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 프리초프 카프라 | 옮긴이 / 김용정, 이성범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개정판]
The Tao of Physics
1979년 3월 7일 1판 발행
2006년 12월 1일 개정판 발행
지은이 _ 프리초프 카프라
옮긴이 _ 김용정·이성범
펴낸이 _ 방광석
펴낸곳 _ 범양사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구산동 142-4)
- 기계에서는 정태적으로 분리된 각 부분의 작동이 전체의 기능을 결정하는 것이지만, 유기체에서는 역동적인 부분들이 상호 의존 관계에 있으며 부분은 전체의 필요에 따라 역할하는 종합적이고 통일적인 것이다.
서구 문명을 과거 300여년간 주도해 온 과학적 방법은 주로 공간적 분할과 분석의 방법으로 일(一)에서 다(多)를 보는 것이지만, 동양의 철인(哲人)들은 주로 명상과 직관의 방법으로 다에서 일을 보려 했던 것이며, 시간의 축에서 생멸하는 자연을 창조적인 생명의 원리로(즉 유기체적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소립자의 세계와 코스몰로지(cosmology)의 세계를 다루게 된 현대 물리학은 물질 세계가 극미로부터 극대에 이르기까지 부단한 생성과 소멸의 연속임을 보았다. 따라서 이러한 역동적인 자연은 기계의 원리로 설명할 수 없게 되었고, 유기체적 생명의 원리로 자연을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7~8p]
- 자연을 관찰함에 있어서의 고전 물리학의 기본 태도는 순수한 객관주의였다. 관찰의 대상체는 주관과는 관계 없이 ‘거기 존재해’ 있는 것이므로 그러한 객관적 존재의 불변적 특성인 수량적 제 속성의 파악에 물리학은 전력을 기울여 왔던 것이며, 따라서 관찰의 과정에서 가변적이요 불확실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주관은 배제되어야 했다. 그리하여 주관적인 감각에 속하는 색(色)이나 음의 본질은 객관적인 파장이나 진동의 수로 대체되고 감각작용은 사진기, 진동막, 한란계(寒暖計) 등등으로 대체된다.
이와는 반대로 불교 등의 동양사상은 주관주의에 입각한다. 그것은 주관적인 마음이 인식의 주체이므로 객관적 존재란 신빙성이 없다고 본다. 고전 물리학이 그 사변적인 방법으로 일에서 다를 보려하고 물체를 3차원 공간에 현존하는 것으로만 보는 데 반해서 동양사상은 그 직관적 방법으로 다에서 일을 보려 하고 일체를 생멸하는 변화로서 초월적으로 보는, 즉 4차원적 시공의 차원에서 보려 한다. [11~12p]
- 과학자들이 자연에서 관찰하는 패턴은 그들의 정신 패턴, 즉 그들의 개념, 사상과 가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이 이룩하는 과학적 성과와 그들이 연구하는 기술 응용법은 그들의 정신 형태에 따라 조건지워진다. 그들의 상세한 연구 대부분이 명료하게 그들의 가치 체계에 좌우되지는 않지만, 그들의 연구를 추진시키는 보다 큰 틀은 결코 가치 중립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과학자들은 그들의 연구에 지성과 도덕 양면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 [21p]
- 데카르트의 철학은 고전 물리학의 발전을 위해서도 중요한 몫을 다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일반적 사고방식에 끼친 영향도 지대한 바가 있다. 데카르트의 저 유명한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은 서양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전체적 유기체로서가 아니라 그의 마음과 동일시하게 이끌었던 것이다. 이러한 데카르트적인 분할의 결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육체 속에 내재하는 고립된 자아로서 인식하게 되었다. 마음은 육체 속으로부터 떨어져 나왔으며 그 육체를 통어해야 한다는 헛된 과업이 주어지게 되고 의식적 의지와 무의식적 본능 사이에 갈등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개인은 그의 활동이나 재능, 감정, 신앙 등에 따라서 수없이 쪼개진 많은 분야로 더욱 분열되어 갔고, 이것은 한없는 갈등을 일으켜 형이상학적 혼란과 좌절을 끝없이 유발시키는 것이다.
