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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수한 큰맛

지은이 / 고유섭

by Joong

구수한 큰맛
2005년 8월 15일 초판 1쇄 인쇄
2005년 8월 20일 초판 1쇄 발행
지은이 : 고유섭
엮은이 : 진홍섭
펴낸이 : 김영애


- 다른 나라와 달리 조선의 1910년이란 해는 조선의 모든 과거 문화를 ‘괄호 안에’ 넣어버리고 말았다. 따라서 조선의 고미술이란 실로 조선의 역사와 함께 자라났으며 조선의 역사와 함께 사라지고 만 미술이다.[10p]


- 적어도 조선의 고미술에 대하여 상술한 바와 같은 역사적·사회적 배경을 냉정히 통찰함이 없이 여운이나 잔재에 대한 연연한 심리만 가지고 애착하여 고집한다면, 그는 자기 무덤을 스스로 파고드는 불행한 사람들이라 하겠다.[14p]


- 조선문화의 창조성을 말하려 할 때, 우리는 먼저 창조성의 의미를 확립 시키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이다. 창조란 무엇이냐. 이것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우선 인간의 창조의 능력을 부인하는 사상과 인간의 창조능력을 시인하는 사상과의 대립을 우리는 보고 있다. 이 인간의 창조능력을 부인하는 사상은 일찍이 스콜라철학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만유萬有는 무無로부터 생겨날 수 없는 것이라” 해석할 제, 만유는 곧 자연 인과율因果律의 위에 설 뿐이요, 창조의 능력이란 오직 신에게만 있는 동시에 자연과학의 발달이 이곳에서 싹트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절대 능력자인 절대 독립자가 아니면 무에서 유를 만들 수 없는 것이니, 인간이란 것이 이와 같은 절대 능동적인 절대 독립자가 아니라면 인간에게는 창조하는 것이 없다. 인간에게는 오직 유에서 유를 만들어낼 수 있을 뿐이니, 이는 이로써 창조할 것이 아니요, 유의 변용變容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 인과율이 절대로 지배하고 있는 한 인간에게는 창조가 없다. 자연과학적으로 볼 때 인간에게는 창조성이 없는 동시에 인과율을 초월한 존재를 세우는 종교적으로도 창조의 능력은 오직 신에게만 있는 것이요, 인간에게서의 창조의 능력이란 거부되어 있는 것이다. 유의 변용이란 것도, 요컨대 인과율에 지배된 한 현상에 불과한 것이요, 인간의 자기의식을 보이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편에서 보면 실로 “역사의 앞에서는 새로운 것이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인간에게 창조의 능력을 시인하는 쪽은 근대 낭만파철학 이후 자기의 행동능력이 주장된 이후 정신의 창조능력, 생명의 창조능력이란 것을 시인하게 된 것이다. 자아는 자아가 결정하는 행동으로써 무한히 전개되는 순수한 활동이다. 그 무한한 실재성實在性이 유한한 한계속에 전개되는 것이 곧 창조적 활동이라, 그러므로 창조의 철학가 베르그송에 의하면, 모든 생명은 곧 지속되며 이 지속은 무궁한 과거에서 무궁한 미래로 창조적 진화를 전개하는 데 그 실재성이 있으니, 생명은 곧 창조이다. 생명이 있는 곳에 창조가 있는 것이다. [34~35p]


- 이리하여 우리는 창조를 해석하되, 이러한 자주적 정신, 무한한 활동적 정신이 인과에서 제약되어 있는 것에서, 즉 유한에서 한정되어 있는 것에서 형태를 얻고, 또 얻는 것에서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해석한다. 바꾸어 말하면, 무형의 능력이란 것이 유형의 형태를 얻는 곳에 창조적 활동, 즉 창조하는 것이 있다고 해석한다. 이것이 인간생활의, 또는 생명 그 자체의 구체적 실존 양상이니, 한 손은 인과율에, 한 손은 자주의지에 파묻고서 움직이고 있음이 곧 생명의 지속형상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무한한 정신이 형태를 얻는다 하더라도, 그곳에는 실재에 있어 여러 가지 경우가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 형태라는 것이 어미 어디든 있던 것을 그대로 본떠온 것이냐(모방), 또는 어디든 있던 곳을 변화시켜서 이 무한정신의 새로운 발전의 내용을 담게 된 것이냐(응용·이용), 또는 아무데도 없던 것을 이 무한정신이 새로운 모양을 얻어낸 것이냐, 이러한 도식적 분류가 설 때 참다운 의미로서의 창조란 이 최종의 경우를 두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 하겠지만, 인간의 실제생활이란 무에서 새로운 것이 나오는 것이 아니요, 일종의 변증법辨證法적 비약의 지속에서 창조가 나온 것인만큼 절대 새로운 것에서의 창생이란 것은 없는 것이다. 이 뜻에서 “만유는 무에서 나오지 아니한다”는 정설이 일종의 파라독스paradoz(역설)를 갖고 새로운 악시움axiom(격언)으로 다시 등장할 수 있다.[35~36p]


