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 에이텐 바랄 | 옮긴이 / 송지수
오타쿠 OTAKU
가상 세계의 아이들 LES ENFANTS 여 VIRTUEL
펴낸날 / 2002년 3월 29일
옮긴이 / 송지수
지은이 / 에이텐 바랄(d'Etienne Barral)
펴낸곳 / 문학과지성사 (서울 마포구 서교동 363-12호 무원빌딩)
- 어쨋거나 그들은 우리의 아이들이며, 그들의 기이한 탐색과 외설스런 의식(儀式)들은 사실 자기들을 낳은 바로 그 세계를 만나기 위한 시도들 이외에 다른 목적을 갖고 있지 않다. 전후 세대에 속하고, 수차례에 걸친 산업 혁명의 산물이며, 겉보기에 수동적인 그들은 사회에 대해 독특한 비판을 제기하는 한편 유목적 환경에 대해 놀랄 만한 적응력을 보여준다. 그들은 점점 더 광활한, 초미디어화된, 평화로운, 그리고 첨단 기술이 보급된 우주에 산다. 그들의 숱한 편집증적 행태들은 정작 세상과 접촉하려는, 지표를 찾으려하는, 하여 그들의 아버지가 만들어준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그만큼의 시도들이다. [9p]
- 사람들이 혹시 그려낼 수도 있을 희화와 닮기는커녕 오타쿠는 한 문화의 출현, 일본이 그 중심인 새로운 문화의 출현을 구체화하는데, 그 물결은 벌써 오래 전에 일본 열도의 경계를 넘었다. 오타쿠는 세계적 현상인 것이다. [10p]
- 말해서 무엇하랴? 또 무슨 이야기를 한단 말인가?[25p]
- 역설적인 것은, 사람들이 가상적으로 소통하면 소통할수록 현실적으로는 덜 만난다는 사실이다. [25p]
- 다윈Darwin은 인간 진화의 계통수를 보완해야 할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 위에, 목하 도래하는 호모 비르투엔스를 위치시켜야 하리라. 호모 사피엔스는 불의 발견 이래로 경험적 인식을 통해 진보해왔다. 그의 세계는 직접 접촉할 수 있는 현실의 세계, 곧 뉴턴, 코페르니쿠스, 데카르트의 세계였다. 경험은 지식의 근원이었다. 반면에 호모 비르투엔스에게는, 자주 골치를 썩이고 늘 중복적인 이 현실, 예컨대 지하철·일·잠 등과 같은 현실은 그 자체로서 도무지 소용에 닿지 않는다. 그는 경험이 Ran으로 통하는 문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우주 비행사·모험가·운동 선수 또는 플레이보이의 자리에 스스로를 위치시키기만 하면 그는 가상적으로나마 이 현대의 영웅들이 일상적으로 체험하는 온갖 감흥들을 전부 다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일상적 현실로 돌아가는가? 호모 비르투엔스는 대리적 삶을 산다. 그는 깬 상태에서 꿈꿀 권리를 요구한다. 그는 자기의 꿈들을 산다. 나르시스처럼 물에 비친 자기의 반영에 의해서가 아니라 TV나 컴퓨터 스크린이 제공하는 자기의 이미지에 의해 매혹된 이 가상 인간은 시험관에서가 아니라 멀티미디어 컴퓨터의 스크린으로부터 태어날 것이다. [25~26p]
- 그들의 주요 통신 수단이 전자 통신망이나 인터넷이라는 것, 그리고 그들이 가명을 사용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 통신망의 구축은 진정한 언더그라운드ㅡ 문화의 창출로 이어지는바, 이 문화는 스스로의 기준과 결집점들, 그리고 전설과 언어를 갖고 있다. [27p]
- 닌텐도 Nintendo·세가·넥NEC·애플Apple·내셔널National 그리고 소니와 같은 기업들을 오타쿠들은 자기들 손바닥처럼 알고 있는데, 왜나하면 그들은, 조금씩조끔씩 우리 거실에 들어오는, 그러나 벌써 오래전부터 자기들의 누에고치-방을 점유하고 있는 첨단 멀티미디어 기기들의 첫 번째 소비자이기 때문이다. [28p]
- 제일 먼저 일본에서 오타쿠들의 개화를 가능케 한 ‘지역적’ 특성을 감안한다 해도, 미국, 스페인 그리고 프랑스에 벌써 그들의 동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멀티미디어가 행사하는 매혹은 국경을 모르며, 후기 산업 사회의 우리 젊은이들 역시, 일본의 젊은이들이 자기들에게 예정된 삶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쓰는 만큼이나, 실업과 퇴출의 어두운 현실로부터 도피하고픈 욕구를 느낀다. [29p]
- 그들은 자기들이 창조한 가상 세계 안에서만 편안함을 느낀다. 그들은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찾지 않는다. 그들은 일본의 상징적인 제품인 워크맨 세대인데, 이 기계는 독립적 내밀감의 벡터로서 공공 장소에서도 자발적인 고립을 가능케 하며, 동시에 사회적 인식 지표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젊은 세대가 그토록 좋아하는 이 워크맨을 통해 우리는, 공적 공간에서조차 스스로를 고립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얼마나 강한지 일찍부터 후기 산업 사회에 존재하고 있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말하자면 워크맨이 상징하는 것은 현실 상황 속에 존재의 전부를 참여시키기를 거부하는 태도 바로 그것이다. [33p]
