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 차별, 분노와 같은 감정들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이런 감정들은 전염병과 같아서, 대상이 사라진다고 해서 끝나지도 않을뿐더러 새로운 숙주를 찾아 이동할 뿐이다. 세 개의 빌보드(광고판)에서 시작되는 이 영화는 사람이 가진 악한 감정들이 어떻게 삶을 좀먹는지에 대한 잔인한 군상극이었다.
줄거리 (출처 : 네이버 영화)
범인을 잡지 못한 딸의 살인 사건에 세상의 관심이 사라지자, 엄마 ‘밀드레드’(프란시스 맥도맨드)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마을 외곽 대형 광고판에 도발적인 세 줄의 광고를 실어 메시지를 전한다. 광고가 세간의 주목을 끌며 마을의 존경받는 경찰서장 ‘윌러비’(우디 헤럴슨)와 경찰관 ‘딕슨’은 무능한 경찰로 낙인찍히고, 조용한 마을의 평화를 바라는 이웃 주민들은 경찰의 편에 서서 그녀와 맞서기 시작하는데…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어느 하나 명확하게 정답을 정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의 배경 상황 자체는 명확하다. 주인공인 밀드레드의 딸이 강간당하고 살해당했다. 하지만 수사 상 진전이 없었고, 용의자를 특정하지도 못한 상황에 분노한 밀드레드가 인적이 드문 도로의 광고판에 메시지를 담는다. 그리고 그 메시지의 칼끝은 경찰서장 윌러비에게 향한다. 보통의 영화였다면 어느 정도 관객의 입장을 감독이 의도대로 끌고 나가려 할 것이다. 수사를 열심히 하지 않은 경찰이 문제인지, 앞뒤 상황도 모르고 무작정 혐오의 메시지를 건네는 밀드레드가 문제인지 영화는 명쾌하게 답을 내려주지 않는다. 관점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며, 이것이 이 영화가 가진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완벽한 사람은 없으며 모두가 결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감독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한다.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우리는 어떤 인물을 페르소나로 삼아 작품을 따라가면 될지 감독은 의도적으로 그 선택을 피한다. 보통이라면 이런 상황에서는 딸을 비참하게 잃은 어머니의 관점이 주된 시점이자 우리가 따라가야 할 주인공이겠지만, 주인공인 밀드레드는 그러기에는 너무 불완전한 사람이다. 대놓고 키가 작은 동네 남자를 비하하며, 전남편의 새 애인(19세)을 대놓고 무시하고, 경찰서에 화염병을 던져 불을 지르고, 본인의 생각과 다른 치과의사의 손가락을 치과장비로 뚫어버리기까지 한다. 마지막에는 딕슨과 함께 다른 강간범을 죽이기 위해 총을 가지고 떠난다. 밀드레드의 불쌍한 인생을 따라 이야기에 몰입하다 보면 이런 포인트들에서 의아함을 느끼게 된다. 내가 생각했던 선악 관계는 옳은지, 혹시나 정말로 밀드레드가 나쁜 것은 아닐지 고민하게 된다. 이런 입체적인 인물들이 작품의 선악을 굉장히 흐릿하게 한다. 딕슨도 한량 같은 업무 태도에 대놓고 차별과 혐오의 메시지를 던지는 폭력적인 경찰로 나오며, 심지어 광고사 직원을 창문 밖으로 던지기까지 한다. 그런데 막상 윌러비 서장의 마지막 편지를 보러 경찰서로 갔을 때, 화재가 나서 본인의 몸이 불타고 있는데도 밀드레드의 사건파일을 먼저 길 밖으로 던진다. 그리고 결국 경찰서에서 해고당한 후에도 본인이 맞아가면서까지 용의자로 의심되는 사람의 DNA를 얻어낸다. 창문 밖으로 사람을 던지던 사람에게서 이런 면을 발견하게 되면 보는 입장에서는 인물에 대한 평가가 계속 뒤바뀔 수밖에 없다. 이런 입체적인 인물상은 자칫 혼란만 야기하고 스토리를 중구난방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감독은 이런 의도된 혼란을 정말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또 하나 감독의 메시지가 있다면, 증오와 분노는 소멸되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이 진행되며 그 대상은 계속 변화하지만, 부정적인 감정 자체는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늘어나기도 한다.
밀드레드의 딸을 죽인 범인에 대한 분노
미진한 수사 상황에 대한 밀드레드의 분노
서장 윌러비의 자살로 인해, 광고판을 부착한 밀드레드에 대한 경찰과 마을 사람들의 분노
서장을 죽음으로 몰고 간 광고판 자체에 대한 분노 (이로 인한 방화)
위의 범인은 아니나, 다른 범죄를 저지른 용의자에 대한 딕슨과 밀드레드의 분노
위와 같이, 작품이 진행되는 내내 분노와 부정적인 감정이 등장한다. 대상은 계속 바뀌나, 그 감정 자체는 점점 확장된다. 분노는 더 큰 분노를 낳는다는 말이 작품 중간에 등장하는데, 정확하게 이 상황이 아닐지 싶다.
악행에 기인하여 발생한 악행은 어디에 책임을 물어야 할까? 딸의 죽음으로 인해 밀드레드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으면 밀드레드의 슬픔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악의 순환을 끊어내기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에 대해 작품은 끊임없이 관객에게 메시지를 던진다. 관객 개개인의 입장에서 어느 수준까지 정당방위인지 감독은 질문을 던진다. '이래도 밀드레드가 착한가? 이렇게 불을 지르고 치과의사를 다치게 해도 자식 잃은 부모를 우리는 이해해줘야 하는 게 맞는 것일까?' 감독은 이에 대한 판단을 유보했고 관객에게 위임했다. 이런 혐오의 고리 속에서, 화재로 병원에 입원한 딕슨을 걱정해주며 오렌지주스를 주려는 광고사 직원의 심리가 매우 복잡하다. 작품에서 혐오의 고리가 끊어질 수 있었던 유일한 순간이었기에 기억에 남는다.
평소엔 그렇게 어머니를 탐탁지 않아하다가도 이혼한 전남편이 폭력을 휘두르자 즉시 어머니를 보호하는 아들. 딸의 죽음, 서장의 죽음과 해고를 맞닥뜨린 밀드레드와 딕슨의 공통의 적(용의자로 지목했던, 밀드레드 사건의 범인은 아니지만 다른 사건 용의자로 추정되는 인물)을 향한 분노를 보면서 상실에서 오는 유대감, 적의 적은 아군, 이런 말들이 떠올랐다.
덧. 딕슨 역할로 나온 샘 록웰을 처음 본 것은 영화 "바이스"였다. 한량 그 자체인 아들 부시 대통령으로 등장하는데, 이 영화의 딕슨과 성향이 굉장히 비슷해서 놀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