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oong Aug 07. 2017

숨결이 바람 될 때

폴 칼리니티 지음, 이종인 옮김 

숨결이 바람 될 때

서른여섯 젊은 의사의 마지막 순간 


초판 1쇄 발행 2016년 8월 19일

초판 17쇄 발행 2016년 10월 27일


지은이 폴 칼라니티

옮긴이 이종인

펴낸곳 흐름출판(서울시 마포구 홍익로 5길 59, 남성빌딩 2층) 


- 그곳은 내가 몇 년 동안 수백 명의 환자를 진찰한 방이었다. 나는 이 방에 앉아서 환자들에게 말기 진단을 내리고 복잡한 수술에 대해 설명했다. 또 완쾌되어 기쁜 표정으로 일상에 돌아가게 된 환자들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기도 했다. 그리고 이 방에서 환자들의 사망 진단을 내리기도 했다. 나는 이 방에서 의자에 앉아 있기도 했고, 세면대에서 손을 씻기도 했고, 흰색 보드에 처방을 휘갈겨 쓰기도 했고, 달력을 넘기기도 했다. 아주 피곤해서 쓰러질 것 같으면 이 방에 있는 진찰용 침대에 누워 자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이제 나는 그 침대에, 완전히 깬 상태로 누워 있다. [34p]


- 안내원의 설명에 따르면, 처음에는 가족이 자주 방문하며 매일 오는 건 물론이거니와 하루에 두 번 오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그러다 하루 걸러 한 번, 일주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으로 방문 횟수가 줄고, 시간이 더 지나면 환자의 생일과 성탄절에만 찾아온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대부분의 가족이 가능한 한 먼 곳으로 이사해버린다. [59p]


- 해부실에서 우리는 시체를 하나의 사물로 대상화하여, 문자 그대로 장기, 조직, 신경, 근육으로만 바라보았다. 실습 첫날, 나는 시체에서 드러나는 인간성을 부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지의 피부를 벗겨내고, 작업을 방해하는 근육을 가르고, 폐를 꺼내고, 심장을 잘라서 열고, 간엽을 제거하고 나면 이런 조직 더미를 인간으로 인식하기가 힘들었다. 결국 시체 해부는 신성 모독이라기보다는 해피 아워에 술 마시러 가는 것을 방해하는 일이 되어버리고, 이런 깨달음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어쩌다 한 번씩 반성의 순간이 찾아오면 우리는 마음속으로 시체들에게 사과했다. 죄의식을 느껴서가 아니라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72p]


- 암 진단을 받기 전에 나는 내가 언젠가 죽으리라는 걸 알았지만, 구체적으로 언제가 될지는 알지 못했다. 암 진단을 받은 후에도 내가 언젠가 죽으리라는 걸 알았지만 언제가 될지는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통렬하게 자각한다. 그 문제는 사실 과학의 영역이 아니다. [161p]


- 진료실 밖으로 나오면 내가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일에서 손을 놓았기 때문에 신경외과 의사이자 과학자이며 전도유망한 청년이라는 정체성을 느낄 수가 없었다. 쇠약해진 몸으로 집에만 있으니 루시에게 남편 노릇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두려웠다. 나는 내 삶의 모든 문장에서 주어가 아닌 직접 목적어가 된 기분이었다. 14세기 철학에서 환자(patient)라는 단어는 그저 '행동의 대상'을 의미했고, 나는 딱 그런 존재가 된 기분이 들었다. 의사였을 땐 행위의 주체이자 원인이었으나, 환자인 나는 그저 어떤 일을 당하는 대상일 뿐이었다. [171~172p]


- 의사의 의무는 죽음을 늦추거나 환자에게 예전의 삶을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삶이 무너져 버린 환자와 그 가족을 가슴에 품고 그들이 다시 일어나 자신들이 처한 실존적 상황을 마주보고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돕는 것이다. [198p]


매거진의 이전글 편의점 인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