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움이 되지만 때론 제발 잊고 싶은 나의 기억 방법
지난 주말 영화 <얼굴>을 보고 감상기를 올렸습니다.
제목은 얼굴인데 기억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사람들에게 못생겼다고만 기억될 뿐 나머지는 그들의 기억에서 지워졌던 인물을, 그와 알던 사람들과 만나서 기억을 복원해 가는 이야기였습니다. 사람들의 기억을 추적해 가다 보니 그들의 기억이 얼마나 왜곡됐고(심지어 단체로) 어쩌면 약자와 정의를 외면했던 자신들 내면의 죄책감이 기억을 왜곡했던 것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기억이란 생각보다 불안정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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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한때 기억력이 좋지 않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학창 시절 암기과목을 잘 못했습니다. 수학을 좋아했지만 시험 성적이 엄청 좋지는 않았는데 공식을 잘 못 외웠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외우는 사람들이 있는 근의 공식을 못 외워서 시험 중에 공식을 유도해서 문제를 푼 적도 있습니다. 즉석에서 근의 공식을 유도할 줄은 아는데 그 공식을 못 외우다니 좀 이상하지요?
사람의 얼굴은 잘 기억하는데 이름은 잘 기억 못 합니다. 요즘은 스마트폰이 있어서 다행이지만 전화번호도 기억을 잘 못 합니다. 그러니 원주율을 수십, 수백 자리까지 기억하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 신기합니다.
그런데 중년이 된 지금은 가끔 '넌 기억력이 참 좋다'는 말을 듣곤 합니다.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떨어지기 마련이고 여전히 숫자나 사람 이름을 잘 못 외우는 건 똑같은데 말이죠. 어떤 상황을 이야기할 때 제가 굉장히 자세히 묘사를 한다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어 과거의 어떤 이야기를 할 때 '1995년 여름'이라든가 '2014년 11월'이라는 식으로 굉장히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저는 그때 제가 겪은 일들을 떠올리면 당시 사건들과 엮어서 자연스럽게 몇 년도였는지, 계절은 어땠는지가 떠오릅니다.
얼마 전 친구와 친구 아들이 같이 한 자리에서 학창 시절 영어 단어를 외우는 방법을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요. 저는 영어 단어를 책에 쓰여있는 '장면'으로 기억한다고 했습니다. Apple을 a.p.p.l.e 식으로 철자 단위로 외우는 건 아무리 해도 잘 못하는 대신 책에 '인쇄된 단어' 자체로 기억하는 식이죠. 단어를 통으로 기억하다 보니 폰트도 기억을 하고 종이의 질감과 색깔, 사전이라면 옆에 쓰인 발음기호와 뜻까지 떠올리는 겁니다.
친구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냐고 하는데 친구 아들은 자기도 저와 같다고 하더군요. 사람마다 기억하는 방법이 다르구나 싶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이른바 사진 기억력을 가지고 있어서 어릴 적부터 모든 기억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장소 기억법이라는 테크닉을 배운 것도 아닙니다. 그냥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그랬습니다.
정확히는 사진보다 영화의 한 장면을 기억하는 식입니다. 영화의 하이라이트 장면을 기억하듯이 특정 기억은 당시의 장소, 대화, 말투, 표정까지 기억합니다. 그러다 보니 특정 장면에 대해 묘사를 자세히 할 수 있나 봅니다.
냄새는 기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냄새와 장기 기억이 해마와 편도체에 같이 저장되어서 특정한 냄새가 나면 기억이 소환된다고 하지요. 저의 경우 비 오는 날 흙냄새가 나면 곧바로 장교 후보생 시절 우의를 입고 총을 들고 산 길을 걷던 기억이 납니다. 우거진 숲과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소리, 전투화에 묻어나는 황토의 느낌과 우의 안쪽이 땀으로 젖어 꿉꿉한 느낌, 방탄헬멧과 K2 소총의 무거움까지 한 번에 전쟁영화 장면처럼 기억이 납니다.
이렇게 명확한 기억이 도움도 되지만 고통스럽거나 부끄러운 기억도 자꾸 떠오릅니다. 저를 괴롭혔던 상사나 동료의 기억이 당시 그 사람의 표정, 어떤 욕을 어떤 억양으로 했는지, 주변 공간의 모습까지 모두 기억이 납니다. 그 괴롭힘에 뒤이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대화들까지 기억이 나기도 합니다.
때론 얼굴이 화끈거리던 흑역사도 선명히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예전에 일을 하던 중 특정 용어를 잘 몰라서 면박을 당한 적이 있는데 지금도 그 단어만 들으면 면박을 당하던 장면이 떠오르며 그 사람의 얼굴, 목소리의 톤, 대사, 말투, 심지어 당시 회의 장소의 테이블 색깔까지 떠오릅니다.
큰 사고가 날 뻔했던 기억들도 선명히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https://www.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905251.html#ace04ou
위에 인용한 기사를 보면 아주 오래된 일을 자세히 사진처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의외로 매일 가지고 다니는 열쇠들을 구분하지 못한다든가 함축적이고 추상적인 글을 읽을 때 글을 구성하는 개별 단어의 세세한 정보에 집착해 전체 의미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고 합니다. 모든 것의 디테일을 기억할 수는 있지만 이들을 활용한 종합적 사고가 어려워진 그는 결국 말년에 몇 분 전에 들은 이야기와 몇 년 전에 들은 이야기를 구분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이렇듯 사진이나 영화와 같은 기억력은 축복일 수도 재앙일 수도 있습니다.
완벽한 암기는 이해와 구분할 수 없다
제가 개인적으로 조금이나마 아는 몇 안 되는 과학자 중 천문학자 이명현 박사(일명 K박사)가 한 말씀입니다.
암기하려 하지 말고 이해를 해야 한다는 말도 있지만 암기하지 못하면 이해했다고 할 수도 없다는 말이죠. SF작가 아더 C 클라크가 말한 '고도로 발달한 기술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Any sufficiently advanced technology is indistinguishable from magic.)'를 패러디한 말이죠.
제 기억력을 자랑하려고 쓴 글이 아닙니다. 아주 사소한 것을 잘 기억 못 하기도 합니다. 특별히 강렬한 경험을 가진 사건이 뇌에 새겨져 있을 뿐인 것 같습니다. 행복한 기억은 금방 떠오르지 않지만 좋지 않은 경험은 문득문득 떠오르곤 합니다. 강렬한 기억이 뇌에 남아있는 것은 일종의 트라우마가 될 수 있습니다.
오래된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강렬한 경험이 적거나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흐릿해졌을 뿐일지 모릅니다.
망각은 인간에게 주어진 축복이라고도 합니다. 좋은 경험은 오래 기억돼도 좋지만 좋지 않은 기억은 잊는 것이 인생이 편안합니다. 불쾌한 기억을 컴퓨터의 Delete 버튼처럼 없앨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