하게 만들어서 그의 솜씨에 감탄한 나머지 그 작품이 본래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 잊게 된다고(p. 595) 피력하기도 했다. 나는 이러한 일이 점점 더 광범위하게 회화에서 발생했다고 말했다.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의 발전들이 이 점을 입증해주고 있다. 만약 회화라는 것이 단지 캔버스에 물감을 바르는 것을 의미한다면 다른 모든 것들을 배제한 채 이것이 행해지는 방식만을 경탄하는 감식가들이 있을 수 있다. 과거에도 화가의 물감을 다루는 방식이나 힘찬 붓놀림, 섬세한 필선들이 높이 평가되긴 했으나, 일반적으로 전체적인 관점에서 그것에 의해 성취되는 효과를 평가하였던 것이다. 도판 213(p. 334)으로 되돌아가 티치아노가 주름깃을 나타내기 위해 어떻게 물감을 다루고 있는가를 음미해보자. 또 도판 260(p. 430)에서 루벤스가 목신(牧神)의 수염을 그릴 때 얼마나 정확한 필선을 구사했는지 살펴보자. 혹은 중국 화가들(p. 153, 도판 98)이 번잡함 없이 아주 미묘한 농담으로 비단 위에 붓으로 그려낸 그 기교를 보라. 필법의 완전한 숙달이 가장 많이 논의되고 평가를 받았던 곳은 특히 중국이었다. 시인이 증흑적으로 시를 휘갈겨 쓰듯이 영감이 아직 생생할 때 영상을 단번에 화폭 위에 옮겨놓을 수 있도록 붓과 먹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을 획득하는 것이 중국 대가들의 야망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사실상 중국인들에게 글과 그림에는 공통의 요소가 많았다. 나는 단지 중국의 ‘서예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중국인들이 찬사를 보내는 것은 결코 글자의 형식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모든 필획마다에 충만해야 하는 달인(達人)의 느낌과 영감의 경지다.
바로 이것이 유럽 회화가 다루어내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것은 내적인 동기나 목적과 상관없이 순수하게 물감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것이었다. 프랑스에서는 붓놀림에 의해 생겨나는 흔적에 관심을 가진 이러한 경향을 타쉬슴(tachisme)이라 했는데 이는 타슈(tache), 즉 얼룩이라는 단어로부터 파생된 말이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물감을 바르는 새로운 방법으로 흥미를 유발시켰던 사람은 바로 미국인 작가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 1912-56)이었다. [601~602p]
- 그러한 작업의 결과로 생기는 엉킨 선들은 20세기 미술의 양립하는 두 가지 기준을 모두 만족시켜준다. 하나는 어린아이들이 형태를 그리기 시작하기 전에 유치하게 그려대는 낙서와도 같은 그림들에 대한 기억을 연상시켜주는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고 자발적인 것에 대한 동경이며, 다른 한 가지는 그와는 반대로 ‘순수 회화’의 문제들에 대한 복잡하고 고답적인 관심이다. 이리하여 폴록은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 즉 추상 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라고 알려진 새로운 양식의 주창자들 중의 하나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중략- 중국의 서예처럼 이런 종류의 그림은 재빨리 그려져야 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미리 계획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분출과도 같은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방식을 지지하던 미술가나 비평가들은 중국 미술은 물론, 특히 선불교(Zen Buddim)라는 이름 아래 서양에서 유행하였던 극동 지역의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았음이 틀림없다. 이런 점에 있어서도 이 운동은 20세기 초반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칸딘스키나 클레, 몬드리안이 외형의 베일을 헤치고 나아가 보다 더 높은 차원의 진실에 도달하고자 했던 신비주의자들이었다는 것(p. 569, 577, 581)과 초현주의자들이 ’신성한 광기‘를 추구했다는 것(p. 592)을 알고 있다. 이성적인 사유의 습관에서 벗어나는 고통을 알지 못하는 자는 크게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이 선(禪)의 교의 중 일부이다(물론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아니지만). [602p]
- 클라인이 자신의 작품을 ‘하얀 형태들’이라고 부른 것이 특이하다. 그는 우리가 그의 작품에서 선뿐 아니라 그 선들이 바꾸어 놓은 캔버스의 여백에도 관심을 기울이기를 원하는 것이다. [604p]
