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기 / 김광우
비디오아트의 마에스트로 백남준 vs 팝아트의 마이더스 앤디 워홀
펴낸날 2006년 8월 20일
지은이 김광우
펴낸이 권순범
펴낸곳 숨비소리 (121-240 서울시 마포구 연남동 226-11)
- 뒤샹은 미술과 무관한 것을 미술과 접목시키면서 전통 미술의 가치등급에 혼란을 야기했으며, 새로운 아이디어와 새로운 물질을 소개하여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는 미술에 대한 선입견을 파괴하려고 했다. 케이지는 바로 이런 점을 받아들였다. 그도 뒤샹과 마찬가지로 음악을 유머스런 재담쯤으로 여기면서 사람들을 웃겼고, 클래식 음악을 고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선입견을 조소했다. 특히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의 실존적 영웅심과 과시, 예술이란 고상하며 지성적 사고의 결정체라는 주장에 반발했다. 예술의 본질은 주관적인 느낌과 창조적 과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의 물리적 환경에서 발견된다고 본 케이지는 예술의 목적이 “예술과 인생의 구별을 흐리게 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웃는 사람들에게 눈물이 쏙 나올 정도로 더 웃게 만드는 것이 예술”이라면서 “인생은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며 창조 안에서 진전을 암시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인생 그대로를 단순히 깨어 있는 것으로 지각할 수만 있다면 최선이다”라고 주장했다..[53p]
- 케이지의 영향으로 1952년 여름 극도의 간소한 그림, 예를 들면 캔버스 전체에 흰색만 칠하거나 검정색만 칠한 라우션버그는 1953년에 21년이나 연상인 드쿠닝에게서 드로잉을 직접 구입하면서 자신이 작품을 고쳐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드쿠닝은 젊은 예술가의 도전에 당혹스러웠지만 그렇게 하라고 허락했다. 라우션버그는 드쿠닝의 드로잉을 모두 지운 후 자신의 창조적인 제스처로 소개하면서 어떤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도 공격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알렸다. [57p]
- 워홀은 비개성적인 방법으로 그림을 그렸고, 이런 방법은 평생 답습되었다. 모두 세 점을 그린<전과 후(Before and After)>의 주제는 성형수술 광고인데, 왼쪽 여인은 매부리코의 못생긴 모습이고, 오른쪽 여인은 매력적인 모양의 코로 교정한 모습이다. 워홀은 이런 그림들을 통해 뉴욕 화가들의 물리적 아름다움의 이미지를 공허하게 만들었으며, 회화의 높고 낮음이 단지 화가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폭로하려고 했다. 풍자적인 요소가 배제된 그의 작품을 관람자는 만화를 볼 때처럼 코믹하게 여기지 않고 미술작품을 관람하는 듯한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당시 워홀이 순수미술가로 변신하기 쉽지 않았던 이유는 훗날 팝아트로 불릴 작품들을 소개하는 유일한 화랑 주인 카스텔리가 라우션버그, 존스, 리히텐슈타인을 후원하고있어 유사한 회화를 추구하는 다른 화가들을 후원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65p]
- 케이지는 말했다.
“어디에 있든 우리가 듣는 것은 대부분 소음이다. 우리가 그 소음을 무시하면 그것은 우리를 방해한다. 우리가 그것을 들으려고 한다면 그것을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83~84p]
- 케이지의 불확정성은 유연성(flexibility), 가변성(changeability), 유동성(fluency)의 성격을 지니며, 비의도적으로 작품을 제작하는 목적성 무목적성(purposeful purposelessness)으로서 작품의 완성보다는 그 과정을 중요시하는 것이었다. 미리 예측될 수 없으므로 실험적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똑같이 반복되지 않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유일한 것이었다. 물리적 공간과 시간만이 실재성을 띠며, 이런 시간과 공간에 의존하는 케이지의 불확정성의 개념은 ‘지금 여기’라는 현장에 관람자를 참여시키는 해프닝의 미학이 되었다. 관람자는 방관자가 아니라 개념적으로 해프닝에 가담하는 참여자가 되는 것이다. 실제 행위로 가담하지 않더라도 현장에 현존하는 것만으로도 참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84p]
- “혼란 상태에서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며, 또 창조행위 속에서 무엇인가를 향상시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을 일깨워주는, 즉 삶을 재확인시켜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삶이 일단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게되면 너무도 멋진 일인데, 사람들은 그 삶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열망한다.”[85p]
- “사람들은 어떤 변화 형식에는 ‘파괴’라하고 또 다른 변화 형식에는 ‘건설’이란 라벨을 붙이는데, 뉴턴의 법칙에 따르면 둘 다 같다.”[88p]
- 플럭서스의 정신을 창양한 딕 하긴스는 “플럭서스는 운동, 역사의 순간, 조직이 아니다. 플럭서스는 아이디어, 일종의 작품 경향, 사는 방법이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람들이다”라고 그 특징을 정리했다. [95p]
-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는 TV 매체가 지닌 일방적 송신에 대한 반발로 시작하여 참여 TV로 진전되었다. 비디오의 발명이 상호소통적인 매체로 변신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비디오가 있음으로 해서 TV 매체의 일방적 송신에 의한 이미지는 왜곡될 수 있었다. 그러나 비디오아트는 1965년 휴대용 캠코더가 발명되면서 본격적으로 그 영역을 확장할 수 있었다. [105p]
- 같은 해에 발표한<생상스 테마의 변주곡 (Variation on a Thema of Saint-Saens)>에서 무어맨은 좀더 과격한 행위를 보여주었는데 생상스의<백조>를 연주하다 말고 옆에 준비된 물탱크로 기어올라가 물속에 몸을 담그고 내려와 젖은 몸으로 연주를 계속했다. 백남준은 말했다.
