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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문_보 이즈 어프레이드(Beau Is Afraid)

(스포 포함) 추상적인 감정을 추상적으로 표현해 낸, 감정이 주연인 영화

by 김주렁

0. 성공에 정론은 없다


장장 179분이라는 러닝타임을 가진 '보 이즈 어프레이드(Beau Is Afraid)'를 보고 왔다. 머릿속으로 잘 정돈이 되는, 관람하는 입장에서 친절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작품이 제시하는 이미지와 매 순간의 감정만큼은 매우 강렬했다. 지금까지 나름 다양한 종류와 방식의 영화를 봐왔노라고 생각했지만, 이 작품을 보면서 영화를 보는 눈에 대한 개인적인 부족함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영화가 대중적으로 성공하는 데 있어 가장 정석적이고 실패할 확률이 낮은 방법은 스토리, 연출, 캐스팅, 사운드 등 작품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들을 고루 우수하게 갖추는 것이다. 그런데 당연하게도 모든 성공한 영화가 이렇게 구성되어있지는 않고, 오히려 한 부분에 있어 지독하게 파고든 한편으로는 불친절한 작품들이 송곳처럼 사람들의 뇌리를 파고들어 오랜 기간 기억에 남기도 한다. 스토리와 대화만으로 작품이 전개되는 "12명의 성난 사람들"과 "맨 프럼 어스", 강약조절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강한 액션으로 밀어붙이는 "매드맥스-분노의 도로", 비주얼 하나만으로도 관객을 압도하는 "아바타"시리즈 등 전반적인 밸런스보다는 한 분야에 올인하다시피 한 위와 같은 작품들은 두루두루 무난한 작품들에 비해 리스크가 클 수밖에 없지만, 감수한 리스크만큼 성공했을 때의 리턴도 크게 돌아오게 된다.


그런 면에 있어 '보 이즈 어프레이드'라는 작품은 주인공인 '보(Beau)'의 "감정"을 지독하게도 물고 늘어지며 러닝타임을 채워나간다. 감독은 '보'의 감정을 관객의 코앞에서 보여주기 위해서 다른 부차적인 요소들의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고, 그런 과정에서 관객이 통상적으로 작품을 받아들이기에는 다소 불친절한 영화가 되었다. 불친절함은 자칫 난해함과 완성도의 하락으로 연결되기 쉽지만, 감독은 작품 내 여러 구성요소들의 완성도를 두루 아우르기보다는 본인이 표현하고자 했던 "감정"이라는 영역을 극대화하여 표현했고 실제로 이에 대한 자신도 어느 정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래에서는 개인적으로 작품에 대해서 느낀 점을 풀어내보겠다.


줄거리 (출처 : 네이버 영화)
편집증을 앓는 ‘보’와 그를 집착적으로 사랑하는 엄마 ‘모나’ 엄마를 무조건 만나러 가야 하는 보의 기억과 환상, 현실이 뒤섞인 공포를 경험하게 되는 기이한 여정


1. 제목에 충실한, 감정이 주인공인 작품


뭐니 뭐니 해도 본 작품의 주인공은 단연 주연인 '보'의 감정, 특히 두려움(Afraid)이었다. '보'의 출생으로 시작되어 죽음을 끝으로 마무리되는 일대기적 이야기는 시작과 끝 이외에는 정돈되어 있는 부분이 없다.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주변 환경 및 나사가 빠진듯한 주변 인물들, 복수(複數)의 이야기를 대강 짜기워 배치한 듯한 전개 순서, 맥락 없이 등장하는 인물들, 현실/환각/상상을 구분할 수 없는 기이한 상황들, 현실의 '보'와 과거의 기억에 뒤섞이는 장면 등 작품의 내러티브만 보자면 정말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하지만 이는 작품을 내러티브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고, 감정을 기준으로 바라본다면 그리 어색하지만은 않다. 감정은 애당초 기록처럼 정돈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추상적이며 시계열대로 움직이지도 않는다. 본인에게 불리한 기억은 지워지기도 하며, 세세한 기억은 날아가고 그때의 감정과 주변의 상황만 어렴풋이 기억에 남기도 한다. 현재의 일로 화를 내다가도 문득 과거의 일이 떠올라 화가 나기도 한다. 하염없이 평온하다가도 갑자기 하나의 계기로 놀라거나 슬퍼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감정의 특성들은 작품의 전반적인 내러티브와 닮아있다. 보통의 작품이라면 내러티브를 기반으로 하여 각 상황에 필요한 감정이 이입되는 순서이겠으나, 본 작품은 매 순간 '보'의 감정을 보여주기 위해 내러티브를 역으로 이용하는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 덕분에 짧지 않은 러닝타임동안 보의 감정에 더 깊이 몰입하여 긴장감을 유지하며 작품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위와 같이 '보'의 감정, 특히 두려움에 초점을 맞춰 작품을 보다 보면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작품에서 '보'가 겪는 일들이 실제로 벌어진 일인지, 아니면 환각이나 상상 속에서 벌어지는 일인지 여러 단서를 모아 해결해 나가는 것이 보통의 방식이겠으나 이 작품에서는 구태여 그 진실을 밝힐 필요성이 없다. 그 사건의 진실여하를 떠나 매 순간 그가 느끼는 감정만큼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덧 1. 작품의 스토리 측면에서 함께 떠올랐던 작품들 (스포일러 있음)

