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3학년부터 시작해 보면,
학급을 올라가자마자 학교에서는 설문조사 같은 걸 했는데, 가고 싶은 학교와 전공을 써내는 것. 시키는 대로 공부나 하던 애들이 아이디어가 있겠냐?
그냥 유명한 학교 쓰고 그럴싸한 전공 써내는 거지 몇 글자 써내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책임질 것도 아니니 마음대로 써서 냈고 담임이 그걸 보고 부르더니 너가 여길 갈 수나 있다고 생각하냐라고 반문을 했다.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가장 늦게 등교한 덕에 맨 앞자리에 앉아서 수업 시간 졸고 있었는데 화학 선생님이 자던 내 머리를 치면서 급우들에게 하는 말,
'나는 만약 얘가 서울대를 갈 경우 휴학을 하라고 권하고 싶다. 니들이 뭐 꿈이나 의지 가지고 공부하고 있는 거 아니라 그냥 하는 건대, 그런 마인드로 대학시절을 보내고 나이 먹으면 결국 고3과 똑같은 인생을 계속 사는 거다. 그러니까 대학을 가면, 1년은 휴학을 하고 뭐든 학교 바깥으로 나가 해보며 세상이 어떤 지 느끼고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라.'
아마 졸다가 들은 그 몇 마디가 내 인생을 바꿨을 거라고는 화학 선생은 생각지도 못할 거다. 아무튼 어느 고3이나 그렇듯 주어진 대로 공부하다 보니 운이 좋게 의대, 자연대, 공대를 붙게 되었고 그중 나는 지금 내가 졸업한 학교의 공대를 택하게 된다.
대학을 들어가니 내가 꿈꾸던 아카데미는 아닌 것을 깨달었다.
난 대학생은 여유 있게 토론도 하고 사색도 하고 그럴 줄 알았지 입학하자마자 어려운 미적분을 공부하고 무겁고 어려운 책들을 들고 다닐 줄 몰랐다.
첫 중간고사의 첫 시험을 중간에 나와 바로 휴학을 신청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알려드리려 술 한잔하자고 권하니, 아들이 부른다고 기분 좋게 나왔던 아버지는 휴학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분이 몹시 상해 자리를 떴다. 그러면서 군대 가겠다는 이야기냐라고 계속 물었는데 왜 그렇게 물었는지는 한참이 지나서야 이해가 되었다. 내가 휴학한 건 군대 가려는 이유가 아니었는데, 아버지의 세상에는 휴학=군대라는 것 밖에 없었나 보다. 아무튼 그날 밤 어머니와 아버지는 긴 논의를 하였고 다음 날 나에게 너가 하고 싶은 대로 하되 남 원망 말고 후회 없도록 노력하라고 하셨다.
나의 20살 휴학생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범인들은 대부분 나와 마찬가지로 이런 기회가 주어지면 그동안 부족한 영어를 해야지, 책도 일고 자기계발 해야지, 투자를 공부하자, 스터디를 하자...할 텐데 나도 마찬가지. 그러나 그 결심은 한 달도 가지 못하고, 취침시간은 점점 늦어지고 기상시간도 해가 중천일 때가 되는데, 덕분에 느긋하게 하루를 시작하면서 어머니와 식탁에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는데 덕분에 훨씬 가까워진 것 같다.
어린 시절 상당의 기간을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고 맞벌이를 하셔서 집에 와도 부모님을 볼 기회가 없고 나도 학년을 올라가며 독서실이나 야자를 하고 오면 부모와 자식사이라도 대화가 없어지게 되던데, 저 시기 충만한 여유 덕에 부모와 친구처럼 가까워진 것만으로도 나의 휴학은 값어치를 했으리라 생각한다.
게다가 쫓기지 않는 하루의 시작이란 돌이켜 보니 그 때가 아니었으면 지금껏 누려보지 못했을 거라. 요새는 일요일에도 하루가 아까워 새벽같이 일어나는 걸?
아무튼, 자기계발 따위는 개나 줘버려 하면서 휴학생활을 보내기 시작한 나는,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다양한 형,누나들을 만나고, 음악을 좋아한다고 문화관련 단체도 활동해보고, 외국과 교류하는 단체 (한일학생끼리 교류하던 곳)에 면접보고 합격도 하고, 클럽도 밤낮으로 다니고,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로 마술이란 것을 접하게 되었다.
어느 날 혼자 영화를 보러 갔는데 나 빼고는 다 연인이란 것이 너무 부러웠다. 그런데 그날 보고 있던 영화 속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에게 마술을 보여주는데, 아! 저거다.. 저거면 나도 여자친구 사귈 수 있겠다 생각이 들었다. 이런 하찮은 이유로 마술을 배우고 싶었고 그렇게 동호회를 찾아가게 되었다. 그러다 이렇게 재밌는 걸 왜 나 혼자 하지라는 생각이 들어 학교에 동아리를 만들어야겠다 결심했다.
휴학생이 학교에 동아리를 만들겠다고 일을 벌리더니, 그게 갑자기 큰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성장하는 거라. 아마 당시만 해도 대학교에 동아리란 것이 대부분 정치나 토론에 대한 것이라 취미생활로 동아리를 한다는 것이 주목을 받은 거 같았다.
그 덕분에 자연스레 사람을 만나 대하는 것, 조직을 운영하는 것, 운영자들 사이 혹은 리더와 참여자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대외 홍보 기타 등을 몸으로 배울 수 있게 되었고.
그렇게 나의 1년의 휴학기간은 끝이 나고 복학을 해야 했다.
정말이지 공대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1년을 쉬고 생각해보니 난 공대와 안 맞는단 생각을 하던 중, 신문을 보니 경영대가 취업률 1위라는 기사 하나 보고, 아~ 이거구나... 전과를 하는 거야 라고 마음을 먹고 복귀하자 마자 2년을 경영대학생처럼 수업을 들었다. 돌이켜 보면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2년 뒤 전공을 바꾸는 전과시험을 보았는데 너무 긴장한 나머지 머리가 백지가 된 상태로 면접을 보고 탈락을 했다. 그리고 군대를 다녀오니 벌써 나이가 스물 다섯, 이십 대 중반이 되었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졸업은 해야겠으니 공대 전공수업을 듣고, 어색했지만 과동기인 친구들을 찾아가 도움도 받고, 군대가기 전 들은 수업들로 학점을 최대한 커버하고 계절학기도 들으면서 2008년 말, 드디어 취업시즌을 맞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