- 현대의 작가들을 매료시키는 것은 바로 사진을 통해서는 나타낼 수 없는 이러한 미묘한 차이이다. 그들은 너무도 많은 것들이 기계로 제작되어 규격화된 세상에서 자신들이 직접 손으로 만든 작품을 진실로 유일한 것으로 느끼고 싶어한다. 어떤 이들은 그 크기만으로도 충격을 줄 수 잇는 거대한 캔버스에 작업을 한다. 그러나 도판을 통해서는 이러한 효과가 살아날 수 없다. 그러나 많은 수의 미술가들은 대부분 물질의 감촉, 즉 물감의 부드러움, 거칠음, 투명함이나 단단함의 소위 텍스쳐(texture)라는 것에 몰두해 있다. 이러한 화가들은 보통의 물감을 버리고 진흙이나 톱밥, 모래와 같은 다른 재료를 사용하기도 한다. [604~605p]
- ‘팝 아트(Pop Art)'라고 알려진 운동을 살펴보자. 이 운동의 배후에 있는 이념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나는 앞 장에서 “일상 생활에서 볼 수 있는 이른바 ’응용‘미술 또는 ’상업‘ 미술과 전시회나 화랑의 이해하기 어려운 ’순수‘ 미술 사이의 불행한 단층(p. 596)"을 이야기하면서 그런 이념에 대한 암시를 했었다. ’고상한 취미‘를 가진 이들이 경멸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지지하는 미술학도들에게는 이러한 단절이야말로 당연히 도전으로 생각되엇다. 이제는 반예술의 모든 형태가 학자연하는 이들의관심사가 되어버렸다. 그들은 ’미술(Art)'이라는 관념을 싫어하면서도 동시에 미술이 배타적이고 신비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음악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일까? 당시에 대중을 정복하고 그들을 거의 병적인 흥분 상태로까지 열광하게 만든 새로운 형태의 음악이 있었다. 그것이 팝 음악이다. 팝 아트도 그렇게 될 수 없을까? 누구에게나 친숙한 만화의 형상이나 광고를 사용할 수는 없을까? [608~609p]
- 오늘날에 와서는 오히려 어떠한 실험이라도 대부분 언론이나 대중에게 받아들여질 만큼 충격이 사라졌다는 것이 문제이다. 오늘날의 투사는 반항스러운 몸짓을 이미 포기한 미술가일 것이다. [610p]
- 어떤 의미에서 미술사에 관한 이러한 관심은 우리 사회 내에서 미술가와 미술의 지위를 변화시켜 왔고 미술을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욱 시류를 타게 만든 여러 가지 요소들이 빚어낸 하나의 결과이기도 하다. 나는 이러한 요소들을 요약해보고자 한다.
1. 첫째 요인은 진보와 변화에 대한 개개인의 경험과 관계가 깊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인류의 역사를 우리의 시대에까지 이어져 왔고 또 미래로 이어지는 연속하는 시대로 보게 만들었다. 우리는 석기 시대, 철기 시대, 봉건 시대, 그리고 산업 혁명에 대해 알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 대한 우리의 관점은 이미 낙관적이지 못하다. 우리는 우리를 우주 시대로 데려온 이 연속적인 변화를 통해 얻는 것뿐만 아니라 잃는 것도 많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19세기 이래로 이와 같은 시대의 행진은 불가피한 것이라는 생각이 단단히 뿌리박히게 되었다. 경제나 문학과 마찬가지로 미술도 되돌릴 수 없는 흐름에 휩쓸려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실로 미술은 중요한 ‘시대의 표현’이라고 여겨진다. 여기에서 특히 미술사의 발달은 (이러한 책까지도) 이러한 믿음을 퍼트리는 데 한 몫 한다. 미술사의 페이지를 넘겨보며 우리는 그리스의 신전, 로마의 극장, 고딕 양식의 성당이나 현대의 마천루들이 각기 다른 정신성을 ‘표현하고’ 각기 다른 사회의 형태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느끼고 잇지 않은가? 이러한 신념은 단순히 그리스 인들이 록펠러 센터와 같은 건물을 지을 수 없었으며, 노트르담 대성당 같은 건물을 짓기 원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뿐이라면 어느 정도는 옳다. 그러나 그것이 그 시대의 정신이라고도 불리우는 그 시대의 조건으로 인해 그리스 인들에게는 파르테논으로 꽃피울 수밖에 없었다든가 봉건 시대에는 대성당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든가, 현대의 우리는 마천루를 지어 올릴 수밖에 없다라는 생각으로 자주 나타나곤 한다. 이러한 견해대로라면, 나로서는 어느 정도 다른 생각을 갖고 있으나, 아무튼 우리가 우리 시대의 미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무익할뿐더러 어리석은 일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떠한 양식이나 실험이 ‘동시대적인 것’으로 선언되었을 때, 비평가들로서는 이를 이해해야 하고 장려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비평가들이 비평할 용기를 잃고 대신 사건들의 연대기를 기록하는 처지로 떨어지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변화의 철학 때문인 것이다. 