- 사실 이미지는 ‘믿게 하는’ 능력이 있고, 덕분에 오타쿠는 스스로에게 자기가 ‘산다고’ 믿게 한다. 그러나 그는 대리적으로 살 뿐이다. 그는 그를 고통받게 할지도 모를 타자와의 관계를 철저히 피해 기술적 자폐의 세계 속에 스스로를 감금한다. 여기서 자아에의 칩거는 병리학적인 것이 된다. [34p]
- 사실, 풍요 속에서 태어난 이 세대가 아는 슬로건이라고는 ‘소비하라’밖에 없다. 일본 사회를 이끌어온 주요 슬로건들은 살펴보면, 군국주의 시대가 끝났을 때 우선 ‘나라를 재건하자’가 있었다. 이어 고속 성장 시대가 왔고, 1960년 당시의 수상은 ‘10년 안에 나라의 수입을 두 배로 하자’란 슬로건을 내걸었다. 70년대에는 ‘서양을 따라잡자’ 80년대에는 ‘국외 시장을 정복하자’란 슬로건이 있었다. 그러나 그뒤로 정부는 여론을 동원할 능력을 잃어버린 듯하다. 전쟁이 끝난 뒤 모든 정력을 경제성장에 집중해온 일본은 이제 자기가 가진 힘으로 무얼 해야할지 모른다. 어린이 만화에까지 등장하며 전후의 이데올로기를 떠받치던 ‘집단의 이익을 위한 개인의 희생’이란 슬로건은, 시상대의 가장 높은 곳에 마침내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국민을 이제 더 이상 결집시키지 못한다.
70년대 말 일본에서는, 부모와 비슷해지느니 차라리 영원한 학생으로 남아 있길 원하면서 사회에 합류하길 거부하는 젊은이들을 가리키는 한 유행어가 등장한바, 한편으로는 깔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해하면서, 사람들은 그들을 ‘모라토리엄 닌겐 moratorium ningen'이라고, 다시 말해 ’유예된 젊은 세대‘라고 불렀다. 이 말을 유행시킨 것은 심리학작인 오코노기 게이고 OKonogi Keigo로서, 그는 일본의 젊은이들에게서, 사회로의 진입을 유예하기 위해 불필요하게 학업을 연장하는, 하여 대학이라는 안락한 고치에 더 오래 머무르려는 경향을 간파해냈던 것이다. [41~42p]
- 막 태어나는 민주주의 전면에 ‘자유·평등·박애’의 일본버전을 적어넣어야 했지만, 일본의 젊은 세대는 ‘공부하라, 일하라, 소비하라’밖에는 아무것도 몰랐다. [44p]
- "예 앞서 언급한 몇 안되는 어린 시절의 친구들을 예외로 한다면, 이 허구적 인물들과의 관계는 젊은 성인이 사회와 가질 수 있는 아직 허약한 관계보다 훨씬 더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44p]
- 저희 세대는 스스로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이 자라났습니다. 실제로 저희는 저희를 가치롭게 해주는, 저희가 필요불가결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아무것도 갖고 있지 못해요. 제가 보기에 오타쿠들은 자신들의 인격을 확립하기 위해 자기들에게 가까운 영역, 곧 만화·만화 영화·아이돌·컴퓨터에 몰두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정체성을 확보하기를, 또래들 앞에서 존재한다는 느낌을 갖기를, 나아가 자기들의 자아를 강화하기를 원하는 것이지요, 스스로에 대해 자부심을 느낄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는 것은 힘들어요.“[45~46p]
- 인형 컬렉션을 던져버리고 이러한 삶의 방식에 마침표를 찍는다? 대답에 앞서 유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저도 그걸 생각해봤어요. 하지만 그것은 제 일부를 도려내는 것과 같습니다. 제게 인형들은 이제 더 이상 가게에서 산 물건들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그것들 속에는 저의 일부가 들어 있기 때문이지요."[62p]
- 오타쿠는 상품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상품을 초월하고, 변형시키고, 적응시킴으로써 그것을 충분히 자기 것으로 만든다. 그가 자기는 시스템에 기만당하는 대신 그것을 이용하고, 개선하고, 나아가 창조적인 작품으로 만든다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바로 시중에서 판매되는 상품에 그가 부여하는 이 새로운 탄생이다. [68p]
- 따라서 인형이 현실의 재현에 충실하면 충실할수록 젊은 오타쿠로서는 자기에게 삶의 의미를 주는 사랑의 감정을 투사하고 경험하는 게 더 용이해진다. 쓰유키가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은 아이돌을 재현한 개라지-키트 인형에서 해결책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이 해결책은 사실 많은 이점을 갖고 있었다.
