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 선에서 이해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공포
잘못된 신념을 굳게 믿는 사람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우리가 어떤 행동에 분노할 수 있다는 것은, 납득할 수는 없더라도 상식선 내에서 간신히 그 이유를 찾을 수는 있다는 것을 뜻한다. 상식선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대해서 우리는 분노하기에 앞서 의문을 가지게 된다. 작중에서 Principle로 표현되는 안톤 쉬거의 신념은 상식 내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You don't have to do this.'라는 말을 안톤 쉬거 앞의 사냥감들이 안톤에게 건넨다. 안톤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안톤의 생각에는 당위성 (have to)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I just do it.'이 안톤의 직진성을 가진 행동이지 않았을까 한다.
줄거리 (출처 : 네이버 영화)
총격전이 벌어진 끔찍한 현장에서 르웰린 모스(조슈 브롤린)는 우연히 이백만 달러가 들어있는 가방을 손에 넣는다. 그러나 이 가방을 찾는 또 다른 이가 있었으니 바로 살인마 안톤 시거(하비에르 바르뎀). 그리고 이들의 뒤를 쫓는 보안관 벨(토미 리 존스)까지 합세하면서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목숨을 건 추격전이 시작된다.
남의 돈으로 요행을 꾀하던 르웰린 모스가 결국 죽게 되는, 큰 틀만 보자면 평이한 이야기이다. 작품 초반에는 가젤을 사냥하던 사냥꾼의 입장이었던 르웰린은 돈가방을 가져간 이후 사냥감으로 전락한다.
덧. 이후에도 사냥꾼과 사냥감의 관계가 반복적으로 활용된다.
르웰린과 가젤 / 르웰린과 상처 입은 마약상 / 르웰린을 잡으러 온 다른 갱단과 르웰린 / 사냥개와 르웰린 / 안톤과 르웰린 / 청부업자 카슨 웰스(우디 해럴슨)와 안톤 / 안톤을 들이받은 차량과 안톤 (의도는 아니었겠으나..) / 안톤과 르웰린의 아내
이 작품을 흡인력 있게 만드는 것은 안톤 쉬거라는 인물이 주는 이질감과 그가 저지르는 무차별적 살인이다. 그가 사용하는 무기이자 도구인 케틀건이 그의 심리를 뒷받침한다. 본래 소를 도살할 때 쓰는 케틀건을 사람에게 사용하는 안톤은 사람을 죽이는 일에 거리낌이 없으며, 가축을 도축하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살인을 저지른다. 또 다른 무기인 산탄총도 은밀하게 사람을 암살하기보다는 눈앞에서 도살하는 것에 가까운 무기이다.
작품에서 안톤 쉬거는 많은 인물들과 대화를 나눈다. (그를 잡아온 경찰, 차를 강탈당하는 노인, 갱단 사람들, 르웰린 모스가 사는 트레일러의 관리인, 주유소 상점 주인, 그에게 의뢰를 맡긴 사람, 카슨 웰스, 르웰린, 르웰린의 아내 등) 그런데 그가 상대방과 나누는 것은 상식선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아니다. 그는 상대방과 본인을 같은 위치에 두지 않는다. 그는 대체로 일방적인 대화를 건넨다. 그런 점이 가장 두드러지게 보인 부분이 주유소 상점 주인과의 대화 부분이다.
표면적으로 안톤 쉬거는 상점 주인과 대화를 나누는 것 같지만, 그는 그가 원하는 답변을 얻어낼 때까지 똑같은 질문을 주인에게 되묻는다. 이 일방적인 대화가 가장 극대화되고 시각화된 것이 코인 토스 장면이다. 그는 상점 주인에게 무작정 코인 토스를 강요한다. 내기라는 행위는 상호 간에 협의를 통해 특정 보상을 걸고 하는 것이지만, 이 상황에서의 코인 토스는 너무나 일방적이다. 본인의 의사와 반하는 것은 둘째 치고라도 무엇이 걸려있는지 조차 알려주지 않는다. 그리곤 대뜸 상점 주인에게 코인으로 본인의 명운을 선택할 것을 강요한다. 이는 마치 상점 주인이 본인 운명의 키를 쥔 것처럼 보여지지만, 그는 그러고자 하는 의지도 없었고 그러고 있지도 못하다. 표면적으로만 그렇게 보이는 것이며 자유를 종용당한 것이다. 도살을 앞둔 소를 앞에 두고 코인 토스를 했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안톤 쉬거라는 인물은 타인을 그 정도로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여담.
안톤 쉬거는 코인 토스를 한 동전 발행연도를 말하면서, 22년이나 걸려서 동전이 이곳에 왔다고 설명한다. 코인 토스를 성공하여 상점 주인이 살아남았을 때는, 행운의 동전이기 때문에 다른 동전과 섞이지 않도록 주머니에 넣지 말고 따로 보관하라고 말한다. 이런 장면을 보면 사람보다 동전을 더 높은 존재로 생각하는 것 같다.
영리한 사냥감 르웰린 모스.