그들은 이전의 비평가들이 당시에 새롭게 일어난 미술 운동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 실패했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자신들의 태도 변화를 정당화시킨다. 이는 특히 인상파 화가들을 박대했던 것과 관계가 깊다(p. 519). 훗날 그렇게 명성이 높아지고 그림값이 올라갔던 인상파 화가들을 적대적으로 대했던 것이 비평가들로 하여금 이다지도 용기를 잃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는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은 당대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전설을 낳게 했으며 대중들로 하여금 어떤 종류의 미술도 더 이상은 거부하거나 조롱하지 않는 가상한 노력을 기울이게금 만들었다. 그리고 예술가들은 미래의 전위를 대표하며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들이 아닌 우리가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적어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사로잡히게 된다.
2 이러한 상황의 조성에 공헌한 두 번째 요인은 과학과 기술의 발전과 관계가 있다. 현대 과학의 사상은 지극히 난해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의 가치는 여전히 증명되고 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사람이 알고 있는 것으로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예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이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모든 상식적인 개념에 대해 상반되는 것처럼 여겨졌지만 거기서 나온 질량과 에너지의 법칙이 결과적으로 원자 폭탄을 만들게 했던 것이다. 미술가들과 비평가들은 과학의 힘과 권위에 대해 크게 감동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실험을 존중하는 건전한 의욕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난해해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존중하는 건전하지 못한 믿음 또한 갖게 되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과학과 예술은 서로 다른 것을. 과학자들은 불합리한 것으로부터 심오한 이론을 합리적인 방법으로 구별해낼 줄 안다. 그러나 미술 비평가들에게는 그런 명확한 실험 방법이 없다. 그리고 그들은 어떤 것이 새로운 실험으로써 의미가 있는지를 가려낼 만한 시간이 더 이상 없다고 느끼고 있다. 만약 그가 그런 것을 일일이 따지고 든다면 그는 그만큼 뒤로 처질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런 것이 과거의 비평가들에게는 거의 문제가 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오늘날에는 변화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진부한 믿음을 고집한다면 막다른 벽에 부딪치게 될 것이라는 신념이 거의 팽배해 있다. 경제학에서는 적응하지 못하면 죽는다는 말을 계속 듣고 있다. 우리는 늘 열린 마음으로 새로이 나타난 방법에 기회를 주어야 한다. 어떤 기업가도 보수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혀서는 안된다. 그는 시대와 함께 가기만 해서도 안된다. 시대와 함께 가고 있다는 인상을 남에게 보여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를 나타낼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회사의 중역실을 최근의 미술 작품으로 장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작품은 혁신적일수록 좋은 것이다. [612p]
3. 현재의 상황에 대한 세 번째 요인은 얼핏 보면 앞서 살펴본 것들과 모순되는 것으로 생각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미술은 과학이나 기술과 보조를 맞추기를 원하는 동시에 이 괴물들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미술가들은 기계적이고 합리적인 것을 피해 자발성과 개성을 강조하는 무언가 신비로운 믿음을 신봉하기 때문이다. 기계화와 자동화, 일상 생활의 지나친 조직화와 규격화, 그리고 이러한 것들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지루한 획일성으로부터 사람들이 얼마나 위협을 느끼는지를 이해하기는 참으로 쉬운 일이다. 미술이야말로 아직 개인적인 취향과 변덕스러움이 여전히 허용되며 오히려 그것이 옹호받을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인 것 같다. 19세기 이래로 많은 미술가들은 자신들이 부르주아를 괴롭힘으로 해서 숨막히는 인습에 대항해 훌륭히 싸웠노라고 주장해왔다(p. 508).