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 앙드레 보겐스키 | 옮긴이 / 이상림
르 꼬르뷔제의 손
초판 1쇄 인쇄 2006년 11월 30일
초판 1쇄 발행 2006년 12월 5일
펴낸이 이상림
펴낸곳 (주)공간사 - 110-280 종로구 원서동 219번지
글쓴이 앙드레 보겐스키
옮긴이 이상림
- 그는 아침에 깨어나면 자신이 바보같이 여겨져서 실망하곤 하지만 다른 사람을 만나고 저녁이 되면 그들보다는 덜 바보 같다고 느끼곤 한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13p]
- 모든 생각은 몸의 형태와 피부에 귀속된다. 몸과 생각은 서로 독립적이지 않다. 보고 만지는 것을 통해 형태는 생각을 풍요롭게 한다. 생각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선 손으로 형태를 만들어야 한다.[18p]
- “흘러가는 시간이 얼마나 가치있는지 확인해보려는 요량으로 하루 매시간 아무런 고통없이 생각을 긴장시키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쥐어지지 않습니다.”[19p]
- 르 코르뷔제는 처음부터 자신을 화가로 여겼다. 그는 건축가이기보다는 위대한 화가로 인정받기를 바랐을 것이다. 일평생 그는 이러한 이중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깊은 내면에 이로 인한 절망을 안고 살았다. 사는 동안 이 문제 때문에 슬퍼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의 존재였다. “두 개의 평행한 존재는 막대기 하나의 양 끝과 같은 것이다.”[23p]
- 함께 여행을 하던 어느 날, 우연히 거리의 미화원을 보게 되었다. 르 꼬르뷔제가 나에게 말했다. “보겐스키, 저 사람이 하는 일은 내가 하는 일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네.” 놀란 나는 설명을 부탁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주었다. “행위의 결과는 행위의 질적 가치에 있다네. 우리 직업을 예로 들자면, 우리가 무언가를 결정했을 때, 그 결정 자체는 결과의 가치나 우리가 작업할 때 우리 스스로에게 하게 되는 요구보다는 중요하지 않다네. 일을 잘 하고자 하는 노력은 집을 지을 때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형성하게 되어 있다네. 결과의 가치는 자신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네.”[31p]
- “받아들이기 위해 열어라. 누구든 다가올 수 있게 하고, 그로부터 무엇이든 얻어내라.”[33p]
- "내가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고 착각하지 말아라, 천사여. 만일 내가 그랬을지라도 그대는 내게 다가오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기도는 늘 거절당해왔다. 누구든 이토록 모진 현실을 거스르며 갈 수는 없다. 나의 소명은 긴장된 팔 그리고 공중을 향해 무언가를 잡기 위해 열린 손과 닮았다. 손은 마치 자신을 방어하듯, 경고하듯 당신 앞에 열려 있다. 오, 그대여, 잡히지 않는, 넓게 열린.“ [34p]
- 그는 너무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회의를 싫어했고, 그룹 속에서도 혼자 조용히 떨어져 있었다. 때때로 누군가가 그를 대변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그는 자기벙어적인 사람이었고 남을 쉽사리 신뢰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아프리카 속담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인간에게는 갈기나 꼬리가 없다. 그러나 잡히기 쉬운,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있다.“
고독은 이기적인 감정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개인의 확장을 의미한다. 고독은 메마른 감정이 아니다.
“자기 앞에 자신을 자유롭게 드러내고 내면의 힘이 밖으로 분출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굉장한 특권이다.”[40~41p]
- 그의 방대한 지식은 책에 의존한 것이 아니다. 체험을 통해 얻어진 것이다. 그가 그린 드로잉, 그가 다닌 여행, 그가 보고 경험한 것들을 통해 얻어진 것이다. 그의 지식은 머리보다는 몸으로 터득한 것이라 할 수 있을 만한 것들이었다.[42p]
- 그는 분석하는 데 있어서는 노련하지 못했다. 종종 자신이 제시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 관대한 청중들 앞에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견해에 대한 미학적이고 시적인 반향을 이끌어내곤 했다. 청중들이 자신의 견해를 합리적으로 이해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저 느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회의에서 그를 위해 설명을 대신할 필요가 종종 있었다. 고독과 자신의 내면 속에 은둔하면서 그는 문제를 보았고 해답을 찾았다.[44p]
- 손을 인도하는 것은 머리지만 때로는 손이 머리를 안내하기도 한다. 그는 말했다. “나는 손에 있는 모든 것을 머릿속으로 옮겨놓는다. 그렇게 손은 나의 정신을 앞지르기도 한다.
