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에서〔박경리 토지 완독 챌린지〕26일차

by 사랑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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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 위에 아픔을 덧대고 일어서서라도 치수에게는 어머니였어야 했던 자기 자신을 깨달은 것이다. 산산조각이 난 것은 저울대에 실렸던 무게의 변동 탓이 아니었다. 그것은 회한 때문이었다. 공포 없이 생각할 수 없는 치죄자(治罪者)로서의 최치수, 그는 아들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 도현의 고초를 겪는 망모의 구원을 위해 석가에게 법을 물었던 목련존자(目連尊者)일 수 없는, 심판장의 형리로 그 어미 스스로가 만들었던 것이다. 목련존자의 악모 이상의 악모임을 윤씨부인은 깨달은 것이다.


<박경리 토지. 3편 9장 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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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겨지는 시체를 따라 사람들이 방 앞으로 몰릴 때 봉기는 죗세기를 벗어던지고 원숭이같이 나무를 타고 올라가서 목맨 새끼줄을 걷어 차고 차근 감아 손목에 끼고 난 다음 나뭇가지를 휘어잡으며 톡톡 분지른다. 그 소리에 돌아본 몇몇 아낙들이 머쓱해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잠시였다. 어느새 나무 밑으로 몰려들었다. 바우랑 불들이, 마을의 젊은 치들도 덤비듯이 쫓아왔다. 모두 엉겨붙어 나뭇가지를 꺾어 간수하기에 바쁘다. 순식간에 나무는 한 개의 기둥이 되고 말았다.

중략...

“이기이 만병에 다 좋다 카지만은 그 중에서도 하늘병(간질)에는 떨어지게 든다 카더마.”

몽뚝하게 된 나무를 올려다보며 봉기는 의기양양해서 말했다.


<박경리 토지. 3편 살인자의 아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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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 9장에서 윤씨부인이 깨닫는 것은

아들의 죽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었는가

하는 사실이다.


“아픔 위에 아픔을 덧대고 일어서서라도

치수에게는 어머니였어야 했던 자기 자신.”


이 문장은 모성의 숭고함이 아니라

회한으로 만들어진

책임의 얼굴을 보여준다.


윤씨부인은 목련존자가 될 수 없었고,

아들을 구원하는 어머니가 아니다.

스스로 형리를 만들어낸 심판자가 된다.


여기서 비극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의 축적에서 생겨난다.



반면 10장에서 함안댁 자살 장면은

비극이 어떻게 공동체 안에서

가볍게 소비되는지를 드러낸다.


시체가 옮겨지는 와중에도

사람들은 약효를 믿고

목맨 나무를 부러뜨리기 위해 몰려든다.


슬픔은 잠시 머쓱한 표정으로 스쳐갈 뿐,

곧 생활의 논리와 미신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이기이 만병에 다 좋다 카지만은…”


이 말은 잔인해서, 라기보다는

자연스러워서 무섭다.


죽음조차 생존의 재료로 환원되는 세계,

비극은 애도의 대상에서

쓸모를 따지는 대상이 된다.



윤씨부인의 회한이

내면에서 무너지는 비극이라면,

함안댁 자살의 장면은

비극이 바깥에서 마모되는 풍경이다.


이 장면에서

나는 참......

정적 상태였다.



토지는 누구도 직접 단죄하지 않는다.

다만 어떤 사람은 고통 앞에서

자신을 형리로 만들고,

어떤 사람들은 타인의 죽음을

생활의 일부로 편입시킨다는 사실을

끝까지 보여줄 뿐이다.


이 소설은 여전히 불편하다.


비극이 특별한 사건 보다는

사람들의 태도 속에서

계속 재생산된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페이지를

멈추는 것이 어렵다.

계속 나를 잡아 끈다.


하루에 20권을

다 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어떤 이야기로

고구마 백개를 먹은 느낌이 들게 할런지

그것 조차 두근거리며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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