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편.누가 리더이고, 누가 팔로워인가?
흘러가는 리더십, 멈추지 않는 팀
HGRS 프로젝트를 맡았을 때, 나는 완전히 낯선 세계에 던져졌다.
10년 가까이 여행사 카운터 영업, 발권, 정산 업무만 해왔던 내가 이제는 패키지 상품 생성, 예약, 결제, 환불은 물론 B2C, B2B 고객 영역, 내부 예약 관리, 통계와 정산까지 모두 리딩해야 했다.
처음엔 버거웠다.
그래서 더 악착같이 파고들었다.
주말에도 프로젝트 룸에서 살다시피 했고, 36개월도 채 되지 않은 어린 아이를 데리고 지하 사무실에 내려와 노트북을 쥐여준 채 나는 기획서를 붙들었다.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영역을 메우기 위한 시간이 우선이었다.
“이건 내가 다 알아야 하는 일이다.”
그 믿음 하나로, 몰두하고 또 몰두했다.
하지만 곧 한계를 마주했다.
외주사와 기획 요건을 확정하는 워크숍 자리였다.
각 영역의 담당자들이 외주사의 기획 문서 위에 깨알 같은 질의와 메모, 포스트잇을 붙여가며 토론을 이어갔다.
나는 그 순간, 알았다.
“내가 알고 있는 건 단순히 외워서 정리한 수준일 뿐, 이들은 본인의 언어와 경험으로 깊이 이해하고 있구나.”
그제야 인정할 수 있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집착한 건 사실 전문가들을 믿지 못한 탓이었다.
내가 모든 걸 알아야만 리더가 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 나는 방식을 바꾸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전략적 판단, 자원의 효율적 배분, 전체 맥을 잡는 것이었다.
세부적인 영역의 깊이는 각 담당자가 리드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WHY라는 질문만 던졌다.
“왜 그렇게 해야 하죠?”
“그 방식이 고객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 질문에 설득력이 있다면, 나는 기꺼이 방향을 틀었다.
그래서 종종 나는 팀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귀가 얇아요. 여러분이 더 전문가이니까, 나는 언제든 따라갈 수 있어요.”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나와 동갑내기였던 한 친구가 먼저 시니어들과 논의하고, 다시 주니어들과 방향을 나누던 순간이었다.
내가 지시하지 않았는데도, 팀은 스스로 역할을 정하고 움직이고 있었다.
시니어는 주니어의 의견을 묻고, 주니어는 현장의 불편을 전달하며, 서로의 생각을 보완했다.
나는 그 과정을 지켜보며 깨달았다.
“리더십은 한 사람에게 고정되는 자리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흘러가는 역할이구나.”
이 프로젝트의 오픈보다 내게 더 큰 의미였던 것은,
내가 굳이 모든 것을 통제하지 않아도 팀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본 것이다.
리더라고 해서 늘 리더일 필요는 없다.
팔로워가 리더가 될 때도 있고, 리더가 팔로워로 물러날 때도 있다.
중요한 건 리더십이 누구에게 있느냐가 아니라, 지금 어디로 흘러가고 있느냐이다.
예전의 나는 늘 앞에서 끌고 가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은 안다.
리더십은 특정 자리에 고정된 권위가 아니라,
집단 안에서 흘러다니며 모두가 잠시씩 맡아드는 순간의 힘이다.
나는 여전히 전략을 보고, 자원을 조율하는 강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강점조차 혼자서는 의미가 없다.
팀원들의 전문성과 실행이 연결될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그래서 이제 나는 이렇게 정의한다.
리더는 ‘항상 리더여야 하는 사람’이 아니다.
리더십은 상황에 따라 흘러가야 하며,
때로는 내가 팔로워가 될 때조차 팀은 더 강해진다.
앞으로 나는 ‘누가 리더인가’를 묻지 않는다.
대신 ‘지금 이 순간, 누가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는가’를 본다.
그리고 그 흐름을 막지 않고, 더 큰 강물로 모아내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