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만 원? 100만 원? 아니면......
약 10년 전 일인 것 같습니다.
거래처 사무실에 방문해서 중요한 문제로 미팅을 하고 있었는데 저는 당시에 사원 혹은 대리 정도였고 상대는 과장, 차장 이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을의 위치였으니 미팅 분위기는 아마 대충은 짐작 하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카드회사에서 연락이 오더라고요. 광고성이겠지 하고 받아서 거절하고 끊으려 했는데 그게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고객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바깥에 나가서 전화를 이어가니, 카드값이 연체가 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생활비 등의 내용이었는데, 저는 풍족하지도 않지만 부족하게 살지도 않았던 것 같고, 그렇다고 돈을 무척이나 못 벌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통장에 잔고가 없고 빨리 돈 내라는 독촉 전화를 받으니 적잖이 당황스럽더군요. 그것도 고객과 미팅 중에.
부랴부랴 전화를 끊고 머릿속 한켠에는 계속 카드사 전화가 생각이 나면서 미팅을 겨우 마쳤습니다.
필요한 돈은 100만 원 정도.
잠시 친구들에게 빌리면 되지 않겠나 바로 며칠 뒤에 월급 받으면 갚으면 되니까라며 몇몇 친한 친구들에게 전화를 하는데, 이게 뭐람. 전화를 건 5~6명 친구 중에 어느 하나도 빌려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더군요.
당시의 당혹스러움이란 하하.
물론 각자는 다 사정이 있었습니다. 당장은 현찰이 없어서, 자신도 빠듯해서, 아직 학생이라서.
다른 금융기관에서 차입해서 카드값은 메꾸고 , 그다음부터는 절대 인생에 잔고 빵꾸는 안 내겠다라며 살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선 누구에게 쉽게 기댈 수 없겠구나 라고 깨달았거든요.
10년이 흘러 제 주머니도 꽤나 차서, 마음만 먹으면 100만 원이 아니라 0 하나 더 붙여서 빌려줄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지인이 급히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저는 빌려 줄까요?
빌려 줄 수 있다면 얼마를 빌려줄까요?
얼마 전 유튜브를 보다 개그 코너에서 무작정 지인에게 전화 걸어 이유도 말하지 않고 당장 돈을 빌려 달라면서 '우정 테스트' 란 이름을 붙이는 것을 보고 10년 전 그날 이 떠올랐습니다.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고 하여 상대방을 믿지 않는 것도 우정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돈을 빌리지 못했다고 하여 스스로 잘 못 살았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각자는 나름의 사정이 있거든요.
'아는 사이끼리 돈을 빌려 주느니 차라지 주겠다 갚는 건 상대 마음대로 하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분이라면 큰돈을 주지는 못하겠죠. 그때의 본인 상황도 살펴야 하고.
'얼마든 빌려는 주겠는데 배우자 재가가 꼭 필요한데'라고 말할 사람도 있고,
'내 신용대출을 해서라도 빌려줄게'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날 친구와 커피를 마시던 중 이런 이야기를 꺼내더군요.
'그때 내가 돈 빌려 달라고 했을 때 불가능하다고 해서 사실 한편으로 서운했다고. 자기가 그렇게 못 믿는 건가 라고 생각이 들었다고.'
듣고 나서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런 일 자체를 크게 기억하지도 않았거든요. 왜냐하면 그 친구는 당장 현금화할 수 있는 재산만 해도 저의 수 배는 되고, 가족들에게도 충분히 요구해도 될 정도의 여유가 있었고, 필요한 금액도 1~200만 원이 아니라 훨씬 커서 제가 감당할 금액이 아니었거든요.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든 그렇게 요구할 상황이 왔다면 그냥 무조건 믿고 빌려줄 상황이 아닐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하기도 쉬웠을 거고요.
오히려 저는 나의 주머니 사정을 이 친구가 너무 과대평가했거나 혹은 내 처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하고 서운했습니다.
다시 이런 일화를 떠올리게 한 유튜브로 돌아가면, 금전을 빌려주고 안 빌려주고는 각자의 사정과 판단에 의해서 할 행위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유튜브 영상이 매우 불편했습니다. 마치 지인에게 갑자기 요청해 돈을 빌리지 못하면 인생을 실패한 것 마냥 묘사했거든요. 너무 폭력적이고 매우 단편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기존 금융권을 알아보지도 않고 지인에게 손을 벌리는 것 자체가 무례하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리고 금전거래를 하느니 못 받을 수도 있단 생각으로 한도를 정하고 빌려주지요. 과거 연구에 보면 보통 그 금액이 10만 원 정도라고 합니다. 물가가 상승해 요새는 더 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지금의 저는 평소 성실했고 저와 가까운 사이라면 100만 원 정도는 빌려줄 처지가 되었으니 스스로가 대견합니다.
저는 10년 전 100만 원을 빌리지 못했을 때 친구들을 원망하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S대 나와서 대기업 다니면서 그것도 없나? 나를 안 믿나? 감히 나를 뭐로 보고?'
아마 이랬다면 그 친구들 모두와 아직도 친하게 지내지 못했을 겁니다.
차라리 그 덕에 이런 방법도 있구나 라면서 금융지식을 얻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리 이야기했듯 망하면 아무도 나를 봐주지 않겠구나 하며 재정관리의 중요성도 깨달았죠.
돈 빌려달라고 요청하고서 안 빌려 주면 욕하는 거. 빌리고서는 언제 갚냐고 물어보면 화내고 당당한 거.
그게 더 우습지 않나요?
글을 쓰다 보니 말미에 갑자기 일화가 하나 더 생각이 났습니다.
사회생활 초기, 고등학교 동창이 갑자기 나이트를 가자는 겁니다 (요새도 있나요 나이트?)
고고 를 외치며 도착을 했는데, 갑자기 돈을 빌려달라는 친구..
아니 지금 술도 나오고 웨이터가 팁을 기다리는 마당에 돈도 안 가지고 나왔다고?
고등학교 동창이고 그 친구가 어느 정도 사는 친구인지도 알았으니 어쩔 수 없이 앞에 ATM에서 돈을 뽑아 빌려줬습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찜짐함은 있었죠. 왜냐면 당시의 저의 금전거래 기준은 10만 원이었으니까요.
25만 원.
그 친구가 가지고 있던 농구화 컬렉션에서 아무거나 한 켤레만 팔아도 모자라지 않을 돈이었습니다.
진짜로 농구화 팔거든 줄게, 엄마가 대신 줄 거야, 차일피일 미루더니 어느 날부터 연락이 안 되더군요.
'집안이 그 몇 달 사이 망했나? 아니면 죽었는데 나에게 부고가 안온 건가?' 여러 생각이 들더군요.
상대가 십년지기던 잘 사는 사람이던 금전거래에서 그런 건 전혀 중요치 않다는 교훈을 얻은 때였습니다.
그래서 돈을 안 빌려줬다고 혹은 못 빌렸다고 그 사람의 인생을 판단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당신은 지금 갑자기 친구가 전화가 와서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얼마나 선뜻 빌려주시겠습니까?
P.S : 당시 이태원 나이트를 같이 갔던, 여전히 4수를 하며 다른 대학을 가고파 했던 친구 B군아.
지금이라도 미안하다면 내가 물가상승률도 감안하지 않고 원금만 받으마.
아니면 그냥 잘 먹고 잘 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