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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ng Oct 13. 2016

카스테라

지은이 / 박민규

카스테라 / 박민규저 / 문학동네 


1. 카스테라
- 열을 식힐 줄 아는 지혜를 배워야 해. 난 그게 필요해. 그런 그에게 신이 다음과 같은 조언을 했다. 그럼 냉장고 같은 건 어떨까? 과연! 그는 무릎을 쳤다. 그거 보람찬 삶이겠는걸.
[13p]


-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독신인 나로서는 그 굉장한 소음이 있어 외롭지 않을 수 있었다. 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나는 인간. 결국엔 길들여지게 마련이다. 
[15p]


- 정문에서 300미터 정도 가파른 언덕길에 위치한 이 원룸에는, 그래서 정말이지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마침 방학이었고, 다시 말하지만 사상 유례없이 불쾌지수가 높았던 여름이었다. 언덕이라곤 해도 이렇게 아스팔트가 잘 놓여진 길인데 왜 인간들이 안 오는 거지? 늘 들르던<언덕 위 호프>의 주인은 종종 나와 같은 생각을 푸념 삼아 늘어놓고는 했다. 글쎄, 왜 그럴까요? 굵어진 종아리를 어루만지며 나는 땅콩을 집어먹고는 했다. 불쾌지수가 높은 날도 불쾌지수가 낮은 날도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여름이었다.
나는 늘 불쾌할 정도로 외로웠다.
[16p]


- 냉장의 역사는 부패와의 투쟁이었다.
[20p]


- 때문에 나는 마음 깊은 곳으로 부터 이 남자의<강한>발언권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물론 진심이었다. 저 정도라면, 확실히 나보다는 큰소릴 칠 만한 입장이었던 것이다.
분명, 지금도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거야.
냉장고를 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그것은<마음 깊은 곳으로부터>의 충분한 공감이었다.
냉장의 세계에서 본다면
이 세계는 얼마나 부패한 것인가.
[22p]


- 앞서 말했듯 나는<언덕 위 호프>의 주인으로부터<글쎄다. 너 나이 때는 일다 ㄴ뭐든지 다 담아 보는 것도 방법은 방법이지>란 조언을 들었고, 주인집 아주머니로부터<정말 소중한 것들을 보관하면 어떨까. 냉장상태라면 더 오래오래 간직되지 않을까?>란 교훈을 들었으며, 도서관의 젊은 사서에게서<인류를 위한다면 세상의 해악(害惡)을 가두는 게 우선 아닐까? 이를테면 미국 같은 것 말이지>란 충고를 들었고, 단골 레코드 가게의 주인으로부터 - 작은 메모지 한 장을 건네받았다. 글쎄,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서, 그가 건네준 종이 위에는 깨알 같은 글시로 다음과 같은 메모가 적혀 있었다.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법
1. 문을 연다.
2. 코끼리를 넣는다.
3. 문을 닫는다.
[24p]


- 말했던 대로, 차례차례였다. 나는 학교를 집어넣고, 동사무소를 집어 넣고, 신문사와 오락실과 7개의 대기업과, 5명의 경찰간부와, 낙도초등학교의 어린이들과 경기고속 소속의 좌석버스와, 지하철 2호선과, 5종의 삼각김밥과, 11명의 방속국 PD와, 51개의 벤처기업과, 2명의 영화감독과, 3명의 소설가와, 192명의 공장장과, 5명의 회사원과, 31명의 수입업자와, 2명의 성형외과의사와, 3명의 댄스가수와, 두 사람의 취객과, 1마리의 비둘기와, 3명의 사채업자와, 2명의 프로레슬러와, 1명의 병아리 감별사와, 180만 명의 실직자와, 36만 명의 노숙자와, 67명의 국회위원과 대통령을 집어넣었다.
언뜩 닥치는 대로 집어넣은 듯하지만, 그러나 분명한 원칙을 따른 것이었다. 원칙은 물론 둘 중 하나 - 소중하거나, 세상의 해악인 것.
[29p]


