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아픈 거 맞네
'2주밖에 안 지났네' vs '2주나 지났네' 고민하는 것 보니, 나 아픈 거 맞네.
벌써 3월이 시작됐다. 우울함과 분노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괴롭혔던 휴가 첫 주가 지나갔다. 그/그녀와 병가 처리를 위해 연락해야 하는 상황에 불안했고, 지인들에게 알리기 시작하면서 많은 응원을 받았던 둘째 주도 이미 지나갔다. 그런데 생각보다 일찍 머릿속에서는 작은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고작 2주밖에 안 지났네!' vs '2주나 지났네'
태어나서 거의 40년 동안 쉬지 않고 달려왔으니, 관성의 법칙상 뭔가 특별한 일을 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어색한 건 당연하다.
근데 나는 환자인데? 쉬려고 일하던 것들 다 내팽개치고 휴가 중이고, 병가 내는 건데? 자꾸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계획과 고민을 하고 있다.
'여행 가서 뭐 먹지? '그럼, 뭐가 필요하지?' '또 어디로 여행가지?' '누구를 언제 만나지?' '뭔가 배워야 하나?' 이런 생각들 이 수시로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든다. 당연히 이성적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외치고 있지만, 나도 모르게 계속 무언가를 생각/고민하고 있다.
원래 이런 게 정상인 건지, 내가 아파서 머릿속이 복잡한 건지.
진짜 내가 아픈 것은 맞는지, 꾀병이 난 것인지 구별도 잘 안된다.
'나는 약을 안 먹으면 불안하다'라고 스스로 세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일할 때는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증상들도 인지되기 시작했다. 간헐적 근육 경련(여기저기 툭툭 튄다), 하지 불안증 증세(가만히 쉬고 있으면 다리가 투두둑하고 떨리고 가만히 있기 힘들다), 일은 안 해도 아픈 목/두통, 화가 잔뜩 나 있는 돌 같은 승모근 그리고 이명. 3주 전에 삐끗했던 허리 통증도 잔잔하게 남아있고, 눈도 잘 안 보이고, 집중도 안 되고, 손도 미세하게 떨린다(이렇게 항시 떨리고 있는 줄 몰랐다.) 이런 것들을 보면 아픈 게 맞는 것도 같다.
지난 2주 동안 살아보겠다고 50회 끊어두었던 회사 앞 요가 환불도 하고, 개명 신청했고, 병가를 위해 그/그녀와 통화도 했고, 주위에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에게 아픈 사실도 알렸고, 대학병원 진단서도 받아왔고, 상담도 다녀오고, (의사가 처방해 준) 주 3회 러닝머신 30분 운동도 시작했다. 좋은 사람들과 점심/저녁 만남도 4번이나 가졌고, 절주도 시작했다.
이렇게 보면 많은 것을 했는데, 나는 뭘 더 하려고 하는 걸까?
아... 그래... 이러니까
나 아픈 거 맞네.
500만 원짜리 가방을 메도 50만 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는 반면, 5만 원 짜리도 500만 원 명품처럼 보이게 하는 사람이 있다. 허양은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런 외모나 분위기와 달리 그녀의 인생은 쉽지만은 않았다.
이력서에 적혀 있는 몇 줄. 외고 졸업, Y대 학사부터 박사, 유명 제약회사 연구원, 10대 기업 전략기획실..
이렇게만 보면 순탄했으리라 생각되는 그녀의 삶은
지금까지 한 번도 쉼표를 찍어본 적이 없다.
그냥 일반고를 가지 왜 멀고 교육비 더 드는 외고를 갔느냐는 질타를 들으면서 공부했다.
대학교 학비를 집에서 지원받지 못해 학자금 대출을 했고
결혼할 때까지 그 학자금을 갚으려 박사과정 중에도 알바를 다녔다.
학부시절 장학금 신청 날짜를 혼동해서 신청하지 못했을 때, 부모님께 혼이 나면서 억울했다. 내가 스스로 학비 충당하며 다니는데 이런 욕을 먹어야 하나?
한 학기만 휴학을 하고 싶다는 요구를 그녀의 부모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게 관성이 되었을까? 지금껏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는 허양은 요새 이런 생각을 한다..
‘매일 한번 이상 눈물이 나지만 지금이 행복하다고 느낄 만큼 나는 힘들게 살아왔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