머리는 생각했다. 손은 접촉했다. 몸은 감지했다.[46~47p]
- 내부의 삶으로부터 외부의 형태가 생겨난다. [52p]
- 집은 집을 둘러싸고 있는 공간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다. 집은 풍경 속에 던져져 풍경 속에 담긴다. 풍경의 힘은 집의 형태에도 영향을 미친다. 내부생활과 외부생활의 경계는 둘 모두의 영향을 받아 형태 지어진다. 집은 닫히기도 하고 열리기도 하는 외피다. 집은 외부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외부를 향해 내부를 열어두기도 한다. 외피는 그 둘을 연결한다. 외피는 주어진 내부와 그 외부 사이에 연속성을 부여한다.[53p]
- 창조자의 가치를 제대로 이용하지 못한 나라는 문화적으로나 물질적으로 피폐해지는 실수를 저질렀다.[58p]
- 그는 나를 비롯한 젊은 예술학교 학생이 모든 종류의 투시도를 수준있게 완성하리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나는 오른쪽 위쪽에 작은 판테온을 그려넣을 수밖에 없었다. 망성이고 있는 내게 르 꼬르뷔제가 다가왔다. “어떻게 자네 같은 예술학교 출신이 고전건축을 고작 이 정도밖에 모른단 말인가?” 그리고는 자신이 직접 판테온의 디테일을 그리기 시작했고 수플로Jacques Germain Soufflot가 기둥과 박공벽, 코르니스와 초석을 어떻게 계획하였는지 보여주었다. 그는 눈과 손안에 판테온을 간직하고 있었다. *수플로(1713~1380)는 프랑스 고전주의건축의 대표자로 루브르 궁의 건축을 담당하였다. [61~62p]
- 여행할 때 예외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고, 영원하고 근본적인 것을 관찰한다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 사이에는 차이보다 유사성이 더 많다는 진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다.[63p]
- 단지 장식적이기만 해서 실질적인 문제들을 소홀히 다룬 결함 있는 건축에 반해 르 꼬르뷔제는 실질적인 문제에 납득할 만한 중요성을 부여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비단 그 혼자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20세기 초의 건축은 실질적인 문제에 주목할 필요가 있었다.
르 꼬르뷔제는 건축이 건물 안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의 결과가 되기를 원했다. 그는 움직임과 행위 그리고 생각의 외피고 그 움직임과 행위 그리고 생각을 근거 삼아 건축을 조형화하려 했다. 그렇다. 그는 합리적이고 지능적이며 개발하기에 적합한 공간조직을 원했다. 그는 공간을 낭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공간에 대한 ‘경제적’감각을 지니고 있었는데 여기서 ‘경제성’이란 인간의 교류와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65p]
- 그가 한 유명한 말 “집은 살기 위한 기계다”는 그를 매우 고통스럽게 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떤 이는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의자는 앉기 위한 기계다. 집은 살기위한 기계다. 나무는 열매를 달기 위한 기계다. 식물은 꽃과 씨를 지니기 위한 기계다. 심장은 빨아들이는 펌프다’라는 표현을 우리 머릿속에 모두 넣어보자”라는 말은 르 꼬르뷔제가 아니라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했다.