우선 우리는 허구의 영역을 떠나 실제 소녀들의 세계로 들어갔다. 차이는 분명했다.
이어, 그것은 개라지-키트의 세계에 새로운 부류의 오타쿠들, 곧 아이돌 오타쿠들을 끌어들였다. 좋아하는 아이돌의 아주 하찮은 사진마저 놓치지 않는 이 사랑에 빠진 수집광들이 그녀를 3차원적으로 자기화할 수 있는 그 좋은 기회를 그냥 지나칠 리 만무했다. [77p]
- “우리는 현재 컴퓨터가 더 이상 기계가 아닌 시대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상 생활에 어찌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지 이제는 자기 고유의 개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많ㅇ느 사람들에게 컴퓨터 화면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있는 시간보다 더 많지 않습니까? [86p]
- 일본에서는 한번 노다지를 발견하면 끝까지 간다. [106p]
- 거대한 스튜디오들이 할리우드를 지배하던 양차 대전 사이의 기간 동안, 영화계는 ‘스타 시스템’이란 걸 만들어냈다. 일본에서는 TV가 ‘아이돌 시스템’이란 걸 만들어냈다. 두 시스템사이의 중요한 차이는 시스템을 만들어낸 두 미디어의 차이에서 온다. 영화관은 매주 모여든 관객들이 신화적 인물들을 숭배하는 일종의 성소이다. 에바 가드너, 마를렌 디트리히, 마를린 먼로는 이 성소의 여신들이었다.
TV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건, 세속적인 미디어이다. 그것은 거실의 탁자 위에 놓여 있고, 아무 때나 켤 수 있으며, 전화가 오면 그것의 음량을 줄인다. 그것은 일상의 일부를 이룬다. 식사와 가족들 사이의 말다툼을 동반한다. TV 스타들은 절대로 영화 스타와 같은 후광을 누릴 수 없을 것이다(적어도 지금으로서는). 하지만 그들은 더 친숙하고 더 가깝게 여겨진다. 그들은 우리의 일상을 덜 따분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아이돌은, 범접할 수 없는 여신과도 같은 영화 배우와는 달리, 누나 같거나 아니면 유명한 상상의 애인 같다. 그들을 떠받치는 발판의 높이는 그들을 유명하게 한 미디어의 크기에 비례한다. [110p]
- 광고에 등장하는 남성 스타들의 경우엔 그 직업이 다양하고 폭넓다. 배우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운동 선수, 코미디언, 록 가수 등이 있다. 우리는 광고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유명인들을, TV가 시청자들에게 제시하는 모범적인 사회적 역할의 표본으로 간주할 수 있는바, 이 표본에서 끌어낼 수 있는 결론은 아주 간단하다. 사내아이들은 축구 선수 · 야구 선수 · 배우 · 록 가수 · 코미디언이 될 수 있는 반면에 여자아이들은 젊고 예쁜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114p]
- 그러나 고토 구미코의 화려한 경력은 판도라의 상자를 연 셈이 되었다. 그녀의 성공 이후 연예 에이전시들은 점점 더 어린소녀들을 선발한다. 그들은 유치원 방문을 서슴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차이들child'와 ’아이돌idoles'을 합성하여 만든 ‘차일돌childoles'이란 신조어이다. [116p]
- 쇼는 비즈니스가 되었다. [118p]
- 그녀는 사랑받고 귀여움받기 위해 있다. 그러나 그녀는 비현실적이고, 건드릴 수 없으며, TV 화면이라는 넘을 수 없고 깨뜨릴 수 없는 유리벽에 의해 팬들로부터(그들이 아무리 열렬한 팬이라해도) 분리된 존재인 것이다. [127p]
- 진짜 소녀와 대면하는 것보다는, 파트너에 대해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오로지 감미로운 사랑의 전율만을 맛보는, 사실은 이기적인 일방적 사랑을 그는 더 좋아하는 것이다. [128p]
