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그들에게 더 이상 필요 없는 사람이다
오늘로 휴가를 낸 지 약 10일째 되었다. (정확한 일 수는 셀 수 있겠지만, 그럴 만한 의욕도 없다)
사고 발생 1일 뒤, 남편은 상사들에게 내 상황과 추가 2주 더 쉴 것을 알렸고, 그 후에는 휴직이든 퇴사든 결정하겠다고 말했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인사 절차에 대한 안내는 아무도 먼저 하지 않았다.
내 소식을 듣고 놀라서 쫓아오신 그분이 안내해 준 게 전부다. 심지어 그는 내 전 상사인데도, 금방 퇴사하기보다는 병가를 제안해 주시면서, 천천히 고민해 보라고 했었다. 그러나 나의 상사들은 남편이라는 소통 채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바쁘다는 핑계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결국, 친한 비서를 통해서(심지어 타 부서장의 비서이다) 인사담당자를 알게 되었고, 예전에 한번 점심 먹은 사이라서 조금 편하게 연락을 했고, 그는 새로운 담당자를 지정해 주었다.
오늘 그 담당자 메일을 저녁이 다 되어서야 받았다.
굉장히 형식적인 답변.
'본인 발생 연차 소진 후 병가 가능하나 일정은 1, 2차 상사와 협의 후 진행 바랍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다시 인사 담당자에게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병원에서 진단서를 받았고, 6개월 이상 상급 병원의 진단이 필요하고 어쩌고 저쩌고.. 그래서 추가 연차 낼 것이고 이후 병가를 신청하려는데, 병가기간을 논의하고 싶다.."
나도 알고 있다.
한 번은 나가서 정리해야 된다는 것을.
그래서 기간 논의를 사전에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요청하고 싶었다.
근데, 직접 직장에 나와서 그와 면담해야 한다고 인사팀 안내를 받았다고 한다.
나는 아직 그를 마주할 생각을 하면 숨이 잘 안 쉬어지는데, 대면 면담이라니. 대면 면담을 해야 병가 기간을 정할 수 있다니. 그녀는 인사팀 안내를 받았는데 왜 나/나의 남편에게는 연락을 해주지 않았을까?
화가 났다. 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나는 교통사고로 병가를 내려고 해도, 대면 면담이 필요하냐고 물었고,
돌아오는 대답은 그것이랑 상황이 다르니까.. 였다.
그렇다.
두 다리가 멀쩡한 아픈 사람은 '진짜 아픈 사람'이 아니니까. 나가서 면담을 하고 (상급병원 진단서가 있음에도) 얼마나 쉬어야 하는지를 결정받아야 한다.
나는 그들에게 '정신이 나약'하여 '본인의 의지에 의해서 병가'를 내야 하는 상황이며, 사지가 멀쩡하지만 일을 할 수 없는 '꾀병 부리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의도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그녀에게는 일 많고 사람도 없어 죽겠는데 이런 것까지 신경 써줘야 하는, 더 이상 필요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ㅅㅂ....
내가 유급병가라도 얻어내야 덜 억울할 듯.
나도 당신들 같은 상사 필요 없다. 퉤퉤
허양과 그녀의 통화를 듣던 남편은 생각했다.
그녀는 진짜 리더로서 자질이 없구나. 직접 채용하고 함께 4년 반을 일한 직원이 아프다는데 저렇게 메신저처럼 이야기할 수 있지?
클리스만 감독에게서 보았듯 유능한 플레이어가 훌륭한 디렉터인 것은 아니다. 리더의 자질은 실무자의 그것과 다르고 따라서 회사는 누구를 리더에 자리에 올리고 어느 정도의 교육과 투자를 할지 고민해야 하는데..
여전히 연공의 성격이 짙은 한국기업문화에서는
버티거나 실무를 잘한다는 이유로 리더의 자리에 오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당사자나 회사에게 모두 손해다.
특히 그런 리더십 밑에서 충성도 강한 직원들이 튕겨 나갈 때 얼마나 막대한 손실인지 회사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사람이 전부인데, 정 반대의 경우가 너무 많다.
이런 상사 아래에서 그렇게 죽도록 일했던 아내가
얼마나 외로웠을까 생각하니 남편은 심장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