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오기 전에 달이 떴다. 사라져야 할 밝음과 나타난 달빛이 서로 겨루듯 잠시 사방은 엷은 회갈색으로 흐리더니 여광(餘光)은 아주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달은 산허리에서 솟아올랐다. 보름달은 은가루 같은 보송한 빛을 뿌린다. 밤이 깊어지면서 은가루는 물기를 머금기 시작했고 숲이 야기(夜氣)에 식어갔을 때 푸르름을 뽐내며 달빛은 출렁이는 것이었다. 산사 뜨락의 도라지꽃 달맞이꽃, 창백한 꽃들은 애잔하게 고개를 쳐들며 혹은 엷게 스치는 바람에 흔들리고 나무그림자도 흔들리고 개울물 흐르는 소리, 부엉이 울음이 들려온다. 처창(悽愴)한 적막은 저승일까 이승일까. 절간 행랑 뒷마루에 걸터앉은 월선은 밤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가 막히는 밤이구나. 사람이라고는 어느 구석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것만 같다. 무섭다. 낮에 들끓던 그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 갔이고? 어디 가기는 가야? 모두 이녁 집으로 돌아갔겠지. 날짐승도 해가 지믄 제 둥우리로 찾아가고 산짐승도 제 구멍으로 들어가는데 나만 갈 곳이 없네. 내가 사는 집 그기 어디 사람우 사는 집이건데? 허깨비들, 음 그래 허깨비들이 사는 집일 기다. 나도 허깨빈지 모르겠다……
<박경리 토지. 5편 1장 황천의 삼도천>
5편 1장에서는
백중날을 맞아 월선이 절에
제사를 지내러 갔다.
해가 떨어지고
숲에서 시작한 어둠이
절간 뜨락으로 밀려온다.
달빛은 은가루처럼 뿌려지지만
위로가 되지 않는다.
처창한 적막이
저승인지 이승인지 묻는 순간
아름다움은 곧장 공포로 기운다.
월선은 밤을 바라보다가 생각한다.
“기가 막히는 밤이구나.”
사람이라고는 어느 구석에서도
찾기 어려울 것 같아 무섭다.
낮에 들끓던 사람들은
모두 제 집으로 돌아갔을 텐데
자신만 갈 곳이 없다고 느낀다.
여기서 고독은 외로움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자리에서 밀려났다는
감각이다.
월선은 자신을
허깨비 쪽으로 밀어놓는다.
사람으로 두면 더 아프니까.
지옥은 불길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갈 곳이 없는 밤에서 시작된다.
용이와 월선이.
묘하게 생기는 간극을 느끼는 그녀.
같이 있고 싶으나 불안하고
떨어지고 싶으나 애달프다.
월선을 용이 곁에 붙잡아 둔 것이
처음에는 사랑이었을지 몰라도,
그 다음을 견디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