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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성폭행 피의자의 죽음과 용서에 대해

비겁한 죽음에 대한 단상

어느 권력자의 죽음


최근 9년 전 자신의 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던 장제원 전 국민의힘 국회의원이 자살을 했다. 장 전 의원은 자신의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다가 동영상과 DNA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공개된 직후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평소 다혈질로 보이고 독한 말로 다른 이들이 상처 입을 만한 말을 많이 했던 그이기에 너무나 의외였다.

이 기사의 댓글을 보면 자신의 죄를 죽음으로 씻은 것 아니냐, 비겁하게 피해자에게 사과도 하지 않고 자살했다는 등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그는 왜 스스로 죽음을 택했을까?


https://www.yna.co.kr/view/AKR20250401009553004?input=1195m


자살의 심리학


나는 오래전부터 자살하는 사람의 심리를 궁금해했다. 고3 때 같은 반 급우가 여름방학 끝 무렵에 한강다리에서 투신자살을 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나와 친한 사이는 아니었고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 1학기 마지막날 모의고사 때 답안지를 보여달라고 했다. 또 성적이 안 좋으면 형에게 맞아 죽는다는 말에 평소의 나라면 보여주지 않았겠지만 그날은 알아서 보라고 하고 1교시 시험 답안을 가리지 않았다.

시험이 끝나고 고맙다는 말을 듣고 헤어졌는데 2학기 개학날 비보를 들은 것이다.

그때 나는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충격적이고 슬프기도 했지만 답안지를 보여줬다는 사실로 조금은 죄책감이 덜어져 안도하는 마음도 있었다. 한편으론 죄책감을 덜 느껴도 된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이 속물로 느껴지기도 했다.


이후 대학 4학년 때 교양과목으로 심리학 개론을 들었는데 어느 날 강의 주제가 자살의 심리였다.

당시 교수님은 '죽을 용기로 살지'라는 말은 자살하는 사람의 심리를 몰라서 하는 말이라고 했다. 자살을 하는 이유는 결코 살아갈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오히려 그동안 나를 괴롭게 했던 사람들이 용서받을 기회를 영원히 얻지 못하도록 나를 죽이는, 굉장히 공격적인 심리라고 했다. 그 말이 맞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이후 여러 자살사건을 보면서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장 전 의원의 자살이 어쩌면 그런 심리일 수도 있겠다 싶다.

성폭행 피해자가 힘들게 용기를 내서 고소를 했는데 한 번도 혐의를 인정하지 않다가 결정적인 동영상 증거가 나오자 죽음을 선택했다. 취재 기사를 보니 유서에는 피해자에 대한 사죄는 없고 가족에게 미안했다 등의 글만 있었다고 한다.

피해자는 결국 가해자의 사죄를 받지 못했다. 피해자가 원했을 가해자의 처벌은 물론 수사와 재판을 통한 사건의 진실도 밝히지 못하게 됐다. 가해자가 죽을 경우 공소권 없음으로 수사가 종결되는 것이 관행이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오히려 자신의 고소 때문에 한때 자신의 상사였던 사람이 죽었구나라는 죄책감이 들 수도 있고 성폭행의 트라우마를 씻을 기회도 얻지 못하게 됐다.

장제원 전 의원은 가해자임에도 피해자에게 마지막까지 씻을 수 없는 상처만 주고 떠난 것이다.


용서는 신이 하는가 인간이 하는가?


나는 영화 밀양을 굉장히 인상 깊게 봤다.

이혼 후 아들을 홀로 키우던 전도연의 아들이 유괴를 당해 주검으로 발견된다.

유괴범은 체포됐지만 전도연은 아들을 잃은 슬픔을 이길 방법이 없다가 기독교에 귀의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

전도연은 이제 신앙의 힘으로 아픔을 극복했다고 생각하고 유괴범을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로 면회를 간다.

그런데 유괴범은 너무나 평온한 얼굴로 감옥 안에서 기독교를 믿기 시작하면서 신께 용서를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전도연은 너무나 화가 나서 '내가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무슨 권리로 신이 용서를 하느냐'라고 소리친다.


gii3ikK43hCMcETXagVwxsGR2pGsHqhZYrD-Uu3GxEVhnaKbDLtHil1Myh6znaFNNciA20rhT4fAe1QoL20r6g.webp 하나뿐인 아들을 유괴범에게 잃고 유괴범을 용서할 기회마저 잃은 처연한 엄마를 연기한 전도연


장 전 의원은 피해자가 용서도 할 수 없도록 죽음을 택하며 과연 자신의 죄를 씻었다고 생각했을까?

용서는 피해자가 하는 것인데 말이다.


장제원 전 의원은 평소 입으로 많은 사람의 가슴에 못을 박아왔다. 여기에 자신의 비서를 성폭행한 피의자로 생을 마감했다. 장 전 의원은 마지막 순간까지 다른 이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들의 마약과 음주운전 행위 때 마지못한 사과를 하기는 했다.)


죽은 이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로 비난은 자제하겠지만 명복을 빌어줄 마음도 없다.

이번 사건으로 자살하는 사람의 심리에 대한 오랜 고민은 더 복잡해지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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