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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ng Oct 13. 2016

사랑의 기술

지은이 / 에리히 프롬 | 옮긴이 / 황문수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지음/ 황문수 옮김/ 문예출판사 


- 아무것도 모르는 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한다.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자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무가치하다.
그러나 이해하는 자는 또한 사랑하고 주목하고 파악한다......
한 사물에 대한 고유한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랑은 더욱더 위대하다......
모든 열매가 딸기와 동시에 익는다고 상상하는 자는
포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파라켈수스-[서문]


- 마찬가지로 인류는 그 유아기에는 역시 자연과의 일체감을 느낀다. 토양, 동물, 식물은 아직도 인간의 세계이다. 인간은 동물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며 이것은 동물가면을 쓴다든가, 토템(totem)으로 삼고 있는 동물 또는 동물신을 숭배한다든가 하는 일에 표현된다.[27p]


- 로마와 그 제국은 그의 가족, 그의 가정, 그의 세계였다. 또한 현대 서양사회에서도 집단과의 합일은 분리상태를 극복하는 일반적인 방법이다. 이것은 개인의 자아가 대부분 사라지고 그 목적을 군중에 소속하는데 두고 있는 합일이다. 만일 내가 남들과 같고 나 자신을 유별나게 하는 사상이나 감정을 갖고 있지 않으며 나의 관습이나 옷이나 생각을 집단의 유형에 일치시킨다면 나는 구제된다.[29p]


- 이러한 일치로 이끌어 가기 위해 독대체제는 위협과 공포를 이용하고 민주국가는 암시와 선전을 이용한다. 물론 두 체제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민주주의에서는 불일치가 가능하고 사실상 불일치가 전혀 없을 때는 없다.
전체주의 체제에서는 소수의 비범한 영웅이나 순교자만이 복종을 거절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민주사회도 압도적인 일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 이유는 합일의 추구에 대해서는 응답이 있어야 하는데, 만일 다른 방법 또는 더 좋은 방법이 없다면, 군중과 일치하는 합일은 유력한 합일로 된다는 사실에 있다. 분리되지 않으려는 욕구가 얼마나 절실한가를 이해한다면, 남과 다르다는 데에서 느끼는 공포, 군중과 약간 떨어져 있다는 데에서 느끼는 공포가 얼마나 강력한가를 이해할 수 있다. 때로는 이러한 불일치에 대한 공포는 일치하려고 하지 않는 자를 위협하는 실제적 위험에 대한 공포로서 합리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적어도 서양민주주의에서는, 사람들은 일치하도록 '강요받는' 정도 이상으로 일치하기를 '바라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치하고 싶다는 자신의 욕구조차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과 기호에 따르고 있으며 자신은 개인주의자이고 스스로의 사고의 결과로 현재의 견해에 도달했으며, 자신의 의견이 대대분의 사람들의 의견과 같은 것은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는 환상 속에서 살고 있다.
[30p]


-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평등의 의미는 달라졌다. 이 사회에서는 우리들은 평등이라는 말로 자동인형의 평등, 개성을 상실한 인간들의 평등을 말하고 잇다. 오늘날 평등은 일체성보다는 오히려 동일성을 의미하고 있다. 평등은 추상적 동일성, 곧 같은 일터에서 일하고, 같은 오락을 갖고, 같은 신문을 읽고, 같은 감정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동일성을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우리는 보통 진보의 조짐으로 찬양되고 있는 성과들 -예컨데 남녀 동등권-에 대해 어느 정도 회의적 태도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중략- 남자와 여자는 대립적인 극으로서 평등한 것이 아니라 '동일하게' 되었다. 현대사회는 이러한 비개성화된 평등이라는 이상을 설교하고 있다. 
현대사회는 인간에게 대집단 속에서 마찰 없이 원활하게 일하도록 서로 동일한 원자적(原子的)인간이 되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 동일한 명령에 복종하면서도 각기 자신의 욕망에 따르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다. 현대의 대량생산이 상품의 규격화를 요구하는 것처럼 사회적 과정은 인간의 표준화를 요구하고 이러한 표준화를 '평등'이라고 부른다.[32~33p]