- 죽은 인간들의 영혼은 어디로 가는 걸까.
아마도 우주로 올라가겠지. 무엇보다 영혼은
성층권이라는 이름의 냉장고에서 신선하게 보존되는 것이니까.
그러다 때가 되면 다시금 우리 곁으로 돌아오는 거야.
어쨋거나 그런 이유로
다음 세기에는 이 세계를 찾아온 모든 인간들을
따뜻하게 대해줘야지, 라고 나는 생각했다.
추웠을 테니까.
많이 추웠을 테니까 말이다.
[32~33p]


2.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 존경스럽다. 잘도 이따위 일을 사 개월째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인턴은 모두 여덟 명. 즉 일곱 명의 경쟁자가 나와 함께 일하고 있다. 월급이라고는 말 못 하겠고, 그저 왔다갔다 차비 정도를 받고 있다. 일은 거의 날밤을 새는 수준, 육 개월의 연수기간이 끝나야 그중 한 명이 정식 사원으로 발탁된다. 그럼 나머지는? 글쎄다. 이곳의 인사부장은<좋은 경험으로 여기세요.>라고 말했지만, 떨어지기만 해봐라.
나머지 일곱 명도 필사적이다. 그래서 미치겠다. 쉴 수가 없는 것이다. 개중 두 명의 여자애들은 토익이 높기로 유명한데다, 하여간에 지독하다. 목숨이라도 건 분위기. 네 명은 그런저런 도토리, 또 한 명은 바보지만 다들 열심이긴 마찬가지다. 이거야 원, 하고 탓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미, 세상이 이렇게 생겨 먹어버린 걸
[39~40p]


- 쉬쉬해도
세상은 엉망이다. 너구리로 변해가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회사의 인사권을 한 손에 쥔 남색가가 있고, 그 인사권이 무서워 허벅지를 내주고도 묵묵히 참고 있는 록그룹의 싱어가 있다. 더이상은 나쁠 게 없다는 생각이다.
[47p]


- 녹슬어. 쇠로 치자면 녹이 슬 만큼 B와 나는 오랜 친구다.
[50p]


- 원래 너구리는 즐거움 그 자체였으니까. 그러고 한 두어 시간은 온통 너구리가 사람들의 혼을 빼놓는 거야. 그럼 그 텃밭 1팀의 팀장은 어땟겠어? 너구릴 죽이고 싶었겠지. 그 미움의 감정이 오래도록 누적이 된 거야. 그리고 세월이 흘렀지. 자, 후기자본주의의 산업사회가 됐어. 세상을 휘어잡은 것은 텃밭 1팀의 팀장 같은 놈들이지.
[53p]


- 아무리 쉬쉬해도
언젠가 인간은 세상이 엉망이란 걸 알게 된다.
아무리 쉬쉬해도
결국엔 너구리가 있다는 걸 알게 되듯이.
[59p]


- 마시게. -중략- 마시게. -중략- 마시게. -중략- 마시게. -중략- 마시게.
[60~61p]


- 미끈미끈한 부장의 손이 나의 페니스를 일으켜세우려 갖은 시도를 다 하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도저히 발기할 것 같지 않던 페니스가 발기한 것은 왜였을까. 그리고 그 순간<스테이지 23>이 눈앞에 펼쳐진것은 왜였을까. 왜 세상은 스테이지 1에서부터 차근차근 시작되지 않는 것일까.
[62p]


3.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 오후엔 주유소에서, 또 밤에는 편의점에서, 있으나마나한 여자애들이 일터마다 있긴 했지만, 있으나마나 했으므로 지루하긴 마찬가지였다. 말하자면 수성과 금성과, 있으나마나인 별들을 지나, 지구까지 오던 태양광선이 나 같은 기분이었을까? 덥지도 않고, 멀고먼, 화성.
[69p]