- 「오 니안코 클럽」의 성공은 아이돌과 아이돌 오타쿠의 관계를 심층적으로 변화시켰다. 이때까지 팬과 그가 사랑하는 아이돌의 관계는 개인적인 것이었지만, 「오 니안코 클럽」이후로 오타쿠들은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만의 순위를 매기고 그래프를 만들고 정보를 모으고 자료들을 수집했다. 예쁜 소녀들의 이러한 특징들을 스스로에게 동화하는 것은 도청 소재지를 외우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으리라. [135p]
- 아이돌 시스템은 처음부터 끝까지 미디어에 의해, 특히 TV에 의해 만들어졌다. 아이돌의 존재 이유는, 우리가 살펴보았듯, 극도로 성적인 여성의 이미지와, 그녀가 선전하는 상품이 서로 결합되는 광고에 있다. 아이돌은 무엇보다도 먼저 성적환상이며, 이는 아이돌 시스템이 생겨난 이후 언제나 그랬다. 가령, 첫 번째 아이돌로 간주되는 야마구치 모모에의 맨 처음 노래들 가운데 하나의 제목은 「원한다면 나를 마음대로 해도 좋아」였다. 다시 말하자면, 파렴치하게 성을 이용하는 것은 물건을 팔고자 하는 광고주, 또는 상업 시스템이다. [145~146p]
- 일본 말에 이런 표현이 있다. “모두가 함께 길을 건너면, 겁낼 것이 없다.” 다른 사람이 나를 정상으로 만들어주고 안심시킨다는 말이다. 만약 한데 모여든 백여 명의 동료들이 서로서로 사면해주지 않는다면, 카메라 고조들은 그들이 아이돌 앞에서 감히 하는 짓거리의 10분의 1도 못 하리라. [148p]
- 오타쿠의 관심을 끄는 것은 다른 사람의 의견이 아니라 자기의 우월함을 확인하거나 좀더 ‘유식’해지는 것이다. 몇 마디 오고 가면 누가 스승이고 누가 제자인지 금방 판가름난다. [150p]
- 만화의 인기는 상당 부분 그것이 즉각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심심풀이라는 점, 또 큰 지적 노력을 요구하지는 않으면서 쉽사리 허구의 세계 속으로 달아나게 해준다는 점에 힘입고 있다. 사람들은 역 구내 매점에서 만화 잡지를 사서 지하철 안에서 읽은 뒤 역을 나가면서 휴지통에 버린다. 그것은 일상 속에서 맛보는 한바탕의 상상 세계이며, 너무 잘 짜여진 사회에서 훔친 한 자락의 시간이고, 군중 속에서 수립되는 일말의 개인주의이다. 그것은 두 약속 사이에, 혹은 두 수업 사이에 긴장을 푸는 간단하고도 경제적인 수단이다. [154p]
- 한결 더 너그러운 서구 사회는 청소년들이 서로 교제하는 것을 막지 않으며, 그들이 유치한 연애를 통해 성에 눈을 뜨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청소년들의 감정적·성적 의식은 이렇게 발달하고, 우리 서구인들은 그것에 ‘자연스러운’이란 수식어를 붙인다. 일본에서는 학습에 지나치게 큰 우선권이 주어지다 보니 청소년들의 감정적·성적 발달이 부수적인 것으로 방치된다. 거의 모든 부모와 교사들의 머릿속에서, 공부 이외의 것에 투자된 시간은 낭비된 시간일 따름이다. [162p]
- 꿈을 세트로 파는 소비 사회 속에서 사는 젊은 오타쿠들은 일본 사회를 지배하는 고삐 풀린 소비주의의 첫 번째 고객들, 혹은 첫 번째 희생자들이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 소비 사회가 제안하는 상품들을 특유의 방식으로 왜곡하거나 우롱한다. [168p]
- 상업 출판사들의 참여를 금지하다 보니, 코미케는 미디어를 통한 선전 효과를 거의 누리지 못한다. 스폰서에 의해 지원되는 행사들의 경우엔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미디어의 주목을 끌고, 또 전국적 규모의 언론들의 취재 대상이 되지만, 사흘 동안 50만이 넘는 젊은이들을 매년 두 차례씩 모으는 코미케는 언론인들로부터 철저히 무시된다. 이 같은 상황은, 어째서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코미케란 행사가 있는지조차 모르는지 설명한다. 아무리 중요하고 의미 깊다 해도, 실업가와 상인들이 이해를 갖고 있지 않은 행사는 언론의 조명을 받을 자격이 없다. [169p]
- 마르셀 뒤샹 Marcel Duchamp을 인용하며, 요네자와가 유식하게 말한다.