이 인간의 내적 분열은 곧 ‘외부’ 세계를 제각기 분열된 대상과 사건의 집합으로 보는 관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자연 환경은 제각기 다른 이해집단에 의해 착취되는 따로 떨어진 부분들로써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취급된다. 이 조각난 관점은 나아가 사회에까지 확장되어 저마다 다른 국가, 인종, 종교, 정치 집단으로 분열된다. 이러한 분열-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환경이나 우리의 사회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분열-이 정말 다른 조각들이라고 믿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일련의 사회적·생태적·문화적 위기의 근본 이유라고 여겨진다. [40~41p]
- 그래서 동양적 관점에서는 자아를 쪼개진 대상으로 구분한다는 것은 본원적인 것이 아니며 어떠한 대상도 활동하고 무상하게 변전하는 성격을 가진다. 그러므로 동양의 세계관은 본질적으로 역동적이며 시간과 변화를 본래부터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우주란 영겁토록 움직이고, 살아 있고, 유기적이며, 정신적인 동시에 물질적인 하나의 불가분이 실재로서 보이는 것이다. [42p]
- 합리적 지식은 우리들의 일상 생활 환경에서 그 대상과 사건들을 경험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것은 식별하고 분리하여 비교하고 측정하여 범주화하는 기능을 가진 지성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지적 분별의 세계가 이루어지면 그것은 상호 관계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대립자의 세계로서, 불가에서 이런 유형의 지식을 ‘상대적’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추상화는 이런 지식의 결정적인 특징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주변에 널려 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양한 형상과 구조와 현상들을 낱낱이 고려할 수는 없는 일이고, 그것을 비교하고 분류하기 위해서는 그 몇 가지의 두드러진 것만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우리들은 사물들이 일반적인 윤곽으로 간추려진 실재의 지적 지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렇게 추론적 지식이란 추상적 개념들과 상징들의 체계인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사고와 언어 활동의 전형을 이루는 직선적·연속적 구조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것이다. 알파벳을 길게 나열함으로써 우리의 경험과 사고를 전달하는 대부분의 언어에 있어서 이 선적인 구조는 분명히 드러난다. [47p]
- 물리학에서 지식은 3단계의 진행을 겪는 것으로 보이는 과학적인 연구의 과정을 통하여 얻어진다. 1단계는 설명해야 할 현상에 관한 경험적 실증을 수집하는 일이다. 2단계에서는 경험적 사실들이 수학적 상징으로 연관되며, 이러한 상징들이 정밀하고 일관성 있게 상호 연결되어 수학적 체계가 마련되는 것이다. 이러한 체계를 보통 수학적 모형(model) 또는 그것이 더욱 포괄적일 때에는 하나의 이론(theory)이라 부른다. 이 이론은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모든 것을 확인해 내기 위해 실험을 더 깊이 진행하면서 그 결과를 미리 예측하는 데 흔히 쓰이곤 했다. 이 단계에서의 물리학자들은 자기들이 수학적 체계를 발견하고 그것으로써 실험 결과를 예측하는 데 활용할 줄만 안다면 만족할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그들은 그 결과를 물리학자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어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그 결과들을 통상적 언어로 표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수학적 체계를 통상 언어로 해석하는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언어적 모델을 만든다는 것은 물리학자들 자신에게 있어서 연구의 제3단계가 되는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도달한 이해의 척도가 될 것이다. [51p]