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부르주아들은 그러는 동안 오히려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진보를 거부하면서 이 시대의 세계 속에서 안주할 둥지를 찾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는 일종의 즐거움을 느끼지 않는가? 또한 새로운 것을 보고 충격을 받거나 놀라 당황해 하지 않을 만큼 편견이 없다는 것을 선전할 수 있다면 이는 그만큼 더 우리의 자랑거리가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기술적인 효율성의 세계와 예술의 세계는 잠정적인 협상의 상태에 들어간 것이다. 그리하여 미술가는 미술이란 이러이러한 것이라는 대중의 개념에 따라가기만 해도 자신의 개인적인 세계에 파묻혀 자신의 비법(秘法)이나 어린 시절의 꿈에 관심을 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4. 이와 같은 생각들은 일종의 심리학적인 가정(假定)에 상당히 물들어 있는데 이 책을 읽어감에 따라 우리는 미술과 미술가들에 대한 이러한 가정이 점점 더 강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낭만주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자아의 표현이라는 이념이 있으며(p. 502), 그 후 프로이트의 발견은 심오한 영향을 끼쳤는데(p. 591), 이는 프로이트 자신이 적용하려 했던 것보다 더 직접적으로 예술과 정신적 고뇌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예술은 ‘시대의 표현’이라는 점차 커가는 신념과 더불어 이러한 확신은 모든 자아 통제를 내팽개치는 것이 예술가들의 권리이며 의무이기까지 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다. 그 결과 나타나는 감정의 분출이 지켜보기에 그리 아름답지 못하다면 이는 우리의 시대 자체가 아름답지 못해서이다. 중요한 것은 딱딱하게 굳어버린 이 세계의 현실을 직시해서 우리의 어려움을 진단해내는 데 도움을 받은 것이다. 이와는 정반대의 견해, 즉 불완전한 이 세상에서 순간적으로나마 완전함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예술뿐이라는 생각은 일반적으로 ‘도피주의’라고 배척받고 있다. 심리학이 불러일으킨 흥미는 미술가나 대중에게 자극을 주어 전에는 혐오스럽다든지 터부시되었던 인간 심리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도록 했다. 도피주의라는 오명을 쓰지 않기 위해 그 이전 세대라면 외면했을 모습을 직시하게 만들었다.
5. 이제까지 열거한 네 가지 요인은 조각과 회화는 물론 문학이나 음악이 처한 상황에도 똑같이 영향을 미쳤다. 이제 앞으로 이야기하려는 다섯 가지 요인은 어느 정도 미술에만 특별히 나타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미술은 다른 창조 형태와는 달리 매개 수단에 덜 의존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책은 반드시 인쇄되고 출판되어야만 하고 연극은 공연되어야 하고 작곡된 곡은 연주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극단적인 실험을 하기에는 어느 정도 제동이 걸릴 수 있다. 그러므로 회화야말로 이 모든 예술 형태 중 가장 급진적인 혁신에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물감을 부어버리고 싶다면 붓을 쓰는 대신에 그렇게 할 수 있고, 당신에 네오다다이스트라면 쓰레기 뭉치를 전시회에 출품하여 주최측에서 그것을 거절하는지 않는지 시험해볼 수도 있다. 그것이 어떻게 처리되건 당신은 당신 나름대로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미술가도 중간 수단인 매개물이 필요하다. 즉 그의 작품을 전시해주고 선전해주는 화상(畵商)이 필요한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바로 여기에 문제점이 있다. 지금까지 논의되어 왔던 모든 문제점들은 미술가나 비평가들보다는 화상들에게 그 영향이 미치게 될 것 같다. 변화의 척도를 주시하며 시대의 추세가 변하는 것을 지켜보고 새로운 인재를 발굴해내는 것은 화상의 몫이다. 그가 유망주를 제대로 고르기만 한다면 돈을 버는 것은 물론 그의 고객들은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지난 세대의 보수적인 비평가들은 ‘이 현대 미술’이라는 것이 모두 화상들의 장삿속이었다고 불평을 해대곤 했다. 그러나 화상들은 언제나 돈을 벌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들은 시장의 주인이 아니라 심부름꾼일 뿐이다. 정확한 추측으로 성공한 개인 화상이 세평(世評)을 좌우할 수 있는 힘과 특권을 갖게 되기도 하지만 풍차가 바람을 일으킬 수 없듯이 화상들 자신들도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지는 못한다.