- ‘기교적인 기교’, ‘계획적인 계획’은 기교, 계획이 의식적 의식, 분별적 의식에서 나와 직접여건인 구체적 생활에서 분리되고 추상된 기교요 계획으로, 그것은 자각된 기교, 자각된 계획, 다시 말하면 기교요 계획이 독자적 의식을 갖게 된 기교요 계획이다. 그것은 즉 기교와 계획이 구체적 생활에서 충분히 분화된 것으로, 따라서 구상적 생활 그 자체도 기교요 계획에서 분화되고 분리되고 있어, 이러한 경우에는 기교요 계획이 구체적 생활로 다시 합쳐질 것을 이상으로 한다. 소위 개성이란 것이 예술에서 문제되어 있고, 천재주의가 문제되는 것은 기교요 계획이 이와 같이 생활에서 분화되어 있는 데서 필연적으로 오는 문제이다.
그러나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은 기교요 계획이 생활과 분리되기 이전의 것으로, 구체적 생활 그 자체의 생활본능의 양식화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생활과의 조화가 처음부터 문제되어 있지 않고 구체적 생활의 본연적 양식 출현으로 생활과 생활의 연석에소 생활과 함께 운명을 같이하고 있다. 기교적 기교, 계획적 계획이 작위적 기교, 작위적 계획으로 구석구석이 기교적으로 계획적으로 정돈하고 구성함으로써 구체적 생활을 이루려는 데 반하여,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은 구체적 생활 그 자체의 본연적 양식화로 나타나므로 구체적 생활과의 합작은 도대체 문제가 아니나, 생활 자체의 본연적 양식화 작용이란 점에서 그것은 기교요 계획의 독자성·자율성·과학성이 자각되어 있지 않다. 기술이 기술가의 손에서 전통이 계승되지 아니하고, 기술가의 혈통이라는 다만 그 이유에서 그가 기술가이든 아니든 기술가의 행세를 해야만 했던 조선의 풍속이 곧 이것을 증명한다. 말하자면 기술이 기술로서 전통이 전해지지 아니하고 기술이 혈통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이뜻에서 보면, 조선에는 근대적 의미에서의 미술이란 것은 없고 근래의 용어인 민예民藝라는 것만이 남아 있다. 즉 조선에는 개성적 미술, 천재주의적 미술, 기교적 미술이란 것은 발달되지 못하고, 일반적 생활, 전체적 생활의 미술, 즉 민예라는 것이 큰 동맥을 이루고 흘러내려왔다.[47~48p]


- 조선의 미술은 민예적인 것이며 신앙과 생활과 미술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조선의 미술은 순전히 감상만을 위한 근대적 의미에서의 미술이 아니다. 그것은 곧 미술이자 곧 종교요, 미술이자 곧 생활이다. 말하자면 상품화된 미술이 아니므로 정치한 맛, 정돈된 맛에서는 항상 부족하다. 그러나 그 대신 질박한 맛과 둔후한 맛과 순진한 맛에 있어 우수하다. [48p]


- 비정제성의 특질의 하나로 우리는 다시 비균제성, 즉 아시메트리asymmetry를 들 수 있다. 이것은 상하의 시메트리든지 좌우의 시메트리든지 다 같은 것으로, 즉 상하나 좌우가 규격적으로 같지 않은 점이다. [50p]


- 조선미술에서 나는 항상 한 개의 모순을 본다. 그것은 작은맛과 큰맛이다. 조선의 미술은 단아한 면을 갖고 있다. 이 단아라는 것은 작은 데서 오는 예술성이다. 그러나 다시 큰맛이 있다. 큰맛은 단아치 않은 것이다. 그러면 이 두 개의 모순은 어디서 오는가? 단아한 작은 맛이란 외부적·자연적·지리적 환경의 소치가 아닐까? 즉 단아란 자연의 제약에서 오는 면이요, 큰맛이란 생활의 면, 생활의 태도에서 오는 면이 아닐까 한다. 즉 무관심·체념 등에서 거칠고 큰것이 나오고 부정이 나오는데, 큰맛이 있고 다시 생활력의 둔한 곳에 큰맛이 있지 아니할까 한다. 이미 조선의 예술이 생활과 밀착된 것임을 말하였지만, 조선의 생활은 또한 땅에 뿌리깊이 밀착하고 있다. 조선의 생활은 아직도 흙냄새가 난다. 이것은 결국 서민사회·시민사회를 이루지 못하였던 곳에 그 원인이 있다. 그러므로 조선의 미술은 확실히 토지에 밀착하고 있다. 땅르, 생활을 깊이 확실히 물고 있다. 일본의 일광묘日光廟나 아사쿠사 관음당 같은 것을 본 사람이면 누구나 기억할 것이지만, 그것은 공중에 뜬 신기루이다. 그러나 조선의 건축은 어느 것을 보든지 그대로 땅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반석같이 서 있다. 동토東土(일본-편자주) 일본의 에술이 세부까지 치밀하고 전체가 아름답게 정돈되어 있음에서 실제로는 어땠는지 간에 큰맛이 적음에 대하여, 조선의 미술은 거칠면서도 땅에 파묻혀 있는 곳에 큰맛이 있는 듯하다. 거칠기만 하면 구수하지 못하 것이요, 땅에 파묻혀 있기만 하면 크지 못할 것인데, 이 두 면의 합치가 구수하게 큰맛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이리하여 단아한 맛과 구수한 큰맛이 개념으로서는 모순된 것이나 적조와 유머가 합치되어 있음과 같이 성격적으로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듯하다. [52~53p]