- 추론적 지식과 추론적 행위는 확실히 과학적 탐구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만약 과학자에게 신선한 통찰력을 부여해서 그를 창조적이게 하는 직관에 의하여 탐구의 추론적 면이 보완되지 않는다면 기실 그것은 아무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통찰은 갑자기 일어나는 경향이 있는데, 책상 앞에 앉아서 등식을 풀고 있을 때가 아니라 욕탕 속에서 심신을 녹이고 있을 때나 숲 속이나 해변을 거닐 때처럼 허심할 때에 홀연히 떠오르는 특성이 있는 것이다. 지적 활동에 골몰하고 나서 잠시 쉬는 틈에 이 직관적 마음은 솟아나는 듯하며, 이것이 과학 연구에 희열을 가져다주는 명석한 통찰을 갑작스레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직관적인 통찰은 그것이 일관성 있는 수학적 체계로 형성되고 일상 언어로 해석되어 보완되지 않는다면 물리학자들에게는 무용한 것이다. 이 기본 작업에 있어서 추상화가 가장 요긴한 특성이다. 그것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실재의 지도를 그려 내는 개념들과 상징들의 체계로 짜여진다. 이 지도는 다만 실재의 어떤 특성만을 나타낼 따름이다. 우리들은 이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가를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릴적부터 비관적인 분석 없이 우리의 지도를 조금씩 덧붙여 그려 온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일상 쓰는 언어의 말 하나하나들은 분명하게 규정된 것이 아니다. 말들이란 몇몇의 다른 의미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들의 대부분은 우리의 마음속을 막연하게 지나갈 따름이고, 우리가 어떤 단어를 들을 때에는 대체로 우리의 잠재 의식 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 [52~53p]
- 우리 언어의 부정확성과 모호성은 잠재 의식층과 그 연상 작용에 따라 시작(詩作)을 하는 시인들에게는 필수적인 것이다. 반면에 과학은 명료한 정의와 모호하지 않은 연결을 목적으로 하며, 따라서 언어의 의미를 한정하고 논리의 규율에 따라서 그 구조를 표준화함으로써 언어를 더욱 추상화시키는 것이다. 언어가 기호로 대체되고 그 기호의 연결 작용이 엄격히 제약되는 수학에서 이 추상은 극대화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과학자들은 정보를 하나의 등식으로, 통상 언어로써는 몇 페이지나 필요할 것을 단 한 줄의 기호 속에 압축해 넣는 것이다. [53p]
- 수학적 모형과 그 언어적 대응물 사이의 차이를 깨닫는 일은 중요하다. 전자는 그 내적 구조에 있어서는 엄밀하고 일관성이 있지만, 그 기호들이 우리의 경험에 곧바로 와 닿지는 않는다. 반면에 언어적 모형은 직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개념들을 사용하지만 늘 애매모호하고 부정확하다. 이 점에 있어서 그것은 실재의 철학적 모형과 다를 바 없으며, 그래서 이 양자는 잘 비교될 수 있는 것이다. [55p]
- 현대의 실험 물리학에 나오는 한 페이지만 해도 초심자에게는 티베트의 만다라 신상처럼 불가사의하기만 할 것이다. 그러나 둘 다 우주의 본질 속으로 파고들어 간 질문의 기록일 따름이다. [59p]
- 그래서 아인슈타인(Einstein)도 이런 경구를 말했다. “수학의 법칙들이 실재에 관해 언급하는 한 그것은 확실하지 않고, 그것들이 확실하다면 실재를 가리키지 않는다.” 물리학자들은 그들의 분석방법과 논리적인 추론이 자연 현상의 전 영역을 당장 해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래서 그들은 현상의 특정한 일군을 뽑아 내어 그 일군을 설명할 수 있는 모형을 세우려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다른 현상들을 무시하게 되고, 따라서 그 모형은 실제 상황에 대한 완전한 기술을 하지 못한다. 고려 대상에서 제외되는 현상들은 그것들을 산입해 봐야 이론을 크게 변개시킬 수 없는 미미한 효과를 가진 것이거나, 또는 어떤 이론이 수립될 때 그것들이 미처 감지되지 못해 단순히 빠져 버린 경우도 있을 것이다. [64p]
