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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온 미래

AI 이후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

by Joong


초판 1쇄 / 2025년 6월 26일

지은이 / 장강명

펴낸이 /한성봉

펴낸곳 / 도서출판 동아시아 (서울시 중구 필동로8길 73)


- 어떤 이들은 아예 바둑계를 떠났다. 조혜연 9단은 인공지능 때문에 바둑을 사실상 그만둔 프로기사가 10명 이상이라고 말했다. 공식적으로 은퇴를 하지는 않았지만 시합에도 나오지 않는 기사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전성기를 지나 순위가 떨어지며 자연스럽게 승부에서 멀어지는 것과는 달리, AI 수법이 퍼지면서 갑작스럽게 자취를 감춘 기사들이 있다고 했다. [59p]


- "몇 년 동안 계속 생각했던 거 같아요. '바둑을 내가 계속해야 하나, 다른 일을 해볼까, 웹툰 작가가 돼볼까, 웹소설 작가가 돼볼까, 플로리스트가 돼볼까.' 그래서 실제로 꽃도 배워봤어요. 처음에는 바둑을 두고 AI로 복기하지 않았어요. 상처받아서요. AI로 검토해 보면 너무 못 둔 수가 태반이었거든요. 내면의 상처가 컸어요. 바둑에 자신이 없어진 거죠. 전에는 '이 정도면 잘 뒀지' 싶었던 것도 AI로 보면 하수의 바둑으로 나타나고, 두는 수마다 혹평을 받으니까. 여전히 자신은 없는데 이제는 납득하죠. AI를 적대적으로 여기지 않고 동반자나 친구로 받아들이기까지는 5년 정도 걸렸네요.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AI로 포석 공부도 하고 복기도 해요. 이제 받아들일 마음이 된 거죠." [60p]


- 이겨야 한다. 그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고 가장 큰 욕망이었다. 국가대표님이든 프로기사 개인이든 마찬가지였다. 멋진 바둑을 둔다든가, 아름다운 바둑을 둔다든가, '인간의 바둑'을 두는 것은 이기고 난 뒤에 고민할 일이었다. 여러 프로기사가 '인간의 바둑' 혹은 바둑의 예술성을 묻는 내게 '그런 고민을 할 겨를이 없었다, 먼저 살아남아야 했다'라고 고백했다. [78p]


-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인공지능이 그 분야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같은 고민은, 실제로 그 분야에서 쓸 만한 인공지능이 나오기 전까지만 할 수 있다. 인공지능은 모든 분야에서 게임 체인저가 된다. 인공지능이 등장하면 그 분야의 규칙 자체가 바뀌며, 그때부터 해야 하는 고민은 '이 인공지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가 된다. 어쨌든 경쟁은 다른 사람과 하는 거니까. [79p]


- 어떤 사람들은 그런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스마트폰 없이 살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스마트폰을 쓸지 말지는 순전히 현대인 개개인의 선택에 달린 문제'라고 말할 수는 없다. 현대 사회에서 스마트폰을 쓰지 않는 사람은 차별받는다. [108p]


- 알파고 이전에는 인강 최강자끼리 바둑을 두는 동안 그 대국에 대해서는 당사자인 두 대국자가 가장 잘 알았다. 알파고 이후에는 자신이 두는 바둑의 형세를 가장 모르는 사람이 바로 그 두 대국자다. 해설을 맡은 프로기사나 그 해설을 듣는 시청자들은 인공지능 덕분에 실시간 형세와 다음에 두어야 할 수를 훨씬 더 정확히 안다. [194p]


- 그때 '의로 현장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은 공존하고 있다, 분업하고 있다'라고 말해도 될까? '인간 의사들이 의료 현장에서 인공지능을 활용해 더 수준 높은 진단과 처방을 내리고 있다'라고 말해도 될까? '인공지능이 결코 줄 수 없는 의료 현장에서의 사용자경험을 인간 의사가 제공하고 있다'라고 말해도 될까? 그보다는 '의료 현장에서 인간이 여전히 필요하기는 하지만 보조 인력의 자리로 물러났고 권위도 추락했다'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한 진술 아닐까? [216p]


- 그 '중요한 것'은 스튜디오 지브리의 저작권이 아니다. 설령 오픈AI가 스튜디오 지브리에 작품 이용료를 제공한다 하더라도 나의 불쾌감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오픈AI는 저작권 이상의 것을 망가뜨렸고, 망가진 그것은 작품 이용료로 회복되지 않는다. 프로기사들의 자부심과 마찬가지로, 아마도 앞으로 영영 복구할 수 없을 무언가다.

1장에서 나는 위대한 작품이 하루에 288편 쏟아져 나올 때 우리가 느낄 당혹감에 대해 썼다. 그와 비슷한 일이 지금 작은 규모로 일어난 게 아닌가 한다.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은 그 이미지가 쉽게 생산되지 않는다는 사실, 그 이미지 한 장을 위해 많은 애니메이터가 거기에 공을 들였다는 사실. 그 화풍이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위대한 예술가가 한평생에 걸쳐 이룩한 성취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중략- 스튜디오 지브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스튜디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들을 둘러싼 내러티브가 바뀌고 스튜디오 지브리의 본질과 정체성도 바뀐다. 나는 이것이 훼손이라고 생각한다. 그에 대한 깊은 불만을 담을 수 있는 개념 도구가 지금 저작권 정도 밖에 없는 것이다. -중략- 지금 중요한 질문은 'AI 시대에 애니메이션 회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혹은 'AI시대에 소설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아닌 것 같다. 애니메이션 회사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왜 AI회사가 좌지우지하는가? 프로기사가 추구해야 하는 삶의 방식을 AI 회사가 함부로 규정해도 되나? 문학작품을 읽고 쓰는 방식을 인공지능이 멋대로 바꿔도 되나? [269-27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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