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매월 조금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아래의 표는 내가 매월 구독하고 있는 서비스들이다.
구글 드라이브, 지피티만 합쳐도 벌써 5만원이 넘는다. 전기세, 수도세, 가스비를 다 합쳐도 10만원이 나올까 말까한데, 이런 미친놈들이 5만 8천원이나 받아 처먹는다. 아니, 심지어 지금 월구독 서비스 돈을 다 합쳐보면 10만원이다. 생활의 편리를 느끼려고 돈도 없는 내가 월 10만원을 따박따박 월세처럼 내고 있었다. 매번 반복적으로 들어오는 수익이 아무래도 회사 입장에선 매력적이라서 그러겠다. 매월 반복적으로 들어오는 매출. MRR? 맞다. 중요한 거 안다. 회사 입장에선 얼마나 안정적인가? 이탈만 막으면 당장 회사에 돈이 빠져나갈 일이 없다. 근데 이거 좀 이상하다. 가만히보면 좀 괘씸하다. 열심히 뭔가 합리적인 가격을 정해서 구독을 굴리는 것처럼 하지만, 그냥 인간의 망각을 활용해서 돈 버는거 아닌가? 나는 매월 14일, 17일, 20일마다 이런 저런 구독료가 빠져나간다. 까먹고 있던 나는 아 젠장 나 이거 구독했었구나‘ 하고 통장에서 와르르 돈이 빠져나가는 걸 보고서 운다. 그리고 멍청하게도 다시 그 서비스를 열심히 쓴다. 삥뜯기는 거 같다.
카드사가 등따시고 배부르게 사는 비결도 아마 이론상 이런 ‘매월’ 반복되는 ‘수익’에 있을 거라 생각한다.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사례는 아마 자동차랑 집. 억 단위의 산더미만한 돈을 대출받고 매달 이자를 낸다. 도저히 만질 수도 없는 액수를 잘게 쪼개서 갚으면 우리는 먹고 사는 데에 필요한 것들을 척척 소비하면서 살 수 있다. 은행과 카드사의 할부 구조 덕분에 우리는 비오는 날 비를 맞지 않는다. 혹은 예쁜 바퀴달린 자동차를 타고 A부터 B까지 빠르게 간다. 어떻게 보면 참 고맙고 유용하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해보면 좀… 족쇄같다. 하지만 괜찮다. 30년동안 갚으면 내 것이 된다. (감가상각은 없던 일로 하자)
반면에 구독은… 그냥 땅바닥에 돈을 버리는 것과 비슷하다. 구독은 소유와 거리가 멀다. 구독은 철저히 소비를 위한 구매 방식이다. 그럼 이제 생각해보자. 난 왜 소유할 수도 없는 것들을 쓰려고 10만원씩 쳐 쓰고 있지?
억울해서 계산해봤다. 아래는 구독한 것들에 대한 누적추산액이다.
<넷플릭스> 4년, 약 16만 원 :
나눠서 써서 금액이 크지 않다. 나쁘지 않다. 극장가서 1만 원짜리 영화를 16편 봤다고 쳐도? 것보다 훨씬 많이 봤다. 이 돈은 길에 버린 느낌이 아니다. 내 머릿속에 지식, 재미로 저장되어 잘 소화되었다. 앞으로도 넙죽넙죽기꺼이 상납하도록 하겠다.
<쿠팡> 5년, 약 30만원 :
나쁘지 않다. 쿠팡으로 아낀 배송비를 모으면 딱 저 정도 되려나. 더 많을 것 같다. 그리고 더욱이나 쿠팡 덕분에 수 많은 난관을 헤쳐나갔다. 당장 내일 필요한 것들을 최저가로 배송받기. 해외 물건 빠르게 구해오기 등등 쿠팡은 대학생활에 있어서, 삶에 있어서 참 기특한 존재였다. 전혀 아깝지 않았다.
<GPT> 2년, 약 60만 원 :
비싸긴 하다. 그러나, 60만원으로 내가 만들어 낸 것들을 생각해보면 진짜 싸다. GPT 덕분에 파이썬도 배웠다. 웹사이트도 만들었다. 이력서도 썼고, 포트폴리오도 만들었다. 앞으로 일 할 때 GPT가 없으면 내 IQ은 절반 이상으로 하락하며 지속적인 해고 압박에 시달리는 저능아 신세를 면치 못 할 것이다. 나는 GPT의 노예이며 앞으로도 충성을 다 할 것이다. 전혀 아깝지 않고 더 달라고 하면 냅다 줄 생각이다.
<유튜브> 10년, 약 100만원 :
이렇게 세상 고약한 서비스가 따로없다. 최악이다. 끔찍하다. 내 인생이 망한다면 유튜브 탓이다. 고등학교 때 내 기억이 맞다면 ‘유튜브 레드’라는 이름으로 구독을 처음 시작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빠짐어 없이 구독해왔다. 이유는 간단하다. 화면이 꺼져도 유튜브 화면을 보기 위함이었다. 근데 그게 그렇게까지 중요했냐고? 중요했다. 나는 유튜브 중독자이기 때문이다. 이 구독은 마약과 다름 없으며 사실상 삶을 좀먹는다는 표현까지 어울린다. 그렇다고 구독을 취소하냐? 아니다. 중독은 무섭다.