- 이것은 뉴턴의 이론이 꼭 ‘틀리다’거나 양자론과 상대성 이론이 ‘맞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런 모든 모형들은 현상의 어떤 범위에만 타당한 근사치일 따름이다. 이 범위를 넘어서면 그것들은 자연에 대해 만족할 만한 기술을 더 이상 줄 수 없게 되며, 따라서 옛것에 대신할 새로운 모형이 발견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는 더 바람직하게는 그 근사치를 개량시킴으로써 그것을 확장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65p]
- 중국과 일본의 신비가들은 이러한 언어적 문제를 다루는 다른 방법을 찾아냈다. 신화의 상징과 이미지에 맞도록 실재의 역설적인 본성을 창출해 내는 대신에 그들은 가끔 사실적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오히려 그것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도가에서는 언어적 소통에서 유발하는 부조화를 드러내고 그 한계를 보여 주기 위해서 역설을 자주 사용하는 것이다. 이 기술을, 도가들은 그것을 더욱 발전시킨 중국과 일본의 불교도에게 계승시켰고, 소위 공간을 가진 선불교에 와서 그 절정에 이른다. [67p]
- 다이토 대선사가 선 수업을 받고 있던 천황 고다이고를 만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수천 ‘칼파(kalpa)’ 이전에 헤어졌지만
우리는 잠시도 떨어져 본 적이 없소.
우리는 하루 종일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지만
우리는 만난 적이 없소.
[73p]
- 어떤 힘을 일으키는 잠재력을 가진 공간에서의 이와 같은 조건을 장(場)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단일 전하에 의하여 생겨나며 다른 전하가 들어와서 그 효과를 느끼게 되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그것은 존재한다.
이것은 인간의 물리적 실재에 관한 개념의 가장 심오한 변화였다. 뉴턴적 견지에서는 힘이 그 작용하는 물체와 단단하게 결부되어 있었다. 이제는 그러한 힘의 개념이 그 자체의 실재를 갖고 물질적인 것들과 아무런 관계 없이도 연구될 수 있는 훨씬 미묘한 장의 개념으로 대체되었다. 빛이 파동의 형태로 공간을 통과하는 급속히 교체하는 전자기장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한 것이 전기 역학이라 불리는 이 이론의 정점을 이룬다. [87p]
- 입자상과 파동상 사이에 존재하는 외견상의 모순은 기계론적 세계관의 바로 그 근본, 즉 물질의 실재 개념에 이의를 제기했던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법으로 해결되었다. 아원자적 단계에서 물질은 어떤 한정된 장소에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존재하려는 경향’을 나타내며, 원자적 사건들은 확실성 있게 한정된 시간에 한정된 방식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하려는 경향’을 나타내 보이는 편이다. 양자 이론의 형식론에서 이러한 경향성은 확률로써 표현되며 파동의 형태를 취하는 수학적인 양과 연관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어떻게 입자가 동시에 파동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까닭이다. 그것은 음향이나 물결처럼 실재하는 3차원적 파동이 아니다. 그것은 공간의 특정 지점과 특정한 시간에 입자를 찾아내는 확률과 관계 있는 파동의 모든 특유한 속성을 가진 추상적이고 수학적 양인 ‘확률파’다. 원자 물리학의 모든 법칙들은 이러한 확률로 표현되다. 우리는 원자적 사건을 결코 확실성 있게 예언할 수 없다. 단지 그것이 어떻게 일어날 것 같은가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97p]
- 이러한 관계들은 언제나 그 본질적인 면에서 관찰자를 포함한다. 인간이라는 관찰자는 관찰되는 과정들의 연쇄에서 마지막 연결을 이루며, 어떤 원자적 대상물의 성질도 단지 관찰자와 대상의 상호 작용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자연의 객관적인 기술이라는 고전적 이상은 이미 빛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와 세계,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의 데카르트적 구분은 원자적 물질을 다룰 때에는 성립할 수가 없다. 원자 물리학에서는 우리 자신을 동시에 언급하지 않고서는 자연에 관해서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98p]
