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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프 인지부조화 실험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 중 어떤 것이 오래 기억될까?

난 왜 이리 운이 없을까? 나의 기억은 정확한가?


저는 주로 지하철로 출퇴근합니다.

어느 날 출근길에 아깝게 눈앞에서 지하철 문이 닫혀서 다음 지하철을 기다렸을 때입니다.

'난 왜 이리 운이 없을까? 운 좋게 승강장에 도착하자마자 지하철에 탈 때는 별로 없고 아쉽게 놓치는 경우가 훨씬 많은 것 같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건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생각입니다. 지하철 당국이 저를 골탕 먹이려고 제가 도착하기 직전에 출발할 리는 없으니까요.


image.png Chat GPT에게 지하철 탑승 때 모습을 4컷 만화로 그려달라고 했습니다.


심리학자나 뇌과학자들이 주장하기로 사람들은 불쾌하거나 공포의 기억이 좋은 기억보다 더 오래 기억된다고 합니다.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위험했던 기억을 가지고 비슷한 상황에서 재빨리 행동에 옮긴 사람들이 오래 살아남아 자손을 남겼기 때문이라는 거죠.

저 역시 기분 나쁜 기억만 오래 기억하는 일종의 인지부조화 또는 편향된 기억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검증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곧바로 다음날부터 셀프 인지부조화 실험에 착수했습니다.

한 달 동안 출퇴근과 평상시에 지하철을 탈 때마다 탑승형태를 기록하기로 하고 간단한 실험 디자인을 했습니다.


나만의 지하철 탑승 형태 실험 디자인


1. 탑승 형태 3가지

- 일반 : 지하철이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다렸다 타기(평온 또는 심드렁)

- 세이프 : 승강장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리지 않고 바로 탑승 성공 (기쁨 또는 아싸!)

- 아웃 : 승강장에 도착했지만 곧바로 출입문이 닫히거나 떠나는 모습을 목격 (슬픔 또는 아쉬움)


2. 세부 실험 조건

- 미리 스마트폰이나 전광판으로 지하철 도착 시간을 확인하지 않는다. (실험자의 개입 최소화)

- 지하철 도착 소리에 계단을 좀 더 빠르게 걷는 것까지는 허용 (다른 사람들과 동일 조건으로 세팅)


3. 가설

1) 평범하게 기다리는 경우가 아슬아슬하게 타거나 놓치는 경우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 지하철 배차간격이 도착 후 문이 열려있는 시간보다 훨씬 길기 때문. 낮시간이나 주말은 배치간격이 더 길기도 함

2) 세이프와 아웃의 경우는 비슷하거나 아웃이 약간 많다.

- 세이프는 문이 열려있을 시간만 포함됐지만 아웃은 눈앞에서 문이 닫히고 출발 후 열차가 승강장을 빠져나가는 시간까지 포함되므로. (사실 어느 쪽이 더 시간이 긴지는 미리 측정하지 않아 모름)


1365679037623.jpg 세이프일까 아웃일까? (사진 출처 : 엑스포츠뉴스)


실험 결과


한 달간의 실험결과를 분석해 봤습니다.

기간도 짧고 모수도 적어서 과학적 분석이라기엔 부족하지만 저의 선입견을 깨는 데는 충분했습니다.


이 실험이 과학적으로 엄밀하지는 못하고, 무엇보다 모수가 83회면 너무 적습니다.

기간을 1년으로 하거나 다른 사람들도 참여시켜 모수를 늘렸다면 조금 더 정확한 실험이 됐겠죠.

그리고 여러 변수를 통제해 가며 시행한 정교한 실험도 아니었기에 재미로만 봐주세요.


1. 실험기간 : 2025년 4월 11일 ~ 5월 12일

2. 탑승회수 : 83회

3. 탑승형태 : 일반 62회, 세이프 16회, 아웃 5회

4. 가설 검증

1) 일반(평범하게 기다리기)이 세이프 또는 아웃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 74.7%로 가설 검증 성공

- 62회 : 21회

2) 아웃이 세이프와 비슷하거나 약간 많다. > 세이프가 16회로 아웃 5회보다 훨씬 많음. 가설 검증 실패

- 세이프 : 16회(19.3%)

- 아웃 : 5회(6.0%)


스크린샷 2025-05-20 오전 11.47.00.png 실험 결과를 그래프로 그려봤습니다. 타율이 생각보다 괜찮네요.


결론 : 나 역시 편향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데이터에 실실

실험 데이터를 보면 눈앞에서 문이 닫히거나 이미 열차가 출발해서 승강장을 빠져나가는 시간까지 모두 합쳐서 '아웃'으로 판정했음에도 운 좋게 곧바로 탑승한 '세이프'가 3배 이상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배 이상 많은 기분 좋은 기억은 잊어버리고 눈앞에서 열차를 놓친 기억이 뇌에 훨씬 많이 남아있었던 겁니다.


저는 주변 사람으로부터 작고 사소한 것까지 잘 기억한다는 이야기를 듣곤 합니다. 스스로 객관적이고자 노력한다고도 생각했고요.

하지만 이 작은 실험 결과를 높고 보면 저 역시 진화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편향적 기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언제든지 오류에 빠지기 쉬운 사람이란 것을 입증한 작은 실험이었습니다.


이 실험이 앞으로 저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앞으로 내 기억과 생각을 전적으로 믿지 말고 항상 객관적으로 검증하려는 자세를 갖자고 다짐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기억을 믿으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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