“20세기에 문화는 더 이상 창조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베낄 뿐이에요.” 코미케보다 이 인용이 더 잘 어울리는 자리는 없으리라. 베끼기는 작가들로 하여금 독창적 인물을 창조하기 위해 애쓰는 대신 이야기 줄거리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 -중략- 게다가 아마추어 만화가들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의도적으로 유명한 연재물을 골라 패러디하기도 한다.[174~175p]
- 만화 영화 주인공으로 변장하면서 젊은이들은 그들의 참모습을 되찾는 듯하다. 마치 평소의 음울한 의복이 사실은 진짜 변장이기라도 하듯. 그것이 진짜 변장처럼 여겨질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재현하는 모습이 ‘그들에게 맞지’ 않기 때문이다. [177p]
- 남성 에로 잡지들에 비해 훨씬 더 정성스레 제작된 이 잡지들은 에로티시즘에 대한 남성과 여성의 개념 차이를 보여준다. 남성들이 ‘핵심적인 것’을 강조하는 그림으로 만족한다면, 여성들은 성관계의 세심한 묘사는 물론 주인공들의 말·느낌·생각들을 중요하게 여긴다. [178p]
- 은어인 ‘야오이yaoi'는 80년대에 세 단어의 첫 글자가 합성되어 생긴 말이다. ’절정 없는‘을 뜻하는 ’YAma nashi', ‘추락 없는’을 의미하는 ‘Ochi nashi', 그리고 ’의미 없는‘을 가리키는 ’Imi nashi', 간단히 말해, 이는 만화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규칙들을 위반하는 만화를 지칭한다. [179p]
- 상업 만화들 속에서 여자는 항상 상냥하고 섹시하며, 남자는 강하고 남성우월적이다. 야오이는 이런 상투적 표현을 뒤집는바, 거기서 남자들은 육체적으로 아름답고(이는 일본에서 남성적 매력의 주된 기준이 아니다) 감정적으로 복잡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오리지널 만화의 주인공이 남성우월주의적일수록 야오이에서는 ‘여리고’ ‘여성적’이다. 마치 젊은 여성 만화가들이 자신들의 일상에 대해 복수라도 하듯, 남성우월주의적인 인물은 동성애에서 수동적인 역할을 하고, 오히려 오리지널 만화에서 소극적이던 인물이 지배적인 위치를 점한다. 이러한 별난 양상을 보이는 야오이 장르가, 일본 사회 안에서 제대로 인정받길 바라는 젊은 여성들의 위장된 요구가 아니면 무엇일까?[184p]
- 조사에 응한 학생들의 52.1퍼센트는 아버지와 이야기할 기회가 없다고 말하고, 51.5퍼센트는 아버지에게 이야기할 거리가 없다고 말한다. [191p]
- 식량이자 세금인 쌀을 개인 혼자서 경작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때문에 마을에서 고립되는 것, 혹은 배척받는 것은 곧 파멸을 의미했다. 오늘에도 여전히 “마을에서 따돌림받는다”는 표현은 사회에 동화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196p]
- "문법적 차원에만 국한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일본어에는 여러 종류의 ‘나’가 있습니다. ‘나’는 그 자체로서 존재를 드러내기보다는 대화 상대에 따라 그 위상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주체는 그가 상급자와 대화하느냐, 아니면 직장 동료, 또는 막역한 사람과 대화하느냐에 따라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 표현을 재구성해야 한다. 이러한 관계의 곡예는 자신을 확정된, 따라서 ‘변화가 불가능한’ 개인, 혹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의 개성을 지닌 인간으로서 생각하기보다는 그때그때 환경에 따라 결정되는 주체로 생각하는 일본인들의 성향을 잘 드러내는번째 지표이기도 하다. [197p]