- 앞으로 서술될 (동양) 철학을 이해하려면 그것이 본질적으로 종교적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동양 철학은 실재에 대한 직접적이고 신비적인 체험을 주요 목표로 삼고 있고, 이런 체험은 본래 종교적인 까닭에 그것은 종교로부터 따로 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점은 다른 어떤 동양의 전통보다도 힌두교에 있어서 더욱 들어맞는 것이며, 철학과 종교가 특히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인도의 경우 거의 모든 사상이 어느 의미에서는 종교적 사상이며, 힌두교는 여러 세기에 걸쳐 인도의 지적 생활에 영향을 끼쳐왔을 뿐만 아니라, 그 사회·문화적 생활까지도 거의 전반적으로 결정지어 왔다고 말해지고 있다. [117p]
- 힌두교는 해탈에도 수많은 방식이 있다고 생각한다. 힌두교는 그 모든 교도들이 같은 방식으로 신성에 접근할 수 있으리라고는 결코 기대하지 않으며, 따라서 제각기 다른 깨달음의 양태에 맞추어 상이한 개념과 의식과 정신적 수련을 마련한다. 그런데 이러한 개념과 의식 중에 많은 것들이 상호 모순된다는 사실에 힌두교도들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그들은 브라만이 개념과 이미지를 초월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로부터 힌두교의 특성인 대자 대비한 관용과 포용성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123p]
- 힌두교가 신화적이고 의식적인 풍미를 띠고 있다면 불교는 분명히 심리학적 취향을 띤다. 부처는 이 세계의 기운이나 신의 본성, 혹은 이와 유사한 문제에 관한 인간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데에는 흥미가 없었다. 그는 오로지 인간 존재의 고뇌와 좌절 등 인간적 상황에 관심을 쏟았다. 그러므로 그의 교리는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 요법적인 것이었다. [127~128p]
- 제2성제는 모든 괴로움의 원인인 ‘트리슈나(trishna)', 즉 집착 또는 탐욕을 다루고 있다. 이것은 불교 철학에서 ’아비댜(avidya)', 즉 무명이라고 불리는 잘못된 관점에 근거하고 있는 무익한 욕심이다. 이 무명 탓으로 우리는 지각된 세계를 개별적이고 분열된 사물로 쪼개고, 이리하여 우리의 마음이 낳은 이 고착된 범주에다가 실재의 유동하는 형태를 붙잡아 매려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지배하는 한 우리는 좌절에 좌절을 거듭 겪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는 무상하고 영원히 변전하는 것임에도 우리가 확고하고 영속하는 것으로 보는 사물들에 집착하려 한다면, 우리는 모든 행위가 행위를 낳고 매 질문에 대한 해답이 새로운 질문이 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이 악순환이 불교에서는 삼사라(samsara), 즉 윤회전생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것은 인과응보의 끝없는 사슬인 카르마(karma, 業)에 의해서 몰아쳐진다. [130p]
- 아슈바고샤는 가장 지적인 마하야나 철학자인 나가르주나에게 가장 강한 영향력을 끼쳤는데, 나가르주나(Nagarjuna)는 실재에 관한 모든 개념들이 지닌 한계를 보여 주기 위하여 고도로 세련된 대화법을 사용했다. 그는 명석한 논증으로 그 당대의 형이상학적 명제를 뒤엎고 궁극적으로 실재는 개념이나 관념으로 파악될 수 없음을 널리 보여 주었다. [132p]
- 공자의 어록인 ≪논어≫와 노자의 ≪도덕경≫은 중국적 사유 방식의 전형이라 할 간결하고 암시적인 스타일로 쓰여 있다. 중국 정신은 논리적으로 추론해 들어가는 일이 없어 서양에서 진화되어 온 것과는 사뭇 다른 언어를 발전시켰다. 중국의 단어들은 명사와 형용사와 동사로 사용될 수 있고 시제는 문법에 의해서라기보다 문장의 정서적 내용에 의해서 결정된다. 중국의 고대어는 분명하게 묘사된 개념을 나타내는 절대적 기호와는 거리가 아주 먼 것이었다. 그것은 차라리 강렬한 암시력을 가지고 마음속에 그림과 같은 영상과 감정을 막막하게 복합시켜 주는 심원한 상징이라고 해야 할 것이었다. 화자의 의도는 어떤 지적인 사상을 많이 나타내기보다 듣는 이에게 영향과 감동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록된 문자는 꼭 무슨 절대적인 기호가 아니라 이미지의 완전한 융합과 단어의 암시력을 보존시켜 주는 하나의 유기적 패턴-하나의 ‘형태(gestalt)'-이었다.