- 미술을 순전히 오락적·감상적 소일거리로 생가하는 것은 이미 과거의 유태遺態이다. 미술 내지 예술을 오직 오락적·감상적 소일거리로 생각하는 것은 미술 내지 예술을 오직 감정적인 것으로만 생각하는 18, 9세기적 사상이다. 미술 내지 예술을 골동적으로 다루는 것은 이 사상에서도 극히 천한 면이요, 더욱이 그곳에 금전문제·영리문제가 붙는다는 것은 인신매매를 업으로 삼는 무리와 다름이 없다. 미술 내지 예술이란 것은 그것을 낳은 무리, 그것을 낳은 사회의 모든 실천적 요소, 모든 정신적 요소가 양식樣式의 형태를 빌어 상징화된 것인만큼, 그 무리, 그 사회의 모든 생활이 구체적 전모를 알려면 미술 내지 예술 외에 없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그 눈을 보면 사람을 어찌 속일 수 있으리오” 한 觀其眸에서 모眸에 해당한 것이다. 청기언聽其言이라 하였지만, 말이 있는 곳엔 오히려 거짓이 있는 법이나, 모眸에는 거짓이 없는 것이다. 조선의 문화인은 다른 나라의 문화인보다 이 방면에 대한 관심이 너무 적다. 조선미술의 전승문제에서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이 조선문화의 전승을 문제삼겠거든, 이 방면에도 깊은 관심이 있어야 해결될 것이다.[56p]


- 인간의 사고란 것이 아무리 단편적인 개념으로써 하는 것이라도 복잡을 단순시키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하고, 복잡을 규격화하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하는, 소위 인간의 이해력이란 것이 너무나 규율적임을 새삼스럽게 깨닫지 않을 수 없는 동시에, 이해의 단순은 사실을 복잡으로 말미암아 다시 괴멸되고, 이해의 규격은 사실의 유동으로 말미암아 다시 파격될 때, 파괴를 본성으로 하는 자연력의 강대와 공작을 본성으로 하는 인간의 이해력과의 사이의 끊임없는 윤회적 상침작용이 너무나 운명적으로 결연되어 있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몽롱하고 복잡하고 부정형인 자연의 사태를 분해하고 단절하여 한 개의 틀 속에 잡아 넣음으로써, 지적 종합작용, 즉 이해작용이 성립되며, 틀과 틀을 비교함으로써 이질적인 것을 발견함으로써 우리의 지식내용이란 것이 성립된다면, 종합과 분석, 즉 일원론과 이원론과의 숙명적 起顚 번복의 관계를 우리는 영원히 벗지 못할 것이니, 이곳 과제에 걸쳐진 신라·고려 양조 문화의 이해방법에 있어서도 비록 그것이 정경·예문·신교 전반에 대한 광범위한 것이 아니요 일부 예술문화에 국한된 것이라도, 우리는 두 개의 이질적인 틀을 찾아 세우고 그 굴레를 쓰고 들어가지 아니 할 수 없다.[68~69p]