6. 미술 교사들의 경우라면 다를 수도 있다. 내게 있어서는 미술 교육이 여섯 번째 요인으로 현대 미술의 상황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현대 교육에서 개혁이 최초로 이루어진 것은 바로 아동들의 미술 교육에서였다. 20세기 초에 미술 교사들은 영혼을 파괴하는 엄격한 전통적인 교수 방법을 버린다면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어린이들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지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물론 인상주의의 승리와 아르 누보의 실험(p. 536)으로 인해 이러한 전통적인 방법들에 대해 어느 정도의 의문이 생겼던 것도 이 시기였다. 이러한 전통적인 교수법으로부터의 해방 운동을 벌인 선구자들 중에 빈의 프란츠 치제크(Franz Cizek : 1865-1946)가 특히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어린이들이 예술적인 기준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을 때까지 그들의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기를 원했다. 그가 노력한 결과 생겨난 아이들 작품의 독창성과 매력은 많은 수련을 쌓은 화가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p. 573). 뿐만 아니라 심리학자들은 아이들이 물감과 세공용 점토를 섞으며 경험하게 되는 순수한 기쁨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개성의 표현’이라는 이상이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처음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 바로 이 교실에서였다. 오늘날 우리는 ‘아동 미술’이라는 용어를 너무도 당연스럽게 사용하고 잇는데 이 용어가 이전 시대들에 고수되어 온 모든 미술 개념에 모순된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오늘날에는 대다수의 대중들이 이러한 교육을 받고 자라나 전에는 볼 수 없었던 폭넓은 관용의 자세를 배우게 된다. 그들 중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자유로운 창조를 통해 만족감을 느끼며, 그림을 그리는 것을 오락으로 삼게 되었다. 아마추어 화가들의 급속한 증가는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미술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미술에 대한 관심을 높였으므로 미술가들로서도 환영할만한 일이었던 반면, 전문 화가들은 자신들의 물감 다루는 솜씨와 아마추어들의 솜씨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려 애를 쓰기도 한다. 전문가들이 구사하는 붓질의 비법이 이런 것과 관련이 있는지도 모르겟다.
7. 첫 번재 요인으로 꼽을 수도 있었지만 편의상 일곱 번째 요인으로 설명해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회화와 라이벌 관계에 서게 되는 사진의 보급이다. 전 시대의 회화가 전적으로 현실의 모사만을 그 목표로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가 보아왔듯이(p. 596), 자연과의 연계성은 수세기에 걸쳐서 미술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중요한 문제였으며 비평가들에게는 최소한 피상적인 판단 기준을 마련해준 것이었다. 사진술은 19세기 초로 그 발평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모든 나라들에서 카메라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수백만을 헤아리고, 매 휴가철이면 찍혀지는 컬러사진은 수십억 장에 이를 것이다. 이 중에는 보통 수준의 풍경화만큼 아름답고 효과적인 사진도 있고 평범한 초상화만큼 풍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기억될만한 운 좋은 사진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진 같다’는 말이 화가들이나 미술 감상을 도와주는 교사들 사이에서는 경멸의 뜻을 지닌 단어가 되어 버린 것에 놀랄 필요는 없다. 사진에 대해서 그들이 종종 갖는 반감의 이유는 변덕스럽고 부당할지도 모르나 미술이 이제는 자연의 재현 외에 다른 가능성을 개발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잇는 것 같다.