대중은 ‘기계’라는 단어를 두려워한다. 다만 점점 완벽해져가는 기계들을 조금 더 소유하기를 꿈꿀 뿐이다. 아무리 빠르더라도, 이전 모델에 비해 더 빨라지고 정교해져야만 하는 자동차는 집보다 더한 지위의 상징이다. 우리는 더욱더 현대적인 기계를 원한다. 우리는 기계의 성능에 감탄한다. 그러나 집에 대해서는 오래된 것이어야만 하고 오래된 것이라는 인상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르 꼬르뷔제는 기계에 대한 올바른 믿음, 좀 더 정확히 말해서 기계가 제공하는 어떤 가능성에 대한 올바른 믿음이 있었다. 그는 성능면에서 집이 자동차나 비행기처럼 기술적으로 발전하기를 원했다. 성능에 대한 흥미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궁극적인 목표를 간과하지 않았다. 기계에 대한 생각이 그가 추구했던 공간의 미와 공간의 시에 모순으로 작용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67~68p]
- “그들 중 용감한 이들은 건축의 어리석음을 간파할 것이다. 건축이 오늘날 학교라 일컬어지는 기관과 학식있는 자들에게 조롱받기 일쑤면서도 모든 것을 망라해야 하는 직업이라는 사실을, (철학적 수준에 도달할 만큼) 순수한 솔직함부터 가장 정제된 상상력까지 무자비한 노동을 강요받아야 하는 직업이라는 사실을. 그러나 그들은 물리적 법칙에 조종되어야 하며, 경제적 요인에 혹사당해야 하고 종종 정치에 귀속되고 마는 건축이라는 직무의 두터운 벽을 뚫고 나갈 것이다. 진정한 투쟁으로부터 현대의 얼굴이 출현할 것이다. 미학의 열정과 예술의 갈망 사이에서 뼈저린 갈등을 겪고 매일 치열하게 노력하며 그들은 자신만의 겸손하고 숭고한 표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예술의 시대가 도래했다. 새로운 시대는 캔버스 위 틀에 박힌 추상화가 아닌, 건축물에 몰두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이 이룩하고 탄생시키는 조형적 총체가 넘기는 새로운 페이지 위에서 펼쳐진다. 새로운 세대는 새로운 세계를 구축함으로써 위험을 감수하는 동시에 세계의 첨병이 되는 기쁨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72~73p]
- 여하튼, 그의 건축은 등방공간에서 이루어진 건축이었다. 공간은 그 자체로 역동적이거나 상대적이지 않다. 공간은 움직이지 않는 무제한적이고 추상적인 것을 담고 있는 것이다.
르 꼬르뷔제는 수학자는 아니었지만 공간을 이론적으로나 수학적으로 균질하고 움직이지 않으며 중석적이고 부동적인 어떤 것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유지했다. 공간을 움직이는 것은 바로 건축이었다.[75p]
- 왜냐하면 건축은 하나의 외피이고 그것들은 담아내는 용기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복합성에 대해 건축은 복잡하거나 정교한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 건축은 복합성을 기초적이며 기하학적이며 원초적인 형태로 이끈다. 입방체, 실린더, 프리즘, 때로는 폐곡선, 구의 일부, 때로는 뒤틀린 표면으로 제한된 형태들, 단순한 덩어리가 복합적인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반면, 복잡한 형태는 단순함을 담을 수 없다. 혼란스러운 세계의 무질서가 건축으로 정화되고 완화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단순한 형태를 선호한다.[77p]
- 형태는 우리의 생각을 상징하고 있으므로 아름답다. 그것은 열망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은 형태가 없는 사고의 흐름 속으로 사라져 버릴 위험이 있다.
건축은 다른 모든 예술처럼, 사유된 형태를 유형의 것으로 변화 시킨다. 구체화된 생각인 것이다. 사유가 깊고 강할수록 건축적 형태는 더욱 아름답다.[79~80p]
- 빌라 사보아가 르 꼬르뷔제 작품 중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라는 명성을 듣는 데에는 많은 이유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채워진 공간과 비워진 공간 사이의 경이로운 균형감이다. 두 공간의 정밀한 보완성. 보이드는 그것의 윤곽을 뚜렷이 하는 외피 안에서 긍정적인 형태가 된다.
보이드의 중요성은 건축을 의미로 가득 채운다. 우리가 풍만함, 풍요로움, 비옥함을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은 우리 내면에 비워진 공간을 만들어놓았을 때다.