- 그러나 불교는 종교이다. 인도신화에서 발족된 것이나 현생의 고난과 사후의 문제를 철학적 체계로 객관화시킨 것이다. 그곳에 보편성이 있다. 즉 일반에게 받아들여지고, 보급될 특질을 가졌다. 동시에 그것은 이러한 사상적 체계를 일반대중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하여 도상적 해설방법과 음률적 표현의 수법을 가졌다. 이 두 방편은 신화 그 자체에도 있는 것이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신화란 보편성을 갖지 아니한 것이다. 이민족에 대한 파급성을 갖지 아니한 것이다. 이 점에서 종교로서의 불교는 당연히 우위를 갖질 것이며, 도시에 불교체계의 거대성은 도상적해설과 음률적 표현에 거대한 성장을 초래하여 세계 어느 민족이라도 그 황홀에 빠지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화엄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종교의 본질로서 말한다면, 도상적 해설이라든지 음률적 표현이라든지 하는 감각적인 것은 절대적 의미에서 시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불교에 있어서도 선파禪派같은 초이지적 이지를 내세워 불립문자不立文字하고, 직지인심直指人心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한 파는 도상적 해설과 음률적 표현을 전적으로 부인한다. 즉 선종은 자율적·사변적 반성으로서, 곧 종교의 본원, 불교의 본원인 보리에 참여하고자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순수사변적純粹思辨的인 것에는 감각적인 방편이란 것은 생각될 여지가 없다.그러므로 가령 유교시대 미술이라 하나 그것이 불교의 교리로서의 영향, 사변적인 영향을 입은 송조 이후의 유교사상을 계승한 조선시대에 있어서는 사변적인 이기론이 추구되어 있는 한, 유교로써도 미술을 낳지 못하였다. 유교로 말미암아 유지된 미술은 한갓 윤리적 경계성뿐이다. 즉 현군·충신·효부·절사의 유형이나, 아니면 징악의 의미에서의 그 반대적 악성적 인물 또는 조상숭배, 제사대상의 인물, 아니면 문방적인 것 등이 있을 뿐이다. 도서나 사군자류도 윤리적으로 극히 제한된 것이었다. [88~89p]


- 일반 유교로는 에술문화란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오직 그러한 시대에 산출된 것은 윤리적 문화성을 갖지 않은 일반 장인들의 산출물이 있었을 뿐이니, 그들은 비윤리적·비문화적인 대로 생활에 뿌리박고 생활을 노래하거나 계급사회의 주문에 응하는 사이에 어느덧 표정 있는 물건도 내놓게 되고, 혹은 미적 가치나 예술적 흥미의 그런 공예품을 내놓았을 뿐, 진정한 의미에서의 문화성을 가진 미술을 내놓지 못하였다.[89p]


- 동양문화란 원래 선善에서 떨어진 독자적인 미 자체를 추구하는 법은 없었다. 특히 그것은 중국문화에서 그리하였으니, 선 즉 미가 아니면 아니 될 것같이 생각되었었다. 그들에겐 비선非善, 비비선非非善의 선악을 떠난 순수미의 존재를 몰랐다. 특히 그것은 실제적이요, 규범적이요, 윤리적인 유교사상에서 그러했다. 그리고 문화인이란 항상 이러한 윤리의 기반 위에선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조선의 문화인·유교인이란 이러한 윤리적 문화성을 더욱 형식화시키고, 협의화시키고, 천착화시킨 것이다. 이것이 조선의 유교문화시대로 하여금 비미술적인 것에로 퇴화시킨 중요한 원인이었다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유교문화인 이외의 자유인들은 비록 이론적 파악은 없다 하더라도, 자유미·순수미의 존재를 무의식중에 파악하고 있었다. 중국 선가仙家의 자연관이 그 큰 예의 하나라 하겠으니, 그것은 일견 유교 같은 규범적·윤리적인 것과 대치되어 있었던만큼 그것도 별개의 윤리성을 그 자체로 갖고 있었던 것같이 생각될 수도 있지만, 그 윤리성이란 원래 초윤리적 윤리라 할 것으로 다분히 자연율을 존중하였던만큼 유고적 윤리와는 다른 것으로 보지 아니할 수 없다. 예술적으로 말한다면, 유교와는 달리 일종의 자연미관自然美觀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어, 이러한 일면이 兩晋六朝로 들면서 유교의 범신적汎神的 자연관과 합치되어, 특히 당말오대, 송조에 들면서 다분의 禪機化를 얻어 신선합일적 신사상이 문학적인 미술, 시정적인 미술을 낳게 하였다. 만일 이러한 일면이 없이 실재적이요, 윤리적이요, 규범적이었던 유교문화만이 고집되어 있었던들 동양의 미술문화란 정신적으로 얼마나 삭막한 것이었을런지 상상에 남음이 있다 하겠다. 조선조 유교문화시대에 있어서의 정경을 우리가 회고한다면, 이러한 경향이 다분히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신선합일적 자연미관이 다분의 배회가 있었기 망정이지, 유리적唯理的인 유교만이 문화의 전폭을 이루었던들, 고갈이 어찌 그들 유교문화인에게만 한 했을까가 의문이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도 비록 유교문화시대라 할 조선시대의 미술문화사에 대해서도 불교미술문화의 의미는 크다 아니 할 수 없다. 물론 불교미술 그 자체는 조선시대에 들어 없어진 것이지만, 그것은 불교미술성이 완전히 근절 단절된 것이 아니요, 일반문화 혈맥에 스며든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조선에 끼친 불교의 역할을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는 바이다.[90~91p]


