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용 세속 에세이
우리가 이 도시의 주인공은 아닐지라도
박찬용 세속 에세이
초판 1쇄 발행 2020년 2월 25일
초판 2쇄 발행 2020년 3월 25일
지은이 박찬용
발행처 (주)웅진씽크빅 (경기도 파주시 회동길 20)
- 들어오는 제안을 거절하지 않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한다. 늘 네 개쯤 공을 하늘에 던지며 저글링을 하는 기분이다. 공이 하나씩은 꼭 떨어져서 먼지를 닦았다가 관객들에게 사과했다가 다시 또 공을 돌렸다가 혼자 한번씩 성내기도 하다가 그러다 또 뭔가 끝나면 잠깐 기분 좋았다가 하는 삶을 살고 있다. 많이들 그렇게 살고 계실 거라 생각한다. [44p]
- 가끔 무모하게도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가 해온 일로 증명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성과, 자신의 직업윤리, 자신의 직업적 결과물, 그것의 완성도와 완전무결함을 위해 인생을 건다. 누군가가 보면 아무것도 아닐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으면서 낭떠러지에서 홀로 버틴다. 그게 나 자신이기 때문에, 그게 당신이기 때문에. 그렇게 어떤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박창진이 된다. [60p]
- 그런데 21세기의 양복 아저씨들은 더이상 양복을 입지 않는다. 여전히 양복적인 위아래 세계관을 유지하면서도 말이지. 양복적 세계관의 위아래는 즐기고 싶지만 양복의 불편함은 싫은 모양이다. 양복이 상징하는 구시대적 프로페셔널리즘이 싫을 수도 있고. 21세기의 여러 문제는 양복 아저씨들이 양복을 입지 않아서 생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74p]
- 말하자면 세상은 세상이고 숫자는 사진 같은 것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사진도 현실의 모든 것을 담지는 못한다. 사진화된 정보에는 반드시 누락되는 부분이 생긴다. 세상과 숫자의 관계도 같다. 숫자는 현실의 여러 요소를 보기 쉽게 만들어준다. 괴테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대차대조표”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도 그게 현실의 전부는 아니겠지. [93p]
- 이제 대학생은 힙의 주체가 아니다. 불경기와 ‘취준’의 영향일까 싶다. [201p]
- 종이에만 낭만이 있다는 말은 더러운 거짓말이자 완전한 오류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과는 친하게 지내면 안 된다. 그 말은 종이 이전의 문자 매체였던 양피지와 석판에게도 큰 실례다. 사람은 어디에서든 낭만을 찾아낼 수 있는 재능이 있다. 낭만은 어디에나 있다. 페이스북 댓글에도, 읽지 않은 카톡 메시지 옆의 1에도 낭만이 있다.
하지만 종이에만 있는 낭만이 있다는 말은 너무 맞다. 빈 종이에 필기구를 들고 팔을 움직여 여백을 줄여나갈 때만 생기는 자극이 있다. [292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