- 사회학자 나카네 지에 Nakane Chie의 관찰에 따르면, 일본에서 아이를 벌줄 때, 어머니는 그를 ‘밖으로 내쫓음’으로써, 가정의 규칙을 존중하지 않은 이상 그는 이제 더 이상 가족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혼자여야 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서구에서는, 아이를 독립적인 존재로 구성하는 사회 관계로써 처벌하기 위해 그를 집 안에, 구체적으로 ‘방구석’에 세워두는 데 반해서 말이다. 일본적 주체는 이러헥, 삶이란 집단 내부에만 존재하며, 홀로, 독립적으로, ‘개인’으로 있는 것은 불안하다는 사실을 습득해나간다. [201p]
- 수업과 병행하여 진행되는 이 서클 활동 덕분에 일본 어린이들은 집단을 움직이는 메커니즘을 배운다. 리더가 있고, 추종자들이 있고, 돋보이게 해주는 이들이 있고, 또 왕따당하는 자가 있는 집단 말이다. [207p]
- 이지메 현상은 어른들의 세계가 지배하는 관계가 어린이들의 사회에 반영된 것 뿐이다. 미야모토 마사오 Miyamoto Masao 박사가 『일본: 구속하는 사회』라는 책에서 분석하고 있듯이, 사회 구조들은 반순응주의자들을 복종시키는 책임을 맡은 일종의 자기 통제 세력을 생성한다. “일본에서 이지메는 본질적으로 개인으로 하여금 집단의 논리를 받아들이게 하는 수단이다. 집단의 조화를 어지럽히는 아이를 복종시키는 일에 교사가 앞장서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223p]
- 이지메에 주로 희생되는 아이들은, 머리는 좋지 않으나 꾸준히 노력하는 아이, 진도를 늦추는 지진아, 외국에 살다 와서 영어를 유창하게 잘하는 아이, 아니면 정반대로 시골 사투리를 쓰는 아이들이다. 부모가 이혼한 아이, 혼혈아, 학기 중간에 전학 오는 아이들 또한 이지메 목록, 다시 말해 인간성을 파괴하는 어린 파시스트들의 슬픈 사냥감 목록에 오를 위험이 아주 크다. [226p]
- 또 다른 학생들은 그들을 고문자로부터 보호해주는 상상 세계 속으로 피신하다. 이들이 바로 오타쿠들이다. [227p]
- “일본에 사는 한국인들은 따돌림받습니다. 일본인들은 그들에게서 흠이란 흠은 다 잡아요. 그들은 게으르고 지저분하고 거짓말쟁이인 데다가 문맹이라고 말하지요. 제 담임 선생님이 상상할 수 있었던 가장 심한 욕은 바로 한국 사람보다 더 멍청하다는 말이었어요. 저는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왜냐하면 저희 집이 바로 한국 어린이들을 윟나 학교 옆에 있어서, 그들이 근처 공원에서 노는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죠. 가끔 저는 그들과 함께 놀기도 했는데, 그들은 그렇게 멍청하지도 지저분하지도 않았어요.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음에도 저처럼 배척받는다고 느꼈죠. [231p]
- “그것은 제가 현실과 허구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보다 허구를 선호한다는 것이죠. 여기서부터 오는 것이 사회적 현실감의 상실, 그리고 옷차림이나 외모 등, 제 또래의 젊은이들이 신경 쓰는 모든 것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인정해주지도 않는 세상의 관습을 존중해서 무엇 한단 말입니까? 저는 포근한 상상 세계 안에 있는 게 더 좋아요. 저를 이렇게 만든 교육 제도를 단죄하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공부를 잘할 수는 없는 노릇이며, 그들 또한 나름대로의 존재 방식을 갖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주었으면 좋겠어요. 일본에서 학교는 평등주의 원칙에 입각해 있어요. 하지만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은,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을 게으름뱅이로 간주하여 일말의 여지 없이 배척해버리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어요. 저 같은 젊은이들은 앞으로 점점 더 늘어날 거예요.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고 사고할 수 있다는 것을 사회가 인정하지 않으니까요.” [231~232p]