- 게다가 건축은 건축만의발달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동시에 모든 조각미술과 공예미술과 회화미술이 함께 들어가는 것이다.
건축이란 원래 건축으로서의 구가성構架性만으로써 발달 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모든 요소를 용납하기 위하여 영조되고 발달됨이니, 그것은 종교건물에 있어 더욱 그러할 것임은 설명하지 않아도 자명할 것이다. 그러므로 인도에 있어서도 오명으로서의 하나인 공교명이란 건축·회화·조각·공예를 전부 포함하면서도 토목건축들이 그것들을 대표하고 있는 것이라 한다.[97p]


- 동양의 건축이란 대개 주택·궁전·관아·묘당·정자·창고·옥사·서원류와 사후주택으로서의 분묘를 들겠는데, 이 중의 만인 공락共樂의 보편성을 가진 것은 정자밖에 없다 하겠고, 장엄성을 말한다면 궁전밖에 없다 하겠다. 그러나 정자류는 대개 소규모의 것이요, 더욱이 계급적인 것이며, 궁전류는 권위에 치우친 것이라 하겠다. 기타 실용적인 것은 본래 예술적 성격을 구비치 못하고, 묘당 같은 신령적 건물이란 것도 대개 각 개인의 조상을 위한 것이었던 관계상 이 역시 예술성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문묘文廟·도묘道廟 같은 다소 일반적인 것이 있다 하더라도 건물양식으로 말하면 일반 궁전건축과 같은 것으로 특별한 것이 못되며, 그 중에도 문묘 같은 것은 대중성을 가진 것이 아니며, 도묘는 다소 종교성을 띤 것이지만, 도묘의 발달은 도교상의 발달 후에 있는 것이며 도교상의 발달은 또 불상조영에 영향되어 나온 것인즉, 그 발상에 있어 독자적 의미를 발견키 어려운 것이다. 즉 이렇게 보면 동양건축은 궁전 같은 것이 가장 장엄성을 가진 것이나, 다른 기타의 건물과 함께 대중적 공영성을 가진 것이 아니요, 따라서 보편성이 있는 예술성을 발휘할 수 없었던 것이다. 동양건축의 이러한 특질에 대하여 보편성·예술성을 부여한 것은 곧 불교의 힘이다. 불교는 권위를 타파하고 계급성을 타파한 만인의 공수共受, 공찬共讚, 공락共樂할 수 있는 평등, 무차별인 법인 동시에 거대 화려한 종교이다. 그 건물에는 만인이 같이 들어갈 수 있고, 만인이 같이 거처할 수 있고, 만인이 같이 장식할 수 있는 건물이다.[93~94p]


- 대체의 설명을 하자면 조선의 불교조각사는 이것을 3단으로 구별하여 생각할 수 있다. 제1은 초기의 교학전성시대요, 제2는 밀교유행시대요, 제3은 선종시대이다. 초기의 교학전성시대는 곧 삼국시대인데, 당대의 조각은 논리적 명증성을 가지고 있어 도식적 체계의 명랑성을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상징적인 점, 신비적인 점이 없이 규격적인 점이 강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제2기의 밀교유행시대의 것이란, 통일 전후부터 발생된 것으로 상징적인 점과 신비적인 점이 많은 특색을 갖고 있다. 예컨대, 석굴암의 11명관음이라든지, 팔부중, 능묘에 보이는 12지신상들과 같이 한 몸에 11면이 나타나 있다든지, 인신수수人身獸首의 형태를 하고 있다든지, 천수관음과 같이 한 몸에 천수를 표현하는 것 등 모두 ‘밀교 특유의 상징적’ 수법에 속하는 것이요, 그 불상 표정에 있어서도 불국사의 비로자나(대일여래)·아미타불 등과 같이 강력한 기개를 갖고 있는 것도 있고, 명왕·천부 등 분노의 표정을 하고 있는 것도 있다. -중략- 여하간 교종 일파에 의하여 조성된 불상들은 논리적 정당성을 가지고 도식적인 점을 가지고 있었으나, 밀교로 말미암아 다면다벽多面多擘의 기괴상, 분노의상, 기타 여러 가지 비상식적으로 상징적인 상이 많이 나왔다. 뿐만 아니라, 여러 불보살 또는 명왕천부들이 여러 가지 상징적 법구法具를 갖게 되었다. [101~103p]


