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bject
성인이 되기 전까지 필기구란 특별할 것이 없는 존재이고, 중고등학교 시절 필기를 열심히 하려면 좁디좁은 교과서 마진공간에 세세히 적어넣을 수 있는 HIGH-TEC C 정도나 의미가 있었을 뿐 특별히 욕심을 부린적이 없었다. 가끔 어릴때 친척형이나 친척누나가 졸업선물로 만년필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막연한 기대감 정도가 있었으나 그 마저도 만화 그려본답시고 초딩때 잉크에 찍어 그리는 펜을 써보고는 완전히 포기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만화용 작업 펜은 눈뜨고 못봐줄(500원 정도 했던 것 같다) 수준이였기에 당연한 결과이지만 첫 걸음부터 멘붕을 겪고 금전적 여유도 없던 기절의 나였기에 빠른 포기를 시전했다.
그 이후로 지금 애용하는 파커 수성펜을 만난건 전경 행정병 시절 강경장님이 연수원 다녀온 기념품을 나에게 토스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내근직들은 대부분 공감하겠지만 자신의 책상위 아이템들에 민감할 수 밖에 없고 매일 매일 마주치면서 과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고 여기저기서 깨진후에 괜시리 붙여놓은 사진 한 번 더보고, 힘내자는 동료의 포스트잇에, 얼마 남지 않은 전역일이 적신 달력으로 위안 삼으며 시간을 견디어 낸다.
전투경찰 순경으로서의 본서 경빅교통과 경비계의 내근직이란 꽤 하드한 직업이었기에 그 펜은 많은 위안이 되었다. 국가기관에 속한 자가 쓸 수 있는 대개의 보급품 필기구란 우리의 친구 모나미 시리즈- 로 시작되는 볼펜똥과의 싸움이였기에 붓질하다가 넘어온 나로서는 일종의 선굵기기 매끄럽게 조절이 되고 필력마저 느껴지는 필기구의 매력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
무게도 무겁지도 않고 가볍지도 아니하여서 적당한 중량감으로 번지는 맛을 즐기며 써내려가기 좋다.
좋은 도구를 만나면 내가 변하는 경험을 처음으로 했기에 지금도 좋은 도구를 찾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고 좋아하고 있다. (정말로) 그날 이후 우연히 내가 한글 쓰는 법이 바뀌어 버려서 9자의 동그라미를 오른편으로 두고 꺽어서 써내린다든지 ㅅ받침을 길게 내려 뺀다든지 하는 습관이 생겼다. 이 펜은 그게 기분이 좋게끔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단점이 있다는 나는 잘 잃어버리고 손에 잔뜩 잉크가 뭍고는 한다. 그리고 내용에 집중해야 하는데 글쓰는 것 자체에 재미붙이다가 가끔 글이 산으로 가기도 한다. 그럼에도 결과물은 매번 만족스러운 편이여서 헛소리도 다시 정독하게 되는 ...
가끔 드로잉할때도 쓰곤 하는데 좋다. 라미보다 파커. 나는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