중국의 철학자들은 그네들의 사유 방식에 아주 잘 어울리는 언어 속에 자신들을 표현했기 때문에 그들의 저술과 말들은 간결할 수가 있었고,(말의 끊어지고 이어지는) 마디가 분명치 않아도 좋았고, 그러면서도 암시적인 이미지는 풍부했다. [140p]
- 그러면 인간이 깨달아야 할 우주적 길의 유형은 무엇인가? 도의 주요한 특성은 끊임없는 운동과 변화의 순환성이다. “돌아옴이 도의 움직임이다. 멀리 가는 것은 돌아오는 것을 뜻한다”라고 노자는 말했다. 이 사상은 자연계의 모든 발전이 인간 상황에 있어서는 물론 물질계의 발전까지 포함해서 오고 감과 확장과 수축의 순환 패턴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이다. [142p]
- 논쟁은 분명하게 보지 못한 증거다. [156p]
- 우리가 도가의 변화 개념을 두고 얘기할 때, 그 변화가 어떤 힘의 결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과 상황 속에 내재하는 경향으로서 보인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도는 강요되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일어난다. 자발성은 도의 행동 원리며, 인간의 행위가 도의 작용을 본뜨는 것이기 때문에 자발성은 모든 인간 행위의 특성이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가들에게 있어서 자연과 조화하는 행위란 자발적인 행위, 곧 스스로의 진정한 본성에 합치되는 행위를 뜻한다. 그것은 마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물 속에 변화의 법칙이 내재하듯이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해 있는 직관적 지성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161p]
- 선에 있어서 깨달음은 만물의 불성을 직접 체험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것들 가운데에서 무엇보다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일상생활 속에 섞여 드는 대상과 범사와 사람들이다. 이처럼 생활의 실제성을 강조하는 반면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은 깊은 신비성을 여전히 띠고 있다. 현재에 전심전력으로 살고 일상사에 충분한 관심을 가지면서 개오를 얻은 사람이면 그 어떤 단순한 행위 하나에도 생의 경이와 신비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169p]
- 우리가 기껏 할 수 있는 일이란 가능성을 예견하는 것이다. [179p]
- 양자론은 우리로 하여금 우주를 물리적 대상들의 집합으로서가 아니라 통일된 전체의 여러 가지 부분들 사이에 있는 복잡한 관계망으로서 보게 한다. -중략-
만물은 서로 의존하는 데에서 그 존재와 본성을 얻는 것이지, 그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185p]
- 이런 역동적 균형의 개념은 동양의 신비주의에 있어서는 대립적인 것들의 통일이 경험되는 방법상의 요체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정적인 동일성이 아니라, 언제나 두 극단 사이의 역동적인 상호 작용이다. 이 점은 중국의 현인들이 원형적 양극을 상징하는 음과 양으로써 철저하게 강조해 왔단 것이다. 그들은 음과 양의 배후에 놓여 있는 통일체를 ‘도’라고 부르고, 그것을 음양의 상호 작용을 발생시키는 하나의 과정으로서 보았다. “지금 어두움이 되게 하고, 또 곧 빛을 나타내 주는 것이 ‘도’다.” [19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