- 만일 계戒란 것을 밀교에, 혜慧란 것을 교종에 기계적으로 배합시킬 수 있다면, 정定이란 것은 선종에 배합시킬 것으로, 전에도 말한 바 논리적 설명(敎)이라든지 상징적 설명이 필요치 아니하고, 초이지적 예지의 힘으로 자내증自內證을 얻음이 선종의 특색이다. 따라서 선종에서의 조각이란 다분히 이 예지적 요소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만이 강조된다면 조각에 있어서의 감각성이란 매우 희박해지고, 더욱이 이러한 초이지적 이성만이 두터워지면 불보살로서의 가장 중요한 일면인 정감적 자비의 표현이란 것이 소극적인 데로 기울어지지 아니할 수 없고, 이렇다면 다시 대중에 대한 불보살상의 일반성이 매우 적어지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조각도彫刻道로 말하면 여기에 소극적 퇴폐적 일면이 나타나게 되고, 따라서 불교예술은 회화적인 데로 넘어가지 아니할 수 없이 된 것이다. 다만 이러한 일면은 조사상祖師像 같은 불법을 수행하는 인간의 표현에는 오히려 적절한 요소의 하나로 됨으로써, 조사상의 조성이란 것이 발전되어 표정으로선 매우 이지적이요, 깊은 도리라 하더라도 초상조각의 발전을 가져오게 된다. -중략- 선종으로 말미암아 불교예술이 회화로 넘어갔다는 것은 무엇이냐. 선종 이전에도 불교로 말미암아 회화 발달이란 있었고, 불교 자체의 회화도 크게 발전되어 있었던 것이다. 즉 불교사원의 벽화·탱화·만다라회도 등은 일일이 셀 수도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불교를 기다리지 않고서도 회화의 발달은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양에 있어서의 회화란 실용적 도해의 것이 아니라, 신간고사神姦故事, 권성징앙적 감계화鑑戒畵뿐, 말하자면 응용예술부분에서의 것뿐이요, 이 응용예술적 특질이란 종교화 그 자신도 동일 범주에 편입될 것이지만, 선종으로 말미암아 전개된 회화미술이란 이러한 응용예술로서의 회화미술 이외에 특수한 범주를 내었으니, 이것이 즉 전에도 말한 바 주관적인 自內證의 현상으로서의 미술이다. 바꿔 말하면, 일반응용미술이란 목적을 위한 수단적인 것이며, 주체에 대립하여 주체로 인도될 미술이다. 즉 주체적인 것으로 인도될 목표의 것이 수단으로서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종의 미술은 주객합일체로서, 미술이 곧 자내증 그 자체이며, 자내증이 곧 미술 그것이다. [103~104p]


- 예컨대, 도학파들이 최고의 예술같이 생각하는 사군자 등을 대조시켜볼 때 다소 사료되는 바가 있으니, 사군자 그 자체의 발생이란 원래 저런 선가적 의식에서 출발한 것이나, 많은 윤리성이 부가되어 있는 점에서 그것은 유불선 합치의 예술이라 할 수 있을 듯한데, 그러한 사군자의 회화적 효과와 선기적 회화의 효과를 비교한다면, 선기를 중요시한 회화에 윤리적 절제성보다도 승기僧氣의 농후함은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105p]


- 그러나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기후가 미술에 한 개의 배경이 될 수 있다는 것일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어떠한 배경인가? 지금 문제된 가을을 들어 말하자면, 그것은 두 가지 배경을 가졌으리라고 생각된다. 즉 하나는 풍성의 성실미, 다른 하나는 적적한 폐허미(이것을 담담한 철학미라고도 할 수 있다)라고 할 것이다. [109p]


- 인도에는 원래 육체에 대한 관념이 이집트의 그것과 같이 고집적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들은 분묘에 대한 관념이 없다. 탑은 불적을 기념하는 기념물적 건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탑파를 대취大聚라든지, 취상聚相이라 번역하는 것도 이러한 기념비적 의미를 말한 것이다. 이러한 곳에서 조탑공덕이란 것도 생기는 것이다. 부처를 기념하려고, 불적을 기념하려고 탑을 세우려는 그 행동이 공덕이 된다는 것이다. 탑이 만일 분묘의 의미가 있다면 한 사람의 해골을 위하여 그렇게 수십 수백만의 탑파가 동서천지를 뒤덮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탑파가 높이에 있어서 다른 건축에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도 기념비적 대취사상과 적공성덕 의미가 부합된 결과이다.[119p]


- 처음 입구에서 첫 상을 보면 다음 상이 유인하고 있어, 그 상으로 가면 다시 유인하기를 시작하여, 이것을 거듭하기 수차에 마침내 본존 앞으로 나오게 된다. 이러한 유동적 관계가 실로 이 석굴암의 기운생동적 경영이니, 일본의 야나기씨는 이것을 위하여 누차의 찬사를 그의 저서 『조선과 그 예술』이란 데서 바치었다.[130~131p]


- 그들의 정원예술을 이해하는 데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시인 리큐의 선생이 객을 청하려고 리큐를 불러 낙엽 진 마당을 말짱하게 소제시켰다. 소제를 마친 후에 리큐로 하여금 나무를 흔들어 낙엽지게 하였다 한다. 이것이 일본정원의 정신이다.[141p]


- 물론 이것은 과거의 이야기이고, 이것으로 규범을 삼으려는 것도 아니다. 규범은 각 시대마다 따로 있는 것이다.[143p]