보편적인 상황을 보자면, 사냥감은 우둔하고 사냥꾼은 영리하고 치밀한 이미지가 연상된다. 사냥꾼은 어둠 뒤에 몸을 숨기고 조심스레 사냥감을 암살한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의 사냥감과 사냥꾼은 반대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르웰린 모스는 상황 판단이 빠르다. 행동에 군더더기가 없다. 내일 아침이면 법원에서 본인의 차를 보고 찾아올 테니 아내에게 당장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가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무작정 일을 저지르기만 하는 타입은 아니다. 그에 반해 안톤 쉬거는 앞뒤 상황을 가리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거의 모든 것을 파괴한다. 조심성이 없다기보다는 조심해야 한다는 자각이 없을 것이다.
직진성을 가지고 앞으로만 나아가는 것 같은 안톤 쉬거가 계획적이고 전문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안톤 쉬거가 르웰린과의 총격전 후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약국을 털어서 약과 주사를 만들고 스스로 총알을 빼내는 장면이 있다. 지금까지는 무작정 부수는 모습만 보여줬다면, 그의 전문적인 지식과 섬세한 기술을 보여주는 장면이어서 인상 깊었다. 이런 장면을 보면 그는 아둔해서 직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를 가지고 파괴를 일삼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보면, 추격전 치고는 템포가 느리고, 화면 내 공백이 많은 편이기도 하며, 야간 씬에서는 의도적인지 조명이 실제 밤처럼 어둡다. 느린 템포의 추격전은 몰입의 밀도를 높여주는 것 같다. 예를 들자면, 호텔 방에서 건너편 길의 차량까지 추격전을 벌인다고 생각해 보자.
사례 1.
빠른 템포의 화면 전환과 흔들리는 앵글, BPM이 빠른 배경음악, 권총 같은 빠른 발사가 가능한 무기 격발 소리의 반복, 그걸 속도감 있게 피하며 도망치는 서로.
사례 2.
어둠 속에서 상대방을 기다리는 주인공. 문이 끼익 열리고 나서 보이는 펄럭거리는 커튼과 열려있는 창. 천천히 따라가서 발사하는 산탄총 or 샷건, 총에 맞고 신음소리를 내며 절뚝거리며 뛰어가는 주인공, 차 뒤에 숨어 서로를 찾는 주인공과 적.
물론 각 방식의 장단점이 있을 것이다. 사례 1의 경우, 긴박한 배경 상황 설정과 과장을 통해 관객의 몰입도를 올려줄 수 있을 것이며, 내 심장박동수가 빨라지는 것 같은 느낌을 주며 무의식적으로 내 몸의 긴장 상태를 올려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긴박함은 정신없음과 난잡함으로 바뀌기 십상이다. 정신없이 지나가기만 할 수도 있어서 내용 전달 측면에선 약점이 있을 수 있다.
사례 2의 경우, 사례 1에 비해 템포가 매우 느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슬로모션으로 억지로 느리게 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실감은 사례 1보다 더 높을 수 있다. 사례 1이 의도를 가지고 관객에게 주입하는 긴장감이라면, 사례 2는 관객이 그 느린 템포 안으로 직접 들어가 마주하는 긴장감의 느낌 같기도 하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비어있는 시간과 공간에는 관객의 주관이 반영된다. 정보가 적게 제공될수록 관객의 역할은 더 커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관객에게 해석을 맡기는 방식은 사례 1의 방식보다 Risk가 높다. 의도적으로 비웠다는 것과 역량이 없어서 비어있다는 것 중에서 감독은 전자의 의도를 가지고 해당 장면을 구성했다는 의도를 관객에게 전달해야만 한다. 공갈빵인지, 재료를 안 넣어서 빈 빵인지 고객이 모를 경우 지루하고 따분한 영화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이런 측면에서 개인적으로 감독은 공백과 여백을 효과적으로 잘 활용했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전반적인 전투 씬이 처절하다. 부상을 입고 픽 쓰러지거나, 영웅적 모습으로 총알을 다 회피하거나 하지 않는다. 작품 내 사냥꾼과 사냥감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총탄을 맞고 피를 흘리고 피부가 벗겨지며, 옷이 피에 들러붙어 가위로 도려내고 소독을 한다. 피가 나오는 옆구리를 부여잡아봐도 피가 흐르고, 안으로 삼키는 듯한 신음소리가 그 아픔을 표현한다. 날것 그대로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관객에게 영화의 현실감을 더 높여준다. 총을 맞으면 마법 몽둥이에 맞은 것처럼 뚝딱 하고 사라지지 않는다. 목에 총을 맞은 갱은 목덜미에서 피가 솟아나며 바람 새는 목소리가 난다. 이런 사실적 묘사는 작품과 관객의 거리감을 줄여주고, 작품에 좀 더 깊게 몰입하도록 해주었다. 삶은 아름답고 멋진 것이 아니며 이렇게나 짠내 나고 처절한 것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전형적인 나이 든 미국 보안관과 젊은 보안관이 등장한다. 사실상 영화 제목에 등장하는 노인의 역할을 하는 존재. 경험과 노련함의 상징으로 비친다. 노인이 살기 힘든 세상이 됐다는 것은, 상식과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너무 많이 일어남에 대한 표현일 것이다. 노인은 지혜를 상징하였을 것이다.
모자를 쓰고 등장하는 주요 인물이 많다. 르웰린, 카슨, 보안관. 안톤 쉬거는 모자를 쓰지 않는다. 이 점이 다른 사람들과 안톤 쉬거의 차이를 보여주는 하나의 부분일까?