-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투쟁’이라면? 다시 말해 고도 생산 사회에 대한 투쟁이라면? 오타쿠들은 생산성이나 합리성의 용어를 통해서만 사유하는 사회와는 아무런 관계도 맺을 수 없다. 이 세계에 부족한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237p]
- 그들을 교활하게 억누르는 사회에 대항하여, 오타쿠들은 그들의 욕구 불만을 표현할 수단을 찾는다. 70년대라면 그들은 아마도 정치적인 학생 운동에 참여했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그래도 ‘이상적 사회’의 이미지가 존재했고, 이데올로기가 그것의 실현을 위한 노력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이데올로기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혁명의 성공은 가능하지만 노래하는 내일은 존재하지 않으며, 일상이 언제나 그 권리, 즉 인간을 권태롭게 하는 권리를 금방 되찾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오타쿠들은 대부분의 경우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조소를 무기로 선택했다.[237p]
- 사실, 비의적이고 병적이며 현대 사회의 이해를 확연히 넘어서는 주제들에 대해서 오타쿠들이 점점 더 민감해지는 것은, 사람들이 그들을 따라와서 방해할 수 없을 문화 영역을 확립해야 한다는 그들의 필요에 의해 부분적으로 설명된다. 그것이 인터넷을 통해서건 전문 서점을 통해서건, 특별한 의미에서의 ‘금지’를 향해 표류하는 것은 입문한 사람들끼리 있고 싶다는 바람의 표현이기도 하다.[245p]
- 그것의 슬로건은 ‘Nothing is true : everything is permitted'(아무것도 진리가 아니며 모든 것은 허용된다.), 또는 ’성적 환상에서 금기는 없고, 오로지 그것의 표출만이 금기일 뿐이다‘로서, 단숨에 색깔을 드러낸다. [245p]
- 이처럼 광범위한 덴쓰사의 지배는, 매번 미디어 세계를 뒤흔든 뒤 대중을(소비자들이라 부르는 게 더 적합하지 않을까) 향해 번져나가는 붐 현상의 주요 근원들 가운데 하나이다. 예를 들어, 1992년이 사실상 ‘스페인의 해’였다고 한다면, 그것은 덴쓰사가 바로셀로나 올림픽과 세빌리아 세계박람회의 홍보 계약을 따냈기 때문이다. 프로그램 편성과 홍보를 도시에 장악한 덴쓰사는 특집 프로그램, 공개 퀴즈, 퀴즈, 그리고 스페인 관광 및 역사에 대한 취재 프로그램 등을 통해 대대적인 스페인 유행을 일으켰다. 올림픽 개막에 앞선 8개얼 동안 매스컴은 불처럼 타오르는 정열적인 스페인말고는 다른 구원이 없을을 일본인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메시지를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하고자 덴쓰사는 광고주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공조를 강화했다. 요구르트·양념·자동차 등, 무슨 광고이건 유행에 맞추어 그 배경에 스페인적 모티프를 포함시키도록 했다. 덴쓰사가 기획한 백화점 전시회들의 테마는 피카소, 달리 또는 가우디였다. 스페인에 대한 이 갑작스런 열정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는 불을 보듯 뻔했고, 올림픽과 세계 박람회에의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미디어의 파급 효과로부터 최대한의 이익을 뽑아낼 수 있도록 모든 것이 완벽하게 조직되었다. 그리고 덴쓰사의 이러한 이중 역할 덕분에 모두가 만족을 얻었다. 올림픽 조직위원회와 세계박람회 조직위원회는 그들의 목표를 달성했고, 일본의 미디어들과 광고주들은 1년 내내 스페인 물결을 타며 배를 두드렸다. 올레! 그러나 해가 바뀌고 1993년이 되자, 개발 도상국을 갓 벗어난 유럽의 작은 나라 스페인과 그 실업자들은 송두리째 잊혀진다. 이제 적어도 이 부분에서만큼은 순진한 사람들에게서 돈을 빼앗을 만큼 빼앗았고, 덴쓰사는 새로운 포고를 내린다. “이제부터는 축구다.” 그리고 J-리그 붐이 시작되었다.