“샬럿 무어맨이 없었더라면 난 음악을 그만두었을 것이다. 그녀를 알게 되고 그녀가 첼로를 연주한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섹스와 연결된 적이 없었던 음악을 이제 연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말에서 그가 무어맨의 육체를 시각적인 요소로 작곡에 포함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10~111p]
- 이 사건은 백남준이 극도의 에로티시즘을 도입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문학과 시각예술과는 달리 음악에서는 성적 영역이 개발되지 않았다”면서 그는 음악에 에로티시즘을 도입하여 음악의 시각화 작업을 완수하려고 했다. 그가 노린 점은 여체의 노출과 성적 요소로 관객을 자극하여 그들에게 좀더 쉽게 다가가는 것이었다. [112p]
- 워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케네디가 대통령으로서 핸섬하고 젊고 도한 영리했기 때문에 감동했다. 그가 암살당한 것이 내게 괴로움을 준 건 아니었다. 날 괴롭힌 것은 텔레비전과 라디오가 슬픔을 강요하듯 그의 사망소식을 전한 것이다.”[134p]
- 워홀은 마릴린과 엘비스의 초상화를 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신성시된 모나 리자의 이미지를 평범한 여인의 모습으로 격하시켰다. 이런 점은 30개의 모나 리자의 초상을 반복한<서른 개가 하나보다 낫다>에서 발견된다. [136p]
- 상자는 뒤샹의 레디메이드와 같은 미학을 지니지만, 뒤샹은 단지 기성품을 선택한 데 비해 워홀은 기성품을 대량으로 생산했다는 점이 다르다. 그리고 이는 바로 팝아트의 정신이기도 하다. [146p]
- 사람들은 밝고 경쾌한 느낌을 주는 꽃 그림을 좋아했으며 카스텔리 화랑에 전시된 꽃은 모두 팔렸다. 카스텔리는 꽃 그림이 모두 팔려 즐거웠지만, 자동차의 충돌장면, 사형을 집행하는 전기의자, 지명수배자의 초상화 등 어두운 내용의 작품들은 사람들이 거들떠보지 않아 실망했다. 그들은 대중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분명히 알게 되었는데, 바로 밝고 경쾌한 것이었다. [148p]
- 멀티모니터 설치가 비디오테이프의 영상을 임의의 숫자로 확대시킨 것이라면, 레이저 프로젝션에서는 레이저 영상이 윤곽의 흐려짐이 없이 모든 지면에 투사되어 벽과 바닥, 천장 또는 자유롭게 공간에 걸린 그레이팅(격자)에서 동시에 관찰될 수 있었다. [172p]
- “한마디로 전위예술은 신화를 파는 예술이지요. 자유를 위한 자유의 추구이며 무목적적인 실험이기도 합니다. 규칙이 없는 게임이기 때문에 객관적 평가란 힘들지요, 어느 시대이건 예술가는 자동차로 달린다면, 대중은 버스로가는 속도입니다. 원래 예술이란 반이 사기입니다. 속이고 속는 거지요. 사기중에서도 고등사기입니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것이 예술입니다. 엉터리와 진짜는 누구에 의해서도 구별되지요. 내가 30년 가까이 해외에서 갖가지 해프닝을 벌였을 때, 대중은 미친 짓이라고 웃거나 난해하다는 표정을 지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의 진실을 꿰뚫어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173~17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