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우리는
"그는 누구입니까?"라고 묻는다.
또는 "어떤 사람입니까?"를 묻는다.
인간의 가치와 의미는
그 개인이게 달여 있다는 증거이다.
어떤 부모가 되기를 원하는가.
이렇게 질문하지 않는 부모가 있겠는가.
한 번도 묻지 않았다면
그것은 부모의 자격을 잃은 것이다.
그러나 그 물음을 지니게 되면
반드시 어떤 신념과 방법을 얻는다.
<100세 철학자의 사랑수업. 김형석>
지금껏 나는 답을 하며 살아왔다.
어릴 적엔 부모의 말에 맞추었고,
학교에선 정답을 찾아냈으며,
회사에선 지시를 따랐다.
부모가 된 뒤에는
아이들의 끝없는 호기심을
받아내느라 바빴다.
답이 길인 줄 알았다.
이미 누군가가 그어 놓은 선 위를
잘 따라가면 된다고 믿었다.
학교가 말하는 것이 정답이었고
사회를 따르는 것이
올바른 삶이라고 여겼다.
다들 그랬으니까.
우린 만나면 답을 말하느라 바빴다.
그 위에 불평과 불만을 덧붙였다.
어느 순간부터 자꾸 걸음이 느려졌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어떤 부모가 되고 싶은가.
질문하는 법을 잊고 살았던 것 같다.
궁금해하지 않는 게 익숙해진 삶이었다.
답을 만들어내기도 벅찼으니까.
호기심을 가질 여유조차 없었다고 말하면
조금은 변명이 될까.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귀찮을 만큼 말을 걸던 아이들이
점점 말을 줄여간다.
"안 궁금해."
"몰라도 돼."
부모가 된 나도
아이들에게 건네는 말은 늘 비슷하다.
"오늘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았어?"
"학교 수업은 어땠어?"
"응."
"괜찮았어."
아이들의 대답도 한결같다.
그 짧은 답 뒤에 나는 더 묻지 않는다.
결혼하기 전에도 그랬다.
'이렇게 살아야지' 하고
남들과 비슷한 그림을 그렸을 뿐.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어떤 부모가 되고 싶은지
나에게 묻지는 않았다.
새벽 달리기를 하다 보면
이상하리만큼 질문만 떠올랐다.
처음에 '왜 그랬을까?' 하는 질타였다.
그다음엔 '어떻게 할까?'로 이어졌다.
끊임없이 질문이 밀려 들어왔다.
그땐 정말 몰라서 그랬다.
숨이 가빠질수록
머릿속은 오히려 또렷해졌다.
이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생각이 끝없이 이어졌다.
책을 읽고, 글을 쓰다 보니
결론보다 멈추는 시간이 길어졌다.
나를 향한 온갖 물음들.
나는 이제 질문투성이가 되었다.
마침표는 여전히 많지 않다.
이제는 쉽게 단정하지 않는다.
모르겠다는 상태로
잠시 서 있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도 불안하지 않다.
강풍이 불 듯 요동치던
내 안의 파도가 조금은 잔잔해졌다.
답을 급히 찾지 않게 되었고,
모른 채로
잠시 머무를 수 있게 되었다.
아직 확실한 신념을 말할 수는 없지만,
이 질문들이 언젠가는
나만의 기준이 될지도 모른다는
느낌은 있다.
앞으로도 나는
모든 시간을 물음표로 채우려 한다.
마침표가 없어도 상관없다.
질문을 잃지 않는 한,
나는 길을 잃지 않을 거라는
확신 있으니까.
오늘은 굳이 서둘러
결론을 내리지 않아도 되는
하루였으면 합니다.
마침표를 늦추는 연습,
오늘 하루만 해보는 건 어떨까요.
당신의 그 마음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