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oong Dec 17. 2021

세상 어딘가에 하나쯤

유희경 산문집

초판 인쇄 2021년 6월 24일

초판 발행 2021년 7월 1일


지은이 유희경


펴낸곳 달 출판사(경기도 파주시 회동길 455-3)


- 일은 여태 남아 있고 손님은 여전히 없고 그러나 나는 씩씩해져버렸다. 서점의 씩씩함이란 내일 한번 더 해보는 것. 내일모레도 해보는 것. 찾아오는 사람에게 기꺼이 물을 덥혀 차를 내어주는 것. 대가보다 좋아하는 마음을 앞서 생각해보는 것. [112p]


- 격이란 한순간에 무너지고 그런 뒤에는 복구하기 어렵다. [119p]


- 어느 날 밤. 우두커니 서서 서점 내부를 둘러보았다. 말할 수 없이 너저분하다 싶었다. 커다란 봉투를 마련해 보이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넣기 시작했다. 한바탕 소란이 끝나고 시집과 가구들을 제외하고 남은 것이 없게 되었을 때, 왠일인지 후련함이 아닌 불안함이 몰려왔다. 치워진 것이 아니라, 정리된 것이 아니라, 사라져버렸다. 남은 게 없구나. 그런데 그게 무엇이지. 도로, 우두커니 서서 보이는 이곳이 서점이라는 장소가 아니라 커다란 다이어리가 아닐까 생각했다. 난데없었지만, 봉투에 담긴 것이 실은 무수한 관계들을 증명, 매분 매초 맺힌 어떤 순간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만나는 사람들, 그들로부터 비롯된 일, 감정, 생각들이 단어와 단어를 만들고 문장으로 이어져 '여태'라는 시간을 증명하고 있구나. 이것이 서점의 역사가 되는 것이구나. [251 ~ 252p]


- 종일 이런 일들을 궁리한다. 내가 사랑하는 거소가 사랑하는 것을 이어 발생하는 사건들. 위트 앤 시니컬은 작은 서점. 직접 찾아와야 누릴 수 있는 곳. 작다니. 시집이라니. 서점이고 직접 누려야 한다니. 버튼 서너 번 누르면 내가 있는 곳까지 책이 배송되는 시대에 허점과 약점뿐이다. 그런가. 언제부터 걸어서 서점을 찾는 일이, 책을 골라 계산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허점과 약점이 되었지. 서점을 찾아가는 동안 보고 듣는 것들이 주는 즐거움, 서점을 떠날 때 내 책을 얻었다는 기쁨, 이런 일은 계산할 수 없어서 이익을 본 사람도 손해를 본 사람도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작은 서점의 일. [261~262p]


매거진의 이전글 도쿄 일인 생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