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까지 오는데 오래 걸렸다, 분노를 지나

by 사랑주니


분노를 지나, 다른 세계로.


나를 가장 크게 바꾼 건

예민함도 아니고, 몸도 아니었다.

분노였다.


정확히 말하면, 치욕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분이 있었다.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내 안에서는 아직 선명한 존재.

나는 그분 앞에서 완전히 무너졌다.


자존심도, 확신도,

내가 믿고 있던 나 자신도.

그날 이후 나는 분노로 살았다.


잠들어도 화가 났고,

눈을 떠도 화가 나 있었다.


왜 나였을까.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그 질문만 머릿속을 채웠다.


그때부터 몸이 더 망가졌다.

잠은 점점 얕아졌고,

속은 늘 타들어 갔고,

두통은 내 머리를 무참히 깨부셨다.


이제 와서 보니 몸은 정직했다.

내가 버티고 있던 걸

먼저 알아차렸던 거다.


어느 날,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분노를 붙잡고 가면

나는 끝까지 여기에 묶이겠구나.


그 생각이 들었을 때

이미 몸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있었다.


놓기 시작했다.

마음이 착해져서가 아니었다.

이 몸으로는 더는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분노를 내려놓자 세상이 달라 보였다.

아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달라졌다.




지금의 나는 나를 돌보는 사람이다.


겨울엔 핫팩과 장갑, 목도기가 기본이고

전기 방석은 가방과 세트다.


도서관에도 방석을 들고 간다.

엉덩이에 살이 없어서

어디든 앉을 수 있도록.


지난 여름 밤은

선풍기나 에어컨 없이 보냈다.

조용해서 오히려 더 좋았다.


전에는 신경외과와 한의원을

순회하듯 다녔다.

지금은 과감히 도수치료를 받는다.

몸을 돌보는 일을 미루지 않는다.


머릿속을 채우던 번뇌는 이제 없다.

타인을 향한 비난도 남아있지 않다.


나를 분노에 쌓이게 했던 그분을 향해

이제는 고맙다는 말이 나온다.


그 치욕 덕분에 나는

다른 세계로 왔으니까.


이 세계는 대단한 곳이 아니다.

아프면 참지 않고,

불편하면 조정하고,

평화로운 밤을 선택할 수 있는 삶.


세상을 바꾼 게 아니다.


나에게 맞게

세상을 다루는 법을 알게 된 자리.


지금의 나는 나에게 맞게

세상을 다루는 법을

아는 자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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