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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마이 8시간전

재능은 그릇에 의해 결정된다.

그릇이 크다, 작다는 말이 아니다.

당신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다. 그리고 지금 감히 예상해보건데, 당신은 두 눈으로 본인의 두 어깨를 제대로 볼 수 없다. 시선을 아래, 좌우로 내려 움직이지 않는 이상 정면을 보고 있는 우리의 시야는 그 정도 범위이다.그리고 또, 당신의 머리 위에 있는 천장이 잘 보이진 않을 것이다. 당연하다. 정면을 보고 있는 인간의 시야는 딱 그 정도 범위에서 보여진다. 이제 상상해보자. 당신이 보고 있는 그 시야의 범위 안에 아무런 것도 보이지 않고, 새빨간 색만 보인다고 생각해보자. 공간도 깊이도 넓이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단지 빨간색만 시야 안에 들어온다고 생각해보자. 사실 상상이 잘 안 갈 것이다. 눈을 감을 때 시야가 완전히 검은색으로 변할 때를 상상해보면 어떠한가? 상하좌우 어디를 둘러봐도 검은색뿐일 것이다. 그런 느낌을 상상해보면 좋겠다.


Barnett Newman, <Vir Heroicus Sublimis>, 1950-51


바넷 뉴맨의 <숭고한 영웅>은 그걸 경험하게 해준다. 이 그림의 실제 사이즈는 세로로 2미터 40센치, 가로로 5미터 42센치미터다. 이 그림 앞에 실제로 서면, 그림이 워낙 크기 때문에 우리의 시야는 상하좌우가 온통 새빨간 색으로 가로막힌다. 그렇게 온통 빨간색을 온전히 경험하고나서, 조금 뒤로 천천히 물러서면, 작가는 좌우에 얇은 선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공간감이 이 정도 됩니다' 라고 알려준다.

이 그림을 모니터로만 봐서는 절대 그 경험이 어떤 느낌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세로 2미터, 가로 5미터 크기의 빨간색 그림 앞에서서 온 시야가 새빨개진 경험을 해보고 나면, '내가 살면서 시야의 끝부터 끝까지 빨간색으로 물들어본 적이 없었구나' 하면서 감탄하게 된다. 이런 경험을 하게 해주는 그림이었구나. 그런 미적인 가치가 있구나. 라고 생각하게 된다. 


좋은 아이디어는 좋은 그릇을 만나야 한다. 만약 바넷 뉴맨의 작품을 재현하고 싶어서 스마트폰에 빨간색 화면을 띄우고, 눈 앞에 가까이 댔다고 쳐보자. 매체를 잘못 선택해도 단단히 잘못 선택했다. 그 경험은 그림에 완전히 매몰되면서 공간감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해야만 할 수 있다. 


멋진 재능이 예쁜 그릇에 담길 때의 감동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한 친구가 있다. 고등학교 때부터 애니를 좋아했고, 음악을 좋아했고, 영화를 좋아했으며, 영상찍기, 사진 찍기를 좋아했다. 친구는 본인 적성에 맞게 미디어를 총체적으로 다루는 학과를 잘 찾아 입학했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흘러 군대를 다녀온 친구는, 전역하고 나서 사진이라는 매체에 꽂혔다. 그리고 잘 다니던 학교를 자퇴하고, 입시를 치뤄 서울예대 사진학과에 신입생으로 입학했다. 그리고 또 시간이 금새 흘러 친구는 졸업을 앞뒀다. 금새 8년이 지났다.

    그리고 여름 즈음부터 친구는 겨울에 열릴 졸업 전시를 준비했다. 아무 맥락 없는 여름 저녁에, 우연치 않게 둘은 공덕역에서 만나게 되었고, 그 우연한 만남을 기념하기 위해 둘은 맥주 한 잔 마시며 답 없는 신세한탄을 했다. 우리는 왜 나이를 먹어도 멍청하고 정신이 없는걸까, 왜 공부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빡대가리인걸까, 왜 사랑 하나 제대로 못 하는 걸까, 나중에 굶어 죽지는 않을까 등등을 두서 없이 쏟아냈다. 그래서인지, 무슨 대화를 했는지 정확한 내용도 기억이 안 난다. 그냥 청춘이 할 수 있는 온갖 고민을 뒤죽박죽 토해냈다. 그리고 가게 앞에 주저 앉아서 5분 단위로 담배를 입에 꺼내물면서 '그러게', '모르겠다', '몰라', '그런가' 를 연기와 함께 내뱉었다. 혼란스럽고 우울했으며 착찹했고 씁쓸했다. '누군가는 청춘이라 부르던 그 종이 위에서 나는 얼마나 서럽게 울었던가'라는 도재명의 <토성의 영향 아래> 가사 일부가 떠오르는 날이었다. 