-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월요일부터 다음 월요일까지, 아침부터 밤까지 모든 활동은 일정하고 기성품화되어 있다. 이러한 상투적 생활의 그물에 걸린 인간이 어떻게 그는 인간이고, 특이한 개인이고, 희망과 절망, 슬픔과 두려움, 사랑에 대한 갈망, 무(無)와 분리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단 한 번 살아갈 기회를 갖게 된 자임을 잊지 않을 것인가? - 중략 -
어떤 종류의 창조적 작업이든 창조하는 자는 외부세계를 나타내고 있는 자료와 결합한다. 목공이 책상을 만들든, 금 세공인이 보석 조각에 가공을 하든, 농부가 곡식을 기르든, 화가가 그림을 그리든, 모든 형태의 창조적 작업에서는 일하는 자와 그 대상은 하나가 되고 인간은 창조과정에서 세계와 결합한다.
그러나 이것은 생산적인 일, 곧 '내'가 계획하고 만들어 내고 나의 작업의 결과를 볼 수 있는 일에 대해서만 해당된다.[34p]


- 인간이 복종하고 있는 자의 힘은, 그것이 인간이든 신이든 팽창된다. 그는 모든 것이고 내가 그의 일부가 아닌 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한 부분으로서 나는 위대성, 힘, 확실성의 일부이다.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은 결정을 내릴 필요가 없고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 그는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다 - 그러나 그는 독립하지는 못한다. 그는 통합성을 갖지 못한다. 그는 아직도 완전히 탄생하지 못한 자이다.[36p]
- 생산적인 성격의 경우, 주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주는 것은 잠재적 능력의 최고의 표현이다. 준다고 하는 행위 자체에서 나는 나의 힘, 나의 부, 나의 능력을 경험한다. 고양된 생명력과 잠재력을 경험하고 나는 매우 큰 환희를 느낀다. 나는 나 자신을 넘쳐흐르고 소비하고 생동하는 자로서, 따라서 즐거운 자로서 경험한다. 주는 것은 박탈당하는 것이 아니라 준다고 하는 행위에는 나의 활동성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주는 것은 받는 것보다 더 즐겁다.[41p]


- 가난은 직접 야기시키는 고통 때문이 아니라 가난한 자로부터 주는 기쁨을 빼앗는다는 사실 때문에 수치이다.[42p]


- 그러나 준다고 하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은 물질적 영역이 아니라 각별히 인간적인 영역에 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자기 자신, 그가 갖고 있는 것 중 가장 소중한 것, 다시 말하면 생명을 준다. 이 말은 반드시 남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을 준다는 뜻이다. 그는 자신의 기쁨, 자신의 관심, 자신의 이해, 자신의 지식, 자신의 유머, 자신의 슬픔 - 자기 자신 속에 살아있는 것의 모든 표현과 현시(顯示)를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생명을 줌으로써 그는 타인을 풍요하게 만들고, 자기 자신의 생동감을 고양함으로써 타인의 생동감을 고양시킨다. 그는 받기 위해서 주는 것이 아니다. 주는 것 자체가 절묘한 기쁨이다.[42~43p]


- 동물이나 꽃에 대한 사랑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다. 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꽃에 물을 주는 것을 잊어버린 여자를 본다면, 우리는 그녀가 꽃을 '사랑한다'고 믿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사랑하고 있는 자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우리들의 적극적 관심인 것이다." 이러한 적극적 관심이 없으면 사랑도 없다.[45p]