- 삼천원이요? 앞뒤 잴 것도 없이, 시간당 삼천원이란 말에 귀가 확 뚫리는 기분이었다. 내 주변에 그런 고부가가치 산업이 존재하고 있었다니. 제의를 받은 사실만으로도, 갑자기 확, 고도산업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한 느낌이었다. 좋구말구요. 비하자면 수성과 금성과 지구를 지나, 비로소 화성에 다다른 태양광선이 바로 나 같은 기분일까? 있으나마나에 받아나마나, 지구여 안녕.
[71p]


- 확실히 그런 식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이 나의 산수(算數)다. 웃건 말건, 세상엔 그런 산수를 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이 있다. 있게 마련이다.

[71p]


- 승객 여러분들은 안전선 밖으로 물러나주셔야겠지만, 그게 될 리가 없는 것이다. 승객들은 모두 전철을 타야 하고, 전철엔 이미 탈자리가 없다. 타지 않으면, 늦는다. 신체의 안전선은 이곳이지만, 삶의 안전선은 전철 속이다. 당신이라면, 어떤 곳을 택하겠는가.
[74p]


- 결국 모든 인간은 상습범이 아닐까. 나는 생각했다. 상습적으로 전철을 타고, 상습적으로 일을 하고, 상습적으로 밥을 먹고, 상습적으로 돈을 벌고, 상습적으로 놀고, 상습적으로 남을 괴롭히고,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상습적으로 착각을 하고, 상습적으로 사람을 만나고, 상습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상습적으로 회의를 열고, 상습적인 교육을 받고, 상습적으로 머리 어깨 무릎 발이 아프고, 상습적으로 외롭고, 상습적으로 섹스를 하고, 상습적으로 잠을 잔다. 그리고 상습적으로, 죽는다.
[80p]


- 파아. 하아. 어색한 표정으로 아버지는 어색해진 넥타이를 고쳐매고 서 계셨다. 그리고 잠깐. 넥타이를 맬 만큼의 짧은 시간이 그러나 절대 풀리지 않을 매듭으로, 우리 둘 사이를 엮으며 지나갔다. 그것은 무척 이상한 체험이었다. 매듭의 바깥은 더없이 소란스러운데, 아버지와 나 사이엔 우주의 고요, 같은 것이 고여드는 기분이었다.
[82p]


- 구로일과 구로를 지나 신도림으로 이어지는 선로의 어둠 속에서, 나는 늘 흔들리며 생각했다. 조금씩, 열차는 흔들렸고, 조금씩, 마음도 흔들렸다. 삶은, 세상은, 언제나 흔들리는 것이었다.
[89p]


4. 몰라 몰라, 개복치라니
- 그랬던가? 그러고 보니 놀이터와 공터와, 그런 것들로 가득 찬 오래된 세계가 - 각이 닳은 주사위처럼 마음의 밑바닥을 구르는 느낌이었다. 왜 전화를 안 받은 거야? 세일즈콜이 하도 와서. 여기도? 여기도.
[98p]


- 그리고 나는 스무 살이 되었다. 알고 보면 그렇다. 말하자면 일 년전의 일인데 - 바로 그 순간 나는 이 세계가, 너무
그렇고 그렇다.
[99p]


- 지구의 나이는 45억 년이다. 인류의 나이는 300만 년이고, 나는 스무 살이다. 누가 뭐래도 세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이에 비하다면 자본주의의 나이는 고작 400년에 불과하다. 나는 아무래도 그쪽이 편했다. 말과 눈치가 통하고, 우선 먹고 마시고, 입는 게 비슷했다. 즉 그런 이유로, 나는 지구와 인류보다는 자본주의와 함께 살아왓다고 말할 수 있다.
[102p]


- 지구는 전혀 둥글지 않았고, 오히려 아주 납작했다. 아아, 내 생각이 옳았어. 듀란이 소리쳤지만, 또 그렇다고 해서 평평한 것만은 절대 아니었다. 그것은 뭔가 복잡한 느낌의 납작함이었다.
[121p]


