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정적이 흐르는 동안 아린은 속이 다 후련한 모습으로 준아의 반응을 살핀다.
준아는 '그게 뭐 어때서'라는 반응으로 쿨하게 말을 이었다.
“윤아린이라고 했지. 선배라서 말 놓는 게 아니라 오늘부터 나하고 친구 하자! 아린이도 말 편하게 해. 나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친구를 잃어서.. 라기보다, 난 여기 옥상에 가끔 오는데, 올 때마다 생각했거든. 위로하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데려오겠다고. 그렇잖아. 친구라는 게 별 거 있나. 힘들 때 서로 위로해 주는 거잖아.”
'이 사람, 괜히 끌린 게 아니었나.' 아린은 준아의 예상 밖의 반응에 놀랐으나 친구가 되자는 말에 조금 안도하는 듯했다. 준아는 아린의 걱정스러운 표정이 사라지자 더 밝게 말했다.
“그리고 비밀 하나 알려줄까. 우리 학교 총장, 아니 너희 아빠 나 그냥 아는 척했던 거야. 선배들 통해 이름만 들었던 거지. 실제로 뵌 적은 한 번도 없어. 하하.”
아린은 기가 막혀서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대학에서 가장 악명이 높은 아빠를 잘 모르다니.'
준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밤하늘을 쳐다봤다. 그리고 팔을 뻗어 하늘 중앙을 가리켰다.
“저기 내 손이 가리키는 곳을 봐 봐. 서울은 어디나 조명이 가득해서 별이 잘 안 보이잖아. 여기는 가로등보다 높은 위치이고 주위에 고층 건물들도 없어서 유일하게 별을 크게 볼 수 있는 곳이야.”
아린의 눈에 흰 빛으로 빛나는 별 하나가 들어왔다. 낯이 익었다. 언젠가, 어디서 인가 본 적이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응.. 예쁘네요.. 저 별은 유난히 밝네요. 자꾸 쳐다보고 싶네요. 더 오래..”
그녀의 예쁜 두 눈망울이 어둠 속에서 빛이 났다. 이마의 곡선을 따라 눈빛, 콧날, 윗입술의 어우러짐이 그 누구보다 아름다웠다.
“오래 쳐다보면 저 별 옆에 다른 별들이 보여. 자세히 보면 더 예쁘지.”
준아의 중저음의 목소리를 따라 그녀는 밤하늘에 보이는 별들에 온 신경을 다 쏟고 있는 듯 보였다. 행복한 모습이었다.
그러다 무언가 궁금한 게 떠올랐는지 준아를 보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타로는 언제 처음 배웠어요? 누구한테 전수받은 거예요? 아니면 혼자 독학한 거예요?”
준아는 아린의 물음에 잠시 슬픈 표정을 짓다 다시 활짝 웃으면서 답했다.
“어릴 때 할아버지한테 배웠어.”
1991년 3월 15일 토요일, 해가 지는 7시경. 국민학생 1학년 준아는 아버지가 집에 오기만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밤 아버지가 비디오 기기를 사 왔다. 토요 명화와 주말의 명화만 기다리던 준아에게 빅뉴스였다. 때 마침 비디오 대여가 아이스크림보다 쌌던 시기로 준아는 한 편에 200원씩 녹색, 파란색, 노란색 비디오테이프를 매일 빌려 볼 수 있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세상의 경험과 시야를 간접 경험하게 해 주었고 준아가 점차 어른스러운 아이로 성장하게 도왔다.
준아의 아버지는 큰 아들로 할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 할아버지는 맞벌이 부부가 집에 없는 동안 어린아이였던 준아의 말벗이 돼주었다.
준아가 6학년이던 여름 옆집 윤기네 할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준아네 할아버지와 노인회관 둘도 없는 의형제였기에 두 집 모두 무거운 마음으로 장례식을 마주해야 했다.
그날 밤, 윤기 아빠가 엉-엉- 소리 내어 서럽게 울었다. 준아는 어른이 저렇게까지 슬퍼하며 우는 모습이 처음이라 낯선 느낌을 받았다. 그러다 보니 어떤 감정일까 궁금한 단계까지 갔다.
그게 과한 호기심이었을까. 준아는 윤기 아버지와 마침 눈을 마주치게 된 순간 그의 눈웃음을 보았고 자기도 모르게 그 사람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있었다. 준아의 섬세하고 예민한 감각 때문이었을까. 침을 꿀꺽 삼키고 등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처음에는 너무 이상한 기분이라서 믿을 수 없었다. 그러다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점차 화가 치밀어 오기 시작했다. 모두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아저씨가-" 소리치려는 순간 누군가 오른쪽 어깨를 낚아챘다.
"아!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윤기 아버지를 노려보는 준아의 눈빛에서 무언가를 눈치채었고 그때부터 준아의 동선을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억울하다는 준아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엄하게 꾸짖었다.
"거, 가만히 있거라. 내가 다 생각이 있으니."
며칠 뒤, 윤기네 집으로 경찰차가 들이닥쳤다. 윤기 아버지가 형사들에게 끌려가는 장면은 어린 준아에게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그때 할아버지는 시끄러운 상황이었음에도 말없이 지켜만 보았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자전거를 타고 시장으로 출발했다. 얼마 전 새로 오픈 한 수입 상가 앞에 자전거를 정차하고 출입문을 힘껏 당겼다.
"어서 오슈. 할아버지, 어쩐 일 이슈. 어째 뭐 찾으시는 거라도 있으신 거유?"
"그.. 놀음하는 거 있잖여. 그림 막 그려있고."
주인은 고개를 흔들며 할아버지를 만류하는 눈치였다.
"아 일 없슈. 요즘 단속이 을마나 심한데유.
아.. 그리케 쳐다보신다고 읍는게 뭐 갑자기로 생기 나나. 읇당께로."
"아! 꼬옥 필요해서 그려. 우리 손자 놈 땜시.."
자전거를 타고 곧장 집으로 온 할아버지는 킁- 코를 세게 한 번 푸시고 집으로 들어왔다. 안방에 양반 다리로 자리를 잡고 친근한 목소리로 손자를 불러 앉혔다.
"준아야, 이리 가까이 앉아 봐라."
준아는 할아버지를 따라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았다.
"사람의 속 마음은 그 사람 것이고 그 사람이 밖으로 내놓을 때까지 그 속에 있는 게 맞다. 그걸 억지로 꺼내려고 하는 게 협박하고 고문을 하는 기다. 그건 나쁜 기다. 무슨 야긴지 알제?"
"예.."
할아버지는 손자를 흐뭇하게 바라보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장롱에서 진붉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 준아 앞에 놓으며 말했다.
"정 필요할 땐 이걸로 꺼내도 된다. 남을 속이라는 게 아니여. 고것이야말로 스니의 거짓말인겨."
준아는 처음 보는 독특한 색의 주머니가 신비로워 눈으로만 쳐다보다 양손으로 묶인 끈을 풀었다. 푸른 빛깔이 보였다.
그리고 왼손을 넣어 꺼내 그림을 보았다.
전 세계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가운데 있는 자를 동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림이었다.
준아가 잡은 첫 타로 카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