- 그런데 이규보 시에도 “구워낸 청자 잔은 열에서 하나 둘 취한다”라 한 바와 같이, 청자다운 미작은 10중의 1밖에 안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적 수렴이 심하여 그에 불응하면 생명 재산까지도 보상할 수 없을 지경이다. 재래의 섬세치밀한 장식수법만 가지고는 도저히 수응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유약이 조금 침탁되더라도, 상감을 이용하면 제작 수법은 매우 편해지고, 외관 또한 재래의 도자에 하등의 손색이 없을뿐더러, 도리어 무늬의 회화적 가치의 발휘로 말미암아 기면의 변화가 찬란해지므로 도공에게는 이에 더한 변법이 없는지라, 마침내 이 수법이 일시를 풍미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고려의 독특한 상감술의 발생 이유요, 예술 발전에 대한 계급투쟁의 능동성의 좋은 예다. 여하간 이러한 편법이 생긴 최초에는 손으로 조각하는 수법이 그대로 성행하였으나, 이 편법은 다시 편화되어 차차 기계적인 인화수법이 가미되고, 마침내 순인화법이 남게 되어 고려 말기에는 푸른색의 투명이 사라지고 탁하게 됨으로써, 소위 삼도수三島手(분청사기)라는 분청색의 도자기로 퇴락적 존재가 되었다. 상술한 바와 같이 상감수법은 일종의 편화수법이었으나, 고려청자는 오히려 이로 말미암아 회화적 가치가 발휘되었고, 또 이로 말미암아 멸망하였다. 푸른색의 소홀이 상감수법의 발생원인이었고, 동시에 그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194~195p]


-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더욱 감계주의만을 생명으로 하는 유교만이 유행되었고, 입신양명이란 것이 개인주의적 출세에 있어 자신의 영예와 선조의 영예를 화폭에 옮겨 일가의 긍지를 삼으려는 풍습이 성행되어, 초상화는 더욱이 이용되었다. 관도에 오른 자의 자기의 면모가 어명에 의하여 어용화가인 화원의 손으로 그려지는 것이 일대의 명예로, 자손으로서 자기의 조상이 영정을 갖지 못한다는 것은 면목없는 일이었다. 이와 같이 비단은 못 쓰고 삼베는 못 쓰더라도, 창호지나마, 유지나마 화공을 부르고 분채를 장만하여 한 폭의 초상화를 남기기에 급급하였다. 자손으로서 효성스러운 일이라면 아름다운 일에 가까우나, 동기가 순결하지 못하면 천하게 된다.[204~205p]


- 미술이란, 생활에 근거하고서 기술로부터 시작되는 것이요, 기술은 생활의 구체적 방법이고 보니, 미술은 생활의 구체적 표현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229p]


- 대개 협의에서의 역사란, 항상 문자를 통하여 후세에 전해지는 성질의 것인데, 신라의 역사적 기술은 신라 자체의 문자로서 이룩된 것이 아니요, 남의 문자 즉 한문을 빌려 기록을 남기게 된 것이라, 이 점은 그 실제생활의 발전이 상당히 고도에 이르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볼 수 있겠고, 따라서 그 문자 사용 이전의 생활사라는 것은 자못 그 민족의 피를 통하여 입으로 전해오는 사이에 어쩔 수 없이 많은 가감의 운명을 받았을 것이요, 또 문자 사용 이후의 생활사라는 것도 그 초기에 있어서는 기록사용이 원초적이었던 관계상, 대개가 겉으로 나타난 크게 소략한 기록이 아니면 의식적 수직이 많은 것이었을 거라고 보매, 이러한 “남의 문자”를 통하여 그들의 생활감정을 알기보다는 “말없는 문자”, 즉 고고학적 유물을 통하여 그들의 생활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 편이 오히려 더 많다 하겠다.[229~230p]


- 서書는 심획야心劃也란 말도 있지만, 미술은 곧 생활의 심획이다. 그러므로 문자에 나타난 것에서 생활감정을 파악할 수 있는 것보다도, 말 없는 미술에서 그들의 생활감정을 있는 그대로 참답게 이해할 수 있나니, 미술의 일반적 공덕은 이러한 곳에 있다 하겠다. 따라서 문자가 말하지 못하는 문자 이전의(시간적으로나 형이상학적으로나) 생활을 우리는 남은 미술품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며, 이때의 문자적 기록이란 어느 정도의 좌표에 불과할 따름이라 하겠다.[230p]