5. 아, 하세요 펠리컨
- 유원지라고는 하지만, 더 정확하게는<저수지>다. 내가 볼 땐, 그렇다. 유원지의 근거를 들라치면 열세 척의 오리배와 경품크레인, 게다가 고장난 두더지잡기가 있다. 그것이 전부다. 경품크레인 속에는 바퀴가 돌아다니고, 올라오는 두더지의 머리는 하나뿐이다. 뿅 쿵딱 뿅 쿵딱. 행여 모르고 그걸 두들기다보면, 누구라도 바보가 된 기분이 든다. 꼴에 두더지는 윙크까지 하고 있다. 처음엔 모르고 오 분 동안 그 짓을 했다. 뿅 쿵딱 뿅 쿵딱. 인생에서 가장 심란했던 오 분이었다.
[127p]


- 일흔세 곳에 이력서를 넣었는데,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일흔세 곳이었다. 일흔, 세 곳.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고장난 기계 때문에 머리를 못 내미는 두더지의 기분이랄까. 아무튼 이 나라는 고장이다. 그런 생각이 든다. 심각하다. 누구나 살기가 힘든 건 알겠는데, 꼭 머리를 내미는 한 마리가 있다. 그리고 그 한 마리가 일흔세 번의 망치질을 독식한다. 뿅 쿵딱 뿅 쿵딱, 어둠 속에서 그 소리를 듣다보면, 누구라도 바보가 된 기분이 든다.
[128p]


- 언제나 삶은 만만치 않은 거니까, 즉 그런 거니까. 새 담배를 물 때까지, 그래서 환한 봄밤의 달 아래엔 나와 펠리컨만이 오롯이 남은 느낌이었다. 햄과 치즈와 김이나 잡화가 잔뜩 든 봉지를 들고, 그래서 나는 라-47호를 보고 이렇게 말하고픈 심정이었다.
자, 크게 아 하세요.
[149p]


6. 야쿠르트 아줌마
- 만남을 반가워한 것은 새들이었다. 부리를 부비며 선원들을 환영했고, 놀랍게도 인간을 친구로 여겨주었다. 선원들은 새들의 그런<관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바보 아냐? 그래서 새들은 바보라는 뜻의<도도>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사냥이 시작되었다.
[154p]


- 약을 먹고, 학교를 오가고, 여자친구를 만나고, 일곱 장의 고지서를 완납하고, 그날그날의 조간신문과 두 권의 주간지를 화장실에서 읽어치웠다. 그래도 똥은 나오지 않았다. 보름째였다. 나는 조금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보름 동안 똥을 누지 않은 인간이 있을까. 보름이나 똥을 못 누면, 적어도 어딘가가 썩는 게 아닐까. 지구의 앞날을 걱정하는 고양이처럼, 나는 배의 이곳저곳을 눌러보았다. 배는, 바다가 증발한 지구처럼 팍팍하고, 막막한 느낌이었다. 현무암과 사암, 멘클과 같은 것이 그 속에 잘 다져져 있었다. 그 느낌 앞에서, 나는 그만 고생대 데본기 석탄계 퇴적암 속의 암모나이트처럼 표정이 굳어버렸다.
[163p]


- 간호사가 변비에 좋다는 차를 가져다 주기 전까지 우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차는 뜨겁다는 사실 외에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맛이었다.
[170p]


- 묵묵히, 도도나무의 열매를 삼키는 칠면조처럼 마음의 어딘가가 우물우물하고 우물쭈물하는 느낌이다. 이러다 삼백 년이나 자란 나무가, 통으로, 불쑥 나오는건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한다. 말마따나, 별일이 아닐 수 있다. 한두 달 똥을 못 눴다고 취업에 불이익을 받는 것도 아니다. 오래전엔 론도와 르네, 드봉과 캄푸를 해야 했던 선조들도 있었다.
[171p]