- 어린애에게서 흔히 우리는 지식에 이르는 이 길을 매우 분명하게 본다. 어린애는 어떤 것을 알기 위해 분해하고 해체한다. 또는 동물을 해부하기도 한다. 나비를 알기 위해, 나비의 비밀을 드러내기 위해 잔인하게 날개를 잡아 뜯는다. 이러한 잔인성의 동기는 보다 깊은 것, 곧 사물과 생명의 비밀을 알려고 하는 소망에 있다.[50p]
- 가령 우리가 우리 자신을 1천 배쯤 더 잘 알게 되더라도, 우리는 근저에 도달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들의 동료가 우리들에게는 언제나 수수께끼인 것처럼, 우리는 자신에 대해 언제나 수수께끼이다.[51p]
-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이 무조건적 성질에도 역시 부정적 측면이 있다. 어머니의 사랑은 보답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획득할 수도, 만들어낼 수도, 통제할 수도 '없다'. 어머니의 사랑이 여기에 있다면 그것은 축복이다. 어머니의 사랑이 여기에 없다면 그것은 마치 인생의 모든 아름다움이 소멸한 것과 같다. 따라서 어머니의 사랑을 만들어 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61p]


- 어린애의 사랑은 '나는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원칙을 따르고 있고 성숙한 사랑은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받는다'는 원칙에 따르고 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랑은 '그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는 것이지만 성숙한 사랑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62p]
- 무조건적 사랑은 어린애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가장 절실한 갈망의 하나이다. 한편 어떤 장점 때문에, 곧 사랑받을 만해서 사랑받는 경우, 언제나 의심이 남는다. 내가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을 즐겁게 해주지 못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언제나 남아 있다. 곧 언제나 사랑을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다. 더 나아가서 '보상으로 주어지는' 사랑은 자기 자신 때문이 아니라 상대자를 즐겁게 해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사랑을 받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분석해 보면 사랑받는 게 아니고 이용될 뿐이라는 쓰라린 감정을 쉽게 일으킨다.[63p]


- 아버지의 사랑은 조건이 있는 사랑이다. 아버지의 사랑의 원칙은 '너는 나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기 때문에, 너는 네 의무를 다하고 있기 때문에, 너는 나를 닮았기 때문에,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것이다.[65p]


- 형제애는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재능, 지능, 지식의 차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인간적 핵심의 동일성과 비교하면 무시해도 좋다. 이러한 동일성을 경험하기 위해선 주변으로부터 핵심으로 침투할 필요가 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주로 표면적으로 지각하다면 나는 주로 차이점을 지각하게 되고 이 차이점은 우리는 분리시킨다.[71p]


- 나 자신이 포함되지 않은 인간의 개념은 있을 수 없다. 나 자신의 제의를 선언하는 이론은 그 자체에 본질적인 모순이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성서의 말에 표현된 사상은 자기 자신의 통합성과 특이성에 대한 존경이 다른 개인에 대한 존경과 사랑과 이해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나 자신의 자아에 대한 사랑은 다른 존재에 대한 사랑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84p]
- 이기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또한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도 못한다.
예컨대 지나치게 걱정하는 어머니에게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다른 사람에 대한 탐욕스러운 관심과 비교하면 이기심을 이해하는 것이 더욱 쉬워진다. 이 어머니는 그녀의 어린애를 특별히 좋아한다고 의식적으로 믿으면서, 사실은 그녀의 관심의 대상에 대해 깊이 억압되고 있는 적의를 갖고 있다. 이 어머니는 어린애를 지나치게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어린애를 사랑할 능력이 전혀 없는 것을 보상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지나친 관심을 갖는 것이다.[87p]


- "만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대는 모든 사람들을 그대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하듯 사랑할 것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보다도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는 한, 그대는 정녕 그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한다면, 그대는 그들을 한 인간으로 사랑할 것이고 이 사람은 신인 동시에 인간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 다른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위대하고 올바른 사람이다."[89p]


- 인간은 자신의 힘과 기술을 자신이 만드는 사물에 투입하며, 따라서 소외된 형식으로 자신의 솜씨와 자신의 소유물을 숭배한다. 더욱 발달된 단계에서는 인간은 신에게 인간의 형태를 부여한다. [91p]