    시간은 또 쏜살같이 흘렀고, 겨울이 되어 친구의 졸업전시 소식이 들렸다. 시간 맞춰 가면 전시장에서 친구의 퍼포먼스를 볼 수 있다고 했다. 무얼 준비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일단 시간에 맞춰서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부리나케 전시장으로 뛰어갔다. 사진학과를 졸업했으니 친구가 찍은 사진이 걸려있을 것이고, 친구가 세상에 내놓은 기가막힌 결과물을 싸구려 아이폰으로 다시 찍어서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업로드 하고, 몇 년간 공부한 친구에게 수고했다고 한마디 하는. 그런 정도를 상상하고 갔다.

    내 예상은 완전히 틀렸다. 친구의 작품은 벽에 걸려있지 않았다. 1층, 2층 모든 전시장을 찾아봤지만 친구의 작품은 걸려있지 않았다. 전시장에서 잠시 사라진 친구에게 전화해 '도대체 너 사진은 어딨는거야' 라고 물어보자, 친구는 지하로 내려오라고 말했다. 그렇게 의문을 잔뜩 품은 채 어두컴컴한 공간에 내려가서야 친구의 작품을 볼 수 있었다. 

    친구는 서울의 풍경을 본인의 눈으로 하나 하나 주워담았다. 어두침침한 길목에 서서 수다 떠는 정체 모를 아저씨들, 인도인지 차도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길을 걷는 인파와 그 사이를 뚫고 당당하게 지나가는 자동차, 광화문 광장에서 웃는 얼굴로 알 수 없는 춤을 추는 알 수 없이 행복한 사람들, 사람이 너무 많아 이리저리 비집어야 간신히 두 발로 설 수 있는 만원 지하철의 풍경을 그의 시선으로 잘라내고, 색을 입히고, 잘라내고, 붙이고, 되돌리고, 빨리 감고, 정지시켜서 그의 풍경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건 사진이 아니었다. 영상이었다. 

    한 술 더 떴다. 대학생 친구들의 인터뷰 내용이 뒤죽박죽 순성 없이 실시간으로 믹싱되어, 배경음악으로 재생됐다. '서울은', '천안에서 자취하는데', '인턴으로 데리고 일을 시키고', '졸업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돈이 많으면', '사람들이 좋아하는', '지방으로 가던지', '꼭 뭔가 얻어야할 것만 같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안정적인 생활을 해야만' 같은 문장들이 허공에 날아다녔다. 다르게 말하면, 도시에서 사는 청춘이 느끼는 불안들이 두서 없이 난도질 당한 채로 허공에서 떠돌았다.

    이 작품의 주인인 내 친구는 그 가운데에 서서, 그 혼란을 연주했다. 디제잉 기계를 가져와 단어들을 허공에 흩뿌렸고, 그 뒤에서는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 친구 눈으로 담은 풍경들을 뒤죽박죽 재생했다. 모든 것들은 실시간으로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도록 설계되었다.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여름 밤에 친구와 대화했던 그 순간이 다시 떠올랐다. 줄담배를 피던 그 저녁밤 같은 작업이었다. 친구는 본인이 겪은 그 혼란과 불안과 흔들림을 하나씩 붙잡고, 요리할 수 있는 재료로 바꿔냈다. 그리고 그 재료들을 잘 뒤섞어, 완성된 요리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여기가 가장 중요한 지점인데, 그 요리를 담기에 가장 적절한 그릇을 찾아서 세상에 내놓았다. 그 친구가 만든 요리를 담으려고 선택한 그릇은 사진이 아니었다. 영상과 음악이었다.

    참 정확하다고 생각했다. 혼란을 설명하는데 적절한 매체였다. 적절한 음악이었다. 적절한 영상이었다. 적절한 공간이었다. 조금 과장 보태서, 정확한 매체였다. 

    백현진 작가가 어느 인터뷰에서 했던 말을 기억한다. '글로 쓸 수 있는 걸 그림으로 그리지 말고, 그림으로 그릴 수 있는걸 영상으로 찍지 말고, 영상으로 찍을 수 있는걸 사진으로 찍지 말라' 같은 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친구의 작품은 그 문장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청춘의 혼란을 사진으로만 담기엔 너무 무겁고, 꿈틀거리고, 역한 맛이나고, 악취가 나는 그런 것이었다. 사진학과 졸업전시기에 사진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스스로가 참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친구가 다뤘던 주제는 사진이라는 그릇에 담으면 안 되는 것이었는데. 