- 두어 달 전 고속터미널에서 급히 화장실을 찾았는데, 아아 그만 숨이 막히는 줄 알았습니다. 처음엔 누가 녹슨 강관(鋼管) 토막을 버리고 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똥이더군요. 사이즈로 보나 질감으로 보나 그건 인간의 똥이 아니었습니다(인간이라면 당연히 그 사람은 현장에서 죽었어야 합니다). 설마 코끼리가,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럴 리도 없고 해서 물을 내렸습니다. 꿈쩍도 않더군요. 할 수 없이 다, 다, 다음 칸에 들어가 저는 겨우 일을 마쳤습니다. 그런데 그 똥의 영상이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왠지 그 박력에 당한 느낌이랄까요? 아아, 때론 죽지도 않고 그런 똥을 양산하신 그분이 부럽기까지 합니다. 인생의 새 목표가 생긴 기분입니다.
[175p] 


7. 코리언 스텐더즈
- 농촌(農村)이란 단어가 있다.
누구나 아는 단어지만, 누구도 모르는 단어라고 나는 생각한다.
[181p]


- 은근히, 세상이 변하기보다는 직급이 변하길 바라는 사람이, 되어갔다.
[184p]


- 나는 한 번도 농촌을 찾은 적이 없다. 돌이켜보니, 그랬다. 과연<6시 내 고향>에서 몇 번 농촌을 보았거나, 국도를 달리면서 그 풍경을 잠시 지나쳤을 뿐이었다. -중략- 그리고 무엇보다 돈을, 상당한 액수의 현금을, 구비했다. 돈만큼 사람의 마음을 안심시키는 것은 없었다.
[188p]


- 사와봐야 맥심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192p]


- 거짓은 요만큼도 없다, 내가 어떤 인간인지 누구보다 네가 알잖니. 거짓이라고는 나도 생각지 않았다. 살아오면서 44킬로그램의 여자가 72킬로그램이 되는 것을 지켜보기도 했다.
[194p]


- 혹시 몰라 나는 캠코더를 점검해보았다. 늘 그랬듯 아무 문제가 없었다.
[199p]


- 아무래도 목소리가 기하 형의 귓전까지 스밀 것 같았다. 그래그래. 나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들고 있던 휴대폰의 무게가, 그래서 마치 72킬로그램처럼 느껴졌다.

[204p]


- 인간이 최선을 다하는 이유는, 무력하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나는 달리면서 알 수 있었다.
[207p]


8. 대왕오징어의 기습
-15미터로 세상을 사는 일은, 150미터로 세상을 사는 것과는 확실히 큰 차이가 있어 보였다. 아는 것을 힘이라 생각하는 동물은 이 넓은 지구에서 오직 인간뿐이다. 인간은, 실은 그래서 왜소하다.
[220p]


- 그리고 나는 - 정확히 이십일 년 동안 정확히 스물한 살을 더, 먹었다. 이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상한 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대왕오징어를 잊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십일 년 동안 내가 잊어버린 것들을 생각하면, 이건 너무나 불공평하고,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때문에 나는 잊어버린 모든 사물과, 세계에 대한 반성으로 이 글을 쓴다.
우선 나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대왕오징어가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신 나는 공군의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다. 대왕오징어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고, 인류와도 아무 상관이 없는 결정이었다. 고공의 높이만큼, 심해와는 더 멀어진 셈이다.
약속을 지키는 인류라는 게 과연 가능하기나 한 얘길까? 비행을 하면서 나는 때때로 그런 생각에 잠기고는 한다. 이십일 년 전에는, 누구나 나 같은 약속을 했을 것이다.
[224p]