내 스크린타임을 공유하면 보는 사람들은 혀를 차며 ‘엠생이 따로 없네’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기꺼이 공개한다. 넷플릭스 시청 시간이 1시간은 족히 넘고 4시간 정도 되어 있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미 개이득이다. 집에서 영화 한 편만 보아도 이미 티켓값은 넘겼다는 기분이 든다. (내 스크린타임을 보고 문득 떠오른 두려움. 인스타그램이 갑자기 꼭지가 돌아 광고 수익이 아닌 사용할 때마다 구독료를 내면 어떻게 되는건가)
비즈니스를 두 가지로 나눠서 설명해보자. 물건을 사고 소유하고 쓰고 버리고 새로운 걸 사고. 먹을걸 사고 먹고 싸고 또 먹고. 지갑을 열어서 돈을 내고 무언가를 소유한다. share of wallet이다
새로운 영화를 보고 감상을 나누고 새로운 영화를 또 찾아보고. 노래를 듣고, 웹툰을 보고. 글을 읽고. 혹은 다른 사람의 일상을 훔쳐보고, 사람의 시간을 뺏은 다음에 어떻게든 돈을 번다. share of time이다.
거창한 개념은 아니고 컨설팅 분야나 경영진이 쓰는 실무 용어 정도로 알고 있다.(조사해야하나) 아무튼 박지웅 대표가 EO 채널에서 비즈니스 종류를 크게 나눠서 설명할 때 쓰길래 처음 알게됐다.
지출 여력이 낮은 ’타임 빌게이츠‘인 나는 시간 도둑들에게 꽤 많은 돈을 내고 있었다. 거의 월세처럼, 혹은 세금처럼. 이게 구독 서비스의 천재적 발상이라고 생각된다. 구독은 지불여력이 낮은 사람들에게도 저렴한 가격으로 고정적이고 안정적인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구조다. 그래서 그런가, 많은 창업자들이 SaaS를 출시하고 나면 냅다 구독으로 돈을 벌겠다고 선언하거나, 앞으로 그렇게 돈을 벌 거라고 광고하거나, 지금 그렇게 벌고 있다고 선전한다.
그런데 사실 이 발상에는 큰 함정이 있다. 준거가치의 유무이다. 내가 넷플릭스에 내는 돈이 아깝지 않은 이유는 CGV 티켓값보다 월등히 싸기 때문이다. 내가 와우회원권을 기꺼이 구독한 이유는 배송료가 붙어서 물건을 살 때 얼마나 손해를 봤는지에 대한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GPT에 기꺼이 돈을 쓰는 이유는 그 걸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금전적, 지적 혜택이 그 이상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언급한 구독 서비스들은 이전의 경험을 토대로 어떤 혜택을 주는지가 명확하다. 이걸 준거가치라고 표현하겠다. 지난 지출에 대한 기억을 통해 내가 할 행동이 얼마의 값어치를 하는지 대략적인 감이 선다. 백덤블링을 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온라인 녹화 강의 100편을 매월 5000원에 구독할 수 있다고 한다면, 나는 몽둥이로 뚜들겨맞지 않는 이상 절대 사지 않는다. 1000원이든, 100원이든 무가치한 것들에는 아무리 저렴하다 한들 절대로 구독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구독하는 것들은 보통 우리가 이전에 매월 반복적으로 하는 행동들에서 느꼈던 불편을 해결해주거나, 더 저렴하게 해주고 있다. 월 판매량이 적다던가, 결제 직전까지 이어지는 고객이 적다던가, 수 많은 비즈니스 문제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요술방망이마냥 구독으로 바꾸면 해결된다는 발상이 자주 발견되는 것 같다. 특히 교내 창업 관련 수업이나 공모전에 제출된 기획안에서 왕왕 본 적이 있다. 나아가, 새로 런칭한 서비스라고 해서 ‘한 번 써볼까’하고 들어갔다가 구독 요금제가 떠있는 페이지를 보고선 이런 감상을 느낀 적이 있다. 세상에는 없던 완전 새로운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작은 불편이지만 해소됐을 때 그 쾌감이 큰 것들은 있는 것 같다. 큰 불편이지만 해소될 필요가 없는 것들도 있다. 반대로 초콜릿이나 비타민처럼 해결이 아니라 삶의 +를 만들어주는 것들도 있다. 구독 서비스를 고민하고 있다면 준거가치가 무엇인지 한 번 고민해보면 좋겠다. 특히 그 서비스가 share of time이라면, 더더욱이 깊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매달 한 사람의 시간을 뺏고 있는 서비스는 한 사람이 밥을 먹거나, 사랑하는 이와 대화하거나, 좋은 것을 볼 시간을 포기하고 그 서비스를 써야할 명분이 있는 서비스이니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