8. 여덟 번째 요인으로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것은 지구상의 많은 곳에서 정해진 것 이외의 다른 새로운 가능성의 탐구가 미술가들에게 금지된 곳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전의 소비에트 공화국에서 해석된 마르크시즘 이론은 20세기 미술의 모든 실험을 단순히 자본주의 사회의 몰락의 징후로만 여겼다. 건강한 공산주의 사회의 미술은 쾌활한 트랙터 운전수를 그린다든가, 건강한 광부를 그려서 일하는 기쁨을 찬양해야 했다. 위로부터 미술 제작을 규제하려는 이러한 획책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진정한 축복임을 알게 해준다. 불행히도 이러한 획책은 또한 미술을 정치 무대로 끌어냈고 냉전 무기의 하나로 이용했다. 만일 자유 사회와 독재 사회가 이처럼 대조적이라는 것을 일깨워줄 기회가 없었더라면 서구의 초현대 화가들의 반역이 그렇게 열렬하게 공적인 후원을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9 이제 새로운 상황의 아홉 번째 요인을 살펴보자. 실제로 독재 국가의 단조로운 획일성과 자유 사회의 밝은 다양함 사이의 대조로부터 이끌어낸 교훈이 있다. 공감과 이해심을 갖고 오늘날을 살펴보는 사람이라면 새로움에 대한 대중의강한 관심이나 유행의 변화에 대응하는 것이 우리 생활에 흥미를 더해 주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대중의 그러한 열렬한 관심은 미술과 디자인에 새로운 착상과 대담한 활기를 자극했으며 이러한 것들 때문에 구세대는 신세대를 부러워할 정도가 되었다. 우리는 가장 최근에 성공한 추상 회화를 보고 ‘컨튼감으로 적당’하다며 간단히 지나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추상 회화의 실험으로 맒미암아 실제의 커튼감들이 그렇게 풍요롭고 다양하게 자극을 받아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전과는 달리 비평가들이나 공장 주인들도 새로운 아이디어나 새로운 색채 배합에 눈을 돌릴 만큼 관대해졌으므로 그에 따라 우리의 주위가 그만큼 풍요로워졌고 급속한 유행의 변화 또한 즐거운 일이 된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이러한 정신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전시회 카탈로그에 실린 모호한 글에도 크게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들 시대의 미술이라고 느끼는 것을 즐기게 된 것 같다. 괜찮은 일이다. 그러한 기쁨이 순수한 것이라면 어느 정도의 우려심은 버려도 괜찮으리라.
한편 그렇게 유행에 굴복하게 되는 위험에 대해서는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다. 그 위험은 바로 우리가 누리는 자유를 위협하는 데 있다. 경찰로부터 받게 되는 그런 종류의 위협은 물론 아니다. 차라리 그렇다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유행을 따르는 데서 오는 압박감으로부터 온다. 유행에 뒤질까 겁내는 것. ‘고리타분하다’고 여겨질까봐 걱정하는 것, 가장 최신의 상표는 무엇이 될까 라고 조바심을 내는 것 등등이 그러한 것이다. 근래에 어떤 신문은 “미술의 갱쟁판에 합류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최근에 열리고 있는 개인전들에 관해 메모를 해야 할 것이라고 독자들에게 일러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경쟁판은 결코 없다. 만약 있다면 우리는 토기와 거북이의 우화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해롤드 로젠버그가 ‘새로운 것의 전통’(p. 611)이라고 한 자세가 최근의 미술 경향에서는 어느 정도 당연시되고 있다는 점은 참으로 놀랍다. 거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누구든 분명한 것을 부정하는 ‘싱거운 사람’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미술가들이 진보의 선구자가 되어야 한다는 이 생각은 결코 모든 문화에서 공유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아름다운 융단(p. 145, 도판 91)을 짠 장인은 전에 한번도 본적이 없는 새로운 문양을 고안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놀랄 것이다. 그가 원했던 것은 오로지 훌륭한 융단을 생산해내는 것이었다. 이러한 태도도 역시 우리들 사이에서 널리 퍼지게 된다면 축복이 아니겠는가?
