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거 봐봐.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대.”
“어. 어.”
“엄마, 보기는 하는 거야?”
“잠깐만. 지금 글 쓰는 중이라 이것만 마저 하고.”
“엄마,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데…”
“응, 응.”
“엄마, 내 말 듣기는 하는 거야?”
“지금 글 마무리해야 하는데 이미지 결정을 못 해서 발행을 못 누르고 있어. 잠깐만.”
“엄마, 나 지금 배고파.”
“벌써? 아직 다섯 시도 안 됐어. 조금 이따 밥 먹으면 안 될까?”
“지금 먹고 싶어.”
“아… 지금 댓글 쓰는 중인데 이것만 얼른 끝낼게. 잠시만.”
글쓰기는 내게 기쁨이다.
문장에 맞는 이미지를 고를 때도 즐겁고, 댓글로 마음을 주고받는 시간도 내게는 소중하다. 그 시간을 붙들고 있으면 몰입이 된다. 손을 떼고 싶지 않을 만큼.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정해둔 발행 시간에 글을 맞추는 일이 더 앞서기 시작했다. 새벽 글은 괜찮았지만, 그다음부터는 가족과 부딪히는 시간이 생겼다. 급히 글을 마무리해야 하는데 아이가 다가오면 짜증이 먼저 올라오기도 했다. 그럴 때면 글쓰기를 즐긴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즐거움보다 시간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나를 부르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 걸까?
그 순간을 내 시간이라고 밀어붙이자니 왠지 작은 불편함이 남았다. 정말 이게 지금 미뤄도 되는 일인가. 지금 더 먼저 봐야 하는 건 무엇인가.
고등학생 딸이 한창 사춘기던 중학생이던 시절에는 문을 닫고 방에서 잘 나오지 않았다. 그때는 사춘기로 자기 세계가 더 단단했다. 그런 아이가 지금은 같이 놀자고 자주 온다. 같이 보자고 하고, 같이 이야기하자고 하고, 별것 아닌 것도 들고 와서 보여준다.
그 시간이 오래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안다. 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지 대학을 선택하면 함께 사는 시간은 길어야 2년 남짓이다. 지금은 당연한 듯 지나가는 이 순간이, 나중에는 쉽게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더 중요한 건 무엇일까.
글을 끝내는 일일까. 아니면 지금 나를 찾은 아이의 얼굴을 보는 일일까.
내 시간도 필요하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시간도 분명 있어야 한다. 어쩌면 내 시간을 갖는다는 이유로 딸과 누릴 수 있는 시간을 뒤로 미뤘던 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자꾸 물었다.
무엇이 더 행복한지. 답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적어도 아이가 알고도 나를 부를 때는, 손을 멈추는 쪽으로 마음을 보냈다. 그건 글보다 아이가 더 귀해서만 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은 미뤄두면 같은 모양으로 다시 오지 않을테니까.
물론 아무 때나 다 멈출 수는 없다.
집중이 필요한 시간도 있다. 그럴 때는 미리 말해둔다. 함께 있을 시간과 각자 몰입할 시간을 미리 나누면, 덜 서운하고 덜 미루게 된다. 각자의 시간은 서로 간섭 없이 보낸다.
“딸, 엄마 지금 글 쓰려고 해. 지금 엄마랑 이야기하고 싶어?”
“아니. 지금은 괜찮아. 글 다 쓰면 불러줘.”
이렇게 먼저 물으면 덜 서운하다. 아이도 준비가 되고, 나도 마음이 덜 갈린다.
“딸, 엄마 지금 시간 되는데 나랑 놀자.”
“지금은 아니야. 나 혼자 있을래.”
“그래, 심심하면 엄마 불러.”
이럴 때도 있다.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늘 같은 타이밍에 오지는 않는다. 아이에게도 자기만의 시간이 필요하고, 나도 그 시간을 함부로 밀고 들어가면 안 된다는 걸 배운다.
“엄마, 이런 거 사고 싶은데 이것 좀 봐봐.”
“지금 글 쓰고 있는데… 알았어. 20분만 같이 이야기하고 다시 쓸게. 뭔데? 보여줘.”
아이와 보내는 순간을 우선으로 하려 한다. 어려울 때는 서로 마음 상하지 않도록 조율한다. 집중이 필요한 시간은 미리 얘기해서 협조를 구한다.
아이가 부르면 안다.
괜히 부르는 게 아니라는걸. 그 순간 함께 있고 싶어서, 지금 내 반응이 필요해서 부른다는걸. 그래서 되도록 손을 멈춘다.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화면에서 눈을 떼고, 아이 쪽으로 몸을 돌린다.
“딸, 뭐야? 뭔데? 같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