- 참으로 종교적인 사람은, 만일 그가 일신론적 관념의 본질에 따른다면, 어떠한 일을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고 신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는 어린애가 아버지나 어머니를 사랑하듯, 신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는 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을 만큼 그의 한계를 느끼고 있어서 겸손하다.[98p]


- '우리는 같은 강물에 들어가지만 같은 강물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이지만 우리가 아니다.' 혹은 'I이면서 동일한 것은 살아 있으면서 죽은 것으로서, 깨어 있으면서 잠자는 것으로서, 어리면서 늙은 것으로서 사물에 나타나 있다.'
노자 철학에서는 같은 사상이 좀더 시적인 형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도교의 역설적 사고의 특징적인 예는 다음과 같은 말에서 볼 수 있다.
'무게는 가벼움의 뿌리이고 정지는 운동의 지배자이다.'혹은 '본래의 과정에 있는 도(道)는 하는 일이 없고 그러므로 하지 않는 일이 없다.' 혹은 '나의 말은 매우 알기 쉽고 매우 행하기 쉽다. 그러나 이 말을 알고 그 말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세계에는 한 사람도 없다.'[102p]


- 바라문교에서는 불교나 도교와 마찬가지로 종교의 궁극적 목적은 올바른 신앙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이다.[106p]


- 신과 나 - 우리는 하나이다. 신을 인식함으로써 나는 신을 나에게로 데려온다. 신을 사랑함으로써 나는 신에게 침투한다.'[109p]


- 어머니의 이러한 측면, 곧 파괴적이고 흡입하는 측면은 어머니 상(像)의 부정적 측면이다. 어머니는 생명을 줄 수도 있고 생명을 빼앗을 수도 있다. 어머니는 소생시키는 자이고 멸망시키는 자이다. 어머니는 사랑의 기적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어머니만큼 깊은 상처를 주지는 못한다.[130p]


- 흔하지는 않으나 가끔 '위대한 사랑'으로서 경험되는(영화나 소설에서 더욱 자주 묘사되고 있는) 사이비 사랑의 형태는 '우상숭배적 사랑'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의 힘의 생산적 전개에 바탕을 두고 있는 동일성, 곧 자아라고 하는 것을 인식하는 단계에 도달하지 못하면,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우상화'하기 쉽다. 그는 자기 자신의 힘으로부터 소외되고 이 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투사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최고선, 곧 온갖 사랑, 온갖 빛, 온갖 지복을 간직하고 있는 자로서 숭배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힘에 대한 모든 감각을 박탈하고, 자기 자신을 찾는 대신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 대체로 그녀를 (또는 그를) 우상시하는 자의 기대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결국은 그는 실망하기 마련이고 따라서 보상으로서 새로운 우상을 찾게 되는데, 때로는 이러한 순환이 끝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우상숭배적 사랑의 특징은 첫째로 강렬하고 갑작스러운 사랑의 경험이다. 이러한 우상숭배젹 사랑은 흔히 참되고 위대한 사랑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의 강렬함과 깊이를 묘사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단지 우상숭배자의 갈망과 절망을 드러내는 데 지나지 않는다. [133p]


- 현대인은 과거나 미래에 살고 오늘을 살지는 못한다. 현대인은 감상적으로 어린 시절이나 어머니를 회상하고, 또는 미래에 대한 행복한 계획을 세운다. 다른 사람들의 가공적인 경험에 참여함으로써 대상적으로 사랑을 경험하든, 또는 사랑의 경험이 현재로부터 과거 또는 미래로 옮겨지든, 이와 같이 추상화되고 소외된 사랑의 형태는 개인의 현실적 고통과 분리감을 완화시켜 주는 마취재로서 작용한다.[134~135p]


- 사랑은 이와 같이 경험될 때에만 끊임없는 도전이다. 사랑은 휴식처가 아니라 함께 움직이고 성장하고 일하는 것이다.[137p]