'더 게임 (1997년)' : 본인이 플레이어가 되어 현실세계에서의 일종의 게임에 참가하게 되는 주인공
'트루먼쇼' : TV쇼의 주인공임을 모르고 살아가는 주인공 트루먼,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버지가 작품에 등장하는 점
'겟아웃' : 의지를 잃고 붙잡혀있는 노예들이 주인공에게 도망가라고 말을 건네는 장면이 중반부에 '그레이스'가 '보'에게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며 개입하는 과정과 겹쳐 보였다
'인셉션' : 꿈속의 만들어진 세상
'셔터 아일랜드' : 트루먼쇼와 비슷한 맥락


감정은 애당초 정량화되는 특성이라기보다는 추상적인 특성에 가깝다. 그렇기에 대다수의 작품들은 인물의 감정을 나타내기 위해 행동(울음, 비명, 주먹질, 포옹 등), 사물(가족사진, 유품, 꽃 등) 등 상대적으로 직접적인 대상물에 감정을 투영하여 감정의 그림자를 관객에게 보여준다. 하지만 '보 이즈 어프레이드'라는 작품은 추상적인 개념을 굳이 다른 방식으로 변환하지 않고 날것 그대로 관객들에게 제시한다. 관객이 마치 '보'의 머릿속에 있는 것처럼, 사건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매 순간 '보'가 느끼게 되는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따라가게 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정말 자칫하면 이도저도 아닌 복잡성만 가진 작품이 되기 십상이지만, 본 작품은 그 분위기와 감정을 작품의 마지막까지 어느 정도 잘 끌고 나갔다고 생각한다.


덧 2. 추상적인 감정을 주제로 풀어나간다는 점에서 왠지 모르게 '인사이드 아웃'이 떠올랐다. 날것 버전의 두려움만 남은 실사판 '인사이드 아웃' 느낌...


2. 연기, 연출 등 그 밖의 요소들


기본적으로는 호아킨 피닉스 배우의 연기력이 출중해서 몰입이 한층 더 잘 되었다. 내면에서 스멀스멀 차오르는 두려움을 과도하지 않고 절제된 표현으로 잘 보여주었다. '토드 필립스'감독의 '조커'에서 보여주었던 외부로 폭발하는 분노와는 다른, 내부로 파고드는 감정을 보는 느낌이었다.

미장센에 신경을 많이 쓴 느낌이었다. 작품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테라피스트의 방에 빽빽하게 배치된 소품들은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작품 초반부를 더 정신 사납게 해 주었다. '보'의 집 자체는 평범했지만 집 앞 거리에 있는 가지각색의 인물들, 복도에 빼곡히 그려진 낙서, 양쪽 문이 열리는 속도가 다르고 스파크가 튀는 엘리베이터 등 디테일에 신경 쓴 부분이 많이 엿보였다. 그를 차로 친 '그레이스'가족의 집은 이와는 상반되게 굉장히 깔끔하고 밝은 분위기였고, 빌려 쓰고 있던 '그레이스'의 딸 '토니'의 방은 그녀의 복잡한 심경만큼이나 빼곡한 소품 및 벽에 붙은 사진들을 볼 수 있었다.

'보'의 엄마 '모나'의 집은 디자인 자체도 공을 많이 들인 것 같았고, '모나'가 운영하는 기업 연표가 벽에 붙어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연표의 마지막에는 다양한 인물들의 증명사진으로 만들어진 모나의 초상화가 있었는데, 그 사진들 속에 '그레이스' 가족, 초반에 '보'의 집 앞에서 얼쩡거리고 후에 집 현관 앞에서 죽어있던 문신을 한 남자 등 이전에 작품에서 등장한 사람들이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 '보'는 스포츠 경기장 같은 관중석에 둘러싸여 고장 난 보트를 타고 무대의 한가운데에 떠있다. 이런저런 대화가 오고 간 이후 결국 모터의 보트가 폭발하고, 보트가 뒤집히면서 '보'는 보트의 아래에서 물에 잠겨 사망하게 된다. 그러고 나서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데 엔딩 크레디트가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뒤집힌 보트만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미 죽어버린 '보'는 감정을 더 이상 보여줄 수 없기에 '보'가 죽음과 동시에 '보 이즈 어프레이드'라는 작품도 전원이 꺼지듯 끝나버린 것이 아닌지 싶었다.


3. 마무리하며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듯한 평가와 세 시간에 달하는 러닝타임을 보면서 볼지 말지 고민을 많이 했던 작품인데, 보고 나니 흥미로운 점이 많아서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사람의 감정은 이렇게나 강렬하고 진한 것이구나 하는 것을 다시금 작품을 보며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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