생각해보면, 미디어의 기능 방식은 오만하기 짝이 없다. 소비자들(정말이지 시처앚나 독자라고 부를 수가 없다)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생각하는 것이 좋은지를 명령하는 것은 미디어 귀족들이다. 정보의 물결은 일방적으로 흐르고, 미디어는 물고기에게 매일 먹을 것을 주는 사육자처럼 소비자에게 정보를 공급한다. [250~251p]
- 서구의 개인주의적 사회에서 정보 통제는 사회를 지배하려는 의도로부터 기인한다. 그것은 엘리트주의적 행태로서, 진정한 권력이란 정보를 배포하는 데 있지 않고 정보를 독점하는 데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에 기반한다. 일본에서는 이와 정반대로 혼자서 정보를 쥐고 있는 것(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오타쿠들은 예외이다)은 그 사람의 가치를 높이지 못한다. 게다가 사회로부터 낙오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가 가진 지식을 계속 업데이트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는 훨씬 더 비뚤어진 효과를 낳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쉬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한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비판 정신과 분별력은 정보의 양의 뒷전으로 밀린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같은 반응은 일본인들이 학교에서 받은 교육을 전형적으로 반영한다. 다시 말해 정보는 시험의 질의-응답과 같은 방식으로 저장된다. 정보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미디어의 독재에 전적으로 유리하다. [252p]
- 학교와 주쿠를 오가는 그들의 시간표는 친구들과 나가 놀 시간을 허락하지 않지만, TV는 언제나 이용이 가능할뿐더러 가장 매력적인 숨바꼭질 놀이보다 훨씬 더 재미있다. 만화 영화, 오락 프로그램 등을 통해 TV는 금방 그들에게 친구가 되었고, 부모들에게는 최선의 베이비시터가 되었다. [256p]
- 한국 신문들은 기회를 놓칠세라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알몸에 미친 일본인들’을 흉봤다. [263~264p]
- 옷을 벗고 포즈를 취하는 것은 얼마간의 용기를 필요로 하지만, 그것은 아문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게다가 미디어의 주의를 끌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잖아요.“ 절묘한 수작 끝에, 미디어들은 마침내 누드로 포즈를 취하는 것이 정체성을 확립하고 가치를 확보하는 수단이라는 생각을 어린 소녀들에게 주입하는데 성공했다. [267p]
- TV 방송국들 쪽에서는 시청률이 높은 시간대에 오타쿠 세계에서 애호되는 만화 영화 주제 음악에 대한 특집 방송들을 편성합니다. 이는 제가 대학생이던 시절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인데, 이런 종류의 프로그램은 시청률의 장벽을 결코 넘을 수 없었기 때문이죠. 요즘 이런 프로그램들의 생존이 가능해진 것은 일본 사회 전체가 오타쿠화되었기 때문이에요. 오늘날 일본에는 2천만 명의 잠재적인 오타쿠들이 있다고 저는 생각하는데, 이 수치는 30세 이하의 모든 세대를 다 합친 것과 다름없어요.“ [277~278p]
- "오타쿠들이 롤리타, 다시 말해 갓 사춘기에 이른 어린 소녀들을 좋아한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일본에서 중세 이후 역사적으로 존재해왔던 경향을 그들에게 뒤집어씌우는 격이에요. 15세기에 일본인들은 겨우 14살 먹은 아내를 취했고,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날때까지 예술가들은 자신들보다 훨씬 어린 아내들을 항상 거느렸죠. 정치가들로 말하자면, 그들은 겨우 소녀 티를 벗을까말까 한 15살 또는 16살짜리 게이샤들과 관계를 맺었습니다. 사회가 그것을 인정하건 말건, 일본인들-나아가 아시아인들 전반-은 언제나 여성의 신선미에 끌렸어요. 그러나 이제 그런 경향들은 정치적으로 부도덕한 것이 되었고, 아무도 그것을 용납하지 않아요. 그리하여 이런 ‘나쁜 버릇’을 규탄하고 미성년자를 탐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모두에게 상기시키기 위해 오타쿠들을 이용하는 겁니다.“ [278p]
- “오타쿠들은 모두 자폐 성향이 있다고 미디어들이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70년대 말에 오타쿠라는 말이 생기기 전에도, 젊은이들은 ‘네아카neaka'와 ’네쿠라nekura'의 두 부류로 구분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네아카가 소속 대학의 스포츠 클럽에 참가하며 활동적인 생활을 하는 학생들을 가리켰다면, 네쿠라는 축소 모형 제작에 심취하거나 만화책을 읽거나 만화 영화에 몰두하며, 의사 표현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을 가리켰지요. 그러나 제 소견으로 그것들은 언제나 존재해온 성격들입니다. [278~279p]
- 대상을 변형시켜 비춰주는 헨사치라는 이름의 거울, 이 가차없는 잣대가 기준이 되는 교육 제도 안에서 가장 우수한 그룹에 속하는 학생들은 직장 생활을 시작하는 순간 가장 낮은 단계로 떨어지고, 단순한 하수인들로 전락한다. [303p]
- 아름다운 것이 정당한 것에 앞선다니, 우리는 과연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일까? [322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