“우리는 점토로 꽃병의 형태를 빚는다. 꽃병의 존재의미는 바로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있다. 우리는 집을 짓기 위해 문이나 창문 같은 개구부를 만드는데, 이를 통해 집의 효율성은 정확히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만질 수 있는 것으로부터 뭔가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정확히 아무것도 인지되지 않는 곳에 진정한 효율이 담겨 있다.”[81~82p]
- 고요함은 소리가 하나도 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귀를 통해 얻는 절대적인 조용함이다. 우리의 시선에도 고요함이 깃든다. [88p]
- “예술작품의구성은 규칙에 따라 정렬된다. 이 규칙들은 표면적이고 의식적이며 모호하다. 또한 이런 규칙들은 창의력 없이 진부하게 적용되는 상투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직관적 조화의 발현과 같은 예술가의 본능적 창조력에 기인할 것일 수 있다. 세잔느의 경우 거의 확실한 예가 될 수 있다. 미켈란젤로는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학식이 있는 사람이었고 자기주관이 뚜렷했으며 심사숙고하는 경향이 있었다.”[92~93p]
- 공간의 지각은 연속적이며 시간을 내포한다. 교향곡이 일련의 음악적 사건인 것처럼 건축은 일종의 시각적 사건이다. 시간, 지속, 계승과 연속은 건축의 구성요소다. 이들은 구태의연한 평면을 폐기처분하고 결과적으로 퇴폐와 퇴보의 시대를 알린다. 평면과 단면은 건축을 음악의 또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 놓는다.“[97p]
- 색채 또한 하나의 음악적 요소다. 색채는 리듬 속에서 멜로디를 인도하고 리듬과 함께 멜로디를 따라 진행된다. 위니테다비타시옹을 연구하고 있던 어느 날 나는 르 꼬르뷔제에게 로지아 내부에 색을 칠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가 좋다고 해서 무척 기뻤다. 그는 세심하게 여러 가지 색채를 썼다. 그리고 나서 우리에게 어떤 점이 어려웠는지 설명해주었다. 입면 위에 선이나 그림으로 색을 칠할 때 서로 시각적으로 연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무분별하게 칠한다면 별들이 무리 지은 것처럼 보일 것이다. 색채가 자연스럽게 칠해진 것처럼 보여야 하는데 그것처럼 어려운 것이 없다. 그는 또 외부의 수직면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로지아 내부에만 색을 써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결국 그가 쓴 색채는 나를 실망시켰다.
음악에서처럼 침묵은 건축적 리듬의 일부다. 침묵은 매우 중요하다. 보이드는 비워진 형태에 그치지 않고 비워 있는 표면이자 가득채워진 벽이며 리듬 속의 적막이자 거대한 자유 공간이다.
“음악은 침묵의 반대가 아니라 그것을 보완하는 것이다. 인디언들은 음악이 연주되면 숨곤 하는데, 음악이 언어보다 더 위험하게 그들을 노출시킨다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음악가들은 ‘음의 부피감’에 대해 말한다. 이에 건축가들은 ‘시각적 지속’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음악에서 리듬이 움직임을 위한 정적인 무언가라면, 건축에서 리듬은 정지된 움직임이다.[98~99p]
- 건물로 지어지기 전에 그의 작품은 이미 그의 머릿속에 보이고 구조화되지만 가끔 예기치 않은 일들이 생기곤 했다. 르 꼬르뷔제는 공사중에 생기는 그런 실수를 좋아했다. 시공업체에는 말하지 말라고 자주 그에게 부탁해야 했다. 그는 형태들의 질서 속에서 생기는우연한 부분이 그 구조를 혼란시키는 예상치 못한 사고를 좋아했다.[100p]
- “항상 푸른 것보다는, 다시 푸르게 자라는 것이 더 낫다.”[102p]
- 가끔 우리는 에술가에 대해 무의식적이라고 말하곤 한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예술가는 무의식이 아니라 ‘의식을 초월한 상태’에 있다. 이는 모든 잠재력과 이성을 포함하는 사고의 영역이며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이성을 초월한 상태’다.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위대한 사상가와 위대한 시인, 위대한 과학자, 위대한 예술가의 정신은 계산으로 증명하기 이전에 결과를 예측했던 아인슈타인의 사고와 같다. 우리는 이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그냥 직관이라고 부른다. 직관에 대해 언젠가 브랑쿠시가 이렇게 말했다. “무엇인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만들 수 있는 상태로 자신을 이끄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106p]
- 직각은 모든 사물의 축이고 그것 없이는 어떤 사물도 위치시킬 수 없다. 특히 우리 자신은 더욱 그렇다. 직각은 예상할 수 없고 가변적이며 때때로 혼란스러운 자연의 모든 형태를 우리의 사고과정을 향해 이끄는 질서다. 직각은 우리가 바라보고 생각하는 세상에 대한 기하학적 원리다.
직각은 단순한 추상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 속 인간 그 자체다. [10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