- 현대인의 주요 목표는 그의 기술, 지식, 자기 자신, 그리고 ' 퍼스낼러티라는 상품'을 다른 삶과 유익하게 교환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도 역시 공정하고 유익한 교환을 바라고 있다. 상황에는 움직인다는 목표 이외에는 아무런 목표도 없고, 공정한 교환이라는 원칙 이외에는 아무런 원칙도 없고, 소비한다는 만족 이외에는 아무런 만족도 없다.[139p]


- 만일 정신집중이 되었다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하는 것은 거의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일이나 중요하지 않은 일이나, 우리들의 충분한 주목을 받게 되기 때문에, 새로운 차원의 현실성을 갖게 된다.[150p]
-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 또한 러시아의 공산주의에도 해당되지만 - 찬양과 경쟁심을 환기시키는 사람은 뛰어난 정신적 능력을 제외하고는 모든 면을 갖추고 있다. 대중의 안목으로 본다면 아주 평범한 사람들에게 대상적 만족을 주는 사람들이다. 영화배우, 연예인, 칼럼니스트, 주요 기업이나 정부의 인사들 - 이러한 사람들이 경쟁의 모델이다. 이러한 기능을 갖게 된 그들의 자격은 대체로 그들이 뉴스 메이킹에 성공했다는 것이다.[155p]


- 알베르트 슈바이쳐 같은 인물이 미국에서 유명해질 수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현대의 젊은이들로 하여금 인간이 오락을 주는 사람(이 말의 넓은 의미에서)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생활과 역사적 인물에 친숙하게 하는 많은 가능성을 투시한다면, 모든 시대의 위대한 문학작품과 예술작품을 생각한다면, 훌륭한 인간적 기능에 대한 비전을 만들어 내고 인간의 기능부전에 대한 비전을 만들어 낼 기회는 남아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전통은 원래 어떤 지식의 전수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어떤 특성의 전수에 바탕을 두고 있다. [155~156p]


-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놓여 있는 역설적 상태는 깨어 있을 때에도 반쯤 잘들어 있고 잠잘 때에, 또는 잠들고 싶어할 때에도 반쯤 깨어 있다는 것이다. 완전히 깨어 있다는 것은 싫증을 느끼지 않기 위한, 또는 싫증내지 않기 위한 조건이다. 사실상 싫증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 싫증을 내기 않는다는 것은 생활의 중요한 주요 조건의 하나이다. 내면적인 게으름을 피하기 위해 수용적, 축적적 형태로든, 자신의 시간을 단지 낭비하는 상태로든, 하루 종일 자신의 눈과 귀로 느끼고 사고하고 있는 것은 사랑의 기술의 실용에 불가결한 조건이다.[167p]


- 우리 사회는 관리자의 관료조직에 의해, 직업 정치가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사람들은 집단적 암시에 의해 동기를 부여받고 그들의 목표는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것이고 이 자체가 목적이 되고 있다. 모든 활동은 경제적 목적에 종속하고 수단은 목적이 되었다. 인간은 잘 먹고 잘 입고 있지만 각별히 인간적인 자신의 자질이나 기능에 대해서는 조금도 궁극적 관심을 갖지 못한 자동 인형이다. 인간이 사랑할 줄 알게 되려면 인간은 그의 최고의 위치에 놓여져야 한다. 인간이 경제적 기구에 이바지하지 않고 경제적 기구가 인간에게 이바지해야 한다. 인간은 기껏해야 이익을 나누어 갖는 데 그치지 말고 경험을 나누어 갖고 일을 나누어 가질 수 있어야 한다.[172p]


- 사람이 사람으로서 평가받지 못하고 그 사람의 이용가치에 따라 평가되는 현실은 우리 주변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지혜도 '돈'으로 환산되고 아름다움도 '돈'으로 환산되고 정의도 '돈'으로 사고 팔 수 있고, 더구나 '사랑'따위는 이제 감각적 쾌락 내지는 매음으로 전락해 버린 현실은 개탄의 영역을 넘어서 있지 않은가.[21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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