- 보통 도자기의 예술적 감상가치에는 골동적 감상가치와 미학적 감상가치와 역사적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혼합되어 평정된다고 하겠으니, 이러한 경향은 물론 다른 예술품에도 공통된다고 하겠으나 도자기에 더욱 짙게 적용된다 하겠다. 이 중에 예술품에 있어서의 골동적 가치라는 것은 그 희귀성과 전통성이 본질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라 하겠다. 그러나 희귀성만으로는 하필 도자의 가치성을 특별히 규정할 수 없으며, 전통성이라 함은 그 전래의 이유가 귀하고 바른 것을 말하는 것이나, 이것은 고려도자의 귀중성을 증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중국·일본에는 도자의 전래유서라는 것이 있지만, 고려의 도자는 모두 고분에서 발굴되는 것뿐인즉, 그곳에 유래의 정통성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도자에는 다시 또 한가지의 골동적 가치가 있으니, 이것이 역사적·사회적 문제에 관련되는 취미성이라는 것이다. 고려도자의 가치를 규정하는 것은 아마 본질적으로 이 취미성 문제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도자의 취미문제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동양 특유의 다도와의 관계일 것이다. 중국에서는 당말 오대로부터 송·원으로 들어오면서 불립문자不立文字·직지견성直指見性의 종파인 선종이 교학을 일소할 듯이 풍미하자, 선미禪味라는 일종의 특이한 형이상적 정서가 승려 계급들로부터 출발하여 유한계급 사이에 충만하게 되고, 승려들의 차 마시고 선을 좇는 풍이 선도禪道에 입각한 일종의 철학관을 산출하여 차의 선미라는 것이 퍼지기 시작하여, 이곳에 차와 선의 관계가 떠날 수 없는 밀접한 연관을 이루게 되었다. 이리하여 투다鬪茶와 명전茗戰의 유희이며 다선이란 술어가 일반 계급사회에 깊이 젖기 시작하여, 차맛을 알려면 선을 알아야 하고, 선의 맛을 알려면 차맛을 알아야 하게까지 되었다. 즉 차를 마실 때 의식이 생기고, 도道가 성립됨에 따라 용기에 대한 규범이 생기게 되었으니, 이곳에 도자기의 골동적 평가 본질이 성립될 가장 중요한 까닭이 있다. 즉 도자기 형태에 일종의 선미를 요구하게 되며 도자 색채에 차 색깔과의 조화를 고려하게 되니, 이러한 가장 중요한 취미성 문제를 오늘의 우리나라 사람은 모두 잊어버리고 있으나, 일본에서는 아직도 다도가 성한만큼 다도에서 내다본 도자기의 생명이란 실로 놀란 만한 이론을 갖고 논의되었다.[268~269p]


- 이뿐만 아니라, 중국인은 심지어 도자기의 감상을 5감으로써 한다고 한다. 즉 시각·청각·미각·후각·촉각의 감성적 만족을 도자에서 구하고 충족시킨다는 것이니, 제 1의 시각적 감성만족이란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색채·형태·도안에 의한 충족이겠거니와, 제2의 청각감성의 충족이란 것은 도자기를 가볍게 두드릴 때 들을 수 있는 음악적 반향의 예술적 만족성이며, 제3의 미각감성은 제1의 시각감성과 제5의 촉각감성으로 말미암아 복합적으로 미각감성에 관련 영향되는 바이며(예컨대, 그릇이 보기에 흉하다면 그 그릇에 담긴 음식물에 대한 미각감정까지 달라진다), 제4의 후각감성의 충족이란 것은 향료를 자기의 재질과 아울러 그윽한 향을 더 내게 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이며, 제5의 촉각적 감성은 촉감의 충족을 말함이나 도자를 형용하고 따스하고 윤기 있다 하며, 아윤하다는 것들이 모두 이 부류에서 나온 형용들이다. [270p]


- 서양도자의 평가기준은 미학적 규범에 있으나, 동양도자의 평가기준은 인생관이란 데에 있다. 예를 고려도자기에서 든다면, 누구나 먼저 고려자기의 형태 곡선이 단아하고 고요하고 솔직하고 유려함을 볼 수 있다. 형식적 과장과 드러내려는 노력이 없고 순진한 지조와 귀족적 겸양이 있다. 상서로운 짐승을 모형한 호화스러운 형태에도, 중국 청동기를 번안한 고전적 형태에도, 꽃과 과일을 상형한 시적 형태에도(도 40참조(, 진취보다는 안일에, 조형보다는 향락에 물들어 젖고 젖은 귀족적 정서, 가련한 시적 정서, 강철의 고음보다 풀피리의 여운, 이러한 것들이 보는 눈을 통하여 마음껏 스며든다. 이러한 형태와 곡선은 요컨대 만들어진 형식이 아니요, 실로 곧 생에서 빚어나온 형식이다. [271~272p]


- 단원에 있어서는 아직 이러한 “추위를 견딘 거칢” 정도의 것은 없다. 시대가 아직 흐름의 선구였을 뿐이요, 도화서 화원이라는 것이 그로 하여금 아직 정돈된 입장에 남게 하였던 것인가, 분방하면서 또한 파격적인 작품을 남기지 않은 것은 그의 위대함을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31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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