서구 세계는 서로를 능가하려는 미술가들의 야망에 크게 힘입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야망이 없었다면 ‘미술의 역사’도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이야말로 어느 때보다도 미술이 과학이나 기술과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할 때이다. 사실상 미술의 역사는 미술의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풀어온 자취를 발방가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책 역시 이런 것들을 쉽게 보여주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또한 미술에 있어서 ‘진보’라는 것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히려 했다. 왜냐하면 어떤 한 부분에서 무엇이가를 얻는 다른 것은 다른 면에서 잃는 것이 있다는 말도 되기 때문이다(p. 262, 536-8). 이것은 과거든 현재든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식의 관용을 얻는다면 그 결과 기준을 잃게 될 것이고, 새로운 흥미만을 좇다 보면 옛미술 애호가들이 정평 있는 그림에 집착해서 그 그림의 비밀을 캐내려들던 그러한 인내심은 지킬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과거에 대한 존경심은 현재 살아 있는 작가드에 대해 솔호하게금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 자신의 은신처에서 유행과 담을 쌓고 대중에 영합하지 않으며 고독한 작업을 하고 있는 진정한 천재를 우리가 소홀하게 놓치지 말라는 법도 없다. 더군다나 우리가 현재에만 몰두할 때 과거의 유산으로부터 쉽게 멀어져서 그것을 단순히 새로운 것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벗겨내야 할 껍질 정도로 여기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박물관이나 미술사 서적들이 이런 위험을 가중시킬 수도 있다. 그곳에는 토템 기둥, 그리스의 조각품, 성당의 창문, 렘브란트의 작품들과 잭슨 폴록의 작품들이 모두 무리지어 있으므로 우리는 이 작품들이 서로 다른 연대를 지녔지만 모두 다름없이 미술(Art)이라는 인상을 너무나 쉽게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미술의 역사는 우리가 왜 그렇지 않은지를 깨닫고, 왜 화가들과 조각가들이 다른 상황과 제도와 유행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대응을 했는가를 이해하려 할 때 비로소 뜻이 통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내가 이 마지막 장에서 현대의 화가들이 당면한 상황과 제도, 믿음을 집중적으로 언급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미래의 기술에 관해서-그 누가 말할 수 있겟는가? [611~617p]
- 확실히 또 다른 추세 변화의 때가 도래했다. 이러한 기대는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슬로건 아래 구체화되었다. 이것이 좋은 용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국 그것이 말하는 바는 이러한 경향을 따르는 사람들이 ‘모더니즘’을 과거지사로 간주한다는 의미에 불과하다. [617p]
-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는 1975년에 찰스 젠크스(Charles Jencks)라는 젊은 건축가에 의해서 소개되었다. 그는 현대 건추고가 동일시되어 왔고 또 내가 560페이지에서 논의하고 비평한 기능주의 원리에 식상한 사람이었다. 나는 거기에서 이 원리가 “19세기 미술 관념이 우리들의 도시를 어질러 놓은 데 사용했던 불필요하고 몰취미한 잡동사니를 제거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말했지만 그러나 그것도 모든 슬로건과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단순한 도식에 근거하고 있다. 명백히 장식은 사소하고 몰취미할 수도 있으나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 쾌감을 줄 수도 있다. 모더니즘 운동의 ‘청교도들’은 그것을 대중들에게 멀리하기를 권했던 것이다. 이러한 장식이 이제 구세대의 나이든 비평가들에게 충격을 주기도 하는 모양인데,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좋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국 ‘충격’이라는 것을 독창성의 한 징표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기능주의와 마찬가지로 장난스러운 형태들을 적용하는 것도 창안자의 재능에 따라 분별력 있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천박한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618~619p]
- 양식(style)이라는 것이 연병장의 군인들처럼 차례차례 뒤이어 생겨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미술사에 관한 책을 읽는 독자나 저자들은 그처럼 잘 정돈된 배열을 좋아하겠지만 미술가들에게 자기 자신의 길을 걸어갈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보다 더 일반적으로 인정하고 있다.[622p]
- 최근의 이러한 발전들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옷과 장식에 유행의 추세가 잇는 것 못지 않게 미술에도 취향의 변화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존경하는 많은 대가들과 과거의 양식들이 당대의 예민하고 박식한 비평가들에 의해 이해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어떤 비평가나 미술사가라도 완전히 편견이 없을 수는 없으나 미술적인 가치가 전적으로 상대적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첫눈에 우리의 마음에 들지 못했던 작품이나 양식이라도 그것의 객관적인 장점을 찾는 데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작품 감상이 전적으로 주관적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우리도 뛰어난 미술 작품을 식별할 수 있다고 여전히 확신하고 있는데 그러한 식별 능력은 우리의 개인적인 취향과는 거의 상관없다. [625p]
- 과거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끝없는 공동 노력의 결과이다. 이 단순한 책조차도 시대와 양식, 인물사의 대략적인 흐름을 명백히 하는 데 기여한, 생존해 있거나 이미 고인이 된 수많은 역사가들의 업적을 토대로 이루어진 보고서라 할 수 있다. 실로 얼마나 많은 사실과 기록과 견해들이 나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내 것이 되어버렸는지. [638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