- 이상하게도 그후, 나는 대왕오징어에서 관심이 멀어졌다. 딱히 등을 돌린 것이 아니라, 이래저래 새로운 관심사들이 생겨난 것이었다. B도 마찬가지였다. 고등학생이 된 후로, 우리는 아무도 대왕오징어를 논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그랬다.
[227p]


- 때문에 늘 오징어들과 눈이 마주치곤 했어요. 불편하긴 해도 가게가 곧 집이었으니까 제겐 익숙한 일이었죠. 그런데 살아 있는 오징어의 눈을 자세히 바라본 적이 있나요?
[229p]


- 인류에게는 차마 말 못 할 인류의 경향이 있었던 게 아닐까. 밀거나 당길 필요가 없는 기지의 회전문을 통과하며,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는 했다. B와 나는 나란히 F-16 편대의 조종사가 되었다. 매우 특별해 보이긴 하겠지만 - 결국 해변의 모래알처럼 평범한 인류가 되었을 따름이다. 150미터의 대왕오징어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결국<나>란 것은<아무나>의 한 사람이거나,<누구나>의 한 사람과 같은 것이다. 즉 그것이, 우리의 경향이다. 아무런, 나, 누구도, 나.
[230~231p]


9. 헤드락
- 그 순간 나는 한 사람의 인간이 아니라 한 마리의 생물(生物)이었다. 인간이란, 생존의 문제를 해결한 생물만이 비로소 얻게 되는 이름이구나 - 그런 생각이 들었다.
[250p]


- 맞으면 - 아프고, 뉘우치고, 숙이고, 무섭고, 궁리하고, 포기하고, 빌붙고, 헤매고, 재빨라지고, 갈라지고, 참담하고, 슬프고, 후련하고, 그립고, 분하고, 못 잊고, 죽고 싶고, 쓰라리지만 이를테면 몇 알의 약, 그 미약한 몇 밀리그램의 화학물질만 있어도 아무렇지 않게 삶을 영위해 나가는 것이었다. 
[258p]


- 여섯 명의 상대는 한결같이 울부짖었고, 나는 우쭐하거나 기쁘거나 통쾌하기보다는, 그저 할 일을 한다는 느낌이었다. 마치 그래서, 나는 호두까기 인형이된 기분이었다.
[261p]


10. 갑을고시원 체류기
- 봄이 되자 나의 기숙(寄宿)도 한계에 이르기 시작했다. 어느 날 친구의 가족들과 아침을 먹으려는데 유독 나만 계란후라이가 빠져 있었다. 여긴 계란이 없네? 친구가 묻자 친구의 어머니가 대답했다. 글쎄, 계란이 떨어졌지 뭐니. 별 생각 없이 잘 먹고, 잘 먹었습니다 인사를 하고 일어서는데 냉장고 위에 얹혀 있는 두 판의 계란이 눈에 들어왔다. 등뒤에서, 친구의 여동생이 수저를 내려놓는 소리가 여느 때보다도 크게 들렸다.
[275p]


- 인간은 결국 혼자라는 사실과, 이 세상은 혼자만 사는 게 아니란 사실을 - 동시에,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모순 같은 말이지만 지금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즉, 어쩌면 인간은 - 혼자서 세상을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혼자인 게 아닐까.
[286~287p]


- 술자리의 과식을 탓하며 나는 조심스레 엉덩이를 잡아당겼다. 최대한,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화가 난 백상어를 달래고 또 달래었다. 결국 튀어나온 것은 한 마리의 참치였다. 그나마 성공이라고 생각했지만,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뭐랄까, 백상어가 작아져서 참치가 된 것이 아니라 - 한 마리의 백상어가 여러 마리의 참치로 쪼개진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여러 마리의 참치는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297p]


- 아직도 그곳에 있었으면 좋겠다.
이 거대한 밀실 속에서
혹시 실패를 겪거나
쓰러지더라도
또 아무리 가진 것이 없어도
그 모두가 돌아와
잠들 수 있도록.
그것이 비록
웅크린 채라 하더라도 말이다.
[30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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