    영상과 음악을 트는 친구의 모습을 보며, 나는 살면서 한 번도 청춘이 겪는 혼란이라는 것을 시청각적으로 세련되게 경험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생각해봤다. 앞서 설명했던 <숭고한 영웅>을 보며 느꼈던 어떤 감상과도 맞닿아있다. 감각을 건드리는 작품이 주는 그런 새롭고 놀라운 경험을 했다. 내가 겪었던, 친구가 겪었던, 모든 청춘 겼었던 혼란과 불안을 시청각적으로 경험해보는 첫 순간이었다. 약 10분 정도의 시간동안의 영상과 음악을 듣고 나선 소리를 질렀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친구는 본인의 역량을 쏟아내, 정확한 그릇에 담는 데에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맞는 그릇에 잘 담아야 한다. 

소위 그릇이 큰 사람, 그릇이 작은 사람 같은 시시콜콜한 어른들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선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싶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수 많은 강점, 역량, 재능을 펼치려면 그 것을 펼치기 위한 환경과 매체와 분야를 잘 찾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릇이다. 라면을 만든 다음에 평평한 접시에 부으면 그 뜨거운 국물이 바닥에 다 쏟아진다. 얇디 얇은 칵테일 잔에 쏟아 부으면 젓가락도 안 들어가 먹을 수가 없다. 잘 만든 라면은, 먹기 좋은 라면 그릇에, 없으면 국 그릇에 담아서 내놓아야 한다.

    사람의 역량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본인이 가진 역량을 펼치기 위한 최적의 그릇을 찾아야 한다. 누군가는 일찍부터 그 그릇을 찾아 본인의 역량을 쏟아붓기도 한다. 누군가는 평생을 그 그릇을 찾아헤맨다. 누군가는 본인이 그릇에 쏟아 부을 것이 없다고 착각하고, 그릇을 찾을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그릇을 찾든, 쏟아부을 것을 찾든간에 중요한건 일단 움직여야 한다. 일단 움직여야 바닥에 쏟아진 라면이라도 줏어 먹고 굶어죽지 않는다. 라면을 종이컵에 담아봐야 큰 그릇이 필요한 걸 안다. 아니, 애초에 라면을 끓여봐야 요리라는 게 뭔지 대충 안다. 그러다가 김치볶음밥도 해보고, 볶음밥을 담을 평평한 그릇도 찾는다. 삶은 이렇게 완성되는 거 아닌가 싶다. 일단 움직여야 그릇이든 요리든 찾을 수 있다.

    나는 친구가 원하는 요리를 잘 만들어서 그릇을 찾아 예쁘게 담는 모습을 관람했다. 뛰어났고, 훌륭했고, 감동적이었다. 왜 그런진 모르겠지만 오히려 내가 힘을 얻었다.


재능은 그릇이 있어야 빛난다.

우린 영재, 천재, 재능 같은 단어에 너무 민감한 것 같다. 처음부터 뛰어난 사람들을 칭송하는 데 익숙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난 처음부터 뛰어난 사람들보다, 악으로 깡으로 재능을 찾아낸 사람들을 더 좋아한다. 사람 냄새도 나고, 그런 사람들이 열심히 무언가를 만들어내면 알 수 없는 이유로 보석같이 빛난다. 땀 냄새도 나고 지저분하기도 하지만, 그게 그 맛이다. 어물쩍, 대충 그럴 듯 하게 멋있게 만든 것들은 향기도 나고 깨끗하지만, 빛은 안 난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장난감 보석같다. 나는 악으로 깡으로 재능을 찾아낸 사람들을 애정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한테서 풍기는 특유의 향을 좋아한다. 그릇을 찾으려고 돌아다니다보면 필연적으로 날 수 밖에 없는 그 땀 냄새가 있다. 

    땀 냄새가 진동하는 청춘을 보내자. 아니, 모르겠다. 그냥 담배 하나 꺼내문다. 그리고 친구의 작업을 다시 생각하며, 그 풍경을 다시 떠올린다. '진짜 해냈네' 생각하고 픽 웃는다.



이 글을 졸업하는데 수고한 이상문에게 바친다.

https://www.instagram.com/